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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식상하게도, 운명(5) (90/95)


외전 5. 식상하게도, 운명(5)
2023.02.06.



 


“강준영 회장. 그놈, 망령이 든 게 분명해.”

강화 건설 강문영 사장이 담뱃불을 거칠게 지지며 욕지거리를 내뱉어냈다. 그의 아들인 강화 건설 강민오 전무는 최대한 흉포한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젊은 시절엔 그래도 총명한 놈이었는데, 쯧. 부모님이 지금 모습을 봤어도 그놈에게 회사를 물려줬을는지.”

강준영 회장은 연일 파격 행보 중이었다.

선오와 준오의 생모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얼마 전 크게 화제가 되었던 선오의 스캔들에 대해서도 일언반구도 없었다. 다 큰 자식들의 연애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여태껏 전례가 없는 대처였기에 반응도 엇갈렸다. 물어볼 것도 없이 보수적인 기득권층에게선 염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놈은 나보다 능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었어. 그저 나보다 조금 더 권모술수가 뛰어났을 뿐이야.”

민오가 중년이 되어서도 극복하지 못한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열등감을 보며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권모술수 또한 능력이다.

그런 데다 준영은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계략가였으니, 문영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이길 수 있을 리가.


“어릴 적부터 아버지 눈에 드는 법을 알았지. 강자한테 붙는 법 말이야.”

“…….”

“이제 그 상대가 아들놈에게 넘어갔을 뿐인 거지. 이빨 빠진 호랑이 처지가 되니,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새끼 호랑이들에게 아양 떠는 거라고.”

“…….”

문영이 열변을 토해도 민오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더욱 심기가 불편해진 문영이 이번엔 아들을 다그쳤다.


“넌 태오는 둘째치고, 어째 그 천박한 서자 X끼들도 못 이겨 먹는 거냐?”

애꿎은 불똥이 튀는 것은 민오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내가 너한테 들인 돈과 노력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그런데 그 서자 X끼들은 너의 반의반도 배우지 못했건만, 더 큰 사업체를 맡고 있어. 주주들도 너보다 강선오 그 자식을 더 언급한다고. 부끄럽지도 않냐?”

민오는 태오와 맞먹는 호화로운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둘의 미래는 현저히 달랐다.


“내가 죽으면 누가 널 기억이나 하겠어? 어쩌다 너처럼 못난 놈이 내 아들이 됐냐? 다 네 엄마 잘못이지. 너 같은 놈을 낳아서.”

분명 익숙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민오도 내부에서 부글부글 끓는 무언가를 참아 낼 수 없었다.


“나도 서자나 들여서…….”

“설령 강태오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해도.”

평소엔 가만히 듣기만 하던 민오가 반박하는 뉘앙스로 말을 끊자 문영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아버지 아래서 자란다면 똑같을걸요?”

“뭐?”

“누구든 아버지 아래서 자라면 강태오가 아닌 강민오가 될 수밖에 없다고요.”

“너, 이 X끼, 어디서…….”

문영이 익숙하게 재떨이를 높이 들었다. 지긋지긋한 상황에 민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을 때쯤, 문이 활짝 열렸다.


“제가 좋지 못한 때에 찾아왔나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선오였다. 문영이 재떨이를 바닥에 던지고서 따지듯 물었다.


“넌 노크도 모르냐?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냐?”

“아시다시피 가정교육은 많이 못 받았습니다.”

웃으며 모진 말을 받아친 선오가 능청스럽게 이미 활짝 열린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강문영 사장님.”

“네가 강화 건설엔 무슨 일이지?”

선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매혹적인 연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우 측에서는 열애 사실을 인정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고 단정 지었다.

그렇다고 딱히 부정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 너 자랑이라도 하러 온 거냐? 그 보잘것없는 계집애랑 다시 만난다고?”

문영이 지저분한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에게서 비열한 웃음은 뱀과 닮아 있었다.

언젠가 문영의 지저분한 눈에 연우가 들어왔던 적이 있었다. 문영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탐했다.


“걔 여전히 예쁘더라. 하긴 얼굴로 먹고사는 애잖냐.”

게다가 눈엣가시이던 선오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라는 걸 알았을 때, 문영의 탐욕은 극에 달했다.

단순히 태오를 견제하기 위한 용도로 들인 서자가 생각보다 너무 많은 걸 손에 쥐게 되었으니까. 선오가 무너지고 나면 선오의 몫은 자신의 아들인 민오의 것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영은 악랄한 손을 연우에게 뻗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우는 선오와의 달콤한 연애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몸매도 그대로냐? 아쉽네. 너만 아니었으면 나도 그 계집과 놀아날 수 있었는데.”

문영의 손끝이 닿기 직전 선오는 온몸을 바쳐 연우를 지켜 냈다.

그 당시 문영은 지금의 문영과 사뭇 달랐다. 태오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 문영은 선오와 비교되지 않을 힘을 지니고 있었다.

선오는 자신과 준오를 벌레 취급하는 문영에게 무릎을 꿇었다. 문영의 말과 시선이 날카로운 못처럼 선오에게 박혔다.

그때 선오는 생각했다. 두 번 다시 진정한 사랑은 할 수 없을 거라고.

그리고 제 손으로 연우를 놓아야 했다. 저와 연관되어 있으면 연우가 문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최대한 저를 미워하고, 증오한 채 헤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했다. 강화 가(家)라면 치가 떨리도록 싫어지게 만들어 주어야 했다.

그래서 준오는 그 전날 사랑을 고백하고, 다음날 연우의 옆에 돈 뭉치를 두고 사라졌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저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표정 한 번 찌푸리지 못했다. 그 어떤 표현도 허락되지 않았다.

진심으로 웃는 법을 잊어버렸다.


“너 그런데 걔 진짜 좋아했나 봐? 천하의 난봉꾼인 줄 알았더니.”

그 후 선오는 무수히 많은 여자와 짧은 교제와 이별을 반복했다. 문영의 기억에서 연우란 존재를 지우기 위해.


“네가 이러니까 다시 탐이 나잖아?”

문영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킬킬 웃었다. 민오조차 그런 아버지를 혐오스러운 듯 응시했다.


“안 그래도 요즘 좀 심심했는데…….”

“강문영 사장님.”

예전처럼 처참히 무너질 줄 알았더니, 선오는 단단해진 목소리로 문영의 말을 끊어 냈다.

딱딱한 부름에 문영이 입을 다물었다.


“우선, 제가 몹시 바쁜 사람이란 걸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제 연애 사실을 역겨운 큰아버지께 자랑하러 찾아올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뭐? 역겨운? 너 돌았어, 인마?”

선오가 대답 대신 손짓했다. 그러자 문밖에 서 있던 남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뭐, 뭐야?”

“강화 그룹 내부 감사팀입니다.”

남자들은 빈 상자에 문영의 자료와 컴퓨터를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강 사장님이 회삿돈을 수십 년간 횡령해 왔다는 내부고발이 들어왔습니다. 수사 기관에서 들이닥치기 전, 자체 감사를 진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사실 문영에 대한 내부고발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강 회장의 형이란 자리를 이용해 교묘하게 피해 왔다.

그런 그에게 직접적인 감사가 들어왔다는 것은 현재 그의 위치를 방증하는 꼴이었다.


“강 회장한테 전화해, 당장! 이것들이 정신이 나가서…….”

선오는 재킷 주머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애석하지만 이 일은 강준영 회장님이 직접 지시하신 건입니다. 물론 강화 호텔 강태오 부사장의 서명도 받았고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문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오가 문득 민오를 쳐다보았다. 민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얼른 도망가라고. 이 못난 아버지를 버리고 가라고.

민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아들에게마저 버림받은 문영의 허망한 표정이 우스웠다.

아니, 우습지 않았다.


“이 특별 감사팀의 책임자는 접니다.”

“강선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몹시 바쁜 몸이지만, 큰아버지 추락하는 꼴은 직접 봐야죠.”

선오가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문영에게만 들리게끔 귓가에 속삭였다.


“강문영 씨. 이번엔 당신 차례입니다. 가장 소중한 걸 잃었을 때 어떤 기분인지 느껴 봐요. 아, 교도소 가신 김에 회개도 하시고. 그러다가 진짜로 지옥 갑니다.”

“이 개X끼야!”

선오는 문영의 욕설을 무시하고서 감사 팀원들에게 말했다.


“전부 담으세요. 작은 낙서조차 빠뜨리지 말고.”

그러다 집무실 밖에 서 있는 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사실 태오는 처음부터 선오와 함께였지만 나서지 않았다.

오롯이 선오가 홀로 문영과의 과거를 매듭짓길 바라서였다.


“더러운 얘기 듣느라 토하는 줄 알았네.”

태오가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며 건조하게 말했다.


“오랫동안 힘들게 일하셨으니 쉬다 오세요, 큰아버지.”

 

* * *

이틀 밤을 꼬박 새우는 촬영을 하고 막 잠이 든 참이었다.

그랬기에 당연히 새벽 2시에 현관문을 두드린 방문자가, 연우는 그리 썩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방문자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신 상태였다.


“내가 깨웠냐?”

“그럼 재웠겠냐?”

연우가 짜증스럽게 머리로 올렸던 안대를 완전히 벗어 냈다. 선오는 비틀비틀 걸어가 소파에 널브러졌다.


“너 근데 그때, 나랑 헤어지자마자 이사 갔더라?”

“당연하지. 버림받은 곳에서 계속 살고 싶겠어? 오빠가 두고 간 돈으로 바로 비싼 아파트로 이사 갔다.”

방도, 침대도, 거실도, 모두 선오와 함께한 추억이 가득했다. 선오를 떠올리자마자 눈물이 났기에 집은 더 이상 편안한 휴식처가 아니었다.

그래서 연우는 선오가 저를 버렸듯, 저도 그 집을 버렸다.


“내가 그렇게 돈을 많이 줬었나? 비싼 아파트로 이사 갈 만큼.”

“그래도 한참 남던데?”

그런데 왜 이딴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자는 사람 다 깨워 놓고.


“정말 많이 줬었네. 그럼 그거 다시 돌려줄래?”

“……뭐?”

연우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선오는 빈말이 아니라는 듯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장난해, 지금?”

“너 돈 많잖아. 돌려줘.”

“오빠는 돈이 없어서 돌려달라는 거야?”

“아니. 많지. 지랄 맞게 많지.”

“오빠 지금 되게 찌질해. 꼭 헤어진 여친한테 그동안 준 선물 다 돌려달라는 남자 같아.”

돈을 달라면야 못 줄 것도 없지만 이해되지 않는 선오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선오는 찌질한 남자가 되어야 할 만큼 돈이 궁하지 않은 처지였다.


“그때 선물 받은 명품 백도 다시 돌려줘?”

“연우야.”

“아, 천만 원짜리 팔찌도 다시 돌려줘?”

“그 돈 다시 돌려받으면, 없던 일로 할 수 있을까?”

“…….”

예상하지 못한 말에 연우는 비아냥대는 것을 멈췄다. 연우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서 선오를 응시했다.

선오는 깊은 눈으로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헤어졌던 순간을 통째로 덜어 내고, 지금과 연결할 수 있을까?”

“아니.”

연우가 눈물이 고인 채 단호하게 말했다.


“새로운 과학 이론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하지. 오빠가 내 침대에 돈을 던져 주고 사라졌던 그 기억은 절대 없던 일로 만들진 못하지. 왜, 후회하니? 잘못한 건 아나 봐?”

“후회는, 그 돈을 내려놓으면서 하기 시작했어.”

“후회하면서 왜 그랬어?”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건 마치 슬픈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았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개소리하지 마.”

“연우야.”

“그날 내 세상은 무너졌어. 나는 오빠가 두고 간 돈더미에 깔려 죽었고, 지금은 그저 텅 빈 육체를 가지고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없던 일로 만들진 못해.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아.”

선오가 애틋하게 연우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연우는 그의 손을 내쳤다.


“그런데,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고?”

그대로 침실로 돌아가려던 연우는 문득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렇게 선오가 미우면서도, 마지막 선오의 외로운 표정을 보자 선뜻 그에게서 돌아설 수 없었다.

너무 싫었던 건 미련한 나였을까. 미련이 남은 나였을까.

그가 그랬듯 매정하게 버려야 하는데.

나는 왜 항상 이 남자 앞에서 이렇게 바보처럼 굴지.

눈을 감자 얼굴을 흠뻑 적실 눈물방울들이 연달아 떨어졌다. 연우는 뒤로 돌아 선오에게 소리쳤다.


“네가 계속 날 당기면 난 바보처럼 또 끌려갈 수밖에 없겠지만, 그때 일을 아예 없었던 셈 칠 수 없어.”

“…….”

“아직도 너를 사랑하니까. 너를 사랑하는 만큼 그 당시의 네가 정말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우니까.”

선오가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양쪽 팔을 폈다.


“이리 와.”

그러자 연우가 말했다.


 


“네가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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