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Sex in the City
싱가포르, 센토사 비치의 가을 하늘은 말 그대로 파란 물감, 흰 물감을 자유롭게 풀어놓은 거대한 도화지 같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롭고 아름다웠다.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유주의 얼굴에도 스스럼없는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서유주, 너 엄청 좋아한다? 야아… 마지못해 오는 것 같더니 이렇게 좋아할 줄이야.”
주하는 센토사 섬으로 이어지는 케이블카에 올라타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유주를 끊임없이 놀렸다. 놀리는 내내 그 역시 그런 그녀의 모습이 흐뭇한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이거 안전하겠지? 처음 타보는 거라서……”
유주는 케이블카에 조심조심 발을 디뎠다. 주하는 불안해하는 그녀의 한 손을 잡고 투명한 사각 공간 안으로 들어가 나란히 앉았다.
“당연히 안전해. 그리고 설령 떨어진대도, 내가 너 안고 누워서 떨어질 거니까 걱정하지 마. 너 이렇게 겁이 많아서 놀이기구는 어떻게 탔어?”
“무서운 건 절대 안 탔어. 어릴 때는 부모님이랑 방학 때마다 갔지만…… 그 뒤로는 안가 봤지만 지금도 못 탈 것 같아.”
케이블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유주는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케이블카와 리조트가 있는 섬까지는 운행 시간이 10분 정도 걸렸다.
“그냥 여기 앉아.”
주하가 실소를 머금고 유주를 아예 제 무릎 위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는 반대 방향에서 지나가는 다른 케이블카를 보고 질겁해서 그의 손을 밀어냈다.
“사, 사람들이 보잖아. 안 무서워.”
“그럼 손이라도 잡고 있을게. 절대 안전하니까 맘 놓고 바깥 풍경을 좀 봐. 저기 실로소 비치 보인다. 백사장이 정말 예술이야. 저기 오른쪽 끝에 풀빌라 쭉 늘어선 거 보이지? 저기가 우리가 묵을 숙소야.”
“저기 초록색 지붕들? 설마, 저렇게 좋은 곳에서?”
유주는 에메랄드빛 수평선 가까이 늘어선 빌라들, 이국적이고 모던한 콘도 빌딩들과 동화처럼 꾸며진 리조트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어딘가 최첨단 미래도시 같은 느낌이야, 입을 떼려는 순간 스커트 아래로 들어오는 손에 흠칫 놀랐다.
“강주하! 손 안 치워? 반대쪽 케이블카에서……”
“이 각도에선 안 보여.”
그의 막돼먹은 손이 뱀처럼 그녀의 다리 사이에 똬리를 틀었다. 주하는 비치를 마주 보고 나란히 앉은 자세에서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꼭 감고 다른 손으로 스커트 안쪽을 비집고 쑤시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손가락이 얇은 속옷 천을 기어이 비집고 들어와 음부 입구를 장난치듯 만지고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주, 주하야! 강주하… 제발. 읏! 하, 하지… 으음!”
“이게 10분만 더 가도 좋을 텐데… 매직 미러에다가……”
주하의 숨결이 점점 더 깊고 야릇해졌다. 유주의 숨결도 당혹감에 가빠졌다. 최소 20분 운행에 바깥에서 안 보이는 유리였다면 그는 당장 창 한쪽에 그녀를 밀어붙이고 윈도 섹스를 강행했을 것이다. 욕정의 화신, 강주하는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하아……”
그가 제 손가락 둘을 속살에 좀 더 깊숙이 밀어 넣고 꼼지락거리며 억눌린 숨을 뱉어 냈다. 손가락보다 훨씬 더 두껍고 큰 것을 쑤셔 박고 싶은데 간신히 참는 호흡이었다. 갈고리처럼 휘는 손가락 마디에, 유주가 우는 소리를 냈다. 아닌 게 아니라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 아파! 그만… 제발, 제발 빼줘…… 읏! 으응!”
철벅철벅, 손가락이 아까보다 더 세차게 점막을 긁어대며 더 깊은 동굴 안쪽 오목한 곳을 지그시 눌렀다. 유주가 악, 비명을 지르며 그의 팔뚝에 힘껏 손톱을 박아 넣었다. 그 와중에도 고개 돌려 점점 가까워지는 케이블카 도착 지점을 바라보며 애원하다시피 그를 말렸다.
“주, 주하야, 다 왔어! 다 왔다고… 제발, 빨리…!”
흐읏, 그가 마지못해 손가락을 빼내고 손을 거둬 갔다. 젠장, 낮게 중얼대며 애액에 축축하게 젖어 든 제 손가락을 정신없이 핥는 그 색기 어린 얼굴에 유주의 몸 중심이 한 번 더 젖어 들었다.
제 몸에서 나온 체액을 미친 듯이 핥고 빨아대는 강주하의 얼굴이 한순간, 너무도 매혹적으로 보였다. 사랑스럽다는 생각마저 들어서 유주는 이를 악물었다.
미쳤어, 서유주. 너도 점점 정상이 아니야. 정신 차려.
도착하기 일 분 정도만 남겨 둔 시점에서, 주하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목 안쪽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유주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의 입술 틈으로 제 애액의 날 내음이 풍겨 오는 것 같았다. 제 목 안쪽, 민감한 살결을 부드럽게 바르작거리던 입술과 혀가 조금씩 그 강도를 더해갔다.
“주, 주하… 그만… 해. 이제 다 왔……”
그를 멈추게 해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섹스뿐 아니라, 평소에 틈틈이 귀나 코, 목에 습관처럼 하는 키스에도 유주는 철저히 무방비 상태였다. 강주하의 입술과 혀, 치아에 무슨 마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일단 그가 어느 신체 부위든 입을 갖다 대기만 하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주하가 그녀의 목 가장 오목한 곳에 입술을 누르고 혀로 할짝이는 순간, 케이블카 문이 열리며 안내원의 얼굴이 보였다. 젊은 현지 안내원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유주는 그를 힘껏 밀어내고 영어로 미안하다 더듬더듬 말한 뒤, 죄지은 것처럼 케이블카를 뒤로하고 뛰듯이 걸었다.
“유주야, 그쪽 아니야! 이쪽이라고. 돌아와!”
얄밉게 소리치며 달려오는 주하의 얼굴 위로 유쾌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 * *
둘의 3박 4일 숙소는 리조트월드 센토사 안에서도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다. 유주는 호화롭고 쾌적한 풀빌라에 감탄할 겨를도 없이 주하에게 붙잡혀버렸다.
그는 유주의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어깨에 둘러업고, 허니문 객실처럼 붉은 장미꽃잎이 나풀나풀 날려있는 침대 한가운데 그녀를 쓰러뜨렸다. 유주가 입을 열려는 순간, 주하는 그녀의 두 손을 침대에 찍어 누르며 기선을 제압하기 바빴다.
“안 돼. 하루 종일 참았어. 새벽에 공항에서부터 지금까지……”
성급한 두 손이 유주의 면 티셔츠를 목 위로 벗겨 내고 스커트의 지퍼를 더듬더듬 찾았다. 좀처럼 잘 벗겨지지 않자 아예 아기 옷을 벗기듯, 그녀의 몸을 제 어깨에 다시 뒤집어 걸쳐놓고 엉덩이 골 쪽에 촘촘히 박힌 스커트 단추를 거칠게 풀어냈다. 제발 찢지만 마, 아끼는 옷이야, 유주는 그의 단단한 어깨너머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애원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마침내 속옷까지 다 벗겨졌다. 주하는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유주의 알몸 위에 올라타서 제 옷도 훌훌 벗어 내렸다. 풀 빌라는 채광도 기가 막혔다. 아직 기세등등한 햇살이 풀과 마주 보는 통유리 창을 뚫고 들어와, 둘의 맨살 구석구석 다 비춰댔다.
가슴 위로 꿈틀대는 크고 작은 근육, 조각처럼 군살 없이 쭉 뻗은 복부에 핏줄이 도드라진 팔뚝과 허벅지, 그사이에 우뚝 솟구친 페니스 기둥에 유주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렇게 환한 대낮에 적나라하게 서로를 내보이며 속살을 들쑤시고 탐하니 새삼 수치심이 밀려왔다.
주하가 턱을 잡고 다시 저를 향해 똑바로 돌려놓았다. 유주가 흐린 눈을 뜨자 욕망에 붉게 젖은 시선이 심장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유주는 그 눈빛에서 그가 조금 전 케이블카에서 못한 것들을 성에 찰 때까지 하리란 걸 예감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 입 안, 목과 쇄골, 가슴에 감미로운 키스를 가해왔다. 혀가 유두를 신명나게 빨아대는 동안, 한쪽 팔이 침대 위 어딘가를 더듬거렸다. 주하가 가슴에서 입술을 떼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게 좋아? 딸기, 바닐라, 초콜릿……”
“어…?”
유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타이밍도 아닌데 무슨 소리지?
“빨리 정해줘. 흐읏…… 응……”
그가 우람하게 불뚝 선 페니스를 달래듯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미간을 좁혔다. 선홍빛 귀두에서 쿠퍼액이 뚝 떨어져 다리 사이의 시트를 적셨다. 그 음란한 모습에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당황스러웠다. 무슨 암호인가, 유주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더듬거렸다.
“따, 딸기.”
“좋아.”
주하가 아까 더듬던 베개 아래서 핑크빛 튜브를 꺼냈다. 미니 치약 용기처럼 생긴 튜브 뚜껑을 열고 끝을 살짝 누르자, 딸기 향을 가득 풍기는 뭔가가 그의 손바닥 가득 담겼다.
“그, 그게 뭐야?”
유주가 상체를 일으키고 그가 끈적끈적한 젤 같은 것을 성기에 펴 바르는 걸 바라보았다.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젤이나 기구는 싫어하는데 웬일인가 싶었다.
“혹시 러브 젤이야? 그런 거 인위적이라고 싫어하잖아……”
“아니, 이건 달라. 시럽 같은 거라서 완전히 식용이야.”
빳빳하게 선 음경 전체에 윤기가 돌았다. 원초적인 본래의 선홍색 위로, 펄을 바른 양 반짝임이 돋아서 더 음란하게 보였다. 주하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유주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손끝에서 새콤달콤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유주가 먼저 운을 뗐다.
“그래서 세 가지 맛 중에 고르라고 했구나.”
“처음은 힘들까 봐 일부러 준비해왔어.”
주하의 눈 속에 애처로움이 서렸다. 가라앉힐 수 없는 격렬한 흥분과 욕망,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애원의 눈빛이 기세등등하게 치솟은 페니스와 묘한 불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한 번만 해줘. 한 번만 해주면 안 될까.
유주는 그 처연한 시선을 외면할 수 없어 한 손을 뻗었다. 손바닥 안에 감겨오는 열기가 너무 뜨거워 데일 것 같았다. 당황스러워 손을 떼어내고 주하를 올려다보았다.
“이, 이거 발열 성분도 있어?”
“아니, 그런 거 없어. 시럽 같은 건데.”
“너무 뜨거워……”
그의 것은 그만큼 흥분해 있었다. 유주의 손바닥이 다시 음경을 감싸고 위아래로 천천히 쓸어 올렸다가 쓸어내렸다. 살덩이가 손 안에서 점점 더 커지는 느낌에 심장 맥박도 더 빨라져 갔다.
주하의 흥분된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처음은 역해서 힘들어할까 봐 일부러 이런 것까지 준비해왔다니 귀엽다고 해야 할지, 배려가 대단하다 해야 할지.
그래. 한 번은 해 주겠어. 못 해 줄 것도 없지.
유주는 대단한 결심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가 늘 제 음부가 꿀단지라도 되는 양 수없이 빨아대며 흥분시켰으니, 그녀도 어쩌다 한 번은 해 줄 수 있었다.
유주의 작은 혀끝이 귀두 끝을 살짝 핥았다. 전에 귀두의 갈라진 틈에 입술을 대 보았지만, 주하가 자지러지는 반응을 보여서 그만둔 적이 있다. 그녀의 혀가 부드럽게 날름거리자마자, 그는 전보다 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응…… 읏! 하윽!”
“괜찮아…?”
“음, 응, 어서… 해. 더… 더 깊이 물고……”
그가 이 악물고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금방이라도 사정해 버릴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다. 유주는 한 손은 밑동을 받치듯 아래로, 다른 손은 음경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는 언젠가 동영상에서 봤던 것처럼, 성기 귀두와 옆선을 혀로 할짝거리다가 빨아올리길 반복하다 끄트머리를 본격적으로 입 안에 넣었다.
달큰한 딸기 향에 가려져 있던 날 것의 냄새가 훅 풍겼다. 과일 향 때문인지 생각보다 역겹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젤 때문이 아니라도 강주하의 것이기에 거부감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유주는 음경을 입 안에 좀 더 깊이 밀어 넣고는 치아를 세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혀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빨면 빨수록 딸기향은 엷어지고 날 것의 냄새가 더 짙게 풍겼다.
주하는 쾌락에 젖은 신음을 연신 흘려댔다. 꽉 악문 잇새로 숨결이 쓸려대는 마찰음이 소리 없는 휘파람처럼 울렸다.
주하는 유주의 어깨를 짚은 양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다, 결국은 제 허벅지 옆 시트를 움켜쥐었다. 넘치는 쾌감으로 힘 조절이 안 돼서 유주를 아프게 할까 겁이 났다.
뜨겁고 미끌미끌한 입속 점막과 혀가 피를 거꾸로 솟게 했다. 유주의 귀여운 혓바닥이 제 움찔거리는 귀두와 포피를 지나 성기의 맨살을 감싸오는 황홀감에, 주하의 전신에 오싹한 경련이 일었다.
혀가 음경에 문질러 올 때마다 목 깊은 곳에서 으르렁거림이 절로 새어 나와 성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달콤한 환희에 금방이라도 싸 버릴 것 같았다.
“하…음. 유주야. 너무 좋…… 큭……”
그가 팔꿈치를 시트에 대고 상체를 거의 눕듯이 뒤로 젖혔다. 그러자 제 것을 절반쯤 품고 있는 유주의 얼굴이 좀 더 잘 보였다.
도톰한 입술에 제 분신을 물고 서툴지만 열심히 빨아보는 뺨이 딸기보다 더 붉은 홍조에 물들어 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음란하고 훨씬 더 예쁜 표정이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머지 또 한 번 밀려오는 사정감을 크윽, 이 악물고 가까스로 참아 냈다.
자꾸만 더 감질났다. 이보다 더 황홀할 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조금 더 확실한 소유와 열락을 원하는 열망이 솟아올랐다. 아예 침대에 똑바로 쓰러뜨려 눕힌 뒤, 입 안 가득 제 좆을 뿌리까지 깊이 박아 넣고 싶었다. 입 안이 질벽인 것처럼, 목구멍 안쪽까지 깊숙이 밀어 넣고 피스톤질을 하고 싶어 온몸이 욱신거렸다.
주하는 두 주먹이 부서져라 불끈 쥐고 그 충동을 참아냈다. 처음인데 너무 심하게 했다간 다시는 오럴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대신, 그는 유주의 머리 뒤에 손을 가져가 부드럽게 아래로 살짝 밀었다.
“조금만 더… 더 깊이 넣어줘. 그래, 음… 그렇게……”
유주가 입을 더 크게 벌리며 고개를 좀 더 숙였다. 너무 커서 끝까지 다 들어가진 못했지만 아까보다는 확실히 더 깊었다.
유주는 커다랗게 부푼 페니스를 입 안 가득 머금고 머리를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굵고 큰 탓에 조금 버거워 보였지만, 쉬지 않고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하는 입술 사이로 질척한 거품 같은 것이 일었다.
“흣……! 음, 유주…… 하. 으읏……”
어느 순간 유주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그의 경련도 더 커져 갔다. 뜨거운 점막과 혀에서 분출된 타액이 리듬감 있게 음경을 휘감고 쓸어 올리는 쾌감은 정말이지 고문이 따로 없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달콤한 고문에,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아니, 안 되지… 죽으면. 이제 시작인데……
쾌락에 못 이겨 저도 모르게 허리를 세게 튕겼다. 그 반동에 귀두가 목구멍 안쪽을 찔러 버렸는지, 유주가 괴로운 신음과 함께 성기를 뱉어냈다. 콜록, 콜록, 한동안 기침을 하던 그녀가 울기 직전의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물로 흐릿한 눈이 유리알처럼 맑고 예뻐서 그 위에 키스하고 싶었다.
“아, 유주야. 미안…… 그… 좀 더……”
좀 더 해주면 좋겠지만 이제 그만해도 돼, 말하려는 순간 유주가 목을 가다듬고 제 것을 다시 잡아 왔다. 미안하지만 좀 더 해달라는 애원으로 잘못 받아들인 것 같았다. 주하는 환희를 억누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유주가 조심조심 페니스를 다시 입속으로 조금씩, 천천히 밀어 넣었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깊숙이 밀어 넣고 주하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아까처럼 목구멍 찌르지 마, 경고하는 눈이 눈물로 그렁그렁했다.
주하는 연신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중얼대며 그녀의 입 안에 제 것을 온전히 맡겼다. 너무 좋아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작고 귀여운 혀가 말랑거리며 다시 살기둥 안쪽을 간질간질 핥았다. 아까처럼 고개를 규칙적으로 움직이자 주하는 다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이러다간 언제 멎어 죽을지도 모를 것 같았다.
뱉었다가 도로 빨아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세 한계가 밀려와서 더는 버텨 낼 수 없었다. 밀려오는 사정감을 꾹 참고 제대로 질 안을 좀 박다가 그 안에서 토해 내려 했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아, 유주… 안되…겠어…! 흐윽, 큭……!”
주하는 안간힘을 쓰고 자제하던 힘을 일시에 놓아버렸다. 움찔, 페니스가 한 번 요동을 치더니 왈칵 파정해 버렸다.
일시에 밀려드는 뜨거운 사정액에 유주가 깜짝 놀라 입에서 페니스를 빼냈다. 꾸역꾸역 흘러나온 탁한 정액이 그녀의 입술과 턱, 목선을 타고 가슴까지 흘러내렸다.
입 안 가득 삼켜 버리기도 했는지, 유주는 한동안 시트에 머리를 박고 콜록, 콜록, 기침을 해댔다. 장미꽃잎이 점점이 뿌려져 있던 순백색 시트는 체액으로 여기저기 얼룩을 그렸다.
“괜찮아? 미안, 입 안에 해 버렸어……”
주하가 그녀의 등을 두드리고 쓸어주며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여기 온 기념으로 오늘은 네가 먼저 가게 해주려고 했는데……”
“하아. 물… 좀……”
주하는 그녀를 침대 위에 똑바로 눕혀 주고 재빨리 일어나 생수를 찾아가지고 왔다. 체액으로 더럽혀진 시트를 한옆으로 밀어 두고 둘은 나란히 누워서 숨을 골랐다. 주하는 옆으로 몸을 틀어 유주의 허리에 한 팔을 두르고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꿈같은 평온함을 만끽하고 있다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중에 겨울에는 휴가를 좀 더 길게 내서 탄자니아나 두바이, 몰디브에도 가자. 근사한 수중호텔이 있는 곳들이야.”
“수중호텔? 아아, TV에서 본 적 있어. 언더워터 객실……”
“여기 센토사에도 있는데 다 차버려서 못했어, 젠장. 너 바다 좋아한다 그래서 일부러 그런 데서 묵으려고 했는데.”
“그런 데는 허니문으로 가야지.”
느낌 탓일까, 갑자기 주하의 몸이 굳어진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서늘함에 유주가 그를 돌아보았다. 일반적으로 허니문에나 가는 곳이라는 뜻이었는데 혹시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걸까?
주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이 유주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제 체액으로 젖어 있는 비부를 야릇하게 쓸었다.
“이제 네 차례야. 나한테 해준 것처럼… 너부터 먼저 가게 해줄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이 소음순 위의 음핵을 끄집어내듯 살짝 잡아당기며 자극해 댔다. 유주가 허리를 휘면서 본능적으로 그의 손길을 피하려 하자, 손가락이 짓궂게 클리토리스를 꼬집듯 더 세게 잡아당겼다. 그 아찔한 감각에, 유주는 방금 전의 기묘한 느낌을 잊고 그의 팔 언저리만 매달리듯 붙잡았다.
“앗. 음… 으흑! 하… 그만…… 흣!”
음부가 잔뜩 흥분해서 애액을 머금을 때쯤에야, 주하는 애태우듯 애무하던 음핵에서 손을 떼고 비부 안으로 검지와 중지를 쑥 밀어 넣었다. 기다렸다는 듯 속살이 손가락을 냉큼 물고 꽉 조여 왔다. 두 손가락은 애액이 좀 더 촉촉하게 솟아나 내벽을 흠뻑 적실 때까지 위아래로 천천히, 빠르게 속도를 조절하며 찔러댔다.
“으……읏, 하… 하아……”
현란한 손가락의 움직임에 유주가 몸을 뒤틀었다. 초소형 페니스가 내벽을 찔러 올리는 감각에 숨이 가빠왔다. 점점 더 크게 벌어지는 입술 아래로 침이 주룩 흘렀다. 주하는 유주의 타액이 빗방울처럼 한 방울, 두 방울, 시트로 떨어지는 걸 보고 아까운 듯 침이 흘러내린 입술을 세차게 빨았다.
“흐읍! 읍… 아흣……”
두 손가락이 격렬한 피스톤질을 멈추고 질벽 깊은 곳, 어딘가를 더듬거렸다. 주하는 손바닥이 위로 향한 방향을 유지한 채, 속살에 파묻힌 검지와 중지 끝을 좀 더 세우고 배꼽 쪽으로 살짝 휘었다. 유주가 아악,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세게 튕겼다. 자궁으로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오목한 곳에서 살구씨 크기의 돌기가 만져졌다.
“찾았어, G스팟. 흣……”
주하가 흡족한 웃음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좀 더 휘었다. 간질간질, 간지럼을 태우듯 손끝을 뭉근하게 만지작거리자 유주가 쥐어짜듯 교성을 흘렸다.
“아, 아아, 응, 흐윽, 응, 그, 그만. 나, 화장실……”
“괜찮으니까 참지 마.”
“바, 바보…! 그게 아니라… 갑자기 화장실이……”
“소… 작은 일이 급해졌어?”
주하가 에둘러 묻자 유주는 응응, 울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갑자기?”
“그, 그렇다니까…… 빠, 빨리…”
유주가 상체를 일으키려 애쓰자, 주하가 다시 쓰러뜨려 눕히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달랬다.
“괜찮아, 그게 자연스러운 거야. 작은 일 아니고 다른 현상이니까 괜찮아.”
주하가 돌기를 손가락으로 세게 긁고 비벼대며 자극을 더 가해보았다. 유주가 거의 사람 살려, 울부짖기 직전까지 가면서 몸을 비틀고 허리를 튕기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하는 괜찮아, 연신 속삭이며 손가락을 몇 배나 더 빠르게 피스톤질 해댔다.
유주가 아악, 소리 높여 외치며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끊어질 듯한 신음과 몸부림 끝에 뭔가가 팍 터졌다. 애액은 아닌데 애액 같은 투명한 물줄기가 질 안에서 파밧, 솟아올라 주하의 얼굴과 목, 가슴팍까지 튀었다.
“아흣! 읏… 으…… 음, 하아……”
유주의 신음이 잦아들며 격렬한 경련 같은 몸짓이 진정되는 순간,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참지 못하고 작은 일을 봐 버린 거라 착각한 것 같았다. 그녀는 수치심에 엉엉 울면서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유주야, 너 싼 거 아니야! 싸긴 쌌는데 그거 아니라고… 괜찮아, 착하지?”
주하가 여전히 그녀의 체액에 젖은 얼굴로 유주를 꼭 끌어안고 달래려고 애썼다. 웃음을 억누른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나와 버릴 때 기분이 어땠어? 굉장히 좋았지? 절정처럼. 실수한 게 아니라 사정한 거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그렇게 나오게 이끈 거야.”
“사정…? 그건 남자만 하는 거 아니었어…?”
“여자도 해. 스퀄팅이라고…… 하기 쉽진 않지만.”
유주는 눈물 젖은 얼굴을 들고 그를 보았다. 기껏해야 동영상만 몇 개 봤지, 성적인 면에서 초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도 동정만 아닐 뿐 거의 경험이 없지 않았던가? 수치심이 조금씩 밀려가고 의혹이 대신 그 자리를 스멀스멀 채우기 시작했다.
“넌… 너도 경험 별로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네가 처음이야, 이런 거 해보는 거. 아까 그 젤 성인용품점에서 특별히 제작 주문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봤어. 단둘이 처음 여행 오는 거니까 기념으로 이런저런 것들 해보고 싶어서.”
주하가 머쓱한 듯 말하자 유주는 의혹을 거뒀지만 여전히 웃음기는 없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창피한 듯 다리 사이를 오므렸다.
“죽고 싶었어, 정말… 실수한 줄 알았단 말이야……”
“아, 유주야……”
주하가 못 참겠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녀를 꼭 안았다.
“너 이런 모습 처음이야. 얼마나 귀여운지 알아? 맨날 부루퉁하니, 새침 도도한 서유주가 이렇게 아기처럼 앙앙 울고……”
“내가 무슨… 부루퉁한 적 없어. 새침 도도한 적도 없고.”
뭐라도 비빌 게 있어야 도도할 것 아닌가. 따지고 보면 그에게 물심양면으로 다 받고만 있는데. 물질적인 것이야 처음부터 그녀가 완전히 기우는 상태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마음도 그랬다. 주하는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그녀에게 아낌없이 쏟아주고 있었다.
유주는 타월을 그녀의 몸 여기저기 튄 체액을 꼼꼼히 닦아주는 주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삼, 고맙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호화로운 해외의 리조트 때문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까지 돌아가시고 그녀는 추석 때 늘 혼자였다. 심지어 설 연휴마다 정혜 언니네 가족과 있을 때마저도, 이방인이란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깊은 외로움은 늘 그녀 곁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 연휴는 달랐다. 주하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유주는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뭐야, 새삼스럽게 왜 부끄러워해?”
“다음부턴 이런 거 하지 마……”
본심과는 전혀 엉뚱한 말이 부루퉁하니 나와 버렸다. 역시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다. 평소의 그녀는 애교라곤 하나 없이 무뚝뚝하고 새침한 편인지도 몰랐다.
“왜? 좋았잖아.”
주하가 타월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음흉한 얼굴로 그녀에게 바짝 몸을 기울여 왔다.
“좋았으면서. 증명해볼까?”
“아, 하지 마…! 저리 가! 읏……”
주하가 단번에 그녀를 쓰러뜨리고 입맛을 다시며 몸을 겹쳐왔다. 둘은 결국 한밤중이 될 때까지 침대 밖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렌트카를 타고 아쿠아리움 쪽을 둘러보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킹크랩을 먹기로 한 저녁 일정은 죄다 다음날로 미뤄지고 말았다.
* * *
꿈같은 사흘이 화살처럼 지나가고 싱가포르에서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사흘간의 일정은 처음 계획과 사뭇 다르게 흘러갔다.
연휴를 맞은 한국인들은 물론, 중국 본토와 홍콩, 인접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와 북미, 유럽 관광객들로 웬만한 핫스팟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 방문을 예정했던 관광지들 중 절반은 그냥 포기하고 리조트에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유주도 딱히 이의가 없었다.
흔히들 여행 와서 연인들이 많이 다툰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둘은 의외로 호흡이 잘 맞았다. 유주는 여기서 마지막으로 입게 될 비키니를 걸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돌아보니 잘 맞는다기보다, 주하 쪽에서 거의 다 그녀에게 맞춰 줬던 게 정확하다.
전에도 싱가포르를 몇 번 방문해 본 적이 있는 그는 나무랄 데 없는 가이드이자 보호자였다. 한 가지 제 뜻대로 하는 유일한 것, 밤일은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변함없이 이어졌지만. 심지어 여기서도 깨어있던 시간 중 절반은 그것에만 오롯이 쏟아부은 느낌마저 들었다.
“빨리 들어와, 뭐해?”
주하는 벌써 물속에 들어가 그녀를 소리쳐 부르고는 시원하게 물살을 갈랐다. 유주도 비키니 차림으로 거실과 바로 이어지는 프라이빗 풀 안으로 들어섰다. 늦은 오후의 하늘은 그날도 어김없이 파랗고 맑았다.
물속에 들어오기 무섭게, 주하가 널찍한 풀 저만치서 단박에 헤엄쳐 와 그녀를 꼭 안았다. 물속이라 뿌리치기도 쉽지 않고 달아나기도 여의치 않았다. 그는 얄밉게도 수영까지 잘했다. 주하가 활기차게 웃으며 그녀를 풀 한가운데로 잡아당겼다.
“앗, 나 깊은 데로 끌어들이지 마. 맥주병인 거 알잖아…!”
“하여간 겁보라니까.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넌 바다나 강, 호수 다 좋아하면서 왜 물은 무서워해?”
“몰라. 무서운 걸 어떡해……”
“나중에 같이 스쿠버다이빙이나 해양 액티비티도 실컷 하고 싶은데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지금부터 빨리 익숙해져.”
갑자기 사흘 전, 그가 수중호텔에 가자고 했을 때 느꼈던 위화감이 떠올랐다. 몰디브나 두바이의 수중호텔 같은 곳은 허니문 장소로나 적합하다는 의미로 그녀가 허니문을 언급했을 때, 강주하는 잠깐이지만 분명히 동요했었다.
“왜 그래?”
갑자기 그가 뺨에 입을 맞춰오는 바람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물이 너무 차가워? 너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아, 아냐. 괜찮아. 딱 좋아……”
얘기해볼까, 수 초간 망설였지만 결국 입을 떼지 못했다. 물장구도 치고 수영하다 잠시 썬베드에 누워 차가운 칵테일을 마시기도 하다가, 유주는 다시 물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주하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혹시 잠수라도 탄 건가 주위를 다시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물속에서 누군가 팔을 잡았다. 깜짝 놀랐지만 주하인 게 뻔해서 비명이 나오진 않았다. 그의 머리가 불쑥 솟아올라 유주의 입술에 제 것을 겹쳤다.
“읏…! 깜짝 놀랐잖아……”
쪽, 주하가 짧은 버드키스 끝에 유주에게 속삭였다.
“숨 깊이 들이마시고 바로 숨 멈춰봐.”
“왜? 또 무슨 이상한 걸 하려고……”
“너 수중 공포증 없애주려는 거야. 날 믿고 숨 들이마셔 봐. 바로 멈추고.”
유주가 시키는 대로 하자, 주하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수면 아래로 끌어당겼다. 물 때문에 서늘해진 그의 입술이 그녀의 것 위에 닿았다. 유주는 본능적으로 숨을 힘껏 내뿜었다. 주하의 입술이 물보라와 함께 잠깐 멀어졌다가 다시 와 닿았다.
그는 혀를 깊이 밀어 넣진 않고, 유주의 아랫입술을 제 혀로 부드럽게 핥고 빨기만 했다. 연이어 빨다가 그녀가 숨이 가쁘기 직전,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유주는 하아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눈빛이 반짝반짝, 얼굴에 홍조가 돌고 있었다. 주하가 그녀의 젖은 앞머리를 넘겨주며 엷게 웃었다.
“물속에서 하니까 느낌이 묘하지?”
“숨 차……”
주하는 좀 더 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제멋대로 해석하고 몇 번 더 수중키스를 감행했다. 급기야 물속에서 비키니 팬티까지 벗겨버린 뒤 유주의 두 다리를 제 허리에 감고 삽입까지 감행해 버렸다.
“아, 물속에서 이러면…… 아! 아흑! 안, 안 돼! 이러면…!”
“이미 하고 있는데… 안 된다면… 어쩌라는 거야. 흣!”
그가 허리를 위로 쳐올릴 때마다 물이 음란하게 철썩거렸다. 유주는 두 팔을 그의 목에 두르고 그가 찔러대는 대로, 위아래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둘은 젖은 몸 그대로 풀에서 나와 거실 매트에 쓰러져 거사를 이어갔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싱가포르 도심의 스카이라운지 바에서 야경을 보며 슬링을 홀짝이는 대신, 휘영청 밝은 달을 올려다보며 몇 번이고 서로의 온기와 체액을 나눴다.
그의 것이 내벽을 찔러 올리고 절정의 흔적을 왈칵 토해내는 순간, 이국의 달이 유주의 눈물 자욱한 눈가에 스며들듯 다가왔다. 열대야의 밤이 깊어갈수록, 그녀는 이 여행이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될 것임을 알았다.
잊고 싶은 과거의 한 자락, 미래로 이어지는 추억의 연장선. 어느 쪽이든.
* * *
꿈같은 밀월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유주는 급여일을 하루 남겨두고 이태원의 고 사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주하의 단골 레스토랑에서 막 저녁 식사를 끝내고 출구 쪽 테라스에서 그가 계산을 마치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사장님, 잘 지내고 계시죠? 저 내일 퇴근길에 들릴게요. 언스위트 녹차 다쿠아즈 한 팩, 바질 스콘과 크로크무슈, 바게트 토스트, 레몬 메렝게랑 얼그레이 크림 파이 한 조각씩 부탁드려요.
-그래, 유주야. 벌써 월말이네? 그런데 파이 말고 다른 것들도 있네? 일단 내일 저녁때 와.
테라스에 기대서서 문 쪽을 보는데, 주하가 카운터에 서서 직원과 얘기하는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잘 아는 매니저가 비번이었다.
“저,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정지된 카드로 확인이 됩니다만……”
강주하가 그럴 리 없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히고 직원이 건네주는 카드를 받아들었다.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창에서 먼 쪽에 서 있어서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강주하가 무덤덤한 얼굴로 다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수초 뒤 직원이 다시 그를 보았다.
“고객님, 이 카드도 잔액 부족으로 확인됩니다.”
젊은 남자직원은 카드에 줄줄이 문제가 있는 게 제 탓도 아니건만, 지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카드를 다시 돌려주었다. 강주하의 얼굴에는 예의 대외적인 냉랭함과 초연함이 가면처럼 변함없이 서려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빳빳한 수표를 꺼내고는 뒷면에 서명하고 직원에게 내밀었다. 이번에는 아무 문제없이 계산이 완료되었다. 직원이 정문까지 따라 나와 정중하게 배웅까지 해주었다. 정문에서 나와 유주를 보는 순간, 강주하의 냉담하던 얼굴이 풀어지며 익숙한 웃음이 떠올랐다.
“오래 기다렸지? 가자.”
“어, 응……”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유주의 한 손을 잡고 주차된 차 쪽으로 걸었다. 유주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흘깃 보았다. 아는 척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쉽게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저기, 주하야.”
주하가 시동을 걸기 전에 유주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정말로 그냥 지나가듯 물어보는 것처럼 운을 뗐다. 그리고는 빙빙 돌고 돌아 가장 무난할 듯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갑자기생각났는데…… 청담동 아파트, 네 명의니까 이번에 공시지가 조정으로 재산세 엄청 많이 나왔겠다. 특히 강남 쪽이 엄청 상향세니까. 그렇지?”
“네가 그런 말도 하고 웬일이야? 부동산의 부, 자도 모르는 부린이가.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그가 유쾌하게 웃었다.
“뭐? 그럼 내가 서당개라는 거야? 아무리 말단 인턴이라도 명색이 부동산 에셋이 근간인 회사인데, 그 정도는 요즘 중고등학생들도 알아.”
“언제는 결국 투기꾼 아니냐 뭐라 하더니, 내 세금폭탄 걱정도 해주는 거야?”
“있지, 갑자기 급전이 필요할 때 있잖아. 임대업 하는 자산가들도 갑자기 몇백만 원 급하게 현금 필요해서 빌리고 그러는 것처럼.”
“응. 그런데?”
강주하가 차를 출발시키며 의아한 듯 그녀를 보았다.
“혹시 누가 너한테 돈 빌려 달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빌려주지 마. 금전거래는 가족 간에도 안 하는 게 좋아. 물론 나도 멋모르고 아버지에게 융통 좀 받았다가 지금까지 시달리지만. 아무튼, 누구야? 같이 살았던 언니들? 회사 동기?”
“어? 아니, 아니라니까. 다들 나보다 형편이 좋은데 누가 나한테 돈을 빌려 달라고 하겠어. 그게 아니라……”
유주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자꾸 뜸을 들이자 주하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외쳤다.
“아, 혹시 네가 필요해?”
“뭐?”
“돈 필요한 일 생긴 거야? 진작 말하지 그랬어, 빙빙 돌리지 말고.”
“아니야! 무슨 돈이 필요해. 얼마 안 되지만 전세 보증금으로 쓰려던 돈도 통장에 그대로 있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한강 다리를 넘어서자 익숙한 사거리로 금세 들어섰다. 그쯤에서 그러려니 넘어가면 좋을 텐데 강주하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너 싱거운 소리 하는 타입 아니잖아. 계속 말 안 해주면 그냥 우리 집으로 가 버린다?”
“정말 끈질기네. 너 얘기한 거였어, 너. 혹시 급하게 현금 필요하면……”
“뭐라고? 그러니까… 혹시 급전 필요하면 빌려줄 테니까 말하라는 거였어? 나보고?”
“……그래.”
차는 어느덧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는 동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유주를 돌아보았다. 은은한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이 뚜렷이 보였다.
“서유주, 나 감동했어. 젠장……”
그가 유주를 확 끌어당겨 입을 맞춰왔다. 위험 신호를 감지한 그녀가 몸을 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주하가 반강제로 그녀의 상체를 휘감고 혀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혀와 혀가 일으키는 마찰이 너무 강해 순간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았다.
“으읏, 흡…!”
한참 만에야 그가 세차게 빨아대던 유주의 혀를 놓아주었다. 숨이 가쁜 가운데서도 입술과 뺨, 눈꺼풀까지 입술로 누르며 강주하는 말을 이었다.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어?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격이긴 해도……”
“그래, 쥐는 이만 사라질게. 운전 조심하고.”
“나, 오늘 밤만 자고 가면 안 될까?”
주하의 손이 차에서 내리려는 유주의 손목을 확 잡아끌고 매달려댔다.
“안 돼. 우리 룰 잊지 않았잖아. 오늘 목요일이야. 내일 밤까지 기다려.”
“하…… 추석 때는 진짜 좋았는데. 나흘 내내 하루에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는데……”
“빨리 가. 운전 조심하고.”
유주는 절망에 휩싸여 제 머리를 쥐어 뜯는 강주하를 버려두고 차에서 내렸다. 차창이 내려가며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유주는 돌아보았다.
“유주야, 여기 이거 놓고 갔어! 빨리 와 봐!”
“뭐? 놓고 온 거 없는데……”
“빨리 가져가라니까, 손 내밀어.”
그녀가 이상하단 얼굴로 차창으로 다가가 한 손을 내미는 순간, 강주하가 덫처럼 그 손을 확 잡아끌었다. 그리고 입술이 다시 부딪쳐왔다. 기습 키스에 유주가 흐읍, 소리 내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손목이 잡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혀를 빨고 입술을 살짝 물어뜯은 다음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잘 자, 내 꿈꾸고……”
유주는 그를 노려보며 혹시 또 붙잡힐까 빨리 뒤돌아섰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에도 쿵, 쿵, 심장이 널뛰는 소리가 멈춰지질 않았다. 엘리베이터 벽의 거울을 보니 얼굴이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다음날, 금요일이라는 사실만으로 다들 점심시간부터 흥에 들떠 있을 때 주하로부터 톡이 날아왔다.
-먼저 우리 집에 가 있어. 마무리할 게 있어서 조금 늦을 거야. 8시까진 갈게.
-잘됐다. 나 깜빡하고 말 못 했는데 오늘 약속 있어.
-약속? 누구랑? 저녁 약속 있다는 말 안 했잖아.
-전에 일했던 이태원 가게 사장님. 약속이라기보다 가게 들리면 항상 뭘 만들어주셔서 저녁 해결이 될 것 같아.
-알았어. 8시까지는 꼭 와.
* * *
가게는 금요일 밤이라 북적북적 손님들이 많았다. 타로 점 테이블은 역시 텅 비어 있었지만 커피와 베이커리 쪽은 나날이 활황인 듯했다. 유주는 직원 휴게실에서 고 사장이 만들어준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맛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다음 주부터 선보일 브런치예요? 괜찮은데요? 반응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그나저나 유주, 너 혹시 연애하니? 요즘 얼굴이 엄청 폈어! 원래도 뭐 미모가 출중하긴 하지만 반짝반짝 물오른 느낌?”
“네…?”
“맞구나? 넌 워낙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 네? 하고 되물으면 영락없이 긍정이고. 누구야? 응? 빨리 말해봐.”
“실은 대학 동창인데 회사에서는 상사예요. 저야 인턴이라 언제까지 다니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머머, 세상에! 너처럼 조심성 많고 보수적인 숙맥이 스릴 넘치는 그 비밀 사내연애를 한단 말이야?”
유주는 강주하와 어떻게 재회하게 됐는지 최소한의 얘기만 들려주었다. 고 사장은 다른 것보다, 강주하가 웬만한 배우와 모델들 뺨치는 외모와 피지컬의 소유자임에 잔뜩 흥분한 것 같았다.
“사실은 사장님에게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요. 언니들에게 말하면 부정적인 쪽으로 먼저 볼 것 같아서……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요. 아, 타로 점은 안 볼 거예요.”
“왜왜? 무슨 문제 있어? 어떤 남잔데?”
고 사장은 부담스러울 만치 호기심을 불태우며 테이블 너머 한껏 귀를 기울여왔다. 그녀는 그의 명의로 된 청담동 아파트만 빼고, 그의 평소 소비 성향과 스케일, 호화로운 펜트하우스 아파트와 비밀스러운 재정 상태에 대해 간략하게 털어놓았다.
“시작점부터 저랑 완전히 다른 세계인 건 알았지만 달라도 너무 달라요. 그 정도 스케일로 돈 쓰는 사람은 현실에서 본 적이 없어서… 언젠가 농담하듯 말한 적도 있어요. 돈을 못 모으고 헤프게 써버리는 병이 있다고.”
“아니, 딱 들어도 임대수익 다달이 최소 몇천 되는 건물주인데 문제 될 거 뭐 있어? 써도 써도 알아서 잔고가 계속 채워지니까 그렇겠지! 솔직히 도박만 안하면 상관없잖아. 성격은 보나마나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주도적이겠지만.”
“그런 쪽은 전혀 관심 없어요. 제가 알기로는. 담배도 어쩌다 한 번, 본인 말로는 못 견디게 답답하거나 속 터질 때만 한 대씩 피우고 술도 주량은 꽤 세다는데, 저랑 있을 때는 와인만 가끔 해요. 약도 안 하는 것 같고 운동은 워낙 좋아해서 이것저것 가리고 열심이고…… 뭐가 됐든 자기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중독되는 건 질색이래요.”
“그럼 막장 요소들도 없고 너한테 잘해주는 게 제일 중요한데.”
“잘해줘요, 정말로. 분에 넘칠 만큼. 그런데……”
유주는 잠깐 망설이다가 바로 어제 레스토랑에서 목격한 상황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정확히는 몰라도, 극소수 회원에게만 발급되는 미국 골드카드와 VVIP 고객들에게만 지급되는 프리미엄 플래티넘 뭐라는 카드들만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 계속 결제가 안 되어 결국 현금을 꺼내 들더란 말을 듣는 동안 고 사장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어머, 세상에…… 내가 소싯적에 만났던 그놈 생각난다. 거의 사기 수준의 허세남이었는데 단지 사람들 환심을 사고 숭앙받기 위해서 빚내서 수천만 원씩 쓰면서 재벌 사생아 행세한 미친놈이 있었어. 아, 네 남친이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야, 아닌데…… 흠.”
“한 달 전쯤… 정식으로 사귀기 전에 누가 돈 빨리 갚으라고 빚 독촉하는 전화 통화하는 거 우연히 들은 적도 있어요. 아무리 봐도 사채업자 같았어요.”
“유주야, 너 내가 남자로서 말하는데…… 그러니까 일단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잖아! 그리고 국적 불문, 인종 불문 겪어봐서 남자에 대해 너보다는 훨씬 더 많이 아는데…… 여자도 그렇지만 남자는 더더군다나 말이지, 얼굴 뜯어 먹고살 거 아니거든? 좆 뜯어 먹고살 건 더더욱 아니고.”
평소보다 더 거친 고 사장의 표현에 유주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잘생겨서…… 그, 그런 이유 때문만으로 사귀는 건 아니에요. 물론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 자체는 없는 거지만.”
“그렇긴 하지. 하지만 너한테 해될 거 없이 거리 두고 적당히 만나, 라고 말해도 넌 안 듣겠지? 휴…… 너 그렇게 약지도 못하니까. 차라리 안 사귀면 안 사귀지.”
“그건 사귀는 게 아니라. 그냥 저 좋을 때까지 즐기고 이용하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너 그 친구 진짜 좋아하는구나? 재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7년 전에 그 친구가 사귀자고 했을 때부터 감정 있었던 거 아냐? 네 첫사랑 김현서랑 별개로.”
“네? 갑자기 현서 선배 얘기가 왜…… 그냥 어릴 적 다들 동경할 때 저도 같이 그런 것뿐이에요.”
”아참, 갑자기 딴 얘긴데 김현서 요즘 우리 집 단골 됐다? 너 알바 할 때부터 네 동창들이 많이 오긴 하지만.”
“아, 그래요? 어쨌든 그때는…… 그런 감정 없었어요. 사귀자고 하고 바로 외할아버지 부고로 미국 가서 다시는 안 왔고. 어쨌든 정말 괜찮은 건가 걱정이 돼서요.”
간밤에 자리에 누웠을 땐 혹시 이 집에 빨간 딱지가 붙는 게 아닌가 불미스러운 상상도 했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사기를 당하셔서 차압 딱지가 침대와 책상, 아끼던 피아노까지 다 붙었던 아픈 기억도 되살아나 잠깐 눈물이 나기도 했었다.
“넌 역시 너무 착해서 탈이야. 못된 년들 같으면 망하든지 파산 나든지, 최악의 상황 전까지 앞으로도 최대한 빼먹을 거 계산기나 두드려 볼 텐데. 하긴 진짜 좋아하니 그럴 수가 없겠지만.”
고 사장은 팔짱 끼고 입술을 뾰족하게 치켜세웠다가 가장자리를 내려뜨리길 반복했다.
“카드 건은 그냥 솔직히 말해보는 게 어때? 알고 보니 진짜 문제가 없었는데 너 혼자 신경 쓰고 있을 수도 있잖아.”
“아무래도 그게 낫겠죠? 앗, 시간이 벌써 이렇게?”
유주가 무심결에 손목을 내려다보다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강주하가 8시까지는 오라고 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다 보니 벌써 아홉 시가 다 되어 있었다. 가방 속에 넣어둔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 와 있었다. 도대체 어디냐, 똑같은 내용의 문자는 그보다 더 많았다.
“사장님, 저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연락이 엄청 많이 와 있었는데 음악 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요.”
“그 남친이 기다리는 거야? 어휴, 빨리 가봐! 나도 궁금하니까 어떻게 됐는지 꼭 알려주고. 아, 가만있어봐. 카운터에 파이 포장해놓은 거 줄게.”
휴게실을 나와 홀을 지나는데 누군가 아는 척을 해왔다. 유주는 초조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성질 급한 강주하가 또 얼마나 들들 볶을지 가뜩이나 마음이 급한데 누군가 싶었다.
“혹시 서유주…… 아니니? Y대학 12학번?”
“앗, 선배님!”
낯익은 얼굴이 온화한 미소를 띠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유주가 졸업반 때 동경했던 그 김현서였다. 단정한 용모에 젠틀한 인성으로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라 누구도 감히 넘보지를 못했던 사람이다. 아까 고 사장이 그가 단골이라 하더니 이렇게 딱 마주칠 줄이야.
“진짜 오랜만이다. 전에 혜리랑 우연히 마주쳤는데, 좋은 회사 들어갔다고 안부 전해 들었어.”
“아, 그렇긴 한데 아직은 인턴이라서요. 선배님은 케이블 방송사에서 자리 잘 잡으셨다고 들었어요.”
“응. 아무래도 요즘은 우리 쪽도 금융업이나 언론 쪽이 강세니까. 아직 자리가 완전히 잡힌 건 아니라 구박받으면서 배우고 있어, 하하.”
“소정 선배랑 내년 봄에 결혼 계획 중이시란 것도 들었고… 축하드려요.”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김현서의 등짝을 살짝 내리쳤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그의 캠퍼스 커플 상대인 최소정이다. 여전히 미인에다 시원시원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뭐야, 뭐야? 오빠는 후배를 봤으면 나도 불러서 인사시켜줘야지, 왜 둘이서만 알콩달콩이야? 유주, 오랜만이다!”
“앗, 선배님! 진짜 오랜만이시네요.”
“그래, 반갑다! 우리 서서 이러지 말고 같이 얘기 좀 하자. 우리도 5월에 여기 이사 온 뒤로 이 집 단골인데 너 예전에 여기서 알바도 했었잖아.”
“아, 저도 그러고 싶은데 죄송해요. 지금 약속에 늦어서……”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해 버렸다. 이런저런 수다를 늘어놓다 강주하가 기다릴 것 같아서 시계를 보는데 최소정이 명함카드를 하나 꺼내 건넸다.
“난 요즘 박사과정 공부하면서 도서관 행정직으로 일하고 있어. 너 그 회사에서 정규직 꼭 될 거라 믿지만 혹시 모르니까. 너는 책을 워낙 좋아해서 도서관 사서 쪽 희망했는데 요즘 관공서 입성이 워낙 치열하니…… 티오 나면 연락할게.”
“아, 감사합니다.”
“아, 맞다! 현서오빠, 오빠 방송국 주최로 내년 3월부터 5월까지 제주도 북 페어 행사하는 거 인력 모으고 있잖아. 1월 말부터 준비 들어가는 거. 그거 나도 하니까 너도 혹시 상황이 가능해지면 합류해. 계약직이지만 잘하면 9월에 공채 때 훨씬 유리할 수 있잖아!”
“야, 유주야 당연히 BK 정규직 되겠지. 나야 우리 쪽 인력으로 와주면 너무 좋지만... 앗! 유주야. 괜찮니?”
누군가랑 어깨를 부딪치는 순간, 갑자기 차가운 물보라가 뒤로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확 적셔왔다. 급히 지나치던 아르바이트생이 얼음물을 유주의 등 쪽으로 쏟아버린 것이다. 품에 파이 상자를 안고 카운터에서 계속 지켜보던 고 사장의 호들갑스러운 외침, 깜짝 놀라 연신 사과하는 학생으로 잠시 소동이 일었다.
“물이라서 괜찮아요. 화장실에서 머리만 잠깐 닦으면 돼요.”
“그래, 내가 타월 줄 테니까 2층 직원용 화장실에서 닦아, 감기 들겠다! 아유, 넌 내가 그러니까 욕심내서 한꺼번에 나르지 말라고 했잖아!”
선배 커플과의 만남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유주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길게 늘어진 머리칼의 물기를 닦아 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가방 속 벨과 문자음은 3분 간격으로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유주는 초조한 마음에 잠시 타월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아까 선배들과 마주치기 직전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부재 통화만 스무 통이 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병 아닌가? 그냥 얘기가 좀 길어지려니 생각하면 될 텐데.
유주가 통화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강주하가 벌컥 외쳤다.
“너 지금 어디야? 아홉 시가 넘도록 도대체 전화도 안 받고 어디서 뭐 하고 있냐고!”
“알바 했던 가게인데 시간 가는 줄 몰랐어, 지금 갈……”
“유주야!”
화장실 노크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유주야, 다 닦았어? 타월 하나 더 줄까? 시간 괜찮으면 온수 나오니까 아예 씻고 가도 돼!”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입을 쩍 벌리고 기함하고 있었다. 유주는 일단 고 사장을 문 앞에서 멀리 떨어뜨려야 한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품에 꼭 누르고 황급히 외쳤다.
“아, 아뇨!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금방 나갈게요!”
“어, 그래. 알았어.”
다시 휴대폰을 귓가에 대는 유주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주하야, 방금 그건……”
“누구야, 지금 그 새끼…?”
그녀가 무척 좋아하는 강주하 특유의 저음이 평소보다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처음에 윽박지르던 어조와는 확연히 달랐다.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은, 회사에서의 음색이다.
“그 새끼 누구냐고. 안 들려?”
“사장님이야. 오해할 상황 그런 거 아니니까 끊어. 지금 갈……”
“사장이 남자였어?”
그의 음성이 더 낮아졌다. 유주는 그의 도화선을 건드린 게 뭔지 알았지만 남의 사생활이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이라고 솔직히 말할까 망설이는 사이, 강주하가 다시 중얼거렸다.
“사장이 남자 새끼였어…?”
“주하야, 그게……”
“어딜 닦았는데?”
차분하게 가라앉은 물음이 계속 이어졌다. 유주는 변명하듯 대답하는 제 목소리가 싫었지만 한 번 눌린 기는 펴지질 않았다.
“머리카락. 아르바이트생이 컵 치우다가 실수로 내 등에 조금 쏟았어.”
“그럼 머리를 한 시간 넘게 계속 닦고 있느라 계속 전화도 안 받고 거기 있는 거니?”
말끝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좋지 못한 사인이었다. 어쩌다 한 번 연락이 빨리 안 될 때, 나중에 얼굴 보고 만나서 왜 연락 두절이었는지 집요하게 추궁할 때 목소리가 이런 톤으로 넘어갈 때가 있었다. 그럴 때의 얼굴은 강력계 형사 취조관처럼 험상궂기 짝이 없었다.
“얘기하다 보니까 길어졌어. 전에도 잠깐 말한 적 있지만, 나한테 참 잘 해주셨고 맘이 잘 통하는 재미있는 분이셔서 얘기하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그럴 수 있잖아. 별일도 아닌데 예민하게 굴지 마.”
“계속 연락이 안돼서 걱정했어. 요즘 세상이 흉흉해서.”
“미안해. 지금 갈게.”
“상호명이 뭐야. 가게 이름은 들은 적 없는데.”
“타로 앤 타르트. 그런데 이름은 왜……”
“용산역 N호텔 쪽에 있으니까 지금 갈게. 기다려.”
전화가 뚝 끊겼다. N호텔이라면 아무리 차가 막혀도 10분 안에 도착할 거리다. 설마 그녀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용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찾고 있었던 건가. 유주는 고 사장이 걱정할까 봐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참, 사이드 창으로 아까 마주쳤던 김현서와 최소정 선배의 뒷모습이 보였다. 둘은 팔짱 끼고 딱 붙어 서서 길 건너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커플의 모습이라 무척 보기 좋았다.
현서 선배가 군 복무를 마치고 어학연수까지 다녀온 후 복학했을 때, 그녀는 졸업반이었고 선배는 캐나다에서 만난 소정 선배와 이미 커플이 되어 있었다. 그때는 다른 동기들처럼, 저런 이상적인 연인을 둔 소정 선배가 부럽다는 마음이 훨씬 강했던 것 같다.
다시 돌아봐도 역시 진심으로 좋아했다기보다 막연한 동경심에 불과했었다. 톱스타 아이돌을 향한 10대 소녀 팬의 마음이었달까.
창에서 시선을 거두고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카운터 쪽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언뜻 보이는 고 사장의 뒷목과 귓불이 새빨개져 있었다. 굉장히 매력적인 손님, 특히 키 크고 풍채 좋은 외국인 남자가 왔을 때 드러나는 현상이다. 근사한 외국인이라도 왔나 싶어 일 층에 내려온 순간, 유주의 발이 뚝 멈췄다.
강주하가 본부장의 얼굴로 카운터에서 고 사장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직원들과 손님들까지 일제히 일손과 수다를 멈추고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차가 꽉꽉 막힐 시간인데 어떻게 이렇게 초스피드로 왔을까.
그가 먼저 유주를 보고 성큼 다가왔다. 그녀를 보는 즉시 기계처럼 차갑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가자.”
“어…… 응.”
“유주야, 이거 가져가야지! 어머나, 남친분이 정말 멋있으시네…… 호호.”
고 사장은 포장백을 그녀에게 건네며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입모양으로 나중에 전화해줘,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강주하가 그녀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돌아서기 직전 고 사장을 향해서는 무표정하게 까딱, 턱 인사만 건넸다. 살갑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무례하진 않았다. 그 이유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가게 입구를 막아선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나서야 그는 유주를 흘깃 노려보았다. 누그러지긴 했어도 아직 앙금은 남은 얼굴이다.
“사장이란 사람, 혹시 그쪽이야? 미국에서 많이 봐서 한눈에 알겠던데.”
“응. 그래서 굳이 남자라고 말하지도 않았어. 정혜 언니 대할 때랑 늘 똑같은 기분이라서.”
“혹시 바이는 아니겠지. 바이섹슈얼.”
그러기만 해봐라, 으름장 놓듯 중얼거리며 주하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톡톡 쳤다. 초조하거나 설레기 직전의 버릇이었다.
“사장은 그럼 됐고 너, 내가 누누이 말했지. 밖에 있을 때 휴대폰 꼭 꺼내 놓고 있으라고.”
“나도 말했잖아, 주하야. 연락이 몇 시간 안 돼도 바쁘려니, 폰을 볼 상황이 아니겠거니 편하게 생각 좀 해달라고.”
“너 영화관 혼자 안 가잖아. 나 만나기 이후에는 나랑 가고. 영화 볼 때나 밤에 잠잘 때 아니면, 폰을 그렇게 오랫동안 못 볼 상황이 대체 뭐가 있어? 혹시 무슨 일 생긴 게 아닌가 얼마나 걱정되고 답답한지 알아?”
“내가 약속 있다고 했잖아. 그럼 수다 떠느라 못 보나보다 하면 되지 왜 그렇게 꼭 극단적으로 생각해? 잠깐만…… 너 지금 어디 가?”
“N호텔로 되돌아가고 있어. 놓고 온 게 있어서.”
소위 주말용 벤틀리가 여기저기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N호텔에 가깝게 다가갔다. 아까도 이렇게 지름길로 꼬불꼬불 돌아오느라 빨리 온 거였구나. 주하는 아직 언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며 한마디로 정리하려 했다.
“다른 말 필요 없고, 앞으로 네가 두 가지만 잘 지키면 돼. 시간약속, 밖에서는 언제 어느 때고 휴대폰 소리 키워서 눈에 보이는 데 두기. 기본적인 거잖아?”
유주는 낮게 한숨을 뱉었다. 나는 아무 문제없으니까 너만 잘하면 돼, 라는 지적으로 부당하게 들렸다. 아무리 그를 못 이겨도 옳고 그른 건 바로 잡아야 한다.
“강주하. 너 있잖아…… 7년 전에 분명히 그러지 않았어? 십 대 시절에도 여자들이 하도 집착하고 귀찮게 해서, 나는 너한테 집착 안 할 것 같아서 사귀고 싶은 이유도 있다고.”
“그랬지, 그때는.”
“그런데 지금은… 뭔가 반대로 된 것 같지 않아?”
“뭐가?”
그가 호텔 로비 문을 열어주며 정말 모르겠다는 눈빛을 지었다.
“집착 누가 누구에게 하는지 정말 모르겠냐고.”
“집착? 설마 내가 서유주 너한테 집착하고 있다는 소리야?”
유주는 은연중에 그가 이끄는 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디에 뭘 두고 왔다는 건지 물으려는데 그가 갑자기 어이없다는 실소를 흘렸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너한테 무슨 집착을 해. 집착이 아니라 걱정한 거지. 알잖아, 난 뭐가 됐든 집착하고 중독되고 그런 타입 아닌 거.”
엘리베이터 문이 최상층에서 활짝 열렸다.
“그래, 집착 아니야. 강주하는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기 주도적인 영혼의 소유자니까……”
절대 집착이 아니라고 저렇게 질색하고 부인하니 집착이 아닌 것으로 넘어가야지 어쩌겠는가. 유주는 그와 더 언쟁하길 포기하고 주하와 룸 안에 들어섰다. 호화로운 스위트룸 안에 들어서고 나서야, 강주하의 진의에 번뜩 깨달음이 일었다. 뭘 놓고 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우리, 여기 왜 왔어?”
“어, 그게 실은 오늘이 우리 백 일째거든.”
“백 일째라고? 하지만 우리가 사귀기로 한 건……”
그가 청담동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다짜고짜 키스하고, 현관문 열자마자 바로 덮쳐왔던 때가 떠올랐다. 새삼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때는 분명 8월 중순이었다.
“아직 50일도 안 된 것 같은데 무슨 백 일…?”
“아, 네 이력서 본 날로부터 백 번째 날이야. 그때가 6월 셋째 주였으니까 오늘이 정확히 백 일이야. 확실해. 내가 달력에 표시해뒀거든.”
“뭐라고? 그게 무슨 백 일이야. 왜 네 기준으로……”
“시끄럽고. 서유주, 너 무슨 일 있지. 이리 와 앉아봐.”
“뭐?”
“너 어젯밤부터 좀 이상했어. 꼭 해야 할 말 있는데 못하는 사람처럼.”
갑작스런 선제공격에 유주는 허를 찔린 얼굴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냥 속 시원히 말해. 정말 돈 필요한 거 아니야?”
“아니야! 내 얘기가 아니라 실은……”
하긴 지금은 백일이고 이백일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유주는 망설이다 결국 말해 버렸다. 고 사장의 말대로, 그럴 필요 없는 일을 그녀 혼자 걱정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실은 어제 그 레스토랑 밖에서 기다릴 때……”
유주는 최대한 그가 기분 나빠 하지 않도록 그녀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에둘러 말했다. 어제 창 너머로 들은 것, 예전에 사채업자의 상환 압박으로 추정되는 전화를 본의 아니게 엿들었던 일을 다 털어놓는 동안 강주하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녀를 응시하는 무표정한 얼굴에 언짢은 기색은 없었다. 유주는 무의식중에 그가 슈트 안쪽을 더듬으려다 손을 거두는 걸 보고, 주하가 초조해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강주하는 극도로 초조하거나 날이 서 있거나, 그보다 훨씬 덜하지만 들뜨고 설렐 때만 담배를 찾았다.
“그래서 걱정했구나.”
그는 담배를 찾는 대신 팔짱을 끼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화난 기색은 없었다.
“먼저 사채업자 전화부터 오해를 풀게. 반대편에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던 분은 아버지야.”
아, 아버지? 유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꽤 거친 표현을 쓰셨던 것 같은데 아버지라니. 그 옆에 중년 여성의 말소리도 들었는데 그럼 그분은 어머니?
“그날 세금 문제로 담당 세무사 오피스에서 두 분이 만나기로 약속하셨는데, 어머니가 연락도 없이 늦는다고 화가 나 계셨어. 여차저차해서 나도 말이 엇나가다 보니 예전에 돈 빌려 간 거 원금과 이자, 한꺼번에 다 갚으라고 역정을 내신 거야. 가끔 그러셔서 이젠 뭐 그러려니 하고 있고. 다행히 어머니가 도착하셔서 그쯤에서 통화를 끝냈어.”
아아, 다행이다. 유주는 저도 모르게 안도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빚 독촉에 시달리다 자금조달로 동분서주하셨던 일이 지금까지 의식 깊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카드는 정말 별일 아니었는데…… 사무실에 지갑을 두고 와서 차에 있던 카드들로 결제하려다 하나는 분실 신고해놓고 도로 찾은 걸 깜빡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오래 방치해둬 계좌에 잔액이 거의 없었던 거였고.”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하나는 다시 활성화시켰고 하나는 당분간 방치해 두려고 버려뒀어. 내가 뭣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돈도 없는 너한테.”
마지막 부분에서 유주는 조금 찔끔했지만 훨씬 더 중요한 사실에 안심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고 사장의 말대로 그녀 혼자만의 억측이었던 것이다. 안도한 나머지 허무함마저 들었지만 기분 좋은 허무함이었다.
“하아. 설마 했는데…… 정말 별 거 아니었구나.”
“왜. 내가 금수저인 척하는 허언증 사기꾼인 줄 알았어?”
강주하는 시종일관 진지하게 말을 잇다 활짝 핀 유주의 얼굴을 보고 엷게 웃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제 걱정을 해줬다는 사실 자체가 기쁜 것 같았다.
“바보냐? 나 그런 사기꾼 아니야.”
그가 어느새 다가와 유주를 제 품 안에 넣고 있었다. 부드럽게 입술을 겹치고 혀를 감아오는 나른한 키스에 잠깐 혼이 나가 있었나 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강주하가 제 몸을 객실용 침대 한가운데 눕혀놓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 어깨 너머 테이블 위에는 장미꽃과 핑크빛 리본이 둘러진 샴페인 바구니도 보였다.
“아, 주하야, 잠깐… 잠깐만! 우리 진짜, 백일 기념으로 여기 온 거야?”
“그렇다니까……”
목 오목한 부분에 그의 입술이 지그시 눌러왔다. 혀가 감미롭게 핥고 지나간 곳마다, 온기를 불어넣어 주려는 것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숨결이 스쳤다. 주하는 그녀가 가슴만큼 빨리 공략되는 성감대인 목 안쪽을 애태우듯 더 자극하다 제 바지 앞으로 손을 가져갔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공기를 날카롭게 찢었다. 중력을 무시하고 잔뜩 융기한 페니스가 옷자락 사이로 우뚝 솟아올랐다. 손끝만 살짝 가져다 대도 튕겨 나갈 것처럼 귀두부터 음경 끝까지 팽팽하게 부풀어 있다. 갈라진 선단 틈에는 쿠퍼액이 잔뜩 맺혀 있어서 조금이라도 쥐어짜면 눈물처럼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유주야, 빨리……”
다리 벌려, 어서. 터질 것 같은 욕망으로 목이 착 가라앉아 나머지 말은 숨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도저히 기다릴 수 없었는지 유주의 풀어헤친 젖가슴을 가운데로 모아 잡고 허리 위에 올라타 그 사이에 제 것을 끼웠다.
“아, 아! 뭐하는… 음… 싫, 싫어……”
지독히도 강렬한 날 것의 냄새에 유주는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렇다고 턱 바로 아래까지 올라온 귀두의 흥분된 내음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그의 성기가 양쪽 젖가슴 사이를 파고들어 위아래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주는 몸 한가운데가 젖어 드는 아찔함에 기겁해서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단단한 페니스 가운데서부터 귀두 쪽까지 거대한 촉수처럼 얼굴 쪽으로 쑥 밀려왔다 밀려갔다 다시 올라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턱을 최대한 뒤로 젖히지 않으면 사납게 밀려오는 선단이 목 안쪽에 부딪쳐올 것 같았다.
“하… 흣…… 으응……!”
유주는 머리를 뒤로 한껏 젖히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만 간신히 내쉬었다. 뜨거워서 미칠 것 같았다. 뜨겁고 미끌미끌한 살덩이가 가슴골을 치대며 문질러 대는 감각에 기묘한 전율이 일었다. 말랑한 가슴을 감싸쥐고 바깥쪽에서 가운데로 당기는 그의 열 손가락, 손바닥도 뜨거웠다.
그 화끈거리는 열기에 호흡마저 가빴다. 가슴을 양쪽에서 움켜쥐고 모아대던 주하의 손가락 중, 양쪽 엄지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유두를 터뜨릴 듯 꼭 누르고 비벼대자 쾌감은 배로 더 일었다. 질 내벽에서 뜨거운 것이 움찔 터져 나와 저도 모르게 다리를 꼭 오므려버렸다.
하아 하아, 주하 역시 거친 숨을 가누며 허리를 리듬감 있게 위아래로 쳐올렸다. 상앗빛 보드라운 가슴 사이 단단하게 자리 잡은, 검붉은 페니스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유주가 너무 예뻐서 눈이 멀 지경이었다. 지금 제 것을 완벽한 가슴 사이 조이고 숨을 헐떡이는 얼굴이 얼마나 귀엽고 애틋한지, 당분간 시작은 늘 이렇게 해야겠다고 흐릿한 의식 속에서 저 혼자 다짐하고 있었다. 귀두 쪽 음경이 조금씩 더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며 사정감이 밀려왔다.
“유주… 유…… 하앗!”
유주도 동시에 커다란 신음을 뱉었다. 시트 옆을 꼭 말아 쥐고 숨만 쌕쌕거리던 양 뺨과 입술, 턱과 목까지 희뿌연 정액이 거품처럼 점점이 흩어졌다. 진한 욕정의 내음에 유주는 고개를 젖히며 신음을 흘렸다. 얼굴과 목 여기저기 닦아주는 그의 손길이 이내 느껴졌다.
주하는 다른 곳은 타월로 세심하게 닦아주면서도, 제 것이 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젖가슴은 내버려 두었다. 그의 땀과 유주의 땀, 음경이 뿜어댔던 열기와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젖가슴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잠깐 가라앉았던 욕망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발목을 아래로 부드럽게 잡아끄는 느낌에 유주는 눈을 떴다. 다리를 벌리고 허벅지를 젖히는 손길은 성급했던 탓인지 조금 거칠었다. 허벅지 안쪽을 손으로 잡아 누르고 촉촉하게 젖은 비부를 보는 두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하아, 진짜…… 미치겠어. 너무 먹음직스러워……”
입술이 허벅지 안쪽을 더듬다가 점점 옆으로 기울어져 갈라진 틈새 바로 앞에 멎었다. 유주는 그만하라는 의미 없는 신음만 흘렸다. 주하의 강한 악력에 허벅지가 꽉 잡혀 옴짝달싹 못 하고 허리만 바들바들 떨었다.
“아니, 박음직스럽다고 해야 하나……? 못 참겠으니까 잠깐만 빨고 넣을게……”
곧이어 발정 난 것 같은 혀가 뜨겁게 젖은 비부 안으로 쑥 밀고 들어왔다. 내벽을 샅샅이 쑤시다가 입구까지 다시 얕게 당기더니, 그의 입술이 크게 벌어지며 음부를 통째로 덮어왔다.
“아흣! 읏, 응, 음, 하아악……!”
내벽의 습기가 죄다 마를 때까지 발라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혀가 우악스럽고 집요하게 움직였다.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내벽에서 기어이 애액이 한바탕 더 쏟아진 뒤에야, 주하는 제 것을 잡고 움찔거리는 비부로 밀어 넣었다. 내벽에 자신만의 의지가 있는 것처럼, 속살이 굵고 단단한 살기둥을 일제히 휘감아 안쪽 깊이 잡아끌었다.
주하는 이 악물고 허리를 뒤로 뺐다. 질이 처음에 확 조여 들던 그 쾌감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었다. 그는 반쯤 빠져나온 페니스를 다시 빠르게 밀어 넣었다. 불끈거리는 음경이 단번에 속살을 사정없이 짓뭉개듯 젖히고 밀어 올려 안쪽 깊숙이 박혀 들었다.
“아흑! 아, 너무 깊… 깊어…… 주하… 흐읏!”
유주는 질벽 끝까지 꿰뚫린 채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가늘고 투명한 줄기가 흘렀다. 주하가 재빨리 허리를 굽혀, 끊어져 없어지려는 타액을 훑어 올렸다. 그 반동에 안쪽 깊이 들어차 있던 페니스 귀두가 경부 쪽에 닿기 직전까지 더 깊숙이 찔러 들었다.
“아, 아흣! 으…읏! 아, 주하야, 깊, 너무 깊다니까…… 아아앙!”
주하는 자연스럽게 고양이처럼 웅크린 자세가 되어 그대로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성기가 물 만난 고기처럼, 쫀쫀하게 감겨오는 속살을 마구 휘젓고 내달렸다. 고환이 더 이상 눌리지 않을 만큼 살기둥이 뿌리까지 깊이 치고 들어와, 불알이 떨어져 나갈 기세로 격렬하게 찔러대었다.
유주는 목이 쉬어버리기 직전까지 교성과 신음을 번갈아 질렀다. 내벽 전체를 위아래로 쓸고 비비며, 귀두가 막다른 내벽을 쿡쿡 찔러대는 충격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와 침대를 부숴버릴 기세로 두 사람 위를 덮쳐왔다.
“아아… 아흑, 앗, 앙, 으응, 응! 응!”
절정이 빠르게 밀어닥쳤다. 주하의 마지막 신음과 동시에 그의 것도 절정액을 거세게 토해냈다. 목 놓아 울듯 길게 이어진 신음 끝에 유주는 마른기침을 몇 번이나 뱉었다. 정말로 목이 쉬어 버린 것 같았다.
주하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목 안쪽에 입술을 묻었다. 파정에의 여운을 오래도록 만끽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