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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7. 피어난 꽃송이 (92/95)


외전 7. 피어난 꽃송이
2023.02.13.



 
강준영 회장이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사임했다. 죽기 직전, 산소호흡기를 달고서도 ‘명예회장직’이라도 쥐고 있었던 선대 회장과는 비교되는 행보였다.

고작 50대에 불과한 그는, 권력이 최고 절정에 이른 순간 결단을 내린 것이다.

물론 그의 심복들은 몇 번이고 그를 만류했다. 실무에서 물러나더라도 자리는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필요할 때 힘을 쓸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강준영 회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첫 번째, 반란의 파도를 일으킨 가장 윗세대로서 젊은 경영자들이 제 눈치를 보지 않고 혁신적인 의견을 낼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 주고 싶다고 했다.

두 번째, 태어난 순간부터 숨 막히도록 달려온 걸음을 멈추고 이제는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강준영 회장’은 아무것도 아닌 그저 ‘강준영’이 되었다.


“오늘도 종일 집에만 있을 거예요?”

바쁘게 나갈 채비를 하던 서령이 일주일째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준영을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준영이 이토록 오랜 시간 집에 머무른 적이 없었다.

늘 정돈되어 있던 머리는 아무렇게나 내려왔고, 거뭇거뭇한 수염은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머리도 좀 다듬고, 면도도 하지 그래요?”

“갈 데도 없는데, 뭐.”

준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서령만 복장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우습게도 커피를 마시며, 리모컨을 만지작대는 그가 진짜로 평범한 중년 남자처럼 보였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강화 그룹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이끌던 리더로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당신은 매일 바쁘네.”

텔레비전에 온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하면서도 준영은 서령의 동태를 모두 살피고 있었다.


“오늘 미술관 행사가 있어요.”

“늦나?”

새삼스러운 질문에 서령이 눈썹을 찡긋했다.


“그런 걸 왜 묻죠?”

“같이 사는 부부끼리 원래 묻는 거 아닌가? 당신이 나한테 면도 좀 하라고 잔소리한 것처럼.”

“잔소리? 내가 잔소리를 했다고요?”

서령이 헛웃음을 지었다.


“잔소리도 애정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난 그저 당신의 지저분한 모습이 거슬릴 뿐이에요. 아무리 보지 않으려 해도 같은 집에 사니까…….”

“그러니까.”

“네?”

“그게 잔소리잖아. 당신 말대로 애정이 있어야 하는 잔소리.”

“…….”

정곡을 찔린 듯 서령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 강준영은 강준영이다. 아무리 한심하게 널브러져 있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마음만 먹으면 저렇게 바늘 같은 통찰력으로 상대를 찌르고 마니까.


“늦으면 내가 데리러 가고.”

“왜 이래요? 그냥 살던 대로 살아요.”

“진서령 씨.”

그제야 준영이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 서령을 바라보았다. 그의 깊은 눈을 보며 생각했다. 이따금 저 짜증 나도록 잘생긴 얼굴이 원망스럽다고. 이런 순간마저 감탄이 나오는 이목구비를 증오한다고.

저 반반한 얼굴에 홀리지 않았더라면, 서령의 지옥 같은 생활은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나랑 결혼한 걸 후회하나?”

“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나왔다.


“그날 교통사고가 났어야 했어요. 아니면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도록 아프거나.”

아나운서만큼이나 뛰어난 발음이 모진 말을 내뱉었다. 준영이 덤덤한 얼굴로 대꾸했다.


“나도 후회해.”

“뭐라고요?”

“우리의 결혼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방법이라 생각했던 그 무수히 많은 결정들을.”

“…….”

“내 옆에서 버티느라 서서히 변해 가는 당신을 보는 게 참 괴로웠거든.”

왜 우리는 오십이 넘어서야 이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까.


“그래도 여전히 예뻐, 당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빈말도 그런 빈말이 없다고 서령은 생각했다. 어떻게 20대의 자신과 50대의 자신이 똑같이 예쁠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쓸데없는 대화를 너무 길게 했군요. 늦기 전에 이만 출발할게요.”

서령은 그대로 뒤로 돌아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다섯 걸음도 채 걷기 전에 그녀의 걸음은 다시 멈췄다.

왜인지 충동적인 말을 내뱉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은 한 적 있어요. 차라리 당신이 노지수 씨를 정말 사랑했으면 덜 비참했겠다는 생각. 차라리 바람이 난 것이었다면 덜 힘들었겠다는 생각.”

그랬다면 나는 조금 더 빨리 당신을 놓고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을 테니까.

지금까지 이 너덜너덜한 관계를 이어오진 않았을 테니까.


“당신이 노지수 씨를 사랑하지 않아, 내 인생은 더 꼬였어요.”

서령의 볼을 타고 눈물이 조용히 흘렀다. 등을 보이고 선 탓에 준영은 보지 못했겠지만. 준영은 그 가녀린 등에 대고 말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어.”

“…….”

“내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서령은 준영이 무어라 떠들든 집을 빠져나왔다.

따스한 햇볕이 쏟아졌다. 서령은 꽤 오랜만에 눈이 부신 태양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따끔하고 잔상이 남았다. 눈이 시큰했다.

* * *



“사모님, 수고하셨어요.”

“다들 도와주신 덕분이죠.”

옷도 불편하고, 구두도 불편한 탓에 서령은 당장이라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능숙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감정과 상관없이 우아한 미소를 짓는 일, 서령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귀걸이 스타일이 바뀌셨네요.”

“아……. 취향이 변하려나. 요즘은 이런 게 좋더라.”

서령이 머쓱하게 귀를 만지작댔다. 이전처럼 손에 쉽게 잡히는 커다란 귀걸이가 아닌 수수한 진주 귀걸이였다.


“사모님이 뭔들 안 어울리겠어요.”

“고마워요.”

“아, 뒷정리는 이만하시고 얼른 가 보세요. 회장님 오래 기다리신 것 같던데.”

“네?”

“어머, 모르셨어요? 한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계세요.”

서령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쭉 빼 준영을 찾았다.


“사임하시더니 금슬이 더 좋아지셨나 봐요. 부러워라. 우리 바깥양반은 언제쯤 본받을까.”

키가 큰 중년 남자가 바로 눈에 보였다. 집에서 보던 초췌한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멀끔한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서령의 말대로 머리도 자르고, 면도도 하고 온 모양이다.


“하긴 저렇게 잘생기셨으니 저라도 아직 설레겠어요.”

준영이 서령을 보며 웃었다. 서령은 그런 남편을 빤히 응시했다.


“어서 가 보세요.”

그러다 등을 떠밀려 준영에게로 걸어갔다.

정면으로 바라보니 따끔하고 잔상이 남았다. 눈이 시큰했다.


“수고했어.”

홀린 듯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준영이 포근하게 말했다. 그러곤 뒤에 숨기고 있던 커다란 꽃다발을 꺼냈다.

첫 만남 때와 비슷한 모양의 꽃다발이었다. 서령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자 주위에서 부러움에 가득 찬 환호성이 들려왔다.


 


“오는 길에 당신과 닮았길래 샀어.”

불현듯 20대의 준영이 보였다.


‘별거 아니지만 받아주시겠습니까?’

그제야 서령은 준영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20대의 모습과 50대의 모습이 똑같이 찬란할 수 있다는 것을.

서령이 보고 있는 준영이 그러했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그는 청년 모습 그대로 찬란했다.


“별거 아니지만.”

서령의 숨이 가쁘게 변하더니 이윽고 그녀의 눈이 붉게 변했다. 하지만 그녀답게 기어코 남들 앞에선 눈물을 참아냈다.

대신 준영이 내민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작은 봄을 담아온 듯 향긋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오전에 말하려다 못 했는데, 귀걸이 바꾼 거 잘 어울려.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서 화려한 귀걸이가 오히려 빛을 잃거든.”

준영은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그 무겁고 화려한 귀걸이를 만지작대며,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해야 할 일은 만들지 않겠노라고.

서령은 꽃다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얼굴이 미세하게 붉어졌다.

그 광경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강화 가(家)에도 봄은 오는 모양이다.

* * *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정원을 가로지르던 중 준영이 말했다.


“백세시대에서 50대라면 고작 절반을 산 것뿐이잖아. 그러니 이제라도 바로잡고자 노력한다면 너무 늦지 않은 게 아닐까.”

“…….”

“지난 절반은 불행했지만, 남은 절반은 행복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썩 실패한 결혼은 아니지 않을까.”

서령의 대답 대신 꽃다발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이젠 자식도, 집안사람들도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둘만…….”

딱 거기까지 말했을 때, 서령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어른 두 명과 어린아이 한 명의 눈이었다.

화들짝 놀란 서령이 감상에 젖은 얼굴을 지워 내고 황급히 꽃다발을 뒤로 감췄다.

그제야 준영도 아들 부부를 발견했다. 태오는 못 볼 것이라도 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소유는 감동한 듯 작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이호는 그저 방긋 웃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

머쓱해진 준영이 물었다.


“한참 전부터요.”

태오가 떫은 표정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소유가 하도 걱정하길래 와 봤는데, 잘사시네요. 이제 보니 아주 로맨티시스트셨어.”

저놈, 지금 비꼬고 있다. 분명 놀리고 있다.


“그런데 아들로서 부모님의 애정행각을 너무 자세히 보고 싶진 않았는데.”

소유가 그만하라는 듯 태오를 툭 쳤다. 하지만 간만에 건수를 잡은 태오는 마음껏 놀려 댔다.

이제 정말 철없는 자식이 되어 어리광이라도 부리기로 작정했나 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와의 결혼 생활을 위해서 사임하신 거 아닙니까?”

“너, 이놈. 다 큰 놈이 부모님 집에 오는데 연락도 없이…….”

“정확히 세 번 전화드리고 왔습니다.”

……그랬나.

할 말이 없어진 준영이 쩔쩔매고 있는 사이 서령은 티격태격하는 부자 사이를 통과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소유도 이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아버님 정말 멋있으세요, 어머니. 저 진심으로 감동받았어요.”

“얘, 너까지 그러지 말렴. 낯 뜨거워 죽겠네. 저 양반 주책 때문에.”

이호가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꽃다발의 꽃을 쥐려고 했다. 행여나 꽃다발이 망가질까 봐 소유가 이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무 늦었지만, 어머니도 이제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어머니 덕분에 행복해졌던 만큼.”

이렇게 예쁜 말만 골라 하는 며느리를 어떻게 예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맙다.”

“이호도 그러길 바랄 거예요. 그렇지, 이호야?”

아무것도 모르는 이호는 “부우우.” 거리며 할머니한테 안기고 싶어 했다. 서령은 아기 냄새가 잔뜩 나는 이호를 안아 들고 등을 토닥였다.

20대의 서령은 남편의 사랑만을 받을 수 있다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50대의 서령에겐 남편의 사랑뿐 아니라 아들 부부의 웃음, 어린 손자의 건강도 행복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니 나이가 드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행복할 구실이 더 많아지는 것이니까.


“참, 저 직접 만났어요. 첫째 도련님이랑 교제하시는 분이요.”

“어머, 그래? 어땠어?”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내심 궁금했는지 서령이 물었다.


“살짝 센 분이긴 한데, 좋으신 분 같아요. 그리고 실물이 훨씬 예쁜 거 있죠.”

“선오 그놈은 자기를 휘어잡을 수 있는 여자를 만나야 해.”

“어머니도 다음에 같이 보실래요?”

“됐다. 잘 만나고 있으면 됐지, 뭐.”

말라비틀어졌던 꽃송이도 봄이 오면 으레 다시 피어나기 마련이다.


“노지수 씨는 잘 지내고?”

“네. 안 그래도 어머니 안부 물으시더라고요. 늘 감사하고, 건강하시길 바란다고 하셨어요.”

파란만장한 서령의 꽃송이도 인생의 2막에서 찾아온 새로운 봄과 함께 피어나고 있었다.

이번 꽃은 이전보다 더 늦게 시들기를 바라 본다.


“다들 혹독한 계절을 무사히 지나왔으니, 다행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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