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화
(02)
무슨 마법이 일어난 거지?
시룡의 불길도 내 죽음도 모두 없던 일이 된 걸까?
시간을 거스른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천장과 루디의 얼굴은 너무나 익숙했다.
이게 현실일까, 아니면 한낱 꿈일까?
무수한 의문이 머릿속을 흩고 지나갔다.
“발렌 님. 오늘 왜 그러세요? 평소에 안 하던 말씀을 하시고.”
루디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그 목소리가 너무 익숙해서 눈물이 날 거 같았다.
나는 달뜬 숨을 고르며 말했다.
“응. 그런 거 같아. 아주 아주 긴 악몽이었어.”
무려 40년짜리 악몽이었다고.
“일어나셔서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옷 갈아입으실까요?”
루디가 단정한 셔츠를 들이밀었다.
“여기서 벗어?”
“네. 늘 그러셨잖아요.”
“내가? 늘 그랬다고?”
그러고 보니 그랬지.
스무 살 전까지만 해도 다른 황족, 귀족들처럼 자연스럽게 시녀나 시종들에게 나신을 보였었다.
“아직도 잠이 덜 깨셨어요?!”
그녀의 호통에 나는 재빨리 잠옷 단추를 풀고 상체를 드러냈다.
큰 거울에 내 몸이 비쳤다.
하얗고, 푸른 핏줄이 군데군데 보였다.
근육이 보기 좋게 붙어 단단하면서도 늘씬했고, 흉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정말로 열일곱 시절 그때 그 몸이었다.
나는 루디가 건네준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부터 융단까지 추억 속에 들어온 듯이 생생했지만, 이상한 것도 있었다.
“원래도 이런 게 있었나?”
눈에 띄게 커다란 책장이 두 개나 있었다. 방이 아니라 도서관에 놔둬도 튈 정도였다.
그 두 책장에는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당연하지만 소설 따위는 아니었다.
행정학 개론, 상속법, 군사학, 지리학, 제국 전쟁사, 외교학, 신학 7경.
그 제목에 어울리는 값진 지식들이 담긴 책들이었다.
“이 책들은 다 뭐야?”
그리고 내 삶과는 조금의 인연도 없던 책들이었고.
“아직도 잠이 덜 깨신 거예요? 매일매일 읽으셨잖아요. 황족답게 살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기본 소양이라고 하시면서. 내용을 계속 말씀하시는 바람에 제가 다 외울 지경이었어요.”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책장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양피지에 쓰고 금속과 나무, 가죽으로 마감한 비싼 책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이런 걸 모았을 리가 없었다.
젊은 시절의 나는 제국 수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개망나니였다.
매일같이 술과 여자와 도박과 마약에 빠져 살았고, 황족 연금을 죄다 홍등가에 가져다 바쳤다.
비슷한 신세의 한량들과 싸우고, 서로 뺏고 빼앗고, 운명과 나 자신을 비웃으며 살았다.
“검 연습도 열심히 하시고, 제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마도서를 구해오셨잖아요. 다른 황족분들하고도 매일같이 만나서 제국의 미래에 대해 열정적으로 토론하셨고요.”
“내가?”
나는 루디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에메랄드처럼 맑게 반짝이는 녹색 눈을 볼 때마다 기억이 산발적으로 되살아났다.
“그래. 그랬지. 맞아. 그랬어.”
내가 처음부터 망나니였던 건 아니었다.
한때는 열심히 살았다.
내일 죽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속세의 쾌락에 대한 미련을 잘라냈고, 영원히 살 듯이 검과 제왕학을 공부했다.
그런 내가 어쩌다가 망나니가 된 거였지?
망나니 시절 약을 너무 많이 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누가 죽고 나서 그 충격으로 변했다.
“혹시 까먹으신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 오늘도 아홉 시부터 다른 황족분들과 만나기로 하셨어요.”
“아홉 시부터? 루디. 오늘이 몇 월 며칠이야?”
“그것도 잊으셨어요? 4월 30일이에요.”
“즉위 1년. 4월 30일.”
그때 극심한 두통이 내 머릿속을 내달렸다.
전생부터 40년간 외면해오던 기억이 한 줄기 벼락이 되어 뇌리에 내리꽂혔다.
루디의 녹색 눈이 감기는 순간이 내 머릿속에 생생했다.
붉은색으로 가득 찬 알현실.
깨져 나가던 포도주잔.
황금 옥좌에서 웃던 제이릴리스.
나는 관자놀이를 지긋하게 누르며 벽을 잡고 기댔다.
“대숙청.”
“네?”
“대숙청까지 한 달 남았어.”
나는 풀린 눈을 하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네가 그때 죽어.”
“제가 죽다니요? 무섭게 무슨 말씀이세요?”
“‘발렌시아누스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였어.”
“그건 죽을죄가 맞죠. 그런데 제가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다고요? 제가 열세 살, 전하가 아홉 살 때부터 전하를 모셨는데요.”
루디가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내가 이상한 농담을 하는 줄 알았나 보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나는 애써 싱겁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좋아하는 옷부터 못 먹는 음식까지 다 꿰뚫고 있는 너인데.
그런데도 그 죄로 죽어서 문제였다.
“내 정신 봐. 이 시간까지 뭐 한 거야. 배고프시죠? 아침 준비해 드릴게요.”
루디가 깜짝 놀라며 방 옆쪽 쪽문으로 향했다.
나는 잠깐, 하며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이미 달려 나간 뒤였다.
“…….”
머리가 아팠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원.”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57세 소드 엑스퍼트에 폭군의 마지막 신하였는데, 갑자기 약 40년 전으로 돌아와 17세 소년이 되었다.
한숨만 더 자고 이 기묘한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지만, 곧 아침을 가져올 루디를 바람맞힐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며 수마를 쫓았다.
그때 저 멀리서 군홧발 소리가 들려왔다. 금속 징과 바닥이 부딪히는 나는 익숙한 소리.
“기사?”
나는 전생에서 기사들과 함께 움직일 때가 많았다.
때로는 기사들에게 쫓겼고 때로는 기사들과 함께 쫓았다.
발소리만 듣고도 그들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복도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아래층부터 위층까지 여기저기서 문이 쾅쾅 닫히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계단 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발렌시아누스. 빨리 들어가. 기사들이 불시검문 왔어. 잘못하면 너도 끌려갈지도 몰라.”
한 여자가 내 옆의 옆 방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두세 살이나 더 먹었을까?
눈동자 색은 나와 달리 붉은색이었지만, 찬란한 백발을 보니 같은 황족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기사들?”
나는 되물었고, 여자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책잡히면 골치 아파져. 폐하께서는 우리를 다들 눈엣가시로 여긴다고. 트집 하나만 잡혀도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끔찍하게 죽을 거야.”
제이릴리스가 즉위 초에 유난히 잔혹하게 굴기는 했다.
불심 검문. 그 단어를 들으니 또 어떤 기억이 떠오를락 말락 했다.
기사들의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래층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황족이 허가받지 않고 마도서를 소지는 건 반역 음모죄에 해당합니다.”
“나는 몰랐네.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
“전하. 황제 폐하께서 법률을 시행한 지 1년이 넘었습니다. 선황의 자식들을 모두 이 궁에 모여 살게 한 것도 1년이 다 되어 가지요. 몰랐다는 말은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히, 히익!”
“마도서는 압류하고 대공 전하는 본궁으로 끌고 가라. 처우는 폐하께서 결정하실 것이다.”
기사들이 이 방 저 방을 드나들었다.
“4월 안에 서적을 전부 압류하라 명령을 받았습니다.”
“손 떼라! 그게 무슨 책인지 아느냐?”
“집행해.”
“아악!”
비명은 점점 커져만 갔다.
“외가와 주고받은 편지가 있군요.”
“그냥 안부만 물었을 뿐이네!”
“이 문자들을 지우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가문의 기사 다섯을 보내 나를 붉은 달무리 궁에서 빼내 주게.’ 더 할 말 있으십니까?”
“한 번만 눈감아 줄 수 없는가?”
“끌고 가라.”
마침내 기사들이 내가 있는 층까지 올라왔다.
“지그하임 대공 전하. 있으십니까?”
“그래. 내가 지그하임이네.”
내 옆방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본궁의 하녀가 모든 걸 자백했습니다. 황제 폐하의 음식에 극독을 넣도록 사주하셨더군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반역죄는 황족이라도 사형입니다.”
“나는 억울하네!”
“마음껏 억울해하도록. 이제 경어를 쓸 필요 없다.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한 죄인이니라!”
지그하임이 주먹을 날리려 했지만, 기사들이 더 빨랐다.
그들은 검을 뽑아 허벅지 힘줄을 찌르고 지그하임을 붙들었다.
마침내 그들이 내 방 앞까지 왔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침착하게 문을 열어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40년간 제이릴리스 아래서 살아남은 나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대응하는 법은 영혼에 새겨져 있었다.
“들어오게.”
백금색 찬란한 전신 판금 갑옷,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투구와 짧은 술, 검은 겉감 위에 하얀색으로 문양을 수놓은 망토.
황실을 수호하는 백금 기사단이었다.
여기서 ‘황실’은 황제와 그 일가 전체를 의미하나, 작금의 제국에서는 오로지 제이릴리스 1인을 뜻하는 단어로 쓰였다.
“발렌 전하. 저 왔습니……!”
쪽문으로 돌아온 루디가 기사들을 보더니 들고 온 쟁반을 떨어트릴 듯 휘청였다.
나는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발렌 전하.”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방에 들어온 ‘백금’의 기사가 둘, 방문 밖에서 기다리는 병사가 넷.
방 안을 둘러본 기사가 말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듣고 있네.”
“황제 폐하의 가장 가까운 혈육이라 저희가 지금껏 여러 편의를 봐 드린 걸 알고 있으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랬나?
“공부도 계속하게 해드렸고, 불순한 뜻을 품은 황족들과 만나는 것도 못 본 척했지요. 심지어 검을 계속 익히는 것도 용납해 드렸습니다.”
그랬군.
그 정도면 편의를 봐준 게 맞다.
“황제 폐하께서는 황족들이 자신에게 대항할 수 있을 힘을 쌓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지식이든 검이든 마법이든요.”
전생과 같다.
이 생각이 든 순간 가물가물하던 기억들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기사가 선반과 책장을 가리켰다.
“저 책들도, 저 검도 본래는 진작 압수했어야 할 물건들입니다.”
선반 위에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께서는 지금 제국에서 계승권을 주장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일단 나는 제이릴리스의 쌍둥이 오라버니니까.
“그런 분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게 누구의 은덕인지 아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내가 제이릴리스라도 나를 견제했겠지.
“앞으로 폐하께서는 더더욱 친족들을 압박하실 생각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하겠습니다. 부디 현명한 선택 하시기를 바랍니다.”
“…….”
침묵이 부정이라 생각했는지, 기사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대공께서 황제 폐하를 돕는 방법은 지식이나 힘을 쌓는 게 아니라, 폐가 되지 않고, 경계심을 사지 않는 것입니다.”
“잘 알겠네.”
탁, 방문이 닫혔다.
루디가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녹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전하. 괜찮으세요? 저는 전하까지 끌려가시는 줄 알고.”
“미안하다.”
“네?”
나는 책상으로 비척비척 향했다.
이제 뭐가 좀 기억났다.
약과 술에 젖어 개망나니로 살던 시절 이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내가 왜 망나니가 되었는지.
왼쪽 아래 서랍을 열어 잡다한 문구류를 꺼내고 서랍 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수십 년 만이었지만 이 공간만큼은 기억했다.
나무판자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나는 깃펜을 집어 그 촉을 작은 구멍에 꽂아 비틀고 들어 올렸다.
얇은 나무판자가 젖혀지고 이중 서랍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디의 놀란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걸 언제 만들어두신 거예요?”
이중 서랍 안에는 편지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마음을 정했어. 이번 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친정에 연락해 병사 3천을 준비하겠네.]
[상아탑 마도사가 된 사촌에게 연락했다.]
[남부 변경백님께서 이쪽을 주시하시는 모양이야. 잘만 하면 소드마스터를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겠네.]
[잘 생각해 보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계승서열이 백 번 대인 여자가 황위에 오르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발렌시아누스 그대가 부디 혈연 대신 대의를 택하기를 바라네.]
“발렌 전하.”
그 제목들을 본 루디가 몸을 떨었다.
나는 잔불 남은 벽난로 앞으로 걸어가 서랍을 거꾸로 쏟았다.
색색의 종이와 양피지가 타닥타닥 타올랐다.
“내가 미쳤지. 이런 짓이나 하고 있었다니. 그러니까 너를 잃었지.”
이 궁에 갇힌 황족, 그러니까 내 이복 남매들은 각자의 외가와 연락하며 반란을 준비 중이다.
계승서열이라는 명분을 위해 그녀의 쌍둥이 오빠인 나를 끌어들이려 한다.
그리고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간다.
나는 어느 편도 들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을 보였다.
죽을 뻔했다가 그대로 동복 남매라고 살아남고, 루디는 주인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죄로 죽는다.
그때부터 감시도 붙는다.
공부도 마법도 검도 못 배우게 된다.
그때는 배울 생각도 없었다.
경험이라는 교사는 비싼 수업료를 받는다.
나는 우유부단했던 죗값을 소중한 사람의 죽음으로 치렀다.
얼마나 오랫동안 망나니로 정신이 나간 채 살았었는지, 어찌어찌 다시 검을 쥐었을 때는 이미 몸이 망가져 경지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
체감상 한 시간 전쯤 있던 일을 떠올렸다.
구름을 가르고 내려온 경계 너머의 시룡.
우유부단의 죗값은 루디의 죽음이었고, 망나니로 보낸 세월의 죗값은 제국의 멸망과 제이릴리스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신의 도움인지 악마의 장난인지 나는 또 한 번의 인생을 얻었다.
제이릴리스와 이 제국을 구원할 기회를 얻었다.
이번 삶은 단 1초도 낭비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넘겨야 내일도 있는 법.
“루디.”
“네, 네?”
“술이랑 잔 좀 가져다줄래?”
그리 머지않은 숙청을 넘기는 게 먼저다.
통치에 폐가 되지 않고, 경계를 사지 않아야 한다.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신호를 끝없이 보내야 한다.
나는 이미 그렇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나는 전생에서 몇 년간 방탕한 모습을 보이며 권력욕이 없음을 증명했다.
그래.
다시 개망나니가 되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