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오렌티 비혼주의 금지법안-1화 (1/8)

Prologue: 연애의 조건

생각해보면 그 불유쾌한 얽힘은 7년 전에 시작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기묘한 얽힘이 거들지 않아도 새내기 생활은 충분히 고되고 정신없었다. 대학생의 낭만 같은 건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새내기 모두가 장밋빛 나날만 펼쳐질 거라 기대하는 대학 입학식이지만, 유주에겐 캠퍼스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고행의 나날이었다. 충분히 각오했던 바였지만 막상 부딪쳐 본 현실은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하루에도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뛰고, 장학금 때문에 학점은 학점대로 챙기느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첫 대학 축제에는 코빼기도 못 비치고 학교 앞 식자재 창고에서 온종일 포장 아르바이트 작업으로 진이 빠졌던 날, 몸은 기어이 정신력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 강주하는 소위 야간용, 붉은색 볼보를 타고 창고건물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을 뿐, 정말로 우연히 지나갈 뿐이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캠퍼스와 인접한 대학병원의 1인용 병동에서 깨어나 게살죽을 먹을 때까지도 정신이 흐릿했다. 혼란스러웠다. 왜 그가 보호자처럼 머리맡에 지키고 앉아 있는지. 뼈대 굵은 손목에 채워진 바쉐린 콘스탄틴이 환한 병동 불빛에 깜빡거렸다. 눈이 부셔서 손을 머리 위에 올리자 그가 일어나 실내의 조도를 낮춰주었다.

“그렇게 무리하다 쓰러져. 이미 쓰러졌지만.”

강주하가 억양 없이 말했다. 팔짱을 끼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은 차가운 유리알처럼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남들 하는 만큼 공부도 하고 알바도 일곱 개씩 뛰는 건 불가능해. 몸이 못 버텨낼 거니까. 이미 못 버텨냈지만.”

유주는 그를 흘깃 노려보았다. 그럴 리 없을 텐데도 어쩐지 놀리는 듯 라임을 맞추는 게 거슬렸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니까. 어떤 미친 인간이 그렇게 하고 싶겠어?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

“과외만 일곱 개 하는 건 어려운가…? 꼭 이렇게 몸 쓰는 알바까지 해야 돼?”

“응! 어려워! 그럼 일곱 명의 중, 고딩 일정 다 맞춰야 하는데 수업 땡땡이치지 않고서야 가능하겠어? 그래서 적어도 하루는 몸이라도 써야 돼. 그 창고 포장 하루에 세후 십만 원이야. 십만 원이면 한 달 치 학식이고! 너처럼 학생식당 근처엔 얼씬도 안 하는 부류는 절대 이해 못 하겠지만.”

강주하는 담담하게 듣고만 있었다. 유주는 좀 더 빈정대고 싶었지만, 그쯤에서 입을 닫았다. 아무리 얄밉게 지껄여도 진심으로 화를 낼 수는 없다.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그냥 휴게실에 눕히지 뭘 번거롭게 병원까지 데려가냐 가뜩이나 일손도 부족한데. 저를 업고 나온 직원들과 매니저가 옥신각신할 때 대뜸 친구라고 그녀를 차에 실어 여기까지 모셔준 은인이었다.

“어쨌든… 고마워. 병원까지 데려와 주고. 이제 가 봐야겠어.”

하지만 1인 개인 병동에다 포도당 주사까지. 너무 오버란 생각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유주는 이불을 젖히고 침상에서 내려갈 준비를 했다. 결국 그녀가 갚아야 할 텐데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퇴원하면 돈이 조금이라도 덜 들지 모른다.

“아직 안 돼.”

갑자기 강주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제지했다. 엉거주춤 일어나려던 유주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팔을 벌려 침상 위를 짚는 바람에, 순식간에 그의 두 팔 사이에 갇힌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오늘 밤은 여기서 푹 쉬고 내일 퇴원해. 어차피 축제라서 수업도 없고 저녁에 과외만 두 건 있잖아.”

유주의 놀란 눈은 더 커졌다. 어떻게 제 스케줄을 알고 있나 의아함을 넘어서서 살짝 소름마저 돌았다. 그녀의 의혹을 읽었는지 강주하는 의자에 가지런히 놓인 그녀의 휴대폰에 눈짓해 보였다.

“미안. 보호자 연락처를 찾다가 스케줄 알림이 뜨길래.”

유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가 다시 등을 침상에 기대자 강주하도 다시 의자에 앉았다.

“병원비 얼마 나왔어? 짐작하겠지만 나 한꺼번에 못 갚아. 조금씩 이체해 줄게.”

“그럴 필요 없어. 여기 친척분이 계셔서 편의를 봐준 거야. 마침 비어 있는 병실이 있어서.”

유주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묶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뭐…? 아무리 그래도 그게 말이 돼? 작은 동네 병원도 아니고 대학병원인데 행정적으로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

“가능했으니까 가능했다고 말하지.”

강주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아홉 시를 좀 넘어가 있었다. 원래 규칙대로라면 그도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시간이지만 규칙에는 늘 예외가 있는 법이다. 정확히는, 규칙에 적용받지 않는 사람이 따로 있게 마련이다.

“더 필요한 거 있어? 사다 줄게.”

“늦었는데,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조금만 더 있다 가려고.”

강주하는 제 옆에 놓인 종이컵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유주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에 잠식될까 두렵기도 했지만, 비현실적인 외모를 눈에 담는 것이 더 부담스러웠다.

무슨 운동을 하고 있는지 190cm에 가까운 훤칠한 키와 건장하고 다부진 몸, 넓은 어깨, 아직 소년티가 남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했다. 누구나 선망하는 유명 연예인이나 아이돌과 갑자기 단둘이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라 해야 할까.

같은 스무 살인데 얘는 대체 왜 이렇게… 반백 살은 산 것 같은 느낌일까. 도무지 속도 알 수 없고 겉모습 외에는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으니.

“네가 이렇게 친절한 타입인 줄은 몰랐네. 아, 오해는 하지 마. 빈정거리는 건 아니니까……”

그는 대꾸 없이 종이컵 안에 든 커피를 조용히 홀짝거렸다. 이과 수석으로 들어온 강주하는 입학식 때부터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눈에 띄는 외모와 인증된 지적 능력,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걸친 명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부의 냄새는 전교생은 물론 교수진들의 이목까지 끌었다.

그리고 극명한 호가 있으면 극명한 불호도 생겨나듯, 언젠가부터 그를 둘러싼 여러 가지 소문들도 무성하게 생겨났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고, 소문의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유주가 보기에는 절반 이상은 루머에 가까웠다.

‘강주하 대체 어떤 금수저 집 자식일까? 시원하게 어필 안 하는 거 보면 역시 구린 데가 있어. 어머니가 물장사한다던가, 아버지가 사채업자라던가. 걸치고 다니는 거 보면 준재벌급인데.’

‘돈 쓰는 거 보면 죄다 현금박치기에, 툭하면 새것 사고 툭하면 남기는데 중국 졸부가 따로 없다던데? 장난 아니래! 아, 혹시 재벌 사생아 아닐까? 아무래도 그게 제일 유력하네!’

‘전에 조교들이랑 과 회식 갔는데 거기서는 그랬대. 야야, 미스터리 강주하!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아재 개그식으로 물어보니까 작은 여관 같은 거 하십니다. 이랬다는데?’

‘전에 형우 선배가 L갤러리 주차장에서 강주하 봤거든? 어머니랑 있는데 어머니가 우와, 장난이 아니더래. 무슨 재벌 사모님처럼 럭셔리에 포스가 그냥. 그래서 나중에 형우 선배가 은근슬쩍 물어봤대. 어머니 혹시 L갤러리 관장이시냐. 그랬더니 네? 아뇨. 일수 같은 거 하시는데요. 일수? 옛날에 시장에서 하던 그 일수? 하니까 네 비슷합니다, 그랬대’

‘야, 그 여자는 혹시 어머니가 아니라 스폰 아니냐?’

‘맞아. 외할아버지네는 미국에 있는데 건물 경비원 겸 주차요원이라던데. 아무리 봐도 스폰이다, 스폰! 그렇지 않고서야 저 차에, 시계에, 옷에, 돈이 어디서 나겠냐? 안 그래?’

‘그러고 보니 그렇네. 돈 펑펑 쓰는 거 보면. 밥도 차 가져가서 어디 비싼 레스토랑에서 먹는지 학생식당엔 코빼기도 안 비추고. 지갑에 골드 카드가 그득 들어 있다더라. 항상 혼자 다니고 여자애들이 아무래 대시해도 철벽치고 우리 같은 서민이랑은 아예 어울리지를 않아, 재수 없게!’

‘결정적인 게 뭔지 알아? 그 새끼 미국 시민권자라서 군대도 안 간대, 씨발! 난 그게 제일 열 받아, 아우!’

‘야야, 뒤에서 뒷담만 까면 뭐하냐? 정작 팀 과제 할 때는 다들 그 새끼 앞에서 굽신굽신, 리드하는 대로 따라가서 학점 줍줍이나 하면서. 냅둬라, 설령 돈 좀 있는 집안이라도 그렇게 돈 물 쓰듯 헤프게 쓰고 방탕하게 쓰는 버릇 들여놨으면 볼 장 다 본 거 아냐?’

‘맞아. 우리 같은 서민들이 건실하게 모으고 재테크해서 번듯한 집 하나씩 등기치고, 커리어도 쌓았을 때, 저런 새끼는 쪽박 차고 망해 있을걸? 보니까 수중에 돈 있는 족족 다 써버리는 것 같던데. 부러울 거 하나 없어!’

‘야, 그래도 머리는 좋으니까 쪽박은 안 차겠지. 그나저나 우리… 이따 교양 채플 팀 과제 그 새끼한테 물어봐야 되는데. 다들 표정 관리 잘해라, 씨발.’

‘관리할 게 뭐 있냐? 앞에 가면 저절로 쭈뼛대던데, 다들.’

‘야, 씨발. 뼈 때리지 마라… 그 새끼 이상하게 카리스마도 쩔어가지고. 안 웃고 가만히 마주 보면 이상하게 긴장되고 등골이 싸해져. 여자들이 그런 위태위태한 분위기에 더 혹하나 봐. 스폰이 맞아, 스폰 틀림없어. 그럼 그럼.’

유주는 과 휴게실에 들어가려고 문고리를 잡고 있다 돌아섰다. 면전에선 아무 말도 못 하고 학점 때문에 빌붙는 주제에, 뒤에서는 열등감과 시기심에 쩔어서 저렇게 스폰이니 뭐니 근거도 없는 입방아만 찧어대다니. 지질한 선배들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주야. 서유주.”

풍부한 바리톤의 저음이 유주를 다시 현실로 일깨웠다. 강주하가 팔짱을 끼고 있던 걸 풀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시선에는 역시 싸한 뭔가가 있었다. 차갑지도 않았지만 포근한 온기라고도 할 수 없는, 어딘가 위태롭고 무감정한 눈빛.

“내가 알바 하나 제안해도 돼?”

강주하가 물었다.

“뭐…? 음, 고맙기는 한데 지금 하고 있는 것만도 시간이 꽉 차다 못해 빡빡해서.”

갑자기 귀가 솔깃해졌다. 시급이 더 센 거라면 일곱 개 중 하나랑 바꿔도 될 텐데. 일단 들어나 보자 싶었다.

“뭐하는 건데?”

“지금 하고 있는 거 다 접고 이거 하나만 집중하면 돼. 페이는 일곱 개 합친 것보다 더 많을 거고. 공부할 시간도 넉넉할 거야.”

유주의 귀가 더 쫑긋 섰다. 그럴 리가. 수업에는 지장 없게, 일곱 개 시시각각 시간 조율하고 일정 바꿔가며 돌려막기로 해도 간신히 백오십만 원 남짓인데 하나만 해도 그 정도 나올 수 있다니? 게다가 공부할 시간까지 넉넉히 확보된다니. 그런 알바가 대체 뭘까.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이미지에 안색이 확 변했다. 혹시 그쪽일까. 아무리 돈이 줄줄 들어온대도 차라리 뒤졌으면 뒤졌지, 절대 해선 안 되는 아르바이트들의 명칭이 하나씩 떠올랐다.

노래방, 주점, 마사지방 등의 유흥적인 성격을 띤 모든 종류의 업소. 원조교제. 아무리 절박해도 절대 발을 디뎌서는 안 되는 세계.

“이상한 거… 하라는 건 아니지? 미리 말해두는데 난 불건전한 알바는 절대로 안 해.”

강주하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조소 같았지만 허를 찔린 웃음은 아니다.

“불건전한 거 아니야, 절대로.”

짙은 속눈썹 아래, 완벽한 아몬드형 눈매가 서늘하게 반짝거렸다.

“나랑 사귀자.”

유주는 눈을 깜빡였다. 그는 또래 남자애들처럼 생기발랄하고 밝지는 않았지만 가볍거나 깐족대지도 않았다. 마음에 없는 헛소리를 할 인물은 아니다.

“뭐라고? 잘못 들었나 봐. 뭐라 그랬어?”

“똑바로 들었어, 너. 나랑 사귀자고.”

유주는 강주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노골적으로 눈을 들여다보고 탐색했지만 읽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한참 만에 입술을 뗐다.

“왜…?”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린지. 유주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한 번 더 물었다.

“왜?”

너 나 좋아하니, 강주하? 아니, 잠깐. 그럴 리가 없잖아. 교양과목 몇 개 같이 들었고, 팀 과제 몇 번 같이 하고, 과제 때문에 오픈 톡방에서 문자 몇 번 주고받은 게 전부였는데. 한 번도 특별한 언질 같은 거 준 적 없고, 묘한 분위기 흘린 적도 없었잖아.

“왜라니… 호감이 있으니까 사귀자고 하는 게 당연하잖아.”

“어, 어떤 면에서?”

솔직히 제 얼굴이 못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거울을 보면 죽고 싶을 정도도 아니고, 매일 싸구려 티셔츠에 물 빠진 청바지만 걸치고 다니는데도 남자들의 눈에는 여자로서 영 형편없진 않은 모양이었다.

선배들이나 동기들의 대시에다, 하다못해 아르바이트 사장이나 매니저까지 은근히 질척대고 집적대는 걸 보면.

하지만 엄청난 미인도 아니고. 가슴은 좀 크지만 헐렁한 것만 입어서 눈에 잘 띄지도 않는데.

“너… 이런 타입이 조, 좋아?”

말해 놓고도 좀 이상했지만 유주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화장도 안 하고 수수하다 못해 엄청 평면적이고 애교도 없는데. 취향이야? 그… 나 같은.”

“너 모르는구나. 네가 얼마나… 생겼는지.”

그는 슬쩍 말 중간을 흐렸다. 유주는 미간을 좁혔다. 분명히 꼴리게, 라고 한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갑자기 다른 것에 생각이 미쳤다.

“잠깐만. 그걸 알바라고 말한 거야? 그럼 너랑 사귀게 되면, 알바 일곱 개 합친 것만큼 돈을 주겠다는 거야?”

매달 백 오십만 원만 떨어져도 공부할 시간을 넉넉히 확보하다 못해 학점 관리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학비며 생활비며 용돈까지 백 퍼센트 집에서 지원받는 동기들처럼.

“그 두 배, 아니 세 배. 원하는 만큼 줄 수 있어.”

“무, 무슨 명목으로?”

“사귀게 되면 남자가 여자에게 그 정도 지원은 해 줄 수 있잖아. 내가 여유가 있고 넌 그 반대니까.”

“그, 그러니까.”

유주는 단어를 최대한 신중히 고르려고 하다가 포기해버렸다.

“내가 지금 머리가 좀, 아니 많이 복잡해서 그냥 빙빙 돌리지 않고 말할게. 워딩이 좀 거칠어도 이해해. 그러니까, 너한테 백만 원 넘게, 아니 필요하면 그 이상이라도 받고 너랑 사귀라는 거야?”

“응. 학비, 월세, 생활비, 용돈 다 줄 수 있어. 아, 지금 있는 반지하 방은 아예 옮기는 게 어때? 학교 앞 신축 오피스텔로. 보증금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유주는 입을 턱 벌리고 그를 보았다. 이게 웬 횡재냐, 그렇게 좋아만 하기에는 그녀가 자란 가정환경이 지극히 보수적이고 정상적인 편에 속했다.

부모님의 사업이 완전히 기울고 두 분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녀도 강남 한복판 아파트에 살았고, 피아노며 바이올린에 내로라하는 대치동 선행 학원들까지 하루가 멀다고 바쁘게 다녔다.

“저기… 이런 말 좀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그건… 스폰 아니야?”

무슨 상류층 사립 고등학교 배경의 미국 드라마도 아니고, 스무 살밖에 안 된 대학생이 동갑내기 여자친구에게 숨 쉬고 사는 데 필요한 자금을 다 대주겠다니. 그것도 획기적인 발명품 특허를 받거나 로또에 당첨된 제 돈과 운도 아니고, 순전히 부모님이 출처일 게 뻔한 돈으로.

“글쎄… 잘 모르겠네, 그 부분은. 스폰서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가에 따라 해석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난 돈 모으는 버릇도 없고 들어오는 족족 다 써 버리니까, 널 일종의 투자처라 생각해도 상관없어.”

그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초연하고 담담한 태도, 저를 투자에 대입하는 괴상한 비유법에 유주의 입이 더 벌어졌다. 강주하는 진심이었다. 그냥 떠보는 말이 아니다.

“너, 넌, 그럼… 내가 내일부터라도 그래, 그러자 하면… 내일부터 바로 우린 커플이 되는 거야? 그… 영현 선배, 지우 선배처럼?”

그는 말없이 눈으로 긍정의 뜻을 표했다. 유주는 더듬더듬, 속사포처럼 덧붙였다.

“그 선배들 거의 동거하다시피 하고 주말마다 MT 간다는 목격담도 있어.”

“그게 뭐 어때서. 커플이 다 그렇지. 미성년자도 아니고 불륜도 아니고. 나쁜 짓 하는 거 아니잖아.”

“그럼 우리도 그렇게 하는 거야?”

목소리가 갈라져서 길게 늘어졌다. 유주는 당황해서 크흠, 흠, 애써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아까 쓰러지면서 정신이 이상해져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듣고 있는 건 아니겠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람.

“당연한 거 아니야? 성인 남녀가 사귀는 건데.”

강주하는 팔짱을 다시 끼었다. 정색하니 하얀 대리석 같은 얼굴이 조각처럼 차갑게 반짝였다. 유주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를 외면하고 제 손톱만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절실하게 짝사랑을 한다거나 그런 마음은 없었다. 그럴 마음의 여유조차 사치일 만큼, 그녀의 캠퍼스 생활은 너무도 바쁘고 고단했다. 굳이 말하자면 대부분의 동기들처럼 톱스타나 아이돌 보듯, 그저 다른 세계에 속한 비범한 인물을 보는 것처럼 막연한 경외심만 느꼈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갑자기 사귀자고 하다니.

“난 잘, 잘… 모르겠어. 너는 정의 내리기 나름이라 했지만 내 기준으로 그건… 스폰 같아.”

유주는 그를 똑바로 보지는 못하고 제 소신을 이어나갔다.

“네가 볼 때는 쥐뿔도 없으면서 무슨 자존심이고 낭만이냐 생각할 수 있지만… 난 연애는 최대한 동등한 위치에서 하고 싶어. 적어도 대학생 때 연애를 한다면 그렇게 시작부터 밑지는 관계는 좀 아닌 것 같아.”

“어차피 너 연애 못 하잖아. 이대로라면.”

강주하가 조곤조곤, 부드러운 목소리로 뼈아픈 지적을 해댔다.

“지금 이대로라면 연애는커녕 언제고 오늘처럼 쓰러져서 결국 제 몸도 못 추스르고 학점도 엉망이 되어버릴 거고, 결국은 한 학기 만에 휴학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나 기로에 서게 되겠지.”

입을 때려버려도 시원찮을 뼈 타작 소리는 계속되었다.

“복학해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다시 알바하고 또 휴학하고 그러길 반복하다, 동기들 다 졸업하고 취직해서 자리 잡아갈 때쯤 간신히 졸업해서 명문대 문헌정보학과 타이틀 달랑 하나로 대기업들만 이력서 돌리다가, 어느 날 서른이 넘어서야 현실을 깨닫고 중소기업으로 들어가서 매일 야근에 시달리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면 자괴감에 빠지겠지. 이 나이 되도록 뼈 빠지게 고생만 했는데 연애도 한 번 못 해보고 변변한 내 집 한 칸 없는 서러움에 눈물이 나겠지.”

유주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하도 기가 막혀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반박할 수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기생충처럼 너한테 빌붙으라고? 매달 꼬박꼬박 입금되는 화대 받으면서? 그게 스폰 받는 창녀, 아빠 또래 아저씨들에게 다리 벌려주고 원조교제 하는 여대생이랑 뭐가 달라?”

“네가 다리를 벌려줘서 돈을 주는 게 아냐. 네가 돈이 필요한 상황에 있으니까 주겠다는 거지.”

잔뜩 격앙된 유주와는 달리 주하의 어조는 시종일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난 너와 사귀고 싶고. 섹스하고 싶고. 네가 필요한 돈을 줄 수 있는 상황에 있는데. 그럼 뭐가 최선이겠어, 서유주. 네가 마인드를 바꾸는 것만이 최선이야. 너와 나, 모두에게.”

“섹스라니 그렇게 노골적으로…”

“섹스가 섹스지 뭐야. 떡 치고 빠구리 뜨고 사랑을 나누는 것, 씹질, 성행위, 퍼킹, 메이킹 러브, 다 같은 말이지. 너랑 나 법적인 성인이야. 원할 때마다 할 수 있어.”

잘못 본 걸까. 순간 주하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그 얼음처럼 뜨겁고 불처럼 차가운 음영이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할 때마다 난 너랑 섹스할 거야. 내 좆을 네 안 깊숙이 밀어 넣고 몸 구석구석 물고 빨고 핥으면서.

“참고로 말하는데 나 지금까지 무성욕이었어. 미국에서 한 번 해보긴 했는데, 별로 재미가 없더라고. 잘 서지도 않고. 그런데 너를 볼 때만은 달라져.”

“달, 달라진다고? 뭐가?”

“좆이 발딱 선다고. 아, 미안. 좀 더 고상한 말로, 페니스가 발기를 해버려. 그래서 너 생각하면서 혼자 많이 뺐지.”

등골에 서늘한 한기가 일었다. 그녀는 달달 떨어대는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그리고 용기를 쥐어짜내 물었다.

“그럼 그 관계는… 언제까지 계속되는데? 어느 한쪽이 질릴 때까지?”

그녀는 흐린 눈으로 주하의 완벽한 외양을 보았다. 적어도 그녀가 질릴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돈에 질릴 일은 더더욱.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중간에 무슨 일이 있다 해도, 네가 3년 뒤 졸업해서 취직할 때까진 확실히 지원 보장해 줄게. 학비, 생활비, 월세, 용돈 모두.”

“하나만 더 물을게, 강주하.”

시간은 벌써 열 한 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 유주는 잘근잘근 짓씹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왜 나야? 나… 정말 좋아해?”

“……..”

“진짜 이유가 뭐야? 그렇게까지 나랑 사귀고 싶은 이유.”

당연히 너를 좋아해서지. 유주는 그가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고, 그러길 원했다. 그러면 돈은 일단 제쳐두고 마음 놓고 행복감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궁핍한 생활고가 발목을 잡고 고된 일상을 이어가도, 사랑에의 막연한 동경까지 막지는 못했다. 더욱이 강주하는 처음으로 그녀가 매력을 느낀 이성이었다.

주하는 한참 동안 그녀를 굽어보았다. 유주는 미간을 좁히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누구도 곁에 두지 않고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는 그 냉랭함의 정체가 항상 궁금했었다.

강의 시작 전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강의가 끝나면 또 후다닥 달려 나가고, 과 활동이나 동아리엔 영혼 한 점 줄 겨를 없이 바빴다. 그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가끔씩 그가 보일 때마다 호기심이 일었다. 저 눈빛이 담고 있는 건 무엇일지.

“너는 내가 원하는 두 가지 요건을 완벽히 충족시켜 줄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유주는 그 눈빛의 정의를 확실히 깨달았다.

“섹스하고 싶은 욕구를 끊임없이 일으키는 몸. 그리고 쿨한 멘탈.”

“쿨한… 멘탈?”

유주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그의 말을 반복해서 읊었다. 첫 번째 요건에선 얼굴이 귓불까지 뜨거워졌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녀 간에 섹스어필이 안 되는 몸이라면 사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

“쿨한 멘탈이라니.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나한테 집착하지 않을 것 같아서. 지갑이 채워지면 굳이 집착하려 들지도 않을 테고.”

“뭐? 그게 무슨……”

그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유주는 그 눈 속에 담긴 정체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난 피곤한 거 질색이야. 정신적으로는 나한테 집착 안 했으면 좋겠어서. 사소한 일에 기 싸움하고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서 휘두르려는 타입은 사양이거든. 급식 시절, 그런 여자애들이 있었는데 그런 감정 소모 정말 쥐약이었어. 모르지, 그래서 발기도 제대로 안 됐는지.”

“뭐라고…? 무슨 말인지 아직도 잘 이해가……”

“돈 달라는 대로 주고, 해 달라는 거 다 해 주니까 정신적으로는 피곤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뭐 큰 거 바라는 게 아니잖아. 섹스할 때 나눴던 교감을 다른 것에서 망치고 싶지 않다는 거지.”

“피곤… 집착… 싫다는 거 알겠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래? 나 정말 모르겠어서 그래.”

“굳이 예를 들자면, 인터넷상에 올라오는 연애 고민이나 갈등 같은 거? 부부 공방전 같은 거 다루는 토크쇼. 그런 데서 항상 이슈 되는 것들 있잖아. 여자들 언어 따로 있고 팩트보다 감성적인 것에 초점 맞춰서 멋대로 해석하고, 예민하게 굴고, 피곤하게 하는 모든 발단. 아예 처음부터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건 남녀 간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문제 아니야? 함께 하면서 하나씩 극복해가는 필수 불가결한 충돌 같은 거.”

강주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그런 건 불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럼… 너는 어떻게 하길 원한다는 거야? 의견 차이나 충돌은 사람 관계에서 원하지 않아도 생기는 거고, 다들 맞춰가는 과정을 통해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중요하지도 않고 자잘한 일상의 의견 차이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맞추는 것으로 다 해결돼.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랬으면 좋겠어.”

“잠깐만… 그럼 만약 우리가 사귀면……”

머릿속에서 종이 뎅 울렸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등줄기를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다 맞춰 줘야 하는 거야? 그런 거야?”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무감정함보다 훨씬 더 온화하고 차분한 표정이 어렸다.

“응. 내가 어릴 때 독립적으로 자라서 그런지 무조건 주도권을 쥐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이 있어.”

온갖 의혹과 의구심 속에서도 간질간질 설렘을 멈추지 않고 있던 유주의 심장 어딘가가 후둑 내려앉았다.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던 강주하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지금껏 누구도 알 수 없던, 엄청난 가치관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강주하는 잔고가 0을 보일 때까지 돈을 물 쓰듯 하는 방탕한 소비자일 뿐 아니라, 이 시대 사라져가는 가부장 제도의 옹호자이자 뼛속까지 물질만능주의자였다. 유주의 시각에서는 다른 말로 또라이였다.

* * *

모든 직장인들이 가장 행복해하는 시간, 금요일 저녁 퇴근 시간이다. 유주는 흔들리는 버스 창 너머, 아직 환한 태양 아래 반짝이는 한강의 수면을 넋 놓고 보고 있다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7년 전 한 남자의 잔상을 떨쳐내려 애썼다.

왜 느닷없이 오래전 일이 떠올랐는지. 조금 전, 퇴근할 준비를 마치고 한숨 돌리며 휴게실에서 봤던 TV가 사단이었다.

시청자들이 연애에의 고민과 문제에 대한 사연을 보내면, 예능인과 심리 전문가 등이 패널로 출연해 사연을 읽으며 제 일처럼 조언해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오늘은 하필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지나치게 가부장적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사연으로 패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던 차였다.

나이 차 좀 있는 남자친구가 다른 건 다 완벽하고, 해 달라는 것을 다 해주며 전생에 공주와 기사가 아니었나 싶을 만큼 애지중지해주는데 매우 가부장적이란 것이다.

여자가 그러면 안 되지, 라는 발언은 기본이고 사소한 의견 차이에도 당연히 남자 의견을 따르는 게 맞다고 여자의 말은 일축해 버리는데 과연 이런 사람과 결혼해도 될지에 대한 사연이었다. 패널들이 갑론을박을 벌이던 중에 퇴근을 하게 되어 결론은 보지 못했다.

대신, 7년 전의 그 어이없던 대화만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이젠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해프닝일 수밖에 없었다. 강주하는 그렇게 사귀자고 말해 놓고, 다음날 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어릴 적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친부모님처럼 돌봐주셔서 돈독하기 그지없는 할아버지가 뉴욕에서 뇌출혈로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새벽에 왔다고 교수님을 통해 과 전체에 전해졌다. 그리고 강주하는 한 학기가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연이은 휴학, 급기야 중퇴 소식에도 그의 근황을 직접 전해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풍문으로 듣자니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미국 사업을 물려받는 것 같더라, 어차피 국적도 미국이니까 아예 자리 잡고 정착하려나 보다, 그럴듯한 소문만 간간이 들려왔다.

그는 몇 달간 유주에게 이메일과 국제전화로 여러 번 연락을 시도해 왔었다. 하지만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눈코 뜰 새 없는 데다 엇갈리는 시차까지 더해, 그녀가 연락을 제때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안부를 묻는 짤막한 이메일에도 답장을 할 겨를이 없었다. 잠시 짬이 날 때도, 한참 동안 이메일만 띄워 놓고 결국 닫아버리기 일쑤였다.

역시 그의 마지막 발언 때문인 듯했다. 사귀자, 너랑 섹스하고 싶다.

거기까진 그렇다 치자. 하지만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집착하지 않고,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서 휘두르고 이겨 먹으려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저와 사귀고 싶다니 그게 말인가 막걸리인가. 상당히 비뚤어진 여성관, 연애관이다.

필요한 만큼 돈은 다 줄 테니 그 대가를 치르라 이거잖아. 다리 벌리고 좆 받아들이고 모든 걸 다 저에게 맞추라고.

헛웃음이 나왔다. 조선 시대에서 타임 슬립해 온 고관대작 양반도 그보단 낫겠다 싶었다. 대체 어릴 때 할아버지께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랐길래. 미국에서 산 게 아니었나?

유주는 할아버지께는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고, 그쪽에 정착할 것이라고 들었는데 부디 잘 지내길 바란다는 작별인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내고 주하의 이메일 주소를 스팸 처리 해버렸다. 그 후로 학교 계정 이메일의 스팸 보관함은 열어보지도 않았고 졸업 후에는 계정을 아예 열어 보지도 않았다.

그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휴대폰 번호가 한 번 바뀌었고 졸업반 때는 멀리서 동경하는 상대도 생겼다. 졸업 직후 시골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세상에 정말 홀로 남겨졌다는 슬픔에 부모님 장례 때보다 더 크게 오열하며 울었다.

그래도 신은 늘 매정하진 않았다. 타이밍도 절묘하게, 창고에서 과로로 쓰러지고 강주하가 미국으로 떠난 뒤 얼마 안 돼서 엄청난 행운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과외 학생의 학부모 소개로, 주한 교포 교수 자녀의 홈스쿨링 한국인 교사 겸 입주 돌보미란 일자리가 들어왔다.

안전한 거처에서의 숙식이 한꺼번에 해결되고, 그럭저럭 제 공부에도 집중하면서 적지 않은 돈도 따박따박 들어오는 일자리였다. 유주의 상황에서는 다시 없을 최고의 기회였다. 중간중간 학자금 대출을 받았는데도 아르바이트 일곱 개씩 뛰던 예전에 비해서는 훨씬 대학다운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기 직전 전화가 걸려왔다. 하우스 메이트이자 집주인인 음정혜였다.

“언니, 지금 퇴근하고 있어. 아, 버스라서 조금 막히네. 지하철이 더 빠르긴 한데 50원 아껴야지. 매일 출퇴근에서 100원씩 아끼면 한 달이면 커피 한 잔인데.”

“어휴, 징한 것. 이제 조금 숨통도 트였는데 그 정도는 괜찮잖아. 하여간 병이다, 병.”

“난 원래 버스가 더 좋아. 지하철은 답답한데 버스는 밖을 볼 수 있잖아. 그나저나 오늘 밤은 정주 언니도 온다고 했었지? 알았어. 먼저 가서 치맥 준비해놓고 있을게.”

유주는 조금 심란한 얼굴로 버스에서 내렸다. 시골 고향에서 올라온 이웃사촌 언니들과 거실 없는 방 세 칸짜리 빌라에서 전세로 같이 산 지 어언 4년째였다. 생활비도 아끼고 서로 의지하면서 부대끼고 살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좀 더 같이 살면 좋을 텐데. 적어도 셋 중 하나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이젠 뿔뿔이 흩어지게 됐네.

빌라 주인이 곧 결혼할 아들 부부의 신혼집으로 줄 것이니 최대한 빨리 집을 빼달라고 부탁해왔다. 자매 중 맏이인 정혜는 이참에 직장 앞의 오피스텔로, 둘째 정연은 전부터 가고 싶어 했던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로, 지난달 모두의 거처가 결정되었다.

유주의 관공서 임시직 계약 기간도 출산휴가로 쉬었던 직원이 다음 주 복직하면서 끝날 예정이었다. 한 달 전부터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어보고 면접도 보고 있지만, 현실은 역시 녹록지가 않았다. 요즘은 해외연수, 외국어 능력 등의 뚜렷한 스펙 없이는 명문대 졸업장만으로 공개 채용 경쟁에 살아남기 쉽지 않다.

‘지금 이대로라면 연애는커녕 언제고 오늘처럼 쓰러져서 결국 제 몸도 못 추스르고 학점도 엉망이 되어버릴 거고, 결국은 한 학기 만에 휴학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기로에 서게 되겠지.’

갑자기 7년 전 뼈 때리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복학해도 이것저것 또 닥치는 대로 알바하고 또 휴학하고, 그러길 반복하다가 동기들 다 졸업하고 취직해서 자리 잡아갈 때쯤 간신히 졸업해서 명문대 문헌정보학과 타이틀 달랑 하나로 대기업들만 이력서 돌리다가 서른이 넘어서야 현실을 깨닫고 중소기업으로 들어가서 시달리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면 자괴감에 빠지겠지. 이 나이 되도록 뼈 빠지게 고생만 했는데 연애도 한 번 못 해보고 변변한 내 집 한 칸 없는 서러움에 눈물도 나겠지.’

언덕길을 오르던 유주는 뒷굽에서 빠각, 소리가 날 만큼 발에 힘을 주었다. 다행히 입주 튜터 일 덕분에 거듭된 휴학과 늦은 졸업은 면했지만, 그 후로는 왠지 그놈의 저주 같은 예언대로 흘러갈까 봐 위액이 치솟았다.

서른다섯 전에 대출 껴서라도 조그만 집 하나만 마련하면 소원이 없겠는데. 여기저기 이사 다니지 않게. 아니 그 전에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할 수 있다면… 아무도 못 만나면 그냥 독거노인으로 외롭게 혼자 늙어 죽고. 그건 정말 싫지만.

일곱 시가 넘어서야 해가 뉘엿뉘엿 질 기미를 보였다. 유월의 마지막 금요일, 해지는 시간이 부쩍 늦춰져 있었다.

* * *

관공서에서의 마지막 근무일, 그동안 성실하게 일해 준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주무관들이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초청 강연회로 업무교류가 있었던 대학 강사와 교수 몇 명도 동석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유주를 데려간 게 화근이었다.

늦은 시간에다 술도 약한데 살짝 과음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공무상 안면이 있다고 덜컥 믿은 게 잘못이었다. 강사는 마침 차를 주차해 둔 건물 일 층에 부모님이 운영하는 골프 연습장이 있으니, 술도 깨게 잠깐 커피 한 잔만 마시자고 제안했다.

“어차피 대리기사 불러야 하니까요. 커피 머신 있으니까 한 잔씩만 하고 기다리시죠. 부모님은 안 계시고 손님들만 있을 거예요.”

유주가 조금 망설이다 실내로 들어선 순간, 그는 점잖고 젠틀하던 가면을 벗고 짐승처럼 변했다. 뭉툭한 손가락이 다가와 우악스럽게 옷을 잡아당겼다. 하늘하늘한 원피스 천이 부욱, 소리 지르며 찢겨나갈 것만 같았다. 유주는 꺄악 비명을 지르며 문을 향해 달려갔지만, 그가 더 빨랐다.

“야, 너 어디 도망가? 이 쌍년이 사람 감질나게……”

상의를 당기던 거친 손이 등 뒤에서 허리를 낚아채 확 끌어당겼다. 하악, 유주는 발버둥 치다 다리가 꺾여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잘못 넘어져서 발목이 아팠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훨씬 더 컸다.

“서, 선생님… 왜, 왜 이러세요?”

“뭔 소리야, 왜 이러긴. 네가 먼저 자꾸 흘렸잖아.”

“네에? 흘리다니 무슨….”

“네가 자꾸 가슴 내밀면서 나 보고 웃었잖아, 씨발. 먼저 유혹해놓고 이제 와서 왜 발뺌이야?”

세상 점잖던 강사 변태민의 일그러진 얼굴이 천장의 간접 등 아래 무시무시하게 빛났다. 유주는 흐트러진 원피스 앞을 여미며 벌벌 떨었다. 희대의 살인마에게 저녁 초대를 받았다가 살인마가 드디어 마각을 드러내어 진짜 저녁거리였던 그녀를 통째로 회 뜨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까 화장실 앞에서 봊년들끼리 떠드는 거 들었는데 너도 남자다운 남자한테 끌린다며… 큭큭…. 나도 젠틀한 척 해왔지만 실은 그런 타입이야. 너처럼 가슴 수박만 한데 얼굴은 귀여운 동안이 딱 내 취향이고.”

변태민은 알콜로 충혈된 눈을 희번덕거리며 유주에게 한 발짝씩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서 집었는지 한 손에는 승마용 채찍이 들려 있었다. 그는 실실 웃으며 탄력성을 시험해 보려는 듯 촤악, 바닥을 후려쳤다. 알고 보니 미친 변태 새끼가 따로 없었다.

“마지막이라니 너무 아쉬운데, 여기서 한 번만 하자. 아니, 한 번으로 끝내기도 아쉬운데… 너 남친 없다며? 아예 나랑 섹파 안 할래? 오빠가 용돈은 넉넉하게 줄게, 응? 지지리 궁상떨며 살지 말고 보테크하면서 편하게 살아,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인데 재능을 썩히면 쓰나.”

이거 아주 사람의 탈을 쓴 개새끼구나. 유주는 간신히 일어나 뒷걸음질 치다 계산대 옆의 골프채 꽂이를 보았다. 더 생각할 겨를 없이 골프채를 하나 빼 들고 그를 향해 겨눴다. 손이 파들파들 떨려서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았다. 유주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앙칼지게 말했다.

“좋게 말할 때 뒤로 물러나세요. 그거 내려놓고.”

“뭐? 너야말로 그거 내려놔라, 좋게 말할 때.”

변태민은 비열한 웃음을 띠고 채찍을 든 채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난 대리기사 올 때까지 기다리자 해서 들어온 것뿐이에요! 이렇게 아무도 없는 줄도 모르고…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데려온 줄 알았으면 절대, 절대……”

“야, 너 아까 김주임이 결혼한다 그러니까 엄청 부러워했잖아? 좆됐다는 얼굴이길래 내가 위로해 주려는데 왜 자꾸 튕겨? 네 입으로 아까 봊년들끼리 속닥댈 때 분명히 그랬잖아? 평소엔 다정하고 밤에는 거친 남자 좋아한다고… 여자들은 원래 뼛속까지 창년들이라 지배되고 구속되고 험하게 박히는 거 좋아해. 좋아서 환장할 테니까 그거 이리 내.”

“비켜, 이 변태 자식아!”

그가 한 손을 뻗는 순간 유주의 손에 있던 골프채도 앞으로 뻗어 나갔다. 둔탁한 소리와 외마디 비명에 유주는 감았던 눈을 떴다. 변태민이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 사이를 감싸 쥐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유주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때를 놓치면 달아날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을 집어 들고 황급히 출입문을 열었다. 등 뒤에서 앵앵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야, 씨발, 이거, 이 골프채, 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건데 깨졌어! 야! 너 어디 가…!”

그다음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유주는 잡히면 끝이라 생각하고, 실내골프 연습장 로고가 크게 박힌 정문 밖으로 내달렸다. 옆 건물 경비실에 박차고 들어가 경찰을 부르고, 정혜 언니에게 전화해 와달라고 청한 것까지는 용케 해낸 것 같았다.

* * *

정신을 차려보니 경찰서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정혜가 책상 너머 경사들에게 핏대를 올리고 뭐라 뭐라 따발총처럼 쏘아대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폭행 미수로 그쳐요? 혹시 그놈 아버지가 뭐 교수라고 이 정도로 그치는 겁니까? 네? 겉으로만 있는 척, 점잖은 척했지 아주 막돼먹은 집구석 변태 놈이라니까! 옷 강제로 찢고 못 나가게 완력으로 막았으니 엄연히 폭행 아닌가요? 거기다 감금, 강간 미수도 플러스 해야죠!”

“예, 충분히 그렇게 말씀하실 근거가 있습니다. 아주 이름값을 하네요. 이름도 변태민. 크흠!”

남자 경사는 정혜의 항의에 백 번 공감하고 동조한다고 안타깝게 말했다. 옆의 여경사가 바통을 이어받아 훌쩍이는 유주를 배려해서 목소리를 낮췄다.

“일단 CCTV 증거도 있으니 강간 미수 혐의가 적용될 겁니다. 다행히 실제 구타는 없었고 채찍도 사용되기 전에 다행히 피해자분이 현장을 빠져나와 상해는 입지 않으셨지만…”

“그러니까요! 간신히 도망치지 않았으면 그 채찍으로 맞았을 거 아니에요? 세상이 말세긴 말세야! 그렇게 세상 젠틀하고 점잖은 척 가식 떨더니 알고 보니 그런 시커먼 속이 있었던 거였어. 게다가 변태도 그런 상 변태가 없잖아요. 싸구려 sm을 얼마나 처 봤는지. 지가 무슨 크리스찬 그레이도 아니고.”

“예? 누구요?”

경사가 이해를 못 한 얼굴로 정혜를 보았다.

“크리스찬 그레이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남자주인공. 모르세요?”

경사는 도통 누군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피의자 쪽 변호 대리인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친고죄가 적용되지 않는 범죄이기 때문에 단순히 합의만으로 끝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합의에 따라서 불기소처분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에 혹시 합의할 의사가 있는지…”

“그쪽 변호사란 사람에게 합의금 얼마 줄 건지 들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해주세요. 그게 순서 아닌가요?”

음정혜가 쌍심지를 돋우며 끼어들자 유주가 엉망이 된 얼굴을 물티슈로 닦고 고개를 들었다. 목을 몇 번이나 가다듬었지만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돈은 필요 없으니까 정식으로 사과만 하라고 해주세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서면으로요.”

“유주야, 그건 당연한 거고 돈도 받아야지. 돈 없는 집구석도 아닌데 최소 몇백은 받아야지! 어차피 그쪽에겐 껌값일 뿐이야.”

“응, 그래서 돈은 안 받을 거야. 구직 상태라 돈이 절실하긴 해도… 돈 많은 집에서 돈으로 적당히 수습하려는 건 거절할 거야. 제대로 사죄하기 전에는 합의 절대 안 해 줄 거고.”

유주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빗질하며 경사 쪽을 돌아보았다.

“반드시 서면으로 성의껏 제출해달라고 해주세요. 사과문 내용 보고 합의에 응할 테니까. 다시는 보고 싶지 않고… 목소리도 듣기 싫어요.”

뇌리에 떠올리자마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음정혜는 돈과 사과문 모두 요구하라 했지만 유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한 푼이 아쉽고 돈이 좋아도, 행여나 금수저 집 자식에게서 금전적 이득을 노렸다, 그런 오해는 절대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문득, 경황이 없어서 내내 확인하지 못했던 문자가 생각났다.

“아, 진짜. 그런 놈은 사과문 정도로 안 되는데. 뭐, 어차피 네가 합의해 줘도 친고죄가 아니니 처벌을 완전히 면할 수는 없겠지만.”

유주는 음정혜의 투덜거림을 배경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진즉에 확인했어야 할 중요한 문자였다.

[서유주님, 축하드립니다. BK 금융 에셋 디벨로퍼 신입사원 상반기 추가 공채 인턴직에 최종 합격 되셨습니다. 송부된 이메일을 확인하여 준비물을 지참하고 1차 오리엔테이션 날짜에 맞춰서 삼성동 본사 11층으로…(중략)]

“유주야. 그냥 돈 받자! 분하지만 그 변태 새끼한텐 어차피 푼돈이…”

“언니, 괜찮아. 나 이제 구직 중 아니야. 인생사 새옹지마란 말이 진짜 맞나 봐. 제일 조건 좋고 기대 안 했던 곳에서… 이렇게 연락이 왔어.”

유주는 휴대폰 문자를 정혜에게도 보여 주었다.

“어머! 잘 됐다, 유주야. 진짜 잘됐어! 으이그, 이렇게 좋은 소식이 와 있었는데 그 좆방망이 회 쳐서 까마귀들에게 던져줄 놈 때문에 정신만 사납네!”

유주의 얼굴에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균열이 일었다. 마구 웃고 싶은데 변태에게 받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아 입술이 비뚤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정혜 언니가 추후 전달 사항에 대해 경사와 얘기하고 공영 주차장의 차를 가져올 때까지, 유주는 경찰서 후문 계단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제야 덜덜 떨렸던 몸도 진정되고 심장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밤 열 시가 넘어 있었다. 번쩍거리는 마천루의 야경이 무척 예뻤다. 사진으로만 본 홍콩이나 뉴욕과도 조금 닮은 것 같았다.

경찰서는 대형 연예기획사와 뷰티 패션, 그에 딸린 부가 산업들의 메카 한복판에 있었다. 명품 로고 간판과 전광판들이 조명에 반사되어 번쩍번쩍 광채 나는 도로는 비싼 수입차들에 빽빽하게 점유당해 있다.

서울 시내, 가장 화려하고 부유한 영역에는 길을 걷는 행인들도 거의 없었다. 다들 차로만 이동하니 거리에 나올 일 자체가 없는 것이다. 내로라하는 부촌 골목의 보행자들 대부분이 출퇴근하는 도우미들인 것처럼.

다시는 이쪽 동네 얼씬도 안 해야지.

유주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떨어져 내렸다. 여기저기, 럭셔리한 주변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기중기가 흉물스러운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한 채에 수백억이 될 건물, 한 공간당 수십억을 호가할 구축 아파트의 재건축 건설 현장이다.

유주는 서글픈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14년 전, 부모님이 사기를 당해 사업이 기울고 차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세 가족이 살았던 보금자리였다.

재건축되면 몇십억이 되든 몇백억이 되든, 그녀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콘크리트 덩어리는 그 옛날 행복하고 단란했던 기억이 스며든 현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유주야, 어서 타!”

정혜의 낡은 차가 코앞에서 멈췄다. 유주는 손등으로 얼굴을 쓱 문지르고 운전석 옆에 올라탔다. 일 년간 무탈했던 첫 임시직 사회생활은 이로써 아름답지 못하게 끝났다. 남은 것은 이 그리운 동네에의 마지막 불미스러운 기억, 앞으로는 쓰레기 변태를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뿐이다.

괜찮아. 힘내자. 이 실업난에 구직자 신분에서 탈출해서 이렇게 탄탄한 중견업체의 부름을 받았잖아. 비록 6개월간의 인턴 기간 뒤 업무능력에 따라 정규직으로의 승격 조건이 있긴 하지만.

신은 공평하게 한 손에 나쁜 것, 다른 손에 좋은 것을 나란히 쥐여 주었다.

1화: 근접하는 실버문

그렇게 기적적인 합격 후, 인턴 기간 중에서도 한 달간의 수습 기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직도 배울 것은 많고 익숙하지 못한 것 투성이었지만, 매일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게 무척 기뻤다. 게다가 제2 금융저축은행 산하 부동산 디벨로퍼 회사이기도 한 만큼, 인턴직에게도 전세금 대출 지원이 된다는 파격적인 희소식은 보너스 같았다.

한 달 안에는 자취방을 얻어서 나가야 하는데 최대한 직장 근접 거처를 알아보려니 예산이 빠듯했다. 회사가 강남 노른자위 땅 한복판에 있어서 방세나 물가 모두, 지금 살고 있는 지역보다 최소 1.5배는 비쌌다.

고모와 삼촌이 나 몰라라 하는 바람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병원비를 유주 혼자 취준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를 몇 건이나 뛰어서 겨우겨우 마련했었다. 고모와 삼촌은 당신들 형편도 빠듯하다고 어린 조카에게 모질게 말했다.

‘너 고아 되고 할머니가 다 거둬주셨잖니. 학교는 역시 서울로 가야 한다고 고등학교부터는 다시 서울 상경시키고 뒷바라지하느라 우리에게도 여러 번 급전 빌려 가셨는데, 그 은혜는 네가 갚아야지. 안 그러니?’

그리고 할머니 장례를 치르자마자, 조그만 시골집과 전답을 모두 팔아 버린 자금을 다 빼돌리고 그녀에겐 일언반구 언급도 없었다. 할머니 49제가 끝난 날, 유주는 친척들의 연락처를 모두 지웠다. 행여나 어려울 때 전화해 버려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유주 씨, 점심 뭐 먹을 거예요? 간단하게 요 앞에서 샌드위치 어때요?”

“네, 같이 가요. 오늘부터 2주간 공사로 직원 식당 안 여니까 좀 난감하네요. 뭘 먹어야 할지.”

“맞아요. 3500원이라 부담도 없고 맛있고, 직원 식당이 최곤데! 그래도 수습 기간 끝나고 이번 달 급여부턴 중식비, 간식비까지 따로 붙으니까 너무 좋아요.”

그녀는 발걸음도 가볍게 인턴 동기들과 건너편 쇼핑센터 푸드코트로 향했다.

“유주 씨, 전세자금 대출 신청은 결과 아직이에요? 한 달 안에 이사 가야 한댔잖아요. 아휴, 입사하자마자 정신없긴 하겠어요.”

“네, 아직이긴 한데 다음 주에 결과가 나올 거래요. 특별한 신용 문제나 결격사유만 없으면 된다니까 반쯤은 안심하고 있어요.”

유주는 생긋 웃으며 야외정원과 분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동기들과 자리를 잡았다. 그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서 테라스 쪽을 흘깃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기분 탓이려니 여기고 다시 테이블로 주의를 집중했다. 동기 중 하나가 갑자기 생각난 듯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우리 드디어 내일은 담당 부서 배치일이에요! 꺅, 은근 긴장되는 거 있죠? 잘해야 6개월 뒤 정규직이 될 텐데. 절대평가라 너무 다행이에요. 우리 힘내서 꼭 올 정규직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게요. 우리 뿔뿔이 흩어져도 단톡방으로 계속 연락하고 가끔 이렇게 만나서 밥 먹어요! 난 솔직히 신탁 관리 부서가 전공에도 맞고 디벨로퍼 최핵심 팀이라 거기가 좋긴 한데… 그러고 보니 어제 저 특급정보 겟했어요! 이건 저희 사수 장 과장님이 어제 회식에서 취중에 흘려주신 완전 핫한 정보인데……”

다른 동기가 한결 더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새로 생기는 디벨로퍼 메인 부서 있잖아요? 거기 총괄 본부장이 새로 발령받아 온대요. 그것도 최연소에 하버드 MBA출신!”

“최연소면 몇 살이에요? 서른?”

“아니, 이십 대래요! 스물여덟. 엄청 잘생기고, 섹시하고, 피지컬이 럭비선수래요!”

“헉, 정말요? 꺄, 너무 기대된다! 어떡해! 스물여덟이면 아직 미혼이겠죠?”

그때 정보를 날라준 동기가 여자 넷의 호들갑스러운 환성을 깨버렸다.

“성격이 굉장히 까칠하대요. 결벽증스러운 면도 강하고……”

아아, 여자들의 입에서 약속이나 한 듯 탄식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업무적인 거라면 오히려 그런 완벽주의자 상사가 좋을 수도 있잖아요. 배울 점도 많고.”

“그게 업무적인 것도 있지만… 이건 순전히 장 과장님 의견이긴 한데,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즉시 머릿속에서 싹 다 지워야 돼요. 사회생활 하면서 제일 중요한 거 첫째도 입조심, 둘째도 입조심. 다들 알죠?”

“절대 말 안 해요! 뭔데, 뭔데… 궁금해 죽겠다!”

“결벽증은 여자한테만 유독 그런 것 같대요. 여성 불신증에 불감증 그런 거? 스킨십 같은 건 극도로 싫어하고 엄청 철벽을 친다는데 제일 유력한 근거가 팩트 하나, 소문 하나예요.”

뭔데요, 뭔데요, 여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빨리 얘기가 이어지길 재촉했다. 유주도 호기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팩트는 미국에 있을 때 엄청난 스캔들에 억울하게 휘말렸다는 건데, 대학 동창이랑 손끝 하나 스친 적도 없는데 자기가 본부장님 아이를 임신했다고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 자살 행각 벌이고 난리도 아니었대요. 그 여자 집안이 부동산 준재벌급이라 여차여차 수습해서 언론에 퍼지지는 않았지만요. 결국 임신한 아이도 다른 남자 아이인 걸로 밝혀졌고요.”

“오 마이 갓! 나라도 학을 떼겠다. 그래서 여자 불신증에 불감증 걸려버린 거래요? 어떡해, 심리적 트라우마가 엄청 컸나 보다. 그럼 소문은 뭐예요?”

“혹시 성 소수자?”

다른 한 명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정보를 물어온 동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다시 한번 커다란 탄식을 흘렸다.

“아니 왜 멋있는 남자들은 다 그쪽이래요? 여자들은 어떡하라고… 흑흑. 미국이 특히 더해.”

“검증 안 된 루머에 그냥 의견이니까 절대 발설하면 안 돼요! 어쨌든 상사가 그렇게 톱스타급이면 우리야 최소 눈이 즐거우니까 뭐… 훗훗.”

“우리 중에 누군가도 디벨로퍼 부서로 이동되면 좋겠네요, 소식통으로!”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표정들을 지었다. 간소한 식사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유주는 다시 한번 시선을 느꼈다. 테라스 쪽을 휙 돌아보았다. 쇼핑몰을 오가는 행인과 쇼핑객만 드문드문 보일 뿐, 그녀 쪽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쇼핑몰을 나오는데 외국인 남자 둘이 지나가다 그녀를 빤히 보고 웃었다. 유주는 미간을 좁히고 제 몸을 요모조모 내려다보았다. 옷이 어디 흐트러졌나?

그녀에겐 딱 적당한 만큼의 자존심과 자존감이 있었다. 길을 가다 남자가 빤히 쳐다보기라도 하면 주제에 보는 눈은 있네, 내가 좀 예쁘긴 하지 김칫국을 마시는 대신, 얼굴에 뭐가 묻었나 얼굴을 만져 보고 옷차림새를 살펴보는 타입이었다.

“유주 씨, 왜 그래요? 뭐 떨어뜨렸어요?”

“아, 아뇨. 방금 저 외국인들이 지나치면서 웃길래 뭐 묻었나 해서요.”

“아무것도 안 묻었는데요? 음, 예뻐서 쳐다봤겠죠. 그리고… 가슴도 크고.”

동기가 짓궂게 웃자 다른 여자가 거들며 속삭였다.

“맞아요. 유주 씨 몸매 진짜 짱이에요! 왜 남친이 없는지 모르겠다니까. 키는 아담하니 보통인데 비율이 너무 이기적이라니까요. 몇 컵이에요? F?”

“네에? 그럴 리가. 그리고 F까진 안 가요.”

여자들은 부러움 반, 악의 없는 놀림 반으로 키득거리며 유주를 사무실로 잡아끌었다.

* * *

유주는 잠자리에 들기 전,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한 달에 한 번, 여성의 욕구가 생리적으로 가장 왕성해지는 생체 주기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바이올린 선율이 귓가를 채우고 있었다. 아주 유명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알고 있는 곡이다.

맞아. 코른골트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언제 들었더라? 공주님 같은 이름의 여성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했었는데… 아 맞다. 아라벨라 슈타인바허였지. 미안하지만 영상의 본질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네.

오십 초중반으로 짐작되는 잘생긴 신사가 우아한 카페 테이블에 앉아 있다. 문이 열리고 젊은 남녀가 웃으며 들어선다. 남자는 땅딸막하고 평범한 외모인데 금발의 여자는 키도 크고 늘씬한 미인이라 한눈에도 어울리는 커플은 아니다.

남자는 테이블로 다가가 기쁜 듯이 웃는다. 그리고 슬라브 악센트가 아주 강한 영어로 말한다.

“아버지! 일찍 오셨네요. 제 약혼녀 마리아를 소개할게요. 마리아, 이리 와. 바로 이분이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지금까지 헌신적으로 날 키워주신 아버지야. 내가 당신 빼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마리…”

여자는 말을 잇지 못한다. 아름답게 웃던 얼굴이 충격에 일그러지고 있다. 부릅뜬 두 눈 아래 인조 속눈썹이 바들바들 떨린다. 책 읽듯 대사를 치는 남자보다는 여자 쪽 연기가 더 자연스럽다.

“당신은…!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청년의 아버지도 적잖이 놀란 것 같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신사의 얼굴도 경악에 휩싸여 있다. 원수나 적을 맞닥뜨린 분위기와는 다르다. 뭔가 다른 분위기가 미래의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흐르고 있다. 중간에 낀 청년만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한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마리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응?”

“안톤. 미안해. 나중에 연락할게.”

마리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어색하게 카페를 뛰쳐나간다. 안톤이라 불린 청년은 당황해서 제 아버지를 닦달하기 시작한다.

“아버지, 무슨 일이에요? 혹시 마리아랑 아는 사이세요? 네?”

그러나 남자의 아버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다. 아들은 답답한지 마리아! 마리아! 한참 늦게 외치며 카페 밖으로 뛰쳐나간다. 신사는 상당히 묘한 표정이 되어 다시 자리에 앉는다.

장면이 바뀌고 남자의 아버지는 으리으리한 사무실 소파에 마리아와 마주 앉아 있다. 그에게선 성공한 사업가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미래에 고부간이 될지 모르는 두 사람 간에 이상한 스파크가 튀고 있다. 아버지가 먼저 침묵을 깬다.

“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어, 마리아. 5년 전 그렇게 사라져서 무척 상심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그것도 내 아들과……”

“마크. 아니 미스터 존스.”

마리아가 마크보다 알렉세이, 세르게이 같은 이름이 더 어울릴 법한 제 아버지뻘 되는 남자를 본다. 파란 눈에 애증으로 해석되는 감정이 실려 있다.

“안톤과 헤어지겠어요. 다시는 두 사람 다 만나는 일 없기를 바랍니다. 그럼.”

“잠깐, 마리아!”

마크라 불린 남자가 허겁지겁 마리아의 손목을 잡는다. 연기가 너무 어색해서 보는 이의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본격적인 전개에선 저렇게 어색하지 않기만을 빌었다.

“마리아, 널 진심으로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해.”

“미치셨어요? 당신은 5년 전 내가 빚 때문에 일했던 클럽의 손님일 뿐이었어요! 창녀와 손님 간의 관계일 뿐이었다고요!”

“너도 나한테 아직 감정이 있어! 그러니 안톤과도 이렇게 쉽게 헤어진다고 하는 거 아니야?”

잠시 몸부림이 진행된다. 잡아당기고 뿌리치고 다시 끌어안고 다시 밀어내길 반복하다가 남자가 마리아를 소파에 쓰러뜨리고 옷을 찢듯이 벗긴다. 마리아는 반항하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남자가 옷을 벗기기 쉽게끔 알아서 팔을 들고 엉덩이를 치켜들고 있다.

남자는 커다랗게 출렁이는 마리아의 젖가슴을 열심히 주무르고 물고 빨며 핥다가 벌써 불룩해진 바지 지퍼를 열고 성기를 꺼낸다. 단단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젊은 청년들의 것 못잖게 굵고 튼실해 보인다. 성기가 체모 하나 없이 매끈한 음부 안을 파고들어 끝까지 찔러 들어간다.

“아! 안돼요! 아흑! 아아앙! 앙! 앙! 응! 으응!”

마리아는 애써 우는 소리를 내지만 아무리 들어봐도 교태와 교성 쪽에 가깝다. 옛 고객은 그녀의 몸속을 거세게 퍽, 퍽, 박아대며 마리아, 마리아, 정신없이 이름을 부르다가 금세 속도를 높인다.

맞닿은 허리가 격렬하게 빨라지던 끝에 남자는 애액 거품에 젖은 제 것을 빼내어 마리아의 얼굴에 대고 갈긴다. 마리아는 몇 번 신음을 토하며 축 처져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장면이 바뀌고 갑자기 웨딩드레스, 연미복, 신혼여행 온 부부를 환영한다는 호텔 방문의 플랫카드, 장미꽃잎들이 흩뿌려진 하트형 침대 등이 보인다. 갓 결혼한 신랑 안톤은 신부 마리아와 샴페인을 들고는 그녀를 침대에 쓰러뜨린다. 공식적인 첫날밤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안톤과 마리아는 무난한 섹스를 선보인다. 보는 이로 하여금 별다른 감흥 없는 정사가 끝나고 불이 꺼진다.

마리아는 안톤이 곯아떨어진 걸 확인하고 침대에서 스르르 일어나 가운을 걸친다. 그리고 방을 나와 복도 끝에 있는 다른 룸의 문을 두드린다. 마크가 그녀를 안으로 들였고, 그녀는 문이 닫히자마자 버럭 화를 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죠? 신혼여행까지 쫓아와서 불러내다니! 안톤이 너무 힘들어서 약까지 먹는 바람에 결국 결혼하게 됐어요. 우리 과거는 철저히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래, 안톤만 모르게 하면 돼. 난 널 포기할 수 없어.”

“네? 뭐라고요? 이 미친… 난 이제 당신의 며느리예요! 당신은 내 시아버지고!”

마리아는 재빨리 문으로 다가가지만, 문은 특수 장치로 잠겼는지 열리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니 시아버지는 벌써 옷을 벗고 있다. 역시 배 나오고 땅딸막한 아들보다 훨씬 더 탄탄한 근육질의 몸이다.

“소리 지를 거예요!”

“방음 때문에 안 들릴 거야. 그래서 일부러 이 방을 예약해 놨어. 마리아, 이리 와. 우린 서로 사랑하면서 다 같이 행복할 수 있어.”

시아버지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마리아를 단번에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가운과 슬립, 팬티까지 빠르게 벗겨지고 알몸이 된 마리아는 짐승처럼 달려드는 남자의 몸 아래 순식간에 깔려 버렸다.

마리아는 싫다 싫다 하면서도 얼굴은 아까 남편 안톤과 담백한 정사를 나눌 때보다 더 붉게 물들어 있다. 교성도 한층 더 높았고 침대가 무너질 것처럼 발작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허벅지를 한껏 벌리고 페니스를 꼭 물고 조여대는 품이 너무 흥분되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고부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정사를 나누었다. 중간에 아들이 벌컥 문을 부수고 들어와 난장판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애널 섹스 부분은 도저히 취향이 아니라서 빨리 감기로 후딱 넘겨버렸다.

잠시 후 영상이 꺼졌다. 유주는 즐거운 관전 뒤의 허망함을 안고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정주 언니가 물려준 노트북에는 아직 보지 못한 영상들이 여럿 더 있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배덕물인 걸 모르고 봐서 깜짝 놀랐지만, 그런 극적 설정 때문에 은근히 짜릿한 스릴이 있었다. 하지만 그 끝에는 늘 허탈함 같은 게 있었다.

“아, 파일명이 #G였는데 샵지…. 그게 바로 시아버지였구나! 헉.”

유주는 뒤늦게 깨닫고 어둠 속에서 눈을 크게 떴다. 배덕한 영상물을 쫄깃하게 즐기고 잠드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잠시,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떠랴 싶었다.

“벌써 내 나이 스물일곱, 성인도 한참 성인인데 뭐. 수녀처럼 조신하게 살아왔는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조신해도 너무 조신했지……”

불을 끄고 머리를 베개에 얹었다. 그래서였나. 그런 배덕한 영상을 보면서 잠들었기 때문일까. 생체의 변화로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는 그저 앤이나 리라 이야기, 작은 아씨들, 키다리 아저씨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나 들춰보면서 맑고 순수한 시간을 보냈어야 했는데.

그렇게 배덕하고 모럴리스한 음란 영상을 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다음날, 잠시나마 음란함을 탐닉한 대가를 전혀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치렀던가 싶었다.

* * *

출근을 서두르며 현관 앞의 샌들을 신는데 뚝, 소리가 났다. 굽이 부러져 있었다. 정장용 샌들은 한 켤레뿐이라서 당황스러웠다.

유주는 신발장에서 서둘러 단화를 꺼내 신었다. 7월의 마지막 주는 매일같이 폭염이 기승을 부렸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쩐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미신인 걸 알아도 기분이 묘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순간 톡 소리가 울렸다.

“엇, 수지네?”

-선생님. 저 어젯밤에 삼촌이랑 한국 왔어요! 방학 동안 유럽 돌고 이제 마지막 한 달은 한국에서 지내려고요. 잘 지내시죠? 저랑 주말에 만나요!

-그래, 일 년 만에 또 보겠네! 내가 지금 출근길이라 이따 다시 전화할게.

유주는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톡을 보내고 버스에 올랐다. 졸업 전까지 4년 내내, 입주가정교사로 살았던 교수님의 딸 수지였다. 어느새 자매처럼 돈독한 사이가 되어 미국에 보딩스쿨, 대학에 들어간 뒤로도 일 년에 한 번은 귀국해 있는 동안 그녀를 만났다.

그런데 수지에게 삼촌이 계셨나? 하긴 만날 때마다 남친 얘기하는 것도 모자라니 친척 얘기까지 할 짬은 없겠지.

* * *

유주는 외근을 마치고, 전 직원이 모이는 월례 회의장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맨 끝자리에 착석했다. 새로 발령받아 온 임원들의 인사 및 소개는 이미 끝나 있었다.

이사 중 한 명이 형식적인 실적 브리핑과 차후 공지될 사원 복지 등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중, 유주는 단상 오른쪽에 앉아 있는 새 임원들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녀가 앉은 구석에선 옆얼굴만 간신히 보였다. 그때 맨 끝줄에 앉은 남자의 옆선을 보는 순간 시선이 멈췄다.

오전에 구두 굽 부러졌던 소리가 머릿속에서 덜컥 울렸다. 굽 소리는 점점 더 켜져서 거대한 종처럼 뎅, 뎅, 더 커져 갔다.

설마. 아닐 거야, 닮은 사람이겠지. 요즘은 남자들도 과학의 힘을 많이 빌리니까 저 정도 콧대에 절벽 같은 턱 정도는 흔하게…

유주는 숨을 멈췄다. 끝줄의 남자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시선이 부딪쳤다. 심장이 내려앉는 서늘한 감각에 명치까지 찌릿했다. 공황상태에 빠진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눈을 깜빡이려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강주하다.

강주하가 7년 만에 눈앞에 나타나 그녀를 곁눈질로 노려보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않은 장소에서 채권자가 채무자를 마침내 찾아내 족치기 전, 폭풍전야 같은 눈길로.

단순한 착각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쪽의 구석은 강단 쪽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설령 보인다 해도 빔 화면 때문에 침침하게 조도를 낮춰서 알아보기 어렵다. 다른 사람을 봤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7년 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예쁘장하고 곱상하지만, 어딘가 비밀을 품은 듯한 미소년의 얼굴은 이제 완연한 남자의 것이 되어 있다. 수려한 이목구비와 매끄러운 피부가 돋보이는 본래의 미색에, 남성적인 굵은 선이 더해져 어디서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외양이었다.

그가 새로 온다던 최연소 본부장이구나. 하필 여기에. 이 회사에……

참 얄궂은 재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냥 동창도 아니고, 스폰받고 하라는 대로 다 하는 섹스파트너 제안을 했던 동창이라니. 그것도 까마득한 상사와 말단 신입사원으로. 같은 대학 새내기로 입학했는데 7년 후의 상황은 이렇게 다르다니.

재회에의 충격이 조금씩 밀려가며 서글픈 생각, 혹시 엮이면 어떡하지 현실적인 걱정들이 그 자리를 채워 왔다. 고작 7년 전이다. 얼굴이나 이름을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만나는 동창들은, 스무 살의 서유주와 지금의 서유주가 똑같다고 매번 말했다. 통통하던 뺨의 젖살이 완전히 없어진 것만 빼면.

기억을 못 하거나 알아봐도 모른 척하지 않을까. 지금 와서 굳이…

대학 때처럼, 그리고 홀연히 떠나 버린 미국에서도 틀림없이 그랬을 것처럼, 그는 여기서도 화제의 중심이 될 것이란 생각이 유주의 뇌리를 스쳤다. 핵심부서가 될 디벨로퍼 신탁 관리 파트, 그리고 저 같은 말단인턴의 간극은 매우 클 것이다.

무엇보다 신생 디벨로퍼 메인 부서의 오피스는 본사의 웨스트 윙, 유일하게 옥외 테라스가 있는 분리형 탑층 15층부터 17층까지 세팅되어 있었다. 출퇴근 엘리베이터와 카페테리아, 모든 부대시설이 센트럴 존(zone)과 완벽하게 분리된 구조였다.

일부러 스카이 브리지를 건너 그녀가 있는 센트럴 오피스로 넘어가지 않는 이상, 서로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디벨로퍼 부서로 지정될 일도 없지. 전공자도 아니고 관련 자격증도 없으니. 아무리 인턴이라도 이 회사가 왜 나를 합격시켰는지 지금도 문득문득 의문이 드니까.

어쨌든 강주하와 다시 엮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니 안도감이 들었다. 왜 이렇게 심장이 세게 뛰고 동요하는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지만, 7년 전의 그 일은 깨끗하게 기억에서 지우는 게 서로를 위해 나을 것이다.

아니, 서로라는 말도 우스운 소리다. 강주하의 기억에는 이미 말끔히 지워져 있을 텐데.

회의가 끝나고 임직원들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이뤄 홀을 빠져나갔다. 유주를 비롯한 신입 동기들은 홀의 의자나 음료, 비품 등을 정리하기 위해 남아 있었다. 유주는 일부러 단상 쪽을 향해 완전히 등을 돌리고 빔 프로젝터 스위치와 선을 정리했다. 동기 한 명이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다가왔다가 불쑥 물었다.

“유주 씨, 괜찮아요? 외근 다녀오느라 힘들었나 봐요. 얼굴이 창백한데.”

“아, 아니에요. 오전에 엄청 더워서 조금 지쳤나 봐요. 그보다 저희 정리하고 바로 부서 배치 공지 듣는 거죠?”

“네, 벌써부터 막 떨려요! 기대되고… 아, 유주 씨는 늦게 들어와서 새로 온 강주하 본부장님 인사 못 들었죠? 진짜 듣던 것 이상이에요. 너무 멋있어…!”

동기들은 정리하다 말고 완전 섹시하다, 저 외모가 자연산이면 집안 유전자 검사해 봐야 한다, 정말 게이라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다 같이 입을 모아 부산을 떨었다. 유주는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비품들을 정돈하는 데만 정신을 쏟았다.

* * *

점심시간 후, 추가 채용된 인턴들의 총괄 멘토를 담당하는 김 대리가 교육실 연단에 서서 리스트를 하나씩 읊어나갔다. 열 명 남짓한 동기들은 제각기 기쁨과 실망이 반씩 섞인 표정이었다. 아직까지 디벨로퍼 파트에 배치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유주 씨는 센트럴의 제2 컨설팅 기획부서의 어시스턴트로 배정되었습니다. 원래 웨스트윙의 디벨로퍼 매니징 어시스턴트로 배치했는데, 본부장님이 김혜윤 씨로 다시 지목하셨습니다.”

모두가 일시에 유주를 돌아보았다. 디벨로퍼 팀으로 배정된 행운이 책임자 본인에 의해 반려된 상황에 동요된 기색이다. 김 대리가 웅성거리는 모두의 이목을 다시 저에게로 집중시켰다.

“아, 오해는 마세요. 김혜윤 씨가 디벨로퍼 쪽 전공에 경력도 있으니 심사숙고 끝에 재배치가 된 겁니다. 서유주 씨가 수습 기간 동안 일 처리가 매우 꼼꼼해서 디벨로퍼 팀이 맞지 않을까 했는데, 총 책임자이신 본부장님의 판단이 보다 정확할 테니까요. 1차 부서는 실적과 근태 성적에 따라 6개월 뒤 이동 가능하니 혹시 희망 부서가 있으면 지금 배치된 필드에서 좋은 성장을 이뤄주시길 바랍니다.”

좋은 성장 속도와 싹수를 보이면 6개월 뒤 이동도 하고 정식으로 다시 근로 계약서를 쓰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인턴직 카드를 반납하고 짐을 싸야 한다. 김 대리는 일부러 냉혹한 부분은 생략하고 설명을 마쳤다.

이동은 퇴근 전까지, 새 부서로의 출근은 내일부터 하는 것으로 최종 지시가 내려졌다. 유주는 이제 뿔뿔이 흩어질 동기들과 주거니 받거니 담소를 나누면서 제 자리로 돌아왔다. 혼자가 되고 나자 잠시 젖혀뒀던 상념이 밀려왔다.

설마 일부러 재배치를 지시한 걸까? 나와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

유주는 얼음이 녹아서 밍밍해진 아이스티를 냉수처럼 쭉 들이켰다.

깊이 생각하지 말자. 정말 업무적인 판단이겠지. 그쪽에서 기억도 못 하고 있으면 너 혼자 삽질하는 것밖에 안 돼. 신경 끄자, 신경 꺼.

그녀는 서랍에서 굴러다니던 빈 상자를 꺼내서 소지품을 차곡차곡 넣었다. 제2컨설팅 기획파트 오피스는 바로 위층에 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진짜 신경 쓸 일은 따로 있어.

유주는 사원 전세대출금 지원 담당자의 내선번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어련히 때 되면 알려줄 텐데 자꾸 독촉하면 실례가 될 것이다. 그녀는 상자를 받쳐 안고 위층 새로운 사무실로 향했다.

전세 지원금이 안 되면, 기숙사 있는 외곽 지부로 6개월간 가 있어도 되는데. 어차피 한적한 시골도 좋으니까. 기숙사 덕에 월세 아끼고 물가 싼 곳에서 생활비 아끼면, 저축할 자금도 훨씬 더 늘어날 텐데.

* * *

주하는 사내 전세대출금과 문화생활 복지금 지원 및 외곽 지부의 기숙사 현황 파일을 죽 훑어보았다. 발령 첫날부터 볼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볼 일 없을 것이며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료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꼭 볼 필요가 있는 파일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늘게 뜨고 있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서류에는 전세자금 지원이 안 되면 직원 도미토리를 갖춘 지사로 발령을 가도 좋다는 당사자의 적극적인 요청이 기재되어 있었다.

기숙사가 있는 지사는 수도권이라기에 애매한 외곽 G시에 한 곳, 지방 A시에 하나 있었다. 현황을 보니 경기도 외곽에 빈 숙사가 가을부터 하나 비게 될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문서에서 눈을 떼고 생각에 잠겼다.

둘 중 한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신청한 건가? 하긴 그녀는 옛날에도 도시보다 시골이 좋다고 했었다. 똑같군. 외모나 나이랑 동떨어진 구석이 많은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복권에 당첨되면 시골 조부모님 댁에 집 한 채 새로 지어드리고, 저는 제주도나 남해, 어디든 바다를 면한 곳에서 조그만 에코 하우스 하나 지어 유유자적 살겠다고 팀 과제 때 지나가듯 말한 적도 있었다. 아니면 미국 포틀랜드나 유타 주,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나 핼리팩스처럼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에 이민 가 살거나.

물론 7년 전 일이다. 어찌 됐든 지금은 안 될 말이다. 그렇게 멀리 가 버리면 그가 아주 곤란해진다.

주하는 휴대폰을 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는 깎듯이 응대해오는 담당자를 향해, 군더더기 하나 없이 본론만 말했다.

“인턴직도 전세 보증금 대출 지원을 신청할 수 있다는 수칙은 언제부터 있었던 겁니까?”

“예, 본부장님. 창립 때부터 있었던 조항입니다. 인턴 신분에서 신청한 사례는 지금까지… 세 건에 불과합니다만, 혜택받은 직원들은 결과적으로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애당초 정규직으로 될 가능성이 보이는 인재들만 본사에 들이니까요.”

“그렇군요. 하지만 다음 달부터는 예외 없이 기 정규직인 사원들에 한정하는 것으로 사칙을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수정하고, 이번 달 신청들도 모두 변경 후 사칙으로 적용되도록 처리해요.”

“네, 알겠습니다.”

그는 통화를 마치고 다른 번호를 눌렀다. 역시 정중한 음성의 누군가가 바로 응답해왔다. 주하는 가을부터 비게 될 도미토리 하나를 하반기 동안 휴게실로 개조해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예? 하지만 마침 여기 지사로의 발령을 신청한 인턴이 있습니다만. 마침 인력이 더 필요하기도 해서 승인할 예정이었습니다.”

“사원번호 ED15447번 맞습니까? 그 인턴은 이쪽에서 기대되는 인력이라 타 지사로 전근 자체가 안 됩니다. 어차피 G시는 토지 기획 위주 업무로 돌아갈 테니 잘 아는 분야도 아니고요.”

담당자가 수긍한 듯 통화는 담백하게 끊겼다. 그가 그런 일까지 직접 연락해 지시하는 일 자체가 상당히 기이했을 것이다. 주하는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고 통유리창을 열었다. 그는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로 옥외 개인 정원에 들어섰다.

개인 정원이 사면으로 펼쳐진 31층 펜트하우스는 250세대 중 단 두 채밖에 없었다. 주하는 불과 일주일 전 그중 한 가구를 계약했다. 한강대교와 맞은편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뷰가 꽤 괜찮았다. 가구가 거의 없어 썰렁한 것만 빼면 모든 게 좋아 보였다.

주하의 손가락이 습관적으로 유리창을 톡톡 두들겼다. 어차피 이 집에는 거의 없을 테니까 상관없다. 당장은 가구를 들여올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 * *

이태원 구석에 자리한 <타로 & 타르트>에는 점을 보는 손님들보다 마카롱과 케이크를 찾는 단골들이 훨씬 많았다. 고 사장은 개량 한복 자락을 하늘거리며,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내일은 무슨 케이크를 만들까 궁리하며 콧노래만 흥얼거리고 있었다.

“사장님, 저 왔어요.”

“어마, 우리 유주 왔구나! 너 온다고 연락 온 거 보고 첫 월급 탔구나 했지! 아까 톡 보낼 땐 바빠서 말 못 했는데, 너 꽤 건실한 부동산 금융사에 취직했다며? 축하해! 너 우리 가게 알바 할 때부터 꼭 좋은 데 취업할 줄 알았어!”

“감사합니다. 근데 당근 케이크 다 솔드 아웃이에요?”

“없기는. 너 온다기에 두 조각 남겨뒀지. 엄청 오랜만에 왔네? 내일은 러시아식 나폴레온 만들까 하는데 어때? 밀푀유처럼 패스츄리 겹겹이 포개고 그 안에 아몬드 크림을 잔뜩, 엄청 달게.”

“네, 그건 좋은데… 디저트는 날개 돋친 듯 잘 팔려서 다행인데 타로 손님은 한 분도 없네요. 갈수록 없는 것 같아요.”

하긴 이상한 말만 하는 야매에다 정체성이 소문나 버렸으니, 유주의 중얼거림에 고 사장이 빽 소리를 질렀다.

“뭐야? 정체성은 할 말 없지만 야매라니! 제대로 배웠다고! 어디 여기 앉아 봐, 오랜만에 한 번 봐줄게. 안 앉으면 케이크 안 팔 거야!”

“첫 월급 받아서 사장님 선물 사 왔는데… 전에 갖고 싶다던 파티세리 레시피 책. 이것도 도로 가져가요?”

“이건 받을 거야. 케이크는 안 팔고. 빨리 앉아.”

고 사장은 유주가 카운터 앞에 올려둔 종이백을 무심한 척 빼앗아 뒤로 숨기고, 기쁨을 숨기려고 입가에 잔뜩 힘을 주었다.

“빨리 뽑아. 진지하게.”

유주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아서 시키는 대로 성의 없이 카드를 뽑았다. 카드 맨 위에는 심각한 표정의 황금빛 달과 그 달을 올려다보며 짖어대는 개와 늑대가 그려져 있었다.

“흠. 하나 더.”

고 사장은 한쪽 귀에 길게 늘어진 이어드롭을 흔들며 다시 카드를 촤락 펼쳐놓았다. 유주는 무념무상, 빨리 장단 맞춰주고 케이크를 먹을 생각에 한 장 또 골랐다. 이번에도 똑같은 카드가 나왔다.

“어머나, 이럴 수가. 이런 카드가 연달아 두 번이나 나오다니!”

고 사장은 손뼉을 탁 치면서 유주에게 카드를 가리켜 보였다.

“내가 전에도 그랬지, 너 멀리서 누군가 나타난다고! 이제 그 사람이 왔어. 오래전부터 널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유주는 네, 네, 성의 없이 고개를 까닥였지만 고 사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너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흠… 이건 보이지 않는 위험을 상징하는 실버 문, 개와 늑대의 시간은 적인지 아군인지 아리송한 정체성인데.”

“사장님의 정체성이랑 비슷하네요.”

“야! 흠흠… 어쨌든 이 사람은 좀 위험해. 아니 굉장히 위험할 수 있어. 자체로도 위험한데 굉장히 매력적이야. 범접할 수 없고 거역할 수도 없는 달의 기운을 뿜어내서 결국은 네가 꼼짝없이 휘둘리게 돼.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데 이 사람은 어둠 속의 실버 문 딱 그 자체거든.”

“사장님.”

“도망가려면 지금이야. 아니다, 도망가도… 쫓아오지 싶은데. 달은 어둠 속에서 못 볼 게 없으니까.”

“사장님. 저 케이크 먹고 싶어요.”

“야! 넌 사람이 진지하게 말을 하는데 어디서 먹을 거 타령이야-”

그는 쌍심지를 돋우면서도 아까 꿍쳐놨던 케이크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좀 갖다 달라고 아르바이트생을 불렀다.

* * *

젠장.

유주는 좀 더 심한 욕을 생각하려 했지만 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조용히 눈만 감았다. 출근하자마자 인사복지과 담당자가 호출해 두 가지 비보를 전해 왔다.

전세자금 대출 지원은 최소 일 년을 만근한 직원에 한해서만 적용되는 조건으로 다음 달부터 변경될 예정이라 소급적용은 어렵게 되었고, 현재 기숙사는 어느 지부에서건 자리가 없다는 전달사항이 있었다.

실버 문인지 골드 문인지 보이지 않는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었군. 믿고 있던 자금줄이 막혔어.

유주가 새로 옮긴 데스크에 앉아 초조하게 손톱만 깨작거리고 있는데 컨설팅 기획부 부장이 그녀를 불렀다.

“서유주 씨! 지금 좀 와봐야겠어요. 지난 한 달간의 수습 기간 업무 평가 및 피드백 시간을 개별 진행하기로 전달받은 것 기억하죠?”

“네, 부장님.”

“서유주 씨가 일 번으로 지정됐어요. 각 부서의 총괄 매니저와 본부장들이 나눠서 하는데 서유주 씨 담당하신 분이 10시부터 일정이 있다고 하시네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전세금이나 이사에 대한 사적인 고민은 잠시 접어둘 때였다. 세미나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평가받는 것은 역시 긴장되는 일이다. 반년 후 정규직으로 살아남을 것인지, 다시 구직자의 신분으로 돌아갈지 판가름 나는 첫 번째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김 대리가 세미나실 문을 열고 나오며 들어가라 손짓해 보였다. 유주는 방 안에 들어가 길게 이어진 데스크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화초로 가려진 데스크 쪽에는 이미 누군가가 회전의자에 앉아 창 쪽을 보고 서류를 읽고 있었다.

누굴까. 아마 컨설팅 파트 본부장님이겠지?

여기 BK 금융 에셋은 대한민국 특유의 조직 문화 중 부정적인 것은 최대한 버리고 북미와 유럽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시스템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철저히 실적 위주로만 평가하고 그에 따라 분기별 연봉이 널을 뛰지만, 일단 능력을 인정받게 되면 입이 떡 벌어지는 연봉과 복지를 보장받게 된다. 그래서 취업 경쟁률이 웬만한 대기업만큼 하늘을 찔렀다.

과연 6개월 후에도 여기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회전의자가 빙글 이쪽으로 돌아오는 소리에 유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전혀 마주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인물이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강주하! 이름을 부를 뻔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동요 하나 없는 얼굴로 한 손에 서류를 들고 기계처럼 읊어나갔다.

“서유주 씨. 수습 기간 중 업무 평가는 A-. Y대학 졸업, 재학 중 유학, 연수 경험 없고 전공은…”

서류를 내려놓고 나서도 그의 표정이나 억양은 요지부동이었다. 유주를 아는 척하는 기색도 티끌만큼도 없었다. 일부러 그러는지 정말 기억을 못 하는 건지, 혹은 사고로 기억을 잃기라도 했는지 오리무중이다.

“고작 한 달간, 기본적인 업무만 주어지는 수습 기간 중의 업무 평가는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열두 명 중 최하점은 B+니까 서유주 씨 성적이 대단히 우수하다고 할 수도 없고요.”

유주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만 있었다.

“솔직히 서유주 씨의 채용 자체가 의문이군요.”

냉랭함과 건조함을 오가는 사무적인 어조는 일부러 깎아내리려는 것인지, 정말로 공적인 의견을 말하는 것일 뿐인지 가늠이 안 됐다.

“감정평가사, 주택관리사, 공인 중개, 하다못해 금융 관련 자격증도 없고. 내세울 것이라고는 인지도 높은 4년제 대학 이름뿐인데.”

가지런히 모은 발끝이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유주는 까치발을 하고 최대한 침착해지려 애썼다. 강주하는 책상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표정이 좋지 않은데 듣기 불편했나요? BK가 이런 분위기란 건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유주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예의상 살짝 미소를 띠려고 했지만, 입술에 경련이 일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아무리 봐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심증이 기울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아뇨, 괜찮습니다. 다 사실이고 인정합니다.”

“어차피 금융이나 리얼 에스테이트 둘 다 바닥부터 시작해야 할 텐데 왜 후자를 택했죠? 여기 적힌 정해진 대답, 허울 좋은 달변, 그런 거 말고 정말 솔직한 생각을 듣기 원합니다.”

유주는 이번에야말로 당혹스러웠다. 이력서와 면접 때 잘 훈련된 앵무새처럼 반복했던 입사 동기는 방금 그의 지적대로 매뉴얼식 답변에 불과했다.

“그럼 그럴듯한 미사여구, 수식은 죄다 생략하고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말씀하신 대로 부동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녀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강주하는 예전에도 말 한마디 없이도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속내를 꿰뚫어 보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말을 하면 그 위압감과 긴장감은 훨씬 더 증강되어, 상대방이 누구든 맥을 못 추게 했다. 짧은 몇 개월간의 대학 생활, 강의 중 교수님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했던 모습이 그녀를 심판자처럼 내려다보는 지금의 얼굴에 오버랩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오갈 데가 없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도 떠들썩했던 해외 주식 사기를 당하셔서 사업체와 집 모두 날아가 자금을 구하러 다니시던 중 차 사고로 두 분 다 돌아가셨거든요.”

굳이 감성적으로 들리지 않게 애쓸 필요도 없었다. 지난 14년의 세월은 그녀를 강하게 단련시켜주었다.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눈시울을 붉히는 일 없이 담담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는 단단해졌다. 한 달 전의 성추행 미수 사건 때는 너무 놀라서 울기만 했지만, 지금은 또 다르다.

“그래서 몇 달간 집도 없이 떠돌다가 시골의 할머니 댁에 정착하고,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도 고향 언니들 집에 더부살이로 신세 지고 살다가 요즘은 사정상 다시 전셋집이나 월세 집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14년 전부터, 모두가 그렇듯 내 집 마련이라는 간절한 염원을 품으며 살고 있고요.”

“…얼마나 더 길어지죠?”

강주하가 손목의 시계로 시선을 내렸다. 스무 살 때의 바쉐른 콘스탄틴은 이제 필립 파텍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차분하게, 노골적으로 지루하다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씨발.

유주는 처음으로 소리 없는 쌍욕을 읊었다.

재수 없는 새끼. 내 신세 한탄하려는 게 아니잖아! 네가 입사 동기 솔직히 말해보라며.

“죄송합니다. 바로 결론으로 압축하겠습니다.”

유주는 엷은 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뒤틀리니 억지 미소가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나왔다.

“바보같이 들리시겠지만, 집 자체에 대한 막연한 로망, 갈망이 생겼습니다. 투기가 아닌 보금자리의 개념으로서, 모두가 저마다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안착해서 사는 집이요. 실무에 대한 것은 최대한 따라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자격증 공부도 병행…”

“BK의 근본적인 가치와 상반되는 생각이군요. 우린 남들이 투기라고 욕하는 것들을 주력상품으로 최대한의 이윤을 남기는 데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자잘한 주택 매매 쪽과는 거리가 멀고 그보다 훨씬 스케일이 크지만.”

“네, 물론 어느 기업이나 실제적인 가치는 최대한의 이윤이지만 저는 보다…”

“그런 가치관으로 육 개월 뒤에도 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재수 없는 강주하 새끼는 그녀의 말을 계속해서 싹둑 자르고 직설적인 질문을 날렸다. 유주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를 마주 보았다. 최대한 정중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자꾸만 입가가 굳고 눈매가 곱지 않게 치켜 올라가는 걸 막기 어려웠다.

“본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실례를 무릅쓰고 본부장님의 고견을 먼저 여쭤보고 싶습니다.”

“솔직한 의견을 원합니까?”

“네. 그게 바로 BK의 모토니까요.”

“괜찮겠어요? 솔직한 대답이 상처가 될 수도 있는데.”

“네. 불편한 진실이 훨씬 득이 된다고 믿는 쪽입니다.”

“그럼 말하죠. 내가 볼 때 서유주 씨가 반년 뒤에도 그 사원증을 달고 있을 가능성은…”

강주하는 잠시 틈을 두고 대답을 완성했다.

“5% 미만입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상대 평가제는 아니지만 다른 신입들에 비해 현저히 뒤처지면 자연스럽게 도태되겠죠.”

그렇게 될 것임을 확신하는 발언이었다. 유주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제 발끝으로 떨어뜨렸다. 채용부터가 스스로도 의문이었으니 딱히 불쾌할 것도, 절망할 것도 없었다. 늘 마음 한구석에선 6개월 뒤 구직 활동을 재개해야 할지 모른다고 각오하지 않았던가. 그때 건너편에서 얄미운 음성이 다시 울렸다.

“잠깐만 사적인 대화를 나눠도 될까요. 공사가 분명한 걸 좋아해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사적인 대화라니? 네,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었다.

“서유주.”

유주의 눈이 커졌다. 굵고 낮은 바리톤의 음색은 똑같았지만, 어조는 확연히 달랐다. 완벽한 아몬드형 눈에 서린 빛도 그때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고 냉정해 보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강주하는 서유주를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계속.

“여전하네, 넌.”

여전히 날 흥분시켜. 내 좆을 발딱 세우고.

환청이 들린 것 같았다. 유주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정말로 환청이었는지, 그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7년 전 갑자기 그렇게 돼서 유감이야.”

“어…… 음…….”

유주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질근질근 씹다가 간신히 대꾸했다.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네, 거기서 완전히 정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맞반말을 할 수는 없었다. 사적인 대화라 해도 여기는 회사 안이고, 그는 까마득한 직장 상사다.

“역시 너도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강주하가 팔짱을 끼고 엷게 미소 지었다. 둘은 어제 회의실에서 시선이 마주쳤을 때부터 이미 서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적어도 강주하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메일 왜 계속 확인 안 했어? 번호도 바꾸고.”

유주는 혀를 깨물 뻔했다. 그런 걸 물어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철저한 비즈니스 모드로 차분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학교 메일은 그 이후로 거의 쓰지 않았고, 번호는 중간에 폰이 바뀌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톡, 톡,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길고 흰 손가락이 데스크의 유리 패드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무심결에 나오는 습관은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래… 장소가 장소니까. 껍질 속에 계속 숨어 있겠다 이거지.”

그럼 끌어내야지. 강주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는 벌써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유주 앞까지 똑바로 걸어왔다. 그녀는 놀라서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세 자금 대출 지원 거부됐죠? 갑자기 사칙이 변경돼서. 다른 방법 논의해줄 테니 퇴근하고 웨스트 윙 17층으로 와요.”

“네? 네?”

“필요 없으면 말고. 6개월 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인턴이라도 일단은 BK 멤버니까. 이상한 제안은 하지 않을 테니까 염려 붙들어 매고.”

강주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곧바로 나가버렸다. 유주는 멍하니 입만 벌린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군가 거울을 가져와 면전에 비춰주면 제 표정이 얼마나 가관일지 눈에 선했다. 그녀는 벌린 입을 닫고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충격이 단계별로 뒤통수를 강타해 와 정신이 없었다. 자신을 기억하고 있던 강주하와 단둘이 대면한 것도 모자라 퇴근 후에 또 만나야 한다니. 게다가 부끄럽게도 그녀의 전세자금 대출 신청에 대해 훤히 꿰고 있다니.

하지만 안 갈 수는 없었다. 전세보증금 대출에 대해 다른 방안이 있다면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닌 상황이다.

정혜 언니에게 그동안 신세 진 게 있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형편은 생각보다 더 좋지 못했다. 할머니 병원비로 융통한 신용 대출과 아직 남은 학자금 대출 상환 때문에 저축액은 몇백만 원이 고작이었다. 반전세로도 모자라는 보증금에 이 근처에 구할 수 있는 곳은 비싼 월세에도 지하나 반지하가 고작이었다.

모르겠다. 정 안되면 출퇴근 지옥이고 뭐고 외곽으로 빠져야지. 동서남북 계속 옆으로 밑으로 내려가면 어디까지 닿을까.

나도 이제부터 매주 로또를 사볼까? 아니면 정연 언니 따라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나 가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볼까.

강주하를 다시 만나기는 싫었다. 다시 아까처럼 미치도록 어색한 상황, 정말 싫은데. 어떡하지.

‘너랑 섹스하고 싶어.’

7년 전 속삭임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방을 나서기 전 분명히 말했다. 이상한 제안 같은 거 안 할 테니 염려 말라고. 그래. 이제 와서 7년 전으로 돌아갈 리가 없지.

지금이나 그때나, 서유주가 가진 거 쥐뿔도 없는 가난뱅이란 건 똑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7년 전에는 막 피어난 꽃잎처럼 푸르고 싱싱한 젊음이 있었다.

지금도 젊은 편에 속하지만, 그때처럼 상큼하진 않겠지. 섹스하고 싶을 만큼 동하지는 않을 거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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