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차이즈 갓 868화
212장 중국 졸부가 무섭다 (5)
'죄송합니다, 선배님.'
법정을 나서며, 고윤무는 등 뒤에 있는 임탁정을 향해 속으로 사과했다.
'전 서울로 반드시 보직 옮기고 싶습니다. 출세하고 싶습니다. 잘살고 싶습니다.'
수사 도중 진석현이 배후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고윤무는 멘붕에 빠졌다.
재벌이 얽힌 범죄라면 실적을 크게 올리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변방 제주지검 소속.
대검 놈들 눈에는 하찮게만 보일게 분명하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압력이 가해지고, 수사가 흐지부지되며,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게 되겠지.
그럴 바엔 발로 열심히 뛰어서 임탁정한테 점수를 따고, 나아가서 하수영을 후원자로 삼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경로를 살짝 수정하고, 발벗고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런데 중간에 상황이 변했다.
-거마비로 먼저 50억씩 주겠네.
-차후 자네들이 어떤 길을 택하든 그룹 차원에서 적극 밀어주겠네.
-총장을 노린다면 총장을, 여의도 진출을 노린다면 여의도를.
-100억. 이 친구와 저 둘 각각 100억씩 주십시오.
그 순간 가슴이 얼마나 세차게 쿵쾅거렸는지.
임탁정한테 심장 소리가 들키지 않을까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100억,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만한 큰돈이다.
그때 깨달았다.
마약 수사를 철저히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 자신의 앞에 황금의 길이 찬란히 열리고 있음을.
그래서 별장을 나왔을 때 실망했다.
-준다면 좋지. 알아서 증거물을 갖다 바치는 거 아니야?
선배는 그 돈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구나…….
거래에 응할 마음이 전혀 없구나…….
고윤무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저울질을 했다.
선배라는 불확실성을 따를 것이냐, 100억과 라테그룹의 후원이라는 보장된 확실성을 따를 것이냐.
결론을 내린 뒤, 그는 진철진 회장에게 은밀하게 연락했다.
'저는 회장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저는? 그럼 임 차장은…….'
'선배님은 자기주장이 확고하신 분입니다.'
'그런가. 알겠어. 자네 인생은 내가 확실하게 책임지지.'
잔뜩 긴장해서 통화를 마치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라테그룹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여기는 제주도, 즉 통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출발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일단 현금 5억입니다. 현찰이 필요할 때 쓰시면 될 겁니다."
5억은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 그룹 유통 브랜드인 하이마켓 방배동점이 입점해 있는 빌딩입니다. 시가로 90억이 조금 넘고, 월세를 받는다면 2,500만 원 정도 될 겁니다. 이 빌딩을 검사님께 넘기겠습니다."
"빌딩을? 그럼……."
"예. 하이마켓 방배동점은 앞으로도 계속 영업을 할 테니, 월세 수입도 추가로 얻으실 수 있죠. 물론 우리 방배동점은 월세 계약으로 3,000만 원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시불 100억 원에 이어서, 지속적인 임대차 계약 관계까지.
앞으로 라테그룹과 평생 간다는 의미, 고윤무는 자신의 선택에 새삼 흡족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1심 결과가 나오고, 완전한 매매계약에 도장을 찍었다.
다만 등기부 등록은 5년 뒤에 하기로 서로 협의를 했다.
피고 당사자와 사건을 맡은 현직검사와의 거래이기 때문이다.
거래는 끝났지만, 대외적 변경은 5년 뒤로 미룬 것.
사건은 서울고등법원으로 옮겨졌고, 고윤무도 출장을 나갔다.
오랜만에 맡은 빌딩숲의 싱그러운 향기를 만끽하며, 그는 이제 자신의 소유가 된 건물을 한 번 눈에 담아 두기 위해 움직였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이마켓에 입장한 고윤무는 괜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직원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자신이 진정한 건물주 아닌가.
하이마켓에서 저번에 봤던, 뇌물을 전달한 라테그룹 직원도 만났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알고 있죠? 3심까지는 가야 합니다."
"네, 임 차장님 성격은 저희도 잘 압니다."
"집유 기간 동안 도련님이 사건에 휘말리지 않도록 단단히 신경 써주셔야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사건 이관 절차를 완전히 마친 고윤무는 며칠 동안 서울에 체류하며, 도심 문명의 화려함을 마음껏 즐겼다.
***
"면목이 없게 됐습니다, 의원님."
임탁정은 하수영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하수영은 쾌활하게 반응했다.
"괜찮습니다. 임 검사님 잘못도 아닌데요, 뭐."
"2심부터는 제주지검을 떠나서 더 이상 제가 손을 쓸 수가 없게 됐습니다."
임탁정은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에 분개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동시에 변절한 고윤무를 향한 분노도.
"그런데 어떻게 확신하셨나요?"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하는 놈들을 10년도 훨씬 넘게 상대했습니다. 윤무는 제가 나름 오랫동안 봐온 후배고요. 변한 게 있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흐음, 겨우 100억에 넘어가다니. 그 새끼는 자기 명예에 대한 자존심도 없나 보군요."
임탁정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100억이라면 언제든 검사직을 내던질 놈들이 열에 아홉은 될 겁니다.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는 척을 해봤자 놈들에게 유용한 정보만 주는 꼴 아닙니까. 속이 뒤집히겠지만 놈 앞에서는 예전처럼 지내려고 합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저도 그게 나을 거 같았거든요."
"의원님이 직접 마피아 죄수들까지 공수해 오면서 도와주셨는데,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임탁정은 눈빛을 활활 불태우며 말을 이었다.
"의원님이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진세주한테 그러했듯이 놈에게 톡톡히 개망신을 주겠습니다. 한국에서 고개를 들고 살아가지 못하게 만들……."
"아아, 그건 잠깐 보류해 주세요."
"예?"
"저도 라테그룹에 받은 게 있는데, 일단 그건 돌려줘야 하잖아요?"
하수영의 웃음에 임탁정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금 장효주와의 스캔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라테그룹은 자기들의 사주란 걸 하수영이 모를 거라고 태평히 여기고 있겠지.
"스캔들 기사라면 제가 남김없이 모아놨습니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씀만 해주십시오."
"클릭 수에 눈이 멀어서 기사 도배한 놈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잔챙이 들입니다. 그런 놈들 때려잡는 건 손맛이 없어요. 이럴 땐 본진 타격이 스릴 있죠."
"본진 타격이라 하시면……?"
임탁정은 가슴이 조금씩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수영은 턱을 괸 채 가만히 바라보다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죄수 친구들, 아직 미국에 안 갔습니다."
"휴가는 2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휴가 시작 안 했습니다. 계속 업무 대기 중이었죠."
"……그 마피아 친구들은 좋아했겠군요."
업무 기간이 길면 길수록 놈들은 좋다.
어차피 휴가가 2주라는 건 변하지 않는데, 업무 기간이 길면 길수록 교도소 밖에서 더 오래 있을 수 있으니.
그래도 감옥보다는 호텔이 낫지 않은가.
하수영이 다시 말했다.
"이제부터의 일은, 검사님이 모르시는 게 나을 겁니다."
임탁정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집행유예로 풀려난 진석현은 아파트에 틀어박혔다.
조부는 상시 2명의 감시원을 24시간 붙여놓았다.
감시원들이 받은 주요 명령은 두가지였다.
아파트 밖으로 못 나가게 할 것.
마약은 일절 손도 못 대게 할 것.
화이트 스카치를 강제로 끊게 된 진석현은 처음에는 곧장 참았다.
꽤 길어진 구치소 생활에서 벗어나 안락한 환경으로 돌아왔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해지자, 곧장 좀이 쑤셔왔다.
"씨발! 씨발!"
금단 증세는 아니었다.
다만 한창 욕구가 왕성할 나이에, 그것을 해소할 길이 없어졌다는 게 문제.
화이트 스카치를 복용하고 여자와 즐기면, 실제 관계가 불가능하더라도 정상일 때 몇 배의 쾌락을 느낄수 있었다.
"야, 스카치 좀 가져오라고!"
"안 됩니다."
"아! 그냥 내가 먹는 거면 상관없잖아! 검출도 안 되고 부작용도 없는데!"
"그래도 안 됩니다."
화이트 스카치 없이 여자들과 놀아봤자, 불구라는 벽에 부딪쳐서 더 큰 좌절만 할 뿐이다.
구름 위에 살다가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고, 다시 구름 위로 올라왔는데, 또다시 내동댕이쳐진 그런 좌절감.
그리고 이제 다시는 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까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도련님, 택배가 왔습니다."
"택배?"
오늘도 한바탕 길길이 가구를 부수고 난 진석현은 지친 목소리로 반문했다.
"주소가 왜 없어?"
"그게, 퀵으로 왔습니다."
"퀵?"
"네, 그래서 도련님이 주문하신 건가 해서요. 어서 뜯어보십시오."
경호원들은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아마도 마약을 주문한 게 아닌가 하고 지켜보려는 속셈이리라.
이제 포기하다시피 한 진석현은 턱짓을 했다.
"니들이 뜯어 봐."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경호원은 소포를 뜯다가 흠칫 굳었다.
진석현은 뭐야 하고 쳐다보다가, 내용물을 보고 굳어졌다.
"이, 이게 뭐야?"
택배 안에는 날카로운 단도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단도 아래에는 한 장의 종이가 있었는데, 중국어로 뭐라고 쓰여 있었다.
사진을 찍어 번역기 앱을 돌린 경호원이 잔뜩 굳어서 말했다.
"대가를 치르라, 라는 뜻입니다."
"씨발! 씨발! 여기는 대체 어떻게 알고!"
진석현은 손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틀림없다.
거래가 불발이 되고, 1억 5,000만 불을 날린 중국 졸부 2세가 보낸 협박 편지였다.
대가를 치르라고?
책임지고 자살이라도 하란 말인가?
'돈, 돈이라도 돌려줘야 하는데! X발!'
하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저쪽도 마찬가지.
중국 졸부 2세 입장에서는 어떻게 됐든 간에 손해를 봤다는 분노만 있을 것이다.
다음 날, 또다시 퀵 택배가 왔다.
이번에는 튼튼한 밧줄이 들어 있었고, 경고 메시지도 똑같았다.
사태가 위급함을 직감한 경호원들은 즉시 수를 늘리고, 경계사태에 만전을 기했다.
그래도 외부인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비싼 아파트이니만큼, 함부로 테러를 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세 번째 되는 날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쓴 덩치 큰 흑인과 백인 남자 둘이 내렸다.
"당신들 뭐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아유, 집 보러 왔어요."
그때, 두 남자 뒤에 있던 중년 여성이 호들갑스럽게 웃으며 나섰다.
"집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옆집 주인이 매물로 내놓으셔서요."
이 아파트는 한 층에 2개의 세대만 있다.
경호원들은 긴장해서 서로 쳐다보다가 끄덕였다.
백인과 흑인 남자 둘은 중년 여성의 뒤를 따라 옆집으로 들어갔다.
"근데 흑백 두 놈이 같이 집을 보러 다니나? 게이 커플인가?"
"그럴 수도 있겠네. 여기 아파트가격 장난 아니데, 돈 좀 있는 놈들일 수도……."
얼마 후, 집을 다 봤는지 중개사와 외국인 둘이 나왔다.
일행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 그 순간까지, 경호원들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일행이 안에 타는 순간, 경호원들은 그제야 안도했다.
그때였다.
문이 닫히기 전 눈이 마주친 흑인이 씩 하고 웃었고, 경호원은 소름이 쫙 끼쳤다.
문이 열린 채로 고정되었고, 흑인이 앞으로 나왔다.
옆에 맨 가방에서 종이박스 하나를 꺼내 경호원에게 내밀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대. 가. 를, 치. 러. 라."
"Don't worry. No bomb. You sa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