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화
(03)
결심을 마친 나는 머릿속이 한결 맑아진 걸 느꼈다.
“나 오늘 다른 황족들이랑 만나기로 했다고 했지?”
루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늘 만나시던 분들이에요. 안 그래도 아까 아침 식사를 가져오는 길에 그분들의 시녀에게 전언을 받았어요. 기사들 돌아가면 바로 만나자고 했어요.”
“취소해 줄 수 있겠어? 아니. 반드시 취소해 줘.”
“네. 어렵지 않습니다.”
루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째서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평소에 자주 만나 통치에 대해 담화를 나누시던 분들이시잖아요?”
“별로 대단한 건 아니야. 그냥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져서.”
나는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을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큰 야망을 품은 황족이 제왕학을 익히려는 거 같았다.
한쪽 선반 위에 올려놓은 검도 바라보았다.
흑단 손잡이가 손때로 반질거렸다.
누가 봐도 야망을 품고 열심히 수련한 검객의 검이었다.
열일곱 내가 얼마나 어렸는지 새삼 다시 깨달았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반듯하게 살았을까?
나를 좀 지지해달라는 듯이.
내가 황제여도 의도를 의심했을 게 분명했다.
“루디.”
“네.”
“사람 불러서 이 책 다 팔아 버려. 황궁 도서관에 기부하거나, 다른 시녀들이 가져가도 좋아.”
“네? 그렇게 아끼셨잖아요.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드신다고 하셨잖아요.”
“이제 됐어. 종이 쪼가리 주제에 사람은 무슨 사람.”
“전하!”
“책 다 팔아 버리고 술 가져와.”
루디가 우물쭈물했다.
“포도주는 정량 배급밖에 안 나와요. 없어지면 바로 티 날 거예요.”
“요리용이라도 좋아. 가져와. 책 팔아서 생긴 돈으로도 술 사 와. 이왕이면 독한 걸로.”
“갑자기 왜 그러세요. 평소에는 드시지도 않던 술을 찾으시고.”
루디가 몸을 떨었다.
미안하다.
오늘 너무 당혹스럽지?
사실 나도 이 상황이 웃기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다시는 망나니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기껏 돌아온 첫날 하는 게 또 망나니짓이라니.
“술 가져다줄 거야, 안 가져다줄 거야? 안 가져다주면 뛰어내린다.”
“가져다드릴게요. 가져다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지만 지금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수치스러웠고, 사과도 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단지 홀로 미안해할 뿐이었다.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후다닥 뛰어가는 루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점심 무렵 루디가 돌아왔다.
포도주 두 병과 코냑 한 병을 들고 있었다.
“책은 붉은 달무리 궁에 물건 들여다 주는 업자분에게 말해 뒀어요. 다른 시녀들에게도 말해 놨으니까 며칠 안에 다 뺄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
“다른 황족분들이 많이 놀라셨어요. 찾아오신다는 분들도 있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해?”
나는 옛 경험을 살려 포도주 코르크를 맨손으로 능숙하게 뽑았다.
향긋한 검보라색 액체를 배 넓은 잔에 넘치도록 따르며 말을 이었다.
“문 열어주지 마. 부수고 들어오려고 하면 그때 나 불러.”
“네, 네.”
어지간히도 당혹스러운지 루디가 말을 더듬었다.
“루디.”
“네?”
나는 입 모양으로 미안해, 하고 말했다.
일순 루디의 얼굴에 경련이 내달렸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며 포도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역시 요리용이라서 향만 좋고 맛은 없었다.
나는 단숨에 포도주 두 병과 코냑 한 병을 다 비웠다.
알딸딸하게 올라온 취기가 안개처럼 머릿속에 번졌다.
나는 방을 적당히 어지럽히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때마침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 *
“발렌 공! 발렌 공! 이게 무슨 일인가?”
올 게 왔네.
루디가 나를 보며 눈짓했다.
어쩌죠? 라고 묻는 거 같았다.
“열어주지 마.”
루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렌 공! 문 좀 열어보게!”
크고 두꺼운 나무 문이 부서질 듯이 흔들렸다.
“안에 없는 건 아니겠지?”
“혹시 자결을 명령받았나?”
“자결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니야. 가능성 있네. 발렌 공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제이릴리스의 즉위 명분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황족이야.”
“그렇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확실히 그녀의 오라비니까.”
“그럼 어서 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시녀! 시녀! 문을 열어라! 어서!”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작게 말했다.
“이제 열어줘.”
루디가 다람쥐처럼 쪼르륵 달려가 방문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지금 발렌 전하께서 손님을 맞으실 상태가 아닙니다.”
“비켜라! 무사한지 확인해야겠다.”
“시녀 따위가 감히 내 앞을 가로막느냐!”
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방 안에 들어왔다.
방이 꽉 찬 거 같았다.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그가 인상을 찌푸리기까지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술?”
따라 들어온 깡마른 사내가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가?”
나는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르르 몰려온 황족들이 하나같이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방 안은 소드 마스터 둘이 싸우기라도 한 거 같이 난장판이었다.
커튼을 치고 촛불을 끈 방 안은 낮임에도 어두컴컴했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잔 조각이 보였다.
쏟아진 술이 융단을 적시며 알코올 냄새를 풍겼다.
책장 안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 책들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서랍장은 열려 있고, 비밀 서랍은 까발려져 있었다.
타다 남은 편지 조각이 벽난로에서 날아올랐다.
그 방의 주인인 나는 술 냄새를 풍기며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자네. 이게 무슨 일인가?”
“그렇게 번듯하던 그대가 어찌 이런 추태를 보이는가!”
황족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나는 무덤에서 일어나는 시체처럼 비척거리며 융단 깔린 바닥에 엎어졌다.
술을 잔뜩 쏟은 하얀 셔츠는 이제 보라색에 더 가까웠다.
“책을 다 내놓았다고 들었네.”
“서랍은 왜 열려 있는가? 설마 그녀의 기사들이 왔다 갔는가?”
나는 그들의 신경을 긁을 한 문장을 준비했다.
“그녀라니. 말조심해. 황제 폐하이시다!”
풀린 눈으로 한 말에 그들이 혀를 찼다.
“제대로 취했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게. 그래야 도와줄 수 있어.”
한 황족 사내가 나를 붙들어 앉히며 말했다.
나는 그 손길을 뿌리치며 답했다.
“나는 마음을 정했네. 그리고 그대들에게도 제안하네. 다 집어치우게. 어차피 안 될 일이야. 이제 인정하게. 제국의 황제는 제이릴리스야.”
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취해서 하는 말이라고 듣겠네.”
“아니. 취해서 했기에 더더욱 못 들어 줄 말이네.”
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내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말조심하게. 발렌시아누스. 내 형님은 그녀에게 죽었어.”
나는 그에게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그야 네 형이 그녀를 초대해 놓고 독 든 술을 먹여서 그랬지.”
황족들이 내가 한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이거 아주 못 쓸 친구였구만.”
“진심인가? 발렌시아누스.”
“잘 생각해 보게. 자네나 우리가 같은 신세야. 이 붉은 달무리 궁으로 끌려와 좁아터진 방마다 다닥다닥 갇힌 신세라고.”
“이렇게 붙들려 있다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르는 신세!”
“그렇게 아부하면 뭐가 다를 거 같나? 그 존속 살해자가 자네에게 뭐 하나 더 챙겨줄 거 같아?”
그때 한 황족 여인이 말했다.
“뭐 하나 더 챙겨줄 수도 있지.”
모두의 눈길이 그녀에게 쏠렸다.
“우리랑 그녀는 이복 남매야. 하지만 발렌시아누스하고 그녀는 친남매잖아. 그것도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남매.”
잠시 침묵이 어렸다.
깡마른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묻겠네. 나의 형제 발렌시아누스. 기사들이 자네에게 왔다 갔나? 그들의 우리의 편지를 보았나? 자네는 우리의 이야기를 했나?”
나는 그의 손이 허리 뒤쪽으로 숨긴 단검으로 타고 내려가는 걸 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사들은 없었네. 모든 건 내 선택일 뿐이야.”
“그 말을 어찌 믿겠나?”
“방금 내게 형제라 말하지 않았나? 그대 역시 내 형제네.”
“하지만 그대는 그녀와 친남매지.”
황족 사내와 여인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배신자.”
누구 한 명이 먼저 말했다.
“배신자다!”
“배신자!”
그래. 이런 놈들이었다.
나는 아릿하게 웃으며 40년 전 과거를 회상했다.
그들은 탈출과 반역을 꿈꾸면서도 동지를 믿지 못했다.
계승 질서가 무너진 혼란을 틈타 제가 제위에 오르거나 한 자리 차지할 생각만 가득한 놈들.
전생의 반란이 시작하지도 전에 망한 이유도 내분과 배신 때문이었다.
나는 침대에 등을 기대며 한숨 쉬었다.
물씬 올라온 취기에 온몸이 뜨거웠다.
“대의를 아는 사내인 줄 알았건만.”
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웠다.
“홀로 혈육의 정 따위를 믿고 동지를 버리다니.”
“동지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나는 서늘하게 일갈했다.
“처음부터 나를 믿기는 했나? 이 반역자 놈들아.”
“지금 뭐라고 했나?”
“역시 배신자다.”
“혀와 손을 잘라! 밀고 못 하게 막아야 해.”
“이미 늦었어. 죽여!”
광기에 찬 외침이 내 방에 가득 찼다.
루디가 겁먹은 눈길을 보냈다.
나는 그 녹색 눈을 보며 웃어주었다.
안심해,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어.
황족이란 놈들은 다 이런 놈들이다.
강인하지만 탐욕스럽고 의심이 심하다.
나도 그렇다.
나는 옆에 놓인 빈 포도주병을 집어 들었다.
“내 입으로 ‘내가 망나니요’라고 말해 봐야 아무 소용 없어.”
입 안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응?”
“방금 뭐라고?”
“남들이 ‘저자는 망나니다’라고 말하게 해야지.”
저들은 잔뜩 화가 났을 거다.
분명히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시녀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겠지.
그녀들은 적혈구와 같이 황궁을 돌아다니며 소문을 퍼뜨린다.
내 안 좋은 소문도 빨리 퍼지면 좋겠다.
“내 방에서 꺼져라! 이 더러운 역당의 무리야!”
나는 포도주병으로 덩치 큰 황족 사내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회귀 전 망나니 시절에 애꿎은 사람들을 상대로 천 번은 더 해봤던 동작이었다.
유리병이 정확히 정수리에 내려꽂혔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덩치 큰 사내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런 미친!”
“자, 잡아!”
나는 미친 듯이 웃으며 두 번째 포도주병을 집어 들어 휘둘렀다.
“덤빌 테면 덤벼라!”
제 손으로 사람 하나 죽여본 적 없을 놈들이다.
전쟁터에도 나갔던 내가 질 거 같으냐?
나는 포도주병으로 그들의 관자놀이를 후려치고 고기 먹던 포크로 그들의 손등을 내려찍으며 날뛰었다.
“도망쳐!”
“저 미친 망나니 새끼.”
황족들이 복도로 와르르 도망쳐나갔다.
“발렌 님. 이분들은 어떻게 할까요?”
덩치 큰 사내는 내 포도주병에 맞아 쓰러졌다.
한 황족은 바닥에 쏟아진 술을 밟고 미끄러져 기절했다.
그 외에서 또 몇몇 황족이 내 포도주병에 맞고 쓰러지거나 자기들까지 뒤엉켜 바닥을 굴러다녔다.
“으윽……!”
“……머리가.”
나는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던져 버리자.”
죽기야 하겠어?
“그, 그랬다가 죽으면요?”
나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어차피 한 달 뒤에는 다 끌려 나갈 거야. 오늘 죽으나 그때 죽으나.”
* * *
“잘 감시하게. 언제 밀고할지 몰라.”
“역시 제 혈육이라고 싸고도는군.”
“저놈도 곧 누명을 쓰고 죽을 거네. 그녀가 자기보다 계승서열이 앞서는 자를 살려둘 리가 없지 않나?”
“미친놈. 포크로 손등을 찍고 사람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다니.”
“내 팔이 부러졌어.”
며칠간 내 방 밖에서 황족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었다.
나를 감시하는 동시에 서로를 감시하려는 목적이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그들은 설탕 과자 앞 개미 떼처럼 모여들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별궁 담 밖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기사와 병사들이 내 방 앞으로 찾아올 정도였다.
또 며칠이 지나자 기사들은 아예 정기적으로 내 방 앞을 순찰했다.
덕분에 내가 자는 동안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내 목에 단검을 꽂을 염려는 없었다.
“책 좀 날라줄 수 있겠나?”
“예. 어쩐 일이십니까?”
“자네들 말이 맞네. 내가 공부해서 뭐 하겠나? 그냥 평생 황족 연금이나 타 먹으며 살려 하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래. 집 있고 밥 나오고 돈 나오는데 야심은 무슨 얼어 죽을 야심을 품겠는가?”
기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짐 하나 덜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술은 조금 자제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경 머리도 포도주병으로 깨 버리기 전에 입 다물게! 누구도 내게 그렇게 말할 수 없어.”
“요리용 술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붉은 달무리 궁 주방장이 했습니다.”
그놈이.
나는 계단에서 기사의 다리를 걸었다.
“악!”
“실수였네. 미안하군”
기사가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담당을 잘못 만나 이런 패악질을 당해야 하는 그가 불쌍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부디 더 나를 쓰레기로 봐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나는 그녀에게 무해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