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 아빠는 딸 바보(2)
(94/95)
외전 9. 아빠는 딸 바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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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9. 아빠는 딸 바보(2)
2023.02.20.
지호에게도 귀여운 원복을 입히니 제법 태가 났다. 지호는 원복이 마음에 드는지 한참 동안 제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오빠랑 똑같은 거.”
“응. 오빠랑 똑같은 옷이지.”
소유가 지호의 머리를 예쁘게 땋아 주며 대꾸하자 지호는 배시시 웃었다.
알콩달콩한 모녀와 다르게 태오는 출근 준비를 끝내고서도 집을 떠나지 못하고 주위를 뱅뱅 맴돌았다.
잘생긴 얼굴에 근심이 어찌나 깊었는지 그늘이 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 남편을 힐끔 보던 소유가 딸에게 물었다.
“지호, 유치원 가기 싫어?”
고개를 갸우뚱하던 지호가 되물었다.
“거기 오빠 있어?”
“응. 있지.”
“그럼 괜찮아.”
아빠의 마음도 모르고, 지호는 쿨하게 대답했다. 워낙 오빠를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라, 오빠와 함께라면 뭐든 괜찮은 듯했다.
봤지?
소유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눈짓했다. 그래도 뭐가 그리 불안한지 태오가 딸의 어깨를 잡고 신신당부했다.
“아프거나, 낯설어서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 돌아와도 돼. 알았지? 무리할 필요는 없어. 오빠 휴대폰 빌려서 아빠한테 전화해.”
“음…… 싫어!”
잠시 고민하던 지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한번 아빠 억장은 와르르.
“재밌는 곳이라고 했어, 오빠가. 신나게 놀 거야.”
벌써부터 친구들과 놀 생각에 지호가 작은 발을 동동 굴렀다. 마침 머리 땋기를 끝낸 소유가 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이, 예쁘다. 우리 지호.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뻐?”
머리를 땋으니 더욱 인형처럼 사랑스러운 지호였다. 그건 단지 제가 엄마라서 흔히 하는 착각만은 아닐 거라 생각하는 소유였다. 지호는 누가 봐도 예쁜 아이였다.
“엄마.”
그 예쁜 아이가 예쁜 말을 재잘댄다.
“맞아요.”
지호가 소유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 작은 입술은 태오의 입술과는 또 다른 기쁨을 소유에게 안겨주었다.
“지호, 가자.”
홀로 준비를 끝내고서 동생을 기다리던 이호가 문득 손을 뻗었다.
“웅!”
지호는 다다다 일어나 오빠에게로 달려갔다.
“아빠도 뽀뽀…….”
애절한 아빠의 목소리는 듣지도 못하고.
오늘도 시무룩해진 태오를 달래는 건 소유뿐이었다.
남편의 등을 톡톡 쳐 주고서 소유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 현관까지 걸어갔다.
지호가 오빠의 도움을 받아 신발을 신은 모습, 이호가 지호의 땋은 머리를 만지작대며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감동이 차올랐다.
“다녀오겠습니다.”
“엄마도 같이 가.”
“오늘은 둘이서 가 볼래.”
엄마의 손 대신 동생의 손을 잡은 이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염려스러운 소유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생 잘 챙겨 줘. 지호 안녕.”
“엄마, 안녕.”
서로에게 의지하듯 꼭 잡은 고사리 같은 손을 보며 소유는 애써 아쉬움을 접어 뒀다. 엘리베이터 숫자가 무사히 1층까지 내려간 것을 확인한 소유는 모두가 잊고 있던 한 사람을 챙겼다.
“아저씨도 이만 출근하세요.”
“뽀뽀도 안 해 주다니. 첫 등원인데. 엄마한테만 해 줬어.”
유치한 태오의 말에 소유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난 지금 진지해.”
“하지만 웃긴 걸 어떡해. 태오야. 너 정말 많이 변한 거 알아?”
아마 이 남자가 이토록 주책맞게 변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꼭 두 남자랑 사는 거 같아.”
적을 제압하던 짐승 같던 강태오.
뽀뽀 한 번 못 받았다고 흐물흐물해지는 강태오.
이게 어떻게 동일 인물일 수가 있어.
“나도 내가 이런 아빠가 될 줄은 몰랐어.”
소유를 시작해서 서서히 태오의 울타리가 넓어지고 있었다. 그건 즉, 그가 지켜야 할 존재가 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가 소중히 여기는 사소한 순간들이 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런 나, 별로인가?”
소유가 태오를 와락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런 네가 더 좋아, 난.”
그저 부정할 수만은 없었던 태오의 인격적 결함, 두 얼굴, 타인을 향한 무자비한 보복 등을 고민하며 힘들어했던 시절보다는 지금이 훨씬 좋았다.
또한 태오도 더 편해 보이기도 했고. 누군가는 동의하지 못할지라도 소유의 눈엔 이게 더 태오의 본성과 맞아 보여서.
“첫 만남 때의 차가운 널 보고, 도망쳤더라면 분명 후회했을 거야. 이런 모습 절대 못 봤을 테니까.”
소유가 태오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아이들에게 받지 못한 뽀뽀를 대신해 주듯 연달아 두 번이나 해 줬다.
“나로는 만족 안 되겠지만…….”
“장난해?”
단박에 기분이 풀려 버린 태오가 소유를 휙 잡아당겼다. 눈 깜짝할 새에 두 사람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눈이 마주친 태오가 익살맞게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
“오히려 좋아.”
이번엔 태오가 소유의 목을 끌어당기고 짧게 입을 맞췄다.
아이들에게 받는 뽀뽀와 연인에게 받는 뽀뽀는 엄연히 다른 장르다.
애써 세팅한 머리가 망가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소유가 태오의 시선을 느끼고서 흠칫했다.
“아침부터 눈빛이 너무 뜨거운데요.”
“소유야.”
“안 돼.”
태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유가 철벽을 쳤다.
“우리 셋째도 낳자.”
태오가 할 말이 무엇인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된다고 했어.”
“다다익선.”
“다다익선이고 나발이고, 일단 애들 좀 키워 놓은 다음에.”
태오의 음흉한 손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은근슬쩍 소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묘한 간지러움과 떨림이 소유를 사로잡았다.
또다시 그에게 끌려가 키스를 할 뻔하던 소유는 바로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손을 쳐냈다.
“하마터면 또 넘어갈 뻔했어.”
“아쉽다. 거의 성공했는데.”
태오가 아쉽다는 듯 혀를 쯧 찼다.
“얼른 출근이나 해.”
“너 너무 차가워진 것 같아.”
“네 발로 나가. 내가 쫓아내기 전에.”
“…….”
태오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이 집의 최고 권력자는 소유가 맞았다.
“돈 많이 벌어와, 여보.”
“……여기서 더?”
“다다익선.”
가만 보면 말발도 좀 세진 것 같아.
* * *
그날 저녁 가족의 화두는 딸의 유치원 첫날이었다.
지호는 가방에서 온갖 것들을 꺼내 거실에 깔아 두고 자랑하기 바빴다.
“엄마 그려써.”
“정말?”
소유는 딸이 내미는 꾸깃꾸깃한 스케치북을 감격하며 받아들었다. 비록 이목구비가 잘 구분되지 않는, 사람보다는 도형에 가까운 그림이었지만 평생 간직할 테다. 딸이 처음으로 그려 준 초상화니까.
“아빠는?”
옆에 앉아 부러운 시선을 보내던 태오가 물었다.
“아빠는 내일!”
“내일? 진짜지. 약속했다, 공주.”
“웅.”
지호는 작은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여 아빠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친구들은 어땠어?”
“재미써써! 나보고 예쁘다고 해써.”
“……남자애들도?”
“웅!”
아빠와 딸의 대화를 들으며 소유는 아들에게 손을 뻗었다. 이호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옆으로 파고들었다. 이럴 때면 이호도 아직 어린아이란 걸 실감하게 된다.
“유준이랑 서원이랑 커서 결혼하기로 했어!”
“벌써?”
요즘 애들 참 빠르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하루 만에 결혼을 약속해 버리다니. 그것도 무려 두 명과.
소유와의 결혼 과정이 험난했던 태오에겐 몹시 놀라운 일이었다.
“지호는 둘 중에 누가 더 좋아? 결혼은 한 사람이랑만 해야 하거든.”
태오가 멍해진 그사이, 소유가 차근차근 딸에게 설명해 줬다.
“왜?”
“사람들끼리 지키기로 한 약속이야. 그러니까 유준이랑 서원이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해.”
그러자 지호가 턱을 괴고서 꽤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어른이 되면 유준이와 서원이란 존재는 까마득하게 잊을 테지만, 소유는 딸의 고민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음…… 그럼 나는, 나는, 오빠!”
“응?”
“오빠랑 결혼할래!”
야무진 손끝이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이호였다. 태오와 소유에게서 동시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 오빠랑 결혼할래.”
콩알만 한 게 사람 볼 줄 아네.
“이호가 제일 멋있대.”
소유가 이호에게 속삭이자, 이호는 부끄럽다는 듯 씩 웃었다. 이렇게 사이좋은 애들이 사춘기가 되어 서먹서먹해지면 되게 서운할 것 같네.
그때, 집 안 가득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딸과의 수다에 빠져 잠시 까먹었던 손님의 존재가 떠올랐다. 소유는 문을 열러 나가며 물었다.
“그럼 작은삼촌은? 지호, 저번엔 작은삼촌이랑 결혼한다고 했잖아.”
“어?”
“삼촌 서운하시겠네.”
문을 활짝 열자 오늘도 어김없이 양손 가득 아이들의 장난감을 사 들고 온 준오가 서 있었다.
“가볍게 오시라니까.”
“어떻게 그래요? 우리 지호가 처음으로 유치원에 간 날인데.”
어떤 날은 이래서, 어떤 날은 저래서…….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정성 가득한 선물을 주는 자상한 삼촌이었다.
“큰 도련님은요? 같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몰라요. 무슨 기념일이래요, 오늘. 아주 연애한다고 바빠요.”
요즘 들어 선오가 도통 시간을 내주지 않는 탓에 준오가 툴툴댔다.
“연애 때문에 바쁜 거면 행복한 거죠. 들어와요.”
준오가 무거운 선물들을 내려놓고 조카들에게 외쳤다.
“이호야, 지호야. 삼촌 왔다!”
그러자 아기 향을 잔뜩 묻힌 아이들이 우다다 달려들었다. 아이들을 품 안 가득 폭 안고 있으면 평온함과 행복이 동시에 몰려왔다. 속세에 찌든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제 자식도 아닌 조카가 이렇게 예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마 선오가 연우와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더욱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왔냐?”
이젠 제법 편해진 태오도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모두가 즐거운 이 자리에 있으니, 준오는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돌아갈 집, 가족이 있다는 것은 외로운 현대인들에겐 무척 중요한 것이었다.
“강선오는.”
“데이트.”
“제대로 빠졌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태오가 웰컴 드링크를 가지러 주방으로 갔고, 소유가 의뭉스럽게 말했다.
“참, 도련님 차였어요.”
“네?”
“지호가 도련님이랑 결혼 안 한대요.”
“왜죠?”
딸 바보 못지않은 조카 바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치원에서 남자 친구 생겼어요?”
그러자 태오가 얄밉게 등장해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응. 무려 두 명이나.”
“……와. 우리 지호, 대단한데?”
“그 직업에, 그 얼굴에 연애 못 하는 너보단 훨씬 낫지.”
“아, 형까지 왜 그래.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니까?”
안 그래도 진 여사와 지수에게 선오처럼 연애하라는 잔소리를 연달아 듣고 있는 준오였기에 태오의 잔소리가 썩 달갑지 않았다.
“그런 말 들어봤지? 잔소리도 돈 내고 하라고. 형도 잔소리하려면 돈 내.”
“얼마면 되는데.”
태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준오가 억지로 웃으며 태오에게서 웰컴 드링크를 빼앗아 들었다.
말을 잘못 꺼냈네. 왠지 이 인간이라면 돈 왕창 주고, 평생 잔소리할 거 같잖아?
“오랜만에 만나서 왜 그래. 도련님 불편하시게.”
역시 형수님밖에…….
“도련님, 그런데 소개팅 안 하실래요? 제 주위에 좋은 사람이 있는데.”
아니네.
다 똑같네, 똑같아.
우리 형수님도 강태오한테 물 들었어.
“착하고 예쁘고…….”
“혹시 진 여사님의 지령인가요?”
“…….”
그렇지만, 그럼에도 지금이 예전보다 나아진 것만은 확실하다.
“형수님까지 그러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믿을 사람이 없어.”
준오는 시끌벅적하고 정겨운 지금이 참, 정말이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