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부동산의 꽃, 몸테크와 존버
시작부터 달랐던 7년의 간극은 일 년 전의 것과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더 크게 벌어져 있었다. 7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가진 것 하나 없이 초라한 서유주, 맞은편의 남자는 가진 게 너무 많아서 각자 내쉬는 공기마저 결이 달랐다.
옷과 구두, 가방까지 인터넷 최저가 마켓에서 고르고 고른 그녀와 달리,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럭셔리 그 자체다.
필립 파텍, 보테가부터 소위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LVMH)그룹은 기본이고 일반에는 알려지지도 않은 극소수 한정품 하이엔드 브랜드 물건들에다, 차 하나가 집 한 채 값인 벤츠 S클래스 마이바흐가 일상인 강 본부장은 처음부터 깡서민 서유주와는 속한 세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어떻게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걸까. 회사가 아무리 알짜배기 중견기업이라 해도 본부장 월급으론 한참 부족해 보였다. 집안이 얼마나 금수저 부자면. 하긴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미국에서 이런저런 사업을 하고 계셨다니 물려받은 것만 해도 어디겠어.
하지만 부자거나 말거나 그녀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출발점부터 하늘과 땅 차이라고 불만을 토로해봤자 의미도 없다. 결과적으로는 그가 부자이기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건네줘서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었다.
“몸테크 하라고.”
유주는 이번에야말로 귓구멍에 일시적인 난청 현상이 있었을 거라 믿었다. 아무리 스무 살 이후부터 시력과 청력의 퇴화가 시작된다 해도 너무 이르긴 하다.
“못 들었어? 몸테크.”
“몸테크라면……”
유주는 시나몬 스틱으로 아인슈페너 생크림 위를 푹 내리꽂았다.
“그래. 아까 말한 그 아파트. 가까운 친지 명의고 반년 후 재건축 들어갈 때까지 비어 있을 테니까 월세나 보증금 없이 공과금만 내고 살라고.”
그럼 그렇지. 몸테크란 건 재건축 들어갈 노후화된 아파트에서 몸으로 때우며 존버, 속칭 존나 버티는 것을 말한다. 강남의 여유 있는 소유주들은 임시 전셋집에서 편안히 살며 세입자에게 몸테크를 시키는 게 일반적인 케이스였다.
그런데 왜 다른 몸테크로 잘못 이해한 걸까. 7년 전의 그 일 때문인 게 분명하다. 그 기억만 없었다면, 그녀도 응당 업계에서 통용되는 몸테크로 바로 이해했을 것이다.
“이게… 오전에 말한 다른 방안이었어요? 아니 방안이었어?”
유주는 얼른 말을 낮췄다. 아까 웨스트 윙 사무실에서 그녀가 끝까지 경어를 고집하자, 강주하는 치외법권으로부터 벗어나 저녁부터 먹자며 건너편 호텔의 비스트로로 다짜고짜 데려왔다. 그리고 철저히 사적인 공간인 여기서도 경어를 쓰면, 전세자금 방안이고 나발이고 바로 가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럼 뭐겠어. 회사 차원에서 안 되니 개인적으로 편의를 봐주는 수밖에.”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까지 편의를 봐주는 건데. 그 금싸라기 땅의 아파트라면 아무리 40년이 다 되어가도 월세가 몇백만 원 할 것이다. 청담 사거리의 그 아파트 단지는 그녀도 무척 잘 아는 곳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족과 살았던 곳이니 모를 수가 없다.
“왜 그렇게까지…… 우리가 특별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사귄 것도… 아니었는데. 게다가 회사 상사가 말단 인턴에게 그렇게까지 하는 건…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해도 대외적인 설명이 안 되잖아.”
“사귄 건 아니었지만 사귀었을 거잖아.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렇게 미국에 가지 않았더라면.”
가늘게 뜬 그의 눈이 묘한 선을 그렸다. 곧게 뻗은 콧대가 은은한 조명 아래 날 선 음영을 자아냈다.
“기억할 텐데. 내가 너 좋아했던 거.”
유주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시나몬 스틱만 휘젓고 있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도와줘야 할 것 같았어. 아니… 도와주고 싶어.”
“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반년 후엔 네 말처럼 방출돼서 여기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직장 상사와 직원, 그것도 인턴 간의……”
“불법이야?”
그의 차분하던 눈에 안개처럼 어둠이 피어올랐다.
“법에 저촉돼? 사회 질서나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이야, 그게? 빈집에 육 개월간 들어가 살다가 나오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문제야.”
“하지만……”
“자선 사업이라 생각해, 그럼.”
찰칵, 경쾌한 케이스 소리가 울렸다. 그는 묻지도 않고 낙엽색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두 사람은 오픈 테라스의 흡연 가능 구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동석한 사람의 양해는 구해야 하지 않나.
“왜?”
유주의 시선에 강주하가 오만하게 물었다. 담배를 두 손가락 사이에 넣고 팔꿈치를 의자 팔걸이에 대자, 연기가 반대쪽 허공으로 점점이 흩어졌다. 유주가 조금 나무라듯 말했다.
“비흡연자라 들었는데 아닌가 봐.”
“가끔만 해. 기분이 아주 좋을 때나, 슬슬 열 뻗칠 때. 지금처럼.”
“결국 흡연자잖아.”
“컨트롤할 수 있는 선에서 해.”
“기분 좋을 때, 혹은 나쁠 때 피워야 직성이 풀리면 결국 자제가 안 된다는 얘긴데.”
“나 그냥 갈까?”
강주하가 연기를 그녀 쪽으로 훅 내뿜으며 거만하게 말했다. 몸테크고 뭐고 여기서 그냥 박차고 나갈까? 네가 외곽 멀리멀리 방을 구해 장시간의 출퇴근에 이 시가 꽁초처럼 축 늘어지든, 햇빛도 안 드는 지하 닭장 같은 곳에서 마른 화초처럼 시들어가든 상관 말고.
그의 날 선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비공식적인 제3의 금융권에서는 도저히 감당 못 할 고금리 이자의 대출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후폭풍이 감당이 안 될 뿐. 강주하는 알아서 하라는 듯 담배를 느긋하게 빨아들였다.
“선택은 네가 해. 아쉬운 건 너지 내가 아니니까.”
유주는 답답함에 손톱을 뜯고 있다 그런 제 모습에 흠칫 놀랐다. 갑자기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갈증에 물을 벌컥 들이켜고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혼자 침실 넷에 화장실 두 개, 45평은 너무 넓어.”
강주하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며 다시 온화한 얼굴이 되었다.
“좁은 것보단 낫잖아. 그럼 범죄현장 바운더리처럼 빨간 줄 쳐놓고 그 안에서만 살든가.”
“차라리 월세를 대폭 깎아주면 어때? 아무리 그래도 계약서 한 장, 보증금 한 푼 없이 몸만 덜렁 들어가서 살다 나오는 건… 빚지는 건 정말 싫어.”
“자존심은 더럽게 드세 가지고.”
강주하가 낮게 한숨을 토해냈다. 유주가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저도 모르게 눈을 부라렸다. 그는 아랑곳없이 독설을 이어갔다.
“가난한데 공부는 할 만큼 한 사람들의 문제점이 뭔지 알아? 머리에 든 건 있어서 부끄럽고 창피한 건 잔뜩 의식하지. 지혜의 선악과를 먹은 하와가 수치심을 알게 된 것처럼. 그래서 어쭙잖게 자존심 내세우며 뻗대는 거야. 제 쪽에서 굽신거려서 얻어 가야 할 판에, 이쪽에서 자존심 살려주며 줄 거 다 주기를 원하는 거지.”
유주는 기가 막혀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명심해. 자존심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거. 돈도 안 주고 밥도 안 먹여줘. 자존심은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게 아니라 남들이 알아서 높여주는 거야.”
그가 마지막 연기를 훅, 허공에 뱉어내고 시가를 눌러 껐다. 그리고 뭘 생각하는지 한 팔로 턱을 받치고 한강 쪽 야경을 굽어보았다.
유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시건방진 모습마저 한 폭의 그림처럼 매혹적으로 보여서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향한 분노를 억누르고 다시 물었다.
“정말 다른 건 없는 거지. 정말 백 퍼센트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지. 회사에선 아무도 모르게, 철저히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일로 계약서도 없고, 오가는 금전도 없이 깔끔하게. 그냥 대학 동창이 형편 어려운 동창을 도와주는 순수한 마음 그 자체로.”
“그렇다니까. 그럼 몸테크 하는 걸로 결정된 거지?”
강주하는 질문을 교묘히 비껴가며 제 앞의 탄산수를 스트로로 쭉 빨아들였다. 여자들이 누구나 흠모할 섹시한 입술 사이로 빨대가 뒤틀리고 구부러져 갔다. 유주는 용기를 내서 한 번 더 물었다.
“궁금한 거 있어. 이 일과는 상관없지만.”
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든 물어보란 의미다.
“만나는 사람 있지?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강주하는 잠시 시선을 내리깐 채 말이 없었다. 그리고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의 표정은 이제 진중함을 넘어 정색에 가까운 것이 되어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역시 잘생겼구나, 수려한 이목구비에 감탄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있어. 생긴 지 얼마 안 돼.”
“아아, 역시.”
유주는 웃으려고 입가를 당겼다. 하지만 왜인지 웃는 게 힘들었다. 입꼬리가 잘 올라가지 않았다. 갑자기 경각심이 들었다. 그 여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더 캐묻고 싶지도 않지만, 그녀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유주는 난처한 듯 다시 말했다.
“저, 역시 안 되겠어. 네 애인이 이 일을 알면 불쾌해할 거야.”
“아무 상관없어. 왠지 알아?”
“왜?”
“그녀가 먼저 오케이 했거든.”
아아, 유주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여자 친구 쪽에서 괜찮다는데 더 뭐라고 하겠는가. 이런 일까지 미리 의논했다면 보통 사이는 아닌 모양이다.
“저기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유주는 궁금한 게 더 있는 얼굴로 운을 뗐다. 그리고 이내 철회했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그 여자는 7년 전 그가 말한 그 조건에 잘 맞는 분인지, 최소한의 이견도 없이 그의 말에 다 따르고 응해주는지, 혹시 7년 전 자신에게 제안했던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는지. 그래서 결국은 스폰 관계인 건지, 사랑을 베이스로 깔고 있는지. 아니면 동등한 위치에서 진심으로 오가는 감정과 순수한 섹스만 있는 건지.
순수한 섹스라니, 표현이 묘하지만 어쨌든 실제로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제 입으로 말해주면 듣기는 하겠지만. 정말로 궁금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무너무 궁금해서.
“그럼 최종 결론은?”
톡톡, 낮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가 버릇처럼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듯한 그 움직임에 유주가 또다시 화제를 벗어난 물음을 던졌다.
“피아노… 아직도 취미로 치고 있어?”
“응.”
강주하가 입가에 웃는 듯 마는 듯, 엷은 잔상을 그리며 유주를 보았다. 그 미소 때문일까 갑자기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좋겠다. 나도 다섯 살 때부터 쭉 치다가 부모님 돌아가시고 피아노는 구경도 못 해봤는데.”
“……”
“아, 구경은 많이 했지. 취준생 때 예술 문화 회관에서 어셔 알바 했었으니까. 운 좋게 문 뒤에서 공짜로 얻어들은 적도 많았고.”
“그 집에 피아노 있어.”
강주하의 입가에 웃음기가 안개처럼 사라져갔다.
“그 아파트 거실에. 세입자가 놓고 갔어. 재건축 이주로 위아래 옆집 쫙 비었을걸? 층간소음 걱정 안하고 칠 수 있을 거야.”
“…….”
“그래서 결론은?”
갑자기 후두둑, 빗소리가 들렸다. 차양 너머로 비가 한줄기씩 떨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사람들이 왓, 즐겁게 외치며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유주가 살짝 열려 있던 폴딩 도어 창문을 좀 더 넓게 밀었다. 오랜 장마 끝, 푹푹 쪘던 며칠간의 폭염을 일시에 날려주는 빗방울에서 청량감이 일었다.
“그래.”
비가 빠르게 몸집을 불려 갔다. 세차게 내리붓는 빗소리가 이명처럼 귓전을 때렸다. 반면 사람들의 발소리와 차 소리는 꿈결처럼 아득하게 울렸다. 강주하는 잠자코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까만 유리알처럼 박힌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정말로 괜찮다면… 거기서 신세 좀 질게. 순수한 제안 정말 고마워.”
역시 무모한 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면서 항상 몸을 사릴 수만은 없으니까. 가끔은 깊이 생각하지 말고 뻔뻔해져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나중에 그럴걸, 후회해도 늦어 버리니까.
강주하는 말이 없었다. 다만,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던 두 눈에 이채가 돌고 있었다. 테이블 위를 소리 없이 두드리는 손가락이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듯 조금 더 빨라졌다.
“그래. 잘 생각했어. 회사와도 아주 가깝고 역세권에 인프라 다 있으니까 불편한 것도 없을 거고… 어릴 때 살았던 곳이기도 하니까. 동 호수는 다르지만.”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월세를 꼭 갚……”
“그럼 이사는 언제쯤 할래. 결정한 이상 미룰 거 없으니까 이번 주말… 아, 다음 주에 해. 다음 주 금요일까진 중국 출장도 있고 정신없을 것 같네.”
강주하는 이번에도 무례하게 싹둑 말을 잘라버리고 제 할 말만 했다. 하지만 화를 낼 수도 없고 화를 낼 마음도 없었다. 이런 엄청난 호의를 받는 입장에서 어떻게 화를 낸단 말인가.
“알았어. 그럼 다음 주 토요일 오전에 옮길게.”
그가 아무리 바쁘다 한들, 어차피 계약서나 금전거래도 없는데 키패드만 알려주면 끝이다. 기타 필요한 것들은 경비실과 알아서 처리하면 되니까 사실상 그와 더 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주는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 전입신고는 미리 해놔. 내일 당장.”
“응? 그건 짐 옮겨놓고 천천히……”
유주의 이의에 강주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냥 해.”
하라면 해. 무언의 명령을 들은 듯한 착각에 갑자기 기시감이 확 밀려왔다. 7년 전, 그녀에게 내걸었던 교제의 조건이 새삼 되새겨졌다.
그래. 강주하는 뼛속부터 혈액세포 유전자부터가 그런 인간이야. 역시 변할 리가 없어. 사귄다는 그 여자친구도 분명히 확 휘어잡고 휘두르고 그럴 거야. 뻔해.
“알았어. 내일 할게.”
“그래. 정확한 주소 문자로 보낼게.”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멎었다. 강주하는 팔짱 끼고 빙긋 웃었다. 빗소리처럼 맑고 시원스럽고 매력적인 미소였다. 갑자기 귓방망이를 한 대 맞은 듯 아찔했다.
그 순간 유주는 깨달았다. 대학 4학년 때 조용히 흠모하고 동경했던 과 조교가 있었다. 김현서는 다정하고 신사적인 태도와 훌륭한 인성으로 여학생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같은 대학원의 여신급 동기와 사귀고 있어서 누구도 감히 넘보지는 못했다.
강주하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아, 잠깐만. 중요한 연락이 와 있어서.”
김현서가 첫사랑이 아니었을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역시 그건 착각이었다. 유주는 휴대폰에 시선을 박고 어딘가로 문자를 보내는 강주하를 바라보았다.
살짝 수그린 눈의 속눈썹은 기분 나쁠 만큼 짙고 풍성했다. 날렵한 콧대와 턱선은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이, 완벽하게 도톰한 입술에는 피멍이 들게 만들고 싶은 갈망이 순간적으로 일었다.
진짜 첫사랑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이상한 가부장적이며 스폰을 정당화시키는 문제적 발언만 아니었다면. 그러면 그가 미국으로 가고 연락해왔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제는 빗소리와 행인들의 소리, 차 소음 중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제 심장 소리가 너무 큰 탓이다.
역시 공연한 짓일 수 있지만, 차라리 잘됐어. 다행으로 여기자. 지금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있다는 걸.
어쩌면 처음이 되었을지 모를 상대를 오랫동안 끌어안고 힘들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기묘하게 얽혔다가 확 끊어지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앞으로 6개월, 그 시간 동안 회사만 유주를 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는 않다. 그녀에게도 권리가 있다.
상대적으로 낮은 스펙 때문이든, 알고 보니 부족한 능력치였든, 전망이 보이지 않고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그녀도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 미련 없이 훌훌 떠날 작정이었다. 어떤 계기나 기회가 주어지면 6개월 전에라도 그럴 의향이 있었다.
* * *
닷새가 흘러갔다. 컨설팅 기획 관련 등 바닥부터 익혀야 할 것들은 많았다. 도저히 소화해내지 못할 만큼 막막하거나 어렵지는 않았지만, 하루가 무척 빠르게 지나갈 만큼은 바빴다.
간단한 업무의 외근이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사수가 사무실로 복귀하지 말고 일찍 퇴근해도 된다는 기분 좋은 명을 내렸다. 원래 시간보다 40분이나 일찍 퇴근하게 되어 날아갈 듯 기뻤다.
유주는 본사 사옥으로 가던 걸음을 돌려 건너편 쇼핑센터 커피숍에 들어섰다. 이름만 봐도 이가 썩을 것 같은 캐러멜 토피 모카 콘파나 그라니따 라떼를 받아들고 창가에 앉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만 원 가까이 되는 라떼는 사수가 전날 일 잘했다고 보내준 쿠폰으로 결제되었다. 월급날이면 모를까 제 돈으로 이런 호사를 누릴 마음의 여유란 없다.
시원한 달콤함으로 한숨 돌리자 기분이 더 좋아졌다. 어제 야근을 좀 늦게까지 해서인지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졸음이 솔솔 몰려왔다. 유주는 졸지 않으려고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창 너머, 쇼핑 아케이드를 오가는 행인들을 내려다보았다.
무더운 날씨에도 타이까지 꽁꽁 매고 걸어가는 외국인 슈트맨들을 보니 강주하가 떠올랐다. 완전히 분리된 디벨로퍼 오피스 구역에만 있으니, 이미 출장을 가고 해외에 있는지 어떤지 근황은 전혀 몰랐다. 사내 인트라넷에 들어가 공식 스케줄을 알아보려면 알아볼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다.
40대 정도로 짐작되는 귀티 나는 여자들이 옆 테이블에 앉아서 부동산 현황과 다주택자 세금폭탄, 향후 엄청나게 맞을 상속세며 증여세에 대해 여러 불만과 고민들을 토로하고 있었다. 탄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어지며 애들을 일찌감치 미국에 보내놓길 잘했다, 달러를 사놓길 잘했다, 목소리가 조금씩 더 높아져 갔다.
유주는 가방을 뒤적거려 이어폰을 꺼내서 휴대폰의 라디오 앱에 연결시켰다. 바흐의 비올라 디 감바와 하프시코드 소나타가 귀를 촉촉하게 적셔왔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어디서도 사람들은 부동산 얘기밖에 하지 않는다. 정혜 언니도 ‘인서울 역세권 아파트 중 어디가 오를 것인가’가 늘 최대 관심사였다.
나는 그냥 작은 공간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는데. 내 몸 하나 누일 방. 그리고 학자금 대출 다 갚고 저축이 좀 모이면 청약 받아 소형 아파트를 마련하고, 더 나이 들면 외곽에 작은 집 하나 지어 이사 가는 거야.
마당과 텃밭이 깔려 있어서 개랑 고양이도 키우고 애들도 층간소음 걱정 없이 마구 뛰어놀고. 마당은 잎이 무성한 초록빛 나무들, 꽃과 풀로 가득 채우고.
거실 벽 전체를 이런 통유리창으로 만들어 남편과 오붓하게 티타임도 갖고. 노을이 지고 분위기가 야릇하게 변하면 둘이 유리창에 기대서서……
미래의 남편이 그녀를 유리창에 기대 세우고 바짝 다가섰다. 입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여자인 제 것보다 더 빨갛고 탐스러웠다.
빨갛게 익은 과실처럼 살짝 부푼 도톰한 입술이 그녀의 것을 덮어왔다. 혀가 질척하게 입 안으로 들어오며 치열과 점막을 부드럽게 훑었다. 혀가 제 의지가 있는 것처럼 음란하게 꿈틀거리며 그녀의 혀를 난폭하게 휘감고 쪽쪽 빨아 당겨 댔다.
그의 양 손바닥이 얇은 여름용 블라우스 위로 가슴을 감싸왔다. 입으로는 키스를 더더욱 열렬히 가해오면서, 불룩하게 솟은 그녀의 젖가슴을 더 세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가 입을 떼고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문질렀다. 그리고 속삭였다.
-유주야… 더 못 참겠어. 이젠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
그녀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자 가슴을 주무르던 손가락이 옷 위로 튀어나온 젖꼭지를 거칠게 비틀고 잡아당겼다. 그가 음험하게 웃었다. 그녀가 무척 좋아하는, 기품이 흐르는 바리톤 음색이 여전히 품위 있게 이어졌다.
-아주 사정없이 박아 주고 싶은데. 정신을 못 차리게… 구멍 제일 깊은 곳까지. 그럼 아주 환장하며 꽉 조여 들겠지. 응…?
손가락이 유두를 한 번 더 세게 잡아당기고 손가락 사이에 세게 비비다가 빙글빙글 원을 돌렸다. 어딘가 금욕적인 분위기마저 흐르는, 평소의 냉담한 모습과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원색적인 워딩은 계속되었다.
-좆이 아주 끊어져라 물고 조이고. 응? 내 좆이 그렇게 쉽게 끊어질 만큼 물렁하진 않지만… 직접 확인해 볼래?
다리 사이가 흠뻑 젖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가 완벽한 콧날을 살짝 들어 올렸다. 늘 진중하게 꽉 다물고 있거나 엷은 웃음만 짓던 입가에 야비한 미소가 걸렸다.
-뭐지, 이 냄새는… 벌써 이렇게나 흥분한 거야? 냄새가 아주 기가 막히는데. 이렇게나 음란하다니.
그는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밀쳐내고 치마 안으로, 다리 사이로, 기어이 팬티 안까지 커다란 손을 밀어 넣고 젖은 음부를 세차게 쓸었다.
손바닥을 쫙 펼쳐 갈라진 틈새에 비비다가 손가락으로 꽃술과 외음부 여기저기를 꼬집기를 한참, 손가락 두 개가 한꺼번에 질 안으로 쑤욱 밀고 들어왔다. 그녀가 자지러지게 놀라 허리를 뒤로 빼려고 물러났다.
-아니, 가만있어.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겨우 이 정도로. 내 좆은 이것보다 훨씬 더 크고 굵은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해. 응?
깊고 풍부한 저음에 물기가 어리니 허스키해졌다. 아아, 그녀는 더 반항하길 포기하고 몸에서 힘을 빼버렸다.
그가 블라우스를 확 풀어헤쳐 안에 숨겨져 있던 젖가슴을 밖으로 꺼냈다. 그리고는 입술과 혀로 유두가 닳도록 격렬하게 애무해댔다. 그 와중에도 음부 안에 깊이 꽂힌 손가락은 속살을 여기저기 찔러대고 비비고 휘젓느라 바빴다.
남편이 그녀의 몸을 빙글 돌려 통유리창 위로 살짝 밀었다. 격한 애무로 뜨겁게 달아오른 젖가슴이 차가운 유리창에 짜부라지듯 눌렸다.
음부 안을 들쑤시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로 다시 들어와 속살을 격렬히 치댔다. 엄지손가락이 후방의 작은 구멍의 주름까지 비비고 문지르자 입에서 비명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습기 찬 속삭임이 다시 귓가에 닿았다.
-넣는다…?
희롱하듯 음순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멀어졌다. 유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상상 속의 남자는 강주하의 얼굴과 음색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크게 외쳤다.
“아, 어떡해! 젖었어!”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유주는 흠칫 놀라 눈을 부릅떴다. 창 너머로 떨어지던 굵은 빗방울이 금세 소나기로 바뀌어 있었다. 카페 입구로 들어서는 웅성거림에 뒤를 돌아보자, 여자들이 옷에 달라붙은 빗물을 탈탈 털어내고 있었다.
“완전 다 젖었어, 아휴… 흠뻑 젖었다고. 아주!”
젠장, 이쪽도 젖었어. 갑자기 그 인간이 머릿속엔 왜 나타나서……
유주는 죄지은 것처럼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폭우가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원피스 스커트를 무릎 아래로 더 잡아당기고 두 무릎을 꼭 붙였다. 누군가 흠뻑 젖은 다리 사이를 엿보기라도 할까 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그녀는 남은 라떼를 다 마셔버리고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났다. 빗줄기가 점점 더 무서운 기세로 땅을 내리꽂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10분 넘게 지하철역까지 뛰어가면, 정말로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될 것이다. 얇은 셔링 원피스는 하필 상체가 달라붙는 스타일이라 브래지어가 고스란히 비칠까 걱정도 됐다.
유주는 커피숍 차양 아래 서서, 정신없이 뛰어가거나 우산을 펼쳐 들고 여유 있게 활보하는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비가 그칠 때까지 조금만 기다릴까. 계속 안 그치면? 하필 우산이 있을 만한 편의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입술 끝이 아래로 처졌다.
이럴 때 드라마에선 남자주인공이 커다란 우산을 가지고 오던데. 여자 주인공이 있는 곳을 귀신같이 알고 말이지.
하지만 그녀는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도 아니고 그런 포지션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남자주인공이라 할 만한 사람도 없고, 최근에 겨우 깨달은 옛 짝사랑의 대상은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었다.
유주는 길 건너 일렬로 늘어선 우산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신호등이 바뀌고 색색의 우산들이 횡단보도를 건너 그녀 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산들은 왼쪽, 오른쪽 제각기 방향을 틀어 바삐 사라져갔다.
그녀는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차도의 물보라를 응시했다. 누군가 익숙한 얼굴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잘못 봤겠지, 유주는 건물 벽에 기대고 차양 아래 눈을 감았다.
“서유주.”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아까 그녀를 젖게 만든 바리톤 저음이다. 왜 자꾸 머릿속에 맴돌며 환청까지 일으키는 걸까. 차라리 비를 좀 맞는 게 나을 것 같다. 유주는 빗속을 달려갈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눈을 떴다.
“여기서 뭐 해?”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환청이 아니었다.
“본부장…님?”
“여기 회사 아닌데.”
190cm가 조금 넘는 거구에, 비처럼 서늘한 눈이 유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 든 커다란 우산이 차양 덕분에 비를 맞지도 않는 그녀의 몸으로 기울어져 있다.
“강주하.”
유주는 그가 원하는 대로 이름을 불렀다. 우산이라니 늘 차로만 이동하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우산을 상품으로 내건 화보를 찍고 있는 것도 같았다. 까만 우산 겉면에는 미리암 셰퍼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역시 재수 없어. 우산도 수백만 원짜리를.
“여기서 비 피하고 있던 거야?”
“그럼 뭐 하고 있었겠어. 기껏 외근지에서 바로 퇴근하는 급경사를 맞았는데 비가 아니면 뭐 하러 여기 멀뚱하니 서 있겠냐고.”
우산값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하지만 강주하는 아랑곳없이 제 할 말만 담담하게 읊었다.
“이왕 라떼 마시면서 앉아 있었으면 그칠 때까지 더 앉아 있지 그랬어.”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자리 차지하고 있기가… 잠깐, 나 안에서 라떼 마시고 있었던 거 어떻게 알았어?”
“창가에 앉아 있던 거 아케이드에서 봤어. 멍하니 앉아 얼굴 두 손으로 받치고 히죽거리던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유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있지도 않은 미래의 집, 거실 통유리창에 밀착해 강주하와 섹스 직전까지 갔던 망상을 그가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수치심이 일었다.
“조, 좋은 일은 무슨! 아까 말했잖아, 바로 조기 퇴근해도 된다고 해서 경사 난 기분이었다고.”
“너 말이야.”
강주하는 뭔가 생각하다 그녀를 보았다.
“외근 간 곳이… 양재 쪽 어반 라이프 모델하우스에 인력 충원 나간 거 맞아? 이번이 두 번째였지?”
유주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장이 타 부서 인턴의 외근 현황까지 꿰고 있다니 세심하다고 해야 할지, 편집증적이라 해야 할지.
“거기 남자 새끼들만 우글거리는 데잖아. 다음부턴 가지 마. 아니 내가 못 가게 조치해놔야겠어.”
“뭐…요?”
그가 갑자기 본부장 모드가 되는 바람에, 유주도 저도 모르게 말 어미를 붙였다가 도로 뺐다.
“아니 왜? 거기 가면 얼마나 유익한데… 현장에서 이것저것 배우고 잠재 고객들을 직접 만나니까 재미도 있고, 오늘처럼 조기 퇴근도 할 수 있……”
“젊고 잘생긴 대리, 과장들이 득실거리고. 그렇지? 영업 쪽은 신수가 훤해야 하니까.”
점점 약해지는 빗줄기를 뚫고 이가 빠득 갈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강주하는 날 선 음색으로 단호하게 덧붙였다.
“가지 말라면 가지 마.”
유주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 어이없는 기시감의 파도 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불과 닷새 전, 그 호텔 비스트로에서도 분명히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휴대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강주하의 것이다. 그는 번호를 보고 이만 가봐야겠다 말하며 유주의 손을 덥석 잡아채 우산 손잡이를 쥐여 주었다.
“어, 비 그쳐서 괜찮…”
“중간에 또 올 수 있잖아.”
좋게 말할 때 들고 가라? 또다시 무언의 명령이 첨언된 환청이 들렸다.
“내일모레 이사하지? 업체 사람이 알아서 다 해 줄 테니까 연락 기다리고 있어. 출장이 다음 주로 미뤄졌으니까 주말쯤 갈게.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은데 차를 맡겨서.”
“어, 업체? 용달차 예약해놨는데… 짐도 거의 없어서!”
강주하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차도에 서자마자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그를 태우고 속도를 높였다. 그러게 우산은 왜 들고 다닌다니, 대체?
유주는 처치 곤란한 얼굴로 우산을 내려다보다 결국 손에 들고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갑자기 그가 다음 주 주말쯤 온다는 말이 생각나 걸음을 뚝 멈췄다. 굳이 올 필요 없는데 왜 온다는 거지? 업체를 불러준다는 것도 이미 너무 과한데.
* * *
8월도 세 번째 주로 접어들어 폭염도 한풀 꺾여 있었다. 유주는 에어컨을 끄고 천장 위를 돌아가는 대형 팬만 그대로 두었다.
앤 셜리와 길버트 블라이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사랑스러운 커플. 그들은 궁극의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 앤이 블라이스 부인이란 호칭으로 불리게 됐을 때 그 어감이 너무도 좋았다. 하이스쿨 스윗하트였던 둘은 결혼해서 아이들도 많이 낳았고, 그 중 리라라는 사랑스러운 막내딸도 있다.
그리고 쥬디와 그녀의 키다리 아저씨, 미스터 스미스. 이 열네 살의 나이 차를 뛰어넘은 커플, 제루샤 애비는 로맨스 픽션 역사상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주인공이고 져비스 펜들턴은 가장 이상적인 어른 남자의 전형이다.
아, 그리고 불멸의 명작인 폭풍의 언덕을 빼놓을 순 없다. 아주 어릴 때 읽었던 히스클리프는 그냥 정신 나간 미친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캐서린의 딸 캐시에게 왜 그렇게 심술궂게 굴고 제 아들한테도 지랄 발광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지금은 그 광기 어린 사랑과 집착에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뭔가가 잘못됐어.
유주는 제가 가장 아끼는 책들을 책장에서 하나씩 꺼내 보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15층 높이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미세먼지로 뿌옇고, 탁했다. 꼭 그녀의 마음 같았다.
“뭔가 잘못됐다니까.”
유주는 중얼거렸다. 소리 내서 반복해 말하면 그 잘못된 것이 바로 잡히기라도 할 것처럼 몇 번이나.
일주일이 지나고 이사한 지 첫 주말이 돌아왔다. 방 네 개짜리, 화장실 두 개짜리 집은 생각보다 훨씬 깨끗하고 쾌적했다. 다만 이상한 점들이 있었고 하루가 지나면서 의문은 하나씩 더 불어나고 있었다.
처음 캐리어와 박스 몇 개를 이끌고 아파트 동에 들어섰을 때, 초로의 관리실 직원이 지나가듯 던진 말씀부터가 이상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인터폰으로 연락하라고 허허 웃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젊은 숙녀분이 세입자로 왔네? 잘 살고 있던 사람들 갑자기 나가고 벽지에 화장실 싹 다 뜯어고치고, 금방 허물 집인데 뭐 하러 인테리어 하고 공을 들이나 했더만… 피아노까지 들여오고. 어디 외국에서 왔소? 교포? 이 동네에 외국인들도 많이 사는데 외국인은 한 달을 살아도 제 취향 맞게 고쳐서 산다 그러더라고.
-네? 아, 아닌데요. 저 한국에서만 쭉 살았어요.
-아, 그렇구만.
-저, 근데 방금 하신 말씀 말인데 원래 이 집에 살던 세입자들이 갑자기 이사를 나갔다고요? 그리고 인테리어는……
-으응, 그 프라이버신가 뭔가 때문에 원래 이런 건 말해주면 안 되지만. 그 집주인 친척이라니 말한다만, 집주인이 웃돈을 더 얹어줘서 계약 중에 나간 것 같더라고. 원래 6개월 이주기간 딱 끝날 때까지 살고 나가려고 했는데. 친척이 잠시 들어와 있어야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가씨가 그 친척 맞죠?
그때 관리실에서 호출전화가 오는 바람에 대화는 끊겼다.
아닌 게 아니라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상한 위화감이 있었다. 실내 구조 자체는 40년 전의 오래된 스타일이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새것이 틀림없는 웨인 스코팅 양식의 벽지에다 소파와 안마 의자, 침대, 가구, 호텔 욕실처럼 모던하게 꾸며진 화장실과 갑자기 들여놓은 것 같은 주방의 최신식 커피머신과 여러 기구, 설비들이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침대도 있으니까 몸만 오면 된다고 했는데, 대문짝만 한 킹사이즈 베드에다 고급스러운 캐노피까지 달려 있어서 첫날 꽤 당황스러웠다. 신혼부부가 살았다 해도 이사 갈 때 가져갈 법한데 아무리 봐도 새것 같았다. 이상함을 넘어서서 수상함마저 일었다.
경비 아저씨께 물어보려고 해도 다음날부터 아저씨가 여름휴가라서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강주하는 지금 출장 중에 있었다. 최근 중국과 동남아시아 여기저기 완공을 앞둔 리조트 개발 투자 프로젝트로 상당히 바쁘다고 귀동냥으로 들은 바 있었다. 어제까지도 해외 어딘가로 출장을 가 있느라 국내에 없었다.
그래서 서류상의 의혹도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이삿날, 그녀의 거취를 걱정한 정혜 언니가 혹시 모르니까 갖고 있으라고 준 인터넷 등기부 등본도 수상쩍었다. 집의 명의가 그의 친척 누군가가 아니라 강주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의문은 눈덩이처럼 점점 더 불어나게 되었다. 왜 처음부터 본인 명의라고 말을 안 했을까?
이상한 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주 그가 화요일 출장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다음 날 사옥에서 다시 공항으로 출발하던 날 오전의 일이다.
유주는 지하 시설관리팀에 볼일이 있어서 주차장 옆을 지나다, 누군가와 통화에 열중하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엿들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유주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기둥 뒤에 숨었다. 통화가 끝나는 즉시, 등기부 등본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었다.
대화 내용이 심상치가 않았다. 수화기 저편에서 누군가 돈 빨리 갚으라고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이 자식아, 돈 내놓으라고! 언제 갚을 거야!
-그런 거금을 당장 내놓으라 하시면 곤란합니다. 완공까지 최소 3년은 걸려요.
-야! 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호화명품으로 두르고 외제 차 굴릴 돈은 있으면서 내 돈 갚을 건 없어? 지난주엔 뭐? 마라세트? 마트라세? 다른 차로 바꿔서 굴리고 다니는 거 다 봤어!
강주하가 한숨을 내쉬고 상대방의 말을 정정했다.
-마세라티요.
-아, 쓰벌! 마라세튼지 마라탕인지 그 빌어먹을 고철덩어리 이름 따위 알 게 뭐야? 지금 그게 중요해?
-차 얘기 꺼낸 건 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벌어서 제 돈 주고 산 겁니다.
-지랄! 마라탕 사발로 처마시고 불알치고 갈 소리! 아주 그냥? 암튼 너 빨리 돈 갚아! 그냥 확 법대로 해버려? 응?
-법대로 하십시오, 그럼.
그리고 그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법대로 할 경우 그가 언제 어떻게 누구를 통해서 상대방에게 불리할 절차를 밟을 것인지 기계처럼 억양 없이 말했다.
상대방은 하! 허허! 참내! 기가 막혀 죽겠다는 의성어만 추임새처럼 넣다가 소리소리 질렀다.
-법대로 하라고요오? 예에! 얼마나 사리에 밝고 똑똑하신데 어련하시겠습니까. 내 아주 불알을 탁 치고 갑니다아!
수화기 너머에서 나이 지긋한 여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놈의 불알은 어째 아직도 무사해요? 그렇게 툭하면 쳐대는데.
고함 소리가 한참 이어지다 여자 쪽의 노호에 잠시 조용해졌다. 강주하는 그럼 이만 끊겠다고 무성의하게 대답하고 통화를 끊어버렸다. 유주는 그가 올라탄 은청색 마세라티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기둥 앞으로 나왔다.
뭐지? 혹시 사채업자에게 돈이라도 빌렸나?
갑자기 오싹한 한기가 들면서 남 일 같지 않게 걱정이 되었다. 그와 저 사이에 정말로 전월세 계약서와 계약금이 오갔다면, 그리고 집주인인 그에게 사적인 감정이 없다면 당연히 다른 것이 걱정됐을 것이다. 전 재산인 전월세 보증금을 못 돌려받아 피 말리고 분쟁하는 케이스가 요즘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녀는 계약금은커녕 돈 한 푼 안 내고 입주했다. 게다가 아직 설명도 듣지 못한 그 미스터리한 인테리어에 새 가구들까지, 설령 그가 억대 빚을 진 탕진남이라 해도 그녀가 손해 보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과도한 빚을 지고 독촉에 시달리는 걸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여자친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잠깐만. 만약 이 아파트를 정말로 소유한 것이라면 그렇게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필요가……
“아, 아니지. 이건 속된 말로 존버할 물건일 테니까.”
강남 재건축 매물은 지구가 멸망하고 지옥문이 활짝 열리기 전까지 절대로 손에 놓아서는 안 되는 황금알 거위라고 귓구멍이 마르고 닳도록 들었다. 그것도 분양가 상한제니 경제 불황이니 뭐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신경 쓰지 말자, 서유주. 네 앞가림이나 제대로 해.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 곧 죽어도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 걱정이라고 했어.
아니, 하지만…
유주는 책장 앞에 오도카니 서서 손톱 끝만 줄기차게 뜯었다. 초조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돈 한 푼 안 내고 신세를 지는데 배은망덕하게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엄지손톱 가장자리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얼마 전 취직에 성공했다는 동창, 직장 동료, 정혜 언니와 정연 언니가 주말에 뭐 하냐, 만나자, 놀러 와라, 연락을 해오고 있었다.
다들 보고 싶었다. 보증금에다 월세, 이사비용까지 죄다 아꼈으니 모처럼 토요일 밤, 사람들과 맛있는 것도 먹고 수다 떨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왜일까, 자꾸만 마음이 허했다. 잠시나마 배부르고 등 따신 허전함일까. 유주는 커다란 집, 넓은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에 누워 불도 켜지 않고 있었다. 노을이 서서히 밀려오고 해가 지고 있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는 솔직히 좋기도 했었다. 지난 3년 반 동안 거실도 없고 옆 건물과 다닥다닥 붙어서 창문 한 번 맘 편히 열어볼 수 없었던 방 세 개짜리 작은 빌라에 살다가, 어릴 때 살았던 아파트에서 다시 살게 되다니.
그러나 그 기대는 달랑 일주일 만에 바뀌었다. 생각만큼 별로 좋지가 않았다. 언니들과 다닥다닥 붙어서 나누던 온기와 정이 그리웠다. 외로웠다. 그런 외로움도 사치다, 이렇게 넓은 곳을 돈 안 들이고 혼자 독차지하게 되니 배부른 헛생각만 드는 거다, 스스로를 꾸짖어도 공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제는 너무 외로워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동 앞까지 걸어가 텅 빈 콘크리트 건물을 멀거니 바라보기도 했다. 그녀의 집이었던 104동, 10층 복도 맨 끝 집은 불빛 하나 없이 적막했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나서 벤치에 앉아 조금 울기도 했다.
유주는 감았던 눈을 떴다. 청담동 사거리의 화려한 조명이 멀리서 희미하게 비쳐들었다. 입주민이 대거 이주해버린 앞 동에는 불빛이 거의 없었다. 이쪽은 저쪽, 불야성을 이루는 자본주의 거리와는 동떨어진 섬 같았다.
저쪽 세계를 동경하진 않았다.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부럽고 갈망했던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절대 속할 수 없는 곳임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단지 외로울 뿐이야. 그게 다야.
휴대폰에서 방전 직전임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그 순간 폰이 띠리리 울렸다. 최근 일반 회사에 취직했다는 대학 동기다.
“어, 혜리야.”
“집이야? 약속 없으면 나오라니까? 지원이랑 영재 선배도 나올 거야. 우리 지금 신사역 훠궈집 갈 건데 너 새로 이사한 동네 코앞이잖아!”
유주는 결국 소파에 누워있던 차림 그대로 나갔다. 마을버스를 타려는 길에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남자 목소리였다.
“유주야! 서유주!”
“어, 영재 선배. 어떻게 여기 계세요? 혜리한테 연락 와서 지금 신사역 가는 길인데.”
“와, 너 진짜 오랜만이다! 이 근처에 여행사 있어서 설명회 참석하느라. 내년 3월부턴 대학원 들어가니까 그 전에 유럽이나 쭉 돌려고.”
“아, 들었어요. 선배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셨다고. 국제경영 쪽으로 학부 바꿔서 대학원도 합격하셨다고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유주는 선배와 나란히 걸으며 그를 선망의 눈길로 보았다.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백 퍼센트 대학원에 대한 선망이었다.
“너도 졸업할 땐 대학원 진학 알아보고 그러지 않았어? 아, 하긴 BK처럼 좋은 회사 취직됐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다. 나야말로 축하해.”
“인턴이고 내년 3월부턴 어떻게 될지 몰라요. 회사는 좋은데 스펙도 딱히 별로고 능력도 없어서……”
“아, 6개월 후 정규직 여부가 결정되는 거구나. 네가 능력이 없긴 왜 없어, 학점도 높아서 장학금 계속 받고 그랬는데… 분명히 잘 될 거야.”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잘 안 될 것 같긴 하지만… 회사가 워낙 규모 있고 연봉 복지 파격적이라 다들 스펙도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마을버스 정류장이 눈앞에 있었다. 영재는 유럽여행, 차를 살 계획 등에 대해 얘기하다 약간의 틈을 두고 유주에게 불쑥 물었다.
“유주야. 너 번호 그대로지? 혹시… 만나는 사람 있어?”
“네?”
유주는 당황했다. 충분히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긴 했지만 쭈뼛거리는 영재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너 학교 다닐 때 진짜 인기 많았는데. 강의만 끝나면 알바 줄줄이 한다고 후다닥 사라지느라 도무지 틈을 안 주니까, 결국은 아무도 대시하지 못했지만.”
“네? 제가요? 그럴 리가……”
“진짜야. 너 알바 한다고 연락도 안 돼, 축제도 참가 안 해, 동아리 활동도 안 하고 학생식당에도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2학기부터는 풀 가정교사 자리 얻었다고 강의 끝나자마자 집에 가버리고.”
“아, 알바는 식당이나 식사 제공되는 곳에서 주로 했고, 가정교사 맡은 아이가 저보다 빨리 하교하니까요. 돌아보니 정말 강의시간 외에는 캠퍼스에 거의 없었던 것 같네요.”
“그래. 그래서 말인데…”
그의 눈빛이 어딘가 묘해졌다. 그리고 뭔가 말을 했는데 갑자기 차도에서 빵빵, 울리는 클랙슨 때문에 듣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은회색 차가 있었다. 영재 선배가 헉, 숨을 들이켰다.
“베, 벤틀리 컨티넨탈! 대박!”
선팅 된 차창이 열리고 운전자가 드러났다. 차는 낯설었지만, 운전자는 낯익었다. 아니? 며칠 만에 마세라티를 또 다른 차로 바꾼 거야?
“서유주 씨.”
강주하가 운전석에 앉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마 위로 시원하게 빗어 올린 머리카락, 하얀 도기처럼 매끈한 이목구비가 가로등 불빛 아래 서늘하게 빛났다. 팔뚝을 감싼 슈트가 옆 좌석을 짚는 동안 팽팽하게 당겨진 압박에 찢어질 것 같다.
“보, 본부장님.”
“여기서 뭐 해요.”
회사도 아닌데 말을 높이는 걸 보니 영재 선배를 의식한 듯했다. 존대가 아니라도 조금 이상했다. 바리톤의 낮은 음성이 평소와는 좀 달랐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정장인 걸 보니 오늘도 업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네, 저… 친구들이랑 신사역에서 저녁 먹기로 해서요.”
“미안하지만 그 약속은 미뤄야 할 것 같은데요.”
“네? 왜요?”
갑자기 뜬금없이 길에서 나타나 무슨 소린가. 강주하는 대꾸 없이 차에서 내렸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옆에 서 있던 영재 선배가 한 번 더 숨을 들이켰다. 벤틀리도 벤틀리지만 190cm에 육박하는 키와 떡 벌어진 피지컬에 압도된 것 같았다.
“집에 문제가 생겨서 손 봐줘야 됩니다. 지금 당장.”
손 봐줘야 됩니다, 라는 대목에서 강주하의 곱지 않은 눈매가 영재 선배를 흘깃 훑었다. 평소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확실히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 있었다.
“네? 지금 당장…이요? 집에 문제라니 무슨. 저 10분 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 없었……”
“10분 전부터 전화 계속 안 받던데요.”
기분 탓인가. 갑자기 목소리가 으르렁거림처럼 들렸다. 그는 운전석 반대쪽 차 문을 눈짓해 보였다. 얼른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 보니 절전모드에서 완전히 꺼져 있었다. 마라탕 집이 어딘지는 이미 알고 있고, 혜리의 재촉에 서두르다 보니 충전하는 걸 완전히 깜빡하고 말았다.
“전원이 나갔네요, 지금 보니.”
“시간 없으니까 빨리 타요.”
“네? 하지만……”
“급합니다.”
강주하는 운전석 쪽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타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태울 기세였다. 정말로 그럴 것이라는 강한 확신에, 유주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영재 선배를 돌아보았다.
“선배, 미안해요. 제가 저분 집에 그… 세입자로 살고 있는데 집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봐요.”
“어, 그, 그래…… 뭔가 심각한 문제 같은데 빨리 가봐. 애들한텐 내가 말해둘게.”
유주는 주눅 든 얼굴의 영재를 뒤로하고 차에 올랐다. 서늘함 속에 깊고 풍부한 머스크 향 같은 것이 흘렀다.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서 가죽 시트가 푹신한 것도 몰랐다. 차가 다시 출발해 차도로 들어서고도 그는 말이 없었다.
“본부장님, 집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혹시 아래층에 물이 새나? 그런 건가요?”
“내려서 얘기해.”
단둘이 되니 다시 말이 짧아졌다. 소름이 돋을 만큼 차디찬 목소리였다. 유주는 더 입을 열지 않고 정면만 보았다. 차 안에는 무덤 같은 정적만이 가득했다.
곁눈질로 보기에도 무서워 앞만 똑바로 바라보길 한참, 차가 청담동 사거리를 지나쳐 반대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시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부… 강주하. 이쪽 방향 아닌데?”
“맞아.”
그는 무뚝뚝하니 짧게 덧붙였다.
“식당은 이쪽이야.”
“뭐? 집에 문제가 있다고 했잖아. 지금 빨리 가서 손 봐야 한다고……”
“정확히는 집이 아니라 집에 사는 사람한테 문제가 있었는데… 이젠 해결됐어.”
“뭐? 도대체 그게 무슨……”
유주는 이번에야말로 인상을 썼다. 도무지 알아듣게 말을 좀 해줬으면 좋으련만 대체 무슨 소린지.
“너야말로 왜 사람 말 허투루 들어? 내가 지난주에 말했어, 안 했어? 이번 주말에 오겠다고 했잖아.”
유주의 뒤통수에 종이 울렸다. 잊고 있었는데 그가 상기시키니 기억이 났다. 그러고 보니 주말에 연락하고 오겠다고 했었지. 그런데 대체 왜?
“그때 왜 오겠다는 거였어? 집에 문제도 없으면…”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 커다란 3층짜리 별장 같은 건물 부지에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발렛 직원이 달려와 정중히 인사하고 차키를 받아들었다.
“자리로 먼저 가 있어. 매니저와 얘기할 게 있어서.”
“저기… 나 이런 데 올 줄 전혀 예상을 못 해서. 옷차림이 이런데.”
유주는 굽 없는 샌들에다 꽃무늬 끈 원피스에 흰 면 티셔츠를 안에 받쳐 입은 제 모습을 가리켜 보였다. 하지만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릴 뿐이었다. 그리고 예의 비뚤어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녀가 가장 매력적이라 생각하는 일그러진 미소.
“왜? 예쁜데.”
그리고는 돌아서서 정중히 두 손 모아 서 있는 매니저에게로 걸어가 버렸다. 유주는 2층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되어 유럽풍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2층 창가 테이블에 앉을 때까지도 어안이 벙벙했다. 여길 실제로 들어와 보다니. 그것도 강주하와 단둘이.
그녀는 화려한 샹들리에와 바로크 양식의 궁정을 본뜬 실내를 휘휘 둘러보았다. 외관과 정원이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스타 쉐프의 예약제 레스토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바로 들어왔을까. 몇 달 전에 예약해도 자리가 날까 말까 하다던데.
직원이 가져다준 보조 배터리를 연결하자 죽어 있던 휴대폰이 2% 소생했다. 강주하에게서 여덟 통의 부재 통화가 와 있었다. 여덟 통? 거의 일 분에 한 번씩 전화를 한 셈인데 진짜 집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었나?
그때 강주하는 매니저와 대화를 마쳤는지 자리로 와 앉았다. 아까 차에서보다 표정이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여긴 따로 정해진 메뉴가 없어서 알아서 나올 거야. 못 먹는 거 없지?”
“그렇긴 한데… 집에 정말 문제없어? 전화를 이렇게 많이 했던데.”
“아까 말했듯이 집이 아니라 세입자에게 문제가 있었던 거라니까. 나는 분명히 주말에 연락하고 온다고 했는데 전화를 받아야 말이지. 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연락했어야 했는데 이동 중에 계속 업무 통화할 일이 있어서. 하노이에서 연착되는 바람에 한참 늦어졌어.”
“하노이? 베트남 일정은 없던데?”
순간 혀를 깨물 뻔했다. 비서도 아닌데 사내 인트라로 그의 출장 스케줄을 확인했다고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주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는 그의 한쪽 눈썹이 의아한 듯 호를 그렸다.
“공식 스케줄이 아니라서. 그쪽에 일이 있었어. 그보다…”
화제를 돌리는 눈빛에 다시 냉기가 고였다.
“아까 그 선배라는 사람과 왜 단둘이 가고 있었어? 중간에서 만났어?”
표정이 다시 안 좋아졌다. 대답을 기다리며 꾹 다물린 입술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아, 가다가 우연히 만난 거야.”
유주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영재 선배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무시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주하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뼛속부터 무례하고 거만한 안하무인 인간이지만, 면식 없는 사람에게 노골적으로 제 본성을 드러내는 타입은 아니다.
“무슨 선밴데? 과 선배? 무슨 과? 친해? 서로 연락하는 사이야?”
“무슨 질문이 그렇게 총알처럼…… 전혀 안 친해. 연락하는 사이 아니고.”
그녀가 강주하에게 인상을 쓰는 순간, 색색으로 플레이팅 된 접시들이 하나씩 나왔다. 정장 차림의 매니저가 친근한 웃음을 지으며 오늘의 메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스웨덴식 돼지갈비인 스콘스크 레벤 및 청어와 훈제 연어를 곁들인 퓌티판나 등등 생소한 이름들은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고 튕겨 나갔다.
“집은 어때? 불편한 거 없어?”
강주하의 얼굴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녹아내릴 듯한 그 미소에 유주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불편한 건 없는데… 사실 집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었는데 그동안 네가 너무 바빠서 기회가 없었어.”
“특히 지난주는 절정이었어. 웬만한 수면 부족은 일도 아닌데 아까 비행기에서도 계속 기절해 있었으니. 물어볼 건 뭔데?”
강주하는 의아한 얼굴을 하며 엷게 웃음 지었다. 그녀 쪽에서 뭔가 용건이 있었다니 어쩐지 기뻐하는 것 같았다. 우아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는 모습이 한 폭의 화보 같다. 유주는 쓸데없는 잡념을 떨쳐내려 애쓰며 용기를 냈다.
“뭐냐니까.”
“개인적인 건데… 그럼 그냥 물어볼게.”
“편하게 물어봐. 뭘 그렇게 조심스러워해?”
“혹시 뭐 안 좋은 일… 있는 건 아니지? 금전 문제라든가.”
강주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미안. 너무 사적인 거였지.”
그는 괜찮다며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금전 문제? 글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건 왜?”
“아냐, 아무것도. 그런데 차 또 바꿨어?”
“아니. 마세라티는 출퇴근용이고 벤틀리는 주말용.”
그의 입가가 살짝 휘었다.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근데 갑자기 내 신변에 관심이 많아졌네, 서유주.”
“뭐? 아니… 그게 아니고……”
유주는 더듬더듬 얼버무렸다. 빨려 들 것 같은 눈빛과 미소에 잠잠하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조여 드는 느낌에 무의식중에 두 다리를 꼭 오므렸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고 있었다.
“주말인데 여친은 안 만나?”
“디저트 나왔다.”
그가 다가오는 카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못 들었나? 설마 일부러 못 들은 척하진 않을 텐데. 유주는 굳이 다시 묻지는 않았다. 알아서들 하겠지. 어련히 알아서 잘 만나겠어? 네가 뭐 하러 신경 써. 오늘도 그냥 집에 문제없는지 살피러 온 거겠지.
포트넘앤메이슨의 로즈 블렌드 홍차와 오랑제트 초콜렛 무스까지, 화려한 정찬이 끝났다. 몇 마디 안 했는데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려서 시계가 잘못됐나 싶을 만큼 아쉬움이 일었다.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가 말했다.
“여기 분위기 정말 좋지? 10분만 더 있다가 가자. 집에 데려다주고… 잠깐만 들어갈게.”
“응? 왜… 아, 집 상태 보려고? 딱히 볼 건 없겠지만. 그래, 집주인인데 내가 오라 마라 할 순 없지.”
“비밀번호는 바꿨지?”
유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번호?”
“그건… 왜?”
“혹시 주민등록 뒤에 번호 처음 네 자리?”
“아냐. 비밀번호는 왜 자꾸 물어봐.”
설마 월세 안 받는 집주인이라고 진심으로 번호 묻고 드나들려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으니까.
“설마 생일? 0327?”
유주가 놀라서 움찔, 입술을 달싹거렸다. 생일로 날짜 설정하는 경우는 많으니 특별할 것도 없다. 포인트는 그가 어떻게 제 생일을 알고 기억하고 있는지에 있었다.
“어떻게… 아, 이력서에서 봤겠군. 그래도 용케 기억하네.”
“나도 여자 생일 저절로 기억되긴 처음이야. 어머니 빼고.”
“여친 빼먹으면 어떡해. 여친은 생일이나 처음 만난 날, 백 일째… 아무튼 중요한 건 다 기억할 텐데.”
그는 대꾸 없이 시선을 내려뜨리고 두 손을 가슴 아래 포갰다.
“아, 아까 물어봤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모처럼 주말인데 여친 안 만나? 집 둘러보고 만나려고?”
“…….”
“사생활인데 너무 깊이 들어갔나. 미안. 어쨌든 비밀번호는 바꿔야겠다. 역시 생일이면 보안에도 안 좋고.”
“없어, 사실은. 아니, 있긴 있는데… 생길 예정이긴 한데. 아니 아직 공식화만 안 된 거지, 엄밀히 말하면.”
강주하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할 말만 중얼거렸다. 그는 결심한 듯 깍지 낀 두 손에서 시선을 떼고 유주를 마주 보았다.
“사실은 없어, 여친 같은 거.”
“뭐?”
“없다고. 그만 일어나자. 집에 가서 얘기해.”
집이란 건 강주하 명의, 서유주 실거주의 그 아파트를 지칭하는 게 불 보듯 뻔했다. 유주는 먼저 뒤돌아서서 나가버리는 주하의 등에 대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사실은 여친 같은 거 없다니……”
보름 전에 분명히 그랬잖아. 내가 그 집에 들어가 사는 거 여친이 괜찮다고 허락했다며!
갑자기 가슴 속에 묘한 희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 설마 기뻐하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 내가 왜? 강주하에게 여자친구가 있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잖아! 나랑 아무 상관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