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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마른 꽃송이 (84/95)


84. 마른 꽃송이
2023.01.16.


분명 언짢은 기색으로 세상에 퍼진 태오의 기사 사진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서령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사진 속 아들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사진 속 며느리가 너무 예뻐서일까.

어쩌면 둘 다일까.

명확하게 규정 지을 수 없는 웃음이 은은하게 퍼진 서령을 가만히 바라보던 강 회장이 말을 걸었다.


“태오 그놈, 불러서 혼냈어.”

강 회장의 음성에 정신이 돌아온 듯 서령이 휴대폰을 황급히 숨겼다.


“당연히 그래야죠. 부모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뒤늦게 사춘기가 온 것도 아니고.”

“처음이더군. 그놈한테 싫은 소리 한 거 말이야.”

태오는 언제나 완벽한 아들이자 후계자였다. 공부도, 체육도, 경영도, 단 한 번도 강 회장의 기대에 어긋난 적이 없었다.

알아서도 잘하는 태오였으니 당연히 강 회장이 혼낼 일도 없었다.

지금까진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겨 왔으나 오늘 태오를 혼내고선 기분이 묘해졌다. 앞으로 다 큰 아들을 혼낼 일이 몇 번이나 남아 있을까. 혹시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까. 이번 생에선 끝이 아닐까.

강 회장이 쓸쓸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따 시원하게 들이켰다. 서령은 팔짱을 끼고서 그런 남편을 응시했다.


“그래서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죠? 설마 나더러 당신을 동정하기라도 하라는 거예요? 다 당신의 업보고, 당신이 치러야 할 대가예요.”

이렇게 보니 당신도, 나도 나이가 들긴 했구나. 처음 만났을 땐 멀끔하던 당신 얼굴에도 주름이 생겨난 걸 보니.


‘진서령 씨? 강준영입니다.’

맞선 자리에서 준영이 가장 먼저 건넸던 인사였다. 지금은 한없이 원망스럽기만 한 딱딱한 태도마저도 그땐 그저 멋있었다.

서령은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며 준영과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아무 기대도 없이, 아버지에게 등 떠밀려 나온 맞선 자리에서 만난 예비 남편이 그토록 멋있다니. 드라마에나 나올 유치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제게 찾아올 리 없는 행운이라 여겼다.


 


‘별거 아니지만 받아 주시겠습니까?’

거기다 준영은 소담한 꽃다발까지 서령에게 내밀었다.

그때부터 서령의 마음은 부풀어 올랐다. 이 멋진 남자와 남부럽지 않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이 작은 설렘이 점점 커져 이 남자에게도 닿으리라.

하지만 서령의 비현실적인 꿈은 결혼 직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 산산조각이 났다.

바보처럼. 정략결혼 상대에게 그런 설익은 감정을 갖다니.

서령은 그때처럼 준영의 눈을 피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는 20대의 자신이 계속 떠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령은 말없이 준영을 지나치려 했다. 그러자 준영이 서령의 팔목을 잡고서 말했다.


“진서령 씨.”

놀랍게도 첫 만남 당시의 그 목소리였다. 전혀 늙지도, 녹슬지도 않은 딱 20대 후반 준영의 목소리였다.

서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편을 쳐다보았다.


“적어도 우리, 이혼은 없던 일인 거지?”

이미 파국으로 치달은 관계이면서, 아직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그의 심경이 이해되지 않으면서 궁금했다.

이혼이 무슨 그리 큰일이라고. 이미 많은 것을 손에 쥔 당신에게 무슨 그리 큰 흠이라고.


“강준영 씨.”

서령은 대답 대신 준영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꽤 오랜만에 ‘태오의 아버지’가 아닌 ‘강준영’ 그 자체로 보였다.


“우리 처음 만났던 날, 줬던 꽃다발. 그것도 어른들이 시킨 건가요?”

왜 대뜸 그 질문이 튀어 나갔던 건지 모르겠다. 맥락에도 맞지 않고, 부부의 미래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건만.

그냥, 그냥 문득 묻고 싶었다. 극적인 이 순간에.


“그렇게 안 어울리는 행동을 하면서까지 나의 환심을 살 필요가…….”

“똑똑히 기억해. 유달리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이었지.”

그랬지. 어두운 미래도 모른 채 눈치 없이 아름다웠던 봄이었지.


“아마 당신은 내가 약속 시각에 늦었던 거로 기억하겠지.”

“진짜로 늦었었죠. 내 착각이 아니라.”

준영은 실제로 약 5분 정도 늦었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몹시 짧은 시간으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시간개념이 엄격한 그들에겐 달랐다. 특히 20분이나 일찍 도착했던 서령에게는 더더욱.

그 무례함을 알아차리고 빨리 도망쳤어야 했는데.


“아니. 난 사실 당신보다 일찍 그곳에 도착했었어.”

“네?”

“창 너머로 당신을 봤어. 베이지색 옷을 입고, 긴장한 기색으로 차에서 내리는 당신을.”

준영은 당시 서령이 입었던 옷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의 서령을 보면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당시의 서령은 화장기가 거의 없는 민낯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귀걸이를 끼고 있었다.


“그때 처음 알았어. 사람이 봄보다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

이번엔 준영이 서령의 눈을 피했다. 준영은 남아 있는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취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런 당신을 맨손으로 맞이할 수 없었어. 그건 봄과 당신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거든.”

준영은 난생처음 간절하게 뛰어보았다. 그러곤 그 근방에서 가장 화려한 꽃다발을 구매했다. 그나마 서령과 어울릴 만한 아름다운 것이었다.

다시 카페로 돌아왔을 땐, 약속 시각이 5분이 지나 있었고, 서령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을 그 정도로 잡고 싶었을지도 몰라. 놓치면 후회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서령은 그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준영처럼 화르르 열이 오를 뿐이었다.


“회장님. 저 왔습니다.”

침묵 아닌 침묵이 이어지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준영의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참 낯부끄럽군.”

준영은 서령을 잡은 손을 놓고 사라졌다. 서령은 잠시 준영의 체온이 머물다간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화장대 안에 숨어 있는 비밀 서랍을 열었다. 태오가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서령만의 공간이었다.

서령이 떨리는 손으로 작은 소설책 하나를 꺼냈다. 펼쳐 본 책의 가운데엔 마른 꽃송이가 있었다. 말라비틀어졌을지언정 아직 시들진 않은 30여 년 전 그 꽃이.

서령이 입을 틀어막고 숨죽여 울었다.

준영을 원망하며 꺼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꽃은 변함없이 그곳에 존재하며 서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서령의 청춘처럼.

서령이 조심스럽게, 바스러지지 않게, 꽃을 어루만졌다.

당신의 눈에 나는 정말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당신은 내가 아직도 이걸 간직하고 있다는 걸 알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아들과 며느리는 그녀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찬란하게 사랑을 지켜 냈다.

그녀가 지켜 내지 못했던 것을 아들 부부는 지켜 냈다.

그래서 웃음이 나왔겠지.

사고를 치는 아들 부부가 제가 못했던 일을 대신 이뤄 줘서.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아들과 며느리처럼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솔직하게 살 수 있었을까.

나는, 당신에게, 나를 지켜 달라고 애원할 수 있었을까.

* * *



“아버님한테 많이 혼났어?”

태오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소유는 이호를 안은 채 달려 나왔다. 오늘 태오가 아버님에게 불려 가 혼이 났다는 걸 소유도 들었다.

태오가 열심히 커버를 쳐 줬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부모님의 뜻인지 어쨌든 불똥이 소유에겐 튀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그 사달을 일으킨 건 본인인데.


“화 많이 나셨어?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내가 대신 혼날까?”

대답이 없는 태오를 보니 더 불안한지 소유가 재차 물었다. 태오는 그제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다 끝난 일인데 너까지 뭐 하러 나서. 다음에 이호랑 갈 때는 정상적인 차림으로 가라더라.”

아버님 성격상 뒤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생 놀이공원 같은 곳은 가지 말라는 엄포가 내려온 것도 아닌데, 태오는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그래서 소유는 더욱 애가 탔다.


“소유야. 너 이호 데리고 아버지 찾아갔었어?”

그러다 예고 없이 돌아온 질문에 소유가 우물쭈물했다.


“아…… 응. 저번에.”

태오가 당일 지방 출장을 갔을 때, 소유는 홀로 시아버지를 찾아갔다. 태오와의 어색한 사이로 인해 시아버지가 한 번도 이호를 보지 못했기에 스스로 나선 것이다.

약속 없이 찾아온 소유를 위해 시아버지는 기꺼이 모든 스케줄을 취소했다. 그리고 제 손자를 처음으로 안아 보았다.

감상에 젖어 이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시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소유는 용기를 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랑 또래라 그런지, 상위포식자인 시아버지가 몹시 외로워 보였다. 안쓰러운 마음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태오의 부모님은 자신의 부모님이나 다름없으니까.


“내가 말도 없이 찾아봬서 화났어?”

그게 불과 지난주의 일이다. 언젠가 태오에게도 말해야지, 했건만 그 전에 태오가 먼저 알게 될 줄은 몰랐다.


“미안해. 그런데 아버님만 우리 이호 얼굴 못 보셨잖아. 있잖아. 아버님 정말 좋아하셨어. 너와 똑 닮았다며…….”

“왜 미안해?”

태오가 안절부절못하는 소유의 볼을 쓰다듬다가 잔잔하게 웃었다.


“나도 못 한 걸, 네가 해 줬는데.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태오야.”

“아버지가 그러더라.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결혼이라고. 나도 동의해.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이 너처럼 예쁜 사람을 만났겠어.”

“그렇게 말하지 마. 너 같은 인간이 뭔데.”

“고마워, 소유야.”

태오가 보답하듯 소유의 말랑한 볼에 입을 맞췄다.


“나 오늘 아버지한테 정말 호되게 혼났어.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가 않더라.”

“변태야? 혼나는 게 좋아?”

“응. 좋아.”

부부는 터져 나오려는 애틋함을 애써 참아 내고서 가볍게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젠 너랑 같이 부모님 속 좀 썩이려고. 가뜩이나 퇴직하시면 무료하실 텐데.”

“아주 효자 나셨어.”

태오의 말이 장난스럽게 들렸지만, 소유는 그제야 어긋났던 가족들의 관계가 제대로 맞춰지고 있음을 느꼈다.

선오도 어머니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태오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조금씩 버려 가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노아와 헤이즐의 영화는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다.


“나도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 되더라.”

“야, 강태오. 그건 네가 잘못 안 거야. 언제나 그곳에 계셨어. 아버님도, 어머님도. 그냥 네가 먼저 마음의 벽을 치고 그분들을 밀어낸 거겠지.”

아마 소유는 태오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감히 건들고 비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너 나중에 이호가 너랑 똑같이 굴면 억장 와르르 무너질걸.”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그럼 지금부터라도 부모님한테 잘해. 자식은 부모의 거울.”

“알았어. 대신 너 평생 그렇게 내 옆에서 나 혼내고 잔소리해 줄 거지?”

“……지금 나 잔소리한다고 돌려 까는 거니?”

“아니. 그게 아니라.”

에라, 모르겠다.

태오는 일단 눈앞의 사랑스러운 아내를 와락 끌어안았다.


“으아앙!”

아내의 품에 안겨있는 금쪽같은 아들의 존재도 그만 잊어버리고서.


“나 지금 이호 안고 있잖아!”

난데없이 부모 사이에 끼어 버린 이호가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태오와 소유는 한뜻으로 온갖 소리 나는 장난감을 삑삑 대며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때마침 태오의 차 키를 돌려주러 왔던 손지욱 비서는 그 광경에 말을 잃었다. 이게 뭔 난리래.


“우리 이호 착하지?”

“으앙!”

가장 꼴불견이었던 것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아이를 달래고 있는 자신의 상사였다. 조용히 영상을 찍어서 사내에 퍼뜨리고 싶을 정도였다.


“안 본 눈 삽니다.”

조용히 중얼거린 손 비서는 태오의 차 키를 내려놓고 홀연히 시끌벅적한 집을 빠져나왔다.

그래도 소유를 만나기 전과 달리 태오가 외로워 보이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부사장님이 행복하면 된 거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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