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는 나의 것 (3)
최종 스코어 11-4.
큰 점수 차에도 페가수스가 추가점을 냈지만 의미 있는 점수는 내지 못했다.
“오늘의 승리로 페가수스와 고트와의 경기 차가 두 경기 차로 줄어듭니다.”
“2경기 차는 크죠. 만약에 말이죠, 내일하고 모레 경기까지 고트가 이긴다면 양 팀은 공동 1위가 되는 거예요. 페가수스의 독주가 무너지는 겁니다.”
“페가수스는 사실 작년에 안 좋은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공동 1위까지 내준다면 꽤 골치가 아플 거 같아요.”
“리그 1위를 달성하고도 한국시리즈 트로피는 피닉스에게 내줬죠. 아마 제 야구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일 겁니다.”
“작년의 악몽이 올해에도 재현된다? 선수들도 그렇지만 팬들에게도 꿈도 꾸기 싫은 악몽일 겁니다.”
“그럼요. 그런 악몽은 평생 단 한 번으로도 차고 넘쳐요.”
* * *
경기가 끝난 후, 송석현은 김나영을 비롯해 정미남과 김영석을 만났다.
“오늘 홈런 죽이던데?”
정미남의 말에 송석현이 웃었다.
“공이 실투로 와서. 운이 좋았지.”
“캬. 완전 대스타야, 대스타. 인기 장난 아니더라?”
“뭐…… 부정할 순 없네? 하하하.”
“재수 없기는.”
“어떻게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오늘은 내가 쏠게.”
김영석이 고개를 저었다.
“이 시간에 맛있는 게 뭐 있어. 죄다 술집이지. 오늘 같은 날 술집 가면 너 몰라볼 사람 하나도 없을걸. 이런 날은 그냥 기분 좋게 집에 가는 게 최고야.”
“그래도 이렇게 넷이서 야구장에서 뭉쳤는데 이대로 가자고?”
“술집이라고 가 봐. 괜히 구설수나 오르지.”
정미남이 김영석에게 어깨동무했다.
“하여튼. 여친도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난리야?”
“친구가 옆에서 딱 잡아 줘야 친구 아니냐?”
송석현이 빙긋 웃었다.
“그래, 고맙다. 이렇게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그럼 우리 그냥 집으로 가자. 대신, 우리 집에서 치맥 어때? 콜?”
“콜!”
네 사람은 집으로 가는 동안 오늘 경기가 재밌었느니, 어땠느니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대화를 끊기게 한 건 김영석의 질문 하나였다.
“그런데 부모님한테는 언제 말씀드리게?”
송석현도 김나영도 쉽게 말하지 못했다.
정미남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이제 슬슬 말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면 리그 끝나고 말해도 되고.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너무 질질 끌어도 안 좋을 거 같아. 니들 둘이 말하기 전에 소문이 먼저 나면 부모님이 서운해하지 않을까?”
“그건 우리 둘이 좀 생각해 보고 얘기하려고. 대단한 것도 아닌데 솔직히 좀 떨리네.”
네 사람은 송석현의 집 앞마당 벤치에서 치맥을 함께한 후 헤어졌다.
정미남이 김영석을 데리고 먼저 자리를 떴고, 송석현은 김나영을 바래다줬다.
“리그 끝나면 말씀드려야 하나……?”
송석현의 물음에 김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말씀드리자. 지금 굳이 말씀드려서 일 복잡해지는 건 안 좋을 거 같아.”
“그렇겠지……. 어머님이 나 좋아하시려나?”
“그럼. 너 얼마나 좋아하는데. 네 경기도 잘 봐, 우리 엄마가. 아빠도 그렇고.”
“그래? 정말?”
“응, 그럼.”
“그러면 다행이고……. 다행이네, 정말.”
두 사람이 김나영의 집에 다 도착했다.
김나영은 집에 들어가길 망설였고 송석현도 김나영을 쉽게 보내지 못했다.
“저기, 근데 석현아.”
“응? 왜?”
“다음 주 중에 엄마, 아빠가 시골 내려간다는데.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거든? 월요일하고 수요일 사이라고 했는데…….”
“응.”
“혹시 된다면 우리 당일치기라도 여행 가 볼까?”
“여행?”
송석현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다, 당일치기지?”
“월요일이 딱 겹치면 1박 2일도 괜찮고, 화요일이나 수요일이면 새벽에 바다 보러 가서 아침에 올 수도 있고. 아, 너 너무 피곤하려나, 아침까지 자는데?”
“아냐. 무슨 말이야. 그 정도야 뭐. 언제든 상관없어. 정확한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 줘. 알았지?”
“응. 알았어.”
김나영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송석현은 연신 손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1박 2일, 1박 2일……. 어디가 좋지? 어디로 가야 되지?”
* * *
고트와 페가수스의 주중 2차전.
고트의 대승으로 언론의 관심은 더 높아졌다.
남은 시즌 페가수스와의 경기는 단 두 경기.
남은 승점도 2경기 차.
고트가 스윕한다면 공동 1위가 탄생한다.
작년에 피닉스에게 발목을 잡혀 연패連霸에 실패한 페가수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시나리오.
반대로 언더독의 승리, 인기 팀의 승리를 바라는 언론과 대중에겐 재밌는 기삿거리였다.
툭.
페가수스의 감독 최성연이 신문을 침대에 던졌다.
[페가수스! 바짝 쫓는 고트를 보며 또다시 작년의 악몽을 떠올리다!]
스포츠 신문 1면에 대문짝하게 나온 기사.
최성연이 숨을 거칠게 쉬었다.
“요새는 뭐 저리 문장이 길어, 길기는.”
페가수스가 잠실로 출근하자 기자들은 먼저 훈련을 끝낸 고트 선수들을 취재하고 있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송석현.
다음은 김인환, 유선호, 김정률이었다.
최성연 감독은 양 주머니에 두 손을 콱 찔러 넣은 채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우리를 벌써 끈 떨어진 연이라고 생각하나…….”
그때 최성연 감독을 발견한 페가수스 전담 기자가 다가왔다.
“감독님, 나오셨습니까?”
“으음, 김 기자, 밥은 먹었고?”
“네,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챙겨 먹었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네. 좋은 기사 좀 써 줘. 오늘 신문 보니까 저질 기사들 많던데.”
“네, 그럼요. 당연하죠.”
기자는 주변을 살피더니 최성연 감독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감독님, 여쭤볼 게 있는데요.”
“뭔데.”
“KS포를 상대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뜻하지 않은 질문에 최성연 감독이 말을 끌었다.
“방법…… 방법이라…….”
“다른 애들 얘기를 들어 보니까 KS포에 천적이 없다면서 올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꽤 높게 치더라구요. 감독님이라면 어떤 복안이 있을까 싶어서 여쭤봤습니다. 그라운드의 여우 아닙니까. 전략통이신데 무슨 방법이 있으시죠?”
“있지, 있어.”
“정말요?”
기자가 얼른 핸드폰 녹음 기능을 켰다.
“뭔지 여쭤봐도 되죠?”
“하지만 지금은 어려워. 한국시리즈를 위해 아껴 둬야지.”
“필살기, 뭐 이런 건가요?”
“뭐 비슷하다고 봐야지.”
“역시, 지략가시네요. 하긴, 감독 연차만 봐도 비교가 안 되죠. 우승 경력도 비교가 됩니까, 함 감독 대행이랑?”
“너무 어린 싹 짓밟지 마. 다들 그러면서 크는 거지 뭐.”
“그럼 올해는 페가수스가 반지 끼겠네요. 그쵸?”
“그렇게 될 거야. 그때 우리도 진탕 마시자고. 김 기자도 그때, 알지?”
“그럼요. 물론이죠, 하하.”
김 기자가 떠나자 최성연 감독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반대편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송석현이 더 크게 보였다.
“방법이라…….”
* * *
경기 시작 전.
송석현, 이창훈, 배터리코치 김태우, 투수코치 연우식이 머리를 맞댔다.
이창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140이 기본값이에요. 더 올라가지 않을 거 같아요.”
이창훈의 말에 연우식이 침음을 흘렸다.
“그래. 하기야, 너도 많이 던졌지.”
“죄송합니다.”
“아냐. 네가 그동안 열심히 했다는 증건데 코치인 내가 미안해야지.”
배터리코치 김태우가 말했다.
“그러면 저번처럼 슬로, 슬로로 가는 수밖에 없겠네. 석현아, 네 생각은 어떠냐?”
송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도 거의 다 우타자니까 바깥쪽 직구, 체인지업을 베이스로 깔고 슬라이더를 섞어 던지면 헷갈리게 만들기 충분하다고 봅니다. 상황을 봐 가면서 인사이드 하이볼이랑 존 위치와 상관없이 바운드 커브볼 섞으면 더 좋을 테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웃사이드 포심, 체인지업이 먹힌 다음의 얘기라고 봅니다.”
투수코치 연우식이 피식 웃었다.
“나보다 네가 더 잘 아네.”
“아…… 죄송합니다.”
“석현이 말이 맞아. 일단 초반엔 아웃사이드 라인에 직구랑 체인지업 영점 잡아. 영점 잡히면 그때 슬라이더를 섞어서 존을 아웃사이드로 더 밀어. 상대가 타석에 바짝 붙기 시작하면 인사이드 하이볼이랑 커브볼 섞고. 무슨 말인지 알지? 1단계, 2단계, 3단계 차근차근 가자는 거야.”
이창훈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네. 퀄스 해 보겠습니다.”
“그래, 해 보자. 네가 영점 맞추는 동안은 최대한 벤치 사인도 자제할 거야. 석현이랑 너랑 영점 맞추는 걸 최우선으로 해. 오케이?”
“네.”
“잘해 보자, 오늘도. 부담 갖지 말고. 오늘 경기만 잘하자. 오늘만 생각해.”
“네, 오늘만.”
* * *
-플레이볼!
1회 초 고트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1회 말 마운드에는 이창훈.
1번 타자 최영석이 타격코치의 말을 되뇌며 타석에 들어섰다.
“구위가 죽었다. 철저하게 밀어 치기. 밀어 치기.”
최영석은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왼쪽 발을 타석 안쪽에 콱 박았다.
타석 가장 앞에, 가장 몸 쪽으로 내민 발.
뒷발로 타석에 바짝 붙어 섰다.
“역시 페가수스네요. 업데이트가 빨라요, 빨라.”
함성훈의 볼멘소리에 투수코치는 소리 없이 콧바람만 훅훅 내뱉었다.
“최영석 선수가 타석에 바짝 붙어 섰습니다.”
“이창훈 선수의 몸 쪽 승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인데요. 이창훈 선수가 몸 쪽 공을 안 던지는 타입은 또 아니거든요.”
이창훈이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구위가 떨어진 건 숨길 수 없는 법인가.
팡팡!
송석현이 미트를 손으로 치면서 이창훈의 시선을 끌었다.
바깥쪽으로 던지라는 사인.
상대의 의도와 상관없이 하던 대로 하라는 신호였다.
“후우, 마누라 말을 들어야지.”
이창훈이 한번 씨익 웃었다.
초구는 바깥쪽 빠른공.
타석에 바짝 붙어 선 최영석에겐 스위트스폿에 정확히 맞힐 수 있는 공이었다.
탁!
최영석이 친 공은 그대로 1루와 2루 베이스 사이를 지나 1루 베이스 파울 라인을 향해 꺾였다.
최소한 단타 혹은 2루타.
최영석이 1루 베이스를 향해 힘껏 뛰다 속도를 줄였다.
촤아악!
미끄러지듯 달려와 설진일이 글러브를 뻗었다.
공은 그대로 글러브에 빨려 들어와 아웃.
우익수가 원래 있어야 할 위치보다 한참 더 앞에 있었다.
-아웃!
“아웃! 설진일 선수의 나이스 캐치가 나옵니다!”
“고트가 여기서 시프트를 썼어요. 최영석 선수가 타석에 바짝 붙어 서자 고트는 야수들을 오른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고트의 시프트에 최성연 선수의 안타가 아웃으로 둔갑됩니다. 상대가 한 수를 보여 주면 반대로 또 한 수로 맞받아치네요.”
2번 타자 심창규는 1번 타자 최영석과 똑같이 타석에 바짝 붙었다.
고트도 시프트를 풀지 않고 그대로 우익 선상으로 선수들을 이동시켰다.
“서로 서로의 의도를 숨기지 않습니다. 고트는 철저히 바깥쪽으로 승부할 생각이고 페가수스도 철저히 바깥쪽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창훈 선수가 몸 쪽 공을 안 던지는 선수가 아닌데, 오늘 경기 양상이 재밌네요.”
“이창훈 선수도 웃네요. 서로 패를 까고 화투를 돌리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