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360화
87장 애들 싸움 어른 싸움(1)
이현덕의 조부, 고 이태산.
그는 서해그룹의 모태가 되는 서해 모직을 세운 사람이다.
슬하에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는 데, 그중 아들 둘과 딸 하나는 어려서 병사했다.
자녀 셋을 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 이태산으로 하여금 돈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남은 자녀는 아들 둘과 딸 하나.
이태산은 기반이 잡힌 그룹을 승계할 때, 이현덕의 부친인 이창영에게 총수 자리를 주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똑똑한 딸은 쇼핑사업부를 들고 나가서 지금의 뉴월드그룹을 만들었다.
하지만 막내아들인 이태영은 어려서부터 제구실을 못 하기로 유명했다.
이태산과 이창영이 이것저것 사업을 맡겨 보았지만, 손대는 족족 말아먹기만 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가장 노릇은 하란 의미에서 식품회사를 새로 만들어서 안겨주고 독립시켰다.
당시 잘나가던 식품회사 태양심을 인수합병해서 식품그룹에 편입시킨 것도 이창영의 결정이었다.
그냥 가만히 아랫사람들을 부리기만 하면 되는 일.
이 정도면 평생 까먹을 일은 없을 거라고 이창영은 생각했다.
'아버지가 틀렸다.'
이현덕은 속으로 냉소했다.
'작은아버지는 회사를 경영하면 안되는 사람이야. 그럴 그릇이 못 돼.'
그냥 어디 고문이나 임원, 이사장 자리 감투나 잔뜩 쓰고 거기서 나오월급이나 연금처럼 타먹으면서 한량 노릇이나 해야 할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그룹을 맡기다니.
'아무리 기세가 강하다지만, 멀쩡한 라면 사업에서 아예 퇴출되다니'
황비버섯 재배단가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게 들어간 라면과 들어가지 않은 라면은 맛에서 아예 비교도 안 된다는 것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패배자의 변명일 뿐이다.
수십 년간 1위에 군림했던 시장을, 신흥 초보에게 빼앗긴 머저리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현덕이란 이름을 무서워했다면 감히, 말이지…….'
침을 튀기듯이 울분을 토하는 작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이현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은 꼭 하수영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바로 눈앞에 있는 숙부에게도 해당된다. 본인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아니, 오히려 하수영보다는 숙부에게 더 강하게 해당될 것이다.
이현덕이란 이름을 두려워했다면 감히, 이런 식으로 나오지는 못했을 텐데,
"저도 서해식품이 그 친구 손에서 농락당하는 걸 두고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룹 차원에서 가만 있지 않을 테니, 작은아버지도 고정하시지요."
"서해그룹이란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는 애송이에게 똑똑히 버릇을 가르쳐줘야 하네."
"물론입니다. 이현덕이란 이름을 우습게 본 놈들은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지요."
이현덕이 부드럽게 달래자 그제야 이태영은 표정이 풀어져서는 돌아갔다.
얼마간 생각에 잠겨 있던 이현덕은 인터폰으로 비서를 콜해서 지시했다.
"차 준비해. 한남동으로 간다."
한남동으로 간다.
이 말은 부친이 있는 본가를 방문한다는 뜻이었다.
***
"……."
무거운 이야기가 다 끝났음에도, 부친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현덕은 참을성 있게 앉아서 부친이 눈을 뜨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부친, 이창영 회장이 입을 열었다.
"태영이가, 네 숙부가 그렇게나 회장으로서 자질이 없는 같더냐?"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지켜보셨으니, 누구보다 더 잘 아실 것 아닙니까."
"허어……."
"라면시장에서 완전히 퇴출당했습니다. 지금 서해식품은 라면 관련상품은 단 1개도 만들지 않습니다."
일부러 눈과 귀를 닫아두었기에, 이창영은 그 정도로 서해식품그룹이 몰렸는지는 알지 못했었다.
"양계농가 사업도 철수해야 할 판입니다. 국내에서 도축되는 육계의 과반을 수영치킨에서 소모합니다. 이미 자체적으로 직영농가집단을 모아서 부화부터 양계와 도축까지 모두 직접하고 있고요."
배달치킨 브랜드의 강자로만 남아주면 좋은 거래 상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상대는 달걀부터 시작해서 직접 치킨을 만들고 있었다.
"최근에는 스낵 시장까지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숙부께서는 해외 시장 진출을 알아보다가 프라임컴퍼니가 효원식품을 먼저 채가면서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겁니다."
"……."
"듣기로는 식자재 군납까지 그 친구가 뺏으려고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국방부는 황비버섯 납품 때문에 그 친구 입찰을 받아줄 기세고요. 식자재 군납까지 넘어가면 서해 식품은 매출 나올 구석이 없습니다."
"겨우 사옥 빌딩을 자기한테 안 팔았다고, 그거 때문에 그렇게 훼방을 놓았다는 거냐?"
"겨우가 아니죠. 그 친구 입장에서는 '감히 내가 팔라고 요구했는데 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는게 화가 났을 겁니다."
"거의 권력자 마인드로구나. 크게 기업을 일굴 사람이라면 그래야지."
"그래서 위험합니다. 이대로 놔두면 서해식품 자체가 넘어가 버릴지도 모릅니다. 이미 라면 사업부는 완전히 넘어가 버린 상태고요."
이창영은 서해식품의 미래가 위험하다는 것만큼은 조금도 반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아들이 내놓을 해결책이란…….
"서해식품을 다시 서해그룹으로 편입해서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 가문의 자산을 남에게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네 숙부의 기업이다. 네 사촌 동생이 물려받을 기업이기도 하고."
"어차피 놔두면 남에게 뺏기거나무너집니다."
"……그게 문제지."
이창영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한때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 기업가라는 위명을 지니고 살았다.
하지만 실무 경영에서 물러난 지 오래된 지금, 그는 날이 서린 감각 대신 풍화된 감성이 적당히 올라온 상태였다.
"식품 사장은 그래도 정훈이한테 맡기거라. 태영이도 부회장직 정도는 세워 주고."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 설마 제가 핏줄을 냉대하겠습니까? 그룹 울타리 밖에서 비바람 맞으며 아옹다옹하는 것보다는 훨씬 아늑할 겁니다."
이현덕은 서해식품그룹을 다시 삼키기로 결정했고, 부친은 그것을 승인했다.
자칫 가문 내에 칼부림이 벌어질지도 모를 중대한 사안이지만, 지금은 그 방법밖에 해결책이 없어 보였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태영이네 식구들 잘 챙겨주고."
"염려 마십시오."
이현덕은 부친에게 인사를 올리고 본가를 나섰다.
하원석, 이창영이 그의 예언이라면 신줏단지 받들어 모시듯이 대했던 용한 박수무당.
이현덕은 하수영이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친에게 마지막까지 고하지 않았다.
***
서해생명, 서해전자, 서해물산, 서해랜드, 서해쇼핑.
서해그룹의 지분지배구조의 핵심을 담당하는 가장 큰 다섯 개의 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섯 개의 회사는 은밀히 움직이며 서해식품그룹 관련주를 쓸어 담기 시작했다.
물론 주가가 눈에 띄게 오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금씩.
주식을 매집 중이라는 게 발각되면, 당장 이태영이 찾아와서 펄펄날뛸 테니.
작은아버지의 역성을 듣는 것은, 모든 게 다 끝난 후의 세레모니로 하고 싶은 마음이다.
서해그룹과 서해식품그룹.
한 갈래에서 나왔다 보니 같이 서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서해식 품그룹은 오래전에 계열분리가 되었다. 완전히 울타리 밖의 회사라는뜻.
계열사라고 해봐야 다섯 개뿐이고, 시가총액도 서해그룹 전체의 1/30에도 되지 않는다. 훨씬 더 낮을 수도 있다.
이태영 일가의 지분율은 22%로, 재벌가치고는 점유율이 높은 편이다. 그만큼 규모가 작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현덕 입장에서는 다섯 개나 되는 새로운 계열사가 늘어나는 기분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계열사 숫자, 시가총액, 그룹 규모가 커진다는 것은 오너로서 기분 좋은 일이니, 시중에 있는 지분만 모은 게 아니었다.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기관, 대형 개인 주주를 은밀히 만나서 지분을 사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사들인 지분의 총 량이 35%가 되는 순간, 일제히 보유 신고를 했다.
보유 신고를 하자마자 그날 곧바로 이태영이 달려와서 노성을 터뜨렸다.
"이 부회장!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조카이지만 직계 장손이자 차기 가주이며, 대한민국 최고 재벌의 후계자.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이놈 저놈 고함을 지를 순 없었다.
가족모임처럼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자칫하다가는 회사가 날아가게 생겼으니.
이현덕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사장님. 모든 건 서해식품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이런……."
"회장님 지시셨습니다. 어렵게 독립시킨 서해식품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으시다고."
"넘어갈 일은 절대 없어! 우리 서해식품이 얼마나 크고 단단한 뿌리를 갖고 있는데!"
"그럼 왜 라면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하신 겁니까?"
"그, 그건……!"
"양계 쪽에서도 철수하실 판이고, 이번에는 식자재 군납 사업도 중지 해야 할 판이라지요? 상대는 여전히 무섭게 치고 들어오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태영의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었고, 이현덕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회장님도 고심 끝에 내리신 결정입니다. 그분이 사장님 뒤를 얼마나 봐주셨는지는, 사장님이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서해식품이 그룹에서 갈라져 나갈 때에도 회장님은 사장님을 알뜰하게 챙기셨습니다."
"……잠깐, 사장님? 나보고 한 소리인가?"
"아, 죄송합니다. 회장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했네요."
이현덕은 깜박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숙여 보였고, 이태영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얼얼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현덕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서해식품그룹'이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서해식품'이라고만 불러왔다. 계열사가 다섯 개나 되는데도 마차 하나의 단일기업인 것처럼 불렀다.
그 의도가 이제야 또렷하게 전달이 되었다.
이현덕은 서해식품그룹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룹에서 갈라져 나간 그때부터 아마 자신의 것이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여겼으리라.
"회사 소유 관계만 바뀔 뿐, 달라 지는 것은 없습니다. 정훈이는 여전히 태양심 사장으로서 그룹을 위해 힘쓸 겁니다. 작은아버지도 식품사업부문 부회장직에 오르실 거구요."
달라지는 게 왜 없겠나.
태양심 사장으로서 후계자 수업에 열중해 온 이정훈이 식품그룹 회장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해식품그룹은 이제 서해그룹의 일개 식품사업 부문으로 바뀌게 될테니, 다 끝났다'갑자기 망연자실한 기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태영은 자리에 힘이 풀려 덜덜 떨다가 비틀거리며 쇼파에 주저앉았다.
이현덕이 다가와서 부드럽게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저도 가슴 아프지만 회장님 뜻입니다. 그룹 식품 사업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고요."
"현덕…… 아."
"다 잘될 겁니다. 걱정 마세요. 저 믿으시잖아요, 작은아버지."
환하디환한 조카의 미소에서, 이태영은 불현듯 부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씨 일가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부친과 형을 볼 때마다 이런 기분이었으리라는 생각에, 이태영은 호흡이 가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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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그룹 식품사업부 총괄기획실장 이진수?"
-네, 메일로 정중하게 미팅에 관해 통화하고 싶다는 연락을 보냈습니다.
"서해그룹이 식품사업도 했었나? 서해그룹과 서해식품그룹은 별개 아니었어?"
-서해식품그룹이 이번에 다시 서해그룹으로 들어갔습니다. 지분 변동이 대대적으로 확인됩니다.
"야, 싸우다가 안 될 거 같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이르는 거 좀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