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선발 출전
“잘해 보자.”
“잘 부탁드립니다.”
송석현은 선발투수 정진오와 주먹을 부딪쳤다.
정진오는 어린 좌완 선발투수라는 장점이 있었지만 1군은 잠깐 발이나 붙이다 오는 수준이었다.
2군에서는 방어율 3점대로 승승장구했지만 1군에선 통하지 않았다.
제구는 괜찮았지만, 구속 140km/h 초반의 직구와 결정구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큰 단점도 없지만 큰 장점도 없는 투수.
덕분에 정진오는 FA 보상 선수들이 트레이드될 때 어린 좌완 선발투수임에도 팀에 남을 수 있었다.
“홈런 한 방 날려 주면 좋고.”
“하하,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정진오와 짧은 농담이 끝난 후 송석현은 금세 진지해졌다.
20세 고졸 포수가 선발 출전을 한다는 건 드문 일이다.
두말할 것도 없는 기회다.
기회는 다른 말로 위기라고 하던가.
여기서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1군 무대를 밟는 시간이 생각보다 더 길어질 수 있다.
-플레이볼!
경기가 시작됐다.
공격은 웨일스부터 시작됐다.
선두 타자는 조양선.
조양선이 들어서자 송석현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처음 보네. 신인이야?”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공 좋은 거 하나 줘라.”
조양선은 넉살 좋게 농담을 건넸다.
27세, 웨일스 주전 유격수.
컨택이 좋고 발도 빠르다.
종아리 부상으로 현재 2군에서 페이스를 올리는 중이다.
“자, 자. 한가운데 직구 하나 줘라.”
송석현은 말없이 사인을 냈다.
첫 선택은 바깥쪽 슬라이더였다.
팡!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존 안쪽으로 말려 들어온 공이지만 타자는 치지 않았다.
선두 타자답게 애매한 공은 지켜보겠다는 심산이었다.
“벌써 뺑끼를 치려고 하네. 그거 좋은 버릇 아니다.”
“저는 한가운데를 냈는데 선배님 공이 바깥쪽으로 빠졌습니다.”
“풋, 그래?”
“이번엔 좋은 거 드리겠습니다.”
‘바깥쪽, 직구.’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은 투수가 공격적으로 바깥쪽에 공을 붙였다.
탁!
타자가 공을 쳤으나 파울이었다.
2구 만에 0-2.
타자가 잠시 타석에 물러서서 시간을 벌었다.
“이번에도 빠졌냐?”
“그럼요. 한가운데 직구를 달라고 했는데요.”
송석현은 다시 사인을 냈다.
‘바깥쪽, 커브, 바운드.’
송석현이 미트로 바닥을 가리켰다.
몸이 풀린 투수는 지체하지 않았다.
타자는 움찔했으나 공을 참아 냈다.
타자는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배트를 빙빙 돌렸다.
1-2.
투수의 승부 타이밍.
타자는 포수와 투수를 번갈아 봤다.
“첫 타자부터 이렇게 승부를 길게 가져가면 나야 좋지, 공 오래 보고.”
“그렇습니까?”
“벤치 볼 배합을 너무 믿지 마. 안전한 게 지나치면 위험하다, 너.”
“네, 명심하겠습니다.”
조양선이 배트를 쥐고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장타는 버리고 단타로만 가겠다는 신호였다.
포수는 신인이고 투수는 결정구가 없다.
큰 스윙만 안 하면 공을 골라 낼 자신이 있었다.
송석현이 연이어 투수에게 사인을 냈다.
투수는 포수의 사인에 두 번 고개를 저었다.
“쯧쯧, 투수가 이때 승부 안 하면 언제 승부하려고.”
고트의 투수코치가 침음을 흘렸다.
결정구가 없는 투수일수록 카운트를 유리하게 잡아도 어려운 승부를 자처한다.
타자는 슬쩍 홈플레이트 근처로 발을 옮겼다.
탓!
투수가 다리를 들어 올려 힘차게 공을 뿌렸다.
팡!
타자는 배트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송석현의 미트는 타자의 옆구리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좋았어.”
투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송석현은 미트의 공을 빼서 내야수에게 돌렸다.
“후우, 진짜 이번 건 빠졌나 본데?”
타자가 투수와 포수를 한 번씩 번갈아 보곤 벤치로 들어왔다.
타자가 들어오자 벤치의 동료들이 물었다.
“공도 안 빠른데 왜 그냥 두고 봤어?”
“거기서 몸 쪽 공이 올 줄은 몰랐지.”
“에이, 바깥쪽 공만 던졌으면 다음엔 몸 쪽 공 하나 던질 만하잖아.”
“정진오잖아. 쟤는 안전제일주읜데 웬일로 몸 쪽 공을 던졌나 몰라.”
“포수가 요구했나?”
“설마. 쟤 신인이라며. 그럼 벤치 아니면 투수지.”
송석현은 정진오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정진오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배터리의 사인이 맞아떨어졌다.
정진오는 모자를 고쳐 쓰며 웃었다.
“재밌네.”
1번 타자를 잡아내자 정진오는 연이어 두 타자 범타를 만들어 냈다.
삼자범퇴.
벤치로 들어가던 정진오가 송석현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좋더라.”
“형 공 좋던데요.”
“그랬냐? 흐흐.”
“다음 이닝에도 투구 템포 더 당겨 보시죠. 템포가 빨라지니까 쟤들 정신 못 차리는데요?”
“내가 봐도 그런 거 같더라. 그래, 알았어.”
구석에 앉아 있던 김정률이 김인환을 보며 말했다.
“석현이가 생각보다 빠르게 안착하네. 안 그래?”
“예, 뭐…….”
김인환은 넋 빠진 얼굴로 고개만 주억거렸다.
“뭐 대답이 그래? 싱겁긴.”
웨일스의 투수는 구인선이었다.
구인선은 웨일스의 토종 2선발이었지만, 부상으로 스프링캠프 합류가 늦어 현재 2군에서 페이스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웨일스의 유일한 좌완 토종 선발이었으며 파이어볼러였다.
제구가 좋지 못하단 평이 많았으나…….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연속 세 타자 삼진으로 웨일스 토종 2선발의 체면을 세웠다.
“쟤 포크는 진짜 좋다니까.”
“타이밍을 못 잡겠네.”
“초반부터 말렸어.”
구인선은 정진오와 달리 포크라는 결정구가 있었다.
1군 무대에서도 수준급으로 평가받는 공이었다.
2군 선수들이 1회부터 쳐 내기엔 쉽지 않을 것이다.
“아이고, 쉴 시간도 없네.”
정진오는 앓는 소리를 하며 마운드로 올라갔다.
송석현은 홈플레이트로 걸어오는 타자를 쳐다봤다.
심수경.
웨일스의 차기 4번 타자.
이제 고작 23세이지만 1군 레귤러 멤버 중 하나였다.
아직은 성적이 들쑥날쑥하지만 작년에도 1군 OPS 8할이 넘은 유망주였다.
“후우우.”
투수는 심수경이 들어서자 한숨을 내뱉었다.
결정구가 없는 투수가 거포를 만나면 머리가 깜깜해지기 마련이다.
송석현은 초구로 몸 쪽 직구를 요구했다.
‘안 돼.’
‘바깥쪽 직구?’
‘안 돼.’
투수가 두 번 연속 고개를 저었다.
송석현은 들리지 않을 만큼 한숨을 쉰 뒤 사인을 바꿨다.
‘변화구?’
‘좋아.’
‘바깥쪽 커브.’
‘안 돼.’
‘……슬라이더?’
‘오케이.’
송석현이 심수경의 발을 살폈다.
포수는 타석의 타자를 읽어 내야 한다.
심수경은 거포지만 스트라이드도 적당했고 히팅 포지션도 높지 않았다.
거포임에도 컨택을 버리지 않은 밸런스 히터.
밸런스가 잘 잡혀 있다는 건 약점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단 얘기다.
투수는 밸런스가 잘 잡힌 타자를 상대론 어려운 승부를 자처한다.
송석현은 몸 쪽 직구 하나를 찔러 상대의 반응을 보려 했으나 투수가 완강했다.
“악!”
투수가 기합을 지르며 공을 던졌다.
삼자범퇴 후 4번 타자.
쉽게 출루를 주지 않겠다는 다짐.
탕!
“에이 씨.”
투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깥쪽으로 덜 빠진 슬라이더는 타자에겐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심수경은 바깥쪽으로 밀어 치면서 우익 선상으로 빠지는 2루타를 만들었다.
“하, 짜증 나네.”
안타를 맞은 투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송석현은 타석의 발자국을 살폈다.
스탠스와 스트라이드의 차이가 크지 않다.
힘들이지 않고 공을 치는 타자다.
결정구가 없는 투수에게 컨택이 좋은 거포는 최악의 상성일 거다.
“흠.”
송석현은 2루의 심수경을 쳐다봤다.
정진오가 어떻게 하면 심수경을 잡아낼 수 있을까.
방법이 있나?
“포수, 앉아야지.”
“아, 죄송합니다.”
심판의 지적을 듣고 송석현이 자세를 잡았다.
2루에 타자를 둔 채 타자가 들어섰다.
무사 2루.
송석현이 지체 없이 사인을 냈다.
‘바깥쪽 커브.’
‘오케이.’
심수경이 출루하자 정진오는 송석현의 사인에 토를 달지 않았다.
1루에 주자도 없는 상황.
정진오는 초구 커브를 던졌다.
툭.
타자는 배트를 가져다 대듯 공을 맞혔다.
공은 그대로 1루수 땅볼로 향했다.
아웃.
“야스!”
투수가 미소를 보였다.
주자가 진루했지만 초구로 아웃 카운트 하나를 뺐다.
1사 3루.
타자는 들어서자마자 벤치의 사인을 살폈다.
정진오는 3루의 심수경을 연신 힐끗거렸다.
‘몸 쪽 직구.’
‘초구부터? 안 돼.’
송석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투수가 당황하는 건 물론이고, 벤치도 술렁였다.
“뭐야? 왜 벌써 마운드로 올라가는 거야?”
“글쎄요. 올라갈 타이밍은 아닌 거 같은데.”
“사인 안 맞았다고 저러는 거야?”
“에이, 설마요. 연차가 몇 년 차인데, 신입이.”
감독과 투수코치, 배터리코치 모두 영문을 몰라 팔짱을 꼈다.
송석현은 마운드에 올라가자 미트로 입을 가렸다.
“형, 제 사인이 마음에 안 드셔도 바로 던져 주실 수 있어요?”
“뭐?”
“형, 오늘 공이 좋아요. 기세 살려서 빨리빨리 승부해요. 아까도 형 기세가 좋았는데 투구 간격이 길어지니까 타자한테 수가 읽혀서 안타 맞은 거지 오늘 공은 좋아요, 진짜.”
정진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송석현은 한 번 더 말했다.
“저한테 공 받자마자 바로 던져요. 제가 사인 바로바로 갈게요.”
“사인 안 뺏기려면 사인 앞뒤로 가라를 섞어야지.”
“바로바로 승부하면 사인을 훔쳐도 알려 주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어요, 형. 오늘같이 공 좋은 날 뭘 고민해요?”
송석현은 정진오의 말을 듣지 않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정진오는 고개를 흔들며 발로 마운드를 툭툭 쳤다.
“바로……?”
송석현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정진오는 구위도, 제구도 특출하지 않고 결정구도 없다.
한 수, 한 수 살얼음판 걷듯 신중하게 공 하나를 던지고 장고에 빠지기 일쑤다.
투수의 생각이 길어지면 타자도 생각이 길어진다.
똑같은 시간이지만 타자와 투수의 시간은 다르다.
타자는 투수의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
투수가 자꾸 고개를 젓는다는 건 포수와 사인이 안 맞는다는 얘기다. 포수와 사인이 안 맞는다는 얘기는 평소 맞춰 왔던 사인이 마음에 안 든단 얘기다.
투수의 평소 투구 스타일을 알고 있다면 타자는 선택지를 줄일 수 있다.
‘고민한다고 구위나 제구가 좋아지면 투수처럼 쉬운 포지션은 없지.’
고민한다고 좋아질 건 없다.
투수의 공이 좋지 못하면 공이 좋아 보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투구 템포를 끌어 올리고 변칙적인 투구 패턴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바깥쪽, 하이볼, 직구.’
정진오는 뜻밖의 사인에 멈칫했다.
송석현은 미트를 한 번 흔들었다.
“에이 씨.”
어처구니없는 사인이라 생각했지만 정진오는 다리를 들어 올렸다.
툭.
타자는 홀린 듯 높은 볼 직구를 건드렸다.
공은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하늘 높이 떴다가 2루수 글러브로 들어갔다.
-아웃.
정진오는 연속 초구 2아웃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트의 벤치에도 말들이 피어올랐다.
“진오가 던지던 패턴이 아니네.”
“그러게요.”
“포수 사인으로 봐야겠지?”
“예, 아무래도…… 스읍.”
“사인이 제멋대로긴 한데 통하긴 통하네.”
감독이 뒷짐을 지었다.
“창의적인 포수라……. 나야 나쁠 거 없지만 우리 1군 감독님께서 좋아하실지 모르겠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