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438화
110장 소 사료를 만들려고 했을 뿐(3)
양흥명 과장은 황당해서 반문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심리야. 일본이 우리 쌀을 사주는 거라고 생각하다니……."
"원래 일본 관료들 심리가 그래요.
우리나라하고 하는 것은 뭐든지 자기들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임하죠."
"농림수산성은 아마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곤경을 우월적 지위에서 도움을 주는 거라고 여기고 있을 겁니다."
양홍명 과장은 어이가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직원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냥 쌀 팔지 말까?"
"어휴, 그건 말이 안 되죠. 무역에서 그런 사적인 감정을 삽입하면 안됩니다. 무조건 잘 팔고, 이윤 남기는 게 이기는 겁니다. 원래 손님이 왕이라잖아요."
"이러다가는 우리가 더 큰 손님이 되게 생겼는데? 우리는 일본 수산물별로 필요가 없다고."
"쌀 팔러 갔다가 필요도 없는 생선 사오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죠. 그러니 외교부 역량이 중요합니다."
"끄응…… 농림수산성 놈들은 대체 왜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뇌구조를 갖고 있는 거야."
그리고 며칠 후, 양홍명 과장은 좀 더 자세한 일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쌀만 샀다가는 농림수산성 체면이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부족한 쌀을 사왔는데 왜 체면이 망가집니까?"
외교부 직원의 설명에 양홍명 과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자기들의 실수를 한국의 도움을 얻어서 만회했다. 그런 이미지가 생기는 게 싫은 거죠."
"허참……."
"일본 고위 관료 입장에서는 그런게 몹시 중요해요. 차라리 중국이나 베트남산 쌀을 사오는 거라면 이렇게까지 안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한국이잖아요. 한일전만큼은 곧 죽어도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사이 아닙니까."
"축구 경기도 아니고 그냥 쌀 수출입인데, 이런 것도 한일전이 되는 겁니까?"
"한일전이죠.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을 성취해야 체면이 섭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요."
"네?"
그제야 양홍명은 이글이글 불타는 외교부 직원의 눈빛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래서 우리 외교부가 처음부터 일본에 쌀 수출하는 걸 내키지 않아했던 겁니다! 이렇게 더럽고 치사하고 야비하게 나올 게 뻔했으니까요!"
"그, 그런……."
설마 이제 와서 발을 뺄 건 아니죠? 라는 말을, 양홍명은 간신히 주워 삼켰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왕 시작한 거, 우리 외교부도 끝을 볼겁니다. 이 한일전, 반드시 우리나라의 승리로 만들겠습니다!"
"쌀 수출 하나 가지고 무슨……."
"양국 정부가 나섰으니까 한일전이라는 타이틀을 피할 수 없어요. 처음부터 칼을 뽑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왕 뽑았으면 무라도 자르고 집어넣어야지요."
외교부 직원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을 굳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반드시 우리 나라의 승리를 따낼 겁니다!"
"……."
"수산물 맞수입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 일본 너희들은 얌전히 돈주고 우리 쌀을 사서 고마워하며 실어가야 할 거다!"
자세히 들어보니, 농림수산성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한 것 같았다.
얌전히 한국산 쌀만 사왔다가는 노가미 대신이 자칫 정적한테 공격을 당할 우려까지 있었다.
'나라에 부족한 쌀을 사왔을 뿐인데 정적한테 공격을 받는다고?'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지만, 그 대상이 한국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다른 일본 고위 관료 입장에서는 나라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한 실책으로까지 간주된다니.
그제야 양홍명 과장은 왜 농림수산성이 처음부터 그렇게 시간을 질질 끌었는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농림수산성 입장에서는 이 정부 간무역거래가, 자칫 장관이 탄핵될 수도 있을 만큼 중차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노가미 대신은 애초에 왜 이 거래를 받았느냐고 아랫사람들을 질책까지 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사왔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괜히 한국과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는 거지요."
"이해가 안 됩니다. 다른 나라 쌀은 일본 쌀하고 차이가 너무 나서 사와도 소용이 없을 듯해서 그동안 주저하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상황에서 노가미 대신한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죠. 그게 정치라는 겁니다."
"쯧쯧, 그놈의 말도 안 되는 정치 질이라니……."
"만약 수산물 맞수출을 성사하지 못한다면 요미우리 같은 우익언론에서 노가미 대신을 신랄하게 비판할 겁니다. 그럼 일본 극우단체들도 들고 일어날 테고, 농림수산성은 사방에서 할복하라는 비난을 받게 되겠죠."
"그럼 이 거래가 무산되는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일본도 우리나라 쌀이 필요합니다. 다만 자기들이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성사하고 싶은 겁니다."
아직까지 일본과의 협상은 물밑에서만 진행되고 있었다.
언론에서도 냄새를 맡지 못했기에, 한국 국민과 일본 국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거래가 어떤 식으로 성사되든, 일본은 우리나라 쌀을 간접적으로 수령하길 원합니다."
"간접 수령은 또 뭡니까?"
"중국에서 중국 국적 화물선단이 출발해서 쌀을 싣고 베트남으로 향할 겁니다. 물론 선주는 일본입니다."
"……."
"이 선단은 중국으로 가는 척하다가 베트남으로 갑니다. 거기서 베트남 국적 선단에 쌀을 옮겨 실을 겁니다. 역시 선주는 일본입니다."
"……."
"그리고 베트남에서 출발한 쌀이 일본항에 짠, 하고 입항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중국에 쌀을 수출한 것이고, 일본은 베트남에서 쌀을 수입한 것으로 포장한다?"
"네, 그렇게 되는 셈이죠."
"그럴 거면 차라리 베트남산 쌀을 수입하는 게 일본 입장에서 훨씬 나을 텐데요?"
"누누히 말했다시피 그나마 일본인 입맛에 맞는 쌀은 베트남이나 중국산이 아닌, 우리나라 쌀이다 보니 걔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겁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이렇게까지 한다고요? 쌀 수출입 동선을 속이고, 우리나라는 필요도 없는 수산물까지 강매로 떠넘긴다고요?"
양흥명 과장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허참, 그럼 일본 수산물도 러시아거쳐서 러시아 국기 달고 다시 내려오는 겁니까? 우리는 일본이 아닌 러시아에서 수산물을 수입한 거로 하는 거고요?"
"일본의 요구는 그게 아닙니다.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바로 직수출 하는 거지요."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수산물 보존을 위해서 최단루트로 입항하는 게 가장 좋다는 말이 붙긴 했습니다."
이쯤 되니 양홍명은 속에 났던 천불도 사그라질 판이었다.
"그놈들 사실은 쌀 살 생각이 전혀 없는 거죠? 차라리 그렇다고 말해주십시오."
"아닙니다. 농림수산성의 속마음은 지금 간절히 우리나라 쌀을 사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물러설 이유는 없습니다. 그 점을 활용해야지요."
외교부 직원이 돌아간 후, 양흥명은 처음 일본 수출 이야기를 꺼냈던 직원을 호출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아는지라 직원도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살살 살폈다.
"자네, 이거 어떻게 할 거야? 괜히 일본에 쌀 한 번 팔려다가 일이 전부 이상하게 꼬였잖아?"
"외, 외교부가 설마 일본 좋은 일만 하겠습니까? 한일전 승리 어쩌고 불태우는 걸 보니까 아마 좋은 조건으로 거래를 끌어낼 겁니다."
"난 쿨거래 주의자라고, 중고거래도 5마디 이상 주고받는 걸 싫어해. 그 이상 말이 길어지면 거래가 어떻게 되든 간에 기분이 지저분해진다고."
"……잘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장님."
양홍명 과장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
전성렬과 정서희도 쌀 풍년 이야기를 들었다.
둘은 이걸 어떻게 활용할지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볏짚이 소먹이로 아주 그만인가 봐요. 정 부사장도 소고기 먹어봤잖아요. 난 그렇게 맛있고 질리지 않은 소고기는 처음 먹어봤다고."
"저도요. 보통 한우는 맛있고 고소하긴 한데 느끼해서 몇 점 먹으면 금방 질려요. 근데 수영한우는 매끼마다 먹어도 전혀 부담이 없겠더라고요."
"그게 바로 젖 떼자마자 '수영벗짚'을 먹이로만 써서 키워서 그런 거라잖아요."
"그럼 당연히 수영볏짚만 먹여서 키워야겠네요. 모든 소가 그런 맛을 내려면요."
"그렇지요. 미국의 비프스 사장이 원한 것도 바로 그 맛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니까."
물 외에 다른 먹이는 일절 먹이지 않고, 오로지 '수영볏짚'만을 먹여서 키운다. 그래야 호불호를 가리지 않는 최고로 맛있고 질리지 않는 소고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도 쌀이 많이 나올 거랍니다."
"인간이 먹을 식량의 부산물을 가축 사료로 활용하는 건 봤어도, 그 반대는 처음 보네요."
소먹이를 만들다가 나온 찌꺼기가 바로 사람 식량이라는 상황이라니.
기네스북에 오를 일 아닌가?
"일단 앞으로 우리 회사가 만드는 인스턴트 도시락 쓸 쌀은 무상으로 받기로 했어요."
"아, 그럼 도시락 단가를 낮출 수 있겠네요."
"구내식당에서 사용할 쌀도 무상으로 받을 생각입니다."
"회사 식비 지출도 줄어들겠네요. 장기적으로 보면 꽤나 큰 돈인데."
"직원들 신청을 받아서, 가족 수에 맞게끔 쌀을 무상으로 나눠줄 생각입니다. 어때요?"
"괜찮은 생각이에요. 쌀값만 공짜로 덜어도 직원들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죠."
"그리고 생각을 좀 더 해봤는 데…… 이참에 우리도 즉석밥 시장에 진출합시다."
"즉석밥 시장이요?"
정서희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전성렬의 한마디에 그녀는 앞으로 회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순식간에 계산했다.
"쌀을 무상으로 받아와서 즉석밥을 만들면, 다른 즉석밥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겁니다. 낮은 가격을 무기로 삼아서 즉석밥 시장의 1인자가 될 수 있어요."
"또 서해식품이 허리띠를 졸라매야겠네요."
현재 즉석밥 시장의 1인자는 바로 서해식품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서해전자로 인수된 이상, 서해식품이 재정난에 쉽게 빠지는 일은 없겠지만…….
"정 부사장, 쌀은 많고 모두 공짜예요. 이참에 쌀로 할 수 있는 모든 먹거리 사업을 한 번 고려해 봅시다."
"그래야겠어요. 앞으로 쌀은 계속 쉼 없이 떨어질 테니까 활용할 방법을 찾아봐야죠."
"막걸리 회사도 이참에 하나 인수해야겠어요."
"아, 지도 그 생각했어요. 사장님."
***
쓸데없이 길고 지루한 협상이 마침내 끝났다.
"일본이 수산물 맞거래는 없던 것으로 해준다고 했습니다."
"해준다고? 되게 거들먹거리면서 말하는군요, 그놈들."
"아이고, 우리가 그거 없앤다고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아십니까? 아무튼 이제 제값 받고 쌀만 팔면 됩니다. 대신……."
"네, 중국 배가 수입해 가는 척하면서 베트남에 싣고, 일본은 베트남에서 수입해오는 척하면서 우리 쌀을 가져간다는 작전인 거죠?"
"운송비를 우리가 부담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떻습니까. 좀 시간을 끌긴 했지만 모로 이익입니다."
솔직히 양흥명은 그냥 판을 엎고 싶었다.
엄밀히 말해서 한국이 이긴 것이긴 하지만, 뭔가 지저분한 승리 같아서 기분이 별로다.
물론 자신의 사감을 거래에 강요할 수 없으니, 그저 속에 난 천불만 달래고 있을 뿐이다.
"자, 일본과 수출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먼저 쌀 소유권부터 확보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마지막 도장을 찍기 전, 하수영으로부터 쌀을 인수받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하수영을 찾아간 양흥명은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되었다.
"그거 다 나눠준 지가 언젠데 이제와서 찾으시면 어떡해요?"
"나, 나눠줘요?"
팔았다도, 처리했다도 아닌, 다 나눠줬다.
양홍명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여기저기서 나눠달라고 손 벌려서, 잘됐다 싶어서 달라는 대로 다줬더니 이제 하나도 없어요."
"750만 톤이나 되는 걸 전부 나눠주셨단 말입니까?"
"제가 딸린 입이 얼마나 많은데요. 모르셨습니까?"
양홍명은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허탈하진 않고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일본 농림수산성 하는 꼴이 얄미워서 차라리 판을 엎고 싶다는 자신의 기도를 하늘, 아니, 하수영이 들어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