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256화
62장 쏘아 올린 작은 공(5)
하진성이 정치판에 몸을 담은 지도 어언 15년이 지났다.
그는 15년 동안 단 한 번도 모시는 주인을 바꾸지 않았다.
물심양면으로, 지극정성을 다해 지금의 주인을 모셨다.
덕분에 지금의 주인은 다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여당대표를 역임하기까지 했다.
이대로는 무난하게 다음 대선주자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찬란히 빛나는 주인과 달리, 하진성의 인생은 그리 밝지 않았다.
주인의 위세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의 얼굴의 그늘은 짙어지기만 했다.
'하 보좌관도 이제 슬슬 지역구든 비례는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의원님은 언제까지 계속 보좌관으로만 쓰실 거래?'
'다른 국회 동기는 저번에 비례 달고 이번 총선에는 지역구에 나간다던데. 영감님이 자기 지역구 물려주신대잖아.'
'하 보좌관도 영감님께 넌지시 말씀 좀 드려봐.'
가족보다 더 알뜰살뜰히 정성으로 챙기며 인생을 바쳤건만, 주인은 제대로 챙겨주는 게 없었다.
얼마 안 되는 보좌관 수당을 쪼개가며 의원님 선물, 식사, 주전부리 등을 챙기며 살아왔는데.
그래도 하진성은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의원님은 절대로 날 버리지 못해. 언젠가는 크게 키워주실 거야.'
긴 세월을 동고동락하며, 주인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주인의 온갖 치부며 약점이며,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공유하고 있다.
정치 자금이나 뇌물 수수 같은 것을 챙기는 것은 당연히 자신의 일이었다.
유부남인 주인이 남들 눈을 피해 애인 집에 드나들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자신의 공이었다.
15여 년 동안 온갖 고행과 오물을, 주인 대신 뒤집어쓰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도 주인의 인도에 따라 초선 의원으로서 정계에 진출하고, 훗날에는 주인의 지역구도 물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이었다.
"뭐? 황 비서가 이번에 비례 번호를 받는다고?"
"하 보좌관만 몰랐었네. 황 비서가 의원님 고교 동기 아들이잖아."
새파란 신임비서가 고교 동기 아들이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그렇지, 황 비서는 너무 젊잖아."
"하지만 청년비례대표 자격으로 나가기에는 적당한 나이가 맞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5년 넘게 세월을 바쳐 봉사한 사람도 있는데……."
"하 보좌관은 가만 보면 열심히 몸부서지라 일하면 상대도 자신을 알아줄 거라는 기대를 하는 경향이 있어. 그런 건 정치판에서 안 통해. 내 밥그릇은 내가 알아서 챙기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의원님 입장에서 입에 혀처럼 구는 하 보좌관을 굳이 독립시킬 마음이 생기겠어? 하 보좌관도 잘 생각해. 보좌관만 30년 넘게 하다가 정치판 인생 접고 싶지 않으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의원님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먼저 챙겨서 정치 신인으로 양성한 것이.
하지만 그때마다 하진성은 자신을 납득시켰다.
저 사람은 그럴 만한 인재라고, 지금 상황에서는 저 사람이 어울린다고,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니 합리적으로 판단하신 거라고.
그러나 비서 일을 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새파란 애송이가자신을 제치고 먼저 데뷔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부서진 멘탈을 간신히 붙들고 있을 때…….
"진성아, 일을 대체 어떻게 처리한 거냐?? 이게 왜 이제 와서 수면 위로 떠올라?"
"죄송합니다, 의원님."
300억 스캔들이 터졌다.
지금은 온 세상이 성진우 검사장의 뇌물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지만, 최원후 의원과 하진성 보좌관은 진실을 알고 있다.
그 돈은 여당이 취득한 불법선거자 금이었고, 그 돈을 관리한 것은 최원후다.
당연히 실무는 하진성이 도맡아 했다.
"이거 심상치 않다. 지금 대검 분위기가 장난 아냐. 성진우 그 친구도 자기 혼자 죽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눈치다."
"……."
"진성아, 알지? 적당한 선에서 잘덮어라."
"네? 의원님, 설마……."
"일이 잘못되더라도 나까지 번지지는 않게 하란 말이다."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하진성이 받은 충격은 유례없이 컸다.
평생을 믿었던 의원님이 자신을 도마뱀 꼬리 대하듯이 하다니.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성진우 검사장 측에서 은밀히 자신을 찾은 것이다.
"보좌관님, 이게 어떻게 된 거요? 그때 나한테는 이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죄송합니다."
"회사 투자금 반입이 워낙 급해서 살짝만 손봐주는 거라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게 왜 내가 뇌물 300억을 수령한 것으로 둔갑되었지? 난 정작 그 돈 구경해 본 적도 없는데."
"저희가 알아서 문제없이 처리하겠습니다."
"하, 판을 이렇게 크게 벌여 놓고 이제 와서 문제없이 처리하겠다? 내가 그걸 믿을 만한 바보로 보이시나?"
"죄송합니다."
한참을 노려보던 성진우가 차갑게 내뱉었다.
"고양이 손도 모자란 판에 적을 더 늘리고 싶진 않으니, 의원님더러 확실히 처리하라고 전해요. 검사장 한 명 잘못 건드리면 어떤 꼴 나는지 겪어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하진성은 궁지에 몰렸다.
사실 모든 것은 최원후 여당대표의 책임이지만, 그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모든 것은 최원후의 지시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그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다.
세상이 자기 말을 믿게 만들 만한 힘도 없었다.
섣부른 반기를 들어봤자 남은 자기 인생만 망가질 뿐이다.
"성 지검장한테 피해를 줄 순 없지. 그 친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진성아, 네가 잠깐만 다녀와라."
"의원님. 이거 300억짜리입니다. 이걸로 감방 가면 저 피선거권 박탈 당해서 10년 이상 선거에 못 나갑니다."
절망한 하진성이 무심코 꺼낸 본심에, 최원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선거? 네가 무슨 선거?"
"……."
"선거에 나갈 마음이 있었어? 네가?"
그 순간 최원후의 눈가에 스친 것은 희미한 비웃음이었다.
어디 너 따위가 감히 그런 것을 꿈꾸느냐 하는, 멸시감.
물론 그것은 순식간에 지워졌고, 최원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차차, 그래. 너도 나중에 선거나가서 지역구 의원으로 변신해야지. 진성아, 이거 하나만 잘 처리하자. 그럼 내년 광복절 특사로 나오게 해줄 거고, 피선거권 박탈 문제도 없을 거다."
"……정말이십니까?"
"그럼, 내가 너 팍팍 밀어준다. 야, 내 밑에서 몇 년을 고생했는데, 내가 챙겨야지, 안 그럼 누가 챙기냐?"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 * *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까지 술을 마셨다.
이렇게 술을 마셔본 게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몇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언제나 의원님을 위해 준비 완료상태로 대기해야 했기 때문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꿈에도 꾸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휴가를 가본 게 언제더라?
결혼도 포기하고 의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거늘, 돌아오는 것은 꼬리자르기식 책임 전가라니.
'300억…….'
만약 그걸 자신이 혼자 안고 간다면 어떻게 될까.
최원후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길고 긴 감옥살이다. 피선 거권 박탈이 문제가 아니다.
10년, 20년이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낼 수도 있다.
그것도 자신의 주머니에는 단 한 푼도 들어오지 않은 300억 선거자 금 때문에.
하진성은 만취한 상태로, 천천히 생각했다.
지금의 자신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이미 자신의 미래는 망가졌다.
단지 어느 쪽 길로 가다가 망가질지만, 아직 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 * *
"지, 진성아. 제발 이러지…… 쿨럭! 쿨럭!"
"왜 그랬습니까! 왜 나한테만 그랬냐고요! 내가 그렇게 만만했습니까!"
푹! 푸욱! 푹! 푸욱! 푹!
"참고 견딘 세월이 얼만데……! 마지막까지 쓰고 버리려고만 했냐고요!"
푸욱! 푹!
"조금만이라도 나한테 믿음을 주면 됐잖아요…… 그럼 믿고 대신 감옥에 갈 수 있었는데… 까짓거 10년 더 기다릴 수 있었는데… 크흐흑… 그 작은 믿음을 못 줘서……."
쨍그렁!
하진성은 피범벅이 된 칼을 내동댕이치고 벌러덩 누웠다.
목이 새빨갛게 물든 채 쓰러져 자신을 바라보는, 초점 없는 최원후 의원의 눈동자가 보인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저 꿈을 꾸는 것만 같다.
하지만 만취한 하진성의 두뇌는 지금이 현실이라는 것을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인지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에 젖은 편지봉투를 꺼내 최원후 의원의 몸 위에 올려놓고, 창가로 향했다.
펜트하우스에서 내려다보이는 거리는, 자신이 세상의 왕이 된 듯한 우월감을 심어준다.
이래서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죄다 높은 곳에서 살려고 하는 건가 보다.
차가운 밤하늘에 걸린 만월을 잠시 응시하던 그는 히죽 웃었다.
"아버지, 어머니…… 용서하세요. 불효자식은 먼저 갑니다."
* * *
-여당대표 최원후 국회의원의 보좌관 하모씨는 최원후 의원을 칼로 찔러 살해한 후, 자신도 투신해 그대로 숨졌습니다.
-하 모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 내용이 공개돼 정계에 큰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모 검사장이 받은 뇌물로 알려진 300억이 사실 여당의 선거자금이라는 폭로인데요.
-비대위 체제로 돌입한 여당은 대변인 발표를 통해 300억 선거자금설을 극구 부인했습니다. 한편 최원후 의원의 빈소에는 정·재계 거물들의 문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최원후가 살해당한 펜트하우스는 누구 소유? 펜트하우스에는 정말 두 남자밖에 없었나?]
-검찰은 성역 없는 수사를 통해한 점의 의혹 없는 진실을 밝혀낼 것이라고 거듭 발표했습니다.
-이거 어떻게 된 거냐? 그 돈이 정말 검사 한 명이 수령한 뇌물인 거냐, 아니면 여당 선거자금이었던 거냐?
-상식적으로 검사 한 명한테 뭐하러 그 많은 돈을 뇌물로 주겠냐? 선거 자금이 확실하다.
-왜, 실형 피하고 싶은 재벌 기업가라면 충분히 지출할 수 있는 돈인데.
-성진우 검사장이 지휘관할한 사건 중에 그만한 사이즈의 경제사범은 없던데. 여당 선거자금으로 보는 게 훨씬 타당하고 합리적인 듯.
-보좌관이 15년 넘게 알뜰살뜰하게 모셨다던데, 왜 주인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을까?
-뻔하지 뭐. 그 돈 책임 진 게 최원후 의원인 거고 모든 오물을 보좌관이 덮어썼겠지. 스캔들 커질 거 같으니까 보좌관한테 책임지고 총대 메라고 했을 테고, 거기에 빡친 보좌관이 동반자살한 거지.
-현직 국회 직원입니다. 죽은 보좌관은 자기 가족보다 의원님을 더 지극정성으로 모셨지만, 변변찮은 도움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마지막에 자기를 쓰고 버리려던 것에 너무 절망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닐까 합니다.
-그래도 보좌관이 현명하다. 자기 혼자 다 끌어안고 죽었으면 저승에서도 억울했을 텐데, 원수를 길동무로 만들었으니 황천길 좀 편히 갈수 있겠어.
* * *
실비아컴퍼니는 경찰의 정식 수사협조 요청을 받았다.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십시오. 프리덤은 모든 걸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