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오렌티 비혼주의 금지법안-6화 (6/8)

6화: 무너진 관계의 균형

기진맥진해 욕조에서 몸을 씻다가, 물속에서 또 한바탕 서로의 몸속에 녹아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눈을 뜨니 아직 새벽 같았다. 노트북 자판을 오가는 최소한의 타건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주하가 제 옆에 상체만 일으켜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깼어? 소리 나서?”

유주는 목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간밤에 얼마나 고성을 질러댔는지 성대가 단단히 몸살을 앓는 느낌이었다. 주하는 침대에서 일어나 따뜻한 차를 가져와 그녀가 몇 모금 마시게끔 잔을 받쳐 주었다.

유주는 목을 축이고 다시 쓰러지듯 누웠다. 어떻게 출근하지 걱정하다 오늘이 토요일이란 걸 깨닫자 눈이 도로 감겼다.

“나 더 잘래……”

“그래. 자, 어서. 타이핑 소리 안 낼게.”

그의 손이 등 돌리고 누운 유주의 머리칼을 빗질하듯 쓸다가, 등을 토닥이다가 은근슬쩍 배 아픈 아이 달래듯 배도 어루만지길 반복했다. 유주는 혼잣말처럼 힘없이 중얼거렸다.

“남자들은 참 좋겠다. 그렇게 밤새 해대고도 아무렇지 않아서……”

“무슨 소리야. 남자라서가 아니라 나니까 그런 거지. 상대는 너라서 그런 거고.”

“그래. 그렇다고 쳐. 근데 주하야… 나 예전부터 궁금한 거 있었어.”

“응. 뭔데?”

“넌 나보다 고작 한 살 더 많을 뿐인데… 어떻게 지금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을까. 부럽기도 하고 너무 다른 세계 일 같아서 실감도 안 나고……”

몸은 노곤한데 말은 하고 싶은지 자꾸만 혀가 멋대로 움직였다. 아까 카드 문제도 안심이 된 데다 그가 부모님 이야기를 좀 더 들려줘서 용기가 난 것 같았다. 갑자기 등 뒤로 주하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곧바로 대답해주다가 노트북을 저만치 밀어두고 유주의 몸을 제 쪽으로 돌려 눕혔다. 주하가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그녀에게 바짝 붙어 누웠다.

“우리 서유주가 웬일일까, 강주하에게 먼저 관심을 다 가져주고…… 응?”

성장 배경이나 미국 생활, 정확한 자산 등, 제 입으로 먼저 말하기 전에는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녀였다. 아까 신용카드 해프닝으로 그의 상황을 걱정해 준 것도 기특해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자세한 건 조금씩 알려주겠지만, 결국 기반은 외가 쪽 유전자에 외할아버지 유산의 합작인 것 같아. 외할아버지께서 미국에 여기저기 일궈 놓으신 땅, 특히 부동산 쪽이 정말 많았어. 여유가 생기실 때마다 일리노이 주나 뉴욕 쪽 여기저기 낡은 건물과 아파트, 땅덩어리를 조금씩 사 모으셨는데 훗날 엄청난 시세차익이 생긴 곳들이야. 관광명소도 있고 호텔, 주차장, 미술관도 있고… 그런데도 심심하다고 당신 건물의 경비원 일도 하셨지.”

유주는 잠자코 그가 자장가처럼 들려주는 얘기를 들었다. 경제적 능력 쪽으로는 외가 쪽의 유전자를 타고난 게 확실한 듯했다.

“친척들도 별로 없으셨고 미국은 상속세가 없어서 어머니께 엄청난 거금의 유산이 넘어왔어. 내게도 브루클린 쪽 건물이랑 땅 이것저것 남겨 주셔서 고심 끝에 작은 갤러리와 전시공간으로 만들었는데 그게 잭팟이 터진 거야. 건물 자체 임대료는 물론, 경매로 하나씩 사들인 신인 작가들 작품들을 타 박물관에 대여해 주면서 수입도 꽤 많아졌고.”

정말로 다른 세계 얘기 같았다. 브루클린의 갤러리라니. 언젠가 그녀도 가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사귀고 있는 동안에는 한 번쯤 기회가 있을지.

유주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사귀고 있는 동안이란 생각을 하자마자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졌다. 주하는 그녀의 동요를 모른 채 등 뒤에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어갔다.

“동시에 어머니는 서울 곳곳의 구축 아파트나 오래된 건물, 호텔 등…… 이것저것 부동산에 손대시는 것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어마어마한 시세차익을 보셨어. 거기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지역이 거듭된 개발로 각광받는 도심과 드림 타운이 된 거야. 속된 말로 천지개벽할 곳들만 미리 점찍으신 거지.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나도 그런 면에서 두 분과 꽤 닮았고.”

“나 빌려준 청담동 아파트도 네가……?”

“아니, 그건 어머니가 훨씬 전에 사 놓으신 건데 세금 때문에 내게 증여하셨어. 나는 마포와 용산 한남동, 옥수동 쪽을 많이 건드렸지. 외국인이 점점 증가하면서 가장 큰 수혜를 받을 곳이라 직감했거든. 열아홉 살 때……”

“열, 열아홉 살?”

“그때부터 아버지는 점점, 어머니뿐 아니라 나와도 척을 지게 되셨지. 툭하면 대한민국을 망치는 투기충 모자라고 격분하시고…… 지금도 미국 대통령이 단지 부동산 디벨로퍼 출신이란 사실만으로 무조건 혐오하실 정도니까. 투기냐, 투자냐는 영원히 정답 없는 가치관의 충돌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 점은 유주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정혜 언니와 정연 언니만 해도, 모든 게 잘 맞는 자매간이지만 부동산에 대한 의견 차이는 있었다. 말하나마나 그녀와 그가 생각하는개념도 분명 다를 것이다.

“유주야, 자?”

“응… 아니. 몸은 너무 피곤한데, 누구 덕에. 얘기하다 보니 머리는 맑아졌… 이게 뭐야?”

은연중에 뻗은 팔이 시트 아래로 들어가자 뭔가 물컹한 게 잡혔다. 핸드크림 같은 튜브가 침대 헤드 안쪽에 떨어져 있었다.

“아, 백일 기념 커플로 예약했더니 어메니티 중에 넣은 모양이네. 이거 흥분제야. 우리가 쓸 일은 없지만.”

유주는 튜브를 주하의 손에서 다시 가져가 레인보우 빛깔로 시선을 사로잡는 용기를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왜? 너 싱가포르에서도 젤 가져왔잖아. 원래 질색하는 것 같았지만 이제부터 애용하려고 맘 바꾼 거 아니었어?”

유주가 장난스럽게 도발하듯 묻자 그는 변명하듯 정색했다.

“센토사는 첫 여행이니까 특별히 기념으로 써 본 거지, 너 힘들지 않게 하려고. 난 원래 이런 거 별로야.”

“왜? 그… 밖에다 흥분제 살짝 바르고 삽입하니까 느낌이 엄청 다른 거 같아 보이던데.

“서유주. 너 세상 순진한 척하면서 도대체 무슨 변태 포르노를 그렇게 많이 본 거야.”

“아니 내가 보려고 한 게 아니라 언니들한테 물려받은 노트북에 이미……”

“다 삭제했어? 저번에 싹 다 없애라고 했잖아.”

그가 자못 엄격한 척 더 정색해 보이자 반대로 장난기가 더 솟았다. 그녀는 튜브의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유주는 갑자기 픽 웃었다.

“졸업반일 때 성인용품점 시급이 워낙 세서 잠깐 알바라도 해볼까 들어가 봤거든? 거기서 글리세린 성분이라 입에 들어가도 된다고 매니저가 남자 손님에게 설명해 주는 거 보고 기겁했는데……”

“뭐? 너 설마 거기서 알바 했어? 아니지?”

“안 했지, 당연히. 아무리 세일즈라지만 처음 보는 남자한테 그런 거 설명한다니 엄두가 안 났어. 시급이 최저임금 1.5배라서 혹했지만……”

“다행이야. 너 하루라도 했으면 나 진짜 열 받아서 가만 안 뒀을 거야. 어떻게 다른 새끼에게 그런 걸 말해주고 앉았냐고.”

주하는 상상만 해도 화가 나는지 숨이 거칠어졌다. 그 숨결은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려 점점 부피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는 튜브를 만지작거리는 유주의 뺨, 목 안쪽을 쓸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야릇하게 낮췄다.

“그럼 오늘은 백일 기념으로… 한 번만 써볼까.”

“뭐? 하지만 이런 거 쓰는 거 별로라고…… 아, 안 돼! 나 정말 힘들어! 못해, 더는!”

주하는 저항하는 그녀를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으로 컨트롤러를 집어 방의 조도를 한껏 낮췄다. 스위트룸은 순식간에 은은한 황금빛 여울빛으로 물들어 관능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 번만 써보자, 응? 대신 너무 느끼지는 말고…… 적당히 느끼면서.”

“뭐라는 거야, 나 힘들다고!”

유주는 실소하며 바위 같은 주하의 어깨를 밀어내려 헛수고를 해댔다. 그가 약이나 기구를 별로라고 생각하며 쓰지 않으려는 이유는 뻔했다. 그런 인위적인 장치들은 일종의 페이크이며, 자신은 그런 게 없어도 서유주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족하다 못해 몸이 너무 버거운 지경이었다.

“아직 토요일 새벽이야, 일요일 밤까지 실컷 쉴 수 있다고.”

“바보야, 네가 날 좀 내버려둬야 쉴 수가 있지!”

하지만 주하는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분명 머릿속으로 뭔가 사악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저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그녀가 젤로 흥분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한 번쯤은 보고 싶은 듯했다.

“딱 한 번만 사정하고 멈출게. 정말이야, 약속해. 너도 이거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했잖아? 아니라고 못 할걸?”

유주는 부정하지 못했다. 아무리 반은 연기라지만 흥분 젤을 바르고, 당장 숨넘어갈 것처럼 황홀경에 빠졌던 영상 속 여자가 떠올라 호기심이 일었던 건 사실이다.

“나 정말 온몸이 아파…… 아프니까 딱 한 번만 사정해. 오래 끌지 말고……”

주하는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유주의 가운을 벗기고 침대 한가운데에 똑바로 눕혔다. 볼 때마다 지금 같은 얼굴은 -그녀와 있을 때의 거의 모든 표정이 그랬지만- 회사에서의 강주하 본부장과는 너무도 달랐다. 정말 같은 사람일까 의심될 정도였다.

“아주 조금만 바를 거야. 살짝만 열나게.”

주하는 잠시 제 손을 내려다보다 유주의 손목을 잡아끌어 검지 끝에 쌀알만큼만 젤을 짜냈다. 이제야 그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제 손길 자체만으로 충분히 민감해지고 느낄 대로 느껴서 흥분제 자체가 무용지물이니, 그녀가 직접 제 손으로 살짝만 맛보란 뜻이다.

유주는 조금 머뭇거리다 영상에서 본 기억대로, 제 손끝에서 끈적거리는 젤을 음부 쪽으로 가져갔다. 순간 주하가 보고 있는 게 부끄러워 등을 돌렸지만 그가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두 눈이 벌써부터 반짝거리며 일그러진 욕망이 충만해 있었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내 눈앞에서 해……”

보여줘, 뻔뻔하게 요구해 오는 시선에 불꽃이 마구 일렁거려 수치심이 더해졌다. 유주는 고개를 숙이고 비부의 틈새와 클리토리스 쪽에 살짝 문질렀다. 상쾌하고 시원하긴 했지만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젤을 손바닥 위에 좀 더 짜냈다. 힘 조절이 안 되어 그런지 생각보다 많이 나와 버렸다.

“이번엔 안쪽에다 발라 봐. 조금만.”

주하가 낮게 속삭였다. 주문을 거는 것처럼 나긋나긋하면서도 특유의 명령조였다. 그는 벌써부터 흥분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위하듯 제 손으로 속살을 더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유주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달싹이다 천천히 허벅지를 벌렸다.

한껏 벌어진 허벅지 사이, 치구 아래 틈새는 이미 애액에 촉촉하게 물들어 있었다. 유주는 젤이 묻은 중지를 천천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손가락이 깊숙이 파고들수록 제 속살이 꾸물거리며 손가락을 꼭 물고 조이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손가락 끝마디까지 다 찔러 넣는 순간 발열이 시작되었다. 젤의 효능이 이렇게 몇 박자 늦는 건지 사람에 따라 다른 건지,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감각만은 확실했다.

아까 젤을 살짝 펴 발랐던 음부와 클리토리스에서 화끈거리는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여기저기 찔러 든 내벽도 마찬가지다. 열기는 이내 전신으로 퍼져가서 얼굴마저 화끈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주하의 손가락이 가슴으로 뻗어와 붉게 곤두선 유두를 빙글빙글 돌렸다.

“이것 봐. 내가 만져줄 때처럼 단단하게 섰어. 여긴 바르지도 않았는데……”

그가 무르익은 양쪽 젖꼭지를 집게처럼 두 손가락으로 꼭 잡았다. 아앗, 유주가 허리를 튕기며 그의 손을 밀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주하가 그녀의 손목을 꼭 잡고 얼굴을 바짝 숙여 유두를 날름 핥고 빨았다.

“아아……읏! 흐…응! 흐읏, 아파, 아……”

“아파? 힘 안 줬는데……”

“아니, 온몸이 다… 욱신거려. 화끈거려 미칠 것 같아……!”

아까 젤을 발랐던 음부와 질벽 안에서 찌르르, 전기에 감전된 듯한 전율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몇 잔이나 연거푸 들이켠 것처럼, 숨도 빨라지고 몸이 저릿하다 못해 발가락 끝까지 마구 구부러지고 뒤틀렸다. 흥분제의 성분이 지나치게 강한 듯했다.

“주하…야…… 하, 나 이상해… 하윽! 너무… 뜨거워……”

그를 보기만 했는데도 질 안쪽에서 뜨거운 애액이 왈칵 쏟아져 주르르 흘렀다. 한동안 관전만 하고 있던 주하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혀로 제 입술을 천천히 핥고 미간을 좁힌 얼굴이 애타는 걸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느긋이 감상하고 싶은 동시에, 손을 대고 마구 만지고 싶어서 결국 자제력을 놓아 버리기 직전의 눈빛이었다. 그 색기 어린 눈과 마주치는 순간, 유주의 여성이 먼저 반응해서 끈적한 애액을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마구 뿜어댔다.

스스로가 음란하기 짝이 없는 여자 같아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주하의 긴 다리가 뻗어와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지렛대처럼 받쳤다.

“너 지금 얼마나 섹시하게… 음란하게 보이는지 모르지. 서유주.”

그가 씨발, 낮게 욕설을 뱉으며 짐승처럼 숨을 씨근거렸다. 지금까지의 유주와는 조금 달랐다. 지금껏 본 적 없었던, 고혹적이고 관능적인 요부로 변이되기 직전의 몸부림 같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당장 싸버릴 것 같다.

“내가 너무 느끼지 말라고 했는데. 그깟 인공적인 자극에……”

“아니, 아니야, 내가 느끼는 게 아니라. 흑…… 이게 너무 강해서… 하아앗, 아아, 어떡해, 자꾸만 나와……”

가느다란 다리 사이의 시트 자락이 흥건했다. 꿀을 한 병 가득 쏟아버려 끈적끈적 축축하게 젖어 버린 것 같았다. 주하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뒤로 쓰러뜨려 눕혔다. 그는 유주의 한껏 벌려진 허벅지 안쪽을 그러쥐고, 음부 여기저기 얼룩처럼 흩어진 체액을 혀로 샅샅이 핥아나갔다.

고양이가 그루밍하듯 깨끗이 핥던 혀가 본격적으로 음부 속을 파고들어 왔다. 혀가 안쪽을 휘저을 때마다 비부 틈을 아예 덮어버린 입술이 움찔거렸다. 유주는 허공만 미친 듯이 휘젓던 손으로 머리를 받친 베개 가장자리를 힘껏 쥐었다. 가뜩이나 쉬어 버린 목에서는 이제 쩍쩍 갈라지는 신음만 힘겹게 새어 나왔다.

“아앗! 주, 주하… 손, 손…! 아흐윽…!”

그가 만족한 듯, 마침내 고개를 들고 제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떼고 나서도 유주는 연신 앓는 소리를 냈다. 흥분제가 묻어 있던 손끝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 민감한 살을 꼭 누르며 비벼오자 열기가 피어올라 근육이 아프도록 욱신거렸다.

“아하… 여기가 아파?”

주하가 짓궂게 놀리듯, 일부러 허벅지 안쪽을 더 세게 주물러댔다. 그의 신체 아닌 다른 것에 일 초라도 느끼는 게 싫긴 했지만, 지금 유주의 우는 얼굴이 꽤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의 손바닥이 발열이 일어난 허벅지 안쪽을 아예 찰싹, 소리 나게 후려치자 유주가 아악, 비명을 지르며 즉각 반응해왔다.

“주…하… 이러지… 이것 좀 놓……”

“놓아주고 넣어줄까……?”

그가 엷게 웃으며, 유주의 귓가에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듯 대답을 유도했다. 어차피 이 달콤한 고문의 끝은 그의 것으로 창대하게 마무리되어야 한다.

“하윽. 으…응…… 으흑………”

“넣어 줘?”

유주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위태로울 정도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주하는 일부러 귓가에 입술을 딱 붙이고 다시 속삭였다.

“넣어 주세요, 해봐.”

유주가 눈물범벅인 눈을 떴다.

“넣어주세요, 주하님. 이렇게.”

“시, 싫… 악!”

그가 여전히 젤이 묻은 손끝으로 젖꼭지를 잡아당겼다. 다른 손으로는 방금 제 입으로 게걸스럽게 빨아 대던 음부의 꽃술을 잡아서 빙글빙글 돌렸다. 유주는 쥐어짜는 신음을 흘리다 결국 뱉어버렸다.

“너, 넣어 주…세……”

“안 들려, 더 크게, 더듬지 말고 한 번에.”

“넣어 주세요, 주, 주하…님.”

“이거 하나만 더.”

주하가 고개를 기울여 유주의 입술에 쪽, 버드키스를 하고 다시 요구했다.

“힘껏 박아 주세요.”

“싫어, 그런 말…! 하앗……!”

그의 이 끝이 유주의 하얀 목을 공략해 왔다. 한 손으로 허벅지를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 가슴을 아프도록 움켜쥐곤 이 끝으로 목 안쪽, 그녀가 가장 잘 느끼는 스팟을 잘근잘근 씹어대니 미칠 것 같았다. 또 한 번, 음부에서 뜨거운 샘이 와락 솟아올랐다.

“한 번만 해줘. 딱 한 번만.”

주하의 이가 목 안쪽에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와 뾰족하게 솟은 유두에서 멈췄다. 유두에 이를 반쯤 박고 한 번만 해달라고 중얼대니 유주는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정체 모를 기운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 뇌세포를 하나씩 하얗게 지워나가는 것 같았다.

“아앗, 아! 그, 그만……! 하앗……”

“어쩌지? 말하기 전에는 안 넣어줄 건데……”

“으…흣! 주하……”

“흥분제에 이 정도로 반응할 줄은 몰랐어. 감도 좋고 잘 느끼는 몸인 건 알았지만. 효과가 너무 강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거야. 내가 박고 절정까지 찔러주기 전에는.”

뜨거운 혀가 유륜을 날름 핥다가 유두 위에 다시 이를 콱 박았다. 아악, 뒤로 넘어가려는 유주의 허리를 그가 받쳐 안았다. 그리고 다시 속삭였다.

“어떡해? 그냥 여기서 끝내고 잘까……?”

유주는 분을 못 이기고 그의 귓불을 꽉 물었다. 주하가 아얏, 펄쩍 뛰면서도 기쁜 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유주는 그가 얄미워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제 쪽에서 더 안달 나 있는 주제에, 이상한 걸 바른 틈을 타 그따위 말을 시키다니.

“그래, 끝내. 프론트에 연락해서…… 흐읏… 구해 달라 하면 돼.”

“구해 달라니, 뭘?”

“딜도!”

유주가 얼굴이 빨개져서 씩씩대며 프론트 폰으로 손을 뻗자 주하가 재빨리 발목을 잡아서 쓰러뜨렸다. 유주의 몸이 시트 위를 주룩, 미끄러지며 단숨에 그의 품에 안겼다.

“알았어, 하지 마. 대신 내가 말할 테니까.”

그의 혀가 가느다란 한쪽 다리를 위로 치켜들고 작고 귀여운 발가락을 하나씩 빨았다. 그리고는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는 듯, 다리를 한껏 벌리고 음부 위에 제 것을 세차게 비비기 시작했다.

“힘껏 박아 줄게, 박게 해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하가 허리를 힘껏 위로 쳐올렸다. 단단한 음경과 보드라운 속살이 하나로 녹아들며, 서로가 제 살처럼 익숙한 교감을 나누기 시작했다.

페니스가 제 몸체에 자석처럼 쫀쫀하게 들러붙고 조여 대는 쾌감에 이가 저절로 갈렸다. 주하는 제 것을 깊숙이 박고 격렬하게 피스톤질을 하다가, 조금씩 속도를 낮췄고 나중에는 아예 멈춰버렸다.

“하… 으흣……”

유주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교성을 높이다 그를 올려다보았다. 벌써부터 눈물이 차올라 촉촉했다. 왜 멈추는지 묻는 듯한 눈이 보석처럼 예뻤다. 주하가 악문 잇새 사이로 물었다.

“뜨거워? 아까 안에 발랐던 부분… 화끈거려?”

으응, 유주는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울먹이듯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아까 흥분젤을 발랐던 내벽 얕은 곳을 페니스가 찌르고 지나갈 때마다 평소보다 더 홧홧한 전율이 일었던 차였다. 확실히 흥분제가 너무 잘 듣는 몸인 모양이다.

“왜…?”

“아니…… 어쩐지 평소보다 더 힘껏 조여 오는 것 같았는데 역시……”

주하가 체념한 듯 한쪽 젖가슴에 입을 맞추며 머리를 기댔다. 유주가 아아앙, 크게 신음을 내질렀다. 머리를 기대는 통에 허리가 좀 더 앞으로 밀려서, 안쪽의 귀두가 경부 가까이까지 찔러오는 통에 강렬한 충격이 밀려왔다.

“미안. 울지 마.”

주하가 허리를 좀 더 위로 세워서 압박을 줄여주었다. 흥분젤 때문에 평소보다 더 거세게 반응하는 게 거슬리면서도, 그런 유주의 반응 자체가 싫지 않았다. 싫기는커녕 너무도 사랑스럽고 애틋해서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살살 해, 제발…… 흐윽. 흑……”

유주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주하는 세상 다시없는 보물을 다루듯,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토닥이듯 달랬다. 그 다정한 몸짓과 달리, 입에서 나직하게 튀어나오는 말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씨발, 그따위 젤 다음부턴 보이는 족족 태워버릴 거야……”

자기가 먼저 발라보자 해놓고는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그는 유주의 몸속에 들어간 채로,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얼굴과 목 여기저기 상냥하게 입을 맞췄다.

유주의 눈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녀의 애원대로, 이제는 좀 배려하며 살살 해 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다정하고 온화한 키스, 달래는 몸짓은 폭풍 전야의 고요에 불과했다.

“괜찮아? 너무 깊이 안 찌를게……”

그리고 허리를 세우고는 본격적으로 삽입을 재개했다. 제 입으로 말한 것처럼 페니스가 너무 깊이 들어오진 않았다.

대신 엄청난 강도로 내벽 여기저기를 들쑤시듯 핫스팟을 찾아 좌우 방향 힘껏 찔러댔다. 작정하고 고문하는 것처럼 유주의 반응을 봐가면서, 조금 더 신음이 높아지는 곳마다 잔뜩 힘을 가하는 통에 기절할 것 같았다.

“아, 그, 그만… 주하야…… 흑!”

“깊이 안 들어갔잖아. 흣……”

“하앗! 흐윽! 응! 아흐흑…… 아…!”

불붙은 듯 화끈거리는 속살에 귀두와 음경이 작정하고 눌러대니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유주는 아예 허리를 뒤로 젖히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렇게 감질나게 눌러대지 말고 차라리 평소처럼 빨리 피스톤질을 가했으면 싶었다.

“아하악… 그만…!”

유주는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켜, 제 허리를 잡은 주하의 손을 움켜잡았다.

“주하야, 제발……”

“응…? 원하는 게 뭔데.”

그는 지그시 이 악물고 모른 척 나른한 미소만 띠웠다. 땀이 투둑, 이마에서 떨어져 유주의 배꼽 옆에 물방울을 그렸다.

“빨리… 움직여 줘…… 빨리……!”

“아까는 힘들다고 살살 하라고 했잖아.”

주하가 제 땀방울이 비껴간 배꼽 위에 쪽, 입술을 맞췄다. 어쩌면 배꼽도 이렇게 완벽한지. 동그란 살점 위의 앙증맞은 소용돌이가 귀여워서 계속 입술을 대보고 싶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향기 안 나는 부위가 없었고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너… 정말……”

“그럼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내 성에 찰 때까지.”

그의 미소에, 유주가 뒤로 벌렁 누워 버렸다.

“나도 몰라. 죽으면 알아서 해… 흐읏……”

여전히 음부 중간쯤 박혀 있는 페니스의 맥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제 곧 날이 밝아올 텐데 언제쯤 이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기약조차 없었다.

“안 죽어. 죽긴 왜 죽어.”

주하가 양손으로 젖가슴을 감싸고 입술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얄미워서 당장이라도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죽어도 내가 죽지. 심장마비로…… 흐읏!”

“아흑! 아!”

주하의 것이 음부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허리를 뒤로 물려 귀두만 남겨두고 음경 기둥을 거의 다 빼냈다. 분기탱천한 페니스 몸체에 수그러들 기미라곤 먼지만큼도 없어 보였다.

길고 굵은 음경이 다시 비부를 꿰뚫고 속살을 힘껏 짓이기듯 들어섰다. 그리고 단 일 초도 지체 않고 곧바로 허리를 격하게 쳐올렸다.

“아아, 응! 응! 으응! 주, 주하…… 하아악!”

유주는 엉엉 울며 제 몸에 바짝 겹쳐오는 주하의 목을 끌어안았다. 머릿속 한 편에 월요일 오전 출근할 때까지 목 상태를 회복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끊이지를 않았다. 몸 한가운데가 괴물의 촉수에 관통당한 것처럼, 전신이 바람 속 풀잎처럼 마구 흔들려 댔다.

괴물은 괴물이었다. 숨결 하나, 체취 한 줌도 섹시하고 고혹적인 괴물. 무서울 만큼 왕성한 성욕과 결국은 제 뜻대로 휘두르고 휘저어야 직성이 풀리는 독선적인 괴물.

유주는 주하의 완벽한 턱선을 지나 귓불을 꼭 깨물며 아이처럼 울었다. 두려울 만큼 좋았다. 미치도록, 사무치도록 이 순간이 황홀해서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깊이 빠져버려도 좋은지,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좋아도 괜찮은 건지 막연한 두려움이 일었다.

그는 바람 같은 남자였는데. 일 학년 봄 학기, 5월의 첫 축제가 끝나기도 전 바람같이 사라지기 전에도, 강주하는 바람 같은 존재로 회자되었다. 누구도 잡을 수 없고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는 남자.

그런데 그런 남자가 7년 만에 다시 눈앞에 나타나 살 집도 주고, 물질적으로 원하는 건 아낌없이 다 퍼주고, 매일같이 그녀를 소유하려 들었다. 그가 내벽 끝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깊숙이 사정하는 순간, 유주의 뇌리에 한 가지 사실이 스쳤다.

그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시작한 지 두 달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일방적인 재회 날짜를 기준으로, 이렇게 백일까지 챙기고 수시로 연락이 되길 원하고 늘 함께 있기를 강렬히 원했다. 그러면서도, 강주하는 단호하게 말하기도 했었다.

나는 너에게 집착 같은 거 하지 않는다고.

* * *

가끔씩 엄습하는 불안감 속에서도 시간은 느리고 끝이 무딘 화살처럼 흘러갔다. 하늘은 파랗고, 어디나 노랗고 붉은 꽃잎 일색이다. 반면, 해의 수명은 눈에 띄게 단축되어 갔다. 어느덧 밤공기도 초겨울의 냉기를 희미하게 머금고 있었다.

주하와 차에서 내리는데 휴대폰이 걸려왔다. 한 달 전쯤 이태원 고사장의 카페에서 마주친 현서 선배의 연인 소정 선배다. 유주는 일부러 여자인 걸 어필하며 제 목소리를 크게 키웠다.

“네, 소정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주하야, 나 잠깐만.”

주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가 통화하며 화장실에 들어가는 건 살짝 못마땅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레이디스 룸까지 따라 들어와 통화를 엿듣지는 못한다. 유주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선배의 안부를 물었다.

“응, 현서 오빠랑 나는 잘 지내지. 근데 전에 내가 이태원 가게에서 말했던 그 북 페어 말인데 지금부터 추천인 신청 받고 있거든.”

“네, 혜리에게 들었어요. 혜리도 신청했다고……”

“응. 12월 마감이니까 일단 네 이름도 넣어볼게. 너 그때 그랬잖아. 회사는 정말 탄탄하고 좋지만 금융 자산, 부동산 쪽 일이 적성에 맞지는 않다고. 인턴이라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긴 하지만……”

“처음부터 도서관 쪽 일하고 싶어서 이쪽 전공한 거잖아. 책이 너무 좋아서 서점이나 도서관에 있기만 해도 맘이 편안하고 행복해 진다고.”

소정 선배 말을 부정할 순 없었다. 사실 주하와 잘 맞는 몇 가지 중에는 책도 있었다. 돈밖에 모르는 면과는 별개로, 그 역시 책을 좋아하고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았다. 최근 매입한 외곽의 구축 상가는 북 카페 겸 독서토론강연 위주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될 계획이라 했었다.

“일단 이름 올려둘 테니까 정 안되면 마감 전에 취소해. 혜리도 지금 회사 뻑하면 주말 근무 강요에 재미없으니 때려치우고 냉큼 신청했잖아. 정규직 사서가 될 좋은 기회니까.”

“네, 그럼 일단 이름만 올려주세요. 선배님께 최대한 피해 가지 않게 제가 조금만 더 생각해볼게요.”

“그래, 아직 시간 많으니까.”

유주는 통화를 끊고도 한참 서 있다가, 영화 시작할 건데 어디 있냐는 주하의 문자를 보고 상영관으로 향했다.

“통화가 왜 이렇게 길어. 친한 선배야?”

“응. 전에 말했잖아. 넌 미국 가 버려서 모르겠지만 유명한 CC였는데 이태원 고사장님 가게 단골이라고……”

북 페어 얘기는 하지 않았다. 주하에겐 역시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퇴사도 퇴사지만, 제주도라니 그렇게 멀리 간다는 것만으로 반대할 건 뻔하다. 공연한 언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벌써 내일이면 11월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시간이 너무 빨라.”

유주는 주하와 나란히 멀티플렉스 관에 들어서다 옆을 스쳐 가는 누군가의 말을 들었다. 정말 그랬다. 여름이 불과 며칠 전 같은데 벌써 가을과 겨울의 간절기가 오다니. 그녀는 커플석 옆자리에 앉는 주하를 문득 돌아보았다.

그와 7년 만에 재회해서 남녀로 사귀게 된 지 이제 석 달이라니 어쩐지 묘했다. 벌써 석 달이 지났나 싶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만나온 것 같기도 했다. 주하는 유주의 시선을 느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둠이 낮게 깔린 실내에서도 의아함을 띤 얼굴선이 또렷했다.

“왜? 뭐 필요해? 영화 시작하려면 멀었는데 가서 사 올까.”

“아니. 아무것도 아냐.”

강주하는 확실히 7년 전의 그와는 달랐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 뜻에 무조건 따르길 바라던 그때의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스스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몇 가지 부분에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기어이 제 뜻을 관철하고 그대로 밀어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는 일에서나 연애에서나 차이가 없었다.

실내가 완전히 어두워지며 거대한 스크린이 빛을 뿜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늘 그렇듯이 그가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보통 여자가 남자에게 어깨를 기대는 것과는 반대다. 인트로가 지나가자 주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언젠가 그는 영화를 보는 것보다, 이렇게 어둡고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는 분위기가 좋다고 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는 곳에서 몰래 그녀를 더듬는 것에도 스릴이 느껴진다고도 했다.

“앗, 주하야……”

“쉿……”

어깨동무하듯 유주의 반대쪽 어깨에 걸쳐져 있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와 블라우스의 가슴을 살며시 움켜잡았다. 영화가 시작된 지 십 분도 안돼서, 그는 제가 한 말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유주가 그 못된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주하는 보란 듯이 가슴을 잡은 손에 더 힘을 가했다.

“주하……”

“괜찮아, 아무도 안 봐.”

그가 귓가에 대고 들릴락 말락 속삭였다. 확실히 아무도 그들을 보고 있진 않았다. 둘의 좌석은 분리된 커플석 맨 안쪽, 맨 뒤에 있었다. 하지만 이 이상으로 소리를 내거나 움직였다간 앞자리나 반대편 커플의 주의를 끌 것이다.

주하의 나쁜 손은 점점 대담해져 블라우스의 라운드넥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브래지어 안까지 쑥 밀고 들어왔다. 유주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을까 두려워 얼른 입으로 손을 가렸다.

이상한 기척에 앞자리의 누군가 돌아보기라도 하면, 한쪽 가슴을 잡혀서 어쩔 줄 모르는 제 상체가 훤히 노출될 것이다. 아무리 어두운 실내라 해도 그쯤은 충분히 보인다. 유주는 숨을 가누며 주하에게 애원하다시피 속삭였다.

“주하야, 손 치워, 제발……”

“해졌고 일요일이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되잖아. 그냥 손만 대고 있을게. 그것도 안 돼?”

“나 이 영화 보고 싶어.”

유주는 급기야 울먹이며 그를 한껏 노려보았다. 손만 대고 있겠다니 말도 안 된다. 손만 잡아도 아래가 젖어 드는데, 앞으로 두 시간 동안 가슴을 잡힌 채 있다니. 영화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공공장소에서는 이러지 마……”

유두를 살짝 누르고 있던 손바닥이 무심결에 움직이자 등골에 오싹 전율이 일었다. 지금 이런 곳에서, 이럴 때 쾌감을 느끼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안간힘을 다해 주하의 손을 뿌리치자 앞자리의 여자가 뭔가 이상하다 느꼈는지 유주 쪽을 돌아보았다. 유주는 당황해서 입모양으로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상영관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유주는 여자 화장실에 뛰어 들어가 흐트러진 블라우스 앞섶을 여미고 좀 진정될 때까지 서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강주하가 화장실 옆 비상구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대뜸 다가와 반대쪽으로 가려는 유주의 손목을 잡았다.

“미안해, 유주야.”

유주는 말없이 그를 노려만 보았다. 지난 석 달간 그의 지나친 자기중심적, 편집증적 면모를 접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화가 난 적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어떤 지나친 언행이든, 단둘만의 장소일 때로 국한되어 있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짓궂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공공장소였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고. 무엇보다……”

유주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제 귀로 듣기에도 낯설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내 기분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게 너무 싫어. 언제나 네 기분이 내 기분보다 우선이라는 게 정말 화가 나서…… 오늘은 이만하고 싶어.”

주하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유주의 양어깨를 잡고 다시 사죄했다. 거듭 사과하는 목소리는 그녀의 차디찬 음성만큼이나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가끔 유주의 단호한 거절에 보이는 시무룩한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정말 미안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너 보고 싶었던 영화잖아. 다음 타임으로 다시 예매할 테니까 기분 풀어. 응?”

“영화 볼 마음 사라졌어. 나 혼자 있고 싶어.”

유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1층 로비 카페로 내려가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았다. 정말로 화가 난 나머지, 주하가 뒤에서 따라오든 말든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따스한 차를 몇 모금 속에 넣고 나자 조금씩 화가 풀렸다. 물론 그의 행태가 여전히 용납도, 이해도 되지 않는 건 변함없었다.

그는 확실히 평범하지 않았다. 누구나 갖고 있는 장단점, 개성과는 확연히 다른 뭔가가 있었다. 그녀와 연락이 안 될 때 보이는 극도의 초조함과 피해망상적인 상상에다, 늘 자기 통제 하에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 하며, 옆에 있을 때는 분리불안증에 시달리는 강아지처럼 최소한의 스킨십에도 일희일비하는 집착은 확실히 도가 지나쳤다.

회사에서 강주하 본부장으로서 보이는 모습에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피곤할 만큼 까다롭고 독선적인 완벽주의는 업무상에 있어서 결과적으로 득이 될 뿐 실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피곤해. 감정소모가 조금씩 커지는 느낌이야.

그렇다고 그가 싫지는 않았다. 반대로,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아 불안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잘해주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 옆에서 훌쩍 없어지면 어쩌지.

이렇게 좋은데. 좋아하는데.

정작 주하는 그녀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질까 봐 불안하다고 고백해 온 적이 있었다. 잠시만 연락이 안 돼도 심기 불편해 하고 언짢아하던 반응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과 분노로 더 심화되어 왔다. 그의 성향이려니 이해하려 했다가도 받아들이기 버거울 때가 있었다.

괜찮은 걸까, 이대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애정이 커질수록, 그만큼 갈등도 생기는 건 어느 연인들에게나 있을 수 있는 과정이다. 하지만 주하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그려 놓은 질서의 테두리 안에 그녀를 가둬두고, 제 시선과 통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못하게 구속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한 시간 동안 잠잠하던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주하가 문자를 보내왔다.

-유주야. 화 좀 풀렸어? 미안해. 다시 한번 사과할게.

뭐라고 답을 할까 망설이는 사이 문자가 다시 울려왔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고 싶을 때 나와 줘. 집까지 안전히 데려다주는 것까지만 할게.

기다리고 있겠다고? 설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 유주는 곧장 전화를 걸어보았다. 신호음이 한 번 울리기 무섭게 바로 연결되었다.

“유주야. 화 풀렸어?”

“지금 어디야?”

“카페 밖에 로비.”

“한 시간 내내 기다렸어?”

“응.”

의자도 없는 로비에 내내 서서 기다렸다는 걸까.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다. 유주는 무뚝뚝한 톤을 유지하려 애썼다.

“들어와서 앉아봐. 할 얘기 있어.”

그는 전화를 끊고 몇 초 지나지 않아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꽤 넓은 카페인데 어떻게 이렇게 금방 찾았는지, 혹시 한 시간 전 자리까지 미리 봐둔 게 아닌가 의혹이 일었다.

“나 아직 화 안 풀렸어. 하지만 대화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화가 난 건 단지 오늘의 스킨십 때문이 아니라……”

“알아, 내가 너 지치게 한다는 거. 미안해. 내가 잠깐만 먼저 말할게, 들어주면 안 될까.”

주하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과를 하는 중에도 비굴함 없이 차분한 태도였다. 하긴 강주하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거듭 사과를 한다는 것 자체가, 회사나 다른 곳에서라면 상상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을게. 마마보이 트라우마의 잔재냐, 못났다, 뭐라고 욕해도 좋아.”

주하는 말을 잇기 어려운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뗐다.

“어릴 때 어머니가 아버지랑은 도저히 못 살겠다고 집을 나가신 적이 있어. 그 후로도 졸혼 선언에 이를 때까지 여러 번 나가시고 별거를 하셨지만… 처음 어머니가 말도 없이 사라졌을 때 나는 겨우 다섯 살이었어.”

유주는 조금 놀랐지만 잠자코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갑자기 한밤중에 엄마가 사라진 게 어린 나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나 봐. 보다 못한 아버지가 말리고 케어해 주셨던 아주머니가 붙잡기 전까지, 며칠 동안 엄마를 찾아 울고불고 동네를 헤매고 다녔대. 며칠간 끙끙 앓아 소아과 병동에 누워 있던 기억은 어렴풋이 나.”

유주는 아랫입술을 달싹거렸다, 살짝 물기를 반복했다. 정말 많이 놀랐을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엄마의 존재는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데 갑자기 엄마가 사라져 버리다니.

“아버지가 엄마가 좀 아프셔서 금방 온다고 둘러대셨지만…… 그 후로도 엄마는 매정하리만큼 아버지와 틀어질 때마다 호텔이든 미국이든 어디든 자유롭게 가버리셨어. 한참 후에나 내게 연락을 해 오시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도 결국 내성이 생겼지.”

의지할 형제자매가 없어서 외로움은 훨씬 더 했을 것이다. 유주도 외동으로 자라다 부모님마저 돌아가신 처지라, 어린 주하가 얼마나 공허하고 쓸쓸했을지 알 것 같았다.

“그 일 때문인지 지금도 어머니에게 깊은 정은 없어. 물질적인 수혜는 많이 누렸고 그에 대해서는 감사하지만, 흔히 모자간에 있을 만한 끈끈한 정이나 유대감… 그런 건 서로 없달까. 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이라 각인되니 아버지에게도 살갑게 대해지지 않았고. 툭하면 투기꾼이라 못마땅해하시니 거리는 더 벌어져 가고.”

씨발, 이런 얘기 누구에게도 한 적 없었는데. 강주하가 낮게 중얼거리며 앞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머리를 한 손으로 받쳤다. 갑자기 측은지심이 올라오며 그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안 돼, 마음 약해지면.

유주가 마음을 다잡고 있는 동안 주하가 다시 얼굴을 들고 그녀를 보았다.

“그래서 미국에서나 여기서나 아무도 믿지 않고 마음도 주지 않다가… 대학 입학식 때 널 처음 보고 반했지.”

“자, 잠깐. 입학식 때 날 봤다고? 학과도 완전히 다른데. 그리고 나 그날……”

“배탈로 쓰러져서 응급 의료실에 누워 있었잖아. 그때 너 업고 간 사람도 나였어.”

“뭐? 네가?”

그때 식비 아낀다고 편의점 일을 뛰다가, 전날 유통기한 지난 삼각 김밥 먹고 기어이 쓰러져서 난리도 아니었다. 다행히 막바지에 쓰러져서 입학식에 누를 끼치진 않았지만, 정혜 언니가 달려와 크게 혼나고 편의점 일도 그만두었다.

그때 의료담당 교직원은 체육학과 학생인지, 키 크고 어깨 떡 벌어진 남학생이 냅다 들쳐 업고 침상 위에 눕혀 주었다고 했었다. 그게 주하였을 줄은 전혀 몰랐는데 이렇게 갑자기 듣게 되다니.

“왜 지금까지 말 안 했어? 7년 전에도, 그때도.”

“7년 전에는 얘기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다음 날 미국에 가게 돼서. 네가 그 후로 계속 연락 피해서 단절돼버렸고. 연락 피한 건 충분히 이해해. 내가 생각해도 그때 그렇게 개소리를 해댔으니. 그냥 첫날 너 보고 반했고 교양과목도 겹쳐서 계속 지켜보는 동안 좋아하게 됐다고…… 솔직히 말하고 사귀자고 했으면 됐을걸. 어쨌든 아까 했던 얘기 계속할게.”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이렇게 제 내면을 하나씩 꺼내어 보여준 적은 없었다. 늘 거리낌 없이 욕망을 드러내고 사랑을 나눴지만 속내를 털어놓는 건 별개의 문제다.

“처음으로 내가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게 된 사람인데… 그렇게 연락이 끊어지고 갑자기 미국에 눌러앉게 돼서 많이 안타까웠어. 가끔 네 안부는 전해 듣고 있었지만, 내 쪽에서 다시 연락을 하는 건 망설여졌지. 네가 받아주지 않을까 겁도 났고. 그래서 귀국해서도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던 중, 네가 BK에 계약직으로 이력서를 넣은 거야.”

시종일관 진지하던 주하가 그때 살짝 웃었다.

“그때 운명이란 게 정말 있다는 걸 알았어.”

유주는 그의 엷은 미소 앞에 허물어지려는 제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주하가 찻잔을 감싸고 있던 제 손을 잡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서 자꾸 너한테 집착하게 됐나 봐. 집착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어딘가 멀리 가버릴까 봐 불안하고, 걱정돼.”

유주는 잡힌 손을 뺄 생각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주하는 전에, 분명 집착 자체에 대해 강경하게 부인했다. 자신은 누구에게도 휘둘리고 매달리거나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인 인격체라 주장해 그녀를 어이없게 했었다.

“나, 너한테 집착하는 거 맞는 것 같아.”

그런데 지금은 제 입으로, 스스로 집착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유주는 잠깐 용서할 뻔한 마음을 내려놓고 애써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까 같은 행동은 집착하고 관계없어. 공공장소에서 그러는 거… 정말 싫어.”

“미안해. 손만 잡고 있으려고 했는데 장난이 심했어.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야.”

유주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지자 그의 눈에도 안심하는 빛이 서렸다.

“네 온기가 있어야 안심이 돼.”

불안해, 네가 없으면. 주하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그가 조금은 이해되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마음 줄 곳 없이 자랐다면 분명히 내적 결핍의 골이 깊을 것이다.

잡지도, 잡히지도 않는 바람 같은 기운은 결국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주하는 냉랭하고 초연한 겉모습과는 별개로 늘 위태로워 보였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형성된 안정감이 늘 부재해 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안 그럴게. 그리고 유주야, 스스로 다스리려고 앞으로 나도 노력하겠지만……”

그가 그녀의 다른 손도 끌어당겨 부드럽게 쥐었다.

“너도 약속해줘.”

“뭘……?”

“말도 없이 훌쩍, 멀리 가버리지 않는다고.”

갑자기 유주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찾아 헤매는 다섯 살, 어린 남자아이의 우는 얼굴이 겹쳐 보였다. 함께 하는 동안 점점 극복될 수 있을까, 불안감이 일면서도 그와 멀어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괜찮을 거라 믿고 싶었다.

“약속해. 가더라도 말하고 갈게.”

“멀리 갈 일이 있긴 하다는 거야? 그 자체가 싫은데.”

“살면서 그런 일은 생길 수 있잖아. 너도 출장 자주 가고. 요즘은 아니지만.”

“약속 지켜.”

주하가 그녀의 한 손을 잡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애무하듯 다정하게 쓸었다.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미칠지 나도 모르니까.”

입술이 깃털처럼 손가락 안쪽에 닿았다. 그 감미로운 숨결에 유주는 살짝 몸을 떨었다. 단지 간지러운 숨 때문이었는지, 그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히 몰랐다.

나른한 행복감 속에서 기묘한 불안이 또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현실적이면서 현실적이지 않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초조함이 다시 엄습해왔다. 잠깐이라도 연락이 안 될 때 주하가 갖는 편집증적인 초조함과는 달랐다.

괜찮을 거야, 우리는.

유주는 제 손이 아가의 것이라고 되는 양 제 손을 보듬고 어루만지는 주하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것이라기엔 뼈대가 굵고, 남자의 것 치고는 너무 하얗고 고운 손가락들이다.

그래. 아직은 아닐지 몰라도, 언젠가는 사랑한다는 말도 주고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과연 끝까지 갈 수는 있을까? 그리고 끝이라면 어디까지? 어느 종착점까지?

* * *

11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 임직원 오후 회의가 끝나기 전 회의장은 조금 들뜬 분위기였다. 글로벌 자산 운용팀 김 이사가 회의 막바지에 갑자기 깜짝 이벤트처럼 청첩장을 선보여 다들 축하해주느라 술자리처럼 유쾌한 분위기였다.

“김 이사님 독신주의 표방하더니 결국 가시는군요. 다행히 오십 되시기 전에. 하아… 난 독신주의도 아닌데 왜 아직도 이러고 있어야 하나.”

비슷한 또래의 조 이사가 한숨을 내쉬자 다들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아니, 그렇게 누구 소개시켜 준달 때 다 마다하고는 무슨 소리야! 그럼 지금이라도 시간 내. 내가 알아볼 테니까.”

“아뇨, 이번 생은 그냥 이렇게 조용히 살다 가고 다음 생에서 딱 세 번만 결혼해보려고요. 아하하.”

“그럼 이혼을 두 번 해야 한단 소리잖아요. 에이, 그건 안 되죠.”

유주는 널찍한 회의장의 단상 너머, 파티션으로 가려진 세팅 룸에서 동기들과 회의의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 파티션 너머로 간간이 들려오는 이사와 본부장들의 대화 속에서도 주하의 음성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보나마나 그의 모습이 뇌리에 그려져서 웃음이 나왔다. 조용히 손가락 사이 끼운 펜만 돌리며, 듣는 둥 마는 둥 머릿속으로 업무 현황을 그려보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분주한 웅성거림을 뚫고 날아든 목소리가 유주의 귀를 사로잡았다.

“예? 결혼요?”

무례하지 않을 정도의 건조함이 음색에 배어 있다. 이사들 중 누군가가 자네는 결혼 언제쯤으로 생각하나, 사귀는 사람 있나 등등 물은 것 같았다. 유주는 저도 모르게 정리하던 손길을 늦추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사내연애를 극비로 해야 한다 주장한 건 그녀였으니 어느 정도는 대답이 예측 가능했다.

“강 본부장 만나는 사람 있잖아. 꽁꽁 숨겨두고 입 뻥긋 안 하니 어떤 여성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그 여성분과 언제 결혼할 건지, 계획은 있는지 궁금하단 말이야. 워낙 사생활 철통보안이라 그저 성별이 여자란 것밖에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아무리 우리 회사가 북미식 개인주의를 표방한다 해도 실제 알고 보면 미국은 더 오픈된 거 알지? 뻑하면 집에 초대하고 가정식 밥 먹이고 가족 다 소개해 주고.”

“글쎄요. 저는 비혼주의라서……”

프로젝터의 버튼을 조작하던 유주의 손이 멎었다.

뭐? 비혼주의? 그게 웬 말이야? 비혼주의나 독신주의나 그게 그거 아닌가? 에이, 아직 결혼까진 모르겠다는 거겠죠. 사귄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임직원들의 각개전투 속에서 주하의 음색이 명료하게 이어졌다.

“결혼이란 제도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요. 피곤하잖습니까. 안 맞아서 갈라서게 되면 절차나 과정도 복잡하고요.”

칼로 무 자르듯 단호한 그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어색한 정적을 깬 것은 호탕한 성격의 조 이사였다. 저도 이번 생은 홀몸으로 살다 가겠노라 선언했지만 막상 남의 일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에이, 그건 아니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나.”

그녀의 말을 시발점으로 맞아, 좀 더 시간 지나봐야 돼, 아직 젊은데 뭐, 30대 넘어서면 또 생각이 달라져, 김 이사도 철두철미한 결혼 회피론자였는데 제 짝 만나니까 저렇게 달라지는 것 봐, 이런저런 조언과 잔소리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강주하는 아까보다 더 싹둑 자르듯 명료하게 말했다.

“전 연애만 하는 게 편합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생각이 달라지진 않을 겁니다.”

유주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오도카니 서 있었다. 외부와 이어진 문이 열리며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어, 유주 씨. 안 나오고 뭐 해요? 다 끝났는데 이만 갑시다. 불금인데 빨리 퇴근 준비해야죠!”

“아, 네. 지금 갈게요.”

“괜찮아요? 갑자기 안색이 안 좋은데…… 아, 아까 마법 중이라더니 혹시 약 필요해요?”

“네, 생리통인가 봐요. 괜찮아질 거예요.”

억지로 웃어 보이느라 입 가장자리가 바르르 떨렸다. 비혼주의. 전혀 몰랐다. 전에 독신주의 아니라고 하지 않았었나.

부모님과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결혼 자체에 회의적이고 부정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저렇게 떳떳하게 소신을 밝힐 정도로, 비혼주의를 고수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갑자기 무거운 납덩이가 뱃속에 들어찬 것 같았다. 데스크로 돌아가 남은 업무에 집중하려 했지만 차트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사적인 일, 특히 연애 문제로 공적인 일에 지장을 받는 건 어리석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뭐가 됐든, 막상 제 일이 닥치면 말처럼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문자음이 울렸다. 예상되는 그 사람일 것 같아서 일부러 확인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퇴근까지 이제 30분 남아 있었다. 유주는 마음을 다잡고 업무를 마무리하는 데만 집중했다. 그사이 휴대폰의 진동은 몇 번 더 이어졌다. 퇴근 시간 5분 전에야 유주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집으로 와. 지금 그 주기니까 따뜻한 거 해 놔 달라 부탁해놨어.

집은 그의 청담동 아지트, 그녀가 얹혀사는 사거리 아파트에서 가까운 그 호화로운 펜트하우스를 뜻했다. 그리고 외부인을 제 영역에 들이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그가 까다롭게 엄선한 전문 가사도우미분이, 전골이나 탕을 여러 종류 끓여서 준비해놓고 지금쯤은 그녀처럼 퇴근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집 말고 밖에서 만나자. 할 얘기 있어.

-금요일인데? 집에서 얘기하면 되지.

유주는 망설이다 알았다고 답문을 보냈다. 어쩌면 그의 영역 안에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강주하는 그녀와 단둘이 있을 때 훨씬 솔직해졌다. 생리를 하고 있을 동안은 관계하지 않고 페팅과 자위만으로 끝났지만, 오늘은 아예 침실에 들어가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 * *

단지 뒤통수를 맞은 기분, 그런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겨우 석 달 사귀어놓고 그럼 결혼까지 바랐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하지만 연인 중 한쪽은 비혼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결혼 자체를 바란다면 관계의 균형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럼 너는 강주하와의 결혼을 바라니? 그런 거야?

유주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현실적으로 서른 중반전에는 결혼해 아이도 낳기를 원하지만 결혼의 상대를 구체화 시켜 본 적은 없었다. 주하와는 고작 석 달이다. 첫 연애고, 돌아보면 첫사랑까진 아니라도 처음 이성으로서 매력을 느낀 사람이긴 하지만 결혼의 청사진을 그려보진 않았다.

결혼이 곧 장밋빛 미래일 거라 착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있다면 이렇게 혼자인 것보다는 행복할 때가 훨씬 많을 거란 확신은 있었다.

부모님과 할머니까지 모두 돌아가시고 혈혈단신 남겨진 이후로, 그녀는 늘 외롭고 추웠다. 고사장이나 정혜 자매들처럼 좋은 이들의 존재는 너무도 감사했지만, 바닥 깊은 공허함은 늘 그 자리에 있어 왔다.

“나는 독신주의냐고 묻는 말에 아니라고 했지, 비혼주의가 아니라고 거짓말하진 않았어.”

잘못 들은 걸까. 거실 맞은편 소파에 앉은 그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울려오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비혼주의건 독신주의건 연인으로 만날 때부터, 아니 만나기 전부터 미리 밝히는 게 그녀가 생각하는 상식이었다.

“결국 연애는 하지만, 결혼은 절대 안 한다는 생각이란 거지?”

유주는 혼란스러운 생각의 흐름 속에서 최대한 핵심만 짚으려고 애썼다. 비혼주의가 절대 결혼을 안 하겠다는 선언은 아니다. 비혼주의자였던 사람이 결혼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다음 달 첫째 주 결혼을 앞둔 김 이사님처럼.

하지만 김 이사님도 지금 결혼할 상대를 만나는 동안에는, 언젠가 그녀와 결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무의식적으로라도 비혼에의 신조가 조금씩 무너지지 않았을까. 지금도 확고한 강주하와는 달리.

“되도록 안 하고 싶어. 다 들었다니까 솔직히 말하겠지만… 아무래도 그런 가정에서 자란 영향이 크겠지. 결혼이란 제도에 구속되고 싶지 않아. 서구에선 동거만 하는 커플이 훨씬 많아. 상호 합의하에 아이도 낳고, 죽을 때까지 사실혼 관계로 살기도 하지만.”

“그럼 아이도… 원하지 않는 거야?”

“지금으로선. 어릴 때 어머니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넌 결혼해도 자식은 낳지 마라, 징글징글하다, 자식만 없었어도 내가 진즉 깨끗이 갈라설 수 있는데, 수없이 한탄하신 말씀에 세뇌가 됐나 봐.”

주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 말이 너무 슬프고 속상해서, 어릴 때는 나름 속 썩이지 않고 착한 자식이 되려고 무던히도 애썼어. 하지만 그게 그런 문제가 아니었더라고. 어머니에겐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서 자식이 있다는 존재 자체가 신경 쓰이고,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였던 거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부모가 될까 봐 두려워. 아이에게 못할 짓이잖아.”

그의 말을 듣는 내내 위가 아릿하게 저려 왔다. 생리통에 빈속이라 더 쓰린 건지, 위액이 역류하는 느낌에 구토감이 일었다. 배를 감싼 유주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처음부터 달랐던 거구나, 우리가 원하는 건.

그녀는 사랑을 했고 앞으로도 사랑하길 원했지만, 강주하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제가 섹스하고 싶은 여자와 원할 때마다 열렬히 -그의 말버릇대로 하자면- 좆질만 했고 앞으로도 좆질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나마 그가 섹스하길 원하는 유일무이한 여자란 게 조금은 위안이 될까,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의미를 부여해보려 했다. 하지만 별로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런 욕정의 상대는 언제 어느 때고 새로이 바뀔 수 있다.

“난 모르겠어.”

유주는 그의 시선을 비껴난 채 테이블 너머 그의 무릎만 보았다.

“나는 결혼하고 싶어. 언젠가는. 아이도 낳고.”

“유주야.”

“오해하지 마. 결혼하자는 그런 말이 아니라…… 나는 너와는 달리 비혼주의자가 아니란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니까.”

“꼭 결혼이란 인위적인 제도가 종착점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 솔직히 난 굳이 비혼주의를 고집할 필요 없이 많은 걸 가졌어. 결혼을 안 하는 제일 큰 이유가 요즘은 경제적인 문제라고 하니까. 하지만 돈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도 않아.”

철저히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를 신봉하는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때는 한 가지 경우뿐이다. 돈 이외의 다른 가치관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최소한의 왕래만 한대도 시댁과의 관계라든가… 결국은 머리 아플 거고. 계획하에 아이를 가지고 낳고 육아하고 아이의 미래를 늘 고민하고, 이런 것에 일일이 감정소모하고 싶지 않아.”

감정소모 하고 싶지 않아. 7년 전에 분명히 똑같은 목소리로 들은 적이 있었다. 나랑 사귀면 물질적인 어려움 전혀 없이 해줄게. 대신 감정소모 시키지 말고 집착하지 말며 내가 하라는 대로 최대한 따라줘.

“결혼이란 제도와 아이에게 쓸 모든 것- 돈과 시간, 에너지와 감정 모두… 나는 나와 내 여자에게만 집중하고 싶어. 너랑 나한테만.”

유주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자 말을 잇는 그의 어조에 초조함이 어렸다.

“그게 잘못된 거라 생각하진 않아. 모두가 삶의 가치가 다른 법이니까.”

“맞아. 잘못되진 않았어. 잘잘못 자체를 논할 수 없는 문제야. 나와는 다를 뿐.”

그녀와는 다르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안 바뀔 것 같아?”

유주의 물음에 그는 혀로 마른 입술을 적시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최근의 강주하는 어딘가 좀 변해 있었다. 사랑을 나눌 때 흥분한 나머지 혼잣말처럼 욕설을 뱉는다거나, 다소 품위 없는 음란한 표현을 쓰는 건 변함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가끔씩 장난감처럼 다루거나, 제멋대로 독선적인 언행을 보이던 초반의 경박함은 현저히 옅어지고 있었다.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 조금씩 무게가 실린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변함없이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내며, 스스로 세운 소신은 절대로 꺾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반드시 찍어 눌러야 직성이 풀리는 공격적인 성향의 소유자였다.

강주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 이만… 가볼게. 속이 안 좋아.”

“뭐? 저녁도 안 먹었는데 어딜 가.”

속이 안 좋다는 말에 주하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보지 않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정말로 속이 요동치며 구토감이 일었다. 여기 더 있다가는 정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번 주말은 정혜 언니한테 좀 가 있을게. 택시만 좀 불러줘……”

주하는 미간을 좁히고 그녀를 내려다보다 결국 고집을 꺾었다. 예전 같으면 절대 못 가게 붙잡고 강제로 눌러 앉혔을 것이다.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키링을 찾았다.

“데려다줄게. 어디야?”

“아니…… 택시 타고 갈게. 괜찮아.”

“너 택시 타는 거 싫어. 너 하자는 대로 다 하고 있으니까 이거 하나만 내 말대로 하자. 응?”

그가 본성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말끝에 이를 악물었다.

잠시 후 유주는 주하가 이끄는 대로 주차장의 세단에 올라타 정혜 언니의 주소지를 보여주었다. 그가 시동을 거는 동시에, 그녀는 정혜에게 톡을 보내 갑자기 방문해도 괜찮은지 물었다. 그녀는 시원스레 금방 답변을 보내왔다.

-너 무슨 일 있구나. 주말은 항상 애인이랑 있더니. 일단 와서 얘기해. 마침 고사장도 와 있어. 정주도 신랑 출장 보내고 곧 올 거고.

차가 어두운 차도로 들어설 때쯤, 주하가 운전대에 손을 올린 채 운을 뗐다.

“그게 그렇게 충격일 줄은 몰랐어. 오해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너랑 헤어질 생각 추호도 없어. 결혼이란 제도에 매이기 싫을 뿐이야, 정말로.”

“나랑 헤어질 생각 없으면……?”

서로 적당히 식을 때까지 몇 년이고 쭉 만나다가 자연스럽게 제 갈 길 가자는 말일까. 물론 연애의 종말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랑하는 동안 최대한의 행복한 과정과 더 행복한 결말을 바라며 그저 나아가는 것, 그리고 처음부터 끝을 정해두고 기약 없는 만남을 유지하는 건 다르다. 후자는 언젠가 고사장의 표현대로, 한 사람과의 원나잇 스탠드가 수백 번, 수천 번 합쳐진 헌드레드 나잇 스탠드, 싸우전드 나잇 스탠드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주하 네 쪽에서 나랑 헤어질 생각 없으면… 난 끝까지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거야? 언젠가 네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헤어질 마음 안 들 거야. 절대로. 영원히.”

“절대로, 영원히. 이런 단어는 쓰는 거 아냐. 특히 연애에는.”

“서유주.”

끼익, 스키드 마크를 그리듯 요란한 바퀴 소리에 이어 차가 갓길에서 멈췄다.

“왜 계속 어깃장을 놔. 내가 아니라는데.”

유주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얼굴을 볼 필요도 없었다. 잔뜩 악문 잇새 사이로 흐르는 음색에 억눌린 화가 짙게 서려 있다. 강주하는 역시 강주하였다. 사람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 법이다. 주하는 폭발 직전의 맹수처럼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결혼이란 제도 자체에 그렇게까지 학을 떼지 않는다면, 당연히 너랑 결혼할 거야. 너 외에 다른 여자랑은 손끝 하나 스치는 것도 싫어. 네가 더 잘 알잖아.”

유주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한껏 비웃어주고 싶었다. 결혼을 한다면 백 퍼센트 너랑 할 거야. 그 말 한마디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터질 듯 안도감이 일다니.

하지만 결국은 의미 없는 말이다. 그는 어차피 결혼 자체를 하지 않을 테니까. 유주는 그제야 깨달았다. 갑자기 알게 된 그 깨달음을 옆자리의 개자식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강주하. 주하야. 어떡하니. 겨우 넉 달도 안 됐는데 나는 네가 너무 좋아져 버렸나 봐. 아니면 네가 가진 풍족함을 조금은 맛봤기 때문일까? 그 호화롭고 달콤한 돈의 힘이 좋아서 그걸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니다.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신세지고 있는 재건축 아파트보다 더 낡고 좁은 집이라도, 강남이 아니라 다른 어디서라도, 주하 한 사람만 있으면 족할 것 같았다. 어느새 당연해져 버린 호텔의 스위트룸, 화려한 레스토랑 퀴진 아니라도 좋은데. 그런 건 사실 아무 부질없는데.

“회사도 힘들면 그만두고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 너 이쪽 일 적성에 안 맞는 거 진즉 알고 있었으니까. 집도 옮겨줄게. 서점이든 북 카페든 하나 차려서 하라는 말 농담 아니었으니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주하가 속사포처럼 뱉어내고 다시 정면을 보았다. 까만 음영을 드리우며 앞서가는 차들이 조그만 장난감 세트처럼 보였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어. 너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아? 최대한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해서 최대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거. 결혼은 하는 즉시 현실이야. 한번 사는 인생인데 현실의 올가미 속에 갇혀 아등바등 허우적댈 필요 없잖아.”

그가 다시 시동을 걸자 유주가 머리를 좌석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슬아슬 심지만 타오르던 도화선에 불을 확 붙이는 선언을 내뱉었다.

“네 말 충분히 알겠어.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고 주하 네 쪽에서 먼저 헤어질 마음 없다고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그럼 내가 정말 결혼이란 걸 하고 싶어질 때 이 관계가 끝나겠네. 그렇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랑 만나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과 결혼이란 걸 하고 싶어질 때라니?”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유주는 입을 다물었다. 이 상태로 운전대를 잡게 했다간 큰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아냐. 잘못 말했어. 나 배 아파. 빨리 가자…… 일단 생각할 시간을 줘.”

“무슨 생각?”

배가 아프다는 말에 주하는 차를 출발시키면서도 유주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헤어질 생각, 다른 남자와의 결혼 생각, 그런 걸 입에 다시 올렸다간 길 위에서 끝없는 싸움이 이어질 것 같았다.

“네 말 알겠어. 알겠고, 나도 그 생각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생각이란 거야.”

그제야 주하는 속력을 높였다. 유주는 입술을 깨물고 위의 통증을 견뎠다. 아랫배의 생리통과는 별개로 속이 쓰렸다. 몸속에서 누가 위장 쪽을 쿡쿡 쑤시고 찔러대는 것 같았다. 빨리 정혜 언니 집에 도착해 뭐든 따뜻한 걸 들이붓고 싶었다.

강주하. 너 나 정말로 좋아하긴 하니. 사랑하긴 해?

차가 정혜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할 때까지 결국 묻지 못했다. 유주는 그가 더 뭐라 하기 전에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주하도 재빨리 따라 내려 유주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일 전화할게. 응?”

“조심해서 가. 주말 동안은 연락하지 말자. 생각 좀 정리하게.”

“답문은 보내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유주는 간신히 그를 뿌리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닫힘 버튼을 눌렀다. 마침내 그와 멀어지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터졌다.

개자식. 끝까지 이기적인 놈. 7년 전이나 지금이나 저밖에 모르고 제 욕구밖에 모르는 자기애 주의자.

당장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헤어지자 할까 봐 전전긍긍 안달 나며 매달리는 건 강주하 쪽이다. 그런데도 마음이 아팠다. 연인이 어느 날 나 비혼주의야, 커밍아웃을 하는 건 너랑 결혼하고 싶을 만큼 널 사랑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 * *

“맞아. 그 의미야.”

“정주야! 음정주!”

“아, 목구멍에 기차 화통을 장착했나. 고막 떨어지는 줄 알았네.”

정주 언니의 싸늘한 지적에 고사장이 눈을 부라렸다. 너 그렇게 불편한 진실을 말하면 어떡해, 유주의 눈치를 보면서 나무라는 시선이다. 정주는 아랑곳 않고 구석에 웅크리고 누운 유주에게 매실액을 가져다주며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완벽한 거 알겠는데 아무리 다른 걸 다 갖추면 뭐하니. 결혼이란 지뢰 절대 안 밟겠다, 미리 탄탄한 방공호 파놓고 한 발도 안 딛으려는 거잖아. 내 보기엔 별로야. 아주 약아빠진 쓰… 쓰읍, 약은 남자야.”

쓰레기라 말하려던 걸 재빨리 수습한 것 같았다. 정혜가 말 함부로 하지 말란 의미로 정주를 힐끔 노려보았다. 정혜와 고사장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정주와는 다른 의견을 펼치기 시작했다.

“비혼주의는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야. 결혼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는 거지.”

“맞아, 누나 말이 정답이야. 사귀다 보면 마음 가고, 결국 결혼하게 되던데 뭐. 표현만 바뀌었지 잘난 독신주의자들 중 끝까지 독신 고수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어?”

“저기요, 두 분 말씀도 맞긴 한데요. 문제는 그 K씨가 제 입으로 자기는 안 바뀔 거라 그랬다는 게 포인트 아니야?”

정주가 또다시 날카롭게 허를 찔렀다. 캐나다에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 정연보다 혀가 더 독하지만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입바르고 악의 없는 악역으로 분위기를 은근히 긴장시켰다. 정혜가 다시 동생에게 도끼눈을 치떴다.

“지금은 그래도 나중에 바뀔 수 있잖아, 나중에! 얘가 사귄 지 일 년이 됐니, 이 년이 됐니? 4년도 아니고 아직 넉 달밖에 안 됐잖아.”

“유주야. 그냥 끝내라.”

“음정주! 너 진짜……”

“야아,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지는 결혼했다고 말이지!”

“나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거 아니야. 내 말 끝까지 들어.”

정주는 소주잔을 단번에 털어놓고도 흔들림 하나 없었다.

“유주가 그저 그런 골드 디거 속물이면 나도 헤어지라고 안 해. K씨가 하라는 대로, 당장 사표 던지고 집 명의도 하나 받고 북 카페 차려서 적당히 단물 다 빼먹고 챙길 거 다 챙기고 간 보면서 버티라고 하지. 막말로 그런 로또가 어딨어? 그런데 유주가 어디 그럴 수 있는 애야? 그 정도로 영리하지 못해.”

“하긴 우리 유주가 심하게 미련 곰탱이긴 하지……”

고사장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주는 똑 부러지게 마무리를 지었다.

“그래서 안 돼. 더 끌다간 유주만 상처받아. 저쪽은 즐길 거 실컷 다 즐기고 손해 볼 거 하나 없고.”

“나는 생각이 좀 달라.”

잠시 조용히 있던 정혜가 입을 열었다. 유주는 생리통에 끙끙 앓으며 벽보고 누워 있으면서도 귀를 바짝 기울이고 있었다.

“아까 말한 대로 아직 넉 달밖에 안 됐어. K씨에겐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무슨 시간? 제 마음 깨달을 시간?”

정주의 회의적인 물음에 고사장도 맞장구쳤다.

“나도 정혜누나 말에 동의해. 전에 말해줬잖아. 유주 데리러 가게에 왔는데, 연락 안 된다고 발 동동 구르던 티 하나도 안 내고도 얼마나 티가 나던지. 기가 엄청 억센 육식과 수컷인데 유주를 볼 때는 눈에서 꿀이 그냥 뚝뚝…… 엄청 좋아하더라고. 보는 내가 다 설렜는데.”

“그렇게 좋은데 좋지만 결혼은 싫다?”

정주가 또 초치는 발언으로 분위기를 깨버렸다. 고사장은 급기야 한손을 들어 쥐어박는 시늉을 가했다.

“결혼이란 제도 자체가 싫은 거라잖아, 음정주!”

“유주는 서운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처럼 나쁜 쪽에 치중된 의견도 필요해.”

유주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힘없이 빗질해 내렸다.

“서운하게 안 들어, 정주언니. 나 생각해서 하는 말인 거 알아.”

“최선은 하나인 것 같다.”

정혜가 연장자답게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나도 그 개조……끼. 아, 아니.”

정혜는 알콜로 많이 풀려버린 혀를 다시 똑바로 놀렸다. 유일하게 말짱한 정신의 유주만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분명히 개좆 같은 새끼, 비슷하게 중얼거린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너의 그 강 본부장이란 인간, 솔직히 얄밉고 정 안 가. 그래도 유주가 그 개… 본부장을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정혜는 잠깐 틈을 두고 말을 이었다.

“기한을 정해서 조금만 더 만나 보는 게 어때? 예를 들어…… 석 달 더. 혹은 내년 봄까지. 아니면 여름까지. 결국 네가 결정해야 하겠지만.”

“그러지 말고 아예 잠깐 헤어져 보면 좋을 텐데. 제일 골반 시릴 12월 한 달만이라도.”

정주가 극약처방을 내놓자, 은은하게 깔린 음악에 한껏 취해 있던 고사장이 고개를 퍼뜩 들며 박수까지 쳐댔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럼 그 페로몬 넘치는 본부장도 유주의 소중함을 사무치게 깨닫고 다시 찾아와 막 프러포즈하고 그러지 않을까?”

“아니, 일방적으로 연락도 없이 사라지는 거야. 그럼 또 모르지, 유주 찾아 헤매면서 소중함을 더 뼛속 깊이 절절하게 느끼지.”

정혜가 정주와 고사장의 맞장단에 확 찬물을 끼얹었다.

“그건 아니지. 연애하면서 일부러 떠보고 시험하고 그건 옳지 않아. 정주 너는 그렇게 수없이 연애해보고 결혼까지 했으면서 참 이상한 거 가르친다.”

“그건 안돼요.”

유주가 힘없이 앉아 있다 고개를 들었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지만… 주하가 어릴 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가끔씩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 적이 있는데…… 그 기억 때문에 그런 거 굉장히 싫어해요.”

“어머, 그런 트라우마가 있었어? 그렇게 바늘로 찌르면 빨간 피가 막 나올 듯한 얼굴로…… 세상에, 세상에!”

“고사장님. 파란 피, 초록색 피라고 해야 문맥에 맞지 않아? 피는 원래 빨갛잖아. 아무튼 그래서? 그런 건 또 무서워서 벌벌 떤다든? 말없이 연락 두절되고 잠수타고 사라지는 거…… 아하, 그래서 연락이 조금만 안 돼도 아주 부들부들 널 잡았구나. 하하하학.”

정주가 아주 대단한 약점을 잡은 것 마냥 교활하게 웃었다. 그녀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잘됐어! 그러면 더더욱 사라져 버려야지. 유주야, 너 우리 제주도 시댁 가 있을래? 너 제주도 한 번도 못 가봤고 언젠가 제주도 한 달 살이 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응? 아, 그래도 그건……”

제주도라니. 아무래도 올 겨울엔 제주도와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소정 선배가 리스트에 올려놓은 그 북 페어 행사도 제주도였는데.

“이 미친 것아, 네 시댁에다 유주를 몰래 숨겨놓고 그 개본부장이 울며 찾아 헤매길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 뭐야!”

정혜가 찰싹, 소리 나게 동생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결국 결론은 나지 않은 채 다들 하나씩 나가쓰러지고 곯아떨어졌다. 그래도 이렇게 제 일처럼 그녀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너무 고마웠다. 쓸쓸한 가운데서도,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오피스텔 실내에는 거친 숨소리, 코 고는 소리만 가득하게 되었다. 유주는 술상을 대강 정리하고 정주 언니 옆에 누운 뒤에야 휴대폰 생각이 났다.

그녀는 황급히 가방 안에 방치해 뒀던 휴대폰을 꺼냈다. 주하는 그녀의 이런 버릇을 질색하고 수없이 지적했지만, 아르바이트할 때부터의 습관이라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평소처럼 수십 통의 문자나 부재중 통화가 와 있진 않았다. 도저히 강주하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달랑 문자 하나만 와 있었다.

-잘 자. 속도 안 좋은데 술 마시지 말고.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가뜩이나 속도 안 좋은데 저 때문에 퍼마실 거라 생각한 건가.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그 정도로 괴롭진 않았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싶었다.

* * *

다음날 정오쯤 문자가 한번 더 왔다. 강주하는 오늘 급한 업무상 미국으로 일주일간 출장을 간다고 전해왔다.

-공항 가는 길이야. 거기선 시차 때문에 어려울 수 있으니까 지금 잠깐만 통화하면 안 돼?

유주는 한참 뒤 문자를 보냈다. 통화하고 싶은 마음과 통화하고 싶지 않은 내면의 투쟁 끝에 결국 후자가 이겼다.

-잘 다녀와. 일주일 뒤 얘기해.

유주는 아침 겸 점심을 대강 차려 놓고 언니들과 고사장을 깨웠다. 정혜가 하루 더 있다가 일요일에 가라고 붙잡았지만 밀린 집안일 핑계를 대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가 않았다.

집이라고 해도 돈 한 푼 안 내고 얹혀사는 남의 집일 뿐이다. 강주하의 집. 헤어짐이 예정된 연인이 소유주인 집.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 주장하지만, 결혼만 없고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 맹세하고 있지만 그게 가능한 말일까. 동서고금 존재했던 수많은 정부와 첩, 지금도 음지에서 존재하고 있을 내연녀들이 늘 듣는 말. 알면서도 또 속아버리는 말.

와이프와 이혼할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집에 있는 그 여자는 그냥 서류상일 뿐이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유일한 여자는 너뿐이야. 맹세해.

그 말 한마디에 희망고문을 당하며 상처 받는 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음지의 여자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다. 한 가지 차이라면, 현재는 두 사람의 관계가 떳떳하다는 사실뿐이다. 그들 사이에는 본부인이란 제3자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고호경은 방구석에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방문 너머 현관에서 유주가 신발 신는 소리, 정혜가 붙잡는 소리가 멀찌감치 침대 위에 널브러진 정주의 콧김 소리를 뚫고 전해져왔다.

말해줄까, 말까.

고사장은 쉽게 일어나지지 않는 상체를 반 바퀴 굴리며 고심했다. 어제 새벽 2시경, 곯아떨어지기 전까지 창문에 기대 정주의 남편 험담과 넋두리를 들어주다 바깥을 바라봤을 때 그는 목격했다. 3층 높이에선 길 건너 심야의 보행자와 주차된 차들이 손 뻗으면 닿을 듯 또렷하게 잘 보였다.

블라인드 틈새로 때깔 고운 벤틀리가 서 있었다. 그리고 차문에 기대서서 누군가 담배를 태우는 중이다. 그 오만하고 당당한 실루엣은 본인이 차주임을 은연중에 명백히 드러내고 있었다.

차와 차주 둘 다, 얼마 전 고사장이 직접 목격한 바 있었다. 특히 차주는 바로 눈앞에서 마주 보고 말을 나누기도 했었다.

아무리 술 때문에 눈과 의식 다 흐려졌대도, 절대 다른 이로 착각할 수 없는 타입이었다. 남자는 시종일관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 잘못한 사람처럼 고사장의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블라인드로 가려져 그쪽에서는 여기를 볼 수 없을 텐데도 시선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진 탓이다.

뭐야, 저 페로몬 덩어리…… 유주 데려다주고 간 거 아니었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저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거야?

유주야, 너 남친한테 여기서 자고 간다 말 안 했어? 저기 밖에…… 입을 떼려는 순간, 뒤통수가 푹신한 바닥에 푹 잠겨 들었다.

에고, 우리 고사장도 이제 늙었네? 맛이 갔구나. 이불 덮어줘라. 우리도 이제 그만 자자. 늙었는데 몸 생각도 해야지.

정혜, 정주 자매들의 혀 꼬부라진 소리를 꿈결처럼 들으며 그의 눈도 스르르 감겨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고 창밖을 봤을 때 벤틀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래도 말을 해 줘야겠지? 끙차, 일어나려는 순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바닥에 다시 쓰러지듯 누웠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허리가 너무 뻐근해서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에이, 모르겠다. 둘이 알아서 하겠지. 암만 봐도 그 남자가 을인데 잘 되겠지, 뭐. 유주가 진짜 부러울 뿐이다.

그는 다시 곯아떨어져 정주가 발로 차며 입안에 술국을 들이부을 때까지 정신없이 자고 또 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