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450화
113장 회장님의 이사떡(2)
주치의는 당황했다.
"떡을 돌리신다고요?"
"그럼, 이사 왔으니 이제 잘 부탁한다고 떡이라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여기 성주신께서 노하지 않고 잘 봐주시지 않겠나 말일세."
"여기는 집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집을 담당하고 지키는 가택신을 왜 병원에서 찾으세요?
아니, 회장님은 지금 이사 오신 게 아니라 입원하신 건데요?
주치의는 터지려는 그런 반문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래도 내 남은 인생을 보낼 곳인 이사 온 거나 진배없지 않은가?
그럼 내 집이나 다름없는 거지. 물론 세입자 신세지만 아무렴 어떤가."
"남은 인생이라니요. 회장님께서는 건강히 회복되셔서 무사히 퇴원하실 겁니다."
"퇴원이라고!"
그 순간 왕세경의 안색이 사나워졌다.
전무 역시 매서운 눈빛으로 주치의를 노려보았고,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왜, 왜 갑자기 저러시지?'
"무사히 퇴원이라니, 어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는가! 자네가 의사라면 환자한테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되는 법일세!"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주치의는 놀라서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억울한 마음 같은 것은 일절 없었다.
병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왕세경 회장의 호통.
맨손으로 시작해서 안 해본 게 없으며, 지금도 안 하는 게 없는 10대 문어발 재벌 기업을 쌓아 올린 그의 위엄에, 그저 가슴이 쪼그라들었을 뿐이다.
"내 남은 생을 이 병실 침대에서 마치기로 했네. 그러니 행여라도 날 퇴원시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게.
알겠나?"
"예?"
"알겠느냐고 물었네!"
"하, 하지만……"
"어허, 앞으로 날 담당할 주치의라면 내가 퇴원하지 않도록, 병원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게 당연할 건데, 이렇게 우유부단해서야 어디 환자가 믿고 자기 몸을 맡길 수 있겠나?"
"아,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결국 주치의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고 고개를 연거푸 숙여야만 했다.
그제야 왕세경의 안색이 풀어졌다.
"교수인가?"
"네, 작년에 막 교수가 되었고, 몇 달 전 수영병원으로 이직했습니다."
"나중에 자네가 병원장까지 올라가서 학계를 완전히 은퇴할 때까지 응원하겠네."
주치의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아프시려고요?
'흉부과가 아니라 신경과나 정신과에서 케어해야 하는 환자인 거 아니야?'
"창식아."
"네, 형…… 회장님."
의료진이 보는 앞인지라 고창식 전 무는 얼른 칭호를 바꿔서 불렀다.
"병상이 800개가 넘는다는구나."
"알겠습니다. 넉넉하게 떡 챙기겠습니다."
"가족들 것도 같이 신경 써야 하는거 알지?"
"물론입니다."
"입원 환자들은 떡은 먹기 힘들 테니까 알아서 신경 쓰고, 그래도 네가 우리 중에서 가장 감각 있잖냐."
"네, 회장님."
며칠 후,
다수의 대형 트럭이 청담수영병원을 찾았다.
트럭에는 하나같이 세경그룹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왕세경을 향한 그룹 임직원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메시지도 박혀 있었다.
[회장님의 건강 회복과 조속한 퇴원을 기원합니다!]
[세경그룹 임직원 일동 올림]
VIP실 창문으로 내다본 왕세경은 뒷목을 잡았다.
"아니, 조속한 퇴원 기원이라니!
누굴 죽일 일 있나! 어휴, 내가 그렇다고 혼을 낼 수도 없고."
이 병원에 억지를 부려 입원하게 된 이유.
외부에 퍼뜨리지 않겠다고 단단히 약속을 했으니, 직원들을 혼낼 수도 없다.
직원들은 진심으로 조속한 퇴원을 바라고 저런 메시지를 넣은 것일 테니까.
고창식 전무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형님! 아아니! 회장님! 이사떡 다 준비됐습니다! 병원 측에 양해 구하고 이사떡 돌릴 때까지는 트럭들 주차해도 된답니다!"
트럭 대부분은 병원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한 채, 병원 밖의 도로에 주차돼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 가장 위층부터 돌자꾸나."
"회장님께서 직접 돌리시게요?"
"그럼, 내가 직접 돌려야지? 직원들 시키고 나는 멀뚱멀뚱, 성주신 노하시게 만들 일 있냐?"
"아, 그렇군요."
한쪽에서 차트를 작성 중이던 젊은 간호사는 병원을 지킬 만한 전통신 뭐가 있는지 찾아봐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복도로 나오자 여러 대의 카트가 왕세경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각 카트는 직원들이 손잡이를 잡고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도록 대기 중이었다.
특이한 것은 카트 아래에 바퀴가 아닌, 탱크처럼 무한궤도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런 카트라면 짐을 많이 신고도 쉽게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다.
왕세경은 가장 선두에 있는, 주인 없는 카트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는 피해라. 다른 환자와 가족, 병원 관계자들께 피해를 주면 안 된다."
"네, 회장님. 계단 이동도 가능한 전동식 무한궤도 카트라서 전혀 문제없습니다."
청담수영병원은 VIP실이라고 해서 부자가 입원해 있지 않다.
환자가 부담하는 입원료는 VIP실과 8인실 간에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VIP실 입원 우선순위 조건은 얼마나 중증인가, 얼마나 오래 입원하는가, 그리고 얼마나 뽑기 운이 좋은 가에 달렸다.
왕세경이 카트를 끌며 움직이자 세경그룹 직원들도 줄줄이 뒤를 따랐다.
왕세경은 바로 옆 VIP실부터 방문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요번에 옆병실로 이사 온 사람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VIP실은 1개의 병실과 응접실, 유족들이 쉴 수 있는 수면실 및 욕실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환자의 가족인 30대 중반의 남자는 일어나서 머리를 숙이 서도 속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저 나이에 VIP실에 입원하신 거면 증세가 정말 안 좋으신가 보구나.'
고령, 하지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
VIP실 이용 우대조건을 생각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치명적인 질환임이 틀림없으리라.
"아무래도 오랫동안 입원할 거 같아서, 병원 성주신의 가호라도 받을까 싶어서 이사떡 좀 돌리러 왔습니다."
"저런, 부디 건강하시길 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왕세경은 카트에서 떡 패키지를 꺼냈다.
패키지에는 떡, 환자를 위한 엘릭서드링크, 가족을 위한 다과류가 포장돼 있었다.
"요즘 엘릭서 드링크가 건강에 좋다고 하더군요. 이 병원에서도 식단으로 제공하지만 그래도 다다익선 아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왕세경은 환자와는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2, 3세나 되어 보일까 말까 한 아기 환자는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80이 넘은 왕세경이 잠든 아기 환자를 가만히 바라보자, 환자의 부친이 조용히 말했다.
"소아간암이에요."
"다른 병원에서는 죽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수영병원으로 오면서 조금씩 호전을 보이고 있어요.
암세포도 벌써 절반 이하로 줄었고요. 이대로면 희망을 가져도 될 거 같습니다."
"다 나았다 생각되더라도 퇴원하지 말고 가능한 오래 눌러 붙어 있으시구려. 병원에서 다 치료됐으니 이제 그만 퇴원하시라 해도 함부로 믿어선 안 됩니다."
"네?"
"경험자의 말이니까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보시구려."
"……??"
그리고 왕세경은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
그렇게 왕세경은 하루 종일 병실을 돌면서 이사떡을 돌렸다.
병상 수가 800개가 넘으니, 병실 개수만 6, 70개는 족히 넘을 것이다.
단순 계단으로 한 병실당 3분이 걸린다 치더라도 최대 210분은 넘게 걸린다.
게다가 정 없게 병실에 들어가서 '이사 왔소. 떡 드슈' 하고 이사떡패키지만 던지고 나갈 순 없잖은가.
뭐 때문에 입원했는지 사연도 듣고, 또 재벌 회장이라고 놀라서 반가워하는 반응도 겪어야 한다.
"회장님, 혹시 셀카 한 번 같이 찍어도 되나요?"
"얼마든지. 이웃사촌 간에 사진 같이 찍는 게 뭐가 대수겠나."
왕세경은 원래 그리 소탈한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매사에 엄격하고, 냉정한 편이다. 다만 사치는 즐기지 않고 자린고비 기질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임직원들은 평소에도 왕세경을 몹시 어려워하고 천상계를 대하듯이 바라보았다.
그런 왕세경에게,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어린 10대 여환자의 제안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절대 나도 이런 증손녀를 갖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다.
'우리 지현이가 뭐가 어때서! 이제만 서른 겨우 됐구먼.
같이 웃어주며 사진을 찍는데 그 당당한 코디네이터의 얼굴이 생각난다.
그때였다.
"아, 왕세경 환자분.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호랑이도 제 생각을 하면 온다더니, 놀랍게도 하 코디가 나타난 것이다.
왕세경은 몹시 반가운 기분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도도한 표정을 유지했다.
"떡 좀 돌리고 있었네. 기왕이면 성주신한테 잘 보여야 오래오래 이 병원에서 무탈할 거 아닌가."
같이 사진을 찍은 10대 여환자가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저, 회장님, 빨리 나으셔서 퇴원을 하시는 게 좋은 거 아니에요?"
"오래오래 건강하고 싶다는 말이란다. 아무튼 하 코디, 환자들과 의료상담하러 다니는 건가?"
"네, 비슷합니다. 의료 관련보다는 병원 생활에서 불편한 게 없는가를 주로 상담하지만요. 마침 오늘은 본 업도 일찍 끝났고 해서 들러봤습니다."
"본업이 따로 있었나?"
"네, 농사지어요."
"전혀 그런 이미지로는 안 봤는데.
세련된 서울 청년 느낌인데 농사라고?"
"농사는 본업이고 병원 일은 취미와 사회적 책무감으로 하는 겁니다."
"정말 부지런하고 건실한 청년이로군. 자네 청년은 내가 처음으로 봤네."
고창식 전무는 카트를 끄는 직원들에게 조용히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또 길어질 모양이다. 카트 끌고 가서 좀 쉬다 와라.'
병실 이동 시간이 하도 지연되다 보니까, 아예 카트는 2대만 따라다니고 있었다.
너무 많은 카트가 한꺼번에 오랫동안 다니면 의료진과 환자들 이동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대부분의 카트는 왕세경의 VIP실에 우려 넣은 채 대기 중이었다.
"어, 엘릭서 드링크도 사셨어요?"
"물론이지. 병마와 싸우는 환자와 간호에 지친 가족들을 위해서 엘릭서 드링크만큼 좋은 이사 음식이 어디 있겠나."
왕세경은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환자와 가족, 그리고 의료진과 직원들도 생각해서 내가 이사떡을 20,000인분을 마련했다네."
엘릭서 드링크만 2억 원어치를 샀다는 소리다.
"정말 많이 사셨군요."
"여기 병원에 사람이 좀 많아야지.
병원 사람만 16,000명 가까이 된다던데. 자네도 하나 받게."
"저는 엘릭서 드링크는 괜찮습니다."
"이거 몸에 좋아서 병원에서도 제공하는 거잖나. 사양 말고 자네도 먹게."
"정말 괜찮습니다. 이거 집에 가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요. 죽을 만큼 질려서 이제는 안 먹습니다."
"으응, 그런가?"
'엘릭서 원액을 먹을 때마다 겪는 고통 때문에 엘릭서 드링크는 아예 입에도 안 대는 것을, 왕세경이 알리가 없다.
"저는 그럼 다른 병실부터 돌겠습니다. 환자분도 이사떡 천천히 돌리세요."
"수고하시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헤어지자, 셀카 여고생 환자가 잔뜩 흥분해서 물었다.
"와, 역시 재벌 회장님이시라 그런지 병원 이사장님하고 친하시군요!"
"이사장님? 누가?"
"방금 저분이요! 하수영 이사장님!"
"뭐? 하 코디 저 친구가 여기 병원 이사장이라고? 설마 강남구의회하수영 의원?"
"수영치킨 회장님 맞아요."
"황비버섯라면 프라임컴퍼니 대주주."
"청담동 부동산 큰손이요."
"수영농장 주인이시잖아요."
왕세경은 손에 쥐고 있던 떡 패키지 한 개를 카트 안으로 툭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