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오렌티 비혼주의 금지법안-7화 (7/8)

7화: 시거렛 애프터 섹스

12월의 첫 금요일이 오기까지 휴대폰은 평화로울 만큼 조용했다. 일주일간, 그는 연락이 없었다. 강주하가 일상에 없었던 넉 달 전으로 되돌아간 착각마저 들었다.

평소 같았다면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걱정도 하고 왜 문자도 없는지 신경이 쓰였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업무 출장 중인 임직원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다면 회사에 진즉 알려졌을 것이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감감무소식인지는 몰라도 유주에겐 의미 있는 일주일이었다. 조용히 차분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다.

점심시간에 수지에게서 귀여운 문자가 날아왔다.

-쌤, 저 어제 한국 왔어요. 근처에 있는데 저녁에 저랑 놀아주시면 안 돼요? 불금이라 약속 있겠죠? 언니 너무 보고 싶은데!

쌤이라고 했다가 언니라고 했다가, 엉엉 울다가 히히 웃다가, 정신없는 이모티콘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6시 30분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어.

-네, 역시 언니밖에 없어요. 으허어엉엉엉. 감사해요! 저 진짜 쌤이랑 얘기할 거 많아요.

사실 고마운 건 그녀 쪽이다. 7년 전부터 입주 가정교사로 함께 살았던 인연을 이렇게 쭉 이어가 주니, 고맙고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애 고아, 혈혈단신 신세인 그녀로서는 정혜자매들과 수지, 고 사장 같은 인연이 제2의 가족만큼이나 소중했다.

얘기할 게 많다니 역시 그 문제일까? 그러고 보니 미국은 왔다 가기엔 겨울방학이 너무 짧은데. 설마 부모님 몰래 한국에 들어온 건 아니겠지.

* * *

유주의 기우는 맞아떨어졌다. 수지는 그녀를 보자마자 이산가족 상봉하듯 와락 안고 울먹였다. 둘은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이동해 다섯 달 만에 회포를 나눴다. 수지는 최근 남자 친구랑도 결국 갈라섰다며 짧았던 연애사를 한참 늘어놓았다.

“그나저나 언니는 진짜 무슨 좋은 일 있는 것 같은데? 원래도 예뻤지만 미모랑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요. 반짝반짝 빛난다고 해야 되나? 진짜 연애하는 거 아니에요?”

“내 얘기로 방향 돌리지 말고, 빨리 털어놔 봐. 정말 부모님 몰래 들어온 거 아니지?”

유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지를 재촉해댔다. 제 연애사는 아직 수지에게 말한 적이 없었고 지금은 더더욱 언급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되어 있었다. 수지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사실은 저 휴학계 내고 와서 어제는 친구 집에서 잤어요. 엄마, 아빠한텐 아직 연락 안 했는데 해봤자 결과는 뻔하니까요……”

수지는 5개월 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부모님과의 갈등이 현재 어떤 상황까지 이르렀는지 두서없이 털어놓았다. 유주는 수지의 말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들어주었다. 그러나 결국은 타인이기에 그녀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그래서 소속사에서는 뭐라고 해? 네가 미성년자는 아니니까 독단적으로 계약서에 사인해도 법적인 문제는 없겠지만.”

“부모님이 인연 끊어버린다 하셨다니까 대표님도 좀 심각하게 생각하세요. 도의적인 게 있으니까…… 부모님께 대신 연락해서 설득해준다고 하시는데 언니도 알잖아요, 우리 부모님. 딴따라 광대라고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편견이 심하고 완고하신지. 쇼 비즈니스 자체가 돈에 혈안이 된 사행성인지 뭔지 사기성의 화신이라 주장하시고. 그래도 엄마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받아들이실 수 있지만…… 아빠는 절대 설득 안 되실 거예요.”

유주는 한숨만 푹 쉬었다. 졸업 때까지 4년간 한 지붕 아래서 지냈기에, 수지의 부모님에 대해 알 만큼은 알아서 부정할 수가 없었다.

수지의 부모님은 집안이나 학벌, 빈부의 격차보다는 사람 자체를 우선시하는 예의 바르고 합리적인 분들이셨다. 높은 교양과 품위를 중시하는 집안 분위기처럼, 유주에게도 피고용인 대하듯 하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부담스러울 만큼 과분하지도 않고, 서운함도 느끼지 않게끔 늘 적당한 선을 지키며 친절하게 대해주신 덕분에 유주도 마음 편한 4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럼 어떡할 거니. 친구 집에서 계속 신세 질 수는 없잖아.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에는 소속사 지원도 못 받고. 다른 친척 댁에 간다 해도 부모님께 바로 연락이 갈 거고 폐가 될 텐데.”

순간, 방이 세 개나 남아도는 제 공간이 떠올랐지만 그 생각은 재빨리 뇌리에서 지웠다. 하다못해 전세 보증금이라도 줬다면 모를까 그건 안 될 말이다.

“사실 미국에 삼촌이 출장으로 와 있어서 어제 비행기로 같이 왔거든요. 휴학계 낸 건 부모님도 알고 있다 거짓말하고…… 삼촌 집에 잠깐 얹혀 있으려고 솔직히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결국 말 못하고 집에 가는 척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신세는커녕 아빠한테 직빵으로 연락할 거 같아서.”

“저번 7월에도 같이 왔다는 그 삼촌분 말이야?”

“네. 삼촌은 늘 일등석만 타서 슬쩍 얹혀오면 엄청 편하거든요, 흐흐. 엄청 부자예요! 아마 아빠 엄마 전 재산 합친 것보다 많을걸요. 집도 혼자 살면서 엄청 넓고.”

“그래도 번번이 같이 와주시는 거 보면 너 예뻐하시는 것 같은데, 그 정도 여유도 있으시면…… 삼촌한테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해 보는 게 어때? 혼자 사시면 며칠만이라도 집에 좀……”

“절대 제 편들어 줄 사람 아녜요, 삼촌. 돈은 후하게 쓰고 일등석은 같이 태워줘서 오긴 하는데, 예뻐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엄청 냉정하거든요. 찌르면 피가 나오긴 할 텐데 철철 흘러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타입. 얼굴은 진짜 잘생겼는데…… 아, 사진 보여줄까요?”

수지는 사진을 보여주려다 아, 맞다 무릎을 쳤다.

“맞다. 어제 공항에서 떨어뜨려 액정 수리하느라, 이거 임시폰이에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아무튼 삼촌은 진짜 멋있긴 한데 좀 무서워요. 예전엔 깡패 조직에도 있었다는데 아무튼 무섭고 여자한텐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으휴……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진짜 asshole(나쁜 녀석)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어른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아니에요, 삼촌 진짜 나쁜 남자예요. 삼촌 집에 얹혀사는 거 아예 씨도 안 먹힐 이유가 더 있긴 한데, 삼촌 애인이 집에도 자주 와 있나 봐요. 삼촌이 낙하산으로 자기 회사에도 취직시켰다는데 웃긴 건! 삼촌은 그 여자랑 결혼 생각 전혀 없대요.”

“그런 얘길 조카인 너한테도 했다고?”

“아뇨. 삼촌이 며칠 전 미국에 와 있을 때 이모부한테 그랬어요. 저 학교 때문에 이모 집이랑 기숙사 왔다 갔다 하잖아요. 삼촌이랑 이모부가 원래 대학 선후배라 친한데 둘이 담배 피면서 하는 얘기 엿들었어요.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지하실에서 몰래 춤 연습하다가 백야드에서 말소리가 들려서요.”

수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오 마이 갓! 남자들이 얼마나 속 시커먼지 아냐, 조심해라, 이모랑 엄마가 그렇게 남자 조심하라고 잔소리할 때는 몰랐는데 삼촌부터가 진짜 오 마이 갓인 거 있죠. 이모부가 지금 사귀는 여자 있지 않냐 했더니 삼촌이 결혼 생각은 없대요. 비혼주의라나, 뭐라나.”

유주는 저도 모르게 디저트를 떠올리던 스푼을 멈췄다. 갑자기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너 정도면 내로라하는 최고의 혼담들이 들어올 텐데. 한국은 아직도 그런 거 많이 하니까. 그럼 그건 어떡할 거냐니까 이러는 거 있죠. 뭐라고 실컷 얘기하더니 나중에는, 결혼 자체는 싫지만 뭐라 뭐라 하더니 지금 즐길 만큼 실컷 즐기고 고려해야지. 뭐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진짜 그때만은 오 마이 갓, 퍼스트 클래스고 뭐고 학을 뗐다니까요.”

유주는 손에 들고 있던 스푼을 아예 내려놓았다. 뇌리 한구석으로 밀어두었던 강주하가 갑자기 떠올랐다.

“즐기는 건 따로 하고 결혼은 제 야망을 위해서 따로 하고! 너무 못됐어요. 지금 만난다는 그 여자가 불쌍해요!”

“그래, 좀 그렇긴 하다. 그런데 일단은 네 문제로 다시 돌아가자.”

유주는 디저트 접시를 밀어 놓고 다시 수지의 주의를 제 목전에 닥친 문제로 환기시켰다. 알지도 못하는 남녀지만 자꾸 감정이입이 되려는 것 같아서 기분이 편치 않았다.

“사실 우리 집에 와 있으라 하고 싶은데…… 내 집이 아니고 사정이 좀 있어서.”

“이해해요, 언니. 싱글용에 둘이 있으면 언니도 불편하고 저도 그래요, 사실. 아니면 제가 먼저 신세 좀 지겠다고 뻔뻔하게 졸랐겠죠.”

유주가 독신자용 원룸에 살고 있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녀 형편에, 아무리 재건축을 앞뒀다지만 방 네 개짜리 청담동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 하면 수지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괜찮아요! 친구 오빠가 군대 가서 방 비어 있는데 친구 엄마가 한 달간은 집안일 도우면서 있어도 된다고 허락해주셨어요. 어차피 내일이면 이모도 나 멋대로 휴학해버려서 기숙사 퇴소하고 여기로 튄 거 알게 되실 거고…… 그럼 엄마에게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니까 소속사 출퇴근하면서 시간 좀 벌어보려고요.”

“돈은 있어? 내 처지에 부잣집 딸한테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비상금으로 꿍쳐둔 거 있고, 공항에서 삼촌한테 많이 얻어 냈어요. 히히. 아빠 카드는 곧 정지되겠지만.”

“다행이다. 나쁜 남자지만 조카에겐 좋은 분이네. 힘도 없고 돈도 없지만, 내가 필요할 일 생기면 언제든 연락해.”

“역시 쌤밖에 없어요! 저 데뷔해서 돈 벌면 언니한테도 꼭 큰 거 쏠게요!”

“그나저나 한국어 진짜 많이 늘었다, 수지야. 미국에 있는 동안 한자어도 다 까먹고 퇴보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렇죠? 제가 좀 똑똑해요! 큭큭, 소속사 대표님도 그러셨어요. 안무나 가사 이렇게 빨리 외우는 애 처음 봤다고, 저보고 천재 아니냐고!”

수지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7년 전이나 지금이나 구김살 없이 밝고 긍정적이라 밉지가 않았다. 부족함 없이 사랑 받고 자란 아이 특유의 순수한 자신감과 애교는 여자인 그녀가 봐도 귀엽고 예뻤다.

나도 자존감 낮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초라해진 것 같지.

* * *

수지와 헤어지고 열 시가 넘어서야 가방 속 휴대폰 생각이 났다. 회사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파트까지 30분간 걸어오는 내내, 다른 생각에 몰두해 있느라 휴대폰을 의식한 속도가 평소보다 훨씬 더뎠다.

아까 수지가 들려줬던 나쁜 삼촌과 그의 가엾은 연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뇌리 한구석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자꾸만 감정적으로 이입이 되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해서야 꺼내 본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와 문자 두 통이 와 있었다.

-나 왔어. 전화 안 받던데 집이야?

그리고 30분쯤 후 다시 보내온 문자는 더 짧았다.

-얘기 좀 하자, 서유주. 얼굴 보고.

답장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는 순간 낯익은 차가 보였다. 유주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차문이 열리고 낯익은 형체가 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공기를 타고 흘러드는 낯익은 체취에 벌써부터 숨이 막혀왔다.

유주는 왈칵 울음이 터질까 봐 이를 꼭 악물었다. 한 발만 더 떼면 제 발로 걸어가 안길 것 같았다. 고작 일주일 동안이었는데. 그동안 정말 아무렇지 않게 혼자 평화롭게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유주야.”

은은한 가로등 아래서 그는 어쩐지 더 커 보였다. 얼굴도 혈색이 좋아 보여 장기출장에서 막 돌아온 사람 같지 않았다. 본래 체격만큼 체력도 좋다 못해 저세상 에너지인 인간이다. 시차 회복 이런 건 아예 필요가 없는 타입이었다.

“응. 왔어?”

유주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강주하를 보는 내내, 저도 모르게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긴장했거나, 반가움에 제 발로 뛰어들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미친 듯이 널뛰는 심장만은 막을 수 없었다.

“어디 갔다 와? 연락 안 받던데.”

“전에 말한 적 있지. 입주 가정교사로 과외 했던 아이가 회사에 찾아와서 같이 저녁 먹었어.”

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장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전혀 읽히지 않았다. 그리고 불쑥 말했다.

“보고 싶었어.”

유주는 묵묵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달빛과 가로등에 비친 그의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보고 싶었어. 그 단순한 한 마디가 내뿜는 무게감은 조금 달랐다. 처음 그와 재회해서 사귀기 시작했을 때의 가벼움보다 훨씬 묵직해져 있었다. 그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들어가서 얘기 좀 하자.”

“밖에서… 얘기하자.”

유주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가 다가와도 물러서진 않았지만 제 의견은 확실히 관철하고자 다시 한 번 말했다.

“네가 집주인이고 난 세 한 푼 안 내고 살긴 하지만. 얘기는 밖에서 하고 싶어.”

“그럼 우리 집에서 해. 얘기 끝나고 다시 데려다줄 테니까.”

“그건 더 싫어.”

“안 건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가 이를 갈듯 내뱉고 그녀에게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누군가 먼발치에서 보면, 틀림없이 웬 커다란 남자가 여자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다 생각할 그림이다.

“손끝 하나 안 댈 테니까. 네가 원하지 않으면.”

위험해. 너무 가까워.

유주는 순간 숨을 참았다. 그의 체취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지금 이렇게 가까이에 서 있는 것만으로 한껏 젖어 버릴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일 때 다른 누가 있는 건 싫으니까 하나만 선택해. 네 영역, 아니면 내 영역. 어디로 갈까? 그것만 말해.”

유주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역시 본성은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유주는 또각, 단화굽 소리를 내며 앞서 걸었다.

“그럼 네 집으로 가. 네 집인데 더 가까운 곳.”

무슨 얘기인지 최대한 빨리 도착할 곳으로 가서 빨리 끝내고 싶었다. 잠깐 떨어져 있자, 헤어지자는 말이면 어쩌지 이 와중에도 맘 졸이는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미친년. 속없는 년.

강주하는 그녀 옆을 그림자처럼 뒤쫓아 왔다. 유주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 와중에 갑자기 거실과 주방의 전구가 나갔다는 사실이 번뜩 떠올랐다. 주중엔 퇴근해 침실만 직행해서 주말에 갈아 버리려 했는데 강주하가 갑자기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침실과 욕실의 전구만 말짱했다.

“나 편의점 가야 돼. 당장.”

“갑자기 왜.”

“전구가 나가 버렸어.”

그와 단둘이 침실에 있고 싶진 않았다. 너무 위험하다.

“어두워도 상관없어. 아, 아니다. 온 김에 내가 갈아줄게. 가자.”

“전구 가는 것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어. 너 먼저… 집에 가 있어.”

“미쳤어? 내가 너한테 그런 거 사 오라고 혼자 보내놓고 집구석에 편히 자빠져 있을 개자식으로 보여?”

“아니.”

확실히 개자식인 건 맞는데 그런 종류의 개자식은 아닐 뿐이다.

“몇 개면 돼? 내가 사 올 테니까 너 먼저 가 있어.”

“싫어. 너 심부름시키기 싫어. 내 집은 아니지만 내 공간에 필요한 것쯤은 내가 알아서 살 거야.”

참 바보 같은 대화를 나눈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강주하는 별로 웃기지 않는 듯 미간을 좁히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럼 같이 가.”

“이거 놓고 가.”

“그냥 가. 편의점 가는 길 공사한다고 여기저기 흙더미잖아.”

유주는 손을 빼지 않았다. 강주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급한 성질머리대로 걸음도 무척 빠른 편이었지만 일부러 유주에게 맞추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때문에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바보같이, 단지 손 하나 잡은 것뿐인데. 알몸 구석구석, 치부 안까지 속속들이 보여주고 만지고 물고 빨고 핥고 삼키고 깊숙이 파고들어 들쑤시고 흩뿌리도록 죄다 허용한 게 이미 수백 번이 넘는데 새삼스럽게.

다시 단지 밖으로 나와 편의점으로 향하는 중, 갓 오픈해서 요란하게 반짝이는 상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 남자가 지하 술집의 화려한 출구 쪽에서 나오다 유주와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 옆에서 훅 끼쳐 오는 술 냄새가 역했다. 아직 열 시 넘은 시간인데도 남자는 조금 취해 있었다.

강주하가 유주를 반대쪽으로 밀어 세우고 취객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지나치려 했다. 그 순간 남자가 갑자기 유주에게 알은척을 해왔다.

“어, 유, 유주 씨 아니에요?”

유주도 남자를 즉시 알아보았다.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변태, 변태민이다. 반년 전 관공서의 임시직 마지막 날, 그의 꼬임에 넘어가 끔찍한 일을 당할 뻔해 경찰서까지 갔던 기억이 뇌리를 악몽처럼 빠르게 스쳐 갔다.

“유주 씨! 오랜만입니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잘 지내고 있나요? 그때는 내가 정말 미안했습니다. 다시 연락을 취하려 했는데 계속 안 받아서……”

그는 질겁하는 유주의 얼굴을 보고도 뻔뻔스럽게 한 걸음씩 다가섰다. 물론 주하가 건장한 몸으로 막아서서 그녀에겐 손끝도 닿지 못했다.

“뭡니까. 좀 떨어지시죠.”

강주하가 럭비선수 같은 어깨로 그를 막아서자 한참 작은 변태민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지독하게 야비하고 비열한 적의를 뿜어내는 주하의 얼굴에 잔뜩 기가 눌린 것 같았다.

“아, 아니, 나는… 저는 전에 유주 씨가 구청에서 근무할 때 문화강좌 강연도 하고…… 그… 저희가 친하게 지냈는데……”

“아냐!”

유주는 강주하의 등 뒤에서 저도 모르게 쇳소리를 냈다. 어이없고 기가 찬 나머지, 차라리 주하가 저 변태놈을 제대로 혼쭐내서 다음에는 알아서 다른 길로 돌아가게 해줬으면 싶었다. 하지만 한 마디만 앙칼지게 내뱉었다.

“아주 질 나쁜 사람이야. 여자들 함부로 성희롱에 성폭행하려는 상습범이고 경찰서에 잡혀간 적도 있어.”

“뭐……?”

주하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그가 한결 더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을 거란 사실은 불 보듯 뻔했다. 지나가던 행인들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몇 명은 아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들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변태민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는지, 갑자기 이목이 집중되자 수치심을 느꼈는지, 저만치 물러나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사람들 눈이 있으니 설마 뭘 어쩌진 못하겠지 생각했는지 우물쭈물 주절거렸다.

“아, 아니… 나는, 나도 이 동네 자주 오는데 마주쳐서 반가워서 그랬는데 뭘 또 그렇게…… 근데 댁은 유주 씨랑 무슨 관계길래 말도 못하게 이렇게 막고 서서… 좀 그렇네요.”

“그만 갈 길 가시죠? 남의 이름 입에 계속 올리지도 말고.”

“아니 댁이 뭔데 내 입으로 다른 사람 이름 부르는 걸……”

“결혼할 남자입니다만?”

변태민은 술에서 확 깨어난 얼굴이 되었다. 놀란 것은 그뿐이 아니다. 유주도 그의 등 뒤에서 눈을 크게 떴다. 강주하는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서며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못 들었습니까? 서유주랑 결혼할 남자라고. 뭐 더 할 말이라도?”

“아, 아뇨… 그, 나는 저 바빠서……”

변태민은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다 부리나케 도망가듯 떠났다. 그 처량한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강주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야, 저 루저 같은 새끼는.”

“아무도 아니야. 너야말로 그게 무슨 소리야? 결혼할 남자라니.”

“그렇게 해놔야 찍소리 못할 거 아냐.”

“하……”

“저 새끼는 누구냐고.”

유주는 강주하를 지나쳐서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적어도 지금은 경찰서니 뭐니 얘기할 계제가 아니다. 변태민의 존재는 이미 뇌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주하는 그녀가 전구를 골라 카운터로 갈 때까지도 계속 추궁해댔다.

“아무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왜 말을 못해? 설마 사귀거나 요즘 말로 썸 탔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설마하니 저렇게 배짱 하나 없는 주정뱅이랑.”

“아니라고 했으면 사람 말을 좀 들어.”

유주가 편의점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자 강주하가 중간에서 가로채서 돌려준 뒤 제 카드를 대신 건넸다.

“뭐 하는 거야? 내 물건이니까 내가 알아서 계산할 거야! 죄송합니다, 큰 소리 내서… 그 카드 다시 돌려주시겠어요?”

아르바이트생이 강주하의 카드로 계산하려다 커플의 갑작스런 전투 분위기에 동작을 멈췄다. 아직 앳된 얼굴의 점원이 카드를 들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자 강주하가 낮게 말했다.

“그걸로 결제해요, 괜찮으니까.”

유주는 이를 부득 갈았지만 점원이 난처해할까 봐 가만히 있었다. 강주하는 제 카드와 함께 전구도 받아들었다. 유주는 그를 무시하고 앞장서서 아파트 동 건물로 빠르게 걸었다.

“하여간에 서유주 너는 처신 조심해서 해. 벌레들 꼬이지 않게.”

강주하가 뒤통수에 대고 또 한 번 지껄이는 순간, 유주의 머리가 다시 돌아갔다.

“뭐라고…?”

“처신 똑바로 하라고. 다른 새끼들한테 일절 틈 주지 말고.”

기가 막혔다. 결혼도 안 할 거면서 네가 무슨 권리로. 너 따위가 무슨 자격으로. 결혼할 마음 조금도 없는 주제에, 결혼할 남자니 뭐니 그따위 개소리는 왜 지껄이는 거냐고!

“웃기지 마!”

너무 화가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렇게까지 화가 난다는 사실에 더 부아가 치밀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네가 뭔데? 너 따위가 뭔데 그따위 말을 해? 너 가지긴 싫고 남 주긴 아깝니? 응? 이 이기적인 개자식.”

그녀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흘러나왔다. 살면서 지금까지, 누군가를 향해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 없는 욕이다.

강주하는 전구를 손에 들고 미동 없는 눈으로 유주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에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그녀인 만큼 조금은 놀랄 법도 하련만, 얄미울 만큼 담담한 태도다. 그 태도가 유주의 화를 더 돋웠다.

“너랑 얘기하기 싫어.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냥 돌아가.”

사납게 쏘아붙이고 주하의 손에 들린 전구를 낚아채려 했지만 오히려 잡힌 것은 그녀의 팔목이었다. 강주하가 그녀의 팔목을 잡고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대로변을 벗어난 아파트 단지 초입에는 둘밖에 없었다.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거야?”

“결혼할 남자라니 그따위 헛소리하지 말란 말이야. 네가 네 입으로 분명히 말했잖아. 결혼할 일 없을 거라고.”

유주의 앙칼진 지적에, 팔목을 움켜쥔 주하의 손에 힘이 실렸다. 강주하도 그녀 못잖게 독이 올라 있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만약 결혼을 하게 되면 반드시 너랑 할 거라고. 너 외에 할 상대는 아무도 없다고.”

유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잔뜩 젖히고 노려보고 있자니 눈이 아파서, 정확히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떨궜다. 팔목을 빼내려고 힘껏 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숨이 조금씩 차분해질 때쯤 그가 팔을 놓아주었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제발 좀.”

그의 손이 밤바람에 흐트러진 유주의 머리칼을 훑었다. 유주는 그 손을 세차게 뿌리치고 앞장서서 걸었다. 오래된 건물의 야트막한 계단을 올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집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둘 사이에는 정적만 흘렀다.

“앉아 있어. 씻고 오든가. 전구 먼저 갈 테니까.”

그가 제집처럼 의자를 끌어와 거실과 주방의 구식 백열등 전구를 순식간에 갈아치웠다. 유주는 힘없이 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화를 내느라 소모된 감정이 육신의 에너지도 죄다 앗아간 것 같았다.

강주하는 환해진 주방으로 가 생수병을 두 개 꺼냈다. 속이 탔는지 하나는 제가 단번에 들이켜 버리고 다른 한 병은 유주에게 건넸다.

“필요 없어. 할 얘기 있다는 거나 빨리 해.”

그녀가 받지 않고 싸늘하게 말하자 그는 물병을 내려놓고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뭔가를 품에서 꺼내 그녀 쪽으로 밀었다. 한눈에 봐도 신용카드 같았다.

“뭐니, 이건……”

유주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기진맥진해서 언성을 더 높일 기력이 없었다. 그의 의중을 스스로 짐작해 볼 힘조차 없다.

“크레딧 카드잖아.”

강주하의 말에 유주는 카드를 집어 들었다. 반짝반짝 광이 나는 카드에는 VIP 프리미엄 뭐라고 거창하게 쓰여 있었다. 유주는 카드를 테이블 위에 다시 내려놓곤 물었다.

“그러니까 이걸 왜. 어쩌라고.”

“너 쓰라고.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1회 천만 원 한도야.”

유주는 강주하의 감정 없는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미친년처럼 한참을 깔깔대고 웃었다. 드라마에서 비슷한 장면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바랐던가.

시어머니가 아들의 연인에게 거액의 돈 봉투를 던져주거나, 금수저 남자가 가진 거 하나 없는 여자를 붙잡기 위해 부동산 소유권 이전 등기 서류나 신용카드를 건넬 때 정말 부러웠었다. 대학생 때 하도 먹어서 이제는 꼴도 보기 싫은 편의점 삼각 김밥을 우물우물 씹으며, 옆 식당에 크게 틀어놓은 TV를 창 너머 훔쳐보고 얼마나 부러워했던지.

“좋아서 웃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래?”

강주하가 팔짱 끼고 심각하게 그녀를 보았다.

“일 회 한도 더 올릴까? 워낙 소비를 안 해서 천 정도면 될 것 같았는데.”

“그러니까 강주하 네 말은.”

유주는 카드를 다시 집어 들어 두 손으로 가장자리를 쥐었다.

“이거 줄 테니까 비혼주의라고 처음부터 말 했니 안 했니, 골치 아프게 하지 말고 얌전히 입 닫고 있으라 그거구나.”

“비약하지 마.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야. 다른 뜻 없어.”

그가 다리를 오만하게 꼬면서 줄줄이 말을 이었다.

“돈으로 마음을 표현한다느니 비꼬는 소린 미리 집어치워. 결국 애정은 가시적인 물질로 표현하는 거야. 그래서 이벤트에, 선물에, 집 사주고 차 사주고 보석 사주는 거라고. 남자는 수조 원이 있어도 마음 없는 여자에겐 일 원 한 푼도 안 써.”

“그래서? 이걸로 돈 펑펑 쓰고 사치하면서 네 마음을 느끼라고? 어떤 마음? 영광스럽고 감사하게도 유일하게 섹스하고 곁을 주고 싶은 여자로 날 낙점해준 그 가증스러운 애정?”

“사람은 다 나름대로 연애하는 방식이 있어. 난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강주하의 눈에 서서히 핏발이 섰다. 그 역시 유주의 마음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고 있다.

처음부터 깊은 감정 없이 즐기고 이용만 하는 것이라면, 그가 불변의 비혼주의를 고수한다는 걸 밝혔을 때 그녀도 이렇게까지 동요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정도로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 개자식도, 내가 자기한테 진심인 걸 알고 있어. 그렇다고 무작정 휘둘리고 간도 쓸개도 없이 붙어 있을 성질머린 아니란 것도 알지.

그래서 지난 일주일간, 평소 스토커처럼 연락에 집착하는 꼴도 보이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썼을 것이다. 이런 VIP카드 증정식이라도 해서 마음을 표현해야 그녀가 떠나지 않을 테니까.

파직, 양손에 힘을 주자 카드가 두 동강 나 버렸다. 유주는 제 손에서 갈라진 카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쉽게 부러뜨릴 정도라니 내가 단단히 화가 났긴 났구나.

“그냥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부러져 버렸네.”

“재발급하면 돼.”

“필요 없어. 그런 걸로 마음이 어필되는 사람 아니야, 난.”

마음도 주고 그에 따른 물질로도 표현된다면 기쁘겠지만 후자만 주어지는 건 사양이다. 너 이렇게 계속 바보 병신처럼 약지 못하게 살면 평생 가난해진다. -언젠가 정주 언니가 일침을 가했던 말이다- 하지만 노력해도 바뀔 수 없는 타고난 성격, 제 팔자도 있는 법이다.

“이렇게 하자, 주하야.”

유주는 주하를 똑바로 보았다. 최대한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그는 날 보낼 생각이 없고 나도 그를 떠날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난 뒤에서 다른 생각, 다른 짓 하는 게 제일 싫어. 배신할 준비, 뒤통수 때릴 준비하는 거… 그것만은 절대 안 돼.”

“내가 대체 너한테 그런 짓을 왜 하겠어? 사업상으론 솔직히 매일 그런 일 연속이지만, 너에겐 절대 그럴 일 없어.”

“맞선, 만남, 뭐든 좋아. 다른 여자와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게 될 때 깔끔하게 그만두는 걸로 하자.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여자와 만나본다든가, 선을 본다든가… 어떤 식으로든 다른 가능성을 몰래 엿보지 말라는 거야.”

“맞선은 무슨, 개가 좆 터는 소리야. 그런 일 없다고 했지.”

“그런 여지가 확실해질 때 나는 끝낼 거야. 이 관계. 비혼주의자 남친과의 연애에 종지부를 찍을 거라고.”

“왜 있지도 않은 제3자를 만들어내고, 일어나지도 않을 일은 미리 걱정해?”

“네가 비혼주의라는 거, 전혀 몰랐던 사실을 이제야 갑자기 알게 됐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건 갑자기 일어나기도 해.”

솔직히 수지가 들려준 이야기도 영향이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비혼주의자 삼촌과 그 가엾은 연인의 이야기가 자꾸 그녀와 강주하의 것으로 감정 이입이 되었다.

“말없이 떠날 거야. 비참해지고 싶지 않으니까.”

말을 하면서도 유주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며칠 전 잠들기 전, 뿌연 밤하늘을 보면서 상상해 보았다.

만약 강주하가 어떤 일을 계기로 출장길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7년 전 그랬던 것처럼 다시 장기체류를 해야 할 상황이 되어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다면 어떨까. 무작정 눈물부터 흘렀다. 그리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강주하는 뭐가 그리 당당한지 팔짱 끼고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멍하니 있는 것도 같았다. 한참 뒤에 그는 말없이 담배를 꺼내서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피워도 괜찮은지 그녀에게 묻지도 않았다. 대신 베란다 쪽으로 걸어가 활짝 열려 있는 창 앞에 섰다.

그는 제 표현대로 하자면 통제 가능한 금연자였다. 섹스 후 딱 한 개비. 그것도 심야에만, 격렬하게 움직인 후 아직 정신이 온전히 남아 있을 때 쾌락에의 여운을 즐기기 위한 한 개비라 했었다. 그 외 가끔 빼무는 건 중요한 일이 제 뜻대로 완벽하게 진행되지 않아 극도로 초조하거나 신경이 거슬릴 때뿐이다.

강주하는 창에 선 채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질문도 아니고 혼잣말도 아닌 말을 툭 내뱉었다.

“시작은 같이하고 그런 좆 같은 결론은 혼자 내리겠다?”

그는 피식 웃다가 담배를 깊이 빨았다. 마지막 연기를 뱉는 옆얼굴이 가파르게 깎아낸 조각처럼 매력적인 선을 그렸다.

“그렇게 해.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그런 증거 나오면 맘대로 떠나, 어디든. 대신.”

그가 제 쪽으로 다가오는 동안, 유주의 슬리퍼 속 발가락 끝이 바짝 들렸다. 강주하가 답답한 듯 목의 타이를 조금 당기며 그녀 옆에 앉았다.

“난 결백한데 네 멋대로 끝낼 순 없어. 일방적으로 걷어차일 마음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강주하의 더운 숨결이 귓가에 훅 들어왔다.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 현기증이 일었다. 짙은 날 것의 체취가 여성의 가장 깊은 곳을 젖어 들게 했다. 당장이라도 그의 멱살을 잡고 체향을 폐부 깊숙이 들이켜고 싶었다.

그가 유주의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타이를 풀어헤치고 바짝 다가섰다. 두 눈이 차분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섹스에 돌입하기 직전의 눈빛임은 유주도 익히 알았다.

“하지 마. 그럴 기분 아니야.”

유주가 그를 뿌리치고 반대쪽으로 피했다. 하필 베란다 쪽으로 도망간 바람에 더 피할 곳이 없었다. 몸을 돌리기도 전에 절제되지 못한 숨결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유주는 돌아서서 그를 똑바로 보았다.

강주하는 그녀가 기대선 창 옆에 한 손을 짚었다. 구김살 하나 없는 순백색 드레스 셔츠, 단정하게 잠긴 버튼 위 가슴팍이 시야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의 몸이 얼마나 크고 단단한지 새삼 실감이 났다.

유주는 반쯤 체념한 채 시선을 떨궜다. 하필 셔츠 자락 아래, 매끈한 복부를 두른 벨트와 바지 앞섶이 보였다. 등이 유리창과 하나가 될 것처럼 강하게 눌렸다. 강주하가 예고도 없이 하체를 바짝 밀어붙이며 압박해 왔다.

“일주일만이야. 보고 싶었어. 만지고 싶었고.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고.”

그가 숨을 헐떡이며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아까 길에서도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그때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아, 그만… 뒤로 좀……”

유주의 숨도 이내 거칠어졌다. 제 몸이 사지에 핀이 꽂혀 창 위에서 파들거리는 벌레 같았다. 단단한 거구가 너무 바짝 붙어 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가 정말 그러겠다 작정하면 이대로 유리창에 눌려 압사되고 말 것이다.

“주하… 주하야, 그만……”

딱딱하게 불거진 뜨거움이 유주의 복부 아래, 다리 사이를 지그시 눌러왔다.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손이 턱을 강제로 잡아 돌렸다. 손가락이 그녀의 터틀넥 목깃을 갈고리처럼 걸어서 저에게로 훅 끌어당겼다. 그리고 바로 입술 앞에서 협박하듯 속삭였다. 아니, 속삭이듯 협박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았다.

“입 벌려.”

혀가 예고 없이 쑥 들어와 치열을 사납게 훑고 점막을 마구 유린해 댔다. 혀가 넘실거리며 그녀의 것을 잡아채 통째로 뽑아 버릴 것처럼 힘껏 빨아 당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니트 끝자락으로 파고든 두 손이 가슴을 더듬어 왔다.

열 손가락이 브래지어를 찢어발길 기세로 훑다가, 가슴을 모아주는 고리를 찾아내 힘껏 당겼다. 레이스 천 찢기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난폭하게 다리 사이를 파고든 무릎이 유주의 한쪽 허벅지를 아프도록 찍어 눌렀다.

“이, 이러지…… 앗!”

머리에 피가 몰리며 시야가 거꾸로 돌았다. 그가 그녀를 바닥에 눕히고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유주는 숨을 헐떡이며 몸부림쳤다. 어차피 그녀를 원할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나사 빠진 것처럼 구는 건 두려웠다. 이렇게 더 거칠게 몰아칠 때는 다음 날 허리도 펴지 못했다.

“좀 천천히…… 주하야… 핫! 으응!”

“넌 이런 거 좋아하잖아. 거칠게 좆 박아주는 거… 부드럽게 살살 해주는 건 느끼지도 못하면서.”

그는 처음부터 살살 하는 법을 몰랐다. 결국 그녀를 그렇게 길들인 것은 강주하 본인이다. 주하는 보란 듯이, 완전히 드러난 젖가슴을 손가락 사이에 넣고 터뜨릴 듯 비벼대다 꼬집어 뜯듯 잡아당겼다. 혀와 입술, 이 끝도 격렬한 고문에 가세해서 유주의 전신을 마구 뒤흔들었다. 유두가 뜯겨나갈 것처럼 아팠다.

“아파! 아아앗, 이 개자식. 아흣! 아프다고!”

“그래, 난 개자식이야. 서유주의 개.”

피식 웃음이 흘렀다. 주하가 손바닥을 쫙 펼쳐 축축해진 속옷 중심을 느른하게 쓸었다. 유주가 허리를 한껏 뒤틀었지만 악력은 더 거세질 뿐이다. 억센 두 손이 배꼽 아래, 실크 팬티 가장자리를 과자 봉지 뜯듯이 힘주어 당겼다. 으득, 애액으로 흥건히 젖은 천이 찢겨나가고 갈라진 틈새가 드러났다.

그가 검지와 중지를 가윗날처럼 세워 음부 입구를 크게 벌렸다. 애액을 머금은 입구가 단 액을 품은 꽃술처럼 움찔거리고 있었다. 새빨갛게 무르익은 과일의 속살처럼, 두 갈래로 갈라져 바들바들 떨어대는 음순과 음핵에 그의 숨결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것 봐…… 이러니 내가 널 두고 다른 생각을 하겠어? 응?”

그가 중지를 질 안에 사정없이 쑤셔 넣었다. 아흑, 유주의 허리가 더 크게 들렸다. 손가락이 본격적으로 속살을 밀어 올리며 미지의 동굴을 탐사하는 것처럼 깊숙이 파고들었다.

발칙한 중지는 내벽의 민감한 주름을 가르고 제 끝이 닿을 수 있는 최대한의 깊이까지 찔러 들어가 갈고리질을 계속 해댔다. 손가락은 하나씩 더 가세해 세 손가락까지 안쪽을 무자비하게 쑤셔 댔다.

“아! 읏, 으응! 아, 하읏! 그, 그만!”

아흐읏, 유주가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그는 손가락을 빼냈다. 검지가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며 바깥쪽의 꽃술을 휘젓고 희롱하길 한참, 유주는 허벅지가 더 크게 벌어지는 느낌에 젖은 눈을 떴다. 주하가 무릎을 붙잡고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아! 안… 그만…… 제발…아! 하읏!”

애액이 끈적이는 꿀처럼 그의 혀에 휘감겨 들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애액부터 재빨리 핥아 낸 뒤, 고양이처럼 혀를 내밀어 촉촉하게 습기 어린 음순을 장난치듯 간질간질 빨고 핥았다.

꽃술 돌기를 이 끝에 물고 살짝 당겼을 때 유주는 크게 신음을 토했다. 너무 외설스럽게 들려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 그가 혀를 다시 음부 안으로 깊이 찔러 넣었다. 츄릅, 춥, 춥, 혀와 입술에 한껏 힘을 가해 안쪽 주름을 음란하게 빨아대는 순간, 유주의 허리가 또 한 번 크게 들썩거렸다.

“아읏! 제발…… 아, 아아…… 아앗! 악!”

내벽이 크게 수축하며 손가락을 끊어낼 듯 꽉 조여 댔다. 주하가 손가락의 힘을 느슨하게 빼자 유주는 바르르 떨면서 허리를 뒤척였다. 제 타액으로 젖은 입술 사이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흣. 제발…… 차라리… 그냥……”

“차라리 그냥 넣어달라는 거지?”

주하가 거친 숨을 가다듬고 쉰 목소리로 물었다. 유주는 눈물로 얼룩진 두 눈을 깜빡이며 제 몸에 올라탄 남자를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악물고 자제하고 있었다. 이렇게 발기한 채 전희만 오래 하는 법은 처음이다. 터질 듯 팽창한 성기가 당장이라도 바지를 뚫고 나올 기세로 앞섶을 산봉우리처럼 세우고 있었다.

“응… 넣어줘, 어서……”

유주는 두 손을 들어 젖은 눈을 가렸다. 터틀넥 아래까지 훤히 드러난 젖가슴을 가리고 싶었지만 아플 것 같아서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그의 거친 애무 직후 젖꼭지가 발딱 세워져 있었다. 그 민감한 돌기 위로 손가락 끝, 부드러운 옷자락이 살짝만 닿아도 쓰라렸다. 수치심과 모멸감에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제 음부에서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나오는 점액처럼.

“빨리…… 흐읏.”

미친년. 아까는 기세 좋게 헤어진다, 떠난다 지껄이더니. 유주는 제 혀를 물어버리고 싶었다.

무의식적으로, 한 번이라도 더 많이 안기고 안겨 기억 속에 각인시키고 싶은 것도 같았다. 최악의 순간이 닥치고 난 후에는, 강주하의 체취와 온기가 그리울 때마다 틈틈이 꺼내서 되새김질하기 위해.

빨리 뒤흔들어줘. 최대한 격렬하고 난폭하게.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짐승처럼. 다른 남자, 다른 미래 생각은 들지도 못하게 광폭하게.

씨발, 주하의 흥분된 욕설이 나직하게 들렸다. 그는 더 지체 않고 유주의 몸을 꿰뚫고 안쪽을 제 것으로 꽉 채웠다. 격한 전희로 흠뻑 젖어 든 질벽은 그의 것을 아무 저항감 없이 꼭 품었다. 그가 허리를 바짝 밀어 올렸다.

“아! 으읏…! 아흑! 응!”

“나는 이래서… 이것 때문에 네가 좋은 게 아냐.”

가빠지는 호흡 속에서 주하가 이 악물고 말했다.

“이렇게 다리 벌려주고… 내 좆 잔뜩 조여주고 싸게 해줘서… 그 이유 때문에만 좋은 게 아니라고……”

“아아앗! 응! 으응!”

그는 이제 더 말하지 않았다. 짐승 같은 숨소리가 한몸이 된 둘의 열기를 더 증폭시켜 갔다. 주하는 온몸에 제 감정을 실어서 유주를 부숴버릴 듯 박차를 가했다. 힘주어 내벽을 한 번 찔러 올릴 때마다 유주의 신음은 더 크게, 더 날 선 쇳소리처럼 높아졌다.

12월에 접어든 밤공기가 활짝 열린 실내로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하지만 실내의 열기는 더해만 갔다. 차갑던 거실 바닥, 한 부분만 다른 공간과 분리된 것처럼 뜨겁고 정제되지 않은 공기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하아, 미칠 것… 같아……”

주하가 악문 잇새로 짐승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허리를 뒤로 당겨 다시 삽입하자, 질벽이 아까보다 훨씬 더 탄력 있고 쫀쫀하게 제 것을 콱 물고 빨아 당겼다. 귀두를 촘촘하게 감싸고 바짝 조여 대는 내벽의 속살이, 몸 주인의 마음과는 반대로 절대 안 놔줄 거야 발악을 하는 것 같아 더한 흥분이 일었다.

“아흑, 주…! 아앗! 아흑! 으응, 아아아. 아앗!”

유주가 젖은 눈을 들고 비명 같은 교성을 내질렀다. 주하가 허리를 조금 더 치켜들고 강도를 높여 한층 더 격렬하게 부딪쳐오고 있었다. 유주는 그 와중에도 바깥으로 소리가 들릴까 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다 결국은 포기하고 그의 머리를 꼭 끌어안고 버텼다.

혀와 이 끝에 부드럽고 쫄깃한 살점이 느껴졌지만 그게 뭔지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주하의 것이, 불알이 떨어져 나갈 기세로 질벽을 마구 휘젓고 후려친 끝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음경이 최후로 깊고 거세게 찔러 들었다. 그 끝에서 분출된 정액이 자궁 안으로 거침없이 흘러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둘 다 안에 사정해 버린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주하가 잠시 숨만 고르다가 페니스를 빼지 않고, 오히려 자궁 끝까지 더 깊이 쑤셔 넣고 그대로 버텼다. 이렇게 된 바에야 체액 한 방울까지 모조리 다 넣어버릴 테다, 온몸으로 선언하는 것 같았다.

유주는 기진맥진해 축 늘어져 있다가 몸이 번쩍 들리는 감각에 눈을 떴다. 그가 제 몸을 들쳐 안고 침대로 향하고 있었다. 위로 들린 다리 사이로 그의 정액과 제 애액이 하나로 뒤엉켜 주르륵 흘렀다.

“주하야, 그만… 이제……”

강주하는 들은 척도 않고 유주의 몸을 반 바퀴 돌려 엎드리게끔 했다. 그러고는 뒤에서 꼭 끌어안고 금세 회복된 제 것을 그녀의 엉덩이 틈으로 찔러 넣었다.

양어깨를 꼭 아래로 당겨 안으니 안으로 깊이 퍽퍽, 박혀 드는 성기의 충격이 더 생생하게 전신을 들쑤셨다. 그가 제 몸 깊숙이 한 번 더 사정할 때까지, 유주는 목이 쉬도록 울고 흐느끼고 교성을 지르다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눈을 뜨니 그가 제 허리를 뒤에서 감고 몸을 딱 붙여 온 채 누워 있었다. 순백색 신부 베일 같은 캐노피가 창 너머 달빛에 비쳐 흐릿하게 음영을 그렸다. 그녀가 깬 걸 알았는지 주하가 한숨 같은 신음을 낮게 흘리며 유주의 정수리에 제 턱을 올려놓았다.

“아직 깜깜해. 더 자.”

“주하야.”

“아니면 씻겨줄까? 시트는 갈았는데 씻겨주다 너 깰까 봐.”

유주는 그의 나른한 목소리를 좀 더 음미하다 불쑥 말했다.

“만약에……”

그의 입술이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비벼왔다.

“만약 내가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그때는 어떡할 거야?”

머리카락을 훑던 입술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허리를 바짝 감았던 손도 한순간 경직되었다.

“결혼하지 않아도 결혼한 거나 다름없어, 우린. 언제까지나.”

“그건 네 바람일 뿐이야.”

유주가 제 허리를 감은 그의 손을 풀어냈다. 그녀는 주하를 돌아보지 않고 다시 한번 조용히 확인했다.

“내가 만약 그렇게 말하면… 그때가 우리 끝인 거지?”

강주하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다시 유주의 허리를 감아 왔다. 입술이 머리칼 어딘가를 비비다 귓불까지 내려왔다.

“아니.”

주하가 귀에 대고 다시 한번 속삭였다.

“끝은 없어. 굳이 결혼해야겠다는 생각 따위 들지 않게……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완벽하게 잘해 줄 거니까.”

깊고 매혹적인 울림이 주문처럼 긴 여운을 남겼다. 유주는 눈을 감고 졸음으로 아득해지는 의식에 몸을 맡겼다. 꿈속에서나마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밉지만 끝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분하고 답답해도 그를 놓을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희부옇게 밝아오는 햇살에 제 몸을 꼭 안고 잠든 그의 얼굴이 보였다. 붉게 부어오른 한쪽 귓불에 그녀가 낸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 * *

첫눈이 내렸다. 그해 첫눈은 이를 거라 했는데 정말이었다. 두 사람은 느지막한 주말 아침을 맞은 신혼부부처럼 식탁에 마주 앉아 토스트와 소시지, 과일을 곁들인 에그 스크램블과 팬케이크로 아침 겸 점심을 들고 있었다. 모두 주하가 만든 것이다. 그는 요리도 잘했다.

“주하야. 넌 정말 못하는 게 없는 것 같아.”

유주는 부드럽고 포슬포슬한 스크램블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몇 분 만에 뚝딱, 브런치 전문 레스토랑의 화보처럼 플레이팅도 예쁘게 해내는 그가 놀라웠다. 돌아가신 할머니, 입주 가정교사 했던 집 아주머니와 언니들에게 배워서 그녀도 요리를 곧잘 하는 편인데도 그가 훨씬 더 노련해 보였다.

“웬일이야. 네가 칭찬을 다하고.”

주하가 특유의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그는 커피 저그를 가져와 제 잔에 들이붓고 유주의 머그컵도 좀 더 채워주었다.

“나는 잘하는 게 너무 없어서 이력서에도 특기란은 거의 비워두는데……”

“네가 못 하는 게 왜 없어. 예쁘고 섹시하고 몸매 완벽하고 일 잘하고 야무지고 착하지만 부당한 건 못 참고 할 말 다 하고 은근 성깔 있고.”

유주는 그를 흘깃 노려보고 다시 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굼벵이도 구는 재주가 있다고, 나도 잘하는 게 있긴 해. 잘하고 제일 좋아하고.”

“전공 쪽?”

주하는 그녀의 공분을 살 말을 또 이었다.

“그러니까 북 카페 차려준다니까. 민간 도서관은 설립 절차가 까다로우니까 서점 겸 카페로 시작하고 갤러리, 다양한 행사도 덧붙이며 조금씩 복합문화 공간으로 발전시키는 거야. 너 그런 쪽 좋아하고 관심도 많잖아. 분명히 잘할 거야.”

“하지만 네 돈을 내 돈처럼 쓸 수는 없어. 아무리 투자 개념이라 억지로 명분을 만들어도.”

유주는 의미 없는 설전이 길어질 것 같아 바로 결론으로 넘어갔다.

“나 퇴사하려고.”

훕, 주하가 주스를 들이켜다 잔을 내려놓고 기침을 해댔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 않는 그도 이번에는 제대로 놀란 것 같았다.

“뭐라고? 언제?”

“이미 확정된 거야. 결심이 선 이상 하루라도 빨리 알리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 어제 사직서도 제출했고. 너한테 상의하지 않은 건 미안하지만 이미 10월쯤부터 생각해 왔고…… 너한테도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여러 번 말했으니까.”

“금융, 부동산, 돈, 영업에 관련된 건 확실히 너랑 안 맞기는 해. 넌 이쪽 업계에 발 담그기엔 너무 때 묻지 않았어. 그런 순수함이 네 매력이기도 하지만.”

주하는 간지러운 소리까지 곁들이며 그녀의 결정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인턴 중 나랑 두 명 더 퇴사해. 12월 31일 마지막 날까지 성실히 최선을 다할 거고. 다음 주부터 부산 수중호텔 리조트 개관에 인턴들 다 가는 건 알고 있지? 한 달간 인력충원으로 거기 있을 거야.”

“알아. 그래서 나도 부산에 내려가 있으려고 했는데 젠장, 김 이사님 다음 주 결혼하는 바람에 대신 미국 일 떠맡게 생겼어. 며칠 후 뉴욕으로 가야 돼.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미국, 싱가포르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없을 것 같아.”

“많이 바쁘겠다. 나야 보조 일이니 힘들 건 없겠지만… 이참에 부산 구경도 하니 좋기도 하고. 어쨌든 당분간 떨어져 있어야겠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짧다면 짧은 지난 넉 달간 하루도 안 본 날이 없었는데. 하긴 지난 일주일 동안도 연락이 없기는 했었다.

“그래서 말인데.”

주하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손가락을 장난치듯 만지작거렸다.

“연락하는 거 그냥 내 성질대로 하면 안 돼? 대신 화내지 않을게. 화내지 않으려고 노력해볼게.”

“바로 바로 연락이 안 돼도 화를 누르는 것보다, 처음부터 여유를 갖고 횟수를 줄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루에도 언제고 시도 때도 없이 수십 번 하지 말고.”

“내가 언제 수십 번 했다고 그래.”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하는 것만 수십 번이야. 문자도. 아무튼 그냥 정상적으로 좀 하자. 해외는 시차도 있으니까 하루의 시작과 끝, 딱 두 번만 하고 전화 안 받으면 바쁜가보다 알아서 이해하고 문자로.”

“하루에 두 번, 언제 할 건지 때까지 정해 놓으라고? 그건 비즈니스지 연인 관계가 아니잖아.”

“장거리 커플 다들 이렇게 해. 싫으면 말고.”

“그사이에 또 보고 싶고 목소리 듣고 싶으면? 잘 자, 인사하고 누웠는데 네가 다시 보고 싶으면? 그럼 어떡하라고?”

“나 커피 좀.”

응, 그는 자동적으로 일어나 커피를 가지러 갔다. 덩치는 저렇게 크고 산만한데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즉각 지시에 따르는 뒷모습이 귀여웠다. 유주는 입술을 꼭 앙다물고 웃음을 참았다. 가슴 속에 납덩이처럼 내려앉은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나도 많이 달라졌잖아. 어디서든 휴대폰 꼭 꺼내놓고 신경 쓰고 있으니까…… 너도 조금은 양보해줘.”

“젠장. 미국이든 싱가포르든 너랑 같이 다니는 게 제일 맘 편한데. 어차피 퇴사할 거 한 달 전에 할 걸 그랬잖아. 응?”

“더 빨리 퇴사했어도 너 안 따라가. 구직 활동해야지.”

“취직하지 말라니까. 최소한 몇 달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 너 전에 그랬잖아, 대학 들어가고 나서 제대로 쉬어본 기억이 없어서 몇 달간 놀고 먹고 해 보는 게 꿈이라고.”

“그렇게 한가하게 놀 여유가 어딨어. 다섯 달 만의 자진 퇴사라 실업급여도 없고 퇴직금도 없는데.”

“내가 실업급여, 퇴직금 둘 다 줄게. 어제 그 카드도 있잖아.”

“부러졌잖아. 재발급 받아 오지 마. 필요 없어.”

“그럼 우리 집으로 이사해. 1월부턴 사내연애 아니니까 같이 살아도 되잖아. 어차피 아파트도 곧 철거 들어갈 거고. 카드는 내일 다시 신청해놓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집 얘긴 나중에 하자. 카드는 사양할게.”

“돈 싫다는 거짓말은 작작 해. 예전에 할아버지가 그러셨지. 가장 정의로운 말만 하고 돈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사람이, 알고 보면 제일 비리 많고 추악한… 아니, 네가 그렇다는 건 절대 아냐.”

주하는 유주가 노려보는 눈길을 피하며 그녀의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손으로 부드럽게 털어주었다. 유주는 손을 피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언제까지나 이어졌으면, 내심 간절히 바랐다.

한 점의 불안감도 없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었으면.

* * *

작년 말, 싱가포르 자본에 힘입어 해운대 쪽에 착공된 매머드급 아쿠아 월드 수중호텔은 일 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완공기념 판촉 홍보 행사는 싱가포르와 국내 대기업들 다음으로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한 BK금융에셋의 주관하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와, 겨울에 부산은 처음이다. 좀 춥지만 겨울 바다도 참 좋은데요? 유주 씨는 부산이 아예 처음이라면서요?”

“네, 일도 일이지만 이 기회에 부산 와보게 돼서 너무 좋아요. 바다 좋아하는데 어릴 때 부모님이 사업일로 너무 바쁘셔서 항상 근교로만 휴가를 갔거든요.”

“우리 온 김에 회도 실컷 먹고 재밌게 놀아봅시다!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엔 자유시간이니까!”

동기들은 물론 선임들도 들떠 있었다. 호텔이 순조롭게 일자 딱 맞춰 완공된 데다, 부산의 랜드마크와 관광 거점이 될 수 있게 정부 차원에서도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 받아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무척 화기애애했다.

쉬는 시간, 유주는 수지에게서 온 톡을 확인하고 답문을 보내주었다. 수지는 일단 어머니부터 간신히 설득해 모친이 마련해 준 원룸에서 지내며 아버지에겐 내년 1월에 사실을 고하고 본격적으로 허락을 얻기로 했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잘됐다, 수지야. 걱정했는데 어머니라도 알게 되셔서 다행이야.

-언니. 그리고 제가 요즘 SNS 이것저것 다 하고 있는데요. 어차피 연예인 되면 해야 된다니까 많이 늘렸는데 이거 팔로워 느는 재미가 꿀이에요! 나중에 유튜브랑 V로그도 해야지, 히히. 그래서 말인데 언니랑 찍은 사진 올려도 돼요? 언니 그런 거 싫어하는 건 아는데 혹시나 해서.

-얼굴 가리면 괜찮아. 예쁘지도 않고 너 정식 데뷔하면 많이 알려질 텐데 내 얼굴 공개되면 부담스러워서……

-네, 그럼 얼굴만 가릴게요! 지금 삼촌이랑 찍은 것도 올리려고요. 삼촌은 그런 거 진짜 질색하는데 어차피 SNS 안 하니까 모를 거예요, 히히.

유주는 저랑 찍은 사진을 어떻게 올렸나 궁금해서 수지의 계정을 찾아보았다. 거의 중독 수준으로 하루에도 몇 개씩 사진이 업로드 되어 있었고 꽤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이러다 먼저 고백하기 전에 아버지가 아시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토끼 스티커로 가린 제 얼굴, 그 옆에서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몸짓을 한 수지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몸짓 하나에도 철철 끼와 애교가 넘치는 게 역시 연예인이 잘 어울린다 싶었다. 다음 사진을 보는 순간 유주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일등석 자리에 기대앉아 눈을 감은 강주하의 얼굴이 있었다. 조도가 무척 낮아 매우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녀가 그의 얼굴을 잘못 볼 리 없다.

사진 아래엔 겁나 부자 삼촌인데 엄청 까칠하고 무섭다, 어느 날 내가 사진을 업로드 안 하고 조용하면 이 삼촌한테 사진 걸려서 죽은 줄 알아라, 익살스런 내용이 영어와 이모티콘으로 쓰여 있었다.

유주는 동기가 찾으러 올 때까지 로비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수지가 전에 들려줬던 말들이 파노라마처럼 뚜렷이 뇌리를 스쳐 갔다. 비혼주의자라서 현재 사귀는 연인과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는 수지의 삼촌, 수지가 그를 따라 귀국한 날은 지난 8월과 얼마 전의 12월 모두 같은 날짜였다.

수지의 삼촌이 정말 강주하라면 모든 게 맞아떨어지는 것 외에, 두 가지 몰랐던 사실이 더 있었다. 서유주가 강주하의 낙하산으로 BK에 입사했다는 것. 그리고 조만간 엄청난 집에서 혼담이 들어올 것이고 강주하는 그 맞선에 임할 예정이며, 비혼주의를 철저히 고수함에도 불구하고 혼사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것들이었다.

즐길 만큼 즐기고 결혼은 적당한 조건의 다른 여자와 한다…… 드라마처럼?

유주는 제자리에 돌아가고 나서도 머리가 하얗게 바랜 채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얼굴은 기계적으로 웃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며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만을 바랐다.

마침내 퇴근 시간이 되자, 유주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저녁 자리를 피하고 수지에게 톡으로 연락을 해 보았다. 통화를 했다가는 목소리에 너무 티가 날 것 같다. 그녀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떨리는 손으로 자판을 천천히 두드렸다. 속도를 내면 자꾸 오타가 생겼다.

-수지야. 아까 삼촌 사진 봤는데 혹시 성함이 강주하 맞아? 흐릿하긴 해도 우리 회사 본부장님 같아서.

-맞아요! 강주하. 앗, 맞다. 삼촌이 무슨 회사 일도 겸사겸사하고 있다 그러긴 했는데. 내년 1월엔 이사로 승진도 한대요. 언니 들어간 회사가 거기였어요? 오 마이 갓, 어떻게 이런 인연이? 언니, 내가 한 얘기 다 비밀로 해주셔야 돼요! 안 그러면 저 죽어요. 흑흑……

-그래, 당연히 비밀로 해야지.

-사실 친삼촌은 아니고 한 다리 건너예요. 우리 엄마 사촌 동생인데 친하고 하니까 그냥 편의상 삼촌이라 한 거죠. 근데 진짜 잘생기긴 잘생겼죠. 눈만 감고 있긴 해도. 아, 아니다. 회사에서 어차피 봤을 테니까. 그럼 매일 회사에서 보는 거예요?

유주는 잠시 망설이다 답을 보냈다.

-아니. 부서가 완전히 달라서 거의 못 봐.

-아 그렇구나. 회사에서도 다들 깜빡 죽겠지만 절대 속으면 안 돼요. 전 우리 삼촌 때문에 잘생긴 사람 안 믿기로 했다니까요? 할머니가 예전부터 얼굴값 한다나 뭐라나, 선은 몰래 보고 크리스마스는 보나 마나 그 애인이랑 뻔뻔하게 보내겠죠? 어휴. 아, 저 지금 피디님이 불러서 가봐야 돼요!

유주는 불도 켜지 않고 어두운 직원 레지던스에 홀로 앉아 있었다. 휴대폰 벨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웠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뉴욕에 있을 강주하였다. 유주는 한참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응.”

“거긴 저녁때지? 여긴 아침인데. 저녁 먹었어?”

살갑게 밥 먹었냐고 묻는 안부에 유주는 눈을 감았다 떴다. 할 말은 많았지만 현명해지기로 했다. 그들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수지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지만, 남의 말만 듣고 쉽게 의심하고 단정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제 먹으려고. 너는?”

“나 원래 아침 잘 안 먹잖아. 삼시 세끼 저녁에 한꺼번에 다 쓸어 넣지.”

쿡쿡,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폰 너머에서 울려왔다.

“주하야. 24일 이브에 들어오는 거 맞지? 그 전에 복잡한 일들 다 마무리되는 거야?”

“그렇게 만들려고 지금 미친놈처럼 동분서주 하고 있는 중이야. 다음 주엔 싱가포르 가서 현장 보고 3시간 만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고. 어떻게든 너랑 오붓한 크리스마스 보내려고 무진장 애쓰고 있다는 것만 알아둬.”

“너무 애쓰지 마. 내 말은, 크리스마스는 올해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내년에도 있고 내후년에도 있고……”

내년, 내후년에도 너랑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지? 주하야, 그렇다고 말해줄래.

“내년은 내년이고 내후년은 내후년이고, 올해 크리스마스는 평생에 단 하루밖에 없잖아. 아, 나 지금 가봐야겠다. 저녁 든든하게 먹고, 잘 때 다시 전화할게.”

통화가 끊어진 뒤에도 유주는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동기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직도 머리 아픈지, 지금이라도 올 수 없는지, 아니면 포장해서 가져가겠다, 단톡방의 문자가 줄을 이었다.

유주는 창 너머 해운대 야경을 바라보다 건너편 횟집으로 발을 뗐다. 쓸데없는 생각은 혼자 가지 치고 몸집을 키워나가기 마련이다. 혼자 있으면 더 할 것 같았다.

* * *

크리스마스를 열흘 앞둔 12월의 한가운데, 제일 친한 인턴 동기 셋과 저녁을 먹을 때였다. 소식통인 윤아람이 초저녁부터 계속 별러왔던 뉴스를 터뜨렸다.

“전에 형부가 미국 교포라서 울 언니 지금 뉴욕에 있다고 했잖아? 어제 대박 사건 들었어! 둘 다 입도 무겁고 유주 씨는 곧 퇴사하니까 믿고 말할게.”

“뭔데 그래? 궁금하다.”

윤아람의 친언니는 작년까지 BK금융에셋에 몸담았다가 올해 가을 결혼해 남편의 사업을 돕고 있었다. 윤아람도 웬만하면 듣고 흘릴 테지만 이번은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우리 BK의 아이돌 강주하 본부장님이 열애 중인 것 같아! 어제 결혼기념일이라서 형부가 예약제 핫플레이스에 데려갔는데 거기서 봤대.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여자랑 데이트 중이었대.”

“헉, 뭐라고? 진짜 핫뉴스구나.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이 누군데?”

다른 동기가 말하는 동안, 유주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윤아람은 쉿, 아무 관련도 없는 누구라도 들을까 봐 식당을 휘휘 둘러보고 목소리를 잔뜩 죽였다.

“BK금융에셋, 우리 회사가 원래는 부경 저축은행이었던 건 알지?”

“알지.”

“여기 사주이자 최대 주주인 대표 딸이래. 전부터 명예 이사, 대주주들이 본부장님 사주 회장 딸과 맞선 보라느니 그 집안에서 엄청 탐을 낸다느니 상당히 부추겼거든.”

“언니가 예전에 근무할 때 사주 딸을 보셨나 봐? 하지만 우린 본 적이 없잖아.”

“사실은 우리도 본 적이 있…… 음. 으흠.”

“본사 센트럴 정사원이구나! 어머머! 빨리 말해줘. 절대 말 안 할게! 유주 씨도 꼭 비밀 엄수해 줄 거지?”

유주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탁자 아래 꽉 맞잡은 손이 욱신거렸다. 제 감정을 절대 들키지 않게끔 차분함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동기가 그럴듯한 직함과 외모, 분위기의 여직원 여럿의 이름을 댔지만 윤아람은 고개만 젓다가 애매하게 털어놓았다.

“다정하고 경이로운. 그런 성품과 외모, 능력의 소유자. 앞글자만 따서.”

“다정하고 경이로운…… 앞글자?”

“이제 대한민국은 동성동본 혼인 가능하고.”

“헉. 나 알았어!”

동기는 유주와 윤아람을 향해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강다경 대리? 윤아람은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주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초반에 유주의 교육 멘토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언젠가 퇴근 후 웨스트 윙으로 호출되어 단둘이 도시락을 먹으며 미팅 룸 준비를 같이한 적도 있었다.

그 강 대리였다니. 이름처럼 정말로 다정한 데다 아랫사람들에게도 하대하는 법 없이 일도 똑 부러지게 잘하는 강다경 대리.

“지금부터 K님과 D님으로 지칭하자. 그렇대. 사내 인트라넷 보니까 D님도 딱 이 시기에 휴가 몰아서 냈더라고. 어쩐지 같은 부서로 배정된 게 그런 이유였어. 처음부터 K님이 D님을 디벨로퍼 팀에 확정 멤버로 넣어 놨다 들었거든.”

“대박이다, 진짜! 이번 맞선이 잘되면 결혼하는 즉시 D님은 퇴사하거나, 회사 소유 건물 관리하거나 호텔 운영하거나…… 어쨌든 결혼이 공식적으로 발표 나면 센트럴은 확실히 떠나겠지. K님은 이사 승진이 확실한 것 같으니까.”

“근데 둘이 한 그림으로 떠올려 보니까 잘 어울리긴 하다. 미모에 학벌, 능력 다 빠지지 않는 재원인데 알고 보니 사주 딸이었다면 뭐. 누가 와도 이길 수가 없겠네. 그치, 유주 씨?”

“아, 네. 맞, 맞아요. 강 대리님… 여자가 보기에도 정말 멋진 사람이니까요.”

유주는 밥을 절반 이상 남긴 채 수저를 내려놓았다. 돼지국밥을 좋아해서 부산에 있을 동안 최대한 많이 먹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한 입만 더 먹으면 토해 버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유주는 퇴근할 때까지 여러 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위액이 역류하고 식도가 타는 듯한 통증은 구토가 여러 번 이어져도 나아지지 않았다.

* * *

그날 밤 어김없이 뉴욕에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계속 걸려올 것 같아서 톡은 남겨두었다.

-오늘 전화 못 받겠어. 속이 안 좋아. 하루는 병가 내야 할지 모르니까 내일까지 연락 안 돼도 그러려니 해 줘.

그리고 그와의 대화창 알림음을 아예 꺼두었다. 새벽에 대화창을 살펴보니 예상대로였다. 어디가 아프냐, 정말 괜찮냐, 병원에 갔는지, 약은 먹었는지, 얼굴 상태 보게 영상통화 걸 테니까 딱 3초만 받아라, 문자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이제 몸은 괜찮은데 행사가 막바지라 너무 바빠. 당분간 통화는 하지 말고 톡으로만 연락하자.

톡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건 비겁한 것 같았다. 설령 상대가 비겁하게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 해도, 그녀는 그녀 자신이고 싶었다.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며 이성적으로.

쥐뿔도 없는 년이 무슨 품위냐고 하면, 그 품위나마 있으니 쥐뿔 많은 쓰레기들보다는 최소한 한 가지는 낫다고 대꾸해 줄 것이다.

* * *

강주하는 크리스마스 때 귀국할 수 없다고 알려 왔다. 계약 몇 건이 더 생겨서 아무래도 1월 넘어 귀국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가 목이 아프다고 해서 문자로 보내온 소식이었다.

-알았어. 일 잘 마무리하고.

-아직도 영상통화 안 돼? 정말 괜찮은 거야? 잠깐이라도 얼굴 보고 싶은데.

-목이 너무 안 좋아. 문자로도 안부 확인하고 있으니까 이해해줘.

유주는 몇 번이나 강다경에 대해 물을까 줄줄이 썼다가 결국 전송하지 못했다. 강주하는 그들의 첫 크리스마스를 함께 하지 못해 분하고 안타깝다고 몇 번이나 토로했다.

유주는 그녀도 슬프고 안타깝다고 답을 보냈다. 그의 문자가 정말로 진심으로 안타깝게 들려서 슬펐다. 진실을 물을 용기조차 없는 스스로가 안쓰러웠다. 이런 상황에도 옅어질 줄 모르는 제 그리움이 괘씸해서 너무도 슬펐다.

* * *

며칠째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퇴근 후 인턴들 중 제일 연장자인 김나현이 그녀를 레지던스 커피숍으로 데려가 이것저것 물었다.

“유주 씨, 정말 괜찮아요? 퇴사 앞두고도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몸이 안 좋으면 사정을 설명하고 조기 퇴사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괜찮아요. 인력도 부족한데 이제 정말 며칠 안 남았잖아요. 유종의 미를 거둘게요. 전혀 티를 내지 말아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업무야 똑 부러지게 잘하니까 윗분들은 아무도 몰라요. 우리는 같은 동기로 동지애도 있고 남다른 정이 있으니까 눈치챌 수밖에 없지 뭐.”

김나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운을 뗐다.

“유주 씨, 우리 회사가 개인주의 존중 분위기라 모른 척 했는데…… 혹시 연애 문제 그런 거예요? 우연히 들었거든, 전에 통화하는 거. 친구분이 약속 잡으려고 하니까 미안하다고, 오늘 데이트 있다고 한 거 아주 예전에 지나가다 딱 한마디 들었어요. 미안해요, 사생활 침해해서.”

“아뇨. 아니에요. 미안하실 것 없어요.”

유주는 속이 쓰려 커피 대신 시킨 과일차를 삼켰다.

“언니. 아… 저 퇴사할 거니까 언니라고 부르라 하신 게 생각나서.”

김나현은 당연히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혼주의자라고 선언한 남자와 연애하는 거… 많이 힘든 것 같아요.”

“비혼주의자?”

유주는 연인의 비혼주의 선언에 대해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다행히, 김나현도 그가 뭐 하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비혼주의라는 신념 외 다른 것은 일절 묻지 않았다.

“유주 씨, 그 남자 분 진짜 많이 좋아하네요. 그런데 그쪽도 그런 것 같은데……”

김나현은 유주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눈치였다. 그녀에게선 결혼 1년 차 아내로서의 여유가 느껴졌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런 틀이 굳게 확립되어 버렸고 결국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둔 게 아닐까요? 물론 연애랑 부부 문제는 양쪽 다 들어 봐야겠지만, 유주 씨 입장만 일단 들어보면 솔직히 시간문제 같아요.”

유주 씨가 최대한 팩트 위주로 말해준 것에 의하면… 김나현은 덧붙였다.

“우리 신랑 선배 중에도 비혼주의, 독신주의 있었는데 그 중 결혼한 사람들도 있어요. 연애하고 동거하는 동안에도 그걸 고수했는데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름의 결말이 지어진 것 같았어요. 진짜 사랑해서 못 놓겠다, 어떤 일로 계기가 생기고 위기감이 느껴지면 아, 결혼밖에 답이 없구나, 깨닫고 그때부터 날 잡고 난리를 치더라고요.”

“하지만 너무 확고하면 그냥 쭉… 이대로 현상유지만 하다가 언젠가는 제 갈 길 가겠죠? 둘 중 한쪽의 감정이 식거나, 식지 않았어도 저만 결혼을 원하거나.”

“그렇겠죠. 그렇긴 하겠지만……”

김나현은 골똘히 생각하다 덧붙였다.

“어차피 그 신념이 자연히 버려질 경우에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 생각을 들려주었다. 이랬어야 하는데, 부질없고 의미 없지만 늦게라도 참고는 되어줄 말이었다.

“비혼주의란 건 사귀다 언제 접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사실 아무 의미 없는 건데. 비혼에 대한 고집이 아무리 강해도 어차피 임자 만나면 알아서 철회되니까요. 어떤 방식으로 알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유주 씨가 끝까지 몰랐으면 좋을 뻔했어요.”

“그렇군요. 사귈 때 비혼주의라고 미리 알려주는 게 예의라고들 하지만… 사실 상대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미리 알려주고 알고 할 필요가 없는 거겠네요.”

“그렇죠. 처음부터 작정하고 노는 상대로 확정한 게 아니라면. 아, 유주 씨 얘기는 절대 아니에요. 아니라고 생각해요, 진짜로.”

김나현은 허심탄회하게 말하다 황급히 제 말을 수습했다. 하지만 단지 수습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유주가 들려준 일련의 팩트를 들어보면 남자에겐 정말로 시간이 필요할 뿐인 것 같았다. 결혼의 필요성을 스스로 깨닫고 행동에 옮길, 나름의 짧은 시간을 요할 뿐이 아닐까.

* * *

그날 밤, 수지의 사진은 하나 더 업로드 되었다. 사진 아래로는 “사촌 언니 결혼한대요. 언니 미모가 반지보다 win!”이라 쓰여 있다.

사진 속 강다경은 한눈에도 뉴요커로 보이는 백인 남자와 웃으며 다이아몬드 반지 낀 약지를 들어 보이고 있었다. 며칠 새 팔로워 수가 부쩍 늘어난 사진 아래에는 댓글들이 수없이 달려 있었다. 유주는 맨 위의 댓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집안 유전자 진짜 버블이네요, 언빌리어버블! 전에 올린 삼촌도 이 세상 외모가 아니시던데 사촌 언니도 그러시고, 수지 님도 그런 유전자 받아서 미모가 저 세상이시네요. 사촌형부 되실 분도 완전 할리웃 스타일!

강주하, 강다경, 강수지, 다 강 씨 집안이었다. 유주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참을 울었다. 화장실 거울에 제 꼴을 비쳐 보니 얼굴선이 갸름하다 못해 턱이 뾰족해져 있었다. 3주 사이 옷들은 헐렁해져 죄다 오버사이즈 스타일이 되어 있다.

* * *

그해 마지막 29일, 유주와 동기들은 부산 해운대를 배경으로 사내 송별회 겸 망년회 밤을 화려하게 마무리하고, 다음 날 아침 서울행 KTX에 올랐다.

다들 전 날 밤의 여파로 곯아떨어질 동안, 유주는 노트북으로 장문의 이메일을 썼다가 지우기를 무한정 반복했다. 마침내 간결한 몇 마디를 예약 메일로 걸어두고 노트북을 닫았을 땐 기차가 서울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저기 쓸고 닦는 데 한나절이 꼬박 걸렸다. 어차피 철거될 건물이라 전문 청소업체까지 부를 필요는 없었지만, 그동안 제가 남긴 흔적은 최대한 지우고 가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제 것 아닌 가구와 비품들을 제외하고 그가 사준 물건들까지 죄다 박스에 담아 빼놓으니 짐은 거의 없었다. 처음 들어섰을 때처럼 캐리어 두 개가 전부다. 박스 안을 다시 확인해보니 옷과 화장품에 각종 액세서리, 가습기부터 최첨단 피부 케어 기기까지 수량도 많고 죄다 고가의 물건들밖에 없었다.

유주는 잠시 망설이다 자잘한 몇 가지를 도로 캐리어에 넣었다. 물건에 대한 미련보다 기억할 만한 것을 몇 개는 남겨두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다섯 달, 부산에 있었던 한 달을 빼면 넉 달 동안 정든 실내를 둘러보았다. 좀 더 많이 쳐볼걸, 피아노를 볼 때는 가슴이 아릿했지만 그 외에는 신기할 정도로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아, 왜 그런지 알겠다. 왜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깝진 않은지.

유주는 경비실 직원에게 음료수 박스를 건네고 돌아서며 동 건물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두 달 내에 허물어져 먼지로 스러질 건물이니까. 그리고 새 생명을 얻어 예쁘게 다시 지어질 곳이니까 그 정도로 슬프진 않은 것 같았다.

예쁘게 새로 지어져 누군가의 행복한 보금자리가 되길 바랐다.

* * *

주하야. 2시간 넘게 계속 썼다가 지웠는데 그냥 간결하게 말할게.

잠깐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 마침 대학 선배가 전공 관련 일을 제안해 줘서 지방에서 몇 달간 일해 볼 기회도 생겼고. 갑자기 정한 건 아니야. 지난 한 달간 부산에 있는 동안 많이 생각했어.

당분간 접점이 없는 게 최선이라 생각하지만, 그동안 연락을 완전히 끊지는 않을게. 우리 관계가 계속 지속되길 원하기 때문에 잠시 시간을 갖자는 결론을 낸 거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의논 없이 일방적으로 말하고 가게 돼서 미안하게 생각해. 연락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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