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식상하게도, 운명(3)
(88/95)
외전 3. 식상하게도, 운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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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식상하게도, 운명(3)
2023.01.30.
[톱 배우 도연우, 강화 전자 강선오 상무와 두 번째 열애설 솔솔]
[소속사 사실 확인 중]
가십의 냄새를 가장 먼저 맡는 것은 언제나 연예부 기자였다. 난데없이 터져버린 열애설에 연우의 소속사는 비상사태였다.
“연우야. 이걸 어쩌면 좋냐. 너 아직 드라마도 안 끝났고, 광고 촬영도 연이어 잡혀 있는데.”
“대표님. 일단 정정 기사부터 내시죠. 스캔들은 질질 끌수록 독입니다.”
연우 소속사의 대표와 홍보팀장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우는 소속사의 간판스타였기 때문이다.
정작 연우 당사자는 타인처럼 상황을 방관할 뿐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로 터진 거라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때처럼 그저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 둘러대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만. 이번 광고 촬영을 계기로 오랜만에 만난 것뿐이라고.”
그들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듯이 선오와 연우의 열애설은 처음이 아니었다.
연우가 신인배우이던 시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처음 사귀었던 시절, 이미 열애설이 한 번 났었다.
연우는 선오의 대처를 기다렸다. 그러나 선오는 비겁하게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회피했다.
결국 연우의 소속사에서 적극적으로 열애설을 부정하고 나서야 난리는 진정되었다.
사실 그 당시 선오의 이미지는 지금보다도 더 나빴기 때문에, 그와 엮이는 사람들은 온갖 추문에 휩싸이기 일쑤였다.
소속사는 이제 막 시작하는 소속 배우를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그때부터 연우는 선오가 자신과 멀어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 이별을 맞이했다.
“그래. 일단 그렇게 해. 연우야. 괜찮지?”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때의 상황과 오버랩되는 건 상관없었다.
연우는 선오에게 묻고 싶어졌다.
이번에도 우리 강선오 상무님은 비겁하게 나를 외면할까.
“대표님.”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어떻게든 수습할게.”
“진짜 죄송한데, 나 아직 그 나쁜 X끼 좋아해요.”
“……뭐?”
연예계에 딱히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저를 위해 이토록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차마 대표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선오와 찍힌 파파라치 사진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먼저 강 상무 찾아갔어요. 그리고 매달렸어요. 나 좀 책임져 달라고.”
“연우야.”
얼마 전, 선오가 한밤중에 연우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잠시 이야기를 하던 순간이 포착되어 마치 엄청난 사건처럼 부풀려졌다.
늘 그렇듯이.
“대표님은 말씀하셨죠. 나는 대표님의 자존심이고, 긍지고, 자랑이라고. 그런데 전 그럴 만한 그릇이 아닌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연우야. 강선오 상무는 안 돼. 그 사람은…….”
워낙 좋은 카메라여서 그런지 멀리서 찍었는데도 연우의 표정이 자세히 보였다.
꽤 무미건조하게 선오를 대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눈은 애틋했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자 같았다.
기자들도 느낄 만한 이 시선을 직접 마주한 당신은 내 마음을 모를 수가 없었겠구나.
“알아요. 강선오가 절대 좋은 남자라곤 할 수 없죠. 아니, 오히려 연애 상대론 최악이에요. 무심하고, 싫증을 잘 내고, 변덕이 심하니까. 언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게 만들죠.”
또 들켰네. 당신이 좋아 죽을 것 같은 나의 감정을.
“나도 이런 내가 이해가 안 돼요.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모양이에요.”
연우가 서글픈 표정으로 태블릿 PC의 사진들을 뒤로 휙휙 넘겼다.
그때 대표와 연우 사이에 껴서 난감해하던 홍보팀장의 전화가 약하게 울렸다. 대표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손짓했다.
홍보팀장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전화를 받았다.
“그래. 대표님이랑 이야기 중이야. ……뭐?”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던 홍보팀장이 언성을 높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표의 시선이 불안한 듯 위로 올라갔다.
“일단 알겠어. 끊어.”
홍보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통화를 끊었다.
“왜 그래? 또 무슨 일이야? 사람 불안하게.”
“또 큰일이 났는데요.”
“뭐가 또 남았어?”
“아, 저 그게…… 인정했답니다.”
사진 속 선오의 얼굴을 보던 연우가 오랜만에 고개를 들었다.
“강선오 상무가 열애설을 인정했답니다.”
이윽고 연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손에서 태블릿 PC가 쿠당탕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대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양반은 또 왜 그래?”
“모르겠습니다. 언론에서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 열애 인정이라서.”
그동안 선오는 무수히 많은 여자와의 염문설을 뿌렸지만,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었다. 연우와의 첫 번째 스캔들 때도 그랬듯이.
그런 그의 인정에, 더욱 이목은 집중되었다. 조용히 덮을 수도 없게끔.
“우리가 이 타이밍에 정정 기사를 내면…… 연우야.”
연우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그저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대표의 부름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이 작은 파도처럼 일렁였다.
* * *
선오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땀 범벅이 된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잠시 호흡을 고르는데, 현관문이 달칵 열렸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나? 한달음에 달려오고 싶을 만큼?”
선오는 이제 막 샤워를 했는지 가운 차림에,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초조한 저와 달리 한없이 여유로운 그를 노려보고 있자니 눈동자가 시큰해졌다.
“들어와. 또 귀찮은 일 생기기 전에.”
선오는 고갯짓을 했다. 연우는 힘이 빠진 다리를 애써 꼿꼿하게 세우며 선오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몹시 넓고 호화로운 집이었지만, 냉기가 가득했다. 한겨울처럼.
“냉수라도 한잔 마실래? 아니, 지금 너한테 필요한 건 술인가?”
“뭐 하는 짓이야?”
“손님 대접?”
연우가 내뱉은 말의 진짜 뜻을 알면서도 선오가 의뭉스럽게 되물었다. 연우가 땀에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왜 인정했어?”
“맞잖아. 우리 열렬하게 연애 중인 거.”
“강선오.”
“이런 게 네가 바라던 ‘책임’ 뭐, 그런 거 아닌가?”
연우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랬을지도 모르지. 몇 년 전엔. 그런데 이젠 너무 늦었거든.”
“너무 늦었으니 이제라도 더 노력해야지.”
연우는 선오의 진심을 도통 알 수 없었다. 그가 왜 제 우스운 억지에 장단을 맞춰 주는 건지, 왜 정말 ‘책임’이라도 질 것처럼 구는 건지.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에겐 전혀 이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저 남은 것은 제 어리석은 미련일 뿐이었다.
“내가 널 찾아간 건……. 난, 난 그냥, 네가…… 나로 인해 괴로웠으면, 내가 성가셨으면, 나를 잊지 않았으면…….”
“너를 잊은 적은 없어.”
참아 낼 새도 없이 뜨거운 눈물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연기할 때를 제외하고서, 선오는 연우를 울게 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내가 분명 말했지. 넌 나를 다시 찾아온 걸 후회하게 될 거라고. 너는 내게 복수를 하고 싶었겠지만, 나는 너에게 다른 걸 내어줄 거야.”
연우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언제쯤 너의 위에서 너를 내려다볼 수 있을까.”
그러자 선오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연우와 눈을 맞췄다.
“연우야.”
그가 다정하게 연우의 이름을 불렀다. 고작 그뿐인데도, 그녀는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그의 손이 땀과 눈물로 축축해진 연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원한다면 나를 밟고 올라서. 나를 원하는 만큼 정복해. 너라면 얼마든지 허락해 줄게.”
감히 강선오를 밟고 올라서고, 정복할 사람. 누구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당연히 연우는 그게 자신이 되리란 건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오의 말에 조금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괜찮아. 뭐가 문제겠어?”
“…….”
“중요한 건 네가 아직도 나를 아주 격렬하게 미워하고 있다는 거지.”
미움과 사랑이란 감정은 어쩌면 사람들의 생각보다 더 가까운 사이인지도 모른다.
선오의 손이 조금씩 은밀한 목 쪽으로 내려갔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듯 다가왔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와의 키스가 싫어서는 아니고, 제게서 땀 냄새가 나는 게 싫었던 것도 같다.
연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오는 그대로 굳어 멀어진 연우를 응시했다. 그러다 연우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씻고 나올래?”
“뭐?”
연우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더워 보여서. 땀도 흘렸고.”
그와 달리 선오는 예사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기억하고 있겠지만, 욕실은 저기.”
선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물론 연우는 욕실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와 사귀는 동안 자주 들락날락했던 곳이었기에.
그때와 별로 변하지 않은 인테리어를 보고 있자니 꼭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싫증을 많이 내는 양반이 왜 집 안 인테리어는 아직도 그대로인지. 돈이 없어서는 아닐 텐데.
“수건은 안에 있어. 좀 크겠지만, 내 옷도 빌려 줄게.”
그대로 있다가는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 것만 같았다. 사람 마음 휘두르는 것쯤은 그 무엇보다 능숙한 양반이었으므로.
아무것도 모르던 몇 년 전처럼 순순히 당할 순 없었다.
“오빠.”
연우가 팔을 뻗어 선오의 손목을 잡았다. 선오의 눈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져 저를 꼭 잡은 연우의 작은 손에 닿았다.
두 사람 사이에 은근한 긴장감이 흘렀다. 연우가 심호흡을 하며 날뛰는 마음을 겨우 잡았다.
“하나만 묻자.”
필사적으로 회피해 왔지만 사실 연우로서는 반드시 직면해야 할 사실이었다. 앞으로의 남은 생을 위해서.
선오와 이대로 헤어지게 되든, 선오와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나가든…… 어쨌든, 그에게서 들어야 할 사실이었다.
배우였기에 발성만은 자신이었지만 그래도 연우는 새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절대 말하는 도중 울먹이거나, 발음이 뭉개지거나, 음성이 갈라지지는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그에게, 못 들은 척도 하지 못하게, 뜻이 전달되도록.
“나 왜 버렸냐?”
이미 연우의 질문이 무엇일 줄 예상이나 하고 있었다는 듯 선오에게선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아무런 징조도, 낌새도 없었잖아. 아니, 전날까지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날 소중히 아껴 줬잖아.”
선오와의 이별을 유독 더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가 있었다.
전날까지 선오는 연우를 특별하게 대했다. 다른 여자와는 달랐다.
연우는 단 한 톨의 의심도 없이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건 절대 연기가 아니었다. 애초에 선오는 솔직한 사람이라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다른 사람과 사귈 땐 그러지 않았잖아. 구태여 끝이 난 인연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잖아. 질리면 질린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이잖아, 오빤.”
“…….”
“그런데 나한텐 왜 그랬어?”
선오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곤 텅 비어 있는 연우의 손을 그러쥐었다. 그리 세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는 힘이었다.
선오는 한숨을 쉬듯 말을 내뱉었다.
“네가 특별했었나 보지.”
“어?”
“다른 사람과는 달랐었나 보지. 네가, 내게.”
솔직히 고백하건대 영원히 그의 손에 갇혀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가 더 세게 잡아, 저를 가둬 놓아도, 좋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