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499화
126장 유통과 농사 사이 (1)
이사회가 열리기 얼마 전 일이다.
황태진 부회장은 유통 이사들 중 몇 명을 은밀하게 불러 모았다.
그들은 본래 자신을 따랐으나, 이번에 부친의 마음 전환으로 황세라에 붙은 이들이었다.
처음 그들은 거절했으나, 황태진은 간곡히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내 입장을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그럼 나도 더 이상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평소 오만했던 황태진 부회장의 그런 태도가 이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제 와서 달라질 것은 없지만, 그래도 한 번 말이나 들어볼까?
그간 든 정도 있는데 말이야.
이런 마음으로 이사들은 황태진이 마련한 회식 자리에 모였다.
그룹과 무관한 호텔 스위트룸을 빌려서 만든 모임이었기에 보안을 유지하기에도 좋았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부터 당황했다.
'창범식 이사가 없어?'
당연히 이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자신들 그룹에서 리더 역할을 맡은 창범식 이사가 없었던 것이다.
놀라운 점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또각또각, 하이힐 굽소리와 함께 등장한 인물은 바로 젊고 늘씬한 미인이었다.
바로 프라임컴퍼니의 부사장, 정서희.
황세라와 손을 잡고 지금의 이 공주의 난을 함께 만든 인물.
'정서희 부사장이 왜 여기에?'
그들은 패닉에 빠졌다.
정서희 부사장이 처음부터 황태진의 편이었단 말인가?
황세라와 손을 잡는 척하면서 비수를 들이댄 것인가?
온갖 상상이 그들의 머리를 휘감았다.
"긴말 않겠습니다."
황태진 부회장은 표정이 싹 바뀐채, 차분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가진 마트 지분의 절반을 수영마트에 이미 양도했습니다. 이번 이사회가 끝나는 대로 바로 공시를 할 겁니다. 그 전까지는 물론 비밀입니다."
"……!"
이사들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마트 지분의 절반을 이미 팔아넘겼다니, 그것도 수영마트에.
애초에 황세라가 일으킨 공주의 난 자체가 수영마트와 손을 잡는다는 전제하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영마트는 이미 황태진의 손을 들어준 상황.
몇몇 이사들은 속으로 탄식을 터뜨렸다.
'판은 이미 기울었구나!'
'다 끝났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아버지의 명을 따랐을 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의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
"이번 이사회에서 무조건 나를 지지하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럼 여러분들이 등을 돌린 것은 영원히 눈감겠습니다."
이사들은 더 이상 침통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상황은 이미 끝났다.
여기서 황세라의 편을 들어봤자 판만 더 지저분해질 뿐이다.
애초에 황세라가 마트에 욕심을 낼수 있었던 것 자체가 수영마트를 끌어들였기 때문인데.
그 수영마트가 황태진의 손을 들어주었으니.
"부회장님…… 외람되지만 질문이 있습니다."
"질문하세요. 어서."
황태진 부회장은 평소보다 더 강한 어조로, 마치 딱딱한 명령을 내리듯이 허락했다.
"혹시 계열 분리까지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럼 나를 회사에서 쫓아내려고 한 가족들과 계속 함께 가야 합니까?"
그걸 말이라고 묻냐는 듯한 냉랭한 표정에, 이사들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부회장님을 따르겠습니다."
"죄송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무조건 부회장님을 따르겠습니다."
그제야 황태진은 보일 듯 말 듯한 옅은 미소를 보였다.
"아버지가 깔아놓은 시선도 있고 하니, 오늘은 이만 다들 들어가십시다. 모든 게 끝난 뒤에 그때 기분좋게 축배를 들죠."
"예, 부회장님!"
이것이, 황태진을 쫓아내려는 이사회가 열리기 전에 있었던 은밀한 화합이었다.
***
이사회에서 벌어진 반란에 황세라는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
"부결이라고? 그게 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쪼르르 달려온 창범식 이사는 당황함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황세라 앞에서 쩔쩔 매기만 했다.
"어떻게 오빠가 이사들을 자기편으로 돌릴 수 있었죠? 그분들은 아버지 말을 절대적으로 들을 텐데?"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등을 돌린 사람을 찾아가서 너 왜 배신했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리고 유통이 가진 마트 지분은 왜 수영마트에 넘기기로 의결한 건가요?"
"……."
"오빠가 수영마트와 손을 잡은 건가요? 대체 언제부터?"
황태진이 수영마트와 손을 잡았다면 이미 게임은 끝이다.
황태진의 뉴월드마트 지분 40%.
수영마트의 뉴월드마트 지분 31%.
합치면 뉴월드마트 지분이 71%가 된다.
이제 뉴월드유통은 마트 경영에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대주주 자격으로 감사나 자료 열람등 자잘한 방해나 할 수 있을 뿐.
그때였다.
"사장님! 마트 지분 공시 변경이 떴습니다!"
"공시 변경? 또 뭔가요?"
"대주주 지분 이동이 있었습니다!! 황태진 부회장님이 자기 지분 40%중 20%를 팔았습니다!""
"지분 20%를? 설마 수영마트에 팔았어요?"
황세라는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네, 맞습니다! 수영마트입니다!"
"……."
"이제 수영마트가 뉴월드마트 지분 51%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황세라와 창범식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입을 다물었다.
충격이 머리를 덮쳤고, 어지러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황태진이 수영마트에 자기 지분까지 팔았다니.
"이러면…… 이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
"창범식 이사님, 말씀을 좀 해보세요.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아니, 아니지."
황세라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짜증을 담아서 말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거냐고요. 오빠가 수영마트와 손을 잡은 수준이 아니잖아요, 지금."
창범식은 얼이 빠져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메아리만 울렸다.
'황태진 부회장님이 마트를 팔았다…….'
'황태진 부회장님이 마트를 팔았다…….'
'황태진 부회장님이 마트를 팔았다…….'
내가 가지지 못할 바에는, 여동생에게도 주지 않겠다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황희철 회장이 누구보다 가장 크게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딸을 밀어주려던 게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회장님이 잘못 판단하신 것은 아니었다.
마트를 살리기 위해서 수영마트와 손을 잡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들을 대신해서 나선 딸이 기특했고, 재질을 더 좋게 보게 되었다.
그래서 딸을 밀어주었다.
그런데 아들이 가족을 배반하고, 아예 마트를 외부인한테 팔아버릴 줄이야.
"이제 마트는 우리 그룹 품을 떠난 거죠?"
지분 51%가 수영마트에 넘어갔으니.
이름만 뉴월드마트일 뿐, 사실상 수영마트의 지점으로 전환된 것이다.
***
황희철 회장실에서는 쩌렁쩌렁한 노성과 사무실 집기가 죄다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황태진 부회장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원래 황희철 회장 일가는 3대가 모여 산다. 분가는 어림도 없다.
딸 역시 결혼 전까지는 함께 살아야 한다.
황태진은 아내에게 연락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올 준비를 하라고 시켰다.
"여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질문은 나중에 해. 됐으니까 중요한 것만 챙겨서 얼른 나와.
"하, 하지만……."
-다시 그 집에 들어갈 일이 없다 생각하고, 중요한 것만 챙겨서 얼른 나와. 어머니, 아버지 눈치 볼 것 전혀 없어.
"당신,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예요?"
-의절당한 거나 마찬가지 신세야. 어서 움직여! 아버지 돌아오시면 눈치 보여서 신발이나 제대로 신을 수 있을 것 같아?
"여보."
-나도 지금 거기 가고 있으니까 서둘러!
황태진의 아내, 박예은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유가증권, 인감, 서류 등 중요한 물품을 챙겼다.
얼마 후 남편 황태진이 본가에 들어왔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 건장한 남자 직원들을 다수 데리고 들어왔다.
설마 행패를 부리려는 건 줄 알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서둘러. 어서 짐 챙겨라."
"예! 부회장님!"
그렇게 급히 전쟁 피난이라도 가듯이 짐을 챙긴 뒤, 황태진은 집을 나섰다.
출타 중이었다가 들어오던 모친이 그 광경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얘들아. 너희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니? 무슨 야반도주라도 해?"
"밤은 아니니까 야반도주는 아닙니다. 죄송하게 됐어요, 어머니."
황태진은 모친 앞에서 고개를 꾸벅숙였다.
모친은 아무 잘못이 없다. 애초에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말년에 편히 쇼핑과 문화생활을 즐기면서 늙으셔야 할 분한테 스트레스를 줘야 하는 불효가 죄송했을뿐.
"어머어머! 아버지가 알면 경을 치실 거야! 어서 다시 들어가! 내가 모른 체해 줄 테니까."
짐을 바리바리 싼 걸 보고 모친이 놀라서 호들갑을 떨었다.
박예은은 시모의 눈치를 봤고, 황태진은 당당하게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오늘부로 집 나가요. 아마 다시는 돌아올 일 없을 거예요."
"태진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나중에 아버지하고 세라한테 들으세요."
"뭐, 뭐뭐?"
그 말에 순간 모친은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도 회사 등 유산이 관련된 일이리라.
"가자."
"네."
황태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가를 떠났다.
***
황세라는 정서희와 마주앉아 있었다.
그녀를 대하는 황세라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정서희만을 위해서 백화점도 열어주고, 에르메스 백도 사줬다.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렇게 배신을 때릴 줄은 몰랐다.
"언제부터였니? 설마 처음부터였어?"
"그건 아니에요."
"하. 제대로 등에 칼을 찔린 기분이야."
"미안하게 생각해요, 언니."
"그럼 말해봐. 대체 언제부터였니?"
"적어도 이사진을 포섭할 때까지는 언니 편이었어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지만, 정서희의 태도는 상당히 느긋했다.
이런 것은 전혀 압박이 아니라는 것처럼.
"솔직히 언니 책임도 있어요. 언니가 약속한 지분은 9%였잖아요. 겨우 9%."
"너……."
"9%의 지분을 가진 백기사 동업자, 51%의 지분을 가진 오너.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저울질을 할 필요도 없잖아요?"
황세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었어도 정서희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비즈니스에서 백기사가 흑기사가 되고, 흑기사가 백기사가 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
정서희는 좀 더 자기 회사를 위해 이익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뿐이다.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사기를 친 것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구두계약을 위반한 것을 들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아무 의미 없다.
"설마 네가 오빠한테 가서 개인 지분과 유통이 쥔 지분을 넘기면, 그래서 수영마트를 51%의 오너로 만들어주면 밀어주겠다고 회유한 거야?"
"그건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
"근데 지금 생각하면 저한테는 그게 더 좋은 선택일 수도 있었겠네요."
황세라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순간, 정서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잖아요. 가정일 뿐이에요. 그러니 그 이야기는 그만해요."
"좋아. 어쨌든 이제 나하고는 연을 끊겠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지? 그럼 머쉬룸 서비스도 이제 철수하는 거야?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아?"
백화점 VVIP를 대상으로 하는 골는 트러플 제공 서비스 때문에라도, 황세라는 정서희한테 애원이라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에이, 비즈니스에서 이런 건 다반사인데 뭘 이 정도 가지고 연을 끊니 마니 해요?"
"내가 준 에르메스 백하고, 할인해 준 것들 다 돌려줘. 그거라도 받아야 분이 풀리겠어."
물론 진담은 아니었다. 속이 상해서 하는 투정일 뿐.
"그보다 더 좋은 것을 드릴게요. 마트 부사장 자리는 어때요?"
"마트 부사장?"
그제야 황세라의 눈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마트 사장은 박태규 전무님이 되실 거예요. 황태진 부회장님의 오른팔이죠."
"부사장은 뭐야?"
"원래 언니가 뉴월드유통사장으로 생각했던 분, 그분을 마트 부사장으로 앉혀드릴게요. 그럼 언니 입장에서는 경영에 어느 정도 참견할 수 있지 않아요?"
"……병 주고 약 주는 거구나."
"우리도 감시꾼은 필요해서요. 원치 않으세요?"
마트는 이미 뉴월드그룹을 떠났다.
이제는 남의 회사나 마찬가지.
하지만 정서희의 제안을 거절할 순없었다.
뉴월드마트는 모든 백화점에 입주해 있었고, 당장 입주 계약이 끝나면 백화점으로서 타격이 크기 때문이다.
그걸 막고, 또 백화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라도, 마트 부사장 자리는 받아들여야 했다.
아니, 이제는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할 판이었다.
"……고마워."
"그럼 백은 안 돌려드려도 되죠?"
"하나 더, 아니, 세 개라도 사줄게. 카탈로그에서 골라서 가져오기만 해."
황세라가 드디어 현실을 받아들이고 타협을 했다.
그제야 정서희는 준비했던 진짜 선물을 꺼냈다.
"언니, 회사에 돈 좀 있어요?"
"돈은 갑자기 왜……."
"아직 라테마트가 남아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