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378화
93장 이사장과 마음의 편지 (2)
전공의 한 명이 병가를 내고 입원한 것은 사실이었다.
사유 역시 실족해서 구른 것이라고 상부에 보고가 되어 있었다.
"우리 병원에서 일하다가 넘어진 거면 우리 병원에 입원을 해야지, 왜 굳이 다른 병원까지 찾아가서 입원을 했지?"
교수한테 구타를 당하는 과정에서 입은 부상이라는 의심을 짙게 만들어주는 정황이다.
하수영은 사건 추리의 즐거움을 혼자 누리지 않고, 정서희 부사장과 함께 나누었다.
"입원한 전공의를 찾아가서 증언을 대가로 50억을 준다면 아마 입을 열지 않을까요?"
-저한테 20억만 떼어주시면 진실을 바닥까지 밝혀내 드릴 수 있는데,
"일단 제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병원 전체에 마음의 편지함을 쫙 깔아놨어요."
-그런데 메일 주소는 대체 뭐예요? 주소 도메인 이름이…….
"신차를 뽑으면 새로 길들여야 하듯이, 병원도 이제 길들이기를 할 때가 된 거 같습니다. 저는 이번 일을 곱게 넘어갈 마음이 없습니다."
-근데 왠지 목소리는 신난 거 같은데요? 뭔가 이벤트 생겼다고 좋아하는 사람 같아요.
"아무튼 가능한 많은 제보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아, 지금 또 편지함에서 알림이 왔어요."
편지함에는 자동센서와 알림장치가 갖춰져 있어서, 누군가가 편지를 넣으면 실시간으로 알 수 있었다.
편지를 넣은 이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디에 위치한 어느 편지함에 편지가 들어왔다는 것은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벌써 5통이나 되는 편지가 들어왔네요. 슬슬 한 번 회수를 해야 될 거 같습니다."
-그냥 입원한 전공의한테 가서 물어보는 게 낫지 않아요?
"증인보호프로그램을 완전히 구축하기 전까지는 회복에 전념하게 놔두는 게 낫죠."
하수영은 통화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청담수영병원은 며칠 전부터 계속 술렁거리고 있었다.
병원 곳곳에 설치된 마음의 편지함때문이다.
세 자릿수가 넘는 마음의 편지함이 병원 곳곳에 설치된 덕분에, 의료진과 직원들은 다소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웬 마음의 편지함? 나 순간 군대 다시 온 줄 알았잖아."
"지금 과장급 교수님들 엄청 긴장하셨던데. 이러다가 뭐 하나 크게 터지는 거 아니냐고."
"네가 중대장이라고 생각해 봐. 나 같아도 사단장이 와서 소대 내무반에 직통 마음의 편지함 설치하고 가면 겁나겠다."
"사단장이 아니라 합참의장, 아니, 대통령이 와서 직통 편지함 설치하고 간 거라고 봐야지."
보통 종합병원에서 이사장이라고 하면, 일반 의사나 직원들에게는 뜬구름 같은 존재다.
높은 사람인 건 당연히 알지만 일상생활에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 보니, 경계하는 마음도 희석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수영은 다른 병원 이사장과는 달랐다.
단독으로 100% 병원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병원이 서 있는 땅의 주인이다.
1.4조 원이 넘는 돈을 들여 닥터헬기를 도입했고, 의료진과 직원 수를 대폭 늘려 근무 강도를 대폭 낮춰주었으며, 간호사조차도 억대 연봉을 받게끔 급여 체제를 개선했다.
원무과 일반 직원들조차 두려운 마음을 품고 사태를 관망하는 이유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
청담수영병원을 방문한 하수영은 먼발치에서 먼저 병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음, 내 성역이 멀쩡히 잘 작동하고 있군."
병원 건물을 감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성역의 기운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바로 신어의 권능과 엘릭서를 통해 구현한 성역이다.
병원뿐만이 아니라, 그가 보유한 모든 부동산에는 성역이 선포되어 있다. 참고로 통영의 수영참치 양식장 가두리그물도 일종의 성역이다.
성역은 불순한 기운을 정화하는 힘을 상시적으로 내뿜는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병원 같은 곳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 구성된 셈이다.
여기에 병원에서는 환자들에게 엘릭서드링크까지 상시적으로 공급한다.
이것이 바로 응급실 출입라인, 스틱스강의 진실이다.
일단 숨이 붙어서 병원에 들어선 위급환자는 성역의 기운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다.
"이론상 병원에서 한 발자국도 안나가고 매일 엘릭서드링크를 먹으면 초장수를 하는 건 사실인데, 영생도 가능할까 궁금하긴 하다. 근데 환자는 어차피 호전되면 퇴원해야 하니까 의미 없는 가정이군."
영생은 하수영에게 큰 의미가 없다.
지금 그가 누리는 삶의 반복 자체가 하나의 영생이나 다름없으니.
전생으로 넘어가지 않고, 진정한 영생을 누려본 적도 있었다.
다만 중간에 너무 지겨워져서 자신이 직접 삶을 마감했을 뿐이다.
"변장은 완벽해. 이 정도면 직원들이 못 알아보겠어."
하수영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비니모자와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이렇게 얼굴을 꽁꽁 감춘 이상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 있게 병원에 들어선 하수영은 직원들의 시선을 피해 편지를 모두 수거했다.
"근데 메일 주소도 남겼는데 메일주소로는 왜 한 통도 안 오는 거야? 다들 아날로그가 편한 건가?"
편지는 도합 12통.
야외 휴게공간으로 나간 하수영은 벤치에 걸터앉아 편지를 하나씩 뜯어보았다.
"어디 보자…… 이사장님, 감사합니다. 저는 말기암으로 발전해서 이제 죽을 날만 정리하고 있었는데 상태가 급격히 호전돼서 다음 주에는 통원치료를……뭐야? 이거 환자가 넣은 편지잖아?"
다음 편지도, 그 다음 편지도, 하수영이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환자, 인턴 1년차, 신입 간호사, 교수가 보낸 감사의 편지들이었다.
이제 남은 편지는 두 통.
하수영은 그중 한 통에 손을 뻗었다.
"이사장님, 병원장 최윤석입니다. 언제나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시는 하해와 같은…… 아니, 이 양반이. 병원이나 잘 운영하랬더니 자기가 마음의 편지를 쓰고 있어?"
이런 걸 받자고 편지함을 설치한 게 아닌데.
하수영은 허탈한 마음에 하늘을 잠시 바라봤다가, 마지막 남은 편지에 손을 뻗었다.
"그래, 원래 이런 건 가장 마지막 차례에 나오는 거라고."
마지막 편지 봉투를 열고 나온 편지지에는 딱 한 줄만 쓰여 있었다.
[얼마 전 입원한 황철 전공의는 넘어져서 다친 게 아니라 조영태 교수한테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하수영은 흐뭇해서 편지 내용을 몇 번이고 읽었다.
그가 원하는 인재상은 불의나 비리를 자기 일 아니라고 외면하지 않는 인재상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사장이 모두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이렇게 판을 차려주었을 때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문화.
그런 문화가 병원에 뿌리내리지 않으면, 물밑에서 알음알음 행해지는 나쁜 관행을 근절하기 어렵다.
"병원장님, 안 되겠네. 폭력, 폭언, 태움 같은 비인간적인 것들은 절대 안 된다고 내가 그렇게 강조를 했는데."
하수영은 매일 병원을 찾았다.
가끔은 변장을 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채 병원을 찾아서 마음의 편지함을 뒤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최윤석 병원장이 헐레벌떡 놀라서 달려 나오곤 했다. 병원장뿐만 아니라 눈도장 한 번 찍으려고 교수들이 달려오기도 했다. 비번인 데도 튀어오는 교수도 있었다.
"마음의 편지함 확인하러 온 겁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각장 일들 보세요."
"혹시 어떤 큰 제보라도 있었습니까?"
"전부 다 저한테 고맙다는 내용뿐이네요. 이런 걸 받아보려고 설치한 게 아닌데, 옆구리 찔러 절 받기는 별로 취미가 아니라서요."
몇 번이고 흠모의 편지를 썼던 최윤석 병원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하하 웃었다.
'병원장님은 조영태 교수 일을 모르는 거 같은데.'
하긴, 최윤석이 이미 파악할 정도면 병원 전체가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아마 조영태 교수 주변 울타리 안에서만 은밀하게 일어나는 가혹행위일 것이다. 이런 것은 최상급자가 파악하기 어렵다.
'문제는 조영태 교수뿐만이 아니라는 건데.'
아직 드러나지 않은, 그래서 최윤석이 파악하지 못하는 폭력, 폭언, 왕따 등 부조리 등이 있을 수 있다.
거실에서 벌레가 발견되면, 집안어딘가 곳곳에 벌레들이 잡은 터가 있는 것처럼.
당장 나서서 조영태 교수를 징벌하면 간단하다.
하지만 그러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다른 비리들이 영영 묻힐 수도 있다.
'그동안 당근은 충분히 줬으니, 이제 채찍을 들 차례로군.'
언제나 이럴 때가 제일 가슴이 두근거린다.
병원을 새로 인수한 이사장은 온화하고 다정하며 돈도 팍팍 쓸 줄 아는 사람.
하지만 그 따스함 이면에는 서릿발같은 냉정함도 있다는 걸, 이제 직원들도 알아야 할 차례.
그렇게 한 달 정도, 하수영은 병원을 드나들며 마음의 편지함을 확인했다.
이렇게 되자 의료진이나 직원들은 이제 큰 긴장을 하지 않고, 의례적인 방문으로 받아들였다. 바로 하수영이 의도한 방심이다.
정황 끼워 맞추기를 통해, 제보한 동료를 파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교란 작전이었다.
철저한 조사 끝에, 하수영은 맞아서 입원한 전공의 사건에 얽힌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아직까지 폭력을 행사하는 의사는 조영태 교수 한 명뿐이군, 그래도 다행이야."
조영태 교수는 병원 인수 이후 외부에서 영입된 인사였다. 바로 한국의대병원 출신이다.
최윤석은 외부에서 영입한 의사, 간호사들의 출근 전 철저히 정신교육을 한다.
No폭력. No폭언, No왕따.
병원이 근절하고자 하는 악습을 강조하며, 이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다.
그런 악습이 익숙해진 이들도 '여기서만큼은 큰일 나겠구나.' 하고 정신을 차리고 행동하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조영태는 아직 나쁜 권위주의를 제대로 털어내지 못한 것이다.
"간호사들 태움 문화도 좀 남아 있기는 한데……."
다른 병원에 비하면 매우 순한 맛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100%를 원하는 하수영의 눈에는 차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럼 간만에 완장질이나 한 번 해볼까."
그러고 보니 이런저런 사업을 하면서 완장 차고 앞으로 나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병원이 그 첫 타자가 될 줄이야.
하수영은 병원 사내게시판에 접속해서 공지를 올렸다.
[이사장입니다.]
[최근 병원 내에 불미스러운 분위기가 돌고 있다는 정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사장은 여러모로 실망감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따라 돌아오는 목요일 하루를 워크샵 일정으로 지정합니다. 이 사장 밑으로 전원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응급실 및 병원 운영을 위한 최소 근무 인력은 제외합니다.]
[지방 분원은 원격화상통신으로 참석합니다.]
병원 내 불미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워크샵이 갑작스레 열렸다는 소문이 퍼졌다.
의료진과 직원들은 불안한 마음에 술렁거리면서, 워크샵 당일을 맞이 했다.
워크샵 장소는 잠실에 있는 대형 문화시설이었다.
대강당에 질서정연하게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내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제 곧 이사장님 들어오십니다."
최윤석 병원장과 교수들은 일제히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른 직원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쥐 죽은 듯한 정적 속에서, 불현듯 쩔그렁거리는 쇠붙이 마찰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갑자기 웬 철 부딪치는 소리가?'
바로 그때 입구가 열리면서 하수영이 들어섰다.
병원 직원들은 그제야 쇠붙이 마찰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가, 갑옷?'
놀랍게도 하수영은 목 위만 겨우 드러낸 황금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쩔그렁거리는 소리는 바로 갑옷의 이음새가 서로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였던 것이다.
충격적인 등장에 병원 직원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난데없이 병원 이사장이 입고 나타난 황금 갑옷이 주는 컬쳐 쇼크는 사고신경을 경직시켰다.
아마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저거, 진짜 황금은 아니겠지?'
하수영이 단상 위로 올라오자, 아무것도 없던 단상 바닥이 갈리면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높이 5미터 정도 되는 삼각형 단상이 새로 만들어졌다. 단상의 꼭대기 중심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왕좌가 놓여 있었다.
쩔그렁거리는 금속 마찰음이 계단을 타고 천천히 올라, 왕좌 위에 차분히 걸터앉는다.
황금 갑옷을 입고, 높은 황금 의자에 앉은 이사장이 직원들을 차분히 내려다본다.
"이사장은 실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