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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갓-454화 (454/1,270)

프랜차이즈 갓 454화

115장 폭탄을 한 개 더 (1)

"아, 머슴이었군요."

하수영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듯하자 최우석이 피식거렸다.

"뭐야, 안 놀라나?"

"놀라야 합니까?"

"아니, 지금 잘나가는 10대 재벌회장이 한때 우리 집안 머슴이었다는데 반응이 너무 시원찮잖아. 보통은 크게 자지러지는데 말이야."

"세경그룹이 밑바닥에서 자수성가 했다는 건 저도 알죠. 머슴이었을 줄은 몰랐습니다만."

"우리 본가가 종로잖나. 조선시대부터 알아주는 양반집 가문이었지. 왕 회장은 3대를 걸쳐 우리 집안머슴이었다네. 6.25 피난 때도 우리 아버지가 왕 회장 가족은 모두 데리고 피난 가셨었지."

"전쟁통에도 수발을 드셨던 거군요. 착취 아닌가요?"

"착취라니! 그래도 우리 가족 따라 움직인 덕분에 왕 회장네 식구들이 그 전쟁통 와중에도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을 수 있었던 거야."

최우석은 가볍게 부채질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전쟁통에 왕 회장 부모가 모두 징용 가서 죽었지. 징용을 피할 수 없었거든. 그걸 가엾게 여긴 아버지께서 전쟁 끝나고 왕 회장을 독립시켜주셨어."

"그랬군요."

"밥벌이나 하고 살라고 작은 국밥집 하나 내주셨는데, 그리고 몇 년 후에 아버지도 돌아가셨지."

"그 이후로도 계속 교류를 하셨던 겁니까?"

"소식은 간간이 들으면서 살았는 데, 나중에 쫄딱 망해서 찾아왔더라고, 그때 내가 참 마음이 안 좋았어."

옛날 일을 추억하는 최우석의 눈빛이 불현듯 아련해진다.

"국밥집으로 시작해서 장사도 잘되고 이제 부자 되는 일만 남았는 데, 종로에서 활개 치던 건달패거리들이 왕 회장 가게에 눈독을 들인 게야."

"저런."

"힘없는 소시민이 뭘 하겠나. 아버지가 차려주신 가게를 건물째로 다 뺏기고 나앉았다고, 그래서 도와달라고 찾아왔었지."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자네라면 어떻게 도와줬겠나?"

"저야 그 조폭들을 족쳐서 뺏긴 것의 10배 이상으로 뜯어내서 돌려주죠. 그게 제 스타일이거든요."

그 말에 최우석이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난 그냥 이자 정도만 쳐서 다시 뺏어서 돌려줬네. 그 뒤로 종로에서 왕 회장을 아무도 안 건드리게 됐고, 이후부터는 자기 능력으로 승승장구하더군."

"큰 도움 주셨네요."

최우석의 입장에서는 별거 아닌 도움이겠지만, 왕세경 입장에서는 다시없을 큰 지원이었을 것이다.

부친은 가게를 차려주고, 그 아들은 빼앗긴 가게를 다시 되찾아서 돌려주었으니.

"뭐, 나도 그 이후 왕 회장 도움받은 게 있으니 퉁 쳤다고 치세나."

"도움을 받으셨습니까?"

"돌아가신 왕 회장 아버지하고 든 정도 있고 해서, 그 뒤로 왕 회장한데 간간이 투자했었거든. 근데 왕회장이 하는 것마다 잘돼서 나도 쏠쏠하게 벌었지. 어디 보자…… 왕회장이 불려준 것만 해도 이삼천억은 될 거야. 지금 가치로 보면."

"근데 그 돈 다 어디 갔습니까?"

저택 전 주인이 죽어서 다시 사고 싶다고 했을 때, 몇백억이 모자라서 쩔쩔매던 기억이 나서 물었다.

"대부분 장독대에 묻어놨으니까 현찰이 없는 거지. 요즘 누가 현찰을 쥐고 있나? 하루가 다르게 화폐인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는 판인데."

"정말 장독대에 넣어두신 건 아니죠?"

"이리저리 유가증권으로 묻어놨다네. 진짜 장독대에 숨겨놨을 리가 없잖은가. 근데 왕 회장, 어디가 아픈 건가?"

"환자 개인 정보라서 말씀은 못 드립니다. 이제 연락은 안 하시는가 보군요?"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한 10년 됐나? 그 친구도 이제 한 기업의 수장이니, 옛날에 머슴살이하던 집 주인 아들하고 연락하는 게 껄끄럽지 않겠나?"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 약속 하나는 했었다네. 나중에 죽을 때 되면 임종 인사 정도는 하자고.

물론 여건이 되면 말이야. 장례식만큼은 서로 꼭 품앗이하기로 했고."

"근데 장례식이 품앗이가 되나요?"

먼저 죽은 사람이 귀신이라도 되서 나중에 찾아가지 않는 한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

'이번 생에서 통찰안을 다시 얻을 줄은 몰랐네. 이게 좀 그립긴 했는데.'

하수영은 아버지 은하신목이 들었다가는 입에 거품을 물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통찰안, 사물이 품은 진실을 꿰뚫어보는 능력.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대상이 간직하고 있는 진실을 한눈에 알아보는 능력이다.

바로 무한의 전생 속에서 그가 지녔던 군주의 권능 중 하나였다.

그 권능 덕분에 그는 현명하고 정의로운 군주라는 칭송을 들을 수 있었다.

'지식의 보고에 마운트하는 거나, 진실을 꿰뚫어보는 거나. 인풋이 달라도 아웃풋은 비슷하니 대충 통찰안이라 치면 되는 거지.'

고도로 발달한 통찰안은 '주신의 지식 보고 접근권한'과 구분할 수 없다.

대충 이런 개념으로 퉁치고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통찰안은 편리하거든.'

'주신의 지식 보고 접근권한'은 어느새 그의 마음에서 통찰안이라고 개명된 지 오래다.

"요렇게 쉽게 잡아낼 수 있단 말이지."

하수영이 검토하던 구정서류 중에서 한 묶음을 쑥 집어 올렸다.

같이 서류를 검토하던 젊은 초선 구의원들이 의아해서 하수영을 바라보았다.

하수영을 열렬히 추종하는 초선의원 윤현수(30후반, 남)가 잽싸게 물었다.

"하 의원님, 무슨 일이십니까? 뭐라도 찾으셨습니까?"

"이거이거, 이 사업 승인 내역 말입니다."

"아, 네. 하수도 정비사업 승인 내 역이군요. 거기에서 문제점이라도 찾으신 겁니까?"

"이거 실질적인 사업주체자가 탁진패 사장이잖아요."

"네? 그런 이름은 없는데요?"

서류를 얼른 뒤져본 윤현수가 묻자 하수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지사장 내세워서 따낸 사업이니까 당연히 그 사람 이름은 없죠."

다른 초재선 의원들이 서둘러 검색했다.

"탁진패 사장이라고 검색하니까 여기 기사가 몇 개 나옵니다. 어? 이 사람!"

"3년 전에 강남에서 빌라를 300가구나 부실공사로 분양해 놓고 부도 내서 꼬리 잘라낸 그 사람이잖아요!! 피해자가 그렇게 많았는데 결국 벌금 1,000만 원으로 끝나고, 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도 없어서 피해자들은 배상도 못 받고."

그제야 윤현수를 비롯한 다른 의원들은 왜 하수영이 문제라고 지적했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근데 서류에는 그 사람 이름이 없는데, 어떻게 사업 실질 주체라는 것을 알아차리셨습니까?"

"여기 사업 낙찰자 박명기, 이 사람이 탁진패 사장 와이프의 고향 친구입니다. 조금만 파보면 금방 나올 겁니다. 그리 복잡하지도 않아요."

"그, 그렇습니까?"

"구청에서는 대체 뭘 했기에 이런 것도 못 잡아내고 턱 하니 승인을 내주는지, 에휴."

하수영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고, 윤현수는 핥을 듯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안 그래도 돈 많고 유능한 정치인이라서 평소에도 열렬히 추종하는 분인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감사건수를 떡하니 잡아낼 줄이야.

'하수영 의원님을 평생 따라다녀야 한다.'

윤현수뿐만이 아니라 더 큰 정치 꿈을 꾸는 의원들은 한결같은 마음이었다.

자신들보다 훨씬 어린, 조카뻘 그 이상인 하수영을 열렬히 따르겠노라고.

'혹시 알아? 10년 안에 여의도 국회에서 하수영계가 주류가 될지?'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하수영이 거대 양당으로부터 피곤할 정도로 받는 러브콜, 그리고 천문학적인 자산과 뛰어난 정무감각과 행정능력을 보면, 얼마든지 중앙정치의 거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통찰안이 일 처리 하는 데는 참 편해. 근데 너무 힘을 썼더니 좀 피곤하군.'

"하수영 의원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구의회 직원 한 명이 올라와서 하수영 앞에서 공손히 보고했다.

매일 맛있는 거 사주는 구의원이기에, 의회 직원들은 하수영 앞에서는 언제나 깍듯했다.

"황정호 의원님이십니다."

바로 하수영 영입에 공을 들이는 여당 4선 의원이었다.

"또요? 그분은 지치지도 않으시네."

하수영이 귀찮다는 듯이 반응하자 윤현수는 물론이고 다른 기초의원들의 심장이 오히려 벌렁거렸다.

소속당 중앙에서 기초의원 한 명을 삼고초려하려고 여기까지 내려오다니.

'아니, 삼고가 아니라 이미 삼십고는 넘지 않았나?'

자신들은 재선 시의원하고 밥 한번 먹는 것도 힘든데.

'하수영 의원님이 제발 우리 당에 들어오셨으면 좋겠다.'

이것은 윤현수 이하 여당 소속 구의원들의 생각이었고,

'안 돼! 하수영 의원님이 저 당에 들어가서는 안 돼!'

이것은 반대당 소속 구의원들의 생각이었다.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십시오, 의원님!"

초, 재선은 물론이고 3선 구의원들까지 마치 당대표를 배웅하듯이 벌떡 일어나서 하수영한테 인사했다.

***

"오랜만입니다, 하수영 의원님."

60이 다 되어가는 인자한 인상의 황정호 의원은 푸짐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하수영을 대했다.

"우리나라 가정집 식탁을 책임지시느라 불철주야 바쁘신 거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하수영 의원님이 아니었으면 국내 쌀 수급에 큰 차질을 겪을 뻔했습니다, 허허."

"농민으로서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 별거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꼭 우리 하수영 의원님한테 승낙을 받아야겠습니다. 거절은 거절하겠습니다. 당으로부터 단단히 격려를 받고 온 겁니다."

"저는 청담동을 벗어나서도 힘을 쓸 능력이 못 됩니다. 그릇이 작아서요."

"아이구, 우리 하수영 의원님이 그릇이 작다면 대한민국에서 정치할 사람 아~ 무도 없습니다!"

-하수영을 끌어들이는 당, 강남3구를 얻으리라.

여의도에 암암리에 퍼져 있는 신화같은 주문이다.

젊지, 유능하지, 돈도 많지, 게다가수십만이 넘는 농민들의 정신적 지주지.

여당, 야당, 군소야당을 가리지 않고 하수영을 영입하기 위한 눈치전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만, 다음에는 호락호락 일어서지 않을 겁니다. 각오하십시오."

"그 말씀이 벌써 몇 번째인지 아세요?"

"허허, 혹시 이 늙은이한테 뭐 궁금한 것은 없습니까? 여의도 실황이라던가요. 편히 물어보십시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수도권 영리병원 허용 문제는 어떻게 돼가고 있나요?"

"음……."

황정호 의원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말문을 열었다.

"서해병원에서 항암제 급여항목 지정으로 영리병원 전환을 꾀했다는 건 기억하실 겁니다."

"네, 잘 알죠. 우리 병원도 거기에 한발 걸쳤었으니까요."

"요즘 비급여 의료행위로 인한 수익은 병원 외부로 배당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중입니다."

"비급여 의료행위만? 부유한 사람들한테만큼은 돈 좀 벌 수 있게 해달라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비싼 사설의료수익만큼은 병원 투자자가 가져갈 수 있게 해달라는 거죠."

"뭐, 원래 목표를 무너뜨릴 땐 저항이 적은 것부터 하나둘씩 해나가는 거죠. 서해그룹이 좀 집요하긴 하네요."

"그래서 수영병원의 존재가 중요합니다. 영리병원법 통과를 막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하수영은 영리병원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서해그룹을 화제에 올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나가다가, 묻고 싶었던 질문을 슬쩍 끼워 넣었다.

"백두반도체 말입니다. 서해전자가 인수전에 뛰어든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아, 사실입니다. 서해전자에서 지금 공정라인 증설에 목을 매고 있어서요."

"100조 원짜리 신 공장도 열심히 올라가고 있지요."

"서해전자가 백두반도체를 인수하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도 올라가고 좋겠지요. 정부도 바라는 바입니다. 그런데 인수 가격을 너무 후려치는 바람에……."

"백두그룹도 참 답답하네요. 좀 싸게싸게 빨리 팔아버리지."

"허어, 그쪽에 투자라도 하셨습니까?"

"그냥 서해전자가 얼른 반도체 공정라인을 증설했으면 하는 마음이 커서 그렇습니다."

황정호는 하수영이 서해반도체에 돈을 조금 집어넣었겠거니, 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

신광룡 농협은행장은 갑작스러운 하수영의 연락을 반갑게 받았다가, 연락 내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두반도체 매각 관련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언제 뵐 수 있을까요?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데.

"언제든지 편한 시간을 말씀하십시오. 지금 당장도 가능합니다."

-그럼 지금 찾아뵙겠습니다.

하수영이 신광룡을 찾은 이유.

바로 농협은행이 백두반도체 최대 채권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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