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357화
86장 가로채기(3)
서해식품 청담 사옥을 매입한 것은 바로 S은행이었다.
S은행 본사 사옥은 본래 종로에 있지만, 꽤 오래전부터 강남구 지역에 근사한 사옥을 하나 마련하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마침 서해식품이 청담 사옥을 매물로 내놨다는 이야기를 듣고 덥석 거래를 물었다.
"이 거래는 소유권 이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외부에는 비밀로 유지해야 합니다."
"그거야 문제 될 거 없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무난하게 거래가 이뤄졌고, 소유권 이전이 끝나자마자 S은행 본사는 부산하게 이사 준비에 들어갔다.
바로 그때, 무서운 고객이 S은행본사를 찾았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종로 S은행 본사는 개인 고객은 상대하지 않고 기업 고객만 상대한다.
젊은 방문객의 행태가 평범해서 기업 고객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은행원은 반가운 미소로 맞이했다.
"정준수 이사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하수영이라고 하면 알아들으실 겁니다."
"이사님은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약 1시간 정도면 끝납니다. 그때까지 기다려주시겠어요?"
"제 이름을 전하면 아마 회의를 끝내고 달려 나올 겁니다. 제 이름을 전하지 않으면 나중에 왜 회의 중이라고 돌려보냈느냐며 닦달하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뭔가 범상치 않은 말에 은행원은 바로 일어나서 회의실에 들어가서 조용히 말을 전했다.
부은행장이 주재하는 회의였지만, 정준수는 안색이 곧바로 변해서 일어났다.
"부은행장님, 저 지금 중요한 고객이 찾아와서 나가봐야겠습니다."
"중요한 고객? 지금 이 회의가 어떤 자리인데 고객 한 명 때문에 가네 마네……."
"강남구의회 하수영 의원님입니다."
"어서 가봐야지! 빨리 가보게! 면담 끝나면 혹시 자리 좀 만들어줄 수 있나?"
"노력해 보겠습니다. 워낙 자유로운 분이시라 저도 장담은 못 드립니다."
회의 도중에 자리를 떠도 뭐라고 하기는커녕 격려를 한 몸에 받게 해주는 방문자.
은행원은 정준수 이사가 부은행장과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비로소 젊은 방문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S은행에 몸담고 있는 사람 중 하수영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수영? 이 사람은 뭔데 개인이 조 단위 자금을 일반 계좌에 예치하고 있는 거야?
-응, 사람 아니고 법인, 부동산법인이야.
-뭐? 사람 이름이 아니야?
-법인주가 하수영이라는 분인데, 자기 이름을 그대로 법인으로 만든 거야.
2조 8,673억 원에 달하는 서락산발굴 문화재 보상금, 수영치킨, 강남구의원, 청담동 부동산 큰손 등등…….
그런 것들보다는 저런 일화 때문에 S은행에서는 일찍부터 유명한 이름이다.
전달했던 은행원은 왜 처음에 이름을 듣고 바로 떠올리지 못했는지, 스스로를 자책했다.
아무튼 정준수는 하수영을 직접 VIP접객실로 안내해서 손수 마실 것을 내왔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락을 드렸으면 제가 직접 청담동을 찾아갔을 텐데요."
"지나가다 들렀습니다. 제가 S은행에 확인할 게 있어서요."
"네, 말씀하십시오."
"얼마 전에 서해식품 사옥을 S은행이 매입했던데, 어떻게 된 건가요?"
"……죄송합니다. 제가 전혀 모르는 일이라서. 잠시만 알아보고 다시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준수는 양해를 구한 뒤 접객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약 20분 후, 얼굴이 살짝 벌게진 채로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고객님, 제가 전혀 모르는 일이라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 은행에서 강남구 지역으로 본사 이전을 고려해서 이번에 적당한 매물을 샀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서해식품 사옥이고요."
"원래 제가 눈독을 들이고 있던 매물이었는데, 하필 중간에서 날아가 버렸네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정준수는 하수영이 청담동 투자에 관심을 크게 기울인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수영 앞에서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쩔쩔맸다.
'왜 하필이면 청담동 매물을 건드려서!'
"2,550억 원에 매입하셨더군요. 땅과 빌딩 포함해서."
"네, 맞습니다."
"서해식품은 제가 3,550억 원에 산다고 했는데도 저한테는 절대 못 팔겠다고 했습니다. 혹시 S은행이 서해식품과 천억 이상 가는 뒷거래를 한 게 있나요?"
"뒤, 뒷거래요?"
"그렇잖아요. 수천억, 혹은 수조 원의 비합법대출을 해줬다던가 하는 식으로, 그런 거라면 천억의 프리미엄보다 더 이득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정준수가 알기로는 그런 일은 정말 없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이 자리에서는 없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 '없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상하네요. 그럼 왜 서해식품은 천억의 프리미엄을 마다하고 굳이 S은행에 빌딩을 넘겼을까요?"
"아마도 저희와 먼저 이미 계약을 한 터라……."
"계약 날짜를 보니 제가 제안을 한 것보다 한참 뒤더라고요. 등기부에 보면 계약 작성일이 나오잖아요. 혹시 나중에 계약 내용 바꾼다고 계약서를 새로 쓰셨나요?"
"아닙니다. 일사천리로 거래가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계약일과 잔금일 간격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습니다."
초고가의 부동산 거래에서는 드문일이지만, S은행의 현금 동원력이 워낙 탁월하기에 가능한 일정이었다.
"정말 이상하네요. 그럼 대체 왜 서해식품은 '먼저' 천억이나 더 없어주겠다고 한 저를 마다했을까요? S은행이 다른 이득을 제시한 게 아니라면, 그만큼 저한테는 팔기 싫었다는 의미일까요?"
"……."
정준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서해식품이 무슨 의도였는지는 자신과 은행에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수영이 무슨 생각에서 자신을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를 꿰뚫어 보는 것이다.
"……제가 빌딩 재판매가 가능한지 상부에 한 번 건의를 해보겠, 아니 반드시 이뤄지도록 추진해 보겠습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럼 예전에 대출 조기회수한 것은 제가 기억에서 완전히 삭제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정준수 이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S은행은 예전에 프라임컴퍼니에 0.19%의 초저금리로 대출을 해주었다가 중간에 갑자기 회수한 적이 있었다.
물론 거저다 싶은 이자로 큰돈을 몇 달 동안 잘 써먹었기에 하수영도 담아두지 않고 넘어간 것이지만,
"말은 정부감사다 뭐다 하셨지만, 사실은 그것도 서해식품이 뒤에서 조장한 것이었죠. 제가 다 기억합니다. 그래도 저는 S은행하고 계속 거래를 해왔어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전성렬 사장님은 뭐하러 거래하냐고, 돈 다 빼라고 하셨지만 제가 듣지 않았죠.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올 것을 대비했기 때문입니다."
웃음에 담긴 칼이 무슨 모양인지, 정준수는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네, 빌딩 재판매 안 하면 돈 싹 다 뺀다?
하수영의 말에는 그런 의도가 실려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거래를 끊는 것은, 그저 큰 고객 하나를 잃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은행의 재무건전성 자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수준이다.
S은행은 부동산법인 하수영의 법인 계좌가 있고, 계좌 안에는 조 단위 현금이 상시 예치돼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실망을 끼쳐 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정준수가 거듭 말하자 하수영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만약 빌딩을 재판매해 주신다면, 구매에 들어간 모든 비용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그리고 거마비 겸해서 50억 원을 따로 얹어드리겠습니다."
정준수의 안색이 밝아졌다.
저렇게까지 해준다면 상부에서도 굳이 안 해줄 이유가 없다.
은행 입장에서는 굳이 그 빌딩이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그리고 빌딩을 2,550억에 사셨다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따로 2,550억 원 5년짜리 장기예금을 들어둘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정준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하수영 앞에서 크게 허리를 숙였다.
그는 곧바로 회의실에서 기다리는 부은행장과 다른 임원들을 찾아갔다.
회의 안건은 당연히 바뀌었고, 만장일치로 부동산 재매각은 통과되었다.
매입에 들어간 비용(취득세 등)을 모두 보전해 주고, 추가로 50억 원, 여기에 2,550억 원의 5년 장기예금까지 들어준다는데, 굳이 그 빌딩을 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
제안을 거절하면?
수조 원이 넘어가는 현금이 일시에 빠져나가고, 은행의 재무건전성은 휘청거리게 된다. 자기자본비율에도 적잖은 타격이 가해질 것이다.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바로 우리 고객님과 계약서를 써야겠어. 정이사, 안내해 주게."
부은행장은 이런 호기를 놓칠 수가 없다는 듯이 얼른 정준주 이사를 재촉했다.
"아이고, 고개님. 고명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그 소원이 이렇게 이뤄지는군요. 제가 우리 S은행 부은행장 박영식입니다."
"하수영입니다."
하수영을 만난 부은행장은 호들갑을 떨며 호감을 나타냈다.
시중은행 임원급 이상치고, 그의자산 내역을 한 번도 열람하지 않은 이는 없다.
공직자 열람사이트에 가면 아주 상세하게 그의 천문학적인 자산을 열람할 수 있으니.
하수영은 부동산 거래를 마치고, 그렇게 26호기를 무사히 확보할 수 있었다.
"역시 그때 짜증 난다고 S은행 계좌 없애지 않기를 잘했네. 덕분에 천억 더 줄 걸 50억만 더 주고 끝냈으니."
역시 사람이 관계가 불편하다고 무조건 칼같이 끊어버리는 게 만사가 아니다. 특히 대상이 은행 같은 곳이라면, 일단 최소한의 소통로는 남겨두는 게 좋다.
"그래도 내 뒤통수를 친 놈들은 아니지. 내가 그렇게 사옥 갖고 싶다고, 천억까지 더 주겠다고 했는데도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하수영은 옥외 광고판에 보이는 서해식품 광고를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두고 보자는 놈이 가끔은 넌덜머리가 난다는 걸 알게 해줘야겠네. 프리덤."
-예, 마스터.
"서해식품을 곤란하게 만들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지 한 번 추천해 봐."
-서해식품그룹은 태양심의 라면 사업 철수와 수영치킨 때문에 이미 거듭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미 올해 누적적자만 600억 원이 넘어 갑니다.
식품회사 입장에서 적자 600억 원은 보통 큰 게 아니다.
- 저에게 1조 원의 자금 유용 권한을 주시면 주가 작업을 통해 서해식품에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기각. 그런 건 너무 쉬워서 재미없어. 질렸다고"
-광고비 집행을 통해 서해식품의 이미지를 바닥으로…….
"돈에 펜대 파는 언론사하고는 놀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이렇게 지저분하게 얽히면 나중에 그거 다 발목 잡힌다."
- 서해식품그룹 오너 일가의 문란한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은…….
"어허, 개인비서 윤리 강령에 어긋나는 짓을 최고관리자인 내가 할 순없지."
-회계감사내역을 조사해서 탈세신고로…….
"좀 클리셰를 벗어난 참신한 발상같은 거 못 하겠니? 내가 그런 걸 생각을 못 해서 너한테 물어봤을까? 나름대로 재미난, 청담동 스타일로 한 방 먹여주려고 고심하는 거잖아."
-…….
프리덤은 그 뒤로도 여러 번 안건을 꺼냈지만, 하수영은 귀찮다는 듯이 기각했다.
"얘가 행성 내수용 버전이라 그런지 별로 쓸모가 없네."
-그럼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대우주항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주십시오…
"지금 지구 컴퓨팅 파워 수준으로는 턱도 없다. 에니악으로 배틀그라운드 돌리려는 꼴이야."
청담동 스타일의 품격을 유지하면서 서해식품을 한 방 먹이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이럴 땐 집단 지성의 힘을 빌리는 게 최고지."
하수영은 단톡방에 공지를 올렸다.
[서해식품이 제 통수 친 거 참교육시켜줄 좋은 방법 모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