83. 놀이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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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놀이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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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놀이공원
2023.01.13.
“곱씹을수록 어이가 없네. 내가 그 핏덩이들한테까지 질투를 해야겠냐?”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이 순식간에 태오의 입속으로 와앙 들어갔다. 화풀이를 하듯. 그럼에도 이미 오른 열은 도통 내려갈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만 찌릿할 뿐. 에이, 짜증 나.
“질투를 할 만한 일은 아니지. 그냥 해프닝?”
그에 비해 토끼처럼 아이스크림을 찔끔 베어 문 소유가 슬그머니 태오의 눈치를 살폈다.
“뭐? 해프닝? 그냥 해프닝? 난 지금 열받아.”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다. 소유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 냈다.
“이마에 써 두고 다녀. 유부녀라고.”
“너도 이마에 유부남이라고 써 두고 다닐 수 있어? 절대 안 지워지는 매직으로. 그럼 나도 할게.”
“…….”
그건 안 되지. 사회적 체면이란 게 있는데.
“아무튼, 내 새끼는 왜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려지고, 더 예뻐지지. 그만 예뻐져도 될 것 같은데.”
낯부끄러운 칭찬에 누가 들을세라 황급히 태오의 입을 막았지만 사실 기분은 좋았다. 모든 사람에게 예쁘게 보일 생각은 없지만, 태오에게만큼은 평생 예쁘게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도.”
“뭐?”
“너도 날이 갈수록 더 어려지고 잘생겨져서 불안해.”
그러는 본인은, 지나가는 여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 모를 테다. 저와 있으면 이 남자의 모든 신경은 제게로만 향해 있다는 걸 아니까. 지나가는 풍경, 인물은 뭉개지듯 흐릿하게 보이는 걸 아니까.
덕분에 괜히 소유는 귀여운 귀를 쫑긋하며 홀로 주위를 경계해야만 했다.
“내가 하자고 했지만, 네 말대로 교복 데이트는 오늘까지만 하자.”
“잠깐, 너 지금 질투해?”
금세 기분이 좋아진 태오가 소유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어, 드디어 우리 차례다!”
“지금 질투하냐고.”
새침하게 태오를 휙 지나친 소유는 먼저 자리에 앉았다. 덩달아 태오도 그녀를 따라 앉았다. 그러곤 소유의 안전벨트가 단단하게 채워졌는지 확인하며 재차 물었다.
“이호 어머니, 질투하시냐고요.”
“조용.”
소유가 검지를 단호하게 뻗어 태오의 입을 막았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태오가 소유의 손가락에 마구 입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놀이기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간에서 빙글빙글 도는 놀이기구 위로 유성이 쏟아졌다. 진짜 무중력 상태의 우주에 있는 기분이었다. 스릴과 감성을 동시에 잡은 기구였다.
멍하니 유성을 구경하는 소유의 손을, 태오가 잡았다. 소유가 픽 웃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우주에 단둘이 떨어지면 어떤 기분일까. 난 네 손을 잡은 채 그저 둥둥 떠 다니기만 할 거야.
“You’re my universe, Noah.”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낭만적인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어째 한 술 더 뜰 줄 알았던 태오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소유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갈 뿐이다. 그의 눈 위에도 유성이 떨어졌다.
다소 경직되긴 했지만 황홀한 광경에 집중하고 있으리라 가볍게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또 타고 싶다, 그렇지?”
“…….”
“Noah?”
“…….”
들뜬 발걸음으로 앞서가던 소유가 문득 뒤로 돌았다. 그곳엔 벽을 짚은 채 미간을 찌푸린 태오가 있었다.
“잠깐만.”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더욱 창백해져 표지판과 보호색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은 소유가 태오에게로 재빨리 달려왔다.
“왜 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좀 어지러운…….”
말을 하다 말고 태오가 헛구역질을 했다.
얘, 혹시 놀이기구 잘 못 타는 체질인가?
“일단 좀 앉자. 그리고 물 좀 마셔.”
태오를 조심스럽게 앉힌 소유가 태오의 넥타이를 살살 풀어 주었다.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나서야 태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놀이기구 못 타면 말을 하지! 왜 억지로 타!”
“억지로 안 탔어.”
“그럼 이 상황은 뭔데.”
속상한 나머지 소유가 태오에게 볼멘소리를 냈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
“혹시 저거 처음 타 봐?”
“내가 저거 탈 시간이 어디 있어.”
공부나 하고 일이나 할 줄 알았지. 놀이공원에 온 횟수도 손에 꼽힐 지경인데.
“넌 뭐 이렇게 처음인 게 많아.”
안쓰러운데 귀여워. 귀여운데 안쓰러워.
“줄 없이 번지점프도 하게 생겨서는 놀이기구를 못 타다니.”
“생긴 걸로 판단하지 마라.”
소유가 키득키득 웃었다. 태오가 애교 부리듯 소유의 어깨에 기댔다.
“못 타서 미안해.”
“뭐가 미안해.”
“또 타고 싶다고 했잖아.”
“에이, 그건 빈말이야. 원래 좋은 풍경도 계속 보면 질리잖아. 아쉬울 때 딱 끝내는 게 제일 좋다고.”
소유는 태오를 위한 하얀 거짓말을 했다.
그깟 놀이기구 좀 못 타면 어때. 오히려 저를 위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 준 태오가 고마울 따름이다.
“알고 보면 연약하고 소중한 나의 작은 Noah.”
“오빠한테 까불어.”
“오빠 좋아하시네.”
마냥 강하고 멋진 태오보다 약한 부분에서는 쿨하게 약함을 인정하는 태오가 더 좋았다.
“앞으로 남은 너의 모든 처음을 내가 독차지할래. 아무한테도 안 나눠 줘.”
내일은 또 너의 어떤 처음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나는 그걸 보고 얼마나 끙끙 앓을까. 상상만 해도 행복한 소유였다.
“욕심쟁이네.”
“그걸 이제 알았어?”
동갑내기 부부답게 티격태격하던 와중, 태오의 휴대폰이 울렸다. 태오는 무시하려고 했지만, 혹시 중요한 업무 연락일까 봐 소유가 손수 통화 버튼을 눌러 주었다.
“주말에 무슨 일이지, 손 비서?”
태오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딱딱하게 말했다. 이 남자의 갭 차이, 너무 설렌다.
소유가 태오의 어깨에 턱을 괴고 반짝이는 눈망울로 구경했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각오해야 할 거야.”
― 부사장님, 혹시 오늘 놀이공원 가셨습니까?
그 말에 소유의 웃음이 멎고 흠칫했다. 태오는 인상을 쓴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눈에 익은 얼굴은 없었다.
― 그것도 교복 입고?
“…….”
― 에이, 설마. 아니죠? 부사장님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어서 부정하라는 듯 손지욱 비서가 다그쳤다.
― 저 지금 좀 소름 돋을 거 같거든요.
“뭐야. 손 비서, 설마 우리 미행했어? 누가 지시한 거야? 뒷돈이라도 받아먹었어?”
― 저를 어떻게 보시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소유의 시야에 뭉쳐서 수군대는 무리가 보였다. 그들의 손엔 각자의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인파가 몰려 있었담.
― 그게 아니라 기사 났습니다.
“……뭐라고?”
이번엔 태오가 현실을 부정했다.
― 부사장님 지금 서른 넘어서 교복 입고 놀이공원 데이트한다고 기사 났다고요.
소유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입을 틀어막았다. 다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기사를 확인해 보려는데, 친절하게도 준오가 손수 링크를 보내 주었다.
[보기 좋네요, 형수님. 그런데 아버지는 뒷목 잡겠는데요.]
이게 무슨 특종이라고 사회면과 연예면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걸렸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태오가 워낙 화제성이 좋은 재벌이라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기사를 클릭하는 비율과 그 아래 주르르 달린 댓글들이 증명해 주었다.
[재벌도 사는 거 다 똑같네. 보기 좋다.]
[저 돈 많고 잘생긴 남자가 유부남이라니.]
[여자분도 예쁜데?]
[그런데 웬 교복? 좀 생뚱맞긴 하다. 저런 거 안 할 것처럼 생겼는데. 저러고 다니면 회장님한테 안 혼나나?]
소유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우리 태오, 생각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었구나. 그냥 평범한 데이트가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냥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싶었을 뿐인데.
― 제발 사고 좀 치지 마십시오.
“일단 나 아니라고 해.”
― 되겠습니까? 지금 부사장님 얼굴 정면으로 찍힌 사진이 온갖 사이트에 돌아다닙니다.
“아버지는?”
― 당장 부사장님 잡아 오라는데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가 너무 오고 싶어서 소유한테 졸랐어.”
이 와중에도 잘못 뒤집어쓰려는 태오를 보며 소유는 더욱더 미안해졌다. 그녀의 기분에 따라 토끼 귀도 아래로 축 처진 것 같았다.
“이만 가자. 가서 아버님한테 잘못했다고…….”
소유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태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어딜 가? 관람차에서 야경 보고 싶었다며. 관람차라면 나도 멀미 안 하고 탈 수 있어.”
“무슨 야경이야, 지금! 난리 났는데.”
“이왕 난리 난 거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가야지.”
태오는 씩씩하게 소유의 손을 이끌었다. 깡이 세다고 해야 할지,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소유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태오에게 끌려갔다.
“참, 이것도 처음이다.”
“뭐가?”
“이렇게 창피한 기사 나는 거. 너 가져라.”
태오의 말에 소유도 곧 걱정을 미뤄 두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관람차는 다른 놀이기구보다 줄이 짧아 바로 탈 수 있었다. 좁은 공간에 문이 닫히자 둘만 있을 수 있어서 조금이나마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태오야. 다들 너 배우보다 잘생겼대. 모델처럼 키도 크대. 아, 몸은 운동선수처럼 좋대.”
관람차가 위로 올라가는 순간, 소유는 휴대폰을 다시 꺼내 초조하게 댓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혹여나 우리 태오한테 악플이라도 달리면 바로 신고할 거야, 내가.
“줘.”
손톱을 물어뜯는 소유의 앞에 태오가 손을 내밀었다.
“응?”
“줘, 휴대폰. 잠깐 압수. 예쁜 풍경을 두고 휴대폰만 보는 건 유죄야.”
확 트인 양옆에서 주황색과 보라색이 섞인 빛이 쏟아졌다. 얼핏 시어머니인 서령에게서 온 메시지가 보이는 것도 같았지만 소유는 태오에게 저항 없이 휴대폰을 내주었다.
그리고 허전해진 손으로 남편의 손을 꽉 쥐었다.
“예쁘다.”
소유가 저물어 가는 하루를 감상했다. 늘 보는 풍경이건만 위에서 보는 느낌은 또 달랐다. 태오는 귀엽다는 듯 소유의 볼을 꼬집었다.
“네가 더.”
소유의 손등에 입을 맞춘 태오가 말했다.
“아까 한 말 지킬 거야.”
소유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 좋아하는 거 보니까 종종 와야겠네. 둘이서.’
“또 오자. 둘이서도 좋고, 셋이서도 좋고.”
이번엔 소유가 태오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서 대답했다.
“놀이기구도 못 타면서?”
“꼭 놀이기구 타야만 하나? 그냥 아이스크림 먹고, 너 원하는 만큼 사진 찍고, 이렇게 관람차만 타도 행복한데?”
원하는 놀이기구는 딱 한 대밖에 못 탔지만, 소유는 태오의 말에 기쁘게 동의했다.
“그건 그래.”
“그리고 이호한테도 이거 보여 주고 싶어서.”
“그런데 우리 바로 아버님 찾아뵙고…….”
자꾸만 현실로 돌아가려는 소유의 입을 막기 위해 태오는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이윽고 비로소 소유도 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뒤의 일은 뒤에 생각하는 거다.
지금은 즐기기만 하면 그뿐.
오늘의 이 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
다른 날엔 또 다른 날의 감상이 떠오를 테니.
“내가 네 우주라고?”
커다란 도시를 아래로 두고 나누는 키스는 찬란했다. 이런 귀한 시간을 만들어 준 아빠에게 감사하는 소유였다.
“You’re my world, Hazel.”
너는 내 세상이야.
인위적인 물감으로는 전혀 낼 수 없는 주황빛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그 시간, 부부에겐 또 하나의 추억이 쌓였다.
두고두고 심적 재산이 될 추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