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093화
20장 어느 은행의 VIP(1)
하수영은 S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이용한다.
공교롭게도 프라임컴퍼니가 금리 0.19%에 2,000억 원을 대출받은 은행이기도 하다.
사실 특별히 대단한 이유는 없고, 그냥 가장 인지도가 높고 자산이 튼튼하며, 지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계좌에 주로 쌓이는 돈은 황금비단 우산버섯을 프라임컴퍼니에 팔면서 받는 대금이다.
프라임컴퍼니의 오너이지만 두 회사는 어디까지나 별도 법인이기에, 따로 황금비단우산버섯 대금을 받는 것이다.
납품가는 80그램 기준으로 80원.
왜 80그램을 기준으로 삼느냐 하면, 라면 1개에 들어가는 버섯의 용량이 80그램 정도이기 때문이다. 생버섯 2개 정도 되는 양이다.
황비버섯라면은 어느덧 누적 판매량 2억 5천 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매출로 치면 2,500억 원이 되는 셈이다.
기대 이익률이 6% 정도이니, 150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고 볼 수 있다.
"라면 2억 5천 개 넘게 팔아서 번 돈이 겨우 150억 원…… 그중 내 몫은 120억 원……."
그에 비해 골든 트러플을 팔아 번 돈은 자그마치 4,500억 원.
물론 법인소득세를 제하면 3,300억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라면 장사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이러니까 확 골든 트러플 장사에 올인하고 싶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만."
골든 트러플, 연간 소비량이 1톤이 채 안 되는 시장.
생산량을 대폭 늘리는 것은 당장에는 큰돈을 만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킬로그램당 10억 내지 30억이나 하는 사치품 시장 자체를 죽여버리는 일이다.
"나중에는 라면만 팔아서 1조 원이상씩 떨어지는 날이 분명히 오겠지, 올 거야."
당장은 라면을 팔아서 버는 돈보다는, 라면회사에 버섯을 팔아서 버는 돈이 더 크다.
그간 누적된 황금비단우산버섯 판매대금이 무려 200억 원에 달했으니까.
"이건 그냥 버섯만 팔라는 신, 아니 아버지의 계시인가?"
중간 계산을 해보니 지금까지 누적된 돈이 대충 4,700억 원 정도 되는 것 같다. 그중 1,200억은 세금으로 사라질 돈이다.
더군다나 법인 계좌에 쌓여 있어 배당을 하기 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쓸 수가 없지만…….
"골든 트러플 300kg 정도 한 번만 더 팔고 싶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이미 골든 트러플은 올해 유통량을 초과한 상태, 여기에서 자칫 발을 잘못 내디디면 시장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아랍 왕족들이 골든 트러플이 흔하고 싸다 느끼는 순간, 사치품으로서의 가치는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다.
"붕괴 타이밍은 이상 낌새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많이 늦은 상태지. 조심해야겠어. 일단 올해는 더 이상 골든 트러플을 시장에 풀면 안될 것 같은데."
서해호텔 만찬 같은 것을 다시 열어 무상 대접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만큼 파티의 격조도 높이 유지해야 한다.
어설픈 톱급 연예인들 따위를 불렀다가는 골든 트러플의 가치까지 깎이고 말 테니까.
"그러고 보니 이제 이체 한도 제한을 늘려야겠네. 슬슬 1호기 중도금지급도 해야 하니까."
최수만으로부터 매입한 청담동 1호기 건물의 중도금 지급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수영은 오랜만에 은행 방문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S은행 서락군 지점은 오늘도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인구가 나날이 죽어가는 경기도 외곽 지역인지라, 찾는 고객들이 도시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다. 지점에 예치된 금융 자산도 얼마 되지 않는다.
S은행 전국 지점 전부 줄을 죽 세우면, 아마 하위 10%에 들어가지 않을까? 하위 5% 이하일 수도 있다.
"오늘따라 손님이 한 명도 없네."
"그러게 말이야."
"통장 신규 발급하려고 한 명 정도는 올 법한데."
"웬일로 이렇게 조용하대? 그래도 오픈하고 30분 안에 다섯 명 정도는 오기 마련인데 말이야."
"이 정도면 지점 통합을 해야 하는거 아니야?"
"더 이상 통합할 지점도 없어서 그렇지. 여기서 또 통합을 해버리면 아예 수십km 이상을 이동해야 한다고, 본사에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유지하고 있는 거야."
"월급 루팡은 언제 해도 기분이 좋군."
"그리고 언제 잘릴지 몰라서 불안하지, 하하."
그렇게 동료 직원들끼리 진담 반농담 반 뼈아픈 말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마침내 첫 손님이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젊은 경비원이 화사한 웃음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오늘 S은행 서락군점 개시 고객은 스물 초반쯤 되어 보이는 깔끔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일반 문의예요. 이체 한도 제한 늘리려고 왔습니다."
번호표를 뽑아드리겠습니다."
대기수가 0명이라서 의미는 없지만, 하수영은 일단 번호표를 뽑아들었다.
"1번 고객님, 이쪽으로 오세요."
"1번?"
하수영은 그제야 번호표에 적인 숫자를 확인하고 풀썩 웃음을 지었다.
그는 창구 앞에 앉으며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이거 제가 오늘 개시 손님인 건가요?"
"그렇습니다, 고객님."
"은행 9시 오픈 아니에요? 10시가다 되어 가는데 제가 개시 손님이라니…… 서락군이 어지간히 사람이 없긴 한가 봅니다."
"아무래도 조용한 마을이긴 하죠."
여직원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법인 계좌 이체 한도 제한을 늘리려고 하는데요. 필요한 서류는 일단다 가져왔습니다."
"이체 한도는 얼마까지 늘릴 예정이세요?"
"무제한으로 해줘요. 다음에 또 오기 귀찮으니까요."
"고객님, 죄송하지만 법인 계좌의 경우는 1회 10억 원, 1일 50억 원까지 최대 한도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50억 원? 그게 말이 돼요? 아니, 그럼 대기업들이 수천억, 수조 원씩주고받을 땐 하루에 50억씩 여러 날씩 보내는 건가요?"
여직원은 당황했다.
아니, 일일 50억 원이면 그거 다 쓰지도 못할 텐데, 이 젊은 남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혹시 중견 기업 오너? 아니야, 이렇게 젊은 나이에? 그리고 그런 사람이 우리 지점을 왜 와?'
"이제 한도 완전 무제한 설정을 하실 수도 있는데요, 그러려면 회사 매출이나 이익률, 혹은 법인 계좌잔액을 증빙하실 수 있어야 해요. 또 일정 기준 이상을 달성해야 하고요. 고객님의 경우에는……."
증명서에 표시된 일련번호를 통해 법인 계좌를 조회하던 여직원은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출근 첫날 이후, '이 모니터'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통장 잔고 자릿수가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일, 십, 백, 천…… 십억, 백억?"
200억 원이 조금 넘게 들어 있는 국내계좌. 그리고…….
'일, 십, 백, 천…… 사, 사억오천만?'
450,000,000$이라는 영롱한 숫자가 아른거리는 외화 계좌까지.
여직원은 그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꺄악!"
"이런, 괜찮으세요?"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여직원을 벌떡 일어나서 허둥지둥 사과를 했다.
이미 머릿속은 새하얗게 표백이 된 상태였다.
지금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숫자에 놀라 그저 어버버거리면서 우왕좌왕했을 뿐이다.
"고객님!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 이건 제가 대응해야 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여직원은 거듭 허리를 숙여 양해를 구하고는, 서둘러 지점장실을 향해 뛰어들었다.
골프채를 만지작거리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던 지점장은 느닷없이 문이 열리자 화들짝 놀랐다.
"윤희 씨, 무슨 일이야? 노크도 없이 갑자기 들어오면 내가 깜짝 놀라잖아."
"지점장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왜? 뭐 천만 원짜리 수표 발급이라도 떴어?"
물론 고액수표 발급이라 해도 지점장은 도장만 빌려주지 직접 나가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농담으로 하는 말이다.
여직원은 숨이 넘어갈 듯이 외쳤다.
"그게 아니에요! 사억오천만짜리 손님이 떴어요!"
"뭐? 사억오천만이라고? 아니, 누구야? 우리 서락군에 그런 금융 자산을 가진 양반이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1억 이상의 예치금을 쌓아두는 '고액예치자'는 당연히 지점장이 모두 파악해 두고 있었다. 명절에는 잊지 않고 꼬박꼬박 선물도 보낸다.
서락군 기준으로 계좌에 1억 이상을 넣어두는 사람은 고액예치자로 분류되는 게 맞다.
"사사억오천만이 맞긴 한데, 맞는 데, 그런데……."
"새로운 '고액예치자'는 언제나 환영이지."
"저, 저희 지점에서 개설한 계좌는 아닌데요."
"그래도 우리 지점을 찾아왔으면 이제부터는 우리 지점 고객이지."
지점장은 재빨리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지점장실을 나섰다.
그 손님이 누군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창구에는 단 한 명의 손님밖에 없었으니까.
지점장은 그의 옆으로 다가가서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여기 지점장입니다."
"아, 지점장님? 반가워요."
"저야말로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셔서 차분히 말씀을 나누실까요?"
"그러죠."
하수영은 선뜻 일어났다. 지점장의 에스코트를 그다지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태도다. 오히려 당연함이 몸에 배어 있다.
어느덧 전 직원들은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지점장은 사교적인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손수 커피를 타서 대접하는 정성까지 보였다.
"법인계좌 이체 한도 해제 문제 때문에 오셨다고요?"
이미 여직원한테 고객의 용건은 들어놓은 상태였다.
"네, 그런데 일일 50억 원 이상은 안 된다고 해서 난감해하고 있던 참입니다."
"매출이나 이익, 잔액 등이 증명되면 50억 이상으로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습니다. 아예 이체 한도 자체를 없앨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저희 은행이 내부에서 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합니다."
그때 조심스럽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여직원 윤희가 출력된 서류 몇 장을 가져와서 지점장 앞에 내려놓았다.
"네, 고객님. 제가 바로 확인을…… 응?"
순간 지점장은 눈을 비비고 서류를 확인했다.
이상하게 0이 너무 많았다.
"200억 원?"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4, 4억 5,000만 달러?"
지점장은 숨이 넘어갈 듯이 놀라 입을 떡 벌린 채 하수영을 주시했다.
하수영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어떤가요, 이 정도로는 이체 한도 제한 해제가 불가능한가요?"
그제야 지점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아닙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가능하고말고요! 전혀 문제없습니다!"
"다행입니다. 나중에 또 한도 제한 풀려고 오는 건 너무 귀찮거든요. 한번에 일을 해결할 수 있게 됐네요."
지점장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느껴졌다.
법인 외화 계좌에 4.5억 달러를 넣어두고 있는 고객이다.
이 정도면 본사에서 직접 집중관리해야 하는 VVIP인데, 왜 전국 순위뒤에서 노는 시골 지점에 와서 한도 제한을 풀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