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459화
116장 길들여진다는 것(3)
마이크론 CEO 너드 파킨은 당연히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카르본, 그게 무슨 말인가? 수십만 달러씩 증발하고 있다니?
"잘 들어요. 이럴 시간 없습니다. 내가 언제 회사에 손해를 끼친 적있나요?"
-없지.
"일단 그래픽 램 생산 중지부터 때 려요. 그다음에 이야기합시다. 날 믿고 어서 조치부터 취해요."
-알았네.
통화가 약 몇 분 동안 잠시 끊어졌다.
너드 파킨은 아마 공장에 그래픽램 생산 중지 지시를 명령하고 있을 것이다.
잠시 후 통화가 다시 이어졌다.
-자네 말대로 일단 그래픽 램은 생산을 멈추라고 했어. 모두 납득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따랐네.
"고맙습니다."
-별거 아닌 이유로 이런 요구를 한 거라면 회사가 얻는 손해가 너무 커. 부디 좋은 이유이기를 바라겠네.
"며칠 전에 서진파운드리에서 그래픽 램 50만 개를 생산해서 납품했잖습니까?"
-그랬지. 혹시 그거 때문인가? 안 그래도 우리도 자사 생산 물량을 더 줄이고, 위탁 생산을 좀 더 늘리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네. 서진파운드리 생산단가는 일단 싸니까.
직접 만드는 것보다 설계도 주고 만들어달라고 하는 게 훨씬 싸다.
경영자로서 당연히 위탁 물량을 늘이고 싶다.
다만 자체 공장은 유지해야 하니까, 얼마만큼의 물량을 얹어줘야 할지 저울질을 해봐야 한다. 이게 머리가 아프다.
"지금 대만 공장에서 50만 개 중에서 3만 개를 테스트했는데, 전부 빠짐없이 램오버 라인 제품 수준이 랍니다."
-……뭐?
순간 놀랐는지 너드 파킨의 목소리가 잠시 막혔다.
"한 개도 빠짐없이, 현재까지 테스트한 3만 개 전부! 오버클럭 라인으로 따로 묶어서 팔아도 되는 품질이 랍니다."
-한 개도 빠짐없이?
"네, 한 개도 빠짐없이. 3만 개 전부요!"
-우리가 설계도를 준 게 언제였지?
"며칠 안 됐죠. 그동안에 50만 개를 찍어냈습니다. 심지어 모두 최상등품이군요. 속도나 품질이나, 가격이나, 어느 것 하나도 빠지는 게 없습니다."
-시범공장만 가동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벌써 본 공장이 다 완성된 건가?
"시범공장으로만 그만큼 찍어낸 겁니다."
-그럴 수가…….
"미스터 정이 본인 입으로 그러더군요. 자기도 막상 제대로 생산해 보는 것은 처음이라 이렇게 줄줄이 나올 줄 몰랐다고요."
-시범라인이 이 정도면, 본 공장이 완공되면 대체 생산 능력이 얼마나 된다는 건가?
"적어도 우리 공장은 상대가 안 될 겁니다. 서진파운드리는 완전히 미쳤어요, 미쳤어."
-이러면 지금 위탁 생산 물량을 더 늘리는 게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물량 늘리는 게 지금 중요합니까? 라인을 독점해야죠!"
공정라인의 일부 또는 전부를 다른 회사가 이용하지 못하도록 독점을 걸어야 한다.
라인 독점이란.
'너희 공장,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우리만 쓸 거니까 우리가 안 쓰더라도 항상 비워두고 있어! 이건 우리 거야!'
라고 제한을 거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그 대신 다른 회사에 치여서 발만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일은 피할 수 있다.
"아시죠? 서진파운드리는 나노소프트와 수영레스토랑이 합심해서 키우는 업체입니다."
-물론 알지. 애초에 내가 자네에게 이 일을 맡기지 않았는가.
"나노소프트는 이미 충분히 라인 보장을 해놨을 겁니다. 남는 캐파를 가지고 여기저기 장사하는 거지요. 그리고 나노소프트가 우리만 소개시켜 줬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겠지.
처음에는 나노소프트가 엑스코트에 들어갈 그래픽 램 1,000만 개를 미끼로 서진파운드리를 밀어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다.
나노소프트는 서진파운드리의 성공을 처음부터 확신했고(당연히 카르본의 착각), 단지 반도체 업계에 화려하게 등장할 개막극을 연출했을 뿐이라고,
"800억 달러의 위약금을 자신 있게 내건 것부터가 이미 확신이 있다는 겁니다! 틀림없어요! 서진파운드리는 TSMC를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파운드리 업체가 될 겁니다!"
-라인 독점이 정말 중요하겠군. 일단 자네에게 전권을 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라인을 가능한 많이 확보해.
"알겠습니다."
-난 그동안 실탄을 마련하겠네. 라인을 많이 먹으려면 그만한 캐시가 필요하겠지.
마이크론은 아직 등기부 잉크도 안마른 회사의 생산라인을 독점하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
정서진은 시범공장을 가동하면서 하루하루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입자집합명령 장치의 효능이야 이미 알고 있어서 이제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사람은 원래 금방 적응하니까.
원료를 넣어주면 입자 단위에서 집합 명령을 내려 자기들끼리 알아서 질서 있게 결합해서 반도체 제품으로 변하는 것.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지 원리는 모르지만, 어쨌든 간에 멀쩡한 제품이 나오고 있으니 거기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프리덤 프로 버전과 로봇이 결합한, 100% 무인화 반도체 공장시스템은 그로서도 소름이 돋는 경이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뽑아낸다고? 벌써?"
일단 공장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시범공장이 무엇인가. 본 공장을 돌리기 전에 앞서 여러 가지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 등을 미리 테스트하는 목적으로 가동한 것이다.
그런데 시범공장은 완벽하게 돌아갔다.
로봇들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모든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했고, 생산의 효율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로봇은 지치지도 않고, 오래 일했다고 정신력이 흐트러지지도 않고, 고장이나 오류가 나지 않는 한 실수를 하지 않으므로, 프리덤은 완벽하게 공장을 관리하고 있었다.
시범공장은 어떤 사소한 문제도 없이 균일한 퀄리티와 속도로 제품을 뽑아냈다.
또한 입자집합명령 장치의 장점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불량품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도체를 구성할 원료의 입자들이 질서정연하게 자기가 위치해야 할 곳에서 안정적인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결합하니, 폐기해야 할 제품은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 반도체 공정라인 자체가 무척이나 간소화되었고, 생산하고 남은 찌꺼기를 버리는 일도 없었다.
이 모든 요소들이 결합하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니, 생산 속도가 정서진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던 것이다.
"시범공장이 이 정도인데, 만약 본 공장이 완공돼서 제대로 가동하면……."
정서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TSMC의 생산 능력 따위는 이미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서진파운드리 혼자서 전 세계가 사용할 모든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이 머릿속에 맴돌자, 자연히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은 그런 위대한 역사의 현장에 주연으로서 참여한 것이다.
'설계 따위! 반도체 설계 따위!'
한때 최고의 반도체 설계자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만, 이제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렸다.
최고, 최강의 파운드리업체 CEO로서 전 세계 전자시장을 호령하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
하수영의 반응은 여전히 평온했다.
마치 이까짓 것은 당연히 예상했다는 것처럼.
-그래도 보안은 지키셔야 합니다.
서해전자가 일찍 알아서 좋을 게 없어요.
"네, 알고 있습니다. 마이크론과의 계약에도 보안 유지 조항이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서해전자 매몰 비용이 80조 원이 넘었다고 하네요. 나날이 늘어가는 손해액을 보니 제 기분이 다 좋습니다.
"통장 잔고 늘어나시는 것보다 더 뿌듯하시겠습니다."
-당연하죠. 원래 내 돈이 불어나는 것보다 내가 싫은 놈 빚이 늘어나는 게 더 기분 좋은 겁니다. 전 아직 못돼먹어서요.
"아닙니다. 회장님처럼 인자하고 배포가 크신 분은 저는 여태껏 못봤습니다."
-그리고 아시죠? 파운드리로 돈버는 것은 부차적인 거예요. 진짜 목적은 서해전자가 신 반도체 공장건설로 손해를 입고 땅을 치게 만드는 겁니다.
"……네, 잊지 않고 있습니다."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가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책임질 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대로 가면 서진파운드리가 세계 최고의 반도체 생산기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정 박사님도 야심이 있으시겠죠. 최고가 되는 것은 좋아요. 저도 말리지 않고, 격려합니다. 그런데 최고를 넘어서서 '유일한'게 돼버리면 안 됩니다.
"어째서입니까?"
정서진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최고를 넘어선 유일한 존재, 얼마나 멋진가?
'설마 반독점법 때문에? 하지만 우리 공장은 미국도 아니고 한국에 있으니 크게 상관없을 텐데?'
전 세계 반도체 생산을 독점한다고 해서 한국 정부가 나서서 회사를 쪼개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격려를 하면 격려를 했겠지.
-은퇴를 못 하게 돼요.
"예?"
정서진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만큼 방금 한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입니다. 이제 늙어서, 이제 그만 쉬고 싶어서, 편히 쉬고 싶은데 은퇴를 못 해요.
일 중독자한테는 그런 삶도 나쁘지 않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원해서 계속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저는 반도체가 정말 좋습니다."
-압니다. 그래서 이름도 서진이잖아요.
"저기, 서진이라는 이름은 반도체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만."
-제가 아는, 반도체에 미친 과학자 중에 서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그래요.
"아아, 그랬군요."
정서진은 혹시 그 사람이 입자집합명령 장치라는 말도 안 되는 기술 개발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상상해 보세요. 먼 미래, 서진파 운드리가 전 세계 반도체 물량을 책임지고 있어요. 전자레인지에 들어가는 간단한 연산반도체 부품도 서 진파운드리가 없으면 생산할 수가 없어요. 그때 박사님의 나이는 95세입니다.
"……."
-여전히 서진파운드리의 CEO는 박사님이시죠. 박사님이 없으면 서진파운드리는 멈추게 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은퇴를 하실 수 있을 것 같나요?
"회장님이 다른 CEO를 선임하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때 가면 저도 호미질도 버거워하는 늙은 농민일 텐데, 굳은 머리와 굽은 허리로 전 세계 반도체 생산을 독점하는 공룡 기업의 차세대 CEO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나요?
"그럼 제가 적당한 CEO를 물색해서……."
-제가 정 박사님 말고 다른 사람을 어떻게 믿고 그런 큰 회사를 온전히 맡길 수 있나요?
정서진은 조금 감동했다.
그만큼 하수영이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은퇴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은퇴도 못 하는 처지가 되실 겁니다. 회사가 너무 거대해져 버리면 그렇게 돼요. 마치 외벌이 가장은 마음 놓고 다치지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최고인 것과 유일한 것의 차이점.
정서진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저는 마음을 굳힌 게 있습니다. 거느린 사람들이 쉬고 싶다면 편히 쉬게 해주자. 더 이상 은퇴를 윤허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부려먹는 것은 하지 말자, 라고요.
"그러시군요."
-부디 먼 훗날, 제가 정 박사님의 은퇴 요청을 기꺼운 마음으로 윤허…… 아니, 수락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수영은 차분하게 덧붙였다.
-얼마든지 최고가 되세요. 유일해 지지는 마세요. 반도체는 농사와 달라서 발 빼고 싶어도 나중에 발 못빼고, 늙은 몸뚱이 붙잡고 죽을 때까지 매달려야 해요.
정서진은 그 말이 마치 경험담처럼 생생하게 들려서, 속으로 픽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