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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식상하게도, 운명(4) (89/95)


외전 4. 식상하게도, 운명(4)
2023.02.03.



‘네가 특별했었나 보지.’

욕실은 뿌연 김으로 가득 찼고, 연우의 머릿속은 선오가 덤덤하게 내뱉은 말로 가득 찼다.


‘다른 사람과는 달랐었나 보지. 네가, 내게.’


“뭐래, 진짜.”

어떻게든 그 말을 떨쳐 내기 위해 연우는 물속에 얼굴을 첨벙 담갔다. 그녀의 입을 따라 뽀글뽀글 공기 방울이 위로 올라갔다가 수면 위에서 허무하게 터졌다.

호흡이 모자랄 정도로 길게 잠수를 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도연우.”

화들짝 놀란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물이 사방에 튀고, 큰 물결이 일었다.

반투명한 유리 너머로 선오의 실루엣이 보였다.


“너 설마 물에 빠져 죽기라도 한 거 아니지?”

난데없는 소란에 선오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연우가 언성을 높였다.


“왜. 나, 나 원래 오래 씻어. 재촉하지 마.”

“재촉하려는 게 아니라 옷 여기 두고 간다고.”

가벼운 의류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우가 뜨끈한 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물장난 적당히 하고 나와라. 감기 든다.”

연우가 선오가 있는 방향을 흘겨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오는 다시 멀어졌다. 피곤한 몸이 더 노곤해지기 전에 연우는 욕조에서 나왔다.

그리고 선오와 똑같은 향의 샴푸와 바디워시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그가 쓰는 향수와 다르게 워시 용품들은 다들 포근하고, 따뜻했다.

금방이라도 감기기 직전인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고서 욕실 문을 아주 살짝 열었다. 그러곤 팔을 뻗어 휘적대자 선오가 두고 간 옷가지들이 잡혔다.


“……이걸 나더러 입으라고?”

이윽고 연우에게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애초에 사이즈가 맞는 옷을 입으리란 기대를 한 적은 없다. 선오의 집에 제 옷이 있을 리 없으니.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연우는 전신거울에 우두커니 서서 제 모습을 응시했다.

자꾸만 자동으로 오프숄더가 되는 턱없이 큰 상의에, 하의는 질질 끌려 이 넓은 집을 청소하기에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연우도 여자치고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으나, 애석하게도 선오가 키가 커도 너무 컸다. 게다가 드라마 촬영을 하느라 가뜩이나 말랐던 그녀는 살이 더 빠졌다.


“바보 같아.”

무엇보다 예쁘지 않잖아.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앉아서 바짓단을 차곡차곡 접고, 소매를 최대한 위로 추켜 올랐다. 딱히 효과는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옷이 이것뿐이야?”

결국 포기한 연우가 거실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던 선오가 그 모습을 보고 나오려던 웃음을 꾹 참았다.

꼭 어른 옷을 입은 아이 같았다.


“사이즈 작은 거 없어?”

“여기가 백화점이냐? 네가 원하는 사이즈 찾게?”

“아니면 전 여친 옷이라도 줘. 여자들이 벗어 두고 간 거 많을 거 아니야.”

선오가 와인잔을 탁 내려놓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시비 걸 거면 벗든가.”

분명 티격태격하고 있었는데, 그 한마디에 기류가 변했다. 얼굴이 붉어져 헛기침을 하던 연우가 성큼성큼 걸어와 선오가 마시고 있던 와인잔을 빼앗아 모조리 들이켰다.

그 사이 선오의 느른한 눈동자가 연우를 담았다. 자꾸만 드러나는 뽀얀 어깨가 선오의 시선을 빼앗아 들었다.


“살 더 빠졌네.”

선오의 말을 못 들은 척 연우가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와인을 닦아 냈다. 그 모습이 참 이상하게도 선정적이었다. 당사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근데 오빠네 아버님 난리 나셨겠네. 상의도 없이 열애설 인정했다고. 뒷수습은 어쩌려고 그래? 강선오답지 않게 무모했네.”

“넌 왜 인정 안 했냐?”

“어?”

“열애설.”

그제야 연우는 선오의 시선이 지나치게 뜨겁다는 걸 알아차렸다. 연우는 머리카락을 둘둘 만 수건 끝을 만지작댔다.


“내가 여기서 부정하면, 오빠 꼴 엄청 우스워지는 건가?”

선오가 전혀 즐겁지 않은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와인잔에 새로운 와인을 따랐다. 새빨간 와인이 아슬아슬한 그들의 관계처럼 일렁였다.


“와, 내가 나를 정복해도 좋다는 말까지 했는데, 넌 아직도 나를 엿 먹일 작정인 거지? 근성 인정한다.”

“강선오에게 당한 피해자 대표로서 그 정도 사명감은 있어야지.”

“네. 네 마음대로 하세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현관문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자, 딱 한 명뿐이었다. 요즘 들어 얄미운 짓만 골라 하는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


“근데 주인도 없는 집에 마음대로 들어와도 되니?”

“주차장에 형 차 있던데요? 야, 강선오. 형!”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수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선오도 살짝 당황했지만 가장 당황한 것은 연우였다. 지금 옷차림하며, 젖어 있는 머리카락 하며,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엄마 걱정하시잖아.”

집이 넓은 탓에 그들이 가까워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연우는 숨을까, 말까 계속 고민했다. 하지만 우물쭈물하는 사이 어느새 준오의 얼굴이 뿅 나타났다.


“오늘 일로 아버지한테…… 깜짝이야.”

“어머나.”

선오를 먹이겠다고 양손에 먹을 걸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준오는 예상치 못한 연우의 존재에 흠칫했다. 지수 또한 마치 보면 안 될 것을 봤다는 듯 급히 등을 돌렸다.


“우리가 뭘 방해한 건가?”

준오의 말에 연우는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뭔가 엄청난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얼른 선오가 무어라 해명이라도 해 주길 바랐다.


“알면 얼른 나가 줄래?”

그러나 우리 대단하신 강선오께서 그런 일을 해 줄 리가 없지. 도리어 뻔뻔하게 구는 선오의 입을 손으로 막은 연우가 황급하게 지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전 오빠의, 그러니까 오빠와…….”

정확히 선오와 어떤 관계인지 정의를 내려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었다.


“아무튼 도연우라고 합니다. 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어요.”

선오가 친모와 재회했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있었다. 또, 언젠가 그의 친모와 마주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민낯에, 아무렇게나 돌돌 말아 올린 바지에, 단정되지 않는 머리까지.

적어도 이것보단 더 완벽한 모습으로 뵙고 싶었다.


“제가 운동을 해서 땀을 좀 흘려서 오빠 집에서 샤워만…… 아, 그러니까 운동이 그런 운동이 아니라…….”

“반가워요.”

말을 하면 할수록 망해 감을 직감하고 있는데, 예상외로 지수가 연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연우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서령만큼 깐깐한 인상의 사모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약간 걱정은 됐었다.

어렵게 만난 아들이니, 아들이 만나는 여자에게 엄격할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지수는 무척 상냥했다. 선오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오늘 우리 선오랑 기사 난 분이죠?”

“……네.”

“아이고, 실물이 더 예쁘네. 나 아가씨가 나오는 드라마 다 봤어요. 팬이에요.”

“감사합니다.”

연우는 부끄러우면서도 벅차올라서 대답을 길게 이어나가지 못했다. 웬만한 인터뷰도 다 마스터한 그녀인데, 지수 앞에선 한없이 수줍어졌다.

이러니까 꼭, 우리 진짜 사귀는 거 같잖아.


“우리 선오가 좋아할 만하네.”

어머니한테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어색하게 웃던 연우는 준오와도 문득 눈이 마주쳤다. 선오와 닮았지만, 선오보다 둥근 인상이었다.

언젠가 멀리서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는 처음이었다.

고개를 숙이자, 준오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이러지 말고 우리 밥 같이 먹자.”

“네? 아니에요. 전 이만 가 볼게요. 가족끼리 편히 드세요.”

“내가 손이 좀 커요. 음식이 남을 것 같아. 식사 전이면 같이해요. 가기 전에 사인도 해 주고 가고.”

“아니, 정말로…….”

“아. 옷 불편하지 않아요? 안 그래도 오늘 선오네 집에서 자고 가려고 옷 챙겨온 거 있는데 빌려 줄까요?”

……그런 거라면 거절할 수 없지.

연우는 냉큼 손을 모았다.


“부탁드립니다.”

지수가 연우와 함께 사라지고 거실엔 형제만이 남았다.

사뭇 심각해진 준오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준오의 눈앞에 큰아버지인 강문영 사장이 스쳐 지나갔다.

몇 년 전, 그 더러운 욕망이 연우에게 닿았을 때, 선오는 거의 이성을 잃을 뻔했다. 그건 준오에게도 꽤 불쾌한 경험이었다.

아마 오늘 기사를 보고 문영 또한 이 사실을 알았으리라.


“이번에도 지난번과 똑같은 대처를 하진 않겠지?”

준오가 선오에게 결연하게 물었다.


“이번엔 큰아버지와 정면으로 맞설 생각으로 일 저지른 거지?”

“큰아버지는 개뿔. 짐승 같은 X끼한텐 그런 호칭도 과분해.”

한 번 시작된 반란은 거침없이 그 범위를 넓혀 나갔다.

선오 또한 서서히 오래 묵은 썩은 전통에 반기를 들고 있었다. 그 당시엔 연우를 떠나는 것만이 그녀를 지킬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힘은 완전히 다음 세대로 넘어갔다.

즉,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강화 가(家)에도.


“태오 형한테 전화 왔더라. 별 얘기는 안 하는데, 그 시시한 통화가 꼭 우리 편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더라. 그리고 형수님도 너무 축하한대.”

“아이고, 황송해라. 그런데 너, 강태오 프락치냐?”

“아니. 형수님 프락치.”

“연애를 하세요. 엄마나 형수님 뒤 졸졸 따라다니지 말고.”

“형 먼저 시작하면 전 알아서 할게요.”

“이게 요즘 따라 왜 이렇게 말대꾸를 하지?”

형제가 옥신각신하는 동안 연우는 한층 더 편해진 의상으로 나타났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옷이 계속 훌러덩 내려가서 부끄러운 일은 없으니 훨씬 나았다.


“자, 그럼 밥 먹자. 준오는 국 데우고, 선오는 숟가락 좀 놓을래?”

“네.”

준오는 고분고분 대답하며 귀찮아하는 형을 일으켜 세웠다. 곧 세 사람은 익숙한 듯 업무를 분담했다.

혼자서 가만히 있으려니 안절부절못하던 연우가 지수에게로 갔다.


“저도 같이 할게요.”

“괜찮아요. 손님은 앉아 있어요. 우리 아드님들 일 잘하니까.”

지수는 만류하며 연우를 자리에 앉았다. 어쩔 수 없이 연우는 멀뚱히 앉아 식사가 완성되는 동안 기다렸다.

그러다 연우가 픽 웃었다.


“왜 웃어?”

수저를 놓던 선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살다 살다 강선오가 수저 놓는 걸 다 보니 신기해서.”

“어머. 우리 선오, 수저 잘 놔요. 빨래도 잘 개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수가 아들을 어필했다. 연우를 놓치면 선오는 평생 방탕하게 살 거란 준오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럼 두 사람은, 정말 사귀는 거죠?”

지수의 물음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선오가 선수를 쳤다.


“엄마 아들이 차일 것 같아요.”

“어머나. 그래?”

폭탄선언에 놀란 연우가 눈이 동그래졌다. 저 주둥이를 꿰맬 수만 있다면, 기꺼이 전 재산이라도 바치겠어.


“얘도 나 좋아하고, 나도 얘 좋아하는데, 끝까지 나랑 사귄다는 말은 안 하네요.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선오를 몰래 툭 치자 선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억울하면 반박을 해 보라는 듯.


“전에 내가 좀 못되게 굴었더니 복수만 하고 떠나려나 봐요.”

“세상에나.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예나 지금이나 강선오는 참, 영악하다.

사람이 참 안 변해. 응. 정말 한결같아.


“다 제 업보라면 달게 받아야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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