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비혼주의 금지법안
망망대해 위에 고적하게 뜬 섬을 낭만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한겨울을 섬에서 난다는 건 생각 외로 난항이었다. 삼다(三多)의 악명을 지닌 섬답게 바람이 무척 강했다. 본래 동절기엔 눈은 많이 와도 육지보다 따뜻하다 들었는데 올해는 조금 예외인 것 같았다.
“오메, 시베리아 고기압인지 저기압인지 때문에 올해는 이상 기온으로 확 내려가 버렸어. 바람도 아주 씨불탱이처럼 지랄 염병을 떨어대네. 하이고, 저 개새끼는 바람맞아 시원한지 또꼬망이 벌름거리는 게 아유, 남사시러워.”
정주 언니의 시할머니는 혼자 중얼거리다 독채 마당 구석에 앉아 있는 유주에게 슬쩍 다가갔다.
“으미, 아가씨. 그러고 앉아 있으면 드멩이 헐벗어서 안 추운디야? 모자라도 좀 쓰쇼. 응?”
“아… 모자. 네, 괜찮아요. 별로 안 추워요. 금방 들어갈 거라서요.”
유주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할머니에게 웃어 보였다. 머리 추워 보이니까 모자를 쓰라는 말씀이신 것 같았다. 본래 고향이시라던 전남 사투리, 현지 사투리에 적당한 서울말까지 섞이니, 말 한마디 하실 때마다 못 알아듣는 단어가 하나씩은 있었다.
그때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이자 정주의 시어머니인 조 여사가 나와서 어머니를 긴급 호출했다. 이 집에서 표준 서울말을 구사하는 유일한 분이다.
“어머니. 내일 가족 손님 온다니까 돔베고기 더 준비해야겠어요. 주방에 들어가셔서 한 번 봐주세요.”
“그랴. 으미, 내일은 눈도 씨불탱이 겁나게 온다드만…… 차나 안 막혀야 할 긴데.”
할머니가 들어가신 후에 유주는 조 여사에게 슬쩍 물었다.
“사장님, 씨불탱이는 무슨 뜻이에요?”
“그건 토속어 아니고 그냥 욕이야. 그러려니 흘려들어.”
유주는 아아, 하고 웃음을 조용히 억눌렀다. 그녀는 조 여사가 건네주는 당근즙을 홀짝이며 독채 1동으로 향했다.
1동 2층에는 원룸 두 채가 있었다. 큰 방은 얼마 전 혼인 신고부터 완료한 최소정과 김현서 커플, 작은 방은 그녀가 묵고 있다. 바다가 손가락만큼 보이는 전망이라도 조용하고 한적해서 좋았다.
위치와 시설 면에서 저렴하지 않은 곳인데도, 정주 언니의 시댁이라 월세를 꽤 싸게 해주셔서 다행이었다. 북 페스티벌 행사 임시직에게는 숙식 제공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날 저녁, 이브닝 뉴스에서 변태민이 나왔다. 후드 티를 뒤집어쓰고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 채 양쪽에 형사들을 끼고 걷는 품은 영락없는 범죄자였다. 정혜 언니의 톡이 아니었다면 그녀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유주야, 지금 뉴스 보고 있어? 대박! 변태민 그 새끼 현행범으로 잡혔다더라. 아유, 그러게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그 짓거리 여학생들, 조교들한테까지 했나 봐. 저런 놈들은 그저 좆방망이를 회쳐서 젓갈을 담가 버려야 된다니까. 이제야 정의 실현이지 뭐니.
뉴스 진행자는 대학 강사 B씨가 교수 아버지의 명예와 권한을 이용해 학부와 대학원 여학생, 조교, 그 외에도 업무상 알게 된 관공서 여직원들을 수차례 성폭행 및 성희롱, 혼인빙자 사기를 벌인 혐의로 검찰에 구속, 기소되었다고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뉴스는 곧 다른 이슈로 넘어갔고 유주도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저녁을 들었다. 게스트하우스의 사장님 가족들, 손님들과 소정 선배와 현서 선배 커플까지, 15인용 커다란 식탁을 가득 채웠다.
매일 저녁 대가족을 방불케 하는 유쾌한 저녁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적어도 저녁에는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소정 선배가 밑반찬을 열심히 맛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반찬 진짜 맛있어요, 사장님. 저 내일부터 좀 더 일찍 퇴근할 수 있거든요? 앞으로는 저녁 준비랑 설거지 도와드릴 테니 레시피 꼭 가르쳐주세요.”
“진짜 유주 덕분에 우리가 좋은 숙소를 알게 됐어.”
“그러니까. 유주 덕에 우리도 정주 언니 알게 됐고 이렇게 좋은 집에서 5월까지 있을 수 있다니 너무 좋아! 사장님, 저희가 북 페스티벌 하면서 여기 많이 홍보해드릴게요.”
소정과 현서 선배도 게스트하우스의 모든 것에 무척 만족스러워 보였다. 아직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법적 부부인 둘은 누가 봐도 한 쌍의 행복한 신혼부부 모습이었다. 세 사람은 설거지와 뒷정리를 거들어준 뒤 손님용 거실에 맥주 한 캔씩 들고 자리를 잡았다.
“유주야, 새삼 고맙다! 아무래도 제주까지 내려와 있어야 되니까 좋은 인력 구하기 진짜 힘들었는데. 2월부턴 본격적으로 업무 들어가니까 혜리도 미리 와서 너랑 놀고 있음 좋은데. 너 일부러 우리 방해 안 하려고 그러는 건 아는데, 가끔은 셋도 좋아. 오빠랑만 다니면 지겹잖아.”
“헐? 맞아, 나도 지겹다. 유주야, 지겨운 우리 커플 사이에 좀 끼어들고 그래라. 응? 마누라가 벌써 권태기 오나 보다.”
두 신혼부부의 티격태격에 유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에요. 이럴 때 혼자 여기저기 가보면서 홀가분히 있는 것도 좋아요.”
“그래. 근데 유주야, 여기 진짜 좋지 않니? 여기서 한 달 살기, 일 년 살기 왜 유행하는지 알겠어. 요즘 자연, 전원, 목가, 시골 이런 게 트렌드라며.”
“네, 저 사실… 여기 너무 좋아요. 맘 같아선 1년 살아보고 싶어요.”
“그럼 이번에 행사 끝나고 계약직 자리라도 따면 정말 좋겠다. 나야 힘이 없으니 실권은 없지만, 추천서라든가 도와줄 수 있는 만큼은 도와줄게.”
유주는 쓴웃음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의 말은 너무 고마웠고 섬도 좋았지만, 누군가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무거웠다. 여기 일 년간 있는 동안, 결국 자연스러운 결별로 치닫지 않을까 두렵고 겁이 났다.
서로를 눈에 담고 행복하게 웃는 선배 커플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강주하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 이기적인 개자식이 너무 보고 싶어, 창 너머로 보이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설경과 그림 같은 바다 안개도 심장에 오롯이 와 닿지 못했다.
윤아람을 비롯한 동기들과의 단톡방은 그대로 있었다. 그 대화창을 통해 간간이 전해지는 소식에 의하면, 강주하는 1월 초 귀국했고 이사로의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정식 발령은 본사의 디벨로퍼 팀이 BK의 자회사로 사옥을 독립해 나가는 2월경 이루어질 예정인 것 같았다.
강다경은 1월 말 공식적인 퇴사 후, 3월에 있을 결혼식 준비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뉴욕 도심의 메디컬센터 외과 의사로 재직 중인 미국인 남편은 최근 병원 근처에 신혼집을 마련해두었고, 두 사람은 거기서 행복한 신혼살림을 꾸려나갈 예정이라 들었다. 처음의 소문과 달리, 그녀의 부친은 BK의 오너가 아니라 대주주 중 한 명이었다.
윤아람은 강 대리가 얼마 전에 유주에게도 청첩장을 보내고 싶은데 잘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물었다고 전해왔다. 제주도에 와 있다는 건 동기들에게도 말하지 않아서 윤아람도 딱히 들려줄 말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왜 연락이 없을까.
한 시간만 연락이 안 되어도 편집증 환자처럼 굴었던 강주하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가 알던 강주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가끔은 지긋지긋했던 그 지독한 집착과 통제조차 그리울 지경인 걸 보니 서유주가 제대로 미친년이 되어 가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녀 쪽에서 먼저 연락할 순 없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바로 말해버릴 것 같았다.
주하야. 내가 널 사랑하는 것 같아. 네 돈, 네 지위, 다 필요 없고 너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너만 곁에 있어 준다면 결혼 따위 안 하고 이대로 쭉 가도 괜찮아. 정말 괜찮아. 그런데…… 역시 안 괜찮아.
너와 결혼하고 싶은 것 같아. 우리 그냥 결혼하면 안 되니?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그냥 우리가 묶여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 마음이 놓일 것 같은데. 강주하를 원하고 탐내는, 그녀보다 훨씬 더 나은 여자들은 저 겨울새 무리만큼 많을 테니까.
수지가 들려준 삼촌과 이모부 사이의 대화는 일단 접어 두었다. 대단한 사회생활을 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습득한 가장 중요한 처세의 요령은 첫째는 말조심, 둘째는 남이 전한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판단하지 말 것, 그 두 가지였다.
수지가 잘못해서가 아니다. 사람이란 본래 악의 없이, 본인이 듣고 싶은 쪽으로 해석해 전달하고 그 결과 와전과 루머가 생성된다는 걸 이른 사회생활로 일찍이 깨달은 바 있었다. 강 대리에 대한 것만 봐도 결국 진실이 드러났다.
문제는 그녀의 내면에 도사린 불안의 씨앗이었다. 오해가 풀린 뒤에는 더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오해를 하고 있을 동안의 시간이 너무 힘들고 괴로웠기에, 다시 이런 지옥 속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매달릴까 봐 무서웠다. 결혼하자고 매달리는 그녀를 지긋지긋한 눈으로 보면서 돌아서는 강주하의 모습을 보는 게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를 향한 그런 얼굴을 본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강주하, 이 나쁜 놈. 처음부터 왜 다가와서. 멋대로 시작해놓고.
눈물이 흘렀다. 소정 선배가 기겁해서 그녀를 살피자 술이 너무 달아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아서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강주하, 자기애로 똘똘 뭉친 이 개자식. 손해라곤 눈곱만치도 안 보려는 기회주의자, 이기주의 개새끼. 그런데 난 그런 네가 너무 좋아. 우리 그냥 결혼하자, 응? 너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유주야, 너 술 약한 줄은 알았는데 너무 빨리 취했다! 들어가서 자자.”
“선배님, 술이 왜 이렇게 달아요? 이거 마약 아니에요? 흠……”
주하야, 사랑해. 넌 나 사랑 안 해? 비혼주의고 나발이고 다 버리고 결혼할 만큼 사랑하진 않는 거야?
검푸른 달이 휘청거리는 그녀를 비웃듯 굽어보았다.
* * *
1월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오전부터 검푸른 하늘에서 눈이 한 송이씩 떨어져 흩날렸다. 자유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듯, 이름 모를 겨울새가 비명 같은 울음을 내지르고 푸드덕 날아가 버렸다. 며칠 뒤엔 혜리도 행사 지원군으로 날아올 예정이었다.
수지가 톡을 보내왔다. 엉엉 우는 이모티콘과 함께, 잘못했다는 까닭 모를 사과를 잔뜩 늘어놓고 있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수지야. 왜 그래? 뭘 잘못했다는 건지 말을 해야지. 통화할까? 내가 전화해?
-아뇨. 저 아빠한테 다 들켜서 지금 집에서 석고대죄할 준비 하고 있어요. 언니에게 미안한 건 나중에 다시 말할게요. 저 휴대폰도 이제 곧 압수될 거예요.
톡이 끊어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수지가 걱정되었다. 아버지가 알게 되셨다니 피바람까진 아니라도 엄청난 폭풍이 몰아닥칠 것이다. 부디 크게 혼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날 밤, 유주는 게스트하우스 원룸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녁에 먹은 것을 죄다 게워내고도 속이 쓰리고 울렁거려 죽을 것 같았다. 머리가 핑핑 도는 극심한 현기증으로 바닥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잠시 후, 찬 바닥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고 머리를 짚어 보았다. 지금이라도 본채 주인 부부에게 가서 병원에 가 보겠다 말할까 잠시 고민했다. 혜리도 이전 직장에 다닐 때 3차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쓰러져 일어나 보니, 병원에서 포도당 주사인지 뭔지 링겔을 꽂고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친구는 다음날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날은 오전부터 기력이 없고 힘이 쭉 빠져 있었다. 혜리처럼 과로에 과음이 겹친 경우는 아니다. 굳이 원인을 찾자면 극심한 스트레스와 그에 따른 위장병, 또 그 결과인 영양실조일 건 뻔했다. 그녀는 아스피린을 몇 알 털어놓고 잠자리에 누웠다.
* * *
겨울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고 맑았다. 유주는 3시 10분 전에 S호텔 1층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3월부터 호텔의 별관 문화센터가 북 페스티벌의 베이스캠프로 임시 오피스가 세팅될 예정이었다. 그녀는 소정 선배를 통해 연락을 받고, 임시직 대표로 다음 주에 있을 스태프 OT 관련 회의에 와 있었다.
“서유주 씨 맞으십니까? 이쪽으로 오십시오.”
호텔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그녀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해 10층 버튼을 눌렀다. 비즈니스 홀은 2층으로 알고 있는데 왜 10층이지?
“저 2층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요?”
“네, 10층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직원은 정중히 대답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유주를 로비 안쪽으로 이끌었다. 복도를 꼬불꼬불 미로처럼 지나 들어선 실내는 무척 고급스럽고 널찍했다. 통유리로 된 기역자 벽 너머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방이다. 시야가 탁 트인 객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앉아서 대기해주시면 됩니다.”
직원은 공손히 인사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육중한 양 문이 닫히고 소파에 앉아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담당자는 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도 센터 담당자와의 간단한 미팅치고는 너무 호화롭고 거창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와 커다란 업무용 데스크, 책장만 제외하면 호텔 브로슈어에나 나올 법한 스위트룸과 다를 바가 없었다.
10분쯤 지나자 슬슬 지루해졌다. 유주는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보았다. 자세히 보니 한쪽 벽면은 폴딩 도어 유리문 너머 옥외 테라스였고, 그 옆에 아담한 주방과 미니바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펜트하우스 객실에나 어울리는 넓이와 구조다. 미니바 끝에는 다른 문도 둘 있었다.
“왜 이런 스위트룸에서 미팅을……”
5분이 더 지났다. 유주는 커다란 업무용 데스크를 지나 폴딩 도어를 조심스럽게 밀고 테라스로 나가보았다. 바다를 마주한 정원과 이국적인 오션 뷰를 보니 비로소 휴양지로서의 명성이 실감 났다. 물론 그녀는 하룻밤 묵는 것도 꿈꿀 수 없는 환경이었다.
“우와…… 전망 진짜 좋다.”
“그렇지?”
갑자기 뒤통수에 와닿은 목소리에 유주는 깜짝 놀라 테라스 난간에서 손을 뗐다. 유리문 너머로 눈에 익은 실루엣이 비쳤다. 귀에 익은 음성이 이어서 말했다.
“안 들어올 거야?”
“강주하…?”
“문 닫고 이쪽으로 와.”
강주하가 그녀를 보지도 않고 업무용 책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울 BK 본사 오피스에 있을 때처럼 흠 하나 없이 완벽한 정장 슈트 차림이었다.
유주는 유리문 너머 실내로 들어섰다. 갑자기 테라스 쪽으로 강풍이 불어와 단정하게 정돈된 긴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흩날렸다. 문을 닫는 손끝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놀라움보다 다른 감정이 훨씬 더 강했다.
한 달 정확히는 두 달 전 뉴욕으로 출발하기 전 그를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때가 일 년 전처럼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졌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보고 싶었던 단 한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여기 있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나머지, 겁에 질린 것처럼 목 졸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강주하가 불붙인 담배를 이 사이에 끼운 채, 정장 슈트로 감싸인 제 몸을 책상 앞에서 일으켜 세웠다. 피부가 조금 까칠하고 얼굴이 조금 말라 턱선에 더 날이 돋아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몸이 기억하던 것보다 더 크고 건장해 보였다.
그는 유유히 문 쪽으로 걸어가 레버를 아래로 당겨 잠갔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낮게 명령했다.
-부를 때까지 문 앞에 아무도 얼씬 못 하게 해요. 어떤 소리가 들려도. 내일 오전까지.
미쳤나?
반가움이 잠시 사라지고 경악이 가슴을 서늘하게 채워 왔다. 유주의 몸이 저절로 바르르 떨렸다. 고작 오후 세 시 넘었는데 방을 안에서 잠그고 내일 오전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어떤 소리가 들려도?
“주하야.”
유주는 먼저 운을 뗐다.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강주하가 하도 느릿느릿 움직여서 숨이 막혔다. 이미 잡아 놓은 물고기 앞에서 급할 거 하나 없다는 태도였다.
“강주하. 여기 어떻게 있는 거냐고 물었잖아.”
“너는 정말 분위기 파악이란 게 안 돼, 서유주.”
그가 그녀를 노려보며 입술 사이에서 빼낸 담배를 손바닥에 그대로 쥐었다. 유주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조그만 홍염이 꽉 쥔 주먹 사이로 사라지며 살타는 냄새,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 것도 같았다. 강주하는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값비싼 슈트에 손바닥을 문지르고 탈탈 턴 뒤 성큼성큼 다가왔다.
“주하야, 너 손! 괜찮……”
“씨발, 내 손바닥 걱정이 되긴 해?”
강주하가 그녀의 목을 단번에 움켜쥐고 이를 갈았다. 등에 유리창이 세게 부딪쳤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그는 제 말대로 스스로도 어떻게 할지 모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이전에도 날을 세우고 덤벼들거나 싸우자고 어깃장을 놓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죽일 듯이 살의를 드러내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걱정되는 계집애가 나한테 그런 짓을 해?”
목이 거세게 잡혀 간신히 숨만 쉴 수 있었다.
“내가 그랬지, 분명히. 말없이 달아나지만 말라고. 그랬다간 나도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주하……”
“닥쳐, 내 말 끝나기 전까지 입 닫고 귀만 열고 있으라고.”
유주는 눈을 감았다. 몸의 아픔보다는 그가 표출하는 분노가 감당할 수 없이 두려워서 경련이 일었다. 완벽한 아몬드형 눈 속에서 불꽃이 거칠게 튀어댔다.
“떠올리기도 싫은 그 좆 같은 기억까지 소환시켜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그랬는데 감히 이렇게 뒤통수를 쳐…?”
“주하야, 내가 메, 메일에 썼잖아.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달아나는 것도 아니고 끝내려는 것도 아니라고…… 번호 바꾸지도 않고… 흑……”
유주는 거의 울먹이다시피 중얼거렸다. 그의 거구가 전신을 세게 눌러 와서 숨쉬기도 어려웠다. 일부러 그의 일에 방해되지 않게끔, 리스케줄링이 된 귀국일로 시간 맞춰 예약 메일을 보냈다. 수신한 것도 확인했었다.
“일방적으로 그따위 메일 하나 보내놓고 사라졌는데 뭐 하러 곱게 연락하고 앉아 있어. 이렇게 찾아내는 거, 일도 아닌데.”
강주하는 그녀의 목을 틀어쥔 손을 놓고 제 슈트 재킷을 벗어 던졌다.
“말이 무슨 소용이야. 오늘 꼭 들어서게 할 거니까.”
“뭐? 들어서게 한다니 무슨……”
유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주하가 무서울 만큼 노련한 손길로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겨내고 있었다. 브래지어는 니트째로 지퍼 뜯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스커트가 순식간에 허물 벗겨지듯 떨어져 나갔다.
유주의 머리가 핑 돌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제 벗은 몸이 객실의 카펫 바닥에 누워 있었다. 주하는 바지 지퍼만 내리고 성급하게 돌진해왔다. 정말로 미친 것 같았다. 거칠고 난폭하다는 표현도 부족했다. 원래도 어딘가 나사가 빠진 강주하는 지독한 광기가 더해져 정말로 미친 사람 같았다.
“주하…… 핫! 으흑!”
전희도, 애무도, 조심스러운 삽입과 내벽을 넓히려는 어떤 자극도 없었다. 강주하는 미친놈처럼 거칠게 쑤시고 들어와 안까지 깊숙이 박아 댔다. 굵고 두꺼운 음경이 사납게 자궁 입구를 두드리며 경부까지 넘어설 기세로 세차게 찔러왔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정말로 기절할 것 같았다.
“아읏! 아으읏…… 아흑! 응!”
“아파…?”
그가 놀리듯 이를 갈며 잠시 허리짓을 늦췄다. 하아, 하아, 내쉬는 숨결마다 진한 날 것의 체취를 머금고 있었다. 오직 강주하만의 냄새. 그녀가 너무도 좋아하는 체향.
“주하야, 나 정말 아, 아파. 이러지 마, 응? 진정하고 얘기부터 좀……”
“많이 아파?”
“응, 으흑, 아, 아파. 아프니까 제발……”
어젯밤 진짜 아파서 응급실에 갈 뻔했다고! 그렇게 세게 찌르면 아랫배까지 찌르르 아프니까 제발, 제발 좀.
“넌 좀 아파 봐야 돼.”
유주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사납게 번뜩이는 주하의 두 눈을 올려다보았다. 제대로 사정하고 애원해 보려 했지만,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야 다시는 달아날 생각을 못 하지.”
주하가 이를 악물고 다시 허리짓을 재개했다. 아아악, 사람 살려, 살려줘, 살려주세요, 비명이 뒤를 이었다. 유주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엉엉 통곡하기 시작하자 그는 동작을 멈췄다. 제 성에 찰 때까지 난폭하게 폭주해대려는 욕망을 간신히 눌러 참는 얼굴이다.
“잘못했어? 정말로?”
응, 으응, 유주는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며 신음만 흘렸다. 주하는 제 것을 음부에 꽂은 채, 카펫에 닿은 유주의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 다시 물었다.
“이제 다신 꿈도 안 꿀 거지? 나한테서 벗어나는 거.”
벗어나려던 게 아니었다고 아무리 말해도 귀담아듣지 않을 것이다. 제 허락 없이, 멋대로 이만큼 멀리 와 있다는 것 자체가 강주하에겐 대역죄나 다름없다. 그는 엄청난 공금을 횡령하고 야반도주한 중죄인을 잡아 단죄하는 무관이라도 되는 양 굴고 있었다.
“대답 안 해?”
그가 턱을 잡고 아랫입술을 살짝 물자 유주는 마지못해 응, 비슷한 신음을 흘렸다. 주하가 천천히 허리를 다시 놀렸다. 내벽 끝, 자궁 입구의 속살이 살포시 제 성기를 감싸주며 움찔거리는 감각이 미치도록 좋았다. 조금 화가 풀려서 천천히 하려고 했지만 두 달 가까이 참았던 욕망이 좀처럼 제어되지 않았다.
고환이 꽉 눌려 뭉개질 정도로, 그의 것이 질벽의 속살을 마구 짓이기고 뭉개며 소유권을 주장해 나갔다. 아프다고 앙앙 울고 몸부림을 치면서도, 자궁 끝의 속살이 귀두를 세차게 끌어당기고 조여 대는 쾌감에 당장이라도 싸 버릴 것 같았다.
처음처럼 일부러 아프게 콱콱 찔러대진 않는데도 유주는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다. 막돼먹은 페니스가 오랜만에 되찾은 제 둥지 여기저길 마구 찌르고 비벼대다 안쪽을 쿵쿵 박아 대는 열락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구잡이로 돌진하길 한참, 그가 허리를 어느 때보다 더 세차게 움직이며 박차를 가했다. 아아앙, 아앗, 이미 쉬어버린 목으로 유주가 한참 비명을 올린 끝에, 최대한도로 팽창한 성기가 억누르고 있던 압박감을 일시에 놓아버렸다.
“아아… 흣…… 으…읏…!”
해방감과 충만감, 열락과 환희 속에서 둘은 나란히 절정을 맞았다. 주하의 것이 토해 낸 뜨거운 열기가 물보라처럼 제 안을 흠뻑 적셔왔다.
절정 이후로도 그는 카펫 위에서 유주를 꼭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가 어깨를 살짝 치고 밀쳐내려 했지만 그는 밭은 숨을 내쉬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나갈 거야. 사정하고 오래 붙어 있어야 착상이 잘된다고 했어.”
“뭐라고…?”
“물구나무서면 효과가 더 좋다던데. 중력 때문에 정액이 더 깊이 들어가니까. 물구나무설까? 너 배란기니까 확실히 들어설 거야.”
“싫어… 힘없어. 제발… 좀……”
설마 아까 들어서게 한다는 게 아이를 들어서게 한다는 말이었을까? 혹시 일부러 제 배란기에 맞춰 온 게 아닐까 생각하니 소름이 쫙 끼쳤다. 그녀는 여전히 두 팔꿈치를 카펫에 대고 제 몸속에 머물러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설마…… 나 임신시키려는 거야? 너 미쳤니?”
“그게 너 이메일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 중 두 번째였어. 아이를 원해 본 적 한 번도 없었는데 너한테 최소 넷은 안겨야겠다 싶었지.”
“미쳐도 정말 단단히 미쳤구나. 결혼은 안 해도 아이는 갖겠다고……? 그것도 네 의사는 상관없이 너 혼자……”
“넌 아이 갖고 싶다고 했잖아. 외곽의 작은 땅콩 주택이라도 마당이 있어서 아이가 거기서 강아지랑 뛰어놀고 같이 꽃도 심고 그러고 싶다고.”
유주는 눈을 감고 한숨을 뱉었다. 그래서 지금 아이만 낳고 살자 이건가. 여기가 미국이니? 프랑스야? 스웨덴이냐고! 저 가증스러운 귓구멍에 대고 고막이 떨어져 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이제 나 어떻게 지랄 발광하는지…… 똑바로 봤으니까 이제 꼼짝도 하지 마. 알았어?”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다. 강주하는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고 얼굴 여기저기 입을 맞추며 무시무시한 협박을 가해왔다.
“또 도망가거나 말 안 들으면 이것보다 몇 배는 더 미칠 거야. 알았지?”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이제는 유주가 대답하거나 말거나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질문 세례만 계속 퍼부어댔다.
“내가 하란 대로 다 할 거지?”
“이제 그만 나가…… 내 몸에서 나가라고. 나 진짜 힘들어. 허리 아파.”
“하나만 더 물을게.”
그가 몸을 일으키다 뭔가 생각난 듯 다시 험상궂게 미간을 좁혔다.
“너, 여기 북 페스티벌 때 일하라고 구슬려서 데려온 선배. 그 여자 약혼자가 네 대학 시절 첫사랑이라던데.”
말 중간중간 이 갈리는 쇳소리가 다시 흘렀다. 도대체 어디까지 뒷조사 질을 하고 탐문 탐색을 한 걸까. 그건 또 대체 누가 흘린 걸까. 고 사장이라면 분명히 톡으로 언질을 줬을 것이다.
유주는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바닥에 너덜너덜 떨어진 옷을 집어 들어 땀과 체액으로 범벅된 몸을 가리려고 했지만, 주하의 손이 제 말에 대답하라 강요하듯 옷을 도로 낚아채 갔다.
“맞아? 왜 대답을 못 해?”
“선배들 이미 혼인 신고했어. 부부야. 엉뚱한 거 물고 늘어지지 마.”
“묻는 말에 대답해. 첫사랑이야, 아니야.”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휘어잡았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고개를 살짝만 돌리면 뿌리까지 뽑히는 아픔에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내가 미국 가서 너 연락 안 돼서 전전긍긍, 애태우고 있을 동안 너는 다른 새끼를 눈에 담고 애틋하게 보고 있었어? 응?”
“아냐. 아니라고……”
그가 더 오해하고 난폭해지기 전에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유주가 필사적으로 강주하의 팔 언저리를 움켜잡고 버텼다. 지금은 둘 사이에 의미 없는 타인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고 언쟁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질투할 대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하야, 잠깐만. 나 먼저 하나만 말할게, 제발 잠깐만……”
그가 잠깐 동작을 멈췄지만 차분하게 노려보는 시선은 그대로였다.
“주하야, 나, 나는 너……”
생각해보니 그는 단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이 시점부터 그 동등함은 사라질 것이다.
“너 사랑해.”
생전 처음으로 좋아하게 됐어. 사랑까지 하게 되어 버린 것 같아. 나도 내가 이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까지 강주하 너에게 의지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그래서 시간을 좀 갖자고 한 거야. 널 떠나기 싫어서. 헤어지는 게 맞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래서… 무서웠……”
유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주하가 그녀를 제품에 끌어당겨 꼭 끌어안았다. 유주는 바위같이 단단한 어깻죽지에 입술이 눌린 채 계속 속삭였다.
“넌 한 번도 말한 적 없으니까. 처음에 덮칠 때만 지금도 좋아한다고 했지, 사랑이란 말은 한 번도……”
“넌 역시 바보야, 서유주.”
그가 유주의 머리칼 깊이 제 코를 파묻고 말했다.
“내가 정말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면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그랬겠지. 난 너 처음부터 쭉 사랑했어. 7년 전, 입학식 때부터.”
입술이 머리카락 올올이 훑으며 소리를 이어갔다.
“그래서 마침 수지 봐줄 입주 튜터를 구한다길래 누나한테 온갖 아쉬운 소리 하고 빙빙 돌려 널 그 집에 넣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연락은 계속 씹지, 나 없을 때 또 알바 무리해서 하다가 쓰러지면 어쩌지, 걱정돼서 견딜 수가 없더라고.”
“뭐? 그럼 네가 일부러 수지 집에……”
유주가 포옹을 억지로 풀고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수지가 조카, 정확히는 사촌 조카인 줄은 알았지만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된 것도 그의 공작이었다니. BK회사에 제멋대로 입사시킨 게 첫 뒷공작이 아니었다.
“수지 그 녀석, 이상한 말 옮기고 아주 난리를 쳤던데. 멋대로 사진을 올리질 않나, 너랑 네 관계 전혀 모르고, 사람 말을 몰래 엿듣고 제 귀에 들리는 것만 주섬주섬 모아서 이상하게 왜곡하고. 지금쯤 제 아버지에게 단단히 혼나고 있을 거야. ”
주하의 손이 유주의 목선을 부드럽게 쓸다가 쇄골에서 멈췄다. 그는 유주가 뭐라 더 묻기도 전에 수지에 의해 와전된 이야기를 스스로 바로 잡았다.
“즐길 만큼 즐기고 결혼도 지금 사귀는 여자와 할 거라고 말했어, 분명히. 언젠가 결혼하게 된다면. 맞선은 그래, 솔직히 계속 들어와. 아무리 무시해도 툭하면 들어오는 게 혼담이야. 주로 외할아버지 생전의 사업 인맥을 통해서.”
“그렇구나…… 실제로 본 적은 있어?”
유주는 담담하게 물었다. 그녀와 재회하기 전 한두 번쯤은 봤을 수도 있다. 아무리 비혼주의를 고수해도 예의상 나가보기만 한 자리도 있었을 것이다.
“뭐라는 거야, 지금. 아까 내가 할 얘기 허투루 들었어? 결혼은 절대 안 할 거란 결심이 아니라도, 7년 전부터 너밖에 머릿속에 없었는데 무슨 선을 봐?”
유주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주하는 다시 그녀를 꼭 끌어안고 몇 번이고 말했다. 사랑한다. 7년 전부터, 아니 7년 전보다 훨씬 더 그녀 하나만을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주문처럼 되풀이했다.
“난폭하게 굴어서 미안해…… 유주야.”
두 팔이 그의 등을 마주 둘러 안았다. 진이 빠질 대로 기력이 쇠한 중에도 가슴이 뭉클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었다. 평생 이렇게 십 년이고 그 이상이고 연애라는 불확정 관계를 지속한다 하더라도, 그를 떠날 수도, 떠나보낼 수도 없다.
비혼주의건 뭐건 어쩔 수 없어. 결혼 안 해줘도 어쩔 수 없다고, 서유주. 넌 이미 이 인간에게 잡혀 버렸다고.
“결혼하자, 유주야.”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얼마나 혼자 고민하고 속 태우고 마음고생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나 쉽게 소원이 이루어진다니 거짓말이다.
“네가 그렇게 사라지고 깨달았어. 역시 법적으로 묶어 놔야 한다는 걸…… 법적으로 아무 관계 아니니까 찾기 힘들더라고.”
주하가 유주의 조그만 머리를 제 품에 꼭 보듬어 안고 애무하듯 쓸었다.
“공식 수사 아니라도 루트는 얼마든지 있지만… 기분 참 좆 같더라. 법적 보호자 아닌 취급 자체가.”
멍청이. 너 이렇게 쉬웠니?
“강주하, 너 이렇게… 쉬운 남자였어?”
천하의 바보 멍청이.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파렴치한 빌런 같으니. 이렇게 쉬울 거면서. 이럴 거면서 날 그렇게 힘들게 했니?
“뭐? 쉬운 남자라니 무슨……”
유주는 돌팔매질하듯 힘껏 두 팔을 휘둘렀다. 주하는 당황해하면서도 유주의 두 손을 꼭 제압하고 다시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아아, 아파! 왜 이래, 도대체… 말로 좀 해, 아니 밥부터 먹자. 너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았던 게 그 피죽도 못 먹은 얼굴 때문이야. 왜 이렇게 말랐어? 젠장할…… 밥 제대로 안 먹고 또 우유에 시리얼이나 부어서 때우고 그랬지? 이 몸뚱어리 내 건데 왜 이따위로 간수했어? 응?”
“너 때문이잖아. 말이나 못하면……”
주하는 연신 아야, 호들갑을 떨면서도 히죽대며 웃었다. 힘없는 손일 망정 머리채를 잡혔다가 주먹질을 당하고 손톱으로 사정없이 마구 긁히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그녀를 아기처럼 꼭 안고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그리고 속삭였다.
“사랑해. 미치도록 사랑해.”
* * *
결혼하지 마라, 주하야. 넌 결혼하지 마. 자식도 낳지 말고. 지긋지긋해, 정말. 돈 있으면 결혼할 이유가 없어. 적당히 연애하다 헤어지렴. 눈에 콩깍지 씌어서 장님 되는 건 어차피 처음 몇 개월이야. 자연스럽게 감정이 식고 헤어지고 그게 최선이야. 돈 있고 혼자 살면 얼마나 편해. 누가 귀찮게를 하니, 간섭을 하니.
어머니는 늘 한탄하셨다. 그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 말씀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훨씬 인간적인 편이었지만 지나친 이상주의자였다.
도덕적이며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부동산과 주식 투기 등 자본주의 활동에 놀랄 만한 수완을 보이는 아내를 늘 경멸하고 그나마 집에서 물려준 호텔도 수익보다는 온갖 자선활동의 공간으로 활용되게 하느라 말아먹기 직전까지 부실한 관리를 일삼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과 기름처럼 본질부터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결혼해서 자신을 낳으셨는지, 철들기 전 주하에게도 세계 최대의 불가사의일 따름이었다.
-돈이면 다 된단다, 주하야.
땅이 널리고 널린 미국에서 성공적인 땅따먹기로 자산을 일군 외할아버지의 말씀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미국 이민 1세대, 2세대들이 한식당과 세탁소, 작은 슈퍼마켓으로 생계를 이어갈 때 외조부는 건물 경비원으로 출근하기 전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녔다.
뉴욕과 맨해튼의 화려한 도심 너머 이민자 출신 빈민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인 브루클린과 할렘 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쓰러져 가는 낡은 주택들을 눈여겨보고 메모한 뒤,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곧바로 사들였다.
티끌 모아 태산으로 돈을 모으고 모아 명품 가방, 옷, 구두를 하나씩 쇼핑하는 여자들처럼, 그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구닥다리 썩어가는 집터를 쇼핑해서 사 모으는 낙으로 살았다.
휴가 때는 일리노이 주를 중심으로 여러 주택가와 도심의 구축 건물과 토지를 사들였다. 한인회 이웃들은 대체 왜 쓰레기 같은 동네 썩다리 집들을 보고 다니냐고 그를 비웃고 업신여겼다.
30년의 세월이 흘러갈 동안 뉴욕의 우중충하고 피폐한 슬럼가 땅은 굴지의 건설사에 팔리며 최소 열 배에서 삼십 배의 시세 차익을 남겼다. 일리노이 주 프로스펙트 하이츠 지역의 허름하던 건물들 역시, 10년 후 지역 최고의 부촌과 관광지로 거듭나서 조부에게 엄청난 수익을 안겨 주었다.
-주하야.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주식은 하루아침에 휴지로 탈바꿈될 수 있고 현금도 경제가 망하면 아무 소용없어.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발 디디고 선 토지, 땅만은 그대로 남아 있지.
-하지만 아빠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하셨는데요?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람 관리 잘못하면 망한다고요. 인심을 사는 게 제일 가치 있는 거라고 했어요.
-그래. 그게 동서고금 빈자들이 하는 말이지. 너희 아빠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쯧쯧. 그 인심이란 거, 사람의 마음이란 걸 얻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돈이라니까? 너는 쓸데없이 뜬구름만 잡는 네 애비 말은 귓등으로 듣고 흘려야 돼. 진짜 승자가 되어서 사내답게 살아보려면 이 할애비와 어미 말을 꼭 명심해야 한다. 네 어미라도 나를 닮아 얼마나 다행인지.
-으음… 하긴 가난하면 승자라 할 수 없겠네요.
-그렇지. 그리고 어지간하면 결혼은 하지 말아라. 너희 부모 사는 꼴 보면 잘 알겠지만. 한쪽이 처지는 결혼을 하게 되면 네가 손해 보는 장사인데 눈 뜨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네가 머리 굴려 증식한 부를 타인과 나눌 필요가 없어. 그렇다고 너에게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안겨줄 것 같은 집안 여자랑 엮이면 좋은가? 그건 또 아니야.
-그건 왜 안 좋아요? 손해 볼 거 없잖아요. 오히려 저에게 이득이고요.
-네가 기울면 널 휘두르려 들 테니까. 자칫하면 이용만 당하다 끝날 수 있어. 웬만큼 떵떵거리고 살 만큼 자산을 확보하면 적당한 힘은 알아서 굴러오게 되어 있으니, 자유롭게 사는 게 가장 좋지 않겠냐. 처가댁 명성, 타이틀 그런 거에 묶여서 노예처럼 기 못 펴고 살면 그게 사내답게 사는 것이니?
-결혼을 안 하면… 자식도 없잖아요. 그럼 제가 죽을 때는 재산 다 어떻게 해요?
-이름을 남기는 거지. 네 이름으로 재단, 학교, 법인을 최대한 많이 남겨두고 가라. 우리 주하 자식이면 유전자 안 남기긴 아까울 테니… 자식만 가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만. 할애비는 이미 후사가 있으니 내가 관에 들어가면 다 너랑 네 애미 거다. 그럴듯한 예술재단과 학교 하나쯤은 내 이름으로 남겨 두고 말이지.
할아버지는 열두 살짜리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사상 자체가 남다른 분이었다. 워낙 비범한 분이었기에 그때는 그런 가치관도 분명 옳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주하에겐 핀트가 어긋난 말씀도 있었다.
* * *
좆 같은 꼰대들에게 비혼주의니 뭐니 무심결에 흘려버린 이후, 서유주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는 몰라도 거리를 두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가끔씩 낯선 눈으로 그를 볼 때면 그 가냘픈 어깨를 움켜잡고 마구 흔들어대고 싶었다.
정신 차려, 서유주!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봐. 응? 씨발, 혼나기 전에 똑바로 안 볼래?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예쁜 눈, 무심한 차분함 너머 어렵지 않게 보였던 애정과 호의가 조금씩 더 짙어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보기가 어려워졌다.
겁이 났다. 갑자기 사라져 버릴까 봐, 그의 마음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떠나 버릴까 봐 무섭고 두려웠다. 12월, 유주가 업무차 부산에 내려가고 저는 뉴욕에 도착한 첫날 밤 23년 만에 악몽을 꾸었다.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깼는데 그 크고 넓은 집에 아무도 없었다. 아빠도, 엄마도, 집안일을 봐주는 아주머니도 없었다. 그날 밤, 다음 날 밤, 그 다음다음 밤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 하나만 있으면 족한 다섯 살에게, 엄마의 부재는 세상의 종말과도 같았다.
호화로운 스위트룸 침대 위에서 깼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기가 막힐 일이다. 엄마의 반복적인 부재에서 자연스레 터득된 진리, 세상에 절대적인 애정 따윈 없다는 걸 깨닫고 부쩍 성숙해진 일곱 살 이후로는 울어 본 적이 없는데. 내일모레 서른인 새끼가 자다가 처 울고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다음날, 뉴욕에 와 있는 권태하를 만나 업무 얘기의 연장인 척 슬쩍 떠보았다. JB트러스트 종합금융그룹 일가의 아들이자, 법무실장 겸 비공식적인 다른 직책으로 더 많이 활동하는 그는 결혼 네 달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것도 열두 살 어린 대학생이랑.
“태하 형. 신혼은 어때? 결혼 전후 달라진 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잡아 놨다는 데 의미를 두는 거니까. 깨 볶고 꿀 떨어지고 하진 않아.”
권태하가 시가를 이 사이에 끼우고 비릿하게 웃었다. 형제자매 하나 없이 외동으로 자란 주하에겐 이십 대 넘어서 알게 된 의형제 같은 존재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많았다. 비공식적인 것들은 준재벌급 금융그룹의 사생아 두 명 중 하나에, 본처 자식들 찜쪄먹고 후려치는 전 조직, 후 합법사업체 소속 깡패 출신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형. 결혼 말고 붙잡아 두는 다른 방법 없을까? 역시 애라도 만들어야 하나.”
“결혼 말고 그런 방법은 없어. 그냥 해. 코흘리개 시절 트라우마 따윈 지금 여기서 던져 버리고.”
권태하가 22층 스카이라운지 창 아래를 턱짓해 보였다. 주하는 묻지도 않고 형의 시가를 하나 빼서 입에 물었다. 결혼이란 제도 자체는 죽기보다 싫다고 생각해 왔지만, 아무리 밤을 새서 생각하고 생각해도 역시 그 결론이 맞는 것 같았다.
서유주도 그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일 것이다. 아무리 제가 훨씬 더 목매고 꼼짝 못 한다 해도 유주도 그를 사랑한다 믿었다. 애당초 비혼주의란 걸 알았을 때부터 은근히 이별 언질 주면서 달라진 이유가 그것 때문일 거 아냐, 씨발.
지지고 볶고 싸워서 집 나가도 법적인 부부니까 당당하게 잡아다 가둬둘 수도 있고. 애도 최소 둘은 만들어서. 행여나 살다가 질리고 싫어져서 이혼한다 뻗대도 도장 안 찍어주고 소송은 생각도 못 하게 애들 양육권이며 이것저것 걸고 넘어지면 될 것이다. 생각해 보니 결혼만 한 안전장치도 없었던 거다.
“시가가 확실히 다른 맛이 있네. 나도 이제 주문해봐야겠어.”
“다음번 구매 때 집으로 보내줄까? 쿠바 산이 역시 클래식이거든.”
“그럼 감사하죠, 형님.”
주하는 느긋하게 시가의 깊은 맛을 음미했다. 혼자 안도하고 혼자 결론 내리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권태하의 휴대폰에서 시그널이 울렸다. 서울의 자택에 꽂아둔 비서인 듯했다. 뭔가 마뜩잖은 상황이 벌어졌는지, 진중하던 권태하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갔다. 그는 험상궂게 명령했다.
“바꿔봐.”
상대가 받지 않겠다고 버티는 모양이었다. 권태하는 시가를 깊이 빨며 차분하게 명했다.
“안 받으면 아예 햇빛 한 점 안 드는 지하에 가둬 버린다고 전해.”
못 들은 척 창 너머로 시선을 주던 주하의 눈썹 한쪽이 꿈틀 움직였다. 설마 와이프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권태하가 말을 잇는 순간, 주하는 설마가 맞다는 걸 알았다.
“왜 난동이야? 집구석에 얌전히 처박혀 있으랬지.”
상대도 보통내기가 아닌 듯, 악을 쓰거나 소리치는 기색이 여기까지 느껴지진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언성을 높이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너. 너도 성깔 보통 아닌 건 잘 아는데… 난 못 이겨, 절대.”
권태하의 입술에서 부러진 시가가 툭 떨어졌다. 완벽하게 잘 자리 잡은 이목구비가 서늘한 조각 같아 더 위압감이 들었다. 그가 남은 시가도 내뱉고 이를 악물었다.
“나는 못 이긴다고. 좋게 말할 때 얌전히 집에 있어.”
권태하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저도 모르게 그 표정을 지켜보던 주하의 입꼬리도 슬쩍 흐트러졌다.
“내일모레 도착해서 집구석 문턱 넘는 순간 그 자리에 그대로 없으면,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테니까. 아니, 아예 몸에 뼈 몇 대는 부러뜨려 버릴 테니까. 내가 한다면 하는 거 알지?”
권태하는 제 말만 내뱉고 우아하게 휴대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주하는 눈치 보고 말 것도 없이 낮게 물었다. 설마 형수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태하형. 방금 통화, 형수 아니지?”
“맞는데.”
그가 심드렁한 눈으로 시가를 새로 꺼내 입에 물었다. 방금 무슨 일 있었어? 묻듯 여상한 어조가 더 소름이 끼쳤다. 뼈 몇 대는 부러뜨려 놓겠다는 겁박을, 조폭 중간급 대가리가 크게 실수한 햇병아리 신참에게 할 법한 협박을 이제 막 신혼 넉 달 차 어린 아내에게 했다니.
“아무리 친형 같은 형이라도 남의 가정사는 알고 싶지 않지만. 형수… 이제 겨우 스무 살 아니야?”
비공식 결혼이라 직접 대면한 적은 없고 사진으로만 본 적 있었다. 교복을 입히면 영락없이 여고생일 앳된 분위기에 꽤 예쁘고 매력 있는 얼굴이었다. 물론 제 타입은 아니다. 강주하의 타입은 오직 한 사람, 서유주의 머리끝에서 시작해 서유주의 발끝으로 끝난다.
“아, 사진 본 적 있지. 내년 설 연휴 전에 정식으로 한 번 초대할게.”
권태하는 동문서답 식으로 빙긋 웃고는 덧붙였다.
“너도 보아하니 7년 전 그 첫사랑과 조만간 날 잡을 거 같은데. 넷이 같이 보면 더 좋고.”
“별일 없는 거겠지. 나도 넷이 보길 바라. 진심으로.”
주하는 눈치 빠르게 권태하의 속을 더 파고들지 않았다. 알고 지낸 지 이제 3년째, 칼 맞을 뻔한 걸 서로 구해 준 목숨 빚으로 이어진 인연은 짧지만 30년만큼 길었다.
어린데 만만치 않은가 보네. 기싸움이 대단해, 아주. 하긴 태하 형 상대인데 어련하겠어.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권태하가 제 와이프에게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지극히 냉담하고 차분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지금 권태하는 부글부글 속을 끓이고 있었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유일무이한 상대 때문에 속을 썩는 건 그나 형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런 부분에서도 공통점이 있다니 참 인연은 인연인 듯했다.
* * *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올수록 서유주가 너무 보고 싶었다. 절절하고 애틋한 그리움 같은 건 팔아먹기 좋게 꾸며진 노래 가사, 시 구절인 줄만 알았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감정이었다.
크리스마스고 나발이고, 밸런타인데이의 초콜릿 장사치들처럼 그저 케이크 하나, 장난감 하나, 허접스러운 재고 상품 더 팔아먹으려는 사행성 조장의 아름다운 명분일 뿐이라 여겼건만 25일이 이렇게 특별하게 와 닿을 수 없었다.
미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것 같았다. 가슴이 붕 뜬 것처럼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전신이 가볍고 설렘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 이브 전날 서울에 도착해 제일 먼저 찾아갈 한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설렘은 더 커져 갔다.
매일 되풀이되는 반복적인 자연현상에 관심 따위 둔 적도 없었다. 때 되면 해와 달이 지고 뜨는 것을 의식한 것은 천문학 책을 읽고 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했던 어릴 적이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이국의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겨울 달, 도심 여기저기 남아 있는 잔설과 허드슨 강 위의 얼음 조각은 물론, 싱가포르의 반짝이는 열대야 운하를 보고 감상적이 될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그게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겨져 부끄럽다거나 민망하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유주가 여기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 냄새 나는 듯 안 나는 듯, 황량하면서도 포근한 이 대도시의 차디찬 공기 아래 나란히 걸을 수 있다면. 매일 수없이 똑같은 생각을 곱씹으며, 극과 극의 기후 사이를 오가며 정신없이 분주한 업무를 이어 나갔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건 분명히 있었다. 돌아가신 외조부의 말씀처럼 돈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빌어먹게도 서유주는 그 거의의 범주에 속하는 유형이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거금을 들여서 제일 간지럽고 구질구질하다 생각하는 헛소비 중 하나를 감행했다. 돈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서유주의 마음을 보다 확실히 붙잡기 위해 돈지랄을 벌인 것이다.
아깝지 않았다. 몇 배 더 쓴다 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주식, 채권, 부동산, 회원권, 차량 외에 자동으로 입금되는 현금만 실제 쓰는 것보다 열 배 넘게 들어온다.
설령 그런 바람직한 현금 흐름을 구축해 놓지 않았다 해도 서유주에게 들이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투자 가치와 결과만 중요할 뿐.
정말 맘이 안 놓이는 계집애니까. 호락호락하진 않아도 조금만 더 고분고분하면 좋을 텐데.
주하는 뉴욕 5번가, 하이엔드 브랜드 아케이드 안쪽의 가게에서 매니저가 보여주는 보석들을 하나씩 품평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이엔드 브랜드, 말 그대로 일반인들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이름을 내건 작은 알갱이들은 지극히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예술품처럼 보였다. 건물 한 채, 아파트 한 가구 가격의 작품도 부지기수다.
주하는 매니저의 추천을 받은 링을 무심한 척 들여다보고 정식으로 주문을 넣었다. 지금까지 유주에게 목걸이, 이어링, 시계는 선물한 적 있지만 반지는 처음이었다.
* * *
검푸른 쪽빛 바다에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차가운 달과 별빛이, 바다 대신 창공에 일으키는 검은 윤슬처럼 어두워진 사위에 반짝임을 더했다.
“그렇게 반지까지 마련했는데 결국 계약이 늘어져서 크리스마스 때 못 오고 말았잖아. 내가 얼마나 분하고 원통했는지, 넌 정말 모를 거야.”
그로부터 한 달이 넘은 지금, 주하는 한 줌밖에 안 되는 작은 상자를 꺼내 보였다. 반짝이는 상자 안에는 그보다 훨씬 더 빛나는 것이 있었다. 주하는 일 초도 허비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서유주. 결혼하자.”
나랑 결혼해 줄래, 떨리는 긴장 대신 둘 사이의 결혼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음색이다. 너무나도 강주하다운 청혼이었다. 유주는 제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그의 손길을 제지했다.
“그렇게 철저히 고수해 온 비혼주의인데 이렇게 쉽게 버려도 되는 거야? 잘 생각해야 돼, 강주하. 한 번 끼우면 끝이라고.”
“너야말로 이거 한 번 끼우면 영원히 못 뺄 줄 알아. 절대 못 물려.”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약지에 다이아몬드를 끼우기 시작했다.
“나, 아직 대답 안 했는데?”
“안 한다고도 안 했잖아.”
주하는 제멋대로 반지를 마디까지 꼭 끼웠다.
“솔직히 말해. 너 내가 결혼만은 절대 안 한다고 해서 여기까지 맘대로 와 버린 거잖아. 카드도 안 받고 집도 싫다, 돈도 싫다.”
유주는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돈이 싫을 수는 없었다. 힘들게 살아왔는데 돈이 싫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VVIP카드, 집문서나 소유권 이전 등기, 호화로운 럭셔리 명품이 아니었다. 강주하의 곁에 쭉 있을 수 있는 영속적인 것, 결국은 혼인 증명서나 가족 관계 증명서 같은 서류 한 장이었던 것 같다.
“알고 보면 제일 큰 걸 바라고 있었나 봐.”
“응?”
주하가 유주의 손 마디마디를 장난치듯 주무르다 그녀를 보았다.
“욕심이 너무 과하다 뭐라 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가… 그렇게 뻔뻔하게 말할 수는……”
유주는 밑도 끝도 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 막 깨달았는데, 주하야.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린 게 아닐까? 넌 모든 걸 다 가졌지만 나는… 난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너 지금 내가 그런 거 해주길 원해? 대신 내 심장을 가졌잖아. 너는 태어난 것 자체가 나 강주하를 가질 자격 모두야. 뭐 이런 영화 같은 대사?”
주하가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유주는 웃지 않았다. 실컷 욕심을 부릴 땐 언제고 이제 반지를 받고 보니, 그동안 존재도 몰랐던 현실적인 자괴감이 마구 밀려왔다.
“난 정말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주하야. 돈도, 좋은 집안도……”
“우리 집 돈만 많은 졸부 콩가루 집안이고, 고로 돈은 내가 많으니까 괜찮아.”
“난 절세 미녀도 아니고 고분고분 순하지도 않아, 주하야.”
“나한테는 절세 미녀 그 이상의 미모고, 너 대학 때부터 인기 많았지만 철벽 잘 쳐 와서 그거 하난 정말 기특하고, 회사 놈들도 은근 눈여겨보는 것 같아서 퇴사한 것도 결과적으로 잘한 거고 음… 사실 그 뒷부분은 맞는 얘기긴 해.”
강주하가 손을 잡은 채 진지하게 덧붙였다.
“서유주가 은근 한 성깔 하지. 고분고분 순둥이는 못 되지, 암.”
그가 손을 들어 손톱 쪽 마디에 입을 쪽 맞췄다.
“그래도 어떡해. 내가 좋은데.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데.”
유주의 얼굴에 서서히 열기가 피어올랐다. 손가락 마디마디 입술을 비비는 간질간질한 감촉 때문인지, 그의 새삼스러운 고백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처음에는 네가 강 대리랑 나 사이 오해하고 사라진 줄 알았어. 수지 SNS로 알았겠지만 내 사촌이야. 강다경.”
“응.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알게 됐어. 결국은.”
오해해서 떠난 게 아니었다. 오해였다는 진실을 알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떠난 것이다. 유주는 신기한 듯 다이아몬드를 한참 들여다보다 손에서 뺐다. 주하가 정색하며 그 동작을 제지했다.
“왜? 너무 꽉 조여?”
“아니, 딱 맞아. 다시 상자에 넣어두려고. 너무… 음, 너무 비싸 보여서. 잘못하다 흠이라도 나면.”
“괜찮아, 엄청나게 비싸진 않아. 적어도 자기 전까지는 좀 끼고 있어. 청혼한 기분 좀 내보게. 응?”
주하는 유주의 손을 지그시 눌러 잡았다. 액수를 들으면 깜짝 놀라다 못해 뒤로 넘어갈 테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다. 서유주의 마음은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는 것이니까.
“주하야, 이제 말해줘.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역시 정혜 언니, 정주 언니 통해서?”
하지만 그랬다면 자매들이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처음 보름 정도는 미치도록 고민했어. 잠도 안 오고 식욕도 없고… 지옥 같았지. 내가 대체 뭘 잘못했을까 수백 번, 수천 번 생각했지. 역시 그놈의 비혼주의 나불거린 것밖에 집히는 게 없더라고. 그리고 결론을 내렸어. 널 붙잡을 수 있다면 결혼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
그가 유주의 손가락을 집어 들어 희고 가느다란 살갗을 매만졌다.
“그래서 다 한자리에 불러 모았지. 음씨 자매와 이태원 그 사장까지. 구구절절 늘어놓을 거 없이 이 반지 보여 주고 말했어. 서유주랑 결혼하려고 반지까지 맞춰왔는데 그 여자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고.”
원래는 약혼반지였지만 유주가 사라지고 나서 프러포즈 반지로 용도 변경되었다는 말까지는 그들에게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입이 떡 벌어져 서로 시선을 주고받기 바빴다. 눈치를 보아하니 유주의 고민, 사라진 진짜 이유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럼 어디로 갔는지 행선지를 아는 것도 불 보듯 뻔하다.
“그리고 서프라이즈니까 절대 너한테 미리 연락하지 말라고 좋게 말했어.”
유주는 그 장면이 눈에 선했다. 제 표현으로 좋게 말했다뿐이지, 얼마나 은근히 위협을 가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됐다. 고 사장이야 그렇다 쳐도 보통 성미가 아닌 정혜, 정주 두 자매도 강주하의 상대로는 역부족이다.
“고 사장님이었구나……”
유주는 낮은 한숨을 흘렸다. 당황한 나머지, 현서 선배와 소정 선배의 제안으로 제주도에 갔다고 횡설수설 털어놓는 동안 대학 때 잠시 동경의 상대일 뿐이었던 현서 선배를 첫사랑으로 지칭한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강주하의 뚜껑이 활짝 열렸을 것이고, 득달같이 여기 내려와 패악을 부리다시피 그 난리를 친 것이다.
“응?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손가락 하나하나 입을 맞추던 키스가 점점 범위를 넓혀갔다. 주하의 감미롭고 집요한 입술은 손목으로, 귓불과 목 안쪽, 턱과 입술로 옮겨 갔다. 본격적으로 키스하려던 그가 얼굴을 살짝 떼어냈다.
“눈이… 울려는 것 같은데. 혹시 감동해서 그래?”
유주는 도리도리 젓는 것도 아니고 끄덕이는 것도 아닌 애매한 고갯짓을 하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주하는 밀려나지 않고 촉촉이 젖어 드는 눈꺼풀 위에 살며시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간질거리는 감촉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유주는 살짝 내려뜨린 눈을 다시 들었다. 노크 소리가 좀 더 크게 났다.
“주하야, 잠깐만, 누가 들어오……”
문고리가 달칵, 조심스럽게 돌아갔다. 호텔 여직원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카트를 노련하게 밀고 들어왔다.
“실례했습니다. 디저트 바로 올리겠습니다.”
아무것도 못 본 척하는 얼굴은 깍듯하고 무표정했다. 유주가 황급히 어깨를 밀어내자 그제야 주하의 입술이 살짝 떨어지며 빠르게 세팅되는 테이블 위를 무심하게 훑었다. 직원은 공손하게 인사해 보이고 방을 나갔다.
형형색색 다쿠아즈, 오렌지 블라썸 프레스데 부아 스트로베리 앤 코코넛 무스와 피치 파블로바 앤 베버나 머랭 크림 아이스크림이란 길고 긴 이름의 디저트들이 화보 사진처럼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
유주는 호화로운 테이블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초록색 다쿠아즈를 하나 집어 들며 주하를 돌아보았다. 직원 앞에서 냉담하던 얼굴이 다시 활짝 밝게 피어나 있었다.
“주하야. 우리 내일은 오소리 해장국 먹자. 디저트는 부산 명물 30년 전통의 빵집에서 팥이랑 떡이 가득 든 우유 팥빙수.”
“그게 먹고 싶어? 그래, 가자. 어디든 너 먹고 싶은 곳으로.”
“여러 번 말했는데 나 아재 입맛이야. 이런 마리 앙트와네트 스타일은 가끔, 아주 가끔만으로 충분해.”
난 너만 있으면 되니까, 저도 모르게 마지막에 덧붙여 버렸다. 주하는 그녀의 찻잔을 채워주다 티팟을 내려놓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눈이 순수한 기쁨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어? 아냐, 아무것도.”
유주는 다쿠아즈를 한 입 베어 물다 모른 척 주하를 외면했다. 귓불부터 발갛게 물들어 맛이 어떤지 느낄 수도 없었다. 주하는 물러나지 않고 집요하게 그녀의 턱을 잡아 돌렸다.
“분명히 뭐라고 했는데…… 다시 말해봐.”
“들었잖아. 들었는데 뭘 다시 말해!”
유주는 다쿠아즈를 채 씹지도 못하고 삼키며 주하의 어깨를 다시 밀어냈다. 분명히 들었으면서 짓궂게 재확인을 하려 드는 그가 미웠지만 미워할 수가 없었다.
“부끄러워하긴. 귀여워 죽겠어.”
주하는 유주의 입가에 묻은 크림 가루를 손가락으로 쓸어주며 옅게 웃었다. 심장이 저릴 만큼 아름답고 다정한 미소였다. 그는 제 입술이 그녀의 것에 내려앉기 직전 다시 한번 속삭였다.
“나도 너만 있으면 돼, 우리 유주.”
다쿠아즈의 달콤한 녹차향이 주하의 체취와 섞여 그녀의 입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혀는 테이블 위의 것들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황홀한 풍미를 자아냈다. 온갖 미사여구로 작명된 고급스러운 디저트, 어떤 와인도 그의 키스에 견줄 수는 없었다.
* * *
S호텔 입사 4년 차 윤진아가 한숨을 깊이 내쉬며 스테이션으로 들어왔다. 예약 현황 리스트를 훑어보던 동기 김나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진아 대리. 왜 그래? 축 처져서…… 혹시 컴플레인 들었어? 안 그래도 오늘 밤 V-A룸 엄청 까다로운 고객이시고 연인에게 프러포즈하신다고 해서 세팅도 최대한 로맨틱하게 신경 썼는데. 문제 생겼니?”
아니, 윤 대리는 고개를 저으며 제일 친한 동기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컴플레인 같은 게 아니라…… 우리 가끔 V룸에서 키스하고 더듬는 거 보잖아? 노크하고 들어가도 정신없는 경우들이 많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어떤 광경이 시야에 들어오든 기물파손만 아니면 눈뜬장님 행세해야지. 그런데 왜?”
“방금 엄청난 장면을 봤어…… 봐버렸어.”
“무슨 장면? 쉿. 목소리 낮춰. mic도 오프인 거 확인하고.”
“나희 대리. 눈에 키스하는 거 본 적 있어? 남자가 여자 눈에.”
김 대리는 당연히 없지, 고개를 젓고 거의 음소거로 물었다.
“그 까탈스러운 고객분이 여친 눈에 키스했어? 청혼이 성공적으로 잘 됐나 보다.”
“그런 것 같아. 여성분 약지에 다이아몬드 끼워져 있었고…… 분위기가 완전히 한 편의 영화였거든. 너무 부러워서 한숨이 나왔어. 지난달에 그놈이랑 깨져서 더 부러웠나 봐.”
“눈에는 키스를, 손에는 다이아몬드를? 헉… 너무 로맨틱하다. 잘생겼어? 여친도 예쁘고? 난 한 시간 늦은 시프트라 얼굴 못 봤잖아.”
윤 대리가 장난하냐는 얼굴로 동기를 보았다.
“이따 나가실 때 봐. 내가 왜 여자분을 부럽다고 했겠어? 여자 쪽도 꽤 예뻐. 인공미 없이 맑고 단아한 느낌? 근데 남자가… 그냥 이 세상 외모가 아니야. 얼굴도, 피지컬도. 어깨가 그렇게 넓은 거 보면 키도 분명히 클 거고.”
김 대리의 눈이 아까보다 더 커져 있었다. 전에 내로라하는 톱스타들이 대거 몰려와 영화 종방 기념 회식했던 날만큼 두 눈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잘 생겼어?”
“응. 근데 좀 무섭더라. 못 들었나 싶어서 노크 한 번 더 하고 들어가니까 방해 받아 그랬는지 얼굴에 순식간에 냉기가 돌더라. 근데 세팅 다 하고 물러가려 하니까 여친을 다시 돌아보는 표정이 확 변하더라고. 급 온화해지면서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데… 그 짧은 순간 갭이 너무 컸어.”
“어쩜, 어쩜! 여친 바라기인가 봐. 이따 꼭 봐야지.”
“다이아몬드도 무지 비싸 보이더라. V룸 애용 고객들이야 웬만한 보석은 놀랍지도 않은데 그런 건 처음 봤어. 할로 세팅이 보통 고급진 게 아니던데…… 아마 피라미드에서 최상위인 그라프나 레비예프 정도가 아닐까.”
“꺅. 구매 불가능한 코어의 정점이구나. 이 호텔 대표라면 모를까… 흑흑.”
아예 음소거를 하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던 김 대리가 갑자기 엄청난 사실을 깨달은 듯 입을 쩍 벌렸다. 그녀는 스테이션 구석의 데스크톱으로 동기를 이끌고 V-A룸 위클리 예약자 리스트를 보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시프트 들어오기 전 장대리한테 들었는데 그쪽 매니저님이 그러셨대. 오늘 그랜드 스위트룸에 체크인한 고객이 대표님 일가니까 각별히 신경 쓰라고. 지금 보니 V-A룸의 예약자 성함이……”
그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비스트로 총괄 매니저가 스테이션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 제대로 언더 컨트롤 중이지? 오늘 대표님 아드님이 V룸에 예약하셨다는데 철저한 완벽주의라 하니 조금의 실수도 없게 각별히 신경 쓰도록. 언제 경영권을 승계 받아 새로운 상사가 되실지 모르잖아.”
“네, 잘 알겠습니다.”
역시 그렇구나, 두 여자의 긴장된 시선이 짧게 공감을 나눴다.
* * *
두 사람은 오랫동안 점거했던 레스토랑 프라이빗 룸을 떠나 몇 시간 전 그와 재회했던 스위트룸으로 돌아왔다. 밤이 깊어갈수록 단둘만의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유주는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테이블에 올려둔 약부터 찾았다. 그녀는 말 안 듣는 아이를 혼내는 엄마 같은 얼굴로 주하의 손목을 덥석 잡아끌었다.
“손바닥 약 한 번만 더 바르자.”
“괜찮아, 1도 화상이라니까. 소싯적에 담배빵 당해봐서 잘 알아.”
유주가 도끼눈을 치뜨자 주하는 정말 말 안 듣는 아이처럼 킥킥 웃었다.
“내가 해 준 적이 훨씬 더 많아.”
유주는 커다란 손바닥을 감싼 거즈를 떼어내고, 벌겋게 부어오른 살갗에 연고를 발랐다. 주하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유주는 입술을 앙다물고 웃음을 참는 주하를 보며 재차 다그쳤다.
“응? 대답 안 해?”
“그렇게 걱정됐어? 그때 정말 울 것 같긴 했어, 네 얼굴. 무서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걱정돼서도 그랬구나.”
유주는 말없이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주하가 싫어, 더 잡고 있어 줘 항의하듯 제 손을 다시 그녀의 손 위에 턱 올려놓았다. 유주는 손을 살며시 다시 잡아주며 낮게 중얼거렸다.
“네 몸……”
“응?”
“네 몸 소중히 해. 내 거잖아.”
깊은 한숨이 둘이 앉은 소파까지 들썩거리게 했다. 돌아보니 주하가 입술을 꽉 물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손과 맞잡은 그의 손에 바짝 힘이 실렸다.
“유주야. 그동안 여기서 뭐 먹고 살았어?”
“뭐…?”
“아니, 이 섬에 무슨 신기한 열매가 열리나? 뭘 먹었길래 이렇게 예쁘고 달달한 말만 하냐고!”
그가 더 못 참겠다는 듯 유주를 꼭 끌어안고 머리에, 뺨에, 얼굴 여기저기 입술을 비비고 혀로 핥았다. 아악 저리 가, 숨 막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는 힘을 빼지 않고 압사시킬 기세로 포옹을 더 가해왔다.
“유주야, 서유주.”
“으응…… 힘 좀 빼. 흣……”
“사랑해, 유주야.”
그가 유주의 작은 머리를 꼭 끌어안고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염병, 그따위 빌어먹을 비혼주의…… 아예 비혼주의 금지법안을 만들어 비혼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것들은 한데 다 모아놓고 정신 교육을 시켜야 돼.”
스스로를 향한 질책은 이내 애먼 사람들까지 한 묶음으로 싸잡은 비난으로 이어졌다. 유주가 그의 등을 세게 치며 제발 나 숨 좀 쉬자, 울먹인 뒤에야 주하는 포옹을 풀어주었다.
사랑해. 미치도록. 내 목숨보다 더.
그는 수없이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침실로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려 데려가는 내내, 옷을 벗기고 녹차와 오렌지, 코코넛과 복숭아 캐러멜 향이 한데 얽혀 합주를 이루는 도톰한 입술과 입 안쪽을 끈적하게 훑는 동안에도 고백은 멈출 줄을 몰랐다.
행복감에 눈물을 글썽이는 유주의 눈꺼풀이 그의 따뜻한 입술에 다시 내리덮였다. 넓고 단단한 어깨너머, 창 반대편에서 흩날리는 눈꽃들이 보였다. 폭설을 이룰 기세로 마구 쏟아지는 눈 속에서, 둘은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며 한 몸으로 녹아들었다.
사랑해, 유주야.
사랑해, 주하야.
두껍게 내려앉은 눈(雪)도, 다가오는 봄 햇살과 안온한 공기 속에 결국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온기, 그리고 온기 이상의 훨씬 더 깊고 짙은 것들은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 있겠지.
이제는 너를 믿으니까. 끝없이 내 안을 잠식해오던 불안을 네가 직접 녹여버렸으니까.
Epilogue: 맹수와 조련사, 명기(名器)와 용주(龍珠)
설 연휴를 며칠 앞둔 2월의 금요일, 유주는 주위의 낯설고 무서운 환경을 불안한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와보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이다. 그것도 관광, 휴양지로만 생각했던 이 섬에서 이게 뭔 일이람.
챙챙, 금방이라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징을 울려댈 것 같은 지옥문 문지기 조각상과 인형들, 요괴처럼 생긴 온갖 벽화와 그림들이 천장에 매달린 연등 아래 빽빽하게 방을 채우고 있었다.
뒤를 힐끗 돌아보자 정주 언니의 모습이 유리문 너머 살짝 보였다. 그녀는 유유자적 차를 마시며 남편으로 짐작되는 누군가와 조곤조곤 깨 볶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아낀다는 의자매 동생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곳에 밀어 넣고 자기는 저렇게 한가하게 깔깔대다니.
그때 반대쪽에서 누군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유주의 시선이 향해있던 유리문을 커튼으로 확 막아버렸다. 30대, 혹은 40대로도 보이는 여인이 사극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머리에 쪽을 지고 연보랏빛 한복 차림으로 유주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인이라 하긴 어려웠지만 복스럽게 동그란 얼굴은 조금 웃어주면 호감이 갈 만한 인상이다.
“기도 시간 안 끝났는데 특별히 봐준다. 내일 서울 올라간다니까. 정주 년이 하도 예비부부 봐달라고 부탁해서 말이야. 저년 시댁에 신세 진 게 좀 있어서.”
“네? 네… 감, 감사합니다, 선생님.”
얼떨떨한 가운데서도 감사를 표하던 유주는 여인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라 방석에서 널브러질 뻔했다. 여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카랑카랑하니 다른 사람처럼 싹 달라져 있었다.
“배꽃선녀님이라 불러야지! 싹바가지 없이 선녀님더러 무슨 슨생이래?”
“죄송합니다. 배, 배꽃선녀님.”
여인이 내뿜는 기가 엄청나서 감히 거스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신랑 자리는 왜 안 왔어?”
“저… 회사일 때문에 급하게 서울로 먼저 올라갔어요.”
먼저 올라가길 다행이지, 여기 있었다 한들 그가 여기 왔을 리는 만무했다. 철저한 과학 신봉주의에 실용주의, 실리주의로 똘똘 뭉친 그는 제 부모님이 형식상 둘의 궁합을 보겠다는 것도 쓸데없는 미신 행각이라 치부했었다.
“사진.”
유주는 정말 이래도 될까,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냥 재미로 듣자 마음먹고 주하의 사진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사진을 집어 든 배꽃선녀의 눈이 등잔만 해졌다. 카랑카랑하던 목소리도 살짝 간드러지게 변해 있었다.
“신랑인가? 인물이 아주… 좋군.”
배꽃선녀는 어쩐지 돌려주고 싶지 않은 얼굴로 유주에게 사진을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생년월일을 받아들고 몇백 년 묵은 듯한 두꺼운 책을 꺼내 흰 종이에 붓으로 뭔가를 끼적거렸다.
“볼 것이 없어, 이 부부는.”
“네?”
“다 좋아. 완벽한 합일이야. 타고난 본성과 후천적인 성정, 심지어 음양의 조화까지 잘 맞아. 신랑 자리가 보기 드물게 사납고 드센 맹수인데 자네가 조련사니까 서로 잘 만난 거야.”
“조, 조련사요…?”
“음. 신랑 자리가 아주 강해. 나 위에 아무도 없고 내 아래만 줄줄이고 지고는 못 살고. 두뇌가 매처럼 비상하며 두둑한 배짱으로 추진력이며 실행력이 탁월하고 색기가 여성 못잖아 남녀노소 확 끌어당겨 매료시키고. 사람을 제 뜻대로 홀리고 부리는 재주가 타고났어. 이런 사주가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 그러면 역적모의로 옥좌를 제가 빼앗아 앉을 상이야.”
선녀가 부채로 무릎을 탁탁 치며 박자 타듯 말을 이어나갔다.
“나밖에 모르고 식솔들이 신처럼 떠받들어야 하는 천하의 가부장 대목이지. 지 뜻대로 안 되면 지 성질 못 이겨 초가삼간 박살 내고 마을을 통째로 초토화시키는 상이야. 사주에 돈이 강물이 되고 바다가 돼서 마를 날이 없으니 그럴 힘이 주어지는 거고. 돈이나 기(氣)나, 정력이나 온갖 힘이란 힘은 강하다 못해 넘쳐흘러, 아주.”
유주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여인은 다른 건 몰라도, 한 번도 대면한 적 없는 주하의 성격에 대해서만은 정확하게 맞추고 있었다.
최소한 3월까지만이라도 약속된 북 페어 행사일을 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또다시 떨어져 지낼 수 없다고 막무가내였다. 다음날 갑자기 어디서 대거 인력을 불러왔나 했더니 행사를 주관하는 호텔 소속 직원들이었다. 그 호텔이 강주하 모친의 소유라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래도 시대를 이맘때로 타고났으니 제 식솔에겐 끔찍하게 잘할 거야. 지밖에 모르던 놈이지만 결혼을 하면서 제 여자, 제 새끼밖에 모르게 돼.”
자네가 그리 바꾼 거겠지, 선녀는 덧붙이며 부채를 유주에게 쫙 펼쳐 보였다.
“누구나 제 사주에 배우자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에 들어오지 말아야 할 상대, 안 맞는 상대가 잘못 들어와서 한쪽이 죽거나 둘 다 죽어 나가거나 파탄 나고 갈라서는 법이거든. 반대로 서로 꼭 들어맞는 짝을 만나면 꼭 들어맞는 단추, 틈 없이 딱 맞물리는 자물쇠처럼 하늘이 점지해 주신 온전한 인연인 게지. 더할 나위 없이 좋네, 좋아.”
유주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솔직히 궁합이나 사주에 관심도 없고 미신이라 믿는 쪽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좋다는 말이 듣기 싫을 리는 없었다.
“뭐, 안 맞는데 헤어질 수 없다는 짝들에겐 부적을 써주거나 개명, 이사 등등 해결책이 될 만한 방안을 제시해 주긴 하는데 이 부부는 깔끔하게 통과. 그런 거 필요 없어.”
선녀는 중얼중얼 숨도 쉬지 않고 주문처럼 말을 이어가다 뚝 멈췄다.
“속궁합을 잠깐 볼까. 원래 그쪽이 내 전문이거든. 선녀님이 나가시면 난 어차피 아무것도 기억 못 하니까 솔직히 말하시게. 밤 생활은 어떤가. 음양이 아주 잘 맞지?”
“네? 그, 그게……”
너무 적나라한 화제에 유주는 머뭇거렸다. 민망함에 귓불부터 열기가 돋기 시작했다. 배꽃선녀는 그런 유주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보아하니 그렇군. 열쇠와 열쇠 구멍이 딱 들어맞는 아주 이상적인 짝이야. 관상이며 혈색, 색기 돌아가는 음영, 시원하게 탁 트인 이마와 명경지수 눈매, 가지런한 치열과 딱 좋게 도톰한 입술을 보니 자네의 음호(陰戶)는 희귀한 용주(龍珠)의 생김새를 띠고 있을 거야.”
“네? 음… 용, 뭐라고 하셨는지 잘……”
선녀는 흰 도화지를 하나 쫙 펼치더니 자궁과 질벽 모양의 남사스러운 그림을 쓱쓱 그려 보였다. 이쯤 되니 유주도 음호니 용주니 하는 말을 감으로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일단 옥문이 좁고 질벽도 좁고 적당한데 자궁이 너무 움푹 들어가진 않았어. 딱 적당히 깊고 자궁 양쪽이 두 마리 용이 구슬을 놓고 서로 다투는 형상이라 하여 용주라고 하는 것이지. 기가 막힌 명기(名器)야, 명기.”
“네에…? 제가 명, 명기라고요.”
갑자기 기생이 된 느낌에 유주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명기면 뭐해, 제대로 된 사내가 아니면 서로 안 맞는 거야. 그런데 아까 본 관상이나 성향, 생년월일을 보니 신랑 자리도 보통 대단한 교접기(交接器)를 달고 있는 게 아니라서, 이 구멍에 딱 들어맞는 열쇠로 보이더구만.”
유주의 얼굴을 덮고 있던 홍조가 이제 목 아래까지 내려왔다. 눈앞의 무속인이 여자니 망정이지 남자였다면 수치심에 방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열쇠가 일단 이 좁은 길에 들어서서 깊숙이 구멍 입구에 닿는 순간, 여기 여기, 이 용주 부분이 활짝 열리며 격렬하게 반응해 올 거거든. 그럼 열쇠도 신명이 나고 자네나 신랑이나 둘 다 화르륵 불이 붙어 황홀경에 빠져서는, 해가 뜨나 해가 지나 시도 때도 없이 극락의 열락을 맛보게 되는 게야. 그야말로 명기와 명기의 합일, 천생연분 속궁합의 조화를 이루는 거지.”
유주는 이제 고개를 푹 숙이고 뜨거워진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급기야 무릎 꿇은 다리까지 저려와서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살짝 무릎을 아래로 내려놓고 편히 앉으려는 순간, 부채가 탁자 기둥을 타닥 내리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둘이 최상으로 들어맞는 몸이니 신랑 자리가 바람도 안 피우고. 슬하에 자식도 숭숭 잘 나올 거야. 최소 셋은 가져야 돼. 그래야 신랑이 마음이 편안하니 안정돼서 자네도 편하고. 으휴…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쎈 기를 만났더니 금세 졸리네, 이거 원.”
배꽃 선녀는 하품을 갑자기 늘어지게 하더니 처음의 목소리로 돌아갔다.
“복채는 됐어. 대신 정주 그 년이랑 인연 계속 이어 가. 자네 복이 원체 풍성해서 주변 보살들에게 다 뻗어가니까. 정주네 통해서 나에게도 이어질 테니. 가 봐, 어서.”
유주는 저린 다리를 간신히 일으켜 여인에게 인사를 해 보이고 방을 나왔다. 정주는 훗훗, 짐작이 간다는 웃음을 흘리며 툇마루에서 몸을 일으켜 보였다.
“다리 저려? 속궁합도 잘 들었고?”
“언니, 진짜……”
신을 신고 마루 아래 발을 딛기도 전에 벨소리가 울렸다. 대단한 명기를 달고 있는 그녀의 남자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응. 주하야.”
“어디야? 점심 먹었어?”
“먹었지. 지금이 몇 신데.”
“저녁 꼭 잘 챙겨 먹어. 내일 출발할 때 전화하고.”
“알았어.”
“저녁 뭐 먹을 건데?”
“모르지, 정주 언니네 어르신이 해주시는 건 다 맛있으니까…… 너는?”
“글쎄. 네가 옆에 없으니 별생각이 없네.”
“JB그룹 형님과 약속 있다고 했잖아. 너야말로 제대로 챙겨 먹어. 맨날 나한테 부실하게 먹는다고 잔소리하지 말고. 아, 나 정주 언니 기다려서 빨리 가봐야 돼.”
“가기 전에 잊은 거 없어?”
그의 혀가 살짝, 정말 아주 살짝 짧아져 있었다. 유주는 무속인과 인사를 나누는 정주를 힐끗 돌아보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속삭였다.
“사랑해.”
“키스도 해줘야지.”
“지금 나 혼자 있는 거 아니야. 제발 좀. 끊을게.”
“그럼 내가 하는 거라도 들어야지. 끊지 마!”
주하는 폰에 대고 쭈우우욱, 쭈웁, 요란한 입술 마찰음을 내고는 서유주 사랑한다 몇 번이나 고장 난 레코드처럼 속삭였다. 고장 났지만 아주 따뜻하고 다정하고 상냥한 레코드 같았다.
* * *
제주도에서 돌아온 지 이틀이 흘렀다. 고작 하루 더 일찍 갔는데도, 주하는 어제 공항에서부터 이산가족 상봉하듯 그녀를 끌어안고 곧바로 제집으로 데려갔다.
청담동 사거리의 아파트는 철거작업에 들어간 지 오래였고, 주하의 펜트하우스 아파트에는 그녀의 공간이 공주님 방처럼 단장되어 있었다.
드레스 룸과 욕실 딸린 넓은 방에는 소파에 피아노, 공기청정기까지 다 갖춰져 있었지만 침대 하나만은 없었다. 대신, 주하의 침실에 있던 침대가 킹사이즈로 교체되어 있었다.
내일은 설 연휴가 시작되는 데다, 처음으로 시부모님이 되실 두 분을 뵙는 상견례 날이었다. 날은 4월로 두 분이 이미 받아 놓으셨고, 어머니 소유 호텔의 야외식장에서 식을 올리기로 기본적인 사항들은 다 정해진 뒤였다.
유주는 하루 전부터 옷을 고르고 머리는 어떻게 손질할까, 나름 고심하고 있었다. 아직은 해가 짧은 늦은 오후, 갑자기 주하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한강변에 부티크 호텔, 설 연휴 끝나고 최종 체크 한다고 했었잖아?”
떠들썩한 인파 소리를 뚫고 그의 저음이 또렷이 들려왔다.
“10분 뒤에 기사 도착할 테니까 잠깐만 이리로 와. 서재에 카메라 가지고. 그게 필요한데 놓고 왔네. L사 Q2 걸로.”
“지금? 기사분에게 전하지 않고 직접 들고 오라고? 하지만 나 화장도 안 해서 준비하려면 시간이……”
“누구 인사하고 그런 자리 아니니까 편하게 와. 늦지 말고.”
전화가 뚝 끊겼다. 유주는 기사분이 가져가시면 왜 안 되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재의 고가 카메라들 중 그가 지칭한 제품을 집어 들었다.
* * *
30분 전, 그때만 해도 몰랐다. 주하가 저를 호텔 탑층, 풀세팅 피니시에 퍼니처링까지 완료된 제 오피스로 끌고 가 이런 상황을 벌일 줄은 정말 몰랐다.
“살짝 묶어도 돼? 딱 10초만.”
“뭐? 미쳤어? 안 돼!”
“팔을 자꾸 내리니까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그래. 잠깐만 묶을게.”
“…그, 그럼 풀어 달라 하면 바로 풀어야 돼? 변태 짓 같은 거 하지 마.”
주하는 대답하지 않고 씩 웃기만 했다. 유주는 두 손목을 내준 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주하가 그녀의 팔을 번쩍 들어 올려 제 목에서 풀어 내린 타이로 양 손목을 단단히 묶었다. 유주는 한강이 앞마당처럼 내려다보이는 23층 통유리창에 등을 대고 기대서서 한숨만 뱉었다.
“강주하, 너 정말…… 이게 무슨 짓이야, 일인 척 불러내서!”
“다 끝나고 사진 찍으려는 건 맞아. 거짓말한 거 아니라고. 이 호텔 완공되고 리버뷰 룸 세팅되면 제일 먼저 너랑 여기서 사랑하고 싶었어. 오픈 기념으로……”
지금 짓는 호텔도 완공되면 탑층에서 섹스하자. 그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유주는 주하의 손이 제 등 뒤로 돌아가 원피스 지퍼를 더듬을 동안 고개를 돌려버렸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실내의 인테리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두 팔이 위로 번쩍 들린 사이, 니트 원피스가 브래지어와 함께 순식간에 벗겨져 나갔다. 주하가 드레스 셔츠 단추를 끄르다 만 채로, 더 참지 못하고 드러난 젖가슴을 손바닥 가득 감싸 잡았다. 그가 가슴을 주무를 때마다,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제 단단한 잔 근육도 덩달아 움찔거렸다.
“응… 핫! 하으읏!”
유두를 꼭 잡아당기고 튕기자 유주의 허리가 위로 크게 튀어 올랐다. 그가 젖꼭지를 입술과 혀로 농락하듯 한껏 빨고 비벼대자 허리의 반동은 더 격렬해졌다.
“주하야…… 손 풀어줘. 응… 안 돼…… 흐읍!”
“말 잘 들으면 풀어줄게, 착하지…? 다리 벌려 봐. 그래, 그렇게…”
주하가 성급히 버클을 풀더니 제 바지를 속옷째 벗어던지고 다리를 조금 벌려 키를 낮췄다. 무섭도록 빳빳하게 발기한 성기가 위용을 드러냈다.
“오늘은 하얀색이네? 이런… 가운데는 벌써 푹 젖었는데.”
그가 우람하게 고개를 치켜든 페니스를 하얀 레이스 천 위에 대고 천천히 비볐다. 귀두의 탁한 액이 이미 젖어 있는 천 한가운데를 꾹 찔러왔다. 변태 같아, 유주는 아랫입술을 꼭 물고 자꾸만 잇새로 나오려는 신음을 억눌렀다.
기묘한 쾌감에 유두가 팽팽하게 곤두섰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발딱 곧추선 성기의 열기가 젖은 음부 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단단한 귀두가 축축하게 젖은 속옷 한가운데 위로 천천히 원을 그렸다.
아찔한 쾌감에 주룩, 몸속에서 뜨거운 것이 다시 흘러내렸다. 주하의 것도 선단에서 쿠퍼액을 움찔 뱉어 냈다. 안팎으로 끈끈한 것들이 흘러대니 정신이 없었다. 미칠 것 같았다.
“어때…? 좆이 생생하게 느껴져?”
“읏… 주하야, 그만, 그만…! 이제……”
“저런… 다 젖어버렸네. 그 레이스는 내가 좋아하는 건데. 빨지 말고 손수건처럼 갖고 다녀야겠어. 너 없을 때 위안용으로.”
“더, 더러운 소리 좀 하지…마… 흐읏!”
음경 끝이 천을 뚫을 기세로 음부 쪽을 더 세게 눌러왔다. 한껏 벌리고 선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가 한쪽 옆구리를 받쳐주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넘어졌을 것이다.
“주하야, 손… 풀어줘.”
“젖꼭지 조금만 더 핥고. 너 여기 빨아주는 거 좋아하잖아. 아주 팅팅 붓도록……”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혀가 음란하게 유륜을 돌리고 깊이 빨아들였다. 어떻게 이런 단맛이 날까, 중얼거리며 막돼먹은 혀가 젖꼭지를 고문하듯 마구 물고 춥춥 빨아 당겼다가 놓아주었다.
“아흑, 주하… 으…읏. 흐응……”
유주는 벌써부터 축 처져서 숨을 쌔근거렸다. 속옷 중심은 살갗이 아릴 만큼 잔뜩 젖어 버렸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기절해버릴 것 같다. 주하가 아래로 미끄러지는 유주의 허리를 받쳐 안고 두 다리를 들어 올려 속옷을 벗겨냈다. 날 것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등에 차디찬 유리가 닿으며, 갈라진 틈으로 그의 것이 힘차게 들어왔다. 페니스가 도톰하게 부어오른 음핵을 지그시 누르고, 안으로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양 손목이 여전히 묶여서 위로 들린 팔이 헛된 흔들림만 반복해댔다. 뜨거운 혀가 드러난 겨드랑이 아래를 번갈아 핥는 감촉에 신음이 좀 더 커졌다.
주하의 한쪽 손은 유주의 머리 뒤로, 다른 손은 엉덩이를 짚었다. 제 것이 박혀들 때마다 유주의 맨살이 창에 부딪히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대신, 그는 제 엉덩이를 힘차게 움직이며 그녀의 맨살에 제 몸을 부딪쳐왔다.
“아핫, 응, 응! 아앙! 주하… 흑! 으응, 응!”
유주가 흐릿한 눈으로 그의 것이 뿌리까지 깊이 박혀 든 제 다리 사이를 바라보았다. 거의 수직으로 찔러든 페니스가 속살에 착 감기며 자궁 입구를 사정없이 넘나들었다. 유주가 크게 숨을 몰아쉬며 그의 어깨를 꼭 움켜잡았다.
“아, 너무 깊, 하악…! 깊어, 깊…… 응! 아아앗! 으흑!”
주하는 이성을 잠시 내려놓고 힘껏 허리를 쳐올리길 반복했다. 퍽, 퍽, 살과 살이 쓸리고 마찰하는 음란한 날 것의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유주는 울다가 흐느끼다 뜻 모를 말을 중얼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새 두 다리는 그의 엉덩이에 교차되고, 두 팔은 머리를 꼭 껴안은 채 전신이 매달려 있었다.
수증기가 어린 것처럼 유리창 위에까지 열기가 가득 서릴 때쯤, 주하는 움직임을 멈추고 유주를 마주 보며 안은 채 오피스 안쪽의 침실로 향했다. 그가 꼭 껴안은 채 침대로 바로 쓰러지자 그 반동으로 페니스가 안쪽을 찔러왔다. 유주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척이자 주하가 천천히 제 것을 빼냈다.
“기다려. 먼저 가게 해줄게. 처음은……”
그가 여전히 바짝 선 분신을 잠시 버려두고, 손바닥을 위로 해서 검지와 중지를 음부에 부드럽게 찔러 넣었다. 애액이 이미 넘칠 듯 흥건한 내벽이 두 손가락을 환영하듯 움찔거렸다. 주하의 손가락은 깊숙이 파고들어, 자궁으로 경사진 깊은 둔덕을 더듬었다. 전처럼 살구씨 크기의 돌기가 잡혔다.
주하의 손가락이 노련하게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돌기를 아예 터뜨려 버릴 기세로 힘껏 누르고 자극하길 한참, 유주의 신음도 더 크고 빨라졌다. 철벅 철벅, 음란한 소리 아래 그의 손가락이 사정없이 찌르고 긁어댔다.
음핵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절정 직전까지 와 있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손가락 끝이 돌기를 쿡 찔러 들면 바로 가 버릴 것 같았다.
“아아, 으흣. 앙, 아아… 흐으읍…… 흣!”
유주의 허리가 크게 들렸다. 갈 곳 잃은 두 손이 베개 아래를 움켜잡다 시트를 말아 쥐길 반복했다. 주하가 그런 반응이 꽤나 만족스러운 듯 이 악물고 손가락에 더 박차를 가했다. 격렬한 흥분으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아아아. 흐으, 흐응, 아앗, 아앙! 아아아.”
팍, 뜨거운 물줄기가 터져 나와 주하의 턱과 가슴팍을 적셨다. 혼자 사정해 버린 유주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손 아래서 축 늘어져 버렸다. 주하는 그녀를 꼭 안고 얼굴 여기저기 입을 맞췄다. 그리고 질벽의 흥분이 채 가시기 전에 여전히 꼿꼿이 발기해 있는 제 것을 음부에 대고 야릇하게 비볐다.
애액을 흠뻑 묻힌 귀두가 제 둥지를 찾아들듯, 천천히 질벽을 파고들었다. 좁고 짧은 내벽의 속살이 페니스를 꽉 물고 바짝 조여 왔다. 주하가 더 참지 못하고 격렬하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유주의 입에서 하아악, 높은 교성이 새어 나왔다.
그의 것이 내벽을 열렬하게 찔러 올리길 한참,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질 안쪽은 애액을 쉴 틈 없이 쏟아내며 성기를 감싸 쥐고 수축과 이완을 반복해댔다. 절정이 빠르게 밀려들고 있었다.
마지막 한 번 더 깊숙이 박혀 든 후, 오래 억눌렸던 음경이 제 몸을 일시에 해방시켰다. 둘은 그 순간이 세상의 마지막인 것처럼 격렬한 신음을 토해내며 동시에 절정을 맞았다. 주하의 입술이 제 소유권을 주장하며 유주의 눈꺼풀 위, 이마와 콧대, 인중과 입술까지 힘 있게 찍어 눌렀다.
가쁘게 헐떡이던 숨이 평온한 리듬을 되찾았을 때, 유주는 눈을 떴다. 주하가 그녀를 마주한 자세로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주하야.”
그가 살포시 눈을 떴다. 채 가라앉지 않은 불꽃이 눈 속에서 춤추고 있었다.
“배고파? 딱 일 분만 이렇게 있자……”
“나랑 사랑할 때마다… 정말 그렇게 좋아?”
갑자기 그저께 정주 언니가 데려간 점집, 자칭 배꽃선녀라는 무속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물론 미신으로 치부할 주하에게 아직 그 일을 말하진 않았다.
“너무 좋아. 너무 좋아서 너랑 할 동안 이대로 지구가 멸망해도 좋다는 생각까지 한 적 있어. 갑자기 왜…?”
“우리가 천생연분 궁합이래. 정주 언니 아는 이모님이 재미로 속궁합을 봐줬는데…… 명기와 명기의 귀하디귀한 만남. 완벽하게 딱 들어맞는 열쇠와 열쇠 구멍이라고 하더라.”
주하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열쇠와 열쇠 구멍? 그거 참 절묘한 표현이네.”
“너무 잘 맞아서 바람도 못 피울 거래, 네가……”
“네가 섹스란 단어 노골적이라고 얼굴 붉힐 때 내가 그랬잖아. 섹스하자, 이건 내 머릿속 사전에서 ‘오직 강주하와 서유주만 하는 것’ 유일무이한 그 뜻이라고. 다른 여자 봐도 그냥 눈 코 입 똑같은 남자나 다름없이 보이는데 내가 무슨 바람을 피워. 너만 조심하면 돼. 하도 벌레들이 꼬이려고 들어서 말이야.”
“내가 뭘 조심해? 나야말로 너 만나기 전에는 열심히 공부만 하고 일만 하고 견습 수녀처럼 살았는데.”
“나는 안 그랬어? 하버드 다닐 때 웬 미친 여자가 임신해서 내 애라고 쫓아다닐 때도, 확성기만 안 들었다뿐이지 다 들으라고 당당하게 외쳤다고. 사타구니 털 한 가닥도, 좆 껍데기도 보여준 적 없는데 무슨 내 애냐! 그 뒤로는 아예 틈도 못 주게 여자들만 보면 속으로 오징어를 떠올려. 아니면 파충류. 미드 V처럼.”
유주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주하의 품에 더 파고들어 그의 체취 안에 얼굴을 묻었다. 기적 같았다. 강주하가 그녀의 인생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내 애는 유주 너밖에 못 가져.”
따스한 두 팔이, 숨쉬기 어려울 만큼 유주를 끌어당겨 온몸으로 꾹 눌러왔다.
* * *
시장에서 일수를 찍으시고 작은 여관을 하신다던 강주하의 부모님은 전국 각지에 지점을 둔 호텔 브랜드의 경영권 및 BK금융에셋을 소유하고 있었다. 강주하가 바로 BK금융에셋의 창업자이자 사주의 아들이었다.
돌아가신 외조부에 대한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수지와 강다경의 부모님 외에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쟁쟁한 경제 활동을 펼치는 일가친척들이 더 있는 것 같았지만 주하는 결혼식 때 자연히 만나게 될 거라 말했다.
-부모님이… 그 정도로 엄청난 자산가이신 줄은 몰랐어.
-다 할아버지 덕이지 뭐. 그래, 솔직히 현금이며 부동산 웬만한 재벌 못잖게 많아. 근데 그러면 뭐해. 아버지 말마따나 땅 투기, 집 투기로 일확천금 이룬 근본 없는 콩가루 집안인데. 그냥 졸부야.
-아무리 그래도 콩가루에 졸부라니. 표현을 좀 좋게……
-우리 어머니도 그렇고 다들 너는 너, 나는 나, 아주 바람직한 서구식 개인주의니까 시집살이 스트레스 이런 건 없을 거야. 콩가루가 그거 하난 좋군. 아, 아버지는 그래도 연락을 좀 하실 거야. 널 너무 맘에 들어 하셔.
-날? 아직 뵌 적 없는데 어떻게……
주하는 그 말을 끝으로 화제를 돌렸었다. 사진을 통해서, 그리고 주하가 언질을 드렸을 말씀만으로 벌써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걸까. 중식당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발길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혹시나 실망하시면 어쩌지.
유주는 엘리베이터 거울을 통해 제 차림새를 재빨리 스캔했다. 헤어숍에서 살짝 드라이를 한 머리카락은 조신하게 한쪽 어깨로 흘러내렸고, 무난한 디자인의 순백색 블라우스 위에 걸친 머스타드 색 가벼운 간절기 코트, 무릎 아래까지 오는 에이라인 스커트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단정했다.
-뭐야, 어디 면접 가나? 교생 실습?
30분 전 주하와 영상통화를 했을 때 그는 소리 내서 웃었다. 주하는 차가 너무 막혀 10분쯤 늦겠다고, 부모님께도 연락 드렸으니 편하게 먼저 얘기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일 분 뒤 S호텔 중식당 목란실에 들어서는 즉시, 한눈에도 어울려 보이지 않는 두 장년층의 부부를 보고 유주는 깜짝 놀랐다. 두 사람 다 낯이 익었다.
수수한 차림에 단정한 풍모를 지닌 초로의 신사는 언젠가 BK금융 투자신탁 지점 VIP전용 라운지에 업무지원 나갔을 때 본 적이 있었다. 그녀를 뚫어지게 보고 말을 시킬까 말까 망설이는 기미가 역력해서 기억하고 있다. 처음부터 유주에 대해 알고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 옆의 귀티 나는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연배로 짐작되나 5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인은 BK에셋이 주최한 리조트 모델 하우스 분양 현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때 유주를 붙잡고 리조트에 대해 이것저것 물은 적이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항들을 재확인한다는 느낌이 강했었는데 주하의 어머니셨던 거다. 둘 다 강다경 대리가 유주를 데리고 나간 현장이었다. 어쩐지.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어.
“안녕하세요? 서유주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뵙긴. 우리 둘 다 본 적 있잖아요. 얘기도 해봤고. 앉아요.”
주하의 모친이 호기롭게 말문을 열었다. 드라마에 종종 나오는, 까다롭지만 시원시원한 재벌 사모님 같은 분위기였다. 반면, 부친 쪽은 좀 더 신중하고 푸근해 보였지만 한 번 역정이 나시면 보통은 아니실 것 같았다. 예전에 본의 아니게 엿들었던 주하와의 전화 통화 중, 쩌렁쩌렁 울려대던 거친 단어들이 기억났다.
“허허, 난 처음 얘기해봐서. 어서 앉아요. 주하는 10분쯤 늦는답디다.”
그녀를 벌써부터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주하의 언질이 그냥 던진 말은 아닌 듯했다. 유주를 보는 두 분의 눈빛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부친 쪽이 좀 더 정감 가는 느낌이었지만 솔직하고 화통해 보이는 모친도 불편하진 않았다. 부부의 졸혼, 어린 아들에게 충분히 정을 쏟지 못한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화두를 뗀 것도 모친 쪽이었다.
“주하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우리 따로 살아요. 서류상으론 묶여 있지만. 그러고 보니 가족이라곤 달랑 셋인데 다 뿔뿔이 흩어져 사네. 원래 사는 게 그런 거지, 뭐. 사람은 결국 다 혼자잖아요. 안 그래요?”
“네…… 저 그냥 말씀 편하게 놓으세요.”
“주하 오면 놓지 말래도 놓을게요. 먼저 주문해 놓을까요.”
옅은 웃음을 띠고 유주만 바라보던 부친이 아내 쪽을 돌아보았다.
“메뉴판 뭐 하러 봐. 제일 비싼 코스로다 해.”
“어머나, 당신이 웬일이세요? 중국집에서 짜장면, 짬뽕, 탕수육 이상 시키는 걸 천하에 죄악으로 여기는 분이.”
“이 사람이… 지금 이 자리가 보통 자리야? 예비 며느리와 처음으로 한 끼 해 보는 역사적인 자리잖아.”
“그래요, 그럼. 불도장, 캐비아에 꽃게, 해삼이랑 바닷가재, 북경오리 다 있는 황실 프리미엄 A코스로 하겠어요. 어차피 당신 카드로 결제할 거니까. 가장이 사주셔야죠.”
“그럴 때만 가장 취급이구만, 쯧쯧……”
전에 그 통화에서 주하가 끊기 전, 역정을 내시던 아버지 옆에서 들려온 여자분의 목소리가 갑자기 뇌리를 스쳤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 모친이 맞았다.
-그놈의 불알은 왜 아직도 안 떨어지고 있대요? 그렇게 심심하면 쳐대는데.
유주는 혼자만의 민망함에 고개를 살짝 수그렸다. 역시 모친도 보통 입담이 아니신 듯했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주하의 못된 말들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며 민망함을 더했다.
“저, 그럼 제가 직원을 부를게요.”
유주는 저가 앞에 있든가 말든가 잠시 티격태격을 이어가던 두 분 대신, 테이블 위의 호출 벨을 눌렀다. 아까부터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듯 매니저가 곧바로 노크하고 방에 들어섰다. 매니저가 나가고 정전 상태가 되자 모친은 또 불쑥 말씀을 이었다.
“유주 양은 딱 봐도 초식이 과라서 맘이 놓이더군요.”
“네? 초식이요?”
“주하 저 애는 날 때부터 육식이, 유주 양은 보니까 초식이더란 말이죠. 둘 다 초식이면 답 없고 둘 다 육식이들이면 허구헌 날 치고 박고 싸우다 이혼할 테니.”
아아. 육식이와 초식이. 유주는 단어의 어감으로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향해 시종일관 미소 띠고 있던 부친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어렸다.
“주하 그놈은 육식이란 말로도 부족하지. 내 아들이지만 성질머리가 아주 보통이 아니야. 그래도 이렇게 신붓감을 데려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하하하….”
“듣자 하니 그 녀석은 대학교 때부터 일편단심이었던데. 미국 가서 연락 두절됐다 회사에서 다시 만나고. 그래도 결혼은 안 한다고 계속 뻗대더니 결국 첫사랑이 임자였구나 싶었죠.”
“당신 때문이었잖아. 어릴 때부터 결혼하지 말라고 툭하면 애를 세뇌시키고, 그게 애한테 할 소리야?”
“내가 결혼해서 행복했으면 그런 말을 했겠어요? 흥. 아무튼 결혼한다고 이렇게 신부도 데려왔으니 그 얘긴 그만 하세요.”
티격태격은 다시 시작되었다. 유주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있었다. 듣다 보니 전혀 심각하진 않아서 웃음이 나왔지만 입술을 앙다물고 참았다.
“염병. 비혼주의가 웬 말이야. 지금 인구가 나날이 감소해서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응?”
“젊은 사람들은 어디 좋아서 결혼 안 한답디까? 수도권 집값에 맞벌이 육아에 시집 스트레스에, 제 한 몸 앞가림하기도 힘든데 결혼이 그리 쉽나.”
“그 집값, 다 누가 그렇게 고공행진 말도 안 되게 부풀렸는데? 당신이랑 주하 같은 투기… 으휴, 말을 말자.”
예비 시아버지는 유주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멈췄다. 대신, 다른 쪽으로 화제를 전환했는데 이번에는 유주의 호기심을 은근히 발동시키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우리 아가씨가 주하 저놈 사람 만들었네요, 하하하. 저놈이 십 대 때 미국에서 깡패질하고 다니고 할 때는 장차 뭐가 되려고 그러나 걱정했는데. 지금 한국에서 일 벌인 것 중 하나도 깡패 조직이었다가 얼마 전에 합법적인 사업체로 바꿨거든. 저게 누굴 닮아 그런 기질이 있나 모르겠어요. 난 대대로 학자 집안이라 그런 유전자는 전혀 없거든, 암.”
부친이 흘깃 부인을 돌아보자 또다시 일촉즉발의 긴장이 서렸다. 다시 언쟁이 이어질까 싶어 유주가 재빨리 밝게 웃어 보였다.
“아, 주하씨가 늦네요. 차가 많이 막힐 시간이긴 하지만…… 제가 한 번 연락해볼까요?”
모친은 남편을 향해 눈을 부라리다 유주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어련히 알아서 오겠지, 뭐. 유주 씨가 많이 시장하겠네요. 그나저나 주하 저놈 갑자기 망해서 무일푼 되면 어떡할 거예요? 문어발처럼 사업체 줄줄이 워낙 일을 벌여놔서. 망해도 난 안 도와줄 거거든.”
“이 사람,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부친의 정색에 유주는 찻잔을 내려놓고 재빨리 대답했다.
“제가 벌면 됩니다. 주하씨 힘으로 다시 일어설 거라 믿고, 저는 근근이 살 정도밖에 못 벌겠지만 그동안은 제가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해요.”
두 어르신 모두 유주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친이 먼저 운을 뗐다.
“어쩜 그렇게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해요? 솔직히 그냥 해 본 말인데.”
“딱 한 번 상상해 본 적이 있거든요. 제가 어릴 때 부모님 사업이 기울어서 굉장히 힘든 시절이 있었어요. 갑자기 닥친 일이라 손 쓸 새도 없이 집도 넘어가고, 빈털터리가 돼서 할머니 댁으로 가 있다가 부모님도 그렇게 돌아가시고……”
유주는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가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어떤 최악의 상황이든, 몸만 건강하면 다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깐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다. 예비 시어머니의 미소가 좀 더 커졌다.
“직접 확인하니 이제야 안심이 되네. 처음에 유주 씨에 대해 전혀 몰랐을 때는 주하 돈 보고 결혼하는 건 아닌가 의심부터 든 게 사실이었거든요.”
“이 사람이? 아니 당사자를 앞에 두고 어찌 그런 말을 하나? 주하가 누누이 말했잖소, 아주 알뜰하고 야무진 데다 카드 갖다 바쳐도 도로 가져가라 안 받고, 물욕이 너무 없어서 큰일이라 했는데!”
“지난 일이니까 하는 거죠. 기차 화통 삶아드셨수? 목소리나 좀 낮추세요.”
그때 노크 소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주하가 헐레벌떡 달려왔는지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면서 부모님께 먼저 인사하고 유주 옆에 털썩 앉았다. 그녀를 돌아보고 활짝 웃는 얼굴을 보니 갑자기 가슴이 찡해졌다.
“좀 늦었죠. 일찍 출발했는데 차가 너무 막히더군요.”
그의 도착을 기점으로 매니저가 전채부터 맛깔스럽게 차려진 접시들을 하나씩 가져와 회전판 위에 올려놓았다. 모친이 다시 유주 쪽을 보았다. 눈에 서린 온기가 처음보다 더 짙게 깔려 있다.
“이제 주하가 왔으니 말 편하게 할게. 그래도 되지? 너도 아버지, 어머니라 편히 부르고.”
“그러게. 이제부턴 새아가라 부르마. 우리가 자식이라곤 달랑 이 무뚝뚝한 놈 하나니. 딸도 없고… 딸처럼 편히 생각하마.”
“참, 이 양반은 정말… 그런 말, 며느리들이 제일 싫어하는 거 몰라요? 가식도 그런 가식이 없어. 부려먹을 땐 딸인 척, 진짜 챙겨줘야 할 땐 남 취급하고. 딸은 딸이고 며느리는 며느리라고요.”
긴장감 없는 설전이 다시 이어지자 유주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웃음만 지었다. 주하는 은근히 편안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녀에게 귓속말로 살짝 물었다.
“나 없는 동안 많이 친해졌나 봐. 생각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꽤 좋은데?”
유주는 부모님 앞이라는 걸 눈빛으로 상기시키며 그를 슬쩍 밀어냈다. 결혼 준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화기애애한 식사가 이어지던 중 예비 시어머니가 불쑥 말했다.
“그래, 대학원에서 좀 더 공부해보고 싶다고.”
“네. 빠르면 가을 학기부터 시작하려고 해요.”
“출판업에 뜻이 있으면 아예 유학을 가는 게 어떠니? 나중에 독자적인 에이전시 만들어서 판권 사 오고 하려면 그쪽 시장 분위기 파악하는 것도 좋을 거야.”
“안 돼, 절대.”
유주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주하가 단칼에 잘랐다.
“어머니 조언은 감사하지만 그건 절대 안 돼요. 죽으면 죽었지, 전 기러기로 살 생각 전혀 없거든요.”
“그래, 주하 말이 맞아. 기러기 그거 할 짓이 아냐. 사람이 돈 벌고 고생하는 이유가 한 가족이 단란하게 잘 먹고 잘 살자는 데 있는데 몸 떨어져서 살면 그게 뭐야?”
“당신은 모르면 가만 계세요. 기러기 아빠들은 뭐 본인이 좋아서 자식들, 마누라 멀리 보낸답디까? 자식들 미래 위해 그러는 거지. 아무튼 그래. 그건 부부들 문제니 알아서 하렴.”
모친은 남편을 향해 또 한 차례 스파크를 날린 뒤 화제를 돌렸다.
“신혼집은? 청담동 31층에 그냥 살림 차릴 거니? 새아가는 거기 괜찮니.”
“네, 저는… 어디든 좋아요.”
“그래. 삼성동이나 한남동 집은 아이 들어서고 옮기는 게 낫겠지. 아이도 최대한 빨리 가진다고 하니까 참 좋구나.”
아내의 말에 부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솔직히 고층 별로거든. 요즘 젊은 사람들 고층만 좋아라 하지만 사실 건강에 안 좋아. 자고로 사람은 땅 기운을 느끼고 살아야 건강하게 장수하는 법이야. 텃밭도 가꾸고 풀 냄새도 맡아보고. 그게 아이에게도 훨씬 더 좋을 거다.”
남편의 말에 예비 시어머니는 보이지 않게 실소를 흘리며 흥, 아예 시골 내려가서 농사를 짓고 살지 왜, 중얼거렸다. 유주는 시부모님 사이에 또 한바탕 설전이 벌어질까 싶어 음식이 참 맛있다는 등, 열심히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디저트까지 무사히 마치고 났을 때 유주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 모레 설날인데 두 분을 저녁 자리에 모시고 싶어요. 아직 정식으로 식도 올리지 않았고 솜씨는 없지만 제가 직접 만들어서 대접하고 싶어요.”
부친의 입이 기쁨에 활짝 벌어졌다.
“그래? 아니, 식만 안 올렸지 뭐 부부나 다름없지 않으냐. 연휴 끝나고 곧바로 혼인 신고할 거라 그랬고. 그럼 모레 갈……”
“아니, 됐다. 초대는 고맙지만 연휴 끝나고 날 좀 풀리면 그때 가마. 주하가 말 안 하든? 설이고 추석이고 우린 제사도 안 지내고 그런 음식 장만에 시간, 에너지 쓸 거 없어.”
서운할 만큼 쿨한 예비 시모의 말에 부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 새아가 음식 잘한대서 한번 맛보고 싶었는데 왜 그래? 당신은 싫으면 오지 마, 나 혼자 갈 테니까!”
“가긴 어딜 가요? 내일 호텔도 둘러볼 겸 당신 동생네랑 강릉 가니까 당신도 잔말 말고 따라오세요.”
시아버지의 표정이 천천히 변했다. 부인의 갑작스러운 강요에 놀라움,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차례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얼굴은 오히려 역정을 내듯 웃음기 하나 없었다.
“아니 말도 없이 내일 당장 갑자기…… 짐도 싸야 되는데 갑자기 이러면 어떡해?”
“흥. 짐 쌀 것도 없으면서 무슨 앙탈이에요? 5분 만에 짐 안 싸지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수.”
“크흠. 흠. 나도 내 일정이 있는데 갑자기 이러면…… 허허. 가자니까 내가 가 준다마는.”
지랄하고 자빠졌네, 예비 시모는 입 모양만으로 중얼거리고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재스민 차를 들이켰다. 그리고 유주를 향해 몇 마디 덧붙였다.
“저 녀석도 밥해주고 청소해 줄 사람 필요해서 너랑 결혼하는 거 아니니까 가사 일 그런 건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없다만, 나중에 새끼들만 직접 키우고 살뜰히 보살피면 돼.”
“네. 그럼 강릉 다녀오셔서 다시 날 잡아주세요. 그래도 두 분께 직접 대접해드리고 싶은 마음이니 부담 갖지 마시고요.”
유주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었다. 시부모님과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기뻤다. 물론 그만큼 거리를 두고 지내기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정말로 다행이라 여겼다.
* * *
식사가 끝나고 다 같이 목란실을 나설 때, 제일 뒤에 남겨진 예비 시아버지는 유주를 살짝 붙잡고 두 손을 꼭 잡으며 속삭여주셨다.
“앞으로는 우리를 부모라고 생각해라.”
주하가 돌아보기 직전, 그는 손을 놓고 안경을 벗어서 옷자락에 닦는 시늉을 해 보였다. 유주의 가슴에 봄날의 온기 같은 따스함이 퍼져나갔다. 단 한 마디였지만 백 마디 어떤 말보다 더 감사한 말씀이었다.
“너는 유주 데리고 알아서 가거라. 난 네 아버지 집까지 모셔드리고 갈 테니. 운전도 안 하는 양반이시니 어쩌겠누, 내가 기사 노릇 해야지.”
“그러시겠어요? 그럼 운전 조심해서 들어가시고 내일 강릉 도착하시면 연락 주세요.”
유주는 멀지 않은 나중을 기약하며 예비 시부모를 배웅했다. 주하는 잠깐 매니저랑 얘기하고 올 테니 VIP 라운지에 앉아 기다리라 말했다.
“다녀와. 소화도 시킬 겸 수목원 둘러보고 있을게.”
유주는 옥외 가든으로 천천히 걸었다. 기분 좋고 편안한 저녁 식사 직후라 마음이 무척 가벼웠다. 새로 개장한 실내 수목원의 아치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거대한 인공목 뒤로 예비 시부모님 목소리가 들렸다.
“풀밖에 없는데 여긴 왜 둘러보자는 거야, 참. 하여튼 피곤한 양반이야.”
아무래도 두 분도 댁에 가시기 전 산책 겸 둘러보러 오신 것 같았다.
“평소 이런 자연을 접하지 않으니 당신 정서가 그렇게 메마른 거야. 그건 그렇고… 여보. 주하 엄마. 이제 집으로 들어오지 그만. 졸혼이니 나발이니… 이제 그만큼 떨어져 살았으면 됐잖아.”
“흥, 새삼스럽게 무슨.”
“송 여사. 아니 지원씨.”
“어머나… 징그럽게 이름은 왜 불러요?”
“주하도 이제 정착하고 저리 괜찮은 며느리도 생기는데 우리도 이만 다시 합치자고. 그게 순리잖소. 어이 이봐! 어디 가? 좀 천천히 가라고-”
유주는 인공목 뒤에서 나오려다 다시 몸을 숨겼다. 아무래도 두 분만의 공간을 존중해드려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수목원 밖으로 나왔다. 주하가 이쪽으로 걸어오며 의아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재밌는 거라도 봤어? 왜 이렇게 실실 웃어, 귀엽게.”
“아니… 아무것도 아냐. 잠깐만 걷자.”
유주는 일부러 수목원 반대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성벽처럼 둘러쳐진 정원 담 너머, 미로처럼 아담한 소로(小路)가 나 있었다. 주하가 유주의 허리를 감싸며 나란히 걸었다.
“부모님이 너무 좋으셔서 다행이야. 나도 정말 딸처럼 잘해드리고 싶어.”
“네가 워낙 괜찮은 며느릿감이라 좋아하시는 거지. 다행이야, 다른 건 물과 기름 같은 두 분이 너에 대해서만은 저렇게 의기투합하시니.”
따스한 2월 중순 미풍이 둘을 감쌌다. 인파가 새로 개장한 수목원에만 몰려 있는지 오솔길에는 둘밖에 없었다. 둘은 서로의 온기에 기대며 나무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확실히 밤공기도 많이 풀렸네. 안 춥지?”
“응.”
유주는 주하의 몸에 조금 더 기대며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주하야, 부모님… 지금이라도 다시 합쳐서 사시게 되면 좋을 것 같아. 그렇지?”
“글쎄. 쉽지는 않을걸. 티격태격 투닥투닥하시다 심기 거슬리시면 어머니는 또 집을 나가실 거고… 그럼 어차피 도돌이표잖아.”
주하는 유주의 어깨에 두른 팔을 꼭 끌어당기며 웃었다.
“알아서들 하시겠지. 흘러가는 대로 두고 지금은 우리 둘만 생각하자. 아참.”
주하가 갑자기 정색한 얼굴로 물었다.
“너 혹시 유학 갈 생각 있어? 미안하지만 절대 못 가. 난 너랑 못 떨어져.”
“아니 그런 생각까진……”
“내가 따라가면 되지만 아직 이쪽 일이 산더미야. 아직은 미국보단 국내에 있는 날이 더 많고. 꼭 가고 싶으면 몇 년만 기다려.”
“걱정 마, 나도 어디든 혼자는 싫으니까. 아이가 생기면 멀리 가기도 힘들고……”
유주는 주하를 안심시키며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머리를 기댔다.
“어디든 너랑 있으면 좋지만… 혼자는 안 가, 절대로.”
만족한 듯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주하가 팔짱을 풀고 그녀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정수리에 그의 입술이 와 닿는 감촉이 너무도 좋았다.
“이제 가자, 주하야.”
그래, 주하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정문 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같은 집으로 가니까 너무 좋다. 이래서 결혼을 하는 거였어. 헤어질 필요가 없어서.”
유주는 응, 동의의 표현을 내비치며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행복했다. 비로소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세상에 태어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행복감을 맛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것인가 보다.
“또 다른 이유, 알 것 같아. 왜 사람들이 그렇게 결혼을 못 해서 안달인지.”
“뭔데?”
유주는 주하의 말에 의아한 듯 물었다.
“이렇게 행복해지려고 결혼하는 거였어.”
신기했다. 방금 그녀가 한 생각을 주하 역시 똑같이 하다니.
살면서 삐걱대는 순간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가 다혈질 성정 못 버리고 울컥울컥 포효할 때도 있을 것이고, 한 지붕 아래 함께 살면서 예기치 못한 갈등으로 부딪치는 일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부부로 결실을 맺어 함께 하는 한, 어떤 것도 다 포용하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행복해?”
그녀의 물음에 주하가 한쪽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말이라고? 행복해서 날아갈 것 같아. 너는?”
유주가 다시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그녀도 말해주었다.
“행복해. 네가 있어 줘서.”
달이 무척이나 밝았다. 이제는 존재조차 희미한 도심의 별들이, 은은한 레일 조명처럼 밤하늘 드문드문 제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 위로 주하의 숨결이 흘렀다.
사랑해.
달빛보다 더 환하고 별보다 더 달콤한 속삭임이 머리 위에서 행복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작가후기
안녕하세요, 피오렌티입니다. 이 스물네 번째 막장이 나올 때는 가을도 무르익은 10월이겠군요. 이맘때쯤 저는 발칸 반도 어디쯤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꽃쓰레기가 꽃길 가는 이야기만 쓴다고는 했지만, 본편의 강주하는 그렇게까지 나쁜 녀석은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가장 동정남에 가깝고 문란남도 아니며 성장환경으로 가치관만 좀 비뚤어졌을 뿐이라, 제대로 된 표렝이표 쓰레기를 원하신 분들께는 이번에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미리 사과드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주주 커플(강주하x서유주)은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여러 번 뒤집어엎고 새로 썼던 남주 강주하가 제 맘에는 흡족하지만 독자분들께는 어떤 남주일지 모르겠네요^^;;
9화 중반에 나왔던 강주하의 친한 형, 권태하는 나중에 나이 차 많은 선결혼 후연애 커플을 다룬 차기작에서 등장합니다. 부부 통화의 상황을 보시니 어떻게 살이 와들와들 떨리고 뼈 덜걱덜걱 흔들리는 신혼부부일지 대략 그림이 나오시죠?(웃음)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독자분들이 계셔서 제가 5년째 막장을 계속 쓸 수 있습니다. 읽히지 않는 글은 일기나 다름없을 텐데 제 막장을 늘 꾸준히 봐주시는 독자님들이 다음 막장을 나오게 해주시는 분들이셔서… 일기로 끝나지 않고 매번 새로운 막장이 나올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좀 더 재미있고 만족스러운 가상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량식품처럼 얕고 돌아서면 잊히는 대리체험이라도, 독자님들의 일상에 조그만 활력소와 즐거움이 되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쓰고 싶은 이야기들의 시놉시스가 열 몇 개에서 지금은 스무 개 정도로 늘어나 있습니다. 이것도 쓰고 싶고 저것도 쓰고 싶고 매일 좀이 쑤셔 죽겠어요(…..) 산적한 본업과 여행, 이런저런 개인적인 일들을 해치우고 내년 1월부터 또 줄줄이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다음 작은 선결혼 후연애 현로(악질 시어머니+쓰레기 남편의 마인드를 한 몸에 탑재한 남주가 그야말로 1인 2역할로 가엾은 여주를 마구 롤링시킵니다. 남편이 시어머니 역할까지 한꺼번에 다 하니 시련의 효과는 고공상승♥)
그 사이에 혹시 분량 짧은 중단편을 내게 되면 배덕물 로판 or 외국인남주x한국인여주 배틀 현로가 될 것 같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늘 행복한 가을날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차후 더 생각나는 TMI썰이 생기면 블로그상에서 풀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교정고까지 힘써 주신 뷰컴즈 이지수 매니저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독자님들 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2019. 9. 16.
추석연휴 다음날, 피오렌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