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02화
22장 이게 왜 대박이야? (3)
하수영이 겁을 주자 전성렬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나 700억 달러짜리 정유 시장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다.
아주 가능성이 없다면 모를까, 안살린 구단주가 분명하게 밀어주겠다고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확실한 지원이 보장되는 이상, 재벌들의 담합 공격만 버텨내면 가능하다는 계산이 있었다.
-부사장이랑 한 번 더 이야기를 해보겠네.
"하실 거죠? 정유 사업?"
-잘 모르겠어. 아까까지만 해도 하고 싶은 마음이 100%였는데, 지금은 반반으로 줄어든 거 같아. 자네 말을 들으니 걱정도 좀 되고,
걱정이 생겼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징조다.
욕심에 마냥 눈이 멀어버리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으니.
뜨거운 열의와 차가운 머리를 동시에 품고 뛰어들었을 때, 그리고 신나게 깨지고 물러나게 될 때, 사람은 비로소 현실을 깨닫게 되는 법.
하수영은 더욱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셔야죠. 충분히 의논해 보세요. 대주주로서 경영진의 심사숙고 한 선택과 결정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하수영은 표정을 싹 바꾼 채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안살린 교수는 왜 쓸데없는 제안으로 우리 두 귀염둥이 사장님들 여린 가슴을 들뜨게 하는 거야."
사실 진심으로 안살린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와야 할 게 왔으니, 이 시기를 잘 넘기자."
밑의 사람들이 사업 확장을 하고 싶어 한다.
심지어 그 확장 동기가 부당한 것도 아니다. 자금도 충분하고, 안살린이라는 조커가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겠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번 마음껏 해보라고 놔두는 게 최선이다.
억지로 틀어막으면 일에 대한 그들의 열정이 꺾이게 되는 역효과가 나고 만다.
전성렬과 정서희가 의욕상실에 빠지는 것이, 하수영으로서는 가장 최악의 결과였다.
"정유 사업이라…… 그나저나 이 세계는 참 구닥다리 문명이구나. 아직까지도 화석 연료에서 탈출을 못하다니."
* * *
다음 날, 정서희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날 전성렬과 충분한 논의를 한 모양인지, 그녀의 음성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다른 재벌들의 방해요? 그건 걱정할 게 못 돼요. 국제자원투자회사의 자회사로 시작하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하수영은 첫 마디부터 당황했다.
아니, 그런 사소한 꼼수로 재벌들의 담합 공격을 피해가겠다고?
'가, 가능하겠는데?'
-국제자원투자회사를 뒤에 업고 있는데 감히 SC이노베이션 같은 곳에서 어떻게 건드리겠어요? 국자투가 SC이노베이션 대주주잖아요. SC 이노베이션에서 수입하는 원유 중 40% 이상은 국자투에서 사들이는 거고요.
"그, 그랬어요?"
-네, 국자투가 한국에 세운 자회사, 이거 절대 못 건드려요. 다른 재벌들도 마찬가지예요. 국자투가 우리나라 상장 기업 중에서 조금이라도 주식을 안 가지고 있는 회사를 찾아보는 게 더 힘들거든요.
"안살린 교수가 한국 시장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요?"
-구단주님은 투자경영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국자투 해외투자부서에서 남아도는 현금을 어떻게든 굴리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대요.
뭔가 일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전체 원유의 40% 이상은 국자투를 거쳐서 들어오는 거 아세요?
"모릅니다. 몰랐어요. 알면 제가 그런 말을 안 했죠."
-어떤 말이요?
"있어요, 그런 거. 아무튼 계속하세요."
정서희는 키득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이건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예요. 사장님의 골든 트러플이 안살린 구단주님과의 깊은 인연을 만들었고, 덕분에 우리 회사가 팔자에도 없던 정유 사업에도 안정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됐어요.
"너무 낙관하지는 마세요. 아무리 국자투를 등에 업고 있어도, 상대는 정치권과 법조계까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재벌입니다. 상상도 하지 못한 방법으로 방해공작이 들어올 거예요."
-그럴 테죠. 절대 포기하지도 않을 테고요. 완전히 굴복했다고 인정할 때까지는.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요.
"……."
-애초에 그런 각오도 없이 정유사업에 뛰어들겠다고 생각을 한 것도 아니니까요. 아무리 안살린 구단주님의 지원이 있다고 해도 말이에요.
"……왠지 나중에 회장실에서 내 결재만 기다리는 수백 명의 사장단 앞에서 없어지지 않는 결재 보고서를 바라보며 한숨이나 짓게 되는 거 아닐까 몰라요."
-꼭 그렇게 만들어드릴게요. 믿어 주세요.
아니, 괜찮다고.
그런 삶은 지긋지긋하게 살아봐서 이제는 편안하게 농촌 힐링 라이프나 즐기고 싶다니까?
"……그냥 부회장, 아니, 회장 시켜 드리고 저는 주주 노릇에 충실할 테니까 부사장님이 그때 가서 결재 서류와 씨름하세요."
-제 결재를 기다리는 수백 명의 사장단이라니,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요.
"저도 상상만 해도 부정맥이 올 거 같으니까 그냥 주주정기총회 때마다 의결 위임장 송달하는 걸로 만족하려고요."
-총회 참석은 안 하시고요?
"그것도 부사장님이 다 알아서 하세요."
하수영은 목청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회사 경영 안 하려고 하는 이유, 잘 아시죠?"
-그럼요.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는데요. 절대 귀찮은 일은 없도록 할 게요.
"그래요, 앞으로도 너무 잘하실 필요 없으니까 조금 쉬엄쉬엄하셔도 됩니다."
-네?
정서희가 의아해서 반문했지만, 하수영은 말을 돌렸다.
이제 조금은 진심을 담아서 조언을 건넸다.
"정유 사업을 한다는 건 그 복잡한 재계의 개판싸움, 아니, 난전에 뛰어 든다는 겁니다. 끝없는 탐욕이 가득한 아수라에 발을 디디는 거죠."
-각오하고 있어요.
"저는 원래 이번 삶은 재벌들하고 별로 투닥거리 같은 거 안 하고 맘편히 지내려고 했었는데…… 왠지 나중에 가장 큰 재벌 둘이 제 좌우에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덕담이시죠? 감사해요.
"네, 까짓거 잘해보세요."
-잘 안 풀릴 수가 없는 일이에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지켜만 보세요. 농장 잘 가꾸시면서 안살린 구단주님하고 노닥거리다 보면 어느새 국내에서 가장 큰 정유회사 대주주가 되어 있을 거예요.
"맞다. 근데 한 가지 조건 있습니다. 아니, 조건이라기보다는 당연히 요구할 자격이죠."
-어떤 자격인가요?
"아시다시피 저는 농장주입니다. 식품 사업은 저에게 있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이니까요."
-알고 있어요.
"정유 사업은 그에 비해 식품과는 전혀 무관하죠. 게다가 프라임컴퍼니가 라면 시장을 제패하기는 했지만, 종합식품회사로서 갈 길이 한참 멀지 않았나요? 황비버섯라면, 그리고 JM식품과의 라면 제휴 말고는 한 게 없잖아요?"
-그렇죠.
"프라임컴퍼니 성장을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안살린 구단주님이 만약 지원을 끊을 것도 대비해야죠.
"그것도 생각했나요?"
-사람 마음이 어찌 될지 모르잖아요. 토양 연구조사 끝나면 만족하고 다른 곳에 또 흥미가 끌릴 수도 있고, 그럼 국자투에서 우리에 대한 지원이 소홀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부호들의 마음은 갈대와도 같죠.
하수영은 정서희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작게 박수를 쳤다.
"좋습니다, 좋아요. 그런 각오로 달려 봅시다. 내년 안으로 프라임컴퍼니 매출 50조 원을 달성하는 겁니다."
-오, 오십조 원이요?
그제야 정서희의 목소리에 당황함이 어렸다.
아무리 그래도 내년 안으로 매출 50조 원을 돌파하라는 것은, 그녀기준에서 너무 무리한 요구였기 때문이다.
"불가능한가요? 저는 부사장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은데."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지원해 주신다면…….
"예산이야 얼마든지 드릴 수 있……."
순간 하수영은 멈칫했다.
'아, 맞다. 나 돈 없지.'
"……알았어요. 그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매출 50조 원, 100조 원을 달성하는 것으로 합시다."
-네, 10년 안으로 매출 100조 원넘어보겠습니다.
정서희는 씩씩한 어조로 다짐했다.
대주주이나 결정권자의 승낙이 마침내 떨어졌고,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 사장님, 안살린 구단주님 말인데요.
"알았어요. 언제든지 오고 싶을 때 오시라고 하면 됩니다. 제가 미리 준비해 놓을 테니까요."
-네, 세계 제일의 부자를 기다리게 만들 순 없으니까요. 제안 자체가 송두리째 날아가는 건 피해야죠.
"기름 24만 톤을 받았는데 그 정도 서비스는 해드려야죠."
-정유 시장보다 기름 24만 톤이 더 마음에 드는 거군요.
"원래 전산상으로 존재하는 주식보다는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기름통이 더 멋져 보이는 법이거든요."
-경과는 계속 보고 드릴게요.
매출 100조 원을 언제쯤 돌파할 수 있을까?
지금 한창 부지를 다지고 있는 공장들이 모두 가동한다면 수출 물량을 확보할 수 있을 테고, 그럼 비약적인 매출의 폭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도 마냥 놀고만 있지 않는다.
얼마 전 JM식품과 라면사업제휴를 맺은 덕에, 지금 당장 매출을 끌어 올릴 수 있는 길도 열린 상태였으니.
"찜찜하다, 찜찜해."
하수영은 전화를 끊으면서 중얼거렸다.
욕망을 강제로 통제하는 대신 세상에 얻어맞고 쓰러질 때까지 마음껏 활개쳐보라고 풀어주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데 정유시장 진출은 왠지 정서희한테 그런 '넘어설 수 없는 시련'이 되지 못할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도 부사장이 식품업계에서만 놀았으니까. 에너지, 통신, 반도체, 자동차 같은 대형 산업을 쥐고 있는 썩은물 회사들의 집요함은 잘 모를 거야. 한 방 크게 얻어맞겠지. 그렇죠, 아버지?"
-이 애비는 그저 답답하구나. 너는 그 둘이 성공하길 바라는 거냐, 실패하길 바라는 거냐?
"외도는 안 좋다는 걸 빨리 깨닫고 본업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같이 먹거리 산업으로 훗날 전 세계를 주름잡게요."
-사람의 욕망이란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라.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인간은 지금처럼 발전하지도 못했을 거다.
"……저도 알아요. 너무 잘 압니다."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직접 도전하고 부딪치고 깨져보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너무 큰 상처를 입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하수영은 표정을 풀었다.
"뭐, 나중에 폭삭 망하면 정유회사는 국제자원투자회사에 다시 매각하면 되겠지. 그걸로 현금 어느 정도 건질 테고, 청담동 건물 몇 채 정도는 살 수 있으려나. 결국 어떻게 되든 간에 손해 볼 건 없겠구나."
하수영은 괜히 안살린을 향해 혼자 원망을 쏟아냈다.
"그 양반은 왜 뜬금없이 나한테 정유 시장을 선물로 준다고 해서 이렇게 판을 키우는 거야. 뭐, 덕분에 적절한 시기에 예방주사를 맞히게 되긴 했지만……."
라면 하나 겨우 만드는 회사가 느닷없이 정유 시장 진출이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웃겼다.
"설마, 정말로 정유 시장을 통째로 삼키지는 못하겠지? 잘해봐야 20%정도나 먹을 거야. 틀림없어."
-지금 기도하는 거냐?
"예측입니다, 예측. 근데 아버지,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허구한 날 속을 썩이는 불효자식이 고민하는 걸 보니 몹시 흡족하구나.
"아버지, 저 같은 효자가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지금도 엘릭서 먹으러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