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랜차이즈 갓-616화 (616/1,270)

프랜차이즈 갓 616화

153장 맨 프롬 콜롬비아 (7)

제작발표회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 첫날부터 최석만 감독은 하수영의 등장씬부터 몰아 찍었다.

다른 촬영장이었으면 주연 배우가 화를 덜컥 내며 드러누울 일.

하지만 맨 프롬 콜롬비아 촬영장에서는 누구도 이견이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S#12. 김주환 청담동 안가(활주로 필수)

한강을 따라 깔린 활주로에 걸프스트림 전용기가 착지한다.

정지한 전용기에서 마약상 김주환내리고, 칼 루빈스가 서둘러 달려와서 에스코트, 수십 명의 부하 경호원들이 인간 방벽처럼 에워싼다.

김주환   : 클레임 들어왔다고?

칼 루빈스 : 네, 자그마치 80억 원어치입니다. 손실이 큽니다.

김주환   : 내가 고작 그런 푼돈 때문에 이 시간에 서울을…… 컷! 죄송합니다. 다시 갈게요.

김주환에서 하수영으로 돌아온 그가 스스로 것을 외치며 촬영을 끊었다.

숨을 죽이며 지켜보던 스태프들이 여기저기서 아쉬운 신음을 뱉었다.

"으…… 또야?"

"아, 분위기 정말 좋았는데, 표정 눈빛 장난 아니었다고."

"섬뜩해서 좋았는데 또 저기서 애드립이 튀어나오시네."

"진짜 아쉽다. 벌써 8번째지?"

이미 8번째 NG.

그것도 같은 장면에서 연달아 낸.

다른 준조연이 그랬다면 벌써부터 촬영장이 험악해지고 난리 났을 것이다.

감독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카메라 감독은 연신 담배를 찾았겠고, 스태프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위기 속에서 전전긍긍했으리라.

그리고 주연 배우들은 자기 짜증을 전가할 희생양을 찾았을 테고.

하지만 촬영장 분위기는 밝은 편이었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제가 자꾸 저도 모르게 실수를 내네요."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원래 연기에 몰입하다 보면 애드립을 하고 그러는 겁니다."

"애드립이 아니잖아요. 연기 몰입이 자꾸만 깨져서 헛소리가 튀어나오는 건데."

"몰입을 못 하시다니요. 분위기 장난 아니었습니다. 진짜 빈말 아닙니다. 카메라 감독, 그렇지?"

카메라 감독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 호응했다.

"그럼요! 분위기 최고였습니다. 진짜 마약상다운 분위기가 철철 흘렀어요."

"하수영 배우님, 정말 마약상 그 자체였어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하수영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머리를 북북 긁어댔다.

일이 잘 안 풀려서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최석만 감독이 얼른 분위기를 수습했다.

"자자! 잠깐 휴식 타임 갖고 갑시다! 지금부터 20분간 휴식!"

"20분간 휴식!"

"20분간 휴식이랍니다!"

다들 장비를 살피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부 스태프는 누워서 책으로 얼굴을 덮은 채로 쪽잠을 청하기도 했다.

출연진과 스태프가 싶다고 해서, 메가폰까지 쉴 수는 없는 법.

최석만 감독은 카메라 감독, 연출, 대본 작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에 들어갔다.

드라마와 달리 영화 촬영장에서는 대본 작가가 올 일이 없지만, 이번 촬영은 다른 영화와 달리 특별했다.

"하수영 배우님, 연기는 정말 좋은데 말이야."

"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눈빛, 분위기 연기가 장난 아니었어요. 역시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한 사람이라서 뭔가 카리스마가 있나 봅니다."

화면에 비치는 모습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평소 자신들이 봤던 하수영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랐으니까.

배우들은 슛 사인이 떨어지는 순간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재능과 연기력이 받쳐줄수록 그 간극의 차이가 엄청나다. 또한 스위치를 끄면 본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재빠르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배우 중에는 연기가 아니라, 정말 본인 그 자체인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어."

"정말 하수영 배우님은 콜롬비아에서 마약 만들어 호의호식하다가 온 사람 같았습니다."

"전편 씬에서는 진짜 기가 막히게, 물 흐르듯이 한 번에 이어갔는데."

"그런 게 바로 메소드 연기라는 거겠죠? 근데 카메라 꺼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이 딱 원래대로 돌아오는 게, 어휴."

"진짜 이번에는 왜 자꾸 NG가 나는 걸까요? 롱테이크도 아니고 훨씬 짧은데."

하수영의 촬영은 이것이 두 번째였다.

물론 영화상으로는 이번이 첫 등장씬이다.

촬영장 사정상 뒤에 나올 장면을 먼저 찍었고, 이번에는 첫 등장씬을 찍는 것이다.

아까 롱테이크로 찍은 장면은 단 한 번의 NG 없이, 정말 최고의 장면이 나왔었다.

그래서 출연자들은 물론이고 스태프들도 일제히 하수영의 연기력에 경악했었다.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준조연이라고 다들 호들갑을 떨었으니까.

"대체 이유가 뭐지? 뭘까? 끄응……."

원래 대사는 이렇다.

김주환   : 클레임 들어왔다고?

칼 루빈스 : 네, 자그마치 80억 원어치입니다. 손실이 큽니다.

김주환   : 내가 언제까지 일일이 뒤를 봐줘야 하나?

"이 쉬운 대사를 왜 자꾸만 틀리시는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끄응……."

감독, 카메라 감독, 연출, 작가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있을 때, 하수영이 다가왔다.

"저, 감독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지금 많이 답답하시죠?"

"아니아니!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수영 배우님 연기는 아무런,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바로 저희죠! 저희가 제대로 연기를 못 끌어내기 때문에 자꾸 애드립 실수가 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하수영배우님 연기는 최고입니다! 아까 첫 롱테이크 때 확실히 느꼈고, 모두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수영은 그런 칭찬이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자꾸만 몰입이 깨지네요."

"혹시 몰입이 깨지시는 이유라도……?"

"어디 컨디션 안 좋은 거라면 오늘 촬영은 중지해도 됩니다."

촬영을 중지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물주는 바로 눈앞의 신인배우다.

값비싼 아이맥스 70m 카메라 여러 대를 턱턱 사준.

심지어 출연자와 스태프 식사, 디저트까지 책임지고 있어서, 출연자들은 밥차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원래 눈치 봐서 신인 배우들이 밥차 같은 걸 보내고 그러는데, 지금 촬영장에서는 일절 없었다.

늘 조공으로 밥차 같은 걸 보내던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작자 본업이 프랜차이즈 요식업인데, 누가 밥차를 보낼 생각을 품겠는가.

최고급 참치에 값비싼 고급 라면에 르주블랑 호텔 출장 뷔페에…….

밥차를 보내봤자 초라하고 비교만 된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감독님과 작가님께는 죄송하지만, 대사를 조금 수정해야겠어요."

"네? 대사를 수정하자고요?"

모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보통 준조연이 대사를 수정하자고 하면 버럭댈 일이지만, 하수영은 상황이 다르다.

그럴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분명히, 틀림없이, 반드시, 결코 있으니까 저러는 것이리라.

"열심히 몰입하고 있는데, 대사 때문에 자꾸만 집중이 깨지네요. 크게 고칠 필요는 없고 뉘앙스 정도만 살짝 고치면 될 거 같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여기 이 부분을 이렇게요."

(수정 전)

칼 루빈스 : 네, 자그마치 80억 원어치입니다. 손실이 큽니다.

(수정 후)

칼 루빈스 : 네, 80억입니다. 손실이 큽니다.

'……?'

넷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글자 수가 줄어들고 뉘앙스가 아주 살짝 달라지긴 했지만, 이게 몰입붕괴를 도와줄 거라고?

"일단 '자그마치'를 뺐어요. 자그마치라고 하니까 정말 엄청난 손해를 보고 호들갑을 떠는 거 같잖아요. 겨우 80억 원 가지고? 진짜 몰입이 안 되더라고요."

"……."

"원 단위도 그냥 뺐어요. 어차피 관객들은 원화라는 거 알 테니까요."

"……글자 하나 빠진다고 크게 달라질 것이 있습니까?"

"속으로 열심히 '저 80억은 80억원이 아니라 80억 달러다. 80억 달러다. 80억 달러…….' 이렇게 자기 세뇌하고 있는데, '자그마치 80억원어치'라고 하니까 몰입이 확 깨지더라고요."

그래서 '자그마치'를 빼고.

'80억 원어치'를 '80억'으로 바꿔버렸다?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 생각하면 납득이 가기도 했다.

'그래, 하수영 제작자님한테 80억원은 자그마치가 붙을 만한 큰 손실이 절대로 아니지.'

'충분히 몰입이 깨질 수도 있어.'

'음, 겨우 표현만 조금 수정하는 거고 내용 전개에는 지장이 전혀 없으니, 상관없겠군.'

"아유, 죄송합니다. 저희가 애초에 설정을 제대로 잡았어야 했는데, 이런 폐를 끼쳐드리고 말았네요."

감독이 얼른 사과했다.

"제 불찰입니다. 제가 대사를 그런 식으로 허술하게 써서 이런 문제를…… 용서해 주십시오."

대본 작가도 머리를 깊이 숙여 사죄했다.

하수영은 괜찮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냥 제가 마약상에 너무 몰입을 해서 그게 깨진 거니까요."

"아뇨, 충분히 깨질 만합니다."

"그래요. 콜롬비아 마약상한테 그깟 80억 원은 하룻밤 술값 아니겠습니까? 그걸 가지고 자그마치 손실이 크다고 했으니, 연기 중에 몰입이 확 깨질 만합니다."

"역시 이 배역은 하수영 배우님을 위해 탄생한 배역이 틀림없습니다. 다른 배우가 배역을 맡았다면 이런 대사 오류도 잡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네? 이거 명백한 대사 오류네? 윤 작가, 대본 집필을 어떻게 한 거야?"

"죄송합니다. 다시 처음부터 죽 훑어보겠습니다."

황정배 연출이 문득 생각나서 급히 말했다.

"잠깐, 그러면 애초에 80억밖에 안되는 손해를 가지고 칼 루빈스가 호들갑을 떨면서 자기 보스를 서울까지 오게 한 것 자체가 전개 오류아닙니까?"

"아, 그렇게 되는가?"

"이런…… 이거 정말 생각지도 못한 데서 중대한 오류가 발생했군. 윤 작가, 대체 왜 이래? 대본 기가 막히게 잘 빠져서 좋았는데, 자세히 보니 왜 이렇게 구멍투성이야?"

윤 작가는 자기 책임을 수긍했지만, 그래도 내심 억울한 면이 있었다.

"한국 범죄영화에서 80억은 정말 큰돈이라고요. 특히 마약이라면 그래요."

"근데 보통 마약상이 아니잖아. 자그마치 콜롬비아라고, 콜롬비아."

"영화 첫 장면부터 미 항모함대 근사하게 나오고 시작하는데 80억이 휴가 중에 급히 달려올 만큼 큰돈이라고 하면, 관객들이 어리둥절하지 않겠어?"

"안 되겠어. 돈 단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검토하자고."

"이거 '우리가 오디션 볼 때' 처음 하수영 배우님이 일일이 다 지적해 주신 거잖아? 그런데 이렇게 또 같은 실수를 하면 어떡해?"

"그때 윤 작가는 없었습니다. 그 뒤로 윤 작가가 대본 다 갈았고요."

"결국 윤 작가 책임이라는 거군."

하수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끼어들었다.

"너무 그렇게 몰아세우지 마세요.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죠. 윤 작가 님도 금방 '콜롬비아 물가'에 적응하실 겁니다."

"암, 그럴 겁니다. 윤 작가, 적응할 수 있지?"

"네? 넷. 금방 적응하겠습니다……."

윤태현 작가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여긴 어디인가. 난 누구인가. 여기서 난 무엇을 하는가. 콜롬비아 물가는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휴식 시간이 끝나고 슛 들어갔을 때, 하수영은 완벽한 콜롬비아 마약상연기를 해보였고, 촬영팀 모두가 흡족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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