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랜차이즈 갓-366화 (366/1,270)

프랜차이즈 갓 366화

88장 봉인된 반도체 검(1)

정서희는 다소 의아했다.

왜 뜬금없이 하수영이 친오빠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반도체를 하는 건 맞아요. 맞는데……."

-제가 반도체 쪽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한 번 만나보게 해주시죠.

"우리 오빠 그냥 대학원생이에요."

-저런,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보군요. 잘못을 저지른 대학생들만 들어간다는 대학원에……. 아무튼 대학원생이라면 저는 더 좋습니다.

"지금 진심이신 거예요?"

-네, 진심입니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연결 한 번 해주시죠.

정서희는 손톱을 잘게 물어뜯으며 갈등했다.

하수영이 갑자기 왜 친오빠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짐작 가는 것이라면…….

"반도체 사업에 관심이 있으신 거예요?"

-비슷합니다.

"그쪽은 레드 오션 끝판왕이에요. 수영 씨가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부어도 가망이 없을 거예요. 1등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는 곳이에요."

설마 하는 걱정이 정서희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서해그룹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쪽에 진출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돈이야 넘쳐 나지만, 돈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없잖아.'

현질로 되는 영역이 있고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

지금 반도체 시장 자체가 그렇다.

이미 서해전자는 메모리 반도체로 시장을 석권했고,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거대 기업이다.

이제 와서 그쪽에 뛰어든다는 것은, 메추리알로 방공호문을 부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하수영은 반도체 사업 쪽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지 않은가.

'이건 안살린 구단주님도 절대 도와줄 수 없는 영역이야.'

안살린은 지질학자지, 전자전기공학은 하나도 모른다.

국제자원투자회사가 보유한 지분중에는 내로라하는 반도체 회사가 포함돼 있을지도 모르지만, 과연 이런 일에 얼마나 큰 도움을 줄까?

이미 한국이 소비하는 원유를 무상으로 공급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지원인데.

-제가 다 생각이 있습니다. 연결만 해주시죠.

"…… 알겠어요."

정서희는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승낙했다.

***

정서진은 JM 식품의 장남이다. 정서희의 친오빠, 원래 그는 JM 식품에서 상무직을 수행하며 회사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서희가 프라임컴퍼니를 통해 식품사업에서 두각을 드러내자, 상무직을 던져 버리고 해외 유학길에 올랐다.

자신의 꿈, 반도체 연구자를 다시하고 싶다는 마음에서다.

"회사야 서희가 물려받으면 되잖아요!"

정재민과 채설희는 그런 장남의 고집을 결국 꺾지 못했고, 정서진은 대학원으로 진출해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정재민 입장에서도 차라리 딸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게,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더 낫다는 임원들의 의견을 무시할 순 없었다.

프라임컴퍼니는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식품기업이었으니까.

아무튼 상무직을 던져 버린 죄로 정서진은 해외 대학원에서 반도체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정서진 씨 번호가 맞습니까?

"아, 네. 하수영 의원님입니까?"

이미 여동생한테 들은 바가 있는 정서진은 의아해하면서도 하수영의 연락을 받았다.

-네, 반갑습니다. 하수영입니다.

"연락을 다 주시고, 정말 영광입니다. 머나먼 미국이지만 의원님의 영향력을 여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참 자랑스럽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당장 정서진의 주변 지인들만 해도 수영라면 없이는 못 사는 이들이 많았다.

'나노소프트가 수영레스토랑으로 올리는 매출이 전문학적이라지?'

IT공룡기업으로 유명한 나노소프트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내는 사업부가 다름 아닌 요식업이라니.

실리콘밸리에 입주한 수많은 기업들이 그거 때문에 하늘에 대고 통탄하는 중이다.

-제가 반도체 사업을 해보려고 하는데 혹시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요? 저는 대학원생입니다. 큰 도움이 못 될 겁니다."

정서진은 자신의 주제를 분명하게 파악했다.

몇 년 동안 식품회사 일을 하느라 시간을 까먹고 뒤늦게 다시 반도체 연구에 뛰어든 대학원 유학생. 그게 자신의 현주소다.

-아니요, 제게는 정서진 씨 같은 분이 제격입니다. 정서희 부사장님의 친남매라 나중에 갈라설 리스크가 적고, 가업 승계를 때려치우고 유학까지 떠날 정도로 반도체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죠. 대학원생이라 도망갈 데도 없고요.

"잘 이해가 안 됩니다만."

-제가 반도세 사업을 작게 하려고 생각 중인데, 그걸 맡아줄 전문경영인이 필요합니다. 정서진 씨는 심지어 후계자 경영 수업을 몇 년간 받은 경험까지 있지요?

"반도체 사업이요?"

정서진은 더욱 이해가 안 갔다.

아니, 식품사업으로 이미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이 느닷없이 웬 반도 체 사업?

'이건 무슨 나노소프트하고는 완전히 정반대잖아.'

미국에서는 IT기업 나노소프트가 프랜차이즈 요식업을 크게 벌이더니, 정작 한국 본사에서는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다고?

-정서진 씨, 이건 정말 큰 기회입니다. 전 그걸 정서진 씨에게 주는 거고요.

"……."

-정서진 씨가 나중에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평정할 AP나 CPU를 개발해도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킬 겁니다. 설계 로열티나 좀 받아먹고, 스톡옵션 얼마로 끝나겠지요.

"제, 제가 그런 제품을 설계한다고요?"

지금 남보다 뒤쳐진 학업 때문에 이렇게 개고생하는데?

-하지만 저는 정서진 씨의 노력에 대한 온전한 보상을 해드릴 겁니다. 정서희 부사장님에게 들으셨으면 알겠지만, 저는 임직원들 연봉 책정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일개 대학원생일 뿐입니다."

-제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까?

"제가 수용하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의원님의 기대에 미칠 자신이 없습니다."

-아,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해도 그러네요.

거듭될 설득 끝에 정서진은 일단하수영을 만나보기로 했다.

마침 휴가 겸해서 한국을 한 번 방문할 예정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약속을 잡았다.

***

"유학 생활은 힘들지 않고?"

"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들 잘해줘요."

"아이구, 대학원이란 곳이 죄지은 대학생들이 가는 곳이라고 해서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단다. 왜 꽃길을 놔두고 그 험한 가시밭길을 가려고 들어."

정서진은 가족과 회포를 나눈 후, 정서희와 함께 나섰다.

"이제는 어엿한 CEO 느낌이 나는구나."

"오빠도 너드 느낌 제대로네. 예전의 그 샤프한 느낌은 다 없어졌어."

정서희는 피식거리며 핸들을 꺾었다.

"진석이는 요즘도 결혼하자고 졸라?"

"아, 걔 이야기는 하지도 마. 걔 때문에 내 연애 사업이 잘 안 풀리는 거 같으니까."

"그럼 의원님 이야기나 좀 해봐. 왜 갑자기 날 보자고 하시는 거야?"

"나도 모르지. 반도체 사업에 관심이 있으신 건 알겠는데 왜 오빠를 부르는지는 이해가 안 가."

정서희는 서해그룹과 하수영이 겪은 갈등에 관해서 설명했다.

덕분에 정서진은 하수영이 반도체에 관심을 두게 된 동기만큼은 확실히 이해했다.

문제는 '왜 하필 나인가?'에 머물러 있었다.

진짜 그는 특별할 것 없는 일개대학원생이었으니까.

"그런 점 때문에 오히려 나를 선택했다고 하셨는데,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

"나도 수영 씨가 뭘 생각하는지는 몰라."

"서해그룹에 반기를 드는 것은 확실한 거 같은데."

"아마도? 방법은 짐작이 안 가지만, 아무리 수영 씨가 부동산 재벌이라 해도 국내에서 서해그룹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어느덧 둘이 탄 차가 청담동 휴민트타워에 도착했다.

"여기 탑층 레스토랑이야. 건투를 빌어."

"같이 안 가?"

"수영 씨가 오빠만 따로 보고 싶다고 해서, 나는 업무 때문에 이만."

그리고 정서희는 쿨하게 돌아섰다.

정서진은 머뭇거리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레스토랑 VIP룸에는 하수영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노트북과 모바일 프로젝터까지 옆에 놓은 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정서진입니다."

"반가워요. 하수영입니다."

나이만 보면 하수영이 막내동생뻘이다.

하지만 정서진은 하수영이 국내 농업, 식품업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아울러 청담동에서 그가 지닌 위상도…….

"평소 의원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말씀드립니다."

"그래요?"

"네, 의원님이 우리 서희를 밀어주신 덕분에 제가 홀가분하게 다 털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었거든요."

"본의 아니게 좋은 나비 효과가 됐군요. 사실 그 점도 고려를 해서 정서진 씨를 택한 겁니다."

자신은 아직 승낙을 하지 않았지만, 하수영은 이미 모든 게 결정된 것처럼 말했다.

"저는 반도체 회사를 세우려고 합니다. 정서진 씨가 그 회사의 CEO를 맡아주면 좋겠습니다."

"제가요?"

"네, 얼굴마담이 필요해서요. 물론 제가 지시하는 역할만 충실히 수행 한다면, 그 외 다른 기업 활동을 하는 것은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정서진은 더욱 당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아직 더 공부해야 하고, 경험도 더 많이 쌓아야 한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 정서진 씨는 누구보다 제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분입니다. 정서진 씨도 회사를 굴리면서 실전에서 반도체 연구를 할 수 있어서 좋을 테고요. 게다가 월급도 나오잖아요."

"실례지만 회사 자본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하실 건지……?"

"딱히 상한선은 긋지 않았어요. 1조는 10조는 제한 없이 부을 겁니다."

"그 정도 규모면 팹리스(설계만 하는 업체) 설립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1조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반도체 제조사업에 뛰어들기에는 터무니없이 적다. 설계만 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충분한 돈이다.

"달러인데요?"

"……."

"물론 제가 지금은 가난해서 아직 그만한 돈은 없지만, 얼마든지 조달은 할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노소프트가 라면 팔아서 쌓인 수익이 꽤 있을 건데, 그것도 인출해야겠네요."

"그러니까 지금 종합반도체업체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오, 파운드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파운드리.

설계는 하지 않고 생산만 위탁해서 해주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공장을 갖추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간다.

정서진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설계는 고도의 천재 연구진이 필요 하지만, 생산라인만 갖추는 것이라면 현질빨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된다. 막말로 장비 사다가 생산라인에 쫙 깔면 되니까.

다만 수익이 난다는 보장이 없을 뿐…….

"물론 정서진 씨가 따로 설계라인을 갖춰서 종합반도체업체로 거듭나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터치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파운드리 시장도 엄청난 레드오션입니다. 수익을 기대하기는 커녕 투자금만 날릴 가능성이 더 큽니다."

"저와 함께하겠다고, 그리고 평생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하신다면 제가 준비한 것을 알려드리죠."

정서진은 고심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놓칠 수 없는 기회다. 하수영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아니니 부담은 덜해졌다.

다만 그가 무엇을 노리는지, 무슨 무기를 준비했는지 이제 궁금할 뿐이다.

"의원님 제안을 받겠습니다."

"좋습니다. 이걸 한 번 보시죠. 제가 준비한 반도체 제조설비라인인데 아직 설계만 있습니다."

"아, 제조설비를 사서 쓰는 게 아니라 직접 개발해서 쓰실 예정입니까?"

"네, 그게 핵심이거든요."

무엇을 위한 핵심인지는 모른 채, 정서진은 프로젝터가 쏘아낸 영상에 집중했다.

3D 그래픽으로 구현한 가공의 조감도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조용히 영상을 보던 정서진의 안색이 어느 순간 굳어졌다.

"이거 혹시 3D 프린팅 반도체 제조 방식 아닙니까?"

"뭐, 일단 기본 개념은 살짝 비슷하겠네요."

"헉, 이걸 상용화에 성공한 기업이 있었습니까!"

"아, 좀 끝까지 보고 말씀해 주실래요?"

어디까지나 살짝 비슷하다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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