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수 박신언
“우아…….”
버스에 올라탄 송석현은 진이 쏙 빠졌다.
고트 팬들에게 사인하고 사진을 찍는 데만 10분 이상이 걸렸다.
선배들 눈치가 보여 빨리 가려 해도 팬들의 인의 장막에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송석현이 버스에게 올라타며 고개를 숙였다.
김인환을 빼면 가장 늦게 탄 사람이 송석현이었다.
“오늘 같은 날이 매일 오는 것도 아닌데 죄송할 거 없어. 대신 앞으론 웬만하면 경기 끝나고 바로 버스로 와. 팬들한테 사인하고 사진 찍는 건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해. 경기 끝날 때마다 그러면 혼잡해서 사고 난다.”
감독의 말에 송석현이 고개를 숙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송석현은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댔다.
김정률은 송석현의 볼을 찔렀다.
“홈런볼은? 찾았냐?”
송석현이 주머니에서 공을 꺼냈다.
“바로 찾아 주던데요?”
“여긴 일 잘하네. 어제는 첫 안타, 오늘은 첫 홈런. 기분은 어떠십니까, 송석현 선수?”
“좋습니다. 예. 아주 좋습니다.”
김정률은 크큭 웃더니 의자에 털썩 앉았다.
“계속 이렇게 이기니까 경기에 나갈 일이 없네. 개점휴업이야, 개점휴업.”
“불펜이 쉬면 좋은 거 아닙니까?”
“난 나가고 싶은데 자꾸 말리네.”
“불펜이 쉴 때 쉬면 좋죠. 바빠지면 쉬고 싶어도 못 쉬잖아요.”
그때 김인환이 버스에 올랐다.
선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를 보냈다.
“김인환! 김인환! 김인환! 김인환!”
김인환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향했다.
선수들은 일부러 더 크게 박수를 보내며 웃었다.
“어때, 몇 년 만에 인터뷰하니까?”
김정률의 질문에 김인환은 코를 슥슥 문질렀다.
“그냥…… 좋죠, 뭐.”
“오늘 온 아나운서 예쁘던데. 왜, 저번처럼 전화번호 알려 줬어?”
김인환의 눈이 커졌다.
선수들이 큭큭거리며 소리 죽이고 웃었다.
“형…….”
송석현도 웃으면서 김인환에게 물었다.
“번호를 따는 것도 아니고 알려 주다니 보통 자신감이 아니네. 와.”
김인환은 얼굴이 벌게져선 손사래 쳤다.
“내가 그런 건 처음이라 당연히 내 번호를 알려 줘야 하는 줄 알았지.”
“그래서 너 전화도 안 오고 꽝이었잖아. 흐흐흐, 웃기네. 너보다 네댓 살은 연상이었을 건데 그렇게 좋았냐?”
“아, 형. 석현이도 있는데.”
“왜? 아나운서 취향이 뭐가 어때서?”
“아나운서 취향이 아니라 그때 김영신 아나운서가 제 취향이었다고요…….”
“그래쪄요? 그래서 결혼할 때 훌쩍거려쪄요?”
동시에 버스 안이 웃음바다가 됐다.
“푸하하하, 그때 울었어?”
“대박이네. 인환이 완전 로맨티스트였어.”
“저거 순진한 거냐, 바본 거냐?”
김인환은 두 눈을 창문에 머리를 박았다.
김정률은 김인환의 머리를 쓰담쓰담 했다.
“짜식, 삐지긴. 오랜만에 인터뷰한 거라서 형이 장난 좀 쳤다.”
“……네.”
“내일도 한 방 쳐 주셔야죠, 김인환 선수?”
“네, 네. 알겠습니다.”
김인환은 입술이 댓 발은 튀어나와선 아무 말도 안 했다.
송석현은 목소리를 죽여 김정률에게 물었다.
“근데 정말 울었어요?”
김인환이 바로 대답했다.
“안 울었어. 왜 울어, 내가?”
* * *
시끌벅적한 버스는 금세 대전 숙소에 도착했다.
선수들이 짐을 풀고 자기 방을 찾아가는 사이, 박신언이 송석현에게 다가왔다.
“너 시간 되지?”
“지금요?”
“이따 로비로 내려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아…… 예예. 알겠습니다.”
송석현은 갑작스러운 접근에 당황했지만 구태여 이유까진 묻지 않았다.
송석현이 방에 들렀다가 다시 로비로 내려오자 박신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신언은 백팩 하나를 메고 있었다.
“따라와.”
송석현은 영문을 모른 채 박신언을 따라나섰다.
박신언은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는 카페로 들어가더니 아무도 없는 2층까지 올라갔다.
“난 아아. 네 것도 하나 사 와.”
박신언은 대뜸 자기 카드를 내줬다.
“예, 다른 필요하신 건 없습니까?”
“괜찮아. 너 먹고 싶은 거 있음 사 와도 돼.”
“저도 괜찮습니다. 그럼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송석현은 주문을 하면서도 이마를 긁적였다.
왜 갑자기 박신언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박신언은 자신과 접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팀에서도 따로 친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모두와 조금씩 거리를 두는 사람.
다른 사람도 아닌 박신언이 자신을 직접 불러 단둘이 카페에 왔다는 게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여기 아이스 아메라카노 가져왔습니다.”
“그래, 앉아.”
송석현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박신언은 커피 한 모금을 쫙 빨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스트레칭 했다.
“너 술집 안 다니지?”
“술집요?”
“그래.”
“아…… 네. 갈 시간도 없고, 딱히 술도 자주 마시는 타입이 아니라서요.”
“앞으로도 가지 마. 안 그래도 요새 우리 보는 눈 많다. 괜히 다른 데 다니지 말고 사람 만날 일 있어도 카페에서 만나든 집에서 만나든 해.”
“예…….”
“뭐 해? 마셔.”
송석현은 커피를 마시면서 박신언의 눈치를 봤다.
갑자기 왜 이러지?
박신언은 커피를 단숨에 비워 내더니 가방을 열어 두터운 수첩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총 열 권의 수첩이었다.
수첩마다 표지 색도 크기도 제각각에 손때가 묻어 있었다.
“읽어 봐.”
박신언은 그중 가장 낡아 보이는 수첩 하나를 송석현에게 내밀었다.
“네.”
송석현은 수첩을 펼쳤다.
약간 구겨진 종이 첫 장에는 기본이라는 두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한 장을 더 넘기자 첫 줄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포수는 책임지는 자리다.
송석현은 박신언을 바라봤다.
노트에는 박신언의 노하우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거 선배님이 쓰신 거 아닙니까?”
“맞아.”
송석현은 노트와 박신언을 번갈아 봤다.
“이걸 왜 저한테……? 이런 건 원래 공유 안 하는 거 아닙니까?”
프로야구 선수는 누구나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다.
투수는 상대 타자를, 타자는 상대 투수에 대해 공부하기 마련이라면 포수는 둘 모두를 아울러야 했다.
타자로서 상대 투수를 분석하고, 포수로서 상대 타자를 분석한다.
여기에 심판의 성향까지 파악해야 한다.
전력 분석팀의 자료만으론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을 포수는 경기를 뛰면서 모으고 채운다.
세밀한 노하우는 포수의 자산이었고, 같은 팀 포수라고 해도 모든 걸 공유하진 않았다.
같은 팀이라고 해도 경쟁자 아니던가.
“이 많을 걸 다…….”
“왜? 너무 많아?”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이런 걸 저한테 보여 주셔도 되는 겁니까?”
“난 다 아는 내용이야. 이미 내 머릿속에 다 있고. 이제는 필요 없어.”
“그러면 이건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그래, 감독님이 널 꼭 한번 키워 보라고 하시더라. 뭐, 훈련이야 코치님이 하는 거니 내가 도와줄 게 이런 거밖에 더 있겠냐?”
송석현은 노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돈을 주고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노트다.
하물며 국내 최고의 수비형 포수라는 박신언의 노트다.
얼마의 값을 쳐줘야 적당하다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이런 귀한 걸 정말 제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너한테만 주는 거야.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라. 나도 자선사업가는 아니어서 말이다.”
송석현은 수첩을 덮었다.
감독의 명령이라지만 자기 밑천을 바로 다 까는 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보통 친한 사이라면 모를까…….
하물며 박신언과 송석현은 인사 말고는 몇 마디 나눠 보지 않은 사이였다.
“뭐야? 싫어? 아님 내가 가져가고.”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너무 좋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이래?”
“이런 걸 받아도 되나 싶어서죠. 귀한 거잖습니까.”
“귀한 건 아니 다행이네. 당장 다 외우라는 말은 못해도 요 두 권, 두 권은 꼭 다 읽고 외워.”
박신언이 노트 두 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프로야구 선수로서 어떻게 처신하고 몸 관리를 할 건지, 내가 모아 둔 거야. 이건 포수가 꼭 알아 둬야 할 기본기고. 내 무공비급이나 다름없는 거니까 어디 유출하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어?”
“절대 유출 안 할 겁니다. 절대요.”
“그래, 그러면 됐다.”
박신언은 다리를 꼬더니 송석현을 쳐다봤다.
“열심히 해. 열심히 해서 빨리 포수 마스크 써야지.”
“예, 감사합니다.”
송석현은 노트를 주섬주섬 챙기다 박신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런데 선배님.”
“왜?”
“정말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이유가 감독님 때문입니까?”
“음……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너무 감사한 일인데 체감이 가질 않아서요. 건너 건너 들었지만 이런 노하우는 절대 같은 팀끼리도 공유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공짜로 주는 거 아니야.”
‘공짜’라는 말에 송석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러면요?”
“쫄기는. 돈 달라는 거 아니야. 나중에 포수로 잘되면 내 덕에 잘 컸다는 말이나 좀 해 줘. 그거면 된다.”
“그거 하납니까?”
“그래,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용욱이 형 은퇴 전에 네가 최고가 되면 더 좋고.”
“정용욱 선배님을요?”
“그래, 너라면 용욱이 형을 충분히 제칠 수 있어.”
“제가 어떻게…….”
“지금은 힘들지. 하지만 그거 읽고 열심히 외워. 그러면 조금 위로가 되겠지.”
박신언은 자기 빈 잔을 툭툭 건드렸다.
송석현은 다시 커피를 한 잔 받아 와 박신언에게 내밀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너 잘되거들랑 내 이름이나 잊지 말고 말해 줘라.”
“그거뿐이겠습니까? 저 정말 열심히 해서 선배님 뒤를 받칠 수 있는 포수가 되겠습니다.”
“최대한 기한을 줄여야 할 거야. 내년 상반기엔 내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송석현은 귀를 의심했다.
“네?”
“뭐, 나중에 발표할 일이지만 너한테 미리 알려 줄게. 나 머리에 문제가 있어. 뇌동맥류? 뭐 혈관이 좀 꼬여 있어. 지금은 심각하진 않지만 수술은 받아야 돼. 시즌 끝나고 받으면 재활하느라 빨라야 내년 하반기 복귀야. 그때까진 너하고…… 뭐. 아무튼. 네가 해야 할 몫이 많아.”
“많이 아프신 거예요?”
“지금은 관리 중이야. 버틸 만해. 구단에는 아직 얘기 안 했어. 의사랑 수술 날짜를 잡고 나서 감독님이랑 같이 구단에 얘기할 생각이거든.”
“아…….”
“그러니까 이거 열심히 외워 둬. 이건 오늘까지의 버전이야. 앞으로 업데이트는 네가 해야 돼.”
“예, 예. 알겠습니다.”
“네가 잘해 줘야 내가 팀에 덜 미안하지. 너한테 부담 주는 건 미안하지만, 그래서 내가 이걸 주잖냐.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않은 거야.”
“감사합니다, 선배님.”
“피지컬적인 훈련은 코치님이랑 하고 소프트웨어 공부가 필요하면 언제든 나한테 물어봐라.”
“예, 알겠습니다.”
“오늘 얘기한 건 너랑 나랑 둘의 비밀이야. 다른 사람한테는 얘기하지 마, 발표하기 전까진 꼭. 어?”
“네, 선배님.”
박신언은 먼저 자리를 떴다.
송석현은 홀로 남아 열 권짜리 노트를 손으로 훑었다.
말 그대로 수억금을 줘도 못 사는 노하우다.
선배나 코치의 도움이 턱없이 부족해 홀로 책과 동영상을 뒤적거리며 배우던 송석현에겐 화룡점정, 마지막 퍼즐이나 다름없었다.
책을 챙겨 일어나려던 송석현은 멈칫했다.
“그런데 일혁 선배도 있는데 왜 나한테만……?”
서일혁이 트레이드 매물로 올라갈 거라는 걸 모르는 송석현에겐 박신언의 호의가 기쁘면서도 또 의아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