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 아빠는 딸 바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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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8. 아빠는 딸 바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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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8. 아빠는 딸 바보(1)
2023.02.17.
딸 바보 아빠의 하루는 몹시 바쁘다.
“지호야. 괜찮아? 아빠가 대신해 줄까?”
딸의 작은 호흡에도, 사소한 투정에도, 미미한 떨림에도 빛의 속도로 반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랬다. 겨우 포크로 작은 사과를 콕 찍는 것뿐인데도, 태오는 도와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유와 이호 모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고작 한 살 차이 나는 이호는 스스로 식사도 하고, 먹은 식기를 싱크대에 담글 줄도 아는데, 지호는 아직도 갓난아기 취급을 받고 있으니.
“시러. 내가 할 거야.”
아주 다행인 건 지호가 자기 주관이 아주 또렷한 아이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태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딸기도 먹어 볼래? 엄청 다네.”
결국 참다못한 소유가 나섰다.
“지호 이제 혼자 먹을 수 있지? 다 컸지?”
“웅.”
“봤죠, 지호 아버님? 어서 식사나 하세요. 그러다 지각하겠어요.”
소유가 아이들 몰래 매서운 눈빛을 쏘아 댔다. 태오가 어찌나 딸을 애지중지하던지, 이러다가 지호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다.
태오는 시무룩하게 식사를 이어나갔다.
“잘 먹었습니다.”
그사이 점잖게 식사를 끝낸 이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품에 폭 안기고도 남던 이호는 어느새 멋진 유치원복을 입은 어린이가 되었다.
“우리 아들, 많이 먹었어?”
소유가 남편에게 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배불러.”
“착하다. 그릇 싱크대에 두고, 가방 가져오세요.”
어릴 땐 픽하면 울어 대더니 이제는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점점 태오와 닮아 가는 것이다. 참, 극단적인 우리 아들.
“지호는 꼭꼭 씹어 넘기고. 체하지 않게.”
소유가 이번엔 딸을 챙겼다. 그러자 지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천히 사과를 씹기 시작했다.
귀여워. 태오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딸의 모습을 단 한 순간도 놓칠 수 없다는 찰칵 대기 시작했다. 못 말리는 태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니 유치원 가방을 든 이호가 돌아왔다.
“준비물 다 챙겼지? 엄마한테 알림장 다 보여 준 거 맞지?”
“응. 맞아.”
아들과 눈높이를 맞춘 소유는 어제저녁에 챙긴 준비물들을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태오를 닮아 가방도 깔끔하게 정리할 줄 아는 이호였다.
이호는 작년부터 동네에 있는 사립 유치원에 다니는 중이었다. 선생님이나 다른 학부모나 다들 이호가 무척 영특하고 예의 바르다며 입 모아 칭찬했다.
그래서 어찌나 고마운지. 처음 태어났을 때만 해도 건강하게 자라 주기만 한다면 소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 그럼 얼른 내려가자. 버스 곧 오겠다.”
그러자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태오가 볼에 묻은 빵가루를 탈탈 털어 내더니 볼을 내밀었다.
“아빠한테 뽀뽀는 해 주고 가야지.”
이호가 익숙한 듯 아빠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추고 돌아왔다. 소유는 아들의 작은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섰다.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라 이호가 뛰어놀기 딱 좋았다.
“오늘 신나게 놀다 와. 대신 다치진 말고. 이호 다치면 엄마 속상해.”
“응. 친구들이랑 싸우지도 말고.”
매일 들어 이제는 외울 지경인 엄마의 말을 대신 읊는 이호였다. 소유가 밝게 웃으며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누구 아들이길래 이렇게 똑똑해?”
“엄마, 아빠의 아들.”
“맞아. 우리 이호는 엄마, 아빠의 하나뿐인 아들이지?”
문득 동그란 머리를 보고 있자니 소유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내심 서운하진 않았을지. 동생을 무척 예뻐하는 아빠를 보며 내심 서럽진 않았을지.
오롯이 자신의 몫이던 부모의 사랑이 반으로 줄어든 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아빠는 지호보다 이호를 덜 사랑하는 게 아니야.”
“알아.”
“응? 알아?”
의외의 대답에 소유가 당황하여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응. 알아. 방법이 다른 것뿐이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엄마를 안심시켜 주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지호는 엄마를 닮았어.”
만약 정말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걸 벌써부터 알고 있다면 이호는 선생님 말 대로 영특한 아이다.
“아빠는 지호를 엄마처럼 대할 수밖에 없는 거야.”
뭉클해진 소유가 코를 찡긋했다.
“그럼 엄마는 아들 바보 할까? 이호는 아빠를 닮았거든.”
“아니. 괜찮아. 지호는 아기잖아.”
그러다 픽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호와 지호는 연년생 남매였다. 엄마 눈엔 이호나 지호나 똑같이 느껴졌다.
“이호는 뭔데?”
“이호는 오빠.”
소유는 참지 못하고 통통한 아들 볼에 입을 맞췄다.
“오빠는 의젓해야 하는 거야.”
“그래도 엄마는 이호를 지금보다 더 더 사랑해 줄래. 그러고 싶어.”
의젓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눌려 아이가 외로워지는 건 정말 싫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이호의 까만 머리카락을 제대로 정리해 주고 있을 때쯤, 저 멀리서 노란 유치원 버스가 도착했다.
“이호 안녕.”
“안녕하세요.”
이호가 양손을 배에 올리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흐뭇하게 보던 소유도 아이를 따라 유치원 선생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뭘요. 이호는 혼자서도 너무 잘하는 아이라서 든든해요. 저도 이런 아들 낳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신혼 생활 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이제는 일상이 된 평범한 아침이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삶 속에서, 부부는 어느새 좋은 부모가 되어 가고 있었다.
* * *
“이호야. 아빠랑 씻자.”
욕조에 적당한 온도의 물을 받은 태오가 이호를 크게 불렀다.
지호와 함께 블록 쌓기 놀이를 하던 이호가 투정 없이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빠와 더 놀고 싶어 울먹대는 지호는 잠시 엄마에게 맡겨 두고서.
욕조에는 지호가 좋아하는 초록색 입욕제가 풀어져 있었고, 작은 오리들이 산책하러 나가듯 둥둥 떠 있었다.
“초록색 다음엔 무슨 색이 좋아?”
이호의 옷을 벗겨 주며 태오가 물었다.
“노란색.”
“그럼 내일은 노란색으로 하자.”
매일 이렇게 신경 써 주는 덕에 이호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목욕 시간이 즐거웠다. 오죽하면 아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정도였다.
잠시 후 아빠와 아들이 나란히 욕조 안에 들어갔다. 워낙 욕조가 넓은 탓에 이호는 오리들과 함께 헤엄도 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색, 좋아하는 장난감, 그리고 좋아하는 아빠가 있는 욕실은 이호에겐 천국이었다.
“수영을 좀 배워 볼까?”
“응!”
“그래? 수영 좋아?”
“응!”
“그러다가 유명한 수영 선수가 되면 어떡하지? 너무 좋겠네.”
후계자 걱정 따위 안중에도 없는 태오는 이호가 넓은 수영장에서 멋지게 수영하는 상상을 했다.
생각해 보니 제 자식이 꼭 후계자가 될 필욘 없겠더라. 이젠 형제가 된 선오와 준오도 아이를 낳을 테니.
“엄마한테 말해 보자.”
“좋아.”
이호가 저 멀리서 헤엄쳐 와 아빠의 품에 폭 안겼다. 엄마에겐 한없이 의젓한 아들처럼 보여도 사실 아빠에겐 아직도 어리광을 꽤 많이 부리는 이호였다.
소유의 걱정보다 태오는 훨씬 더 공평하게 아이들을 대하고 있었다.
태오가 제 얼굴 아홉 스푼에 소유의 얼굴을 한 스푼 더한 것 같은 아들과 마주 보았다. 그러곤 물 묻은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뒤로 멀끔하게 넘겨 주었다.
“이호는 아빠의 뭐라고 했지?”
“자랑.”
“맞아. 이호는 아빠의 자랑이야. 네가 어떤 어른으로 자라든, 아빠는 항상 우리 이호가 자랑스러워.”
아빠의 따뜻한 말을 듣는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아빠는 이호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호를 한순간도 빠짐없이 계속 사랑해 왔어.”
연인에게나 할 법한 고백이었지만, 아빠가 아들에게 하는 고백으로도 썩 어울렸다.
“이호는 엄마와 아빠의 처음이니까.”
이렇게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여 주었기에, 이호는 동생에게 죽고 못 사는 아빠를 보고서도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기저엔 아빠가 자신을 몹시 사랑한다는 사실이 깔려 있었다. 그건 이호의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과거부터 그래 왔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이호는 아빠를 얼마나 사랑해?”
“이마아안큼.”
“애걔, 겨우?”
“이마아아아아아안큼.”
아이는 자신이 그릴 수 있는 가장 큰 원을 그렸다.
태오는 그제야 만족하며 웃었다. 아이가 자라며, 팔이 길어지는 만큼 저 원은 더 커질 테니까.
“강 씨 남자들, 그만 놀고 나와. 그러다 감기 들어.”
알콩달콩하던 부자는 이 집안의 최고 권력자, 소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시 목욕에 집중했다.
엄마의 말은 법이다.
이호는 아빠가 알려 준 문장을 가슴에 고이 새겼다.
* * *
아이들이 잠든 늦은 밤, 소유는 벽에 걸려 있는 지호의 원복을 어루만졌다. 어쩜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울까.
그런 소유를 바라보던 태오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유치원은 아직 좀 이른 거 아니야?”
“뭐가 일러? 이호도 이때쯤부터 유치원 다녔는데.”
“그건 맞지만, 지호는 아직 체구도 작고…….”
“평생 옆에 끼고 살 거야?”
“…….”
“아이고, 아버지. 나중에 시집은 어떻게 보내려고?”
“꼭 시집을 가야 하는 걸까? 우리랑 평생 살면 안 되나?”
못 살아, 진짜. 소유는 진지한 태오의 물음에 웃음을 터뜨렸다. 지호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딸에게 쩔쩔매는 아빠가 될 줄은 몰랐다.
첫 만남의 차가웠던 그 남자와 이 팔불출 아저씨가 매치가 되냐는 말이다.
“우리가 평생 있어 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말이야. 결국엔 우리가 먼저 세상을 떠나.”
소유는 태오와 마주 보고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평생 옆에 끼고 살다가, 우리가 사라져 버리면? 그때 지호는 어떻게 살아?”
그러므로 어렸을 때부터 조금씩 사회를 배우고 혼자 살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사랑은 주되, 세상 물정 모르는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워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지호를 진짜 사랑하면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소유의 맞는 말에 태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소유의 손을 꽉 잡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호는 너를 너무 많이 닮았어. 사진으로만 보던 어릴 적 네가 돌아온 것만 같아. 그래서 자꾸만 지호를 보면 애틋해지네.”
그토록 깊은 마음이 있었다니. 냉정하게 조언을 하던 소유는 머쓱해졌다.
“그때 서럽던 널 위로해 주지 못한 게 한이 돼서. 지호에게 잘해 주면 꼭 그때의 너에게 사랑을 주는 것만 같아서.”
“태오야.”
“알아, 나도. 나의 이런 생각은 지호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거.”
넌 나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 걸까. 소유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그래도, 그래도 아직은 어리잖아. 조금만 더 예뻐해 줄래.”
소유는 태오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언제나처럼 포근하고 단단했다. 소유는 이호를 달래듯 살살 태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이것만 알아 둬. 어렸을 때의 난 불행했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자부할 수 있어.”
“…….”
“널 만난 덕분이야. 부모님의 사랑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지만, 너의 사랑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없어.”
부부가 동시에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래서 난, 지호의 인생에 강태오 같은 사람이 나타나길 바라. 그 사람과 인생을 꾸리며 부모의 사랑만을 갈구하지 않는 어른이 되길 바라.”
어쩌면 그게 부모로서의 진짜 보람이 아닐까.
자식들이 각자의 행복을 찾아 떠난 뒤, 다시 둘만 남아 조금은 쓸쓸해지는 그 순간이 비로소 진정한 에필로그의 끝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