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01화
22장 이게 왜 대박이야? (2)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기름 대박이라니요?"
-아, 답답해. 일단 톡 메시지부터 확인해 보게.
"잠시만요. 일단 스피커 모드로 바꾸고요."
하수영은 통화 모드를 스피커로 바꾼 후, 전성렬이 보낸 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과연 어젯밤에 수십 개가 넘는 장문의 메시지가 온 기록이 있었다.
"정서희 부사장님한테서도 메시지가 잔뜩 왔네요?"
-뭐하느라고 안 본 건가? 아무튼 빨리 읽어보게!
"보약이 너무 독해서 기절해 있었거든요."
-자네, 보약도 먹어? 그래서 그렇게 건강했던 거구만.
"아뇨, 보약이 너무 독해서 당장은 제 건강을 망치고 있습니다만. 사장님도 한 방울만 드셔 보시면 주마등이 눈앞을 스쳐 지나갈 걸요?"
하수영은 메시지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이게 뭐죠? SC이노베이션에서 저한테 유류 24만 톤을 준다고요? 아니, 왜죠?"
-안살린 구단주가 골든 트러플 선물한 게 고마워서 자네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야. 24만 톤이면 우리나라 하루치 전체 소비량이라고! 엄청나지 않나?
"뭐, 약소하군요."
-그래, 안살린 구단주는 그 엄청난걸 가지고 약소하다고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게…… 잠깐, 자네 지금 뭐라고 했지?
"안살린 구단주도 그런 말을 했어요? 이야, 그분이랑 제가 통하는 게 있네. 어쩐지 저번에 서해호텔에서 잠깐 봤을 때 오고 가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
전성렬은 기가 막혔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뭐, 24만 톤 준다면 그냥 감사히 받으면 되죠. 제트엔진 항공유로 받아서 국내 항공사에 되팔면 짭짤하겠는데요. 아니다, 나중에 개인 전용기 살지도 모르니까 그때를 위해서 그냥 일단 킵해 놓는 게 나으려나?"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아, 우리 회사 직원들한테 복지 차원으로 유류를 제공하는 건 어떨까요? 24만 톤이면 몇 년은 거뜬히 쓸 거 같은데요."
-몇 년이라니. 백 년 동안 써도 다 못 쓸 거야. 우리 회사 직원이 얼마나 된다고,
대충 대한민국 일일 소비량에 달하는 양이다.
일반 소비자가 쓰는 양뿐만 아니라 산업용, 군수용까지 전부 포함한 수치다.
"에이, 그렇게 장담하시면 안 됩니다. 나중에 우리 회사가 얼마나 커질지 알고요. 아무튼 당분간 기름걱정은 없겠네요. 기름 쓸 일도 별로 없었지만."
하수영은 실소하며 덧붙였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기름 대박이 터졌다고 하신 거예요?"
-아니, 이건 애피타이저에 얹은 사과 장식에 불과해. 진짜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지.
"네?"
-기대되지 않나? 유류 24만 톤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진짜가 뭔지?
"뜸 들이지 마시고 얼른 말씀하시죠."
하수영은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만만한 전성렬의 음색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던 내용이 튀어나올것만 같았다.
놀라지 말게. 안살린 구단주가 한국 시장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했어.
"한국 시장을 준다고요?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죠? 설마……."
-하 사장. 국제자원투자회사가 아직 한국에는 직접 진출하지 않은 거, 알고 있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한국 시장이 '너무 작아서' 굳이 진출할 필요를 못 느꼈는데, 자네가 원한다면 줄 수 있다는 거야. 정유 시설이나 기술이야 국자투계열사에서 적당히 가져오면 되는 거고, 가장 중요한 원유는 지인 할인 적용해서 한국 시장이 필요한 만큼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겠다고 했네.
하수영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며, 이마에는 힘줄이 돋아났다.
불길한 예감은 왜 이렇게 잘도 들어맞는지.
-그럼 국내 다른 정유회사보다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가져갈 수 있네. 원유 품질도 가장 좋은 지역 것을 골라서 주겠다고 했고, 정서희부사장하고도 이야기해 봤는데, 국자투가 전격적으로 밀어주면 SC이 노베이션을 제치는 건 일도 아닐 걸세.
하수영은 속으로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올 게 왔군. 왜 안 오나 했다.'
에너지, 통신 등 기간산업은 거대한 탐욕이 소용돌이치는 복마전이다.
그곳에 발을 담근다는 것은 다양한 인간의 복잡한 욕망의 충돌을 부대끼고 살아감을 뜻한다.
그게 싫은 것은 아니다. 두렵지도 않다.
다만 너무 오래 그런 삶을 살아봤기에, 지금은 잠시 지겨워졌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 생은 평화롭게 농사짓고, 임대료나 받아 유람이나 하면서 살아가려고 했었다.
-조건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네. 엄청 대단한 대가를 줘야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하 사장 자네 트러플농장 토양을 연구조사만 하게 해달래. 순수한 지질학자로서 어떻게 한 반도에서 골든 트러플이 자생하는지 토양 상태가 궁금하다고 하더라고.
"근데 저는 정유 사업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데요.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석유로 돌아가는지, 원……."
-우리나라 작년 연간 원유 수입량이 얼마였는지 아나? 자그마치 700억 달러어치라고. 잘하면 과반, 못해도 30% 이상은 먹을 수 있어. 정말 엄청난 거 아닌가?
사람의 욕망.
그것은 억누른다고 해서 통제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게 없었다면 인간은 지금처럼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외우주 진출까지 가능하게 만든게 바로 그 본능적인 욕망 덕분이었으니까.'
식품사업이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커지고 있다.
해외 라면시장까지 선점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다른 개발식품들도 승승장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사세를 확장해야 한다는 모든 임직원들의 욕망이 자연히 솟구쳐 오를 것이다.
그것은 전성렬, 정서희를 억누른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지금은 그 둘이 시작일 뿐, 나중에는 회사 사람 전부가 원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욕망은 억누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지. 자기가 직접 당해봐야 제어가 되는 법이지.'
오랜 전생 동안 한두 번 겪어본 일이 아니기에, 하수영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말했다.
"겨우 30% 가지고 되겠어요?"
-최소로 말한 거지. 과반 이상은 먹을 수 있을 거라고.
"겨우 과반이요? 국제자원투자회사라는 큰 힘을 등에 업고 있는데,700억 불 시장 중에서 고작 350억달러 이상만 먹는 것으로 만족하실 수 있겠어요?"
-하, 하 사장? 자네가 갑자기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무서워.
"전 사실 에너지, 반도체, 방위산업, 종합유통, 전자산업 등등 그런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워낙 큰 물들끼리 노는 레드오션이라 한 번 얽히면 골치 아파지거든요."
-……에이, 어쩔 수 없군. 자네 마음이 그렇다면야 할 수 없지. 아쉽지만…….
"하지만 청담동 건물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된다면야 뭔들 못 하겠습니까. 좋아요, 까짓거 한번 해보죠."
-……뭔가 이상한데.
"이상하긴요. 대체 뭐가요?"
-아니, 난 자네가 펄쩍 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어떻게 설득할까 열심히 궁리했는데, 이렇게 순순히 알았다고 나오니까 뭔가 이상해. 왠지 발을 빼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들어.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땐 아닙니다. 말씀 들으니까 저도 갑자기 700억 달러짜리 정유 시장을 독차지하고 싶어졌어요. 그럼 청담동 건물 수집에 큰 도움이 되겠죠?"
-…….
전성렬은 확실히 연륜을 그냥 쌓은 게 아니었다.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무언가 불편함은 느끼고 있었다.
"편하게 생각하세요. 어차피 올 게 온 겁니다."
-어차피 올 거?
"식품회사로서 엄청 커지고 잉여자금이 남아돌면 당연히 문어발 확장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오겠죠. 그게 기업, 아니, 욕망의 생리니까요. 저는 그걸 부정하지 않습니다."
욕망을 부정하는 대신, 미리 예방주사를 놓을 뿐이다.
하수영은 사악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하세요, 정유 사업. 얼마든지 하세요."
-……진심인가?
"그럼요. 대신 이건 알아두셔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예요."
-집중하겠네. 말해보게나.
"생각해 보세요. '제가 국자투의지원을 받아서 '사장님'과 '부사장님'이 국내 정유 시장 야금야금 갉아먹는다고 칩시다. SC그룹 같은 기존 재벌들이 별로 안 좋아할 겁니다."
-그거야 당연하겠지. 느닷없이 경쟁 상대가 하나 튀어나온 거니까.
재주를 부리는 건 너희.
과실을 따 먹는 것은 나.
전성렬은 그 미묘한 억양 강조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정치권, 법조계 등등 이 나라 주요 권력하고 빽빽하고 복잡하게 연결돼 있어요. 자기들 이익이 조금이라도 침해당한다. 근데 그 침해 상대가 빽도 없는 중소기업이다, 이러면 옳다구나 하고 공격 들어옵니다."
-…….
"정유 사업에 발 디디는 순간 곧바로 국세청에서 세무조사부터 들어올 걸요? 작정하고 회사 업무 방해 들어올 거고, 식약처는 우리 회사 라면 제조 과정에서 위생상 문제가 없는지 사사건건 털어댈 거고, 노동부는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은 없는지 전수조사 들어오겠네요. 버틸 수 있겠어요?"
-우리도 JM식품이 있지 않나? 나름 재벌인데…….
"엄밀히 말해서 준재벌급이죠. 10대 재벌하고는 체급이 전혀 달라요, 달라."
-…….
"우리가 식품 시장에서만 놀고 있으면 그놈들이 우리한테 굳이 눈길 안 줘요. 자기들은 인스턴트식품 같은 거 안 만드니까, 우리 제품이 자기들 유통망 이용해서 잘 팔리고 있으니까. 그런데 정유 사업은 전혀 다릅니다."
어느덧 전성렬은 조용히 듣기만 하고 있었다.
"사장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우리나라 작년 원유 수입량이 700억 달러나 된다고요. 그럼 그걸 정제해서 항공사에, 주유소에, 군대에 공급하는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부가가치가 발생했겠어요? 1,000억 달러는 거뜬히 넘겠네."
하수영의 미소는 더욱더 사악해지고 있었다.
"그 시장에 우리가 들어가면, 가만히 놔둘 거 같아요? 정유사업에 조금이라도 발을 걸치고 있는 대기업계열사들이 다 같이 담합해서 말려 죽이려고 할 겁니다. 아니면 우리가 가진 원유공급권을 후려쳐서 뺏으려고 하겠지요. 그거 거절하면? 아까 말한 대로 정치권, 검찰, 노동부, 국세청, 식약처에서 개떼공격 들어올 테고요."
-……700억 달러짜리 시장 한번 집어삼키기 쉽지 않군. 10% 정도만이라도 무사히 차지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겁을 조금 줬다고 그새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다니.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는 건 하수영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한 번 욕망을 품은 이상, 힘껏 부딪치고 깨져 봐야 사람은 성장하고 변화하는 법이다.
"우리가 삼키기 힘든 먹이겠죠. 하지만 완전히 꿀꺽 삼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국제자원투자회사와 안살린 교수의 힘을 등에 업은 국내최강 정유 회사! 프라임오일컴퍼니라는 계열사가 당당히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
"정서희 부사장님하고 이미 이야기는 해보셨죠? 두 분이 잘 상의해 보세요. 회사가 커지는 일인데, 저야 당연히 전적으로 응원합니다."
'재벌들 집중포화 맞고 나면 다시는 기간사업 레드오션 판에 끼어든다는 생각을 안 품겠지.'
하수영은 강제로 억누르는 대신,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는 판을 깔아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