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127화 (127/201)

베테랑

경기가 끝난 후.

김인환은 퇴근하지 않고 실내 연습장으로 향했다.

김인환은 배트를 옆에 내려 둔 채 벽에 기대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불도 켜지 않고 컴컴한 어둠 속에서 숨을 죽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탁.

불이 켜지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들렸다.

“누꼬?”

익숙한 목소리.

김인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배님,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

“인환이가?”

“네.”

“니는 아직 안 가고 뭐 하노?”

“아…… 저는 그냥 있었습니다.”

“여서? 오늘 같은 날 아들 맛있는 거나 사 주지 돈 나갈까 봐 여서 있던 기가?”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유선호는 피식 웃더니 김인환 옆에 앉았다.

“와? 혼자 감상에 젖었나? 내가 오늘 지깄따고 막 난리 부르스 추고 그랬나?”

“아닙니다. 그냥 생각했습니다.”

“무슨 생각?”

“그냥……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좀 했습니다.”

“오늘 같은 날 생각할 게 뭐 이따꼬 여서 궁상을 떠는데? 이런 날은 맥주 한 캔 딱 하고 푹 자면 되는 기지, 뭐 그리 생각이 많아?”

“그러게요. 그래야 하는데 잡생각이 많네요.”

“짜슥이.”

유선호가 기지개를 켰다.

“근데 선배님은 퇴근 안 하십니까?”

“뭐…… 요새 내가 칼퇴근할 처지가?”

“선배님이 왜요? 잘하고 계시잖습니까.”

“내가? 참 나. 니 내 꼽주나?”

“아뇨, 아뇨. 제가 왜요? 선배님 요새 성적 잘 나오잖습니까?”

“나오긴 개뿔. 뭐가 나오노? 겨우겨우 목숨 줄이나 연명하고 있는데.”

유선호가 한숨을 쉬었다.

“타자가 아무리 공을 잘 고른다고 해도 결국은 공을 잘 쳐야 하는 게 타자다. 요새 내가 뭐 공을 쳐도 잘 나가기나 하나. 영 힘아리가 없다, 힘아리가.”

“잠깐이겠죠. 선배님은 금방 올라오시잖습니까?”

“그거야 옛날 말이고. 요새는 내도 뭐 자신이 없다.”

“선배님이요?”

“인마, 니도 내 나이 돼 봐라. 매일매일이 불안한기라. 내가 못하는 게 잠깐 컨디션 때문인지, 아니면 늙어 가꼬 이라는 긴지 알 수가 없다니까. 그게 환장하는 기야.”

“아…… 예…….”

“내가 뭐 홈런을 해마다 서른 개, 마흔 개씩 치던 놈도 아이고, 그래도 팀에 보탬이 될라치믄 진루타라도 만들어야 될 거 아이가. 맞나?”

“예. 그래도 선배님은 선구안이 훌륭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언제나 그게 제일 부러웠습니다. 제가 선배님 선구안의 반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유선호가 피식 웃었다.

“선구안이라는 것도 공부하면 늘게 돼 있어. 아들이 공부를 안 하고 자기 필로다가 야구를 하니까 안 느는 기지, 매일매일 공부하다 보면 감이 온다니까. 이 타이밍엔 이 공이겠구나, 이런 거. 니 솔직히 말해 봐라. 하루에 2시간 이상 공부하나?”

“2시간이요? 그건……아니죠…….”

“봐라, 인마. 니 안 하제? 그날 경기 끝나믄 컴퓨터 켜 놓고 경기를 복습해야 안 하나. 야는 왜 이때 이런 공을 던졌지? 이유가 뭐지?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 건너뛰기 누르면서 후딱후딱 볼 수라도 있지, 예전에는 어데. 경기 테이프 구하기도 힘들고, 구해도 3시간 이상은 가만히 그거 쳐다봐야 했어. 지금은 전 구단 경기 다 봐도 3시간이 안 걸리는데 말이야.”

“선배님은 그걸 여태 다 보신 겁니까?”

“내는 고등학교 때부터 할 수 있으면 계속 봤다. 홈런을 칠라믄 그냥 쳐서 되나? 내가 원하는 공에 제대로 스윙해야 나오는 게 홈런이니까 내가 원하는 공을 고를 방법이 뭐 있겠노. 자가 무슨 공을 던질지 계산을 할 수 있어야 칠 거 아이가.”

김인환은 머리를 긁적였다.

“선배님이 그렇게까지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 프로다, 프로. 살아남을라믄 뭐라도 해야지, 재능으로만 살아남는 게 된다고 생각하나? 그거 오래 못 간다. 악착같이 버티는 것만으로도 칭찬받는 게 프로야.”

“네…….”

“니가 무슨 생각하는 줄 안다. 갑자기 홈런을 치니까 계속 이렇게 해도 되나, 아니면 다시 예전처럼 해야 하나 그거 고민하는 거 아이가?”

김인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이 없습니다, 뭐가 맞는지.”

“맞고 틀리고는 니가 생각해서 정하는 게 아이야. 니가 해 보면 답이 나온다. 잘되는 쪽으로 가. 정답 같은 거 없어. 그때마다 맞는 해결책이 있는 거지.”

“그런……가요?”

“내는 그래.”

“그러면 너무 불안하지 않을까요? 매번 해결책이 다르면 매번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에 정답이 어딨노. 항상 불안한 게 인생이다 안 하나.”

유선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니 여기서 계속 궁상 떨끼가? 내는 공 좀 치다 들어갈라 카는데.”

“아, 그러면 자리 비켜 드리겠습니다.”

“너도 좀 치고 갈래?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예. 그럼 같이 해도 되겠습니까?”

“하자. 안 할 이유가 어디 있노.”

두 사람은 훈련을 마치고 함께 해장국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잠시 바람을 쐬는 사이, 김인환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해장국 한 그릇 샀다고 감사는 무슨.”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 많이 도와주신 거요.”

“돕기는 무슨. 그냥 내도 불안하니까 주절주절하는 기다. 돕는 거 아이야.”

“항상 가슴에 돌덩이처럼 꽉 막힌 게 있었는데 선배님 말씀 들으니까 답답한 게 많이 가시는 거 같습니다.”

“니 잘하고 있는데 뭐가 그리 답답했노?”

“……재능이 없는 거 같아서요.”

“니가? 참 나, 니 내 멕이나? 내가 니처럼 빠워가 좋았으면 FA로 강남 빌딩을 샀겠다.”

“선배님은 데뷔 때부터 스타 아니셨습니까? 저는 밥값 한 지 몇 달도 안 됐는데요.”

“지금부터 시작이다. 니 몇 살이나 먹었다고 그라는데.”

“시작부터 잘하는 놈이 있으니까요. 걔를 보면 내가 뭐 하나 싶기도 하고…….”

“석현이?”

“네.”

“가가 마이 부럽나?”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말이죠.”

“내도 부럽다.”

“선배님이요?”

유선호는 커피를 홀짝거렸다.

“타고나길 그런 놈이 있어. 뭘 해도 잘하는 놈. 똑똑하고 몸도 좋고, 센스도 좋고. 이런 놈은 보통 다른 길로 잘 빠지거든? 석현이 이놈 아는 그런 것도 없어. 술도 안 마셔, 나이트도 안 다녀. 훈련하고 공부하고 그라고 바로 잠 푹 자삐고. 후. 지만 모르지, 가는 천재다, 천재.”

“석현이는 그걸 잘 모르더라고요. 인정도 안 하고.”

“가가 와 그라는 줄 아나?”

“왜요?”

“눈이 저 위에 있어서 그렇다.”

“저 위에 누구요? 석현이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긴, 인마. 있잖아. 혼자서도 팀 멱살 잡고 우승시킨 애.”

“아…….”

“눈높이가 거기에 맞춰졌으니 지가 잘한다고 생각을 하기나 하나.”

유선호가 남은 커피를 다 마셔 버리곤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누구나 다 아쉬운 법이야. 그래도 우짜겠노. 아쉬운 데로 내가 할 수 있는 거 하는 거 아이가? 남 부러워할 시간에 내가 뭐 더 할 게 없나, 그것만 생각해. 니가 한가해서 자꾸 딴생각하는 거야.”

“충고 감사합니다, 선배님.”

“내도 원래 시즌 중에는 체력 관리한다고 훈련량 관리하는데 요새 공이 안 나가니까 나와서 훈련한다 아이가. 내가 모자란 거 채울 생각하면 딴생각 날 틈이 없어요.”

“네. 저도 선배님처럼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처럼 하든 말든 그건 니가 알아서 하는 기고.”

김인환이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이 헤어지기 전, 김인환은 유선호에게 대뜸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이 우리 팀에 와서 정말 좋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닭살 돋게끔 와 이라노?”

유선호는 핀잔을 줬지만 입꼬리는 씰룩였다.

집으로 가는 길.

유선호는 뒷짐을 진 채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가 높고 날카로웠다.

* * *

다음 날.

주말 3연전 페가수스와의 마지막 경기.

이날의 주인공은 김인환도 송석현도 아니었다.

탕!

탕!

탕!

“유선호 선수! 오늘 전 타석 안타를 기록합니다!”

“3루타 빼고 다 나왔어요. 3루타 하나면 사이클링 히튼데…… 아무래도 유선호 선수의 발을 생각하면 그건 어렵겠죠?”

“사이클링은 어려워도 오늘 고트의 승리는 코앞까지 왔습니다. 유선호 선수 혼자서 5타점을 올리면서 7회 초 고트가 8-4로 앞서갑니다. 고트의 불펜이 바쁩니다. 오늘도 총동원이죠?”

“내일은 쉬는 날 아니겠습니까? 불펜 아낄 필요 없죠.”

“페가수스는 오늘 경기까지 지게 되면 스윕입니다. 이러면 현재 순위가 위태롭지 않나요?”

“스콜피언과 2경기 차였는데 오늘 경기까지 지게 되면 1경기 차로 확 줄어듭니다. 울브스와도 3경기 차로 줄어드네요.”

“최근 페가수스의 상승세를 생각하면 이번 스윕은 좀 의욉니다.”

“글쎄요. 의외라고 볼 건 없을 거 같습니다. 고트가 그동안 하락세였다고 하지만 송석현 선수와 유선호, 이지성 선수의 복귀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고트는 불펜을 아껴 두면서 전력을 비축해 뒀구요. 선발 라인업을 보더라도 고트는 5선발, 1, 2선발이라면 페가수스는 3, 4, 5선발. 물론 페가수스의 3, 4선발도 다른 팀에선 1, 2 선발이라지만 고트가 선발 라인업에서 안 밀렸다는 얘깁니다. 선발이 비슷하다면 타선이 보강되고 불펜도 충분히 쉰 고트의 활약은 이미 예정된 사실입니다.”

“그렇군요. 아직 오늘 경기가 끝나지 않았지만 이번 시리즈 일등 공신은 누굴까요? 역시 송석현 선수일까요?”

“KS포 아닐까요? 송석현 선수가 메인 키라지만 이번에는 김인환 선수도 정말 잘했거든요. 송석현 선수가 없을 땐 홀로 고군분투하느라 성적이 안 나왔지만 송석현 선수가 뒤에 서니까 다른 타자가 됐습니다. 상대 투수들이 김인환 선수를 피해 갈 수 없는 거죠. 김인환 선수엑 정면 승부를 한다……. 어떤 선수의 공이 김인환 선수의 힘을 감당하겠습니까?”

“오늘 경기를 보면 유선호 선수도 살아나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아직 정상급 투수들 공략은 어려워 보이지만 몸 상태를 보면 어느 정도 올라온 거 같아요. 유선호 선수가 자신의 클래스를 보여 줄 수 있다면 고트의 클린업은 리그 최고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거 같습니다.”

유선호는 이날 경기 1루타 한 개, 2루타 두 개, 홈런 한 개를 쳐 냈다.

사이클링 히트는 해내지 못했지만 경기 MVP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유선호는 오랜만에 MVP 인터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저를 응원 많이 해 주신 스콜피언의 팬 여러분들에게 제대로 감사 인사를 못 하고 떠난 게 마음에 걸렸는데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다른 팀 유니폼을 입었지만 저를 응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침 다음 경기는 스콜피언전인데요. 혹시 남다른 각오를 하신 게 있을까요?”

“각오가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유선호가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습니다. 꼭 지켜봐 주시죠.”

유선호는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 * *

유선호의 선전포고는 기삿감으로 충분했다.

월요일 스포츠 신문에는 유선호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찍혀 실렸다.

야구팬들의 갑론을박이 한창인 월요일 오후.

유선호는 호텔 사우나에서 이지성과 나란히 앉아 땀을 빼고 있었다.

“오늘 약속 안 잡으시는 거예요?”

“월요일은 푹 쉬는 게 최고다. 괜히 아들 만났다가 술 마시고 그라믄 좀 그래.”

“그래도 오랜만에 대구에 오는 건데……. 선배님 만나고 싶다는 사람 많을 거 아니에요.”

“지금은 아이야. 좀 잠잠해지면 그때 만나도 된다.”

유선호가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아들 일로 온다캤제?”

“네. 좀 있으면 약속 시간이에요.”

“땀 쫙 빼고 오리 먹은 다음에 버스에서 자면 딱 맞겠네.”

“저녁은 어떡하시게요?”

“호텔에서 대충 때우고 일찍 잘끼다.”

“아예 안 나가시게요?”

“나가 봐라. 기자들이고 사람들이고 잔뜩 벼르고 있을 텐데 괜히 난잡시럽다. 내가 선전포고를 했으면 내가 조심해야지.”

두 사람은 사우나를 마치고 바나나 우유 하나씩을 들고나왔다.

밖에는 송석현과 김인환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이 기다렸나?”

“아닙니다. 저희도 조금 전에 왔습니다.”

“그래. 가자. 내가 오리 기가 막히게 하는 데 안다. 삼계탕보다 오리가 더 여름에 딱이다.”

네 사람이 호텔을 나서려는 찰나, 한 사람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멈췄다.

선글라스를 썼지만 낯익은 얼굴의 남자.

김정률이었다.

김정률 옆에는 선글라스를 썼지만 8등신의 미녀가 함께했다.

“근데 자……가 팽혜리 맞나?”

유선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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