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813화
201장 최후의 만찬 (2)
참치 스테이크 대접.
'조리 전 식재료의 상태'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하수영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냄비 안에서 식재료들이 맛있게 익어가기를 기다리면 된다.
굳이 불 앞에서 주야장천 기다리면서 냄비 속을 기웃거릴 필요는 없다.
타이머만 맞춰놓고, 그사이에 다른 일을 해야지.
결과는 금방 볼 수 있을 것이다.
귀국하자마자 KT&G에서 정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드나들었다.
"의원님, 저희 회사에도 부디 담뱃잎을 제공해 주십시오."
"말씀드렸는데요. 국내에는 제가 키운 담뱃잎을 유통하고 싶지 않다고요."
"부디 곤란에 처해 있는 국내 담배시장을 도와주십시오."
"그거야 KT&G가 국산 담뱃잎을 더 많이 사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지금도 거의 전량 수매에 가까운 형태로 국산 담뱃잎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민영화 이후, KT&G는 농가 담뱃잎 수매 의무는 사라졌다.
하지만 거의 수매나 마찬가지 수준으로 모든 담뱃잎을 사들여왔다.
KT&G 부사장은 그 점을 적극 어필했다.
"에이, 눈 가리고 아웅 하시면서 뭐 그렇게 생색은 내고 그러세요? 같은 농부로서 듣기 불편하게요."
하수영은 쾌활하게 웃으면서 말했지만, 부사장 입장에서는 정수리가 쭈뻣해지는 문장이었다.
"KT&G가 언제부터 그렇게 국내담배 농가들을 챙겼다고요? 틈만 나면 외국산 담뱃잎 사려고 그렇게 발버둥 치셨잖아요."
"그, 그렇지 않습니다. 국산 담뱃잎 만으로는 물량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수입산도 추가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가에 발주를 더 늘렸어봐요. 농가들이 그럼 거기에 맞춰서 더 많이 생산을 했겠죠."
"……."
"선금 30% 주고 계약생산 맡기면 뭐합니까? 애초에 물량을 딱 정해놨는데, 물량 늘리고 가격 더 쳐줬어 봐요. 그럼 농가에서 알아서 인부를 쓰든 뭘 하든 해서 물량을 더 늘렸을 겁니다. 아니에요?"
부사장은 말문이 막혔다.
비겁하게 팩트로 공격을 하다니, 이러면 당해낼 재간이 없잖은가.
'KT&G가 나한테 담뱃잎 사려는 이유야 뻔하지.'
담배산업으로 국감에서 항상 터지는 레퍼토리가 이거다.
-그래서, 너희 올해는 국산 담뱃잎 얼마나 썼어? 이번에도 40% 밑이니?
-외국산 담뱃잎 사와서 담배 만들어 팔면서 꿀 빨라고 민영화시켜 준 거 아니다?
-내년에는 국산 담뱃잎 얼마나 더 늘릴 거니?
-그래도 한때 공기업이었는데, 양심이 있다면 국산 담뱃잎 최소 50% 이상은 유지해야 하는 게 아닐까?
국산 담뱃잎은 외국산에 비해 비싸다.
딱히 품질이 더 좋다고도 할 수 없다.
KT&G는 마음 같아서는 전부 수입산 담뱃잎으로 공정을 돌려 버리고 싶을 것이다.
가격도 거의 세 배 가까이 차이가 나니까.
하지만 여론이라는 게 있고, 눈치라는 게 있다.
한때 공기업이었던 만큼, 국내 담배 시장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우리는 국내 담배 농가와 미래를 함께합니다!'
'담배 농가를 살리는 것이 한국 담배 시장의 미래를 살리는 길입니다!'
그렇게 속에도 없는 외침을 열심히 부르짖으며, 어떻게든 외부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웬걸?
수영농장에서 수입산 담뱃잎보다 더 좋고 더 싼 담뱃잎을 '찍어내고' 있다지 않은가?
수익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국산담뱃잎 수매 비중은 순식간에 80%이상을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제발 국내 담배 농가와 보조 좀 맞추지그래?'
'국내 담배 농가가 죽으면 너희도 재미없는 거 알지?'
그런 정치인들의 갈굼을 벗어던질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아니면 수영농장의 무인로봇 렌탈 서비스를 담배 농가에도 제공해 주십시오."
"그건 안 됩니다. 안 돼요."
"담배 농사야말로 손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힘든 농사인데, 어째서 로봇 렌탈 서비스 대상에서 빠져 있는 것입니까?"
"우리나라 5천만 오토 군단……. 아니아니, 우리나라 고객들의 입에 제가 만든 담뱃잎이 물리는 걸 참을 수 없어서입니다."
몸에 나쁜 것을 내 나라 고객들에게 절대로 먹일 수 없다.
수영농장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미국 수출은 알 게 뭐냐.
그건 미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고.
KT&G 부사장은 몇 번이고 간청했지만, 수확을 얻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국산 담뱃잎 비중을 늘리고, 정부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낼 작정이었다.
"그런 노력으로 담배 농가 처우나 잘해주던가. 뭐, 내가 할 말은 아닌가."
담배 농가에 나쁜 감정은 없다.
오히려 다른 농민들과 차별을 두는 것이, 개인적으로 유감일 뿐이다.
물론 하수영에게 그들을 챙겨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농민 회장이라 불리는 입장에서, 도의적인 미안함이 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밥 만드는 손으로 어떻게 불량식 품을 만들어서 팔겠어……."
-마스터, 전국의 담배 농가에서 저를 통해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다 함께 마스터를 만나러 청담동으로 상경한다고 합니다.
"설마 시위?"
-시위는 아니고, 단체 면담을 통해서 부탁을 하려는 모양입니다. 억지를 부릴 의사는 없고,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오면 내가 마음이 약해 지는데. 네가 조언을 했나 보구나?"
-구독 서비스 유저들을 가능한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할 뿐입니다. 제가 먼저 불씨를 지피거나 장작을 넣진 않았습니다.
"뭐, 아무튼 잘했다. 기왕 이리 된 거, 내 쪽에서 날짜 잡아라. 르주블랑 호텔로 오라고 해."
-기 팍팍 죽이고 시작합니까?
"그래야지. 후원회 멤버들도 초대해서 호텔 로비에 2인용 차도 여러 대 좀 쫙 깔아놓고, KT&G 경영진도 불러."
-알겠습니다, 마스터.
***
그리고 그날이 다가왔다.
청담동 상경을 준비하며 떨리는 마음을 다잡던 담배 농장주들은 하수영의 단체 초청에 처음에 호들갑을 떨었다.
"농민 회장님이 우리한테 괘씸한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겠지?"
-아닐 겁니다. 안심하십시오.
"우리가 엄한 소리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저 우리도 다른 농가들처럼 좀 도와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리려고 했을 뿐이야! 바짝 엎드려서! 알지, 덤이야?"
-그럼요, 주인님. 제가 다 압니다.
청담동 프리덤 측에 잘 설명을 해놓았으니, 주인님의 의도는 오해 없이 전달되었을 겁니다.
"나 말고도 우리나라 담배 농장주들은 죄다 초청을 했다고?"
-네, 전원 참석하셔도 되고 동네에서 대표만 보내서 참석을 하셔도 됩니다.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화상통화를 통해 원격으로 간담회에 참석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신논현 르주블랑 호텔을 찾은 담배 농장주들은 입구부터 쫙 깔린 슈퍼카들의 향연에, 초반부터 기가 죽었다.
"이, 이래서 서울이란……."
"억 소리 나는 차들이 뭐 이렇게 많은지."
"이 호텔이 농민 회장님 소유라고 하는 게 참말인 게지?"
"기둥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우리 집안이 기둥뿌리째 뽑히것서."
나름 오늘을 위해서 경조사 때나 입는 양복을 꺼내고 신경도 썼지만, 자신들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랜드볼룸에 차려진 한식 뷔페장의 향연을 본 순간, 농장주들은 마음이 풀어졌다.
오감을 유혹하는 각종 맛있는 요리들이 잔뜩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창 편안하게 식사를 하는데, 마침내 하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농민 회장님이다."
"농민 회장님이야."
"듣던 대로 아주 인물이 헌앙하시구먼."
"서해그룹 이창영 회장도 농민 회장님 손닿은 음식을 삼시 세끼 먹고 산다지?"
대한민국의 밥을 지배하는 식황.
그는 시골 정자의 노인들이 즐겨 입을 법한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덕분에 담배 농장주들은 굳어 있던 긴장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식사는 다들 맛있게 하셨습니까?"
어느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적막만 흘렀다.
하수영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이렇게 여러 담배 농장주분들을 모셨습니다. 저는 담배 산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담배 농가에 대한 나쁜 감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분위기는 조용했다.
"이번에 담배 재배를 시작했지만, 100% 미국으로 수출되는 물량입니다. 국내 시장을 교란할 일은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저는 국내 시장에 담뱃잎을 판매할 계획이 없습니다."
"담배 농가야말로 로보트 임대가 가장 절실한 분야입니다! 그런데 농민 회장님은 왜 담배 농가만 로보트임대를 해주지 않으십니까?"
"제가 키운 쌀과 고기, 생선을 드시는 소비자들의 입에 들어가는 담배를, 제 손으로 키워낼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단호한 하수영의 말에, 담배 농장주들의 표정은 풀이 죽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좋은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다들 표정이 조금씩 살아났다.
"담배가 아닌 다른 농작물로 전환을 하신다면 당연히 로봇 렌탈 서비스를 해드립니다. 초기 지원도 빵빵하게 해드립니다."
"하, 하지만 평생 담배 농사만 지었는데 이제 와서 전혀 모르는 다른 농작물로 갈아타기에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프리덤이 가르쳐줄 겁니다."
"프리덤이요?"
그 말에 다들 귀가 솔깃해졌다.
"네, 프리덤은 전국 300만 농민들의 모든 수십 년 노하우와 각종 농업 관련 기술 데이터를 페타바이트단위로 습득한, 말 그대로 농사 마스터 인공지능입니다."
"페타…… 그게 뭔가요?"
"서울 전체를 뒤덮고도 남을 양의 농사 기술책들을 달달 외웠다는 뜻입니다."
"오!"
"작물 전환하는 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프리덤 소유권 역시 우리 수영농장에서 갖고 있으니, 중간에 지원이 끊길 일도 없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소식에 둔한 이들은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에 깜짝 놀랐다.
"네, 적당한 작물 추천부터 시작해서 판매로까지, 하나부터 백까지 모두 지원해 드릴 테니까 걱정 마시고 지금 결정을 내리세요."
하수영이 시선을 돌리자, 직원들이 얼른 종이와 펜을 들고 와서 농장주들에게 나눠 주었다.
"수영농장의 작물전환 서비스 토탈 케어를 받겠다는 서류입니다. 서명만 하시면 전부 제가 알아서 해드립니다."
"아, 해야지. 이런 건."
"농민 회장님이 주시는 서류는 무조건 서명부터 하라고 했어."
"해야지, 암암."
지난 3년간 하수영이 농촌에 쌓은 신뢰는 브라우니 대뱃살처럼 두텁고 탄탄했다.
농장주들은 너도나도 읽어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서명을 했다.
***
KT&G는 줄줄이 들어오는 담배농가의 계약 파기에 골머리를 앓았다.
농촌 지원 정책상, 위약금 없이 선금만 돌려주면 그만이다.
KT&G가 머리를 싸맨 것은 위약금 장사를 못 해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내년부터는 당장 100% 해외 담뱃잎으로만 담배를 만들게 된다.
물론 소비자들은 원료가 어느 나라 산인지는 관심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정감사 등 권력기관의 조사에 탈탈 털리는 건, 이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부사장님, 이렇게 된 이상 수영농장에서라도 반드시 담뱃잎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내수 물량 35%라는 지금의 수준은 무조건 유지해야 합니다."
KT&G는 막다른 길목에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