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460화
117장 슬기로운 청강생활(1)
마이크론 대만 공장은 서진파운드리산 그래픽 램 50만 개 테스트를 모두 마쳤다.
불량품은 단 한 개도 없었다.
50만 개 전부가 램 오버클럭 전용 라인업으로 팔아야 될 최상등품들이었다.
그만큼 제품이 안정적으로 잘 뽑혀 나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마이크론 내부에서도 소수에 불과했다.
마이크론 경영진은 이 사실을 소문낼 마음이 전혀 없었다.
원래 좋은 것은 가급적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지 않은가.
물론 나노소프트가 이미 선점을 하긴 했지만(오해다), 그래도 불필요하게 경쟁자를 빨리 늘릴 필요는 없다.
"램 유효 클럭이 어느 정도까지 될 거 같나?"
"결국 그래픽 제조사인 엔도비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28 이상으로 설정해도 하프라이프하다가 뻗을 일은 없을 겁니다."
마이크론이 공급한 그래픽 램으로 그래픽카드를 만드는 것은 결국 엔도비.
램에 어느 정도의 성능 제한을 걸지는 최종적으로 엔도비 설계팀의 결정이다.
물론 엔도비는 안정적인 한도 내에서 가능한 높은 스펙으로 정규 클럭수치를 조정할 것이다.
그래야 소비자들한테 스펙 자랑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근데 엔도비 양아치 새끼들 하는 걸 보면, 아마 처음에는 23이나 24정도로 해서 내놓은 다음에, 세팅하고 디자인만 슬쩍 바꿔서 26 이상으로 설정하고 TI붙여서 내놓을 겁니다."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지."
최대 성능의 60%로 해서 먼저 제품을 내놓는다.
그 다음 같은 부품으로 디자인과 세팅만 바꿔서 80% 정도로 해서 모델명에 TI를 붙여서 내놓는다.
엔도비가 이런 식으로 이익을 극대화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마이크론은 서진파운드리산 그래픽램의 최대 퍼포먼스가 봉인된다는 것이 내심 아쉬웠다.
그때 너드 파킨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거 같은데."
"네?"
"우리가 설계한 GDDR6 메모리 말이야. 지금 우리는 우리 공장에서 나온 것을 표준으로 잡고, 서진파운 드리에서 나온 것을 오버클럭 라인으로 잡고 있지."
"네, 그렇죠."
"당연한 거 아닙니까?"
"사실은 그 반대가 아닐까?"
"……?"
다들 잠깐 동안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너드 파킨이 다시 말을 이었다.
"서진파운드리에서 나온 것이 표준이고, 우리 공장에서 나온 것들은 '언더클럭' 라인인 거지."
어느 쪽을 정상(표준)으로 잡느냐에 따라서, '오버와 언더'의 용어가 갈리게 된다.
너드 파킨의 말에 경영진들은 깊은 깨달음을 얻은 듯이 표정이 달라졌다.
"그렇네요! 사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서진파운드리가 오버 라인 제품만 뽑아내는 게 아니었어요! 우리 공장의 공정 능력이 좋지 않아서 언더클럭 제품만 우르르 쏟아져 나왔던 겁니다!"
"이론상 최대치, 이 말은 사실 잘못된 표현이었던 겁니다! 최대치값이 본래 성능이었고 대다수의 생산품들이 그에 미치지 못했던 겁니다!"
물론 모두가 그와 같은 의견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저기 이건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따지면 100미터 달리기를 9초대로 끊는 게 표준이고, 10초 이상은 죄다 표준 미만 불량이라고 쳐야 하는 겁니까?"
"공정라인에서 생산된 제품의 대다수가 안정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는 수치가 바로 표준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평균을 정상으로 볼 것이냐, 최대치를 정상으로 볼 것이냐.
별안간 경영진은 그런 논쟁에 휘말렸다.
하지만 너드 파킨은 눈썹 하나 꿈 쩍하지 않고 논쟁에 쐐기를 박았다.
"50만 개나 되는 램들이 이론상 최대치 성능을 가뿐하게 내고 있어.
불량 하나 없이 말이야."
"……"
"우리가 표준이고, 서진파운드리가 특출난 건가? 아니면 서진파운드리가 표준이고, 우리가 못난 것인가?"
서진파운드리는 폐기품 없이 50만 개를 만들었고, 그 전부가 최대치 성능을 낸다.
마이크론 공장은 50만 개를 찍어내면 그중 최대치 성능에 근접하는 것은 1만 개가 될까 말까 한다.(폐기품은 별도) 그럼 어느 쪽이 표준일까?
"난 아무리 생각해도 서진파운드리산이 표준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
"사장님, 서진파운드리산을 오버성능으로 포장하면 우리 공장산과 병행해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 진파운드리산을 표준성능으로 잡으면 우리 공장산은 표준 미달, 불량품이 됩니다."
"결국 회사 경영 악화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입니다."
프레임을 어떻게 잡느냐의 문제다.
표준성능과 오버성능으로 잡을 것이냐, 언더성능과 표준성능으로 잡을 것이냐.
"카르본 이사가 그래픽 램 생산을 당장 중지하라고 했지. 나도 일단 긴급 중지 지시를 내렸고."
"……."
"오늘은 그에 대한 후속 비전을 논의하는 자리인데, 좀 더 미래지향적인 의견을 낼 수는 없나?"
경영진은 너드 파킨이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슬슬 눈치채기 시작했다.
"이번에 라인을 독점한다고 해서, 다음 제품에서는 우리가 더 우세할 거라는 보장이 있나?"
10조 원을 쏟아부어 세운 파운드리업체고, 시범공장부터 이미 될성부른 떡잎을 보였다.
"지금은 우리 공장 가동률을 걱정할 때가 아닐세. 서진파운드리산을 회사 표준으로 잡는 한이 있더라도, 제품 경쟁력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야."
같은 설계도를 가지고 극한의 최상품만 뽑아내는 외주 공장과 불균등한 제품들을 뽑아내는 자사 공장.
"자체 생산력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거기에 경도돼서 정작 시장 경쟁력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네."
너드 파킨은 차분히 임원들을 둘러보고 쐐기를 박았다.
"서진파운드리산 성능을 우리 제품의 표준성능 수치로 공표하세나."
자사 공장산 제품들이 표준 미달의 떨이품으로 전락하게 되더라도, 시장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아예 공장을 버리는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너드 파킨은 이미 더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
정서진은 라인 전용을 하고 싶다는 마이크론의 요청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아직 시범공장 밖에 없는 상황인데 라인 전용 계약은 너무 이른 거 같습니다. 본공장 가동이 들어가면 그때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귀사의 생산 능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아직 본공장준공까지 시간이 남아 있지만, 그 전에 미리 생산라인 일부를 전용하고 싶습니다."
"전용 계약을 하려면 당연히 주문물량을 전액 선금으로 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주문 규모도 일정 이상 되어야 하고요."
카르본은 잠시 호흡을 골랐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 마이크론은 향후 5년간 모든 램의 생산을 귀사에 위탁하기로 했습니다."
정서진은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생각보다 파격적인 제안에 기쁜 마음이 들었지만, 얼른 감정을 억눌렀다.
"라인 전용 대가로 50억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50억 달러어치 주문을 할 거다.
돈은 먼저 줄 테니, 언제든지 우리 주문을 소화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한 전용 라인은 상시 비워둬라.
그런 의미가 담긴 제안이다.
"50억 달러면 마이크론의 1분기 매출도 안 되는데요. 그 정도로 5년이나 라인을 차지하려는 겁니까?"
"5년 생산 위탁 계획은 전용과는 별개의 계획입니다. 전용 기간은 1년으로 잡았으면 합니다."
"1년 안에 50억 물량 주문을 소화한다는 거군요."
"네, 1년 안에 50억을 전부 주문 못 할 시에는 우리를 위한 라인을 비워놓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돈을 떼먹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선금을 받았으니 생산은 해줘야 한다.
다만 1년 후에는 '다른 회사 선주문을 먼저 처리해야 돼서, 이제 너희는 좀 기다려야겠다' 라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보던 정서진을 끄덕여보았다.
"좋습니다."
50억 달러면 공장 전부가 아닌, 일부 라인 몇 개만 따로 떼어줘도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적인 반도체회사 마이크론이 50억을 밀어 넣으면서까지 라인 전용을 원했다는 사실.
서진파운드리의 공정능력에 대한 신뢰도를 올려줄 중요한 보증수표가 된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우리 계약은 당분간 비밀로 했으면 합니다. 적어도 본공장이 가동되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 정도야 문제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도 원하는 바입니다."
마이크론은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 전용 라인을 좀 더 늘릴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비밀로 하자는 제안은 마이크론에도 이익이었다.
다른 경쟁자들이 달려드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테니.
***
라인 전용 계약을 체결한 마이크론은 즉시 모든 D램의 생산을 중단했다.
앞으로 회사가 설계한 모든 D램은 서진파운드리에 맡기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 것이다.
D램 외의 SSD, MCP, 낸드 플래시, 노어 플래시 등의 제품도 서진 파운드리에 맡기기로 했다.
다만 자사 공장 생산분은 그대로 두고, TSMC에 위탁한 물량만 서진 파운드리에 맡기기로 했다.
물론 D램 외의 반도체 생산 능력이 어떤지는 검증을 거치고 난 뒤이겠지만, 마이크론은 서진파운드리에 대한 소문을 조심스럽게 수집했고, 아직 다른 반도체업체들은 서진파운드리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진파운드리가 아직 적극적으로 영업을 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음, 그 정도의 경쟁력이 있으니 어차피 바이어들이 돈 싸들고 알아서 찾아오게 될 거야. TSMC는 안됐지만 이제 그 아성에서 물러날 준비를 해야겠군."
"회사 잉여금으로 그 부분에 대한 증권 투자도 병행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반도체 시장 재편에 투자한다? 좋은 생각이야. 파운드리 업계가 망하는 것에 판돈을 걸면 간단하겠군."
"서진파운드리에 투자를 하면 좋겠지만, 그건 어렵겠지요."
"자본금 100억 달러를 가지고 시작하는 유한회사를? 시장을 제패할 자신이 있는데 뭐하러 외부 투자를 유치하겠나?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
그렇게 서진파운드리는 본공장이 완성되기도 전에 그래픽 램 1,000만 개 생산분과 추가 매출 50억 달러를 달성했다.
CEO 자리에 오르고 처음으로 올린 천문학적인 매출에 정서진은 스스로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가만, 50억 달러면 여기서 내 몫은 얼마나 되지?"
정서진의 연봉은 기본급 100억에 회사 순수익의 5%.
50억 달러어치 주문에서 원가 등 경비를 대충 30%로 잡으면 35억달러가 수익이 될까?
'35억 달러라고 치면 1.75억 달러!'
순식간에 기본급의 17.5배가 되는 인센티브가 들어온다.
아직 지급이 된 돈은 아니지만, 정서진은 벌써부터 그 돈이 들어온 것처럼 흥분되었다.
"반드시 최고의 반도체파운드리가 돼서 서해전자를 팹리스로 만들어버려야겠어."
서해전자가 어쩔 수 없이 모든 반도체 생산공장을 정리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100% 설계에만 올인하는 미래.
그러면서 자사의 모든 반도체 제품은 서진파운드리에 굽실거리면서 생산을 위탁하는 것.
하수영에게 보은하기 위한 정서진의 발걸음은 마이크론을 딛고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
오늘도 한옥의 기운을 찾아 옆집하수영 사택을 찾은 최우석은 차고 문이 열리는 걸 보았다.
"우리 하 의원이 어디 외출하는가 보구먼."
당연히 캠핑카가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의외의 차량이 차고에서 나왔다.
"저게 뭐지? 하 의원 차는 아닌 거 같은데?"
하수영이 캠핑카를 타고 다니는 이유는 교통사고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티타늄 합금으로 된 대형 캠핑카는 화물차가 들이박아도 깔리거나 납작해질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차고에서 나온 차량은 흔히 볼 수 있는, 조금 큼지막한 대형 세단이었다.
"처음 보는 차인데? 어디 브랜드지?"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단조로운 검은 세단에는 엠블럼이나 브랜드를 식별할 만한 마크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차량이 최우석 옆으로 다가와 섰다.
운전석의 차창이 밑으로 내려가며 하수영의 얼굴이 나타났다.
"부의장님, 오셨습니까?"
"이거 하 의원 차였어? 이런 차도 있었나? 돈도 많으면서 뭐 이렇게 심심하고 흔해 빠진 차를 타고 다녀?"
"아, 이거 개별 주문 차량입니다. 캠핑카 만든 독일사에 주문해서 받았어요."
"엠블럼도 없고, 심심하게 생겼는데?"
"일부러 그렇게 주문한 거죠. 캠핑카는 등교하기에는 너무 눈에 띄게든요."
"등교? 그게 무슨 말인가?"
"저 대학 가려고요. 농대요."
"갑자기 농대는 왜?"
"그래도 폼 나게 농사지으려면 노벨상까진 아니어도, 박사 학위 정도는 있어야 할 거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