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 오프닝 크레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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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0. 오프닝 크레디트
2023.02.24.
군의관 복무를 마친 재현은 현재 고즈넉한 시골에서 작은 병원을 운영 중이었다.
화려한 번화가에 성형외과를 차리겠다던 꿈은 까맣게 잊은 듯.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명되었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성형외과의 권위자였던 석영재 교수의 명예는 크게 실추되었고, 그로 인해 이런저런 추문을 일으키고 다니던 재현은 동료들에게 외면당했다.
그나마 의사 생활을 계속하려면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우리 애가 요즘 계속 속이 안 좋다고 난리예요.”
“그럼 환자 본인이 오셨어야죠.”
“아, 우리 애가 지금 고3이라. 내가 대신 약 타 가는 건 안 될까?”
“분명 안 된다고 저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나마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따금 차오르는 짜증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애 엄만데, 왜 안 돼요? 생판 남도 아니고 말이야.”
“아무튼 안 됩니다.”
모두에게 추앙받으며 자신감이 넘치던 대학생 땐 이런 미래는 정말 상상조차 못 했는데.
돈을 쓸어 담으며 누구보다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모두의 부러움을 받으며 동경의 대상이 될 줄 알았는데.
“아이고, 딱딱하시네. 젊은 양반이 왜 그렇게 모질어요?”
“다음.”
이렇게까지 초라하게 망가질 줄이야.
자신의 발끝도 못 따라오던 열등한 동기보다도 못한 삶을 살 줄이야.
“전에 계시던 용 선생님은 안 그랬는데.”
“다음!”
유일한 동아줄이던 아버지와는 거의 연이 끊기다시피 했다.
석영재 교수는 재현의 추악한 실수마저 덮어 주려던 헌신적인 아버지였지만, 재현이 다해와 함께 살겠다고 선언했을 때, 마침내 아들을 외면해 버렸다.
그러나 재현은 태오와 있었던 일을 아버지에게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말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차피 아버지는 그 맹수 같은 남자를 이길 수 없었을 테니까.
그가 이 정도로 끝내 준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시 아버지가 그 맹수의 코털을 건드린다면, 그땐 아버지마저 형편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아들로서 그 꼴은 정말 볼 수 없었다.
“석 선생. 아 글쎄, 미국에 있는 아들한테 소포를 하나 보내려는데,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꼬부랑 글씨를 하나도 읽을 수가 없어. 좀 도와주면 안 되남?”
참고 참던 재현이 결국 터져 버렸다.
재현이 책상을 세게 내리치자 백발의 노인이 흠칫 놀랐다. 내내 재현의 불친절한 태도를 눈여겨보고 있던 베테랑 간호사도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는 병원입니다. 병원 뜻 몰라요?”
“에이, 왜 그래. 난 석 선생이 똑똑하다길래…….”
“내가 이깟 허드렛일이나 하려고 의사가 된 줄 압니까? 나가세요.”
간호사가 차트를 든 채 달려왔다.
“석 선생님!”
“쫓아내세요. 제대로 된 환자만 받으란 말이에요.”
재현이 단호하게 손가락질을 했다. 잠시 한숨을 쉬던 간호사가 일단 할아버지를 밖으로 내보냈다.
“아버지, 다음에 오세요.”
“내가 미안하네, 그려.”
“아니에요. 그리고 소포 보내는 건 우체국으로 가시면 도움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곤 진료실 문을 탁 닫고 재현과 마주 보았다. 아직 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재현이 씩씩댔다.
“가끔 무리한 부탁을 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그런 건 우리한테 맡기시고, 선생님은 너무 모질게 대하지 마세요. 아프시고 외로운 분들이에요.”
간호사가 아들뻘의 재현에게 조언했다. 그녀는 재현이 오기 전 ‘용 선생님’ 시절부터 이 병원을 지킨 사람이었다.
용 선생과 석 선생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물론 용 선생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오지랖이 넓긴 했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석 선생은 친절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간극에 악의 없는 환자들은 상처를 받기 일쑤였다.
“아프고 외로우면 뭐요? 그럼 다 받아 줘야 합니까? 애초에 그런 걸 다 받아 주니까 병원이 이 꼴이 된 거잖아요. 이 빌어먹을 시골…….”
“석 선생님.”
좋게 달래도 말이 통하지 않자 간호사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이 빌어먹을 시골에서 살아 보려고 내려오신 건 선생님 아니신가요?”
재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말이 꼭 ‘서울에서 쫓겨나서 여기에 온 주제에 뭘 그리 잘난 척이야?’이란 말로 들렸다. 재현의 피해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감히 나한테 충고하는 겁니까?”
“석 선생님은, 정말 꼬여 있네요.”
* * *
오늘도 재현은 술에 취한 상태였다. 비틀대며 불이 켜져 있는 집을 올려다보았다.
원래 집이란 일반 사람들에겐 고된 일과를 끝내고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처럼 여겨지지만, 재현에겐 아니었다. 들어가기 죽기보다 싫은 공간이었다.
“어이, 석 선생!”
그때, 등산복을 걸친 옆집 아저씨가 재현을 툭 쳤다.
“또 늦었어? 그러면 안 돼. 아픈 마누라가 집에서 기다리는데 매일 같이…….”
재현의 내부에서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뻥 터지는 기분이었다. 재현이 옆집 아저씨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쳤다.
“왜, 왜 이래.”
당황한 옆집 아저씨가 필사적으로 재현의 손을 떨쳐 내려고 했다. 재현이 어둡게 침잠된 눈동자로 그를 눈에 담았다.
“몇 번이나 말해. 우리 결혼한 사이 아니라고.”
어찌나 딱딱하게 끊어 말했던지 재현의 말은 마치 여러 단어들의 나열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 그럼 뭔데! 성인 남녀가 부부도 아닌데, 왜 같이 사냐고.”
“제발, 오지랖 좀 그만 떨어. 지긋지긋하니까.”
재현이 던지듯 옆집 남자의 멱살을 놓았다. 한밤중의 소란에,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밖을 보던 이웃들이 수군댔다. 대부분 재현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였다.
잘생기고 젊은 의사가 온다기에 기대했던 사람들은 포악한 재현의 본성에 잔뜩 겁을 먹고 말았다.
“좀 닥치라고.”
이곳에서마저 자신의 평판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재현은 그토록 싫어하는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 왔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요란한 텔레비전 소리, 정돈이라곤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어지러운 바닥.
그 최악의 환경에서 가장 싫었던 건 해맑은 표정으로 달려 나오는 다해였다.
“왔다. 왔다.”
어린아이가 된 다해는 재현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했다. 빗지 않아 산발이 된 머리가 얼굴을 간지럽히자 재현은 가차 없이 다해를 내쳤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해는 재현을 졸졸 따라다녔다.
재현이 목을 옥죄던 넥타이를 풀어내는 순간, 마침 뉴스에는 강화 호텔에 대한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강화 호텔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한 것에 대한 소감을 인터뷰하는 태오의 모습은, 한심한 현재 초라한 자신의 모습과 비교되었다.
한때는 저 남자와 동등하게 겨룰 수 있으리라 착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 제힘의 원천은 가족입니다. 우리 가족도 걱정 없이 묵을 수 있는 안전한 호텔, 쾌적한 호텔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레 좋은 결과가 나왔던 것 같습니다.
자신감에 찬 태오의 목소리마저 저를 기만하는 것만 같았다. 재현은 거칠게 텔레비전 코드를 완전히 뽑아 버렸다.
그리고 해맑은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다해의 어깨를 붙잡고, 고함을 질렀다.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 첫사랑도, 인생도 다 망가졌어. 너만 없었더라면. 너만 죽었더라면.”
재현의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르는 듯 다해는 그저 방긋 웃었다. 그 모습마저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싫었다.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혀를 쯧, 하고 찬 재현이 그대로 찬 바닥에 누웠다. 침대도 아니건만 그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부터 고된 업무에 시달린 데다 술까지 마신 터라 졸음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다해는 무릎을 끌어안고서 그런 재현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작게 콧노래를 부르던 그녀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다시 눈을 떴을 때, 몹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다해는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아닌 또렷한 눈동자로 잠든 재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던 것이다. 마치 사고를 당하기 전처럼.
“다 나 때문이라고?”
놀라운 건 비단 눈동자뿐만이 아니었다. 어눌했던 발음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만약 목격자가 있었다면 몹시 소름이 끼쳤을 장면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유일한 목격자 후보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모든 건 다 네가 자초한 거지. 네 팔자, 네가 스스로 꼰 거라고.”
다해가 혀를 탁 튕긴 채 조소를 지었다.
“우리 재현이는 여전하네. 남 탓이나 하면서 멍청하게 구는 거. 아마 평생 그러겠지, 넌.”
다해가 재현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재현아.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하진 마.”
“…….”
“이제 시작일 뿐이잖아.”
그러다 재현의 볼에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분명 연인끼리나 할 법한 애정 표현이었는데, 정작 애정은 하나도 담기지 않은 아이러니한 행동이었다.
“내가 말했지. 지옥에서 만나자고. 살아 있는 동안은 기꺼이 내가 너의 지옥이 되어 줄게.”
다해가 서늘하게 웃었다. 잠든 재현이 움찔할 정도의 냉기였다.
“평생 네 곁에 있어 줄게.”
나는 소망한다.
너의 사랑이 되는 것엔 실패했지만, 그 대신 너의 절망이라도 될 수 있기를.
* * *
분명 깊은 잠에 들었는데, 일으키는 몸은 한없이 무거웠다. 마치 물을 먹은 솜처럼.
재현이 숙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해는 창문에 딱 붙어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된 이후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 망할 꿈 때문인가.
어제 재현은 무척 섬찟하고 끔찍한 꿈을 꿨다. 정상으로 돌아온 다해가 재현을 저주하고, 입을 맞추는 꿈이었다.
현실처럼 생생한 그 꿈을 꾸며, 재현은 가위라도 눌린 듯 꼼짝할 수 없었다. 무력하게 그저 다해의 저주를 듣고 있는 수밖에.
재현의 목 위에 아주 작은 소름이 돋아났다.
불현듯 다해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해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으로 그녀가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다해는 늘 그랬듯이 재현을 향해 방긋 웃었다.
“둥근 해가 떴습니다.”
다해가 천진난만하게 동요를 불렀다. 어쩐지 재현은 그녀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외면했다.
딱히 상관없다는 듯 다해의 노랫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재현은 욕실로 뛰어 들어왔다.
거울 속엔 모든 것을 빼앗긴 초라한 남자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지. 악몽일 뿐이야.
재현의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렸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중얼거림을 듣던 다해는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유달리 햇살이 아름답게 내리쬐는 아침이었다. 산새들과 들꽃들이 몸을 흔들며 다해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해도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주다 문득 달력을 쳐다보았다.
익숙한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다해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구겨졌다.
가만 보자.
오늘이 그 여자 출소일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