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식상하게도, 운명(2)
(87/95)
외전 2. 식상하게도, 운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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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식상하게도, 운명(2)
2023.01.27.
“수고하셨습니다.”
“네. 연우 씨. 오늘도 연기 최고였어요.”
매니저가 몇 번이고 간곡하게 부탁한 덕에 드라마 촬영은 예정된 시간에 끝이 났다. 연우는 곧바로 강화 전자 지면 광고 촬영장으로 향해야 했다.
서둘러 드라마 배역의 흔적을 지우고 있는데, 누군가가 아주 무례하게 연우의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문 들었어. 이번에 강화 전자 광고 따 냈다며?”
연우가 거울 너머로 그다지 달갑지 않은 얼굴을 응시했다.
“이야, 대단해. 아무튼 엄청난 여시라니까. 전 남친한테 다시 매달리기라도 했니?”
연우의 선배 연기자였다. 선오와의 첫 만남이 있었던 파티에서, 연우를 가장 아니꼽게 바라보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땐 그녀가 주연, 연우가 조연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처지가 뒤바뀌었다. 이번 드라마도 그랬다. 연우가 여자 주인공이었고, 그녀는 아주 가끔 등장하는 연우의 친구였다.
연우를 향한 시샘은 연우가 잘나가기 시작하자 더욱 극심해졌다. 우연히 그 시기가 선오와 헤어졌던 때와 겹쳤기에 연우를 둘러싸고 온갖 더러운 소문까지 나돌았다.
정작 선오에게 가장 비참하게 버림받은 건 연우였는데, 말이다.
그 당시 연우는 심신이 지친 나머지 그 어떤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진실 한 톨 섞이지 않은 거짓은 진실 행세를 하게 되었다.
“사람들 앞에선 고고한 척, 재벌 남친 앞에선 벌벌 기는 거, 너무 역겹다. 배우로서 프라이드도 없니?”
연우는 대꾸 없이 픽 웃었다.
“웃니? 요즘 좀 잘나간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봐? 너 하나 때문에 다들 스케줄 조정하고 이게 뭔 고생이야? 후배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아?”
평소였으면 그저 무시하고 말았을 그저 그런 비난이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독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나 보지.
아니면 선오를 만난 이후, 무뎌졌던 감정이 다시 예민해졌든가.
“선배가 그렇게 후배들을 생각하시는 분이었어요? 몰랐네.”
“뭐?”
선배 배우가 찢어질 듯한 소리로 되물었다. 늘 얌전히 당하기만 하던 연우가 반박을 해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선배는 선배보다 잘나가는 후배는 싫어하시잖아요. 그 열등감 때문에…….”
“너 말 다 했어?”
선배 배우가 연우에게로 손을 뻗어 귀걸이를 세게 잡아당겼다. 그로 인해 귀걸이는 아래로 추락했고, 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교묘한 만행이었다.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얼굴을 피해 저질렀으니까.
스타일리스트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정작 피해자인 연우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나 후배로 안 받아들이거든. 너처럼 재벌 발밑에서 설설 기는 천박한 계집애는 후배라고 생각 안 해.”
“선배.”
연우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얼굴 피한다고 폭행이 아닌 건 아니거든요.”
“뭐, 뭐?”
“게다가 증인도 있고.”
선배 배우가 그제야 연우의 스태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우의 스태프들은 경멸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 광고 촬영장으로 출발…… 무슨 일 있어요?”
그때, 다음 스케줄 조정을 하던 매니저가 대기실로 도착했다. 그러곤 심상치 않은 대기실 분위기에 얼어붙었다.
연우는 반대쪽 귀걸이도 빼고서 선배 배우에게 경고했다.
“한 번만 더 이런 짓 하시면 그땐 정식으로 법적 절차 밟을게요.”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선배 배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연우는 가방을 들었다. 그러다 대기실을 나가기 직전, 말했다.
“그리고 발밑에서 설설 기면 좀 어때서요?”
“…….”
“좋아하는 사람한테 자존심이 어디 있어?”
* * *
“누나 진짜 병원 안 가도 괜찮아요? 내가 확 대표님한테 말해서…….”
“됐어. 호들갑 떨지 마.”
지면 광고 촬영장에 도착해서도 연우의 귓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러나 저만 기다리는 관계자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 연우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인사를 건넸다.
선오와의 구질구질한 관계를 떠나서 일은 일이었다. 연우는 프로였고.
“감독님. 제가 좀 늦었죠. 죄송합니다.”
“아니요. 딱 맞춰 왔어요. 드라마 촬영하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고생했어요. 참, 오늘 깜짝 손님이 있어요.”
“네?”
“강 상무님께서 응원차 오셨어요. 광고 현장엔 처음 나오시는 거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 커피차도 준비되어 있으니 드세요.”
그제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어두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믿을 수 없게도 그곳엔 선오가 있었다.
선오의 시선이 연우의 얼굴에서 붉은 귓불로 옮겨 갔다.
모두가 선오에게 고개를 숙이는 그 순간, 두 사람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최대한 귀가 보이지 않게 굵은 웨이브를 넣는 쪽으로 해야겠어요, 언니.”
“응. 그래. 알아서 해 줘.”
선오와의 깊은 눈 맞춤이 끝나고, 대기실로 도망치듯 들어온 연우는 거울 속 상기된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리석게도 가슴은 아직도 콩닥콩닥 뛰었다.
“이번 신제품의 흥망은 강화 전자에겐 아주 중요한 포인트예요. 그래서 비싼 광고료를 들여 도연우 씨를 섭외했죠.”
그때 연우의 심장을 뛰게 한 당사자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다. 선오는 성큼성큼 걸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 대신 도연우 씨는 우리 강화 전자를 위해 품위를 유지하기로 약속했던 것 같은데.”
“품위가 훼손될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어요.”
“그래요? 그럼 귀가 그 모양인 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쌈박질은 품위 유지와 관련이 없나?”
작게 한숨을 쉬던 연우가 매니저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연우의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빠져나갔다.
어느새 그 공간에는 연우와 선오만 남게 되었다.
“그냥 좀 다친 거예요. 그리고 머리로 충분히 가릴 수 있는…….”
“누가 그랬냐?”
둘만 남게 되자 선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마치 사귀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아 연우는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시절에도 선오는 연우를 향한 공격을 지나치게 경계하곤 했었다.
“강 상무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곰곰이 생각해 봤어. 네가 왜 날 찾아왔을까. 이미 정상에 오른 네가 내게서 얻을 게 없는데. 돈도, 권력도 더는 필요 없을 텐데.”
연우는 손톱으로 손가락의 여린 부분을 마구 긁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서럽고 약한 눈물이 툭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나와 엮여 봤자 더러운 추문만 날 뿐인데.”
하지만 그 아픈 노력이 무색하게도 연우의 눈에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선오는 거만하게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연우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깨달았지. 너 정말 나 좋아했구나. 진심으로. 많이.”
선오의 손이 연우의 귓불에 닿았다가 은근하게 젖은 눈으로 향했다.
“순수하면서, 한심하게도.”
길고 얇은 손가락이 연우의 눈물을 닦아 냈다.
“너는 아주 간절하게 바라고 있구나. 정말로 내가 죽어버리거나, 너에게로 돌아가거나.”
선오와 닿은 부분이 찌릿하고 따끔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겁을 주고 쫓아냈겠지만, 우리 연우라면 또 다르지. 네 커리어를 전부 걸고 내게 다가왔다면, 나도 장단 정도는 맞춰 줘야겠지. 넌 특별하니까.”
또 선오에게 말려들 것만 같았다. 선오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홀로 들뜨고, 실망하는 거라면 이젠 지쳤다.
연우가 선오를 매정하게 내쳤다. 하지만 선오는 딱히 상관없다는 듯 손을 아래로 내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예전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편했을 거야. 그런데 난 이제 죽을 수가 없거든. 그때완 달라졌어.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겨서.”
연우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물로 선오를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겠지. 널 책임지는 수밖에.”
원하는 바를 이루었음에도 연우는 무조건 기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심정은 더욱 복잡해졌다.
“연우야. 넌 나를 다시 찾아온 걸 아마 후회하게 될 거야. 내가 생각보다 더 최악의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될 거거든. 하지만 이제 늦었어. 도망갈 기회는 없어.”
선오는 아주 달콤한 목소리로, 몹시 살벌한 말을 했다.
“넌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아질 거야.”
“…….”
선오가 얇은 연우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닿을 듯 가까워진 상태로 속삭였다.
“그래서, 그 상처는 누가 만들었냐고.”
선오의 시원한 향이 가까워졌다.
선오의 간지러운 숨결이 얼굴에 닿았다.
* * *
맛있는 밥을 먹고, 형제는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간 광고가 나오는 시간, 화면엔 낯이 익은 한 여자 연예인이 티 없이 깨끗한 피부로 화장품 광고를 하고 있었다.
멍하니 사과를 오물거리던 준오가 문득 미간을 팍 찌푸렸다.
“아, 맞다. 형. 저 사람, 이번에 강화 전자 광고 모델 됐다며?”
기억력도 좋아.
선오는 쓸데없이 비상한 준오의 기억력에 혀를 찼다. 그러고 보면 준오는 선오가 잊어버린 짧은 인연조차 모두 기억하는 편이었다.
“안 불편해? 전 여자친구잖아.”
“나랑 안 엮인 여자 찾는 게 더 힘들지 않겠냐.”
알긴 아나 보네. 당당한 선오의 말에 준오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새로운 사과를 포크로 콕 집으며 다시 말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좀 다르잖아. 형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대한 사람 아니야?”
“뭐래. 너 진짜 별걸 다 기억해. 무섭게.”
“그때 헤어진 거, 큰아버지가…….”
“입 다물고 사과나 먹어라.”
선오가 남은 사과를 마구 준오의 입 안에다 넣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만나고 밝아진 건 좋은데 너무 말이 많아졌어.
준오가 괴로운 소리를 내는 사이 지수가 방에서 나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귀엽게 티격태격하는 아들들이 귀여운지 지수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요즘 들어 선오가 집에 자주 오는 덕에 집 안이 시끌벅적하고 좋았다.
“준오가 대학교 다닐 때 CC였는데, 그 여자한테 차이고 나서 얼마나 찌질하게 굴었는지 회상 중이었어요.”
선오의 역공이 시작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준오가 눈을 크게 뜨며 캑캑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오는 사악하게 웃었다.
나만 과거 있냐. 너도 과거 있지.
제게 가려져서 그렇지, 준오도 알게 모르게 뒤에서 할 거 다 하고 다닌다는 것을 아는 선오였다.
“어머나, 그래?”
처음 듣는 아들의 연애 이야기에 지수가 흥미로운 듯 눈을 깜박였다.
“그게 아니라, 바람둥이인 형이 진짜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는데요!”
열심히 오물대던 준오는 사과를 모두 삼키고 나서야 반박을 할 수 있었다.
“정말?”
선오의 연애 이야기든, 준오의 연애 이야기든 엄마에겐 그저 즐거웠다.
“최근에 그 여자랑 다시 만났거든요.”
“진짜니?”
선오가 눈을 질끈 감고 '참을 인' 자를 세 번 새겼다. 어머니 앞에서 동생을 쥐어 팰 수도 없으니.
“어떤 여잔데?”
“형이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 예쁜 사람이요, 그런데 바보처럼 놓쳤어요.”
“안타까워라.”
“제 생각엔 형은 그 여자분 놓치면 평생 방탕하게만 살다 갈 것 같아요.”
아니다. 못 참겠다.
선오는 준오의 위에 올라타 쿠션으로 응징하기 시작했다.
준오는 말랑한 쿠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며 얄밉게 웃었다. 어차피 저를 아프게 때리지 못하는 형이라는 걸, 약아빠지게도 알고 있었다.
“음, 그래도 이왕 다시 만난 거.”
땀이 뻘뻘 나도록 동생을 응징하던 선오가 어머니의 말에 모든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잡아 보는 게 어떨까? 어쩌면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모르잖니.”
선오가 천천히 팔을 내리고 텔레비전을 응시했다. 대세 배우답게 이번엔 연우의 청량음료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까만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어김없이.
“운명을 잡으라고 준 마지막 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