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엔딩 크레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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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엔딩 크레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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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엔딩 크레디트
2023.01.20.
“어, 사모님. 안녕하세요! 웬일이세요?”
“안녕하세요.”
태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차석 비서는 갑작스럽게 방문한 소유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지난번에 아프셨다고 하던데, 괜찮죠?”
“그럼요. 덕분에. 아, 사모님이 챙겨 주신 보약 잘 먹고 있어요.”
소유는 다른 재벌가 사모님과는 달랐다.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알며,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비밀 아닌 비밀이지만 이 호텔 직원들은 제 상사인 태오보다 소유를 더 좋아했다.
소유가 등장하면 자의로 그녀를 돕고 싶어 하는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별거 아닌데요, 뭐. 아, 그런데 그이는 외근이라도 나갔나 봐요.”
“아니요. 잠깐 회의하러 가셨습니다.”
비서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짧은 회의라 곧 끝나실 것 같네요. 안에서 기다리시겠어요? 차라도 드릴까요?”
“차는 괜찮아요.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은 소유는 태오의 집무실에 혼자 남게 되자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할 수 없어 웃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강태오. 가만 안 둬.”
그 사이 태오는 소유가 집무실에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에 급히 회의를 마무리하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그녀에게 전해 줄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소유야. 연락도 없이 무슨 일로…….”
퍽.
애석하게도 태오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소유가 그의 가슴팍에 쿠션을 약하게 던졌기 때문이다. 딱히 아프진 않았지만, 쿠션을 한 손으로 잡은 태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순한 눈이 티 나지 않을 만큼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왜 그래? 내가 또 잘못했어?”
이젠 소유에게 혼나는 것이 익숙해진 태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유는 기다란 머리를 거칠게 뒤로 쓸어 넘기며 태오를 흘겨보았다.
“우리 회사에서 곧 큰 프로젝트 들어간다고 했지.”
“응? 응.”
그게 왜.
“나 자리 오래 비운 것 때문에 도진 오빠 고생이 말이 아니라고 했지.”
“했지.”
이호를 가진 이후 출산 휴가에 들어간 소유로 인해 도진이 고군분투한 것은 태오도 알고 있었다.
그런 부분은 당연히 태오도 고마웠고, 든든했다.
그런데 그게 제가 잘못한 일이었던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진 않지만, 태오는 일단 굽히고 들어갔다. 그러자 소유가 어이없다는 듯 허리에 팔을 짚고서 되물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데?”
아…… 제일 어려운 질문이 나왔다.
글쎄. 내가 뭘 잘못했을까. 착하디착한 네가 화를 내는 것으로 보아 내가 또 뭔 실수를 한 것 같긴 한데, 그게 뭘까.
겉모습은 침착해 보이지만, 사실 태오의 머리는 빠르게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나더러 도진 오빠 얼굴 어떻게 보라는 거야! 조금만 여유 갖자고 했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뭔 일 생긴 거야?”
당장이라도 소유를 꼭 안고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지만 어쩐지 소유가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뒤로 숨긴 애꿎은 영화 포스터만 만지작댔다.
“내가 오늘 어디 간다고 했지?”
“잠깐 회사 나갔다가 산부인과…… 너 설마 어디 아프대?”
소유가 정기적으로 산부인과에 검진을 하러 가는 날이었다. 이젠 덩달아 태오도 심각해졌다.
“뭐가, 어디가, 얼마나 아프대. 아니다. 다른 병원 가서 검사 다시 해 보자.”
태오의 손에 들린 영화 포스터가 팔랑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도 모르고 태오는 황급히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나 또 임신했대!”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 소유가 그렇게 소리쳤다.
“……어?”
그대로 얼어붙은 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소유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위험한 날이라고.”
“…….”
“아직 이호도 어리고, 회사에 할 일도 밀렸는데, 어떡할 거야!”
소유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태오는 할 말도 찾지 못한 채 눈만 깜박였다.
이호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기회는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드문 기회 속에서도 일을 이루어 내다니. 너 진짜 대단하다, 강태오.
“몰래 웃지 마.”
스스로를 칭찬하며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려는데 소유가 엄하게 말했다. 태오는 곧장 입꼬리를 내렸다. 늘 같이 붙어 있다 보니 보지 않아도 서로의 행동이 예상되는 둘이었다.
“나 진짜 어떡해.”
“어떡하긴. 축하해야지.”
태오가 성큼성큼 다가가 소유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호와는 다른 느낌의 기쁨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그래도 둘째가 찾아온 건 축복이잖아. 그렇지?”
“그렇긴 하지만…….”
“우리 딸이 들으면 속상해요.”
벌써부터 둘째가 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진 소유가 그를 툭 밀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오는 싱글벙글했다.
“형님한텐 내가 사죄드릴게. 그리고 강화 인터내셔널에서 자원 근무할 직원들 있으면 뽑아서 파견 근무 보낼게. 물론 인센티브도 줄 거야.”
“뭐가 이렇게 일사천리야? 마치 계획했던 사람처럼?”
“…….”
슬그머니 눈을 피한 태오가 소유의 여기저기에 마구 입을 맞췄다.
“축하해, 내 새끼. 그리고 사랑해. 우리 둘째도 예쁘게 키우자.”
그렇게 말하니 소유도 더 이상 화를 낼 순 없었다. 태오의 말대로 이미 찾아온 둘째의 존재는 축복이기도 하고.
“네가 다 책임져.”
“알았어. 내가 다 책임질게.”
어느새 소유도 태오처럼 방긋 웃고 있었다. 태오의 바람대로 저를 닮은 딸이라면 정말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이호가 동생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고.
“그나저나 저건 뭐야?”
문득 소유가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진 영화 포스터를 가리켰다.
“아, 맞다. 이거 너한테 제일 먼저 알려 주고 싶었는데.”
태오는 포스터를 주워 소유에게로 내밀었다. 이윽고 소유의 눈이 기쁨으로 인해 커졌다. 바로 노아와 헤이즐이 나오는 그 고전 영화의 재개봉 소식이었다.
“이번에 강화 시네마에서 고전 영화 특집 진행하면서 재개봉하기로 했어.”
“말도 안 돼.”
언젠가 꼭 한 번 영화관에서 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었는데, 남편 태오는 이번에도 그 꿈 같은 일을 이뤄 냈다.
“오늘 진짜 좋은 소식 많이 들려온다. 이건 운명이야.”
태오가 소유를 꽉 끌어안으며 감상적인 말을 했다.
“장인어른께서도 좋아하시겠지?”
“응. 무척.”
“나 잘했지?”
“응. 잘했어.”
소유는 태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분명 오늘 태오를 아주 호되게 혼내리라 다짐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개봉 첫날에 같이 보러 갈까, Hazel?”
“Yes, Yes. Of course.”
고개를 끄덕이는 소유의 눈에서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
“왜 울어, 좋은 날에.”
“꼭 영화 주인공 같아, 나.”
태오를 만나고, 결혼하고, 연애를 하고, 누군가의 부모가 된 지금까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물론 이 영화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제작, 투자 등을 모두 해낸 태오 덕분이었다.
“주인공 맞아, 너.”
“…….”
“내 인생의 유일한 여자 주인공.”
태오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I love you, Hazel.”
* * *
현대 기술로 복원해 보려 노력했지만, 워낙 오래된 영화라 한계가 있었다.
사실 그래서, 소유는 오히려 좋았다.
자글자글한 화질과 흑백뿐인 영화라 그 감성이 더욱 도드라졌고, 아련함을 완성시켰다.
중년이 된 노아와 헤이즐이 달밤 아래서 노래를 불렀을 때 관객들은 훌쩍거렸다. 그리고 다시 만난 노아와 헤이즐이 끊겼던 사랑을 이어 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윽고 영화가 끝나고, 감명을 받은 관객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하지만 태오와 소유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에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여운이 지나치게 오래 가는 나머지 한동안 떠나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는 서로의 손을 잡은 중년의 노아와 헤이즐이 아른거렸다.
“확실히 영화관에서 보니까 느낌이 다르네.”
눈물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소유의 눈을 보던 태오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소유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해피엔딩일까?”
“당연하지. 누가 봐도 꽉 막힌 해피엔딩이지.”
영화 결말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건만 태오는 그것이 해피엔딩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틀린 것이라는 듯 단언했다.
그래서 소유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너에게 해피엔딩이면 나에게도 해피엔딩.
그 순간 아무도 보지 못했던 ‘Special Thanks to’라는 글자가 스크린에 떠올랐다.
의아한 표정의 소유가 곧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이 세상 유일한 나의 Hazel에게, Noah가.]
하여튼 강태오. 진짜 못 말려.
태오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이벤트였다. 아버지가 이 영화를 보고 제게 헤이즐이란 이름을 지어 줬을 때만 해도 엔딩 크레디트에 올라가리라 예상이나 했을까.
“내가 뭐라고 여기에 숟가락을 얹어.”
“네가 뭐긴. 추억 속의 Hazel을 다시 추억하게 만들어 준 장본인이지.”
“다 네가 한 거잖아.”
“널 못 만났으면 안 했을 거야.”
덕분에 사람들은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잊고 지내던 서로의 헤이즐에게, 또는 서로의 노아에게 연락을 해 보았을지도 모르지.
“말 그렇게 예쁘게 하는 거 어디서 배웠어?”
“너한테.”
그리하여 아쉽게 끊어졌던 인연이 다시 이어진다면 해피엔딩.
설령 없는 번호라는 안내음이 나오거나, 단호한 거절이 돌아온다고 해도 그것 또한 해피엔딩.
적어도 미련이 남은 과거에 작별을 고할 수 있으니.
“나중에 이호한테도 이 영화 꼭 보여 주고 싶어.”
“그때쯤 또 재개봉하면 되겠네.”
소유는 태오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이 세상 모든 노아와 헤이즐이 행복하길 바랐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는 생기와 수줍음이 가득하여 사춘기를 경험할 수 있길.
그리하여 언제나 소녀와 소년으로 남을 수 있길.
영영 시들거나 굽어지지 않길.
“너를 만난 것만으로도 내 인생의 운은 다 썼을 거야.”
“운 아니야. 필연이지.”
필연. 그래, 필연.
반드시, 꼭, 틀림없이 이루어졌어야 할 인연.
영화가 끝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라와야 하는 엔딩 크레디트처럼 이어지고야 말 인연.
“그러니까 다음 생에서도 내 필연이 되어 줘. 지금과 다른 모습이어도 좋으니, 우리의 성별이 바뀌어도 좋으니 꼭 다시 내 앞에 나타나. 그리고 오로지 나랑만 사랑해.”
당신의 필연은 안녕하십니까.
혹 괜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놓치진 않으셨는지요.
“응. 언제나 널 기억하고 널 찾아갈게, 태오야. 다음 생에서도, 다다음 생에서도.”
주위를 잘 둘러보시기를.
나도 모르는 새에 나의 필연이 나의 옆에 성큼 다가왔을지도 모르니.
내가 돌아보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내 필연,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나랑 결혼해 줘서 고마워.”
자, 그럼 필연으로 이어져 진정한 사랑을 찾은 두 남녀의 이야기는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끝을 내려고 합니다.
꽉 막힌 해피엔딩과 함께.
안녕.
모두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