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화
(01)
황궁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았다.
시녀와 시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나는 검을 쥐고 황금 옥좌가 있는 알현실로 달려갔다.
제발 부탁이니, 살아만 있어 다오.
“폐하!”
알현실에 도달한 나는 벽을 짚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오면서 혁명군을 자칭하는 반란군 놈들과 몇십 번이나 싸운 탓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늦었군. 그대도 내 목을 가지러 왔나?”
백금을 녹여 부은 듯한 하얀 머리와 황금을 박은 듯이 진한 노란 눈동자.
늘씬한 몸매에 훤칠한 키를 자랑하듯 허리를 펴고 다리를 꼬고 앉아 상대를 내려다보는 여자.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용과 같은 인상의 군주.
제국 최연소 소드마스터이자, 상아탑주가 공인한 대마법사.
열여섯 살에 난을 일으켜 친족들을 참살하고 제위를 쟁취한 자.
40년간 9번의 반란을 진압하고 5번의 대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
약탈에 가까운 징세로 원성을 산 폭군.
대륙을 지배하는 제국의 황제.
그리고 나의 쌍둥이 여동생.
제이릴리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
그녀가 단상 위 황금 옥좌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그럼 어째서 도망치지 않았지?”
나는 잠시 멈칫하다 답했다.
“갈 곳이 없습니다.”
“갈 곳이 없다고?”
“폐하 옆에서 오만 가지 사치를 다 누린 절 반란군이 받아주겠습니까?”
“동맹한 왕국들이나 귀족 연맹, 상인 연합도 있지 않은가?”
“그놈이 그놈입니다. 저는 폐하의 최측근. 척살 순위 1위랍니다.”
“누구 마음대로 그대가 짐의 최측근인가? 짐은 측근 같은 걸 두지 않았느니라.”
그녀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
“그럼 폐하께서는 왜 도망치지 않으셨습니까?”
해서는 안 될 말이 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무례하구나.”
나는 황제의 말을 듣자마자 어깨를 떨며 눈치를 살폈다.
그 말이 나온 다음에는 언제나 피가 흐른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짐이 임명한 처형인도 도망친 지 오래니 처벌은 못 하겠구나. 특별히 넘어가 주겠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이쪽이다!”
“알현실로 모여!”
“다 같이 돌입한다.”
“다들 긴장해! 그 황제다!”
“자칫하면 다 죽어.”
밖에서 혁명군을 자칭하는 반란군 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도망치지 않았냐고 물었느냐?”
그녀가 옥좌 옆에 놓인 검을 집어 들며 말했다.
동시에 알현실 정면의 넓은 문과 옆문 여덟 개가 왈칵 열렸다.
“가자!”
함성과 함께 수백의 무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하나같이 지옥을 헤치고 나온 듯 살벌한 기세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저런 실력자들을 잘도 모았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쥐었다.
긴장감에 온몸의 털이 바싹 솟았다.
그러나 이 알현실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여인은 개 떼를 마주한 호랑이와 같이 웃었다.
“내가 내 집을 버리고 어디를 가겠느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 검을 뽑아 들었다.
금빛 눈동자와 반투명한 칼날이 검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인간을 아득히 넘어선 기세가 그 늘씬한 몸에서 흘러나왔다.
반란군 선두에 선 사내가 한 걸음 물러섰다.
증오와 분노로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들어온 사내였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두려워 마라. 그래 봐야 한 명이다!”
그때 알현실 정면의 넓은 문에서 십수 명의 무리가 더 들어왔다.
선두에 선 사내는 나와 같은 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구나. 제이릴리스.”
“짐에게 말을 높이거라.”
“그럼. 폐하. 이제 물러나실 때가 왔습니다. 그 관과 인장을 두고 순순히 일어나 주십시오.”
평민들과 어깨를 맞대고 달려 나온 그 사내는 내 이복형제이자 반역자, 반역 황자라 불리는 민중의 영웅.
유스티아누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
“좋다. 결정했느니라.”
제이릴리스가 하얀 악마와 같이 웃었다.
“네 동료는 모두 비룡들의 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평생 내 곁에 머물게 될 것이다.”
반역 황자가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웃었다.
황제가 고개를 저으며 황좌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잘리고 그 목에 목줄이 메여도 그렇게 웃을 수 있나 보자꾸나.”
검보라색 오러가 그녀의 몸에서 흘러넘치고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다음 순간 수천 대 하나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싸움이 시작된 순간 나는 검을 쳐들고 반역 황자를 향해 돌진했다.
어차피 소드 엑스퍼트 이하는 이 싸움에서 아무것도 못 하니, 머리부터 잘라야 했다.
솔직히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나도 제이릴리스 곁에서 볼꼴 못 볼 꼴 다 봤으니까.
하지만 반역만은 허락 못 하겠다.
“이 앞으로는 지나가지 못한다.”
나는 검에 마나 블레이드를 둘러 내리쳤다.
거대한 절벽도 반으로 가를 일격이었다.
그러나 반역 황자는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내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내가 눈으로 따라가기도 어려운 속도였다.
다음 순간 그의 검이 푸르게 타올랐다.
내가 만든 마나 블레이드와 달리 흔들림도 균열도 없었다.
마나 블레이드가 아니라 오러 블레이드였다.
말도 안 된다.
저놈이 소드마스터까지 올랐다니.
“비켜라. 망나니. 혈통의 수치여.”
반역 황자가 내 검을 받아쳤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 * *
“아.”
정신이 들자 머리가 아팠다.
나는 일격에 날아가 벽에 박혀 있었다.
아직 함성이 이어지는 게 몇 초도 안 지난 거 같았다.
“하.”
나는 비틀비틀 일어나 돌가루를 털고 빠진 팔을 끼웠다.
눈앞에서는 폭음과 함께 반신과 반신의 싸움의 일어나고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은 제대로 보지도 못할 속도였다.
그녀에게 덤벼들던 반란군 중에는 허망한 표정으로 검을 늘어트린 사내도 있었다.
“우리가 저런 거랑 싸우려고 했다고?”
불길한 검보라색으로 빛나는 검과 찬란한 푸른빛으로 빛나는 검이 불꽃을 튀기며 부딪혔다.
“네년의 폭정에 대가를 치를 때다!”
반역 황자가 땅을 박차자 대리석과 수정으로 만들어진 알현실 바닥에 금이 가고 파였다.
그가 검을 앞세워 제이릴리스를 굵은 기둥까지 밀어붙였다.
등을 거세게 부딪친 제이릴리스가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감히 짐에게 대가를 논하느냐?”
다음 순간 그녀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마나를 불어넣은 구두 굽이 반역 황자의 무릎 아래 관절과 근육 사이에 정확하게 박혔다.
적잖이 고통스러운지 유스티아누스의 균형이 일순 무너졌다.
동시에 그녀는 왼발을 축으로 크게 한 바퀴 돌며 검을 빙그르르 휘둘렀다.
단 한 호흡만 빨랐어도 반역 황자의 몸통을 일도양단했을 일격이었다.
무난하게 진압되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내게 달려드는 반란군 둘을 베어 쓰러트렸다.
내전에 가까운 반란이 아홉 번. 자잘한 봉기는 연례 행사였다.
이제와서 이 정도 병력을 모은 게 대단하기는 하다.
하지만 황제는 같은 소드마스터 셋을 상대로 승리한 적도 있다.
병사들의 술수 정도는 내가 막을 수 있다.
반역 황자 유스티아누스는 여기서 죽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남쪽 하늘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사방에서 시체가 썩어 가는 사형장과 같이 옆에 있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기운이었다.
“너, 너.”
제이릴리스 역시 그 기운을 느꼈는지, 얼굴을 굳혔다.
처음으로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렇게나 오만하고 여유 넘치던 사람이 낸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급했다.
피 흐르는 배를 감싸 쥔 반역 황자는 비틀비틀 물러나며 웃었다.
“그래. 이 정도 실력으로는 네게 대가를 논하지 못하겠더라고.”
제이릴리스가 이를 악물며 알현실 밖으로 달렸다.
나 역시 그녀를 쫓아 알현실 밖으로 나갔다.
반란군 병사들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던 듯 허탈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폭풍이 오기 전처럼 후덥지근한 바람이 우리의 백금색 머리카락을 날렸다.
“폐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래.”
그녀의 목소리 역시 떨렸다.
천 년 제국의 화려한 수도 곳곳에서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검은 구름과 안개가 해일처럼 밀려와 그 불길마저 덮었다.
그 구름과 안개 사이에서 죽지도 살지도 않은 괴물들이 엿보였다.
“경계를 열었구나.”
“그래.”
“옛것들을 불렀어.”
“그랬지.”
우리를 따라 나온 반역 황자가 단조롭게 답했다.
나는 분노와 경악으로 이를 떨며 물었다.
“너는 민중의 영웅이 아니었나?”
반역 황자는 검은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 무슨 수를 써도 못 이긴다는 걸 안 다음에는 아무래도 상관없더라고.”
검은 구름 사이에서 시룡(屍龍)이 내려왔다.
뼈와 비늘 가죽만 남았어도 여전히 황궁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 거대했다.
고래도 한입에 삼킬 만큼 거대한 아가리에서 푸른 불길이 일렁였다.
이에 저항하듯 제이릴리스가 이를 악물고 마나를 끌어모았다.
그 순간 반역 황자가 달려들었다.
소드 엑스퍼트인 내가 어찌해볼 몸놀림이 아니었다.
제이릴리스가 다급하게 반격했다.
그녀의 왼팔과 반역 황자의 머리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서걱, 하는 소리는 한 박자 늦게 났다.
“……!”
그녀가 어울리지 않는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다시 마나를 끌어모았다.
반투명한 오러 실드가 그녀의 몸을 구형으로 감쌌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양손으로 발동해야 하는 기술을 한 손으로 펼칠 수는 없었다.
오러 실드가 깜빡이며 흩어졌다.
나는 검에 마나 블레이드를 만들며 그녀의 앞에 섰다.
“폐하. 물러나십시오.”
어쩔 수 없네.
여기가 내 무덤이겠지.
그녀가 미친 사람 다 봤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저 시룡의 불길 앞에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황명이다. 짐을 두고 도망쳐라. 폭군의 최후는 고독해야만 하는 법이다.”
“제이릴리스.”
“!”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40년 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그냥 한번은 이렇게 해보고 싶었어.”
“너……!”
“내가 오빠잖아.”
도망쳐 봐야 살기는 늦었지.
나는 떨리는 이를 악물고 시룡에게 검을 겨누었다.
“오라버니.”
그때, 등 뒤에서 어색함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한번 불러보고 싶었어.”
너는 황제, 나는 망나니.
얼굴은 여전히 10대의 그것이건만, 서로를 부르는 이름도 서 있는 자리도 너무나 달라졌다.
시룡이 푸른 불을 뿜었다.
오러 블레이드도 아닌 내 마나 블레이드로는 찰나도 버티질 못할 맹렬한 불길이었다.
삽시간에 내 눈앞이 하얗게 달아올랐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에 쥔 검은 여전히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득한 주마등이 그림을 보듯 펼쳐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황궁의 잔디밭을 뛰어놀던 어린 시절.
누군가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떠난 너.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서 전설처럼 들려오던 네 이름.
피 묻은 검을 쥐고 황금 옥좌에 앉은 너.
다른 사람이 된 듯 잔혹한 숙청과 가학적인 통치를 펼친 너.
네 옆을 떠나지도 못하고 제대로 남지도 못한 나.
한동안 방황했다.
술과 여자와 도박에 빠져 망가졌다.
권력에는 무해한 개망나니 황족이 되어 수많은 숙청을 넘겼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재활을 시작했다.
검술을 제대로 익혀 소드마스터가 되기에도, 마법을 제대로 배워 대마법사가 되기에도 늦은 나이였다.
그렇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
망나니가 아니라 황족답게 살았어야 했다.
그럼 오늘 이 불길을 막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온몸이 모루 위의 쇠처럼 달아오르는 느낌이 났다.
만일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게 할 텐데.
너와 이 제국을 지켜낼 텐데.
단언할 수 있었다. 살면서 품어 본 가장 강렬한 소망이었다.
그 순간 나는 심장에 남아 있는 모든 마나가 단숨에 흘러나가는 걸 느꼈다.
온몸이 피가 역류하는 거 같았다.
마나가 흩어지는 건가?
그럼 이제 진짜 죽는다.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지는 감각과 함께 나는 의식을 놓았다.
* * *
“……님.”
가물가물한 목소리가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벨 님?”
벨. 어릴 적에 불리던 애칭이었다.
“발렌 님. 일어나세요.”
아직도 주마등이 안 끝났나?
생각보다 길다.
“발렌시아누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 대공 전하. 일어나십시오!”
커튼 걷히는 소리와 창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눈부신 볕과 선선한 바람이 내게 쏟아졌다.
주마등치고는 너무 생생한데.
하지만 나쁘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떴다.
붉은 커튼이 드리워진 침대와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일어나셨어요? 어제 피곤하셨나 봐요. 평소에는 제가 부르기 전에 일어나시더니.”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녹색 눈에 부드럽게 파도치는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시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는 사람과 너무 닮아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럴 리가 없지.”
“네?”
“너는 죽었잖아.”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루디는 이미 죽었다고.”
죽은 다음에는 살아생전의 기억을 계속 떠올리게 되는 건가?
그럼 너무 비참한 사후세계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악몽이라도 꾸셨나요? 제가 왜 죽어요? 이렇게 대공 전하 옆에 있는데.”
“그럴 리가. 어떻게 네가 살아 있을 수가 있어? 지금이 몇 년인데.”
주마등이나 사후세계가 아니라고?
그럼 나도 살아있다는 뜻인가?
만일 살아남았다면 도대체 그 불길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지?
제이릴리스도 못 막았을 시룡의 불길인데.
“올해로 제국력 1073년. 제이릴리스 폐하 즉위로부터 1년째 되는 해의 봄이에요.”
“그럼 지금 내가 열일곱 살이라고?”
“네. 당연하죠.”
루디가 뭐 그런 걸 묻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허둥지둥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 있는 백발 금안의 소년이 거울 속에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