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118화
26장 환전은 정수리에서(2)
하수영은 쾌활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없어요."
「……」
이렇게 바로 칼 자르듯이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정서희는 잠시 말없이 머뭇거렸다.
한참 후 그녀가 다시 물었다.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제가 말했잖아요. 심심풀이 소일거리로 조금씩 키우는 거라고, 그래서 제가 먹을 것하고 주변에 조금 나눠줄 것밖에 없어요. 맛 괜찮죠?"
「네, 엄청 맛있더라고요. 그냥 고춧가루가 아니라 마법의 고춧가루예요.」
"마법의 고춧가루라, 좋은 표현이 네요. 계란프라이에도 뿌려서 드셔보셨나요?"
「그럼요. 뿌리니까 맛이 진짜 달라지더라고요.」
"사실 어떤 음식에 뿌려도 궁합이 잘 맞습니다. 요리가 가진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내주죠. 심지어 술에 넣어서 먹어도 풍미가 전혀 달라요."
「그래요? 다음에 꼭 그렇게 먹어 봐야겠어요.」
"떨어지면 말씀하세요. 또 나눠 드릴게요."
「이거 대량생산해서 팔면 엄청 대박날 것 같은데 왜 양산을 안 하시는 거죠?」
"아, 그건 양산이 힘든 품종이라서 그렇습니다."
「고추가 양산이 힘들어봐야 황금비단우산버섯만 하겠어요?」
"이거 양산 제대로 하려면 수십조원 이상은 쏟아 부어야 해요. 그러고도 기술 완성을 기대하려면 몇 년은 참고 기다려야 해요."
「네?」
정서희의 목소리에 황당한 감정이 듬뿍 묻어났고, 하수영은 진지하게 덧붙였다.
"농담 아니라 상황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소일거리로 조금씩만 만드는 거예요."
최소 강인공지능(인간과 대등하거나 더 높은, 자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은 갖춰야 고추를 재배하고 수확하고 말리고 가루로 만들고 할 수 있을 테니까.
그저 포자를 뿌리고, 캐고, 포장박스에 담기만 하면 되는 버섯 재배와는 난이도가 다르다.
사람을 쓸 수 없으니, 사람 이상의 역할을 하는 강인공지능이 필요하다. 이게 바로 하수영의 기준이었다.
「요즘은 고추도 자동으로 따주는 로봇도 개발됐고,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뭐 때문에 수십조 원이나 필요하다는 거죠?」
"기술적인 분야라서 자세히 설명하기는 곤란해요. 아무튼 양산은 곤란 합니다. 수십조 원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수백 조 원 이상이 들어갈 수도 있는 대규모 사업이에요."
[…….]
정서희는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고추 품종 하나 양산하는데 그렇게 무지막지한 돈이 든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진 모르지만, 너무 아쉽네요. 이 마법의 고춧가루를 세계 시장에 내놓으면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사갈 텐데요. 전 세계 모든 가정집에 이 고춧가루통이 무조건 있는 세상을 꿈꿨는 데…….」
"뭐라고요? 전 세계 모든 가정집에?"
하수영은 솔깃해서 다시 확인했다.
방금 그 말은 너무 멋지잖아?
「네, 그렇게 되면 우리 회사 브랜드 가치 상승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황비버섯라면과 함께 회사의 매출과 브랜드 가치 상승을 견인할 쌍두마차가 될 거라고 생각했죠. 송이버섯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고, 골든 트러플이야 어차피 일반 대중한테는 판매가 불가능하니…….」
"좋은 생각이라는 거 찬성해요. 하지만 역시 양산기술 개발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하수영은 살짝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확 혼자서 조용히 강인공지능을 개발해 봐? 아니, 근데 그럴 돈 있으면 차라리 청담동 빌딩이나 사는 게 낫지.'
가장 크고 근본적인 목적은 청담동제일가는 건물주가 되는 것이다.
수십조, 수백조 원이 있다면 그 돈으로 먼저 빌딩을 사는 게 효율적이지 않은가?
「그럼 지금 재배 방법으로는 어느 정도가 생산 가능해요?」
"저번에 드린 통 있죠? 한 달에 그런 통 한 5개 정도 만들 수 있습니다."
「진짜 적긴 적네요.」
"그렇죠."
「저어, 그럼 혹시 제가 주기적으로 고춧가루를 얻을 수 있을까요?」
"떨어지면 언제든지 말씀하시라니까요."
「그게 아니라 제가 증정용으로 사용하려고 그래요. 상시 챙겨뒀다가요.」
"증정용이요?"
「네, 골든 트러플처럼 비즈니스상필요한 VIP들에게 선물해서 인맥을 트는 목적으로 쓰려고요. 식사자리 같은 곳에서 요리나 술에 뿌려서 시식하게도 해주고요.」
"그건 좋은 생각이네요. 알았습니다, 여유분 남는 대로 챙겨드릴게요."
「혹시라도 합리적인 비용으로 양산이 가능하게 되면 꼭 알려주세요.」
"알았어요. 근데 아마 그럴 일은 없지 않을까 싶네요. 견적 내보니까 양산기술 개발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꼭 양산이 가능해졌으면 좋겠어요.」
대화를 조금 더 나누고 통화를 끊었다.
"우리 정서희 부사장님이 엘릭서 고춧가루에 어지간히도 반하신 모양이네."
정서희의 목소리에서는 진심어린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에휴, 이 시대는 아직도 강인공지 능 하나도 개발 못하고, 과학자들은 여태껏 대체 뭐 한 건지 모르겠어."
서락읍으로 돌아온 하수영은 고추밭에 고추를 심은 뒤 산을 내려왔다.
다음 날 산에 올라가니 완전히 성장한 고추에 빨갛게 익은 고추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는 장갑을 낀 채 일일이 고추를 따서 포대에 담는 작업을 시작했다.
"제조업은 결국 자동화로 가야지. 기계가 해야 할 일을 왜 사람이 하고 있어. 답답하고 비효율적인데."
버섯 농업은 수십억 원을 들여서 결국 자동화에 성공했다.
전자노예들은 특별히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알아서 버섯을 심고, 수확하고, 포장박스에 차곡차곡 담아 둔다.
프라임유통컴퍼니 직원들은 매일같이 화물 트레일러를 끌고 와서 빈 박스를 내려가고, 버섯을 가져간다.
그가 할 일은 로봇과 격납고, 저장탱크, 관리어플 등 자동화 설비를 유지 보수하는 것뿐이다.
시간이 되자 유통 직원들이 황금비단우산버섯 수거를 위해 트레일러를 몰고 산에 들어왔다.
"가는 김에 이것도 좀 실어주세요. 저택 안에 내려주고 가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들은 하수영이 가리킨 고추가 담긴 포대를 가장 뒷부분에 실었다.
버섯 포장박스를 전부 실은 차량들이 차례차례 산을 빠져 나갔고, 하수영도 저택으로 돌아왔다.
직원들이 내려놓은 포대를 풀어헤친 그는 볕이 잘 드는 정원에 고추를 널어놓았다.
"어서어서 마르거라."
햇볕에 익어가는 붉은 고추더미를 바라보니, 가슴 한가득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 * *
S은행 서락읍점 지점장 박행식은하수영과 헤어진 후, 그가 말한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럼 일단 4,500만 달러 정도만 환전 부탁합니다.'
'아무래도 계약금 걸려면 10%는 일단 원화로 쥐고 있어야 할 테니까요. 대충 2주 정도 후에 나머지를 환전하면 딱 알맞을 거 같아요.'
하수영이 환전하고 남은 외화는 4억 500만 달러.
환전에 필요한 서류는 이미 받은 뒤였기에, 그날에 맞춰서 환전을 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환전을 시행하기 직전 환율을 체크해서 마지막으로 하수영의 의지를 확인할 것이다.
그날 환전을 하라고 시켰다고 해서, 환율이 나빠졌는데 굳이 환전을 해서 손해를 끼칠 이유는 없으니까.
헌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했다.
"환율이 오르고 있어?"
특별한 조짐도 없었는데, 환율이 조금씩 점점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백악관에서 경제 정책에 관한 발표를 한 것도 아니고, 연방준비은행에서 금리 변경을 선언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별다른 요인이 없는데 기이하게도 환율이 점점 오르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하수영이 말한 날이 되었을 때, 환율은 100원이나 올라 있는 상태였다.
1달러에 1, 100원이 된 것이다.
만약 2주 전에 4억 5,000만 달러를 전부 환전했으면, 앉은 자리에서 10%를 손해 봤을 것이다.
즉 하수영은 10%만 미리 환전하고 90%는 2주 뒤에 환전하기로 함으로써, 40억 5,000만 원을 이익 본것이다.
"근데 환율이 왜 오른 거지?"
사실 갖다 붙이기 식으로 해석하자면 환율이 오른 이유는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이거다, 라고 짚어낼 만한 중대한 요인은 찾기 어려웠다.
지금처럼 환율 상승의 특별한 원인을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좀처럼 없을 것이다.
아무튼 박행식은 신이 나서 부리나 케 하수영한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 S은행 서락읍 지점장 박행식입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아, 지점장님. 무슨 일이세요?」
"오늘 고객님의 외화계좌 남은 금액 4억 500만 달러를 마저 환전하기로 한 날이라서 전화드렸습니다. 지금 환율이 아주 좋습니다. 2주 전에 비해서 100원이나 올랐습니다."
「그래요?」
"지금 환율이 계속 오르고 있으니까 며칠 정도 더 지켜보시는 것은 어떨까 해서요."
「오늘 지금 전부 다 환전해 주세요.」
"예? 하지만 환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는데요."
「괜찮습니다. 오늘 다 끝내주세요.」
VVIP 고객이 두 번이나 거듭해서 말했다. 여기에 더 반대 의견을 표시해서는 안 되는 법.
박행식은 하수영이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고객님. 그럼 지금 바로 전부 환전해서 국내계좌에 입금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전화를 끊자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환율이 10원만 더 올라도 4억 500만 원이 앉은 자리에서 추가로 생기 는데. 워낙 금액의 단위가 큰 덕분이다.
"하지만 고객님의 단호한 결정이시니."
박행식은 본사의 정준수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저 박행식입니다."
「어, 박 지점장. 오늘이 고객님 환전하는 날이지? 고객님께 전화는 드렸나?」
"예, 안 그래도 방금 통화해서 환전을 좀 더 미루시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습니다만, 그냥 오늘 전액 환전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이나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 아쉽네. 지금 환율이느리게 상승세라서 며칠 더 지켜봐도 될텐데..
"고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어쩌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럼 지금 바로 전액 환전하고 나한테 말해. 내가 전화드릴 테니까. 아니, 그냥 메시지 넣어 놔.」
"네, 알겠습니다."
박행식은 곧바로 환전 절차를 마쳤다.
4억 500만 달러를 환전하니, 4,050억 원이 되었다.
그 돈은 곧바로 프라임유통컴퍼니의 다른 국내계좌로 입금되었고, 박행식은 정준수 이사에게 일이 끝났다고 메시지를 넣었다.
-내가 고객님과 방금 통화했어.
박 지점장, 자네는 굳이 연락 안 해도 돼.
-알겠습니다, 이사님.
박행식은 모니터에 나타난 환율 그래프를 주시했다.
지난 2주 동안 느린 속도로 꾸준히 오른 환율 수치를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흘, 아니 하루만 늦게 환전을 해도 앉은 자리에서 수억 원의 이익을 볼 텐데.
'하긴, 고객님이 몇 억에 신경을 할애하실 분이 아니지.'
박행식은 그렇게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그날 밤 11시경이었다.
퇴근하고 집을 향하던 박행식은 스마트폰을 무심코 뉴스를 보다가 국제경제 속보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뭐야? 미국이 금리를 인하를 결정 했다고? 아니, 이렇게 깜짝 발표를 하는 게 어딨…… 잠깐, 그럼 내일부터 환율이 다시 떨어지는 거 아니야?"
박행식은 불현듯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환전 시기가 이렇게 정확히 맞아떨어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