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4화
(04)
나는 며칠간 루디의 도움과 기사의 도움 아닌 도움을 받아 책들을 전부 처분했다.
대부분은 황실 도서관에 기부하는 형식을 택했다.
마도서 두 권은 별궁에 물자를 공급하는 상인을 통해 처분했다.
“값이 상당하네요. 급하게 파느라 반의반 값도 못 받았는데 이 정도예요.”
루디가 가죽 주머니를 들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장에서는 돈 있다고 구하지도 못하는 거니까. 상아탑 애들이 좀 비밀스러워야지.”
“학문은 몰라도 마법은 계속 공부하실 줄 알았어요.”
루디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성실하던 대공 전하가 어느 날 아침에 횡설수설하더니 갑자기 망나니로 돌변한 거니까.
언젠가 다 이야기하고 사과할 거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속여야 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했다.
“됐어. 이제 필요도 없고.”
“술 사 올까요?”
“그래. 포도주 살 수 있는 만큼 사고 한 닢은 너 가져.”
“네?”
루디가 벼락 맞은 표정을 지었다.
“금화인데요.”
“응.”
“제 한 달 월급만큼 큰돈인데요.”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중간에 떼먹을 생각 하지 말고 좋은 술 사 오라는 뜻이니까 주는 대로 받아.”
그러니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하잘것없는 사과였다.
그녀가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나는 의자를 끌고 큰 창문 앞에 앉았다. 아직 피지 않은 장미 꽃봉오리가 가득 맺힌 넓은 장미 정원이 보였다.
장미 정원을 보자 전생에서 한 시인이 조만간 있을 숙청에 대해 노래한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장미가 만개한 유월은 꽃향기가 아니라 짙은 피 냄새와 함께 왔다네.’
“하.”
나는 남은 포도주 한 병을 병 채로 들이켰다.
반란과 숙청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황위에 오른 이상 반드시 터질 일들이었다.
미래의 반역 황자 유스티아누스를 당장 잡아 죽여야 한다고 간언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전생과 똑같이 흘러간다면 누군가는 그놈과 같은 위치와 입장을 가지게 될 테니까.
그 규모를 다소 줄이거나 없애려면 보다 근본적인 부분을 건들어야 했다.
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 담 밖 병사들이 혹시 이곳을 들여다보는 걸 막았다.
“흔들리며 피어나는 불꽃.”
불꽃 마법 중 기초 중의 기초이자, 제대로 익혀 놓으면 계속 우려먹을 수 있는 마법이었다.
마도서를 아끼지 않고 팔아 버린 이유가 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책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주문을 외운 순간 심장에서 마나가 흘러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직 마나 회로가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아서 마나 유도가 거칠고 미숙했다.
손바닥 위에서 연기와 불꽃이 튀더니 촛불 크기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훨씬 낫네.”
나는 만족하며 웃었다.
회귀 전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힘이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생각이면 이쪽이 더 좋았다.
단언컨대 회귀 전 내 몸은 글러 먹었다.
한참 노력해야 할 나이에 함부로 산 탓.
독기와 혼탁이 쌓일 대로 쌓인 그 몸으로는 절대 경지에 오를 수 없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약 3주.
그동안 의심병 걸린 이복 남매 황족들이 내 방에 못 쳐들어오게 막아야 하고, 불꽃 마법을 연마해야 하며, 망나니 모습을 더 보여야 한다.
일복 터졌네.
“발렌 전하. 저 왔습니다.”
“왔구나! 어떤 포도주 사왔어?”
나는 루디가 사 온 포도주를 받아 들고 웃었다.
시간은 빨리 흐르겠다.
* * *
마침내 그날이 왔다.
전생과 똑같이 하늘 높고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이었다.
“발렌 전하. 보세요. 엄청 예뻐요.”
드넓은 장미 정원에 붉은 장미 노란 장미 하얀 장미가 만개했다.
“그래. 예쁘네.”
“기사분들에게 허락받고 나가서 볼까요?”
“응. 나중에.”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떨렸다.
“발렌 전하. 오늘도 악몽 꾸셨나요?”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오늘은 악몽이 현실이 될 거다.
저 멀리서 말 탄 기사가 달려왔다.
그가 담 주변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봉서를 건네며 뭐라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기사들이 투구를 쓰고 풀어두었던 검을 찼다.
그들이 붉은 달무리 궁 안으로 들어왔다.
징 박힌 군홧발 소리가 아래층 복도에 울려 퍼졌다.
“경들이 이 시간에 여기 무슨 일인가?”
“바르프 대공 전하 맞으십니까?”
“맞아. 내가 바르프네.”
“끌고 가라. 방 수색해.”
거친 몸부림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짓인가?”
주먹다짐 소리와 비명이 그 뒤를 따랐다.
“유리나 대공 전하 맞으십니까?”
“그래. 내가 유리나다.”
“따라와 주셔야겠습니다.”
“올 게 왔구나. 묶지 않아도 되네. 도망할 마음은 없으니.”
체념한 발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소르닐 대공 전하. 맞으십니까?”
“흔들리며 피어나는 불꽃!”
마법 주문이 들려오고 기사들이 검을 뽑는 소리가 났다.
“허가 없이 마법을 익힌 반역자다!”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는 폐하의 명이시다.”
“경은 먼저 위층으로! 도주 우려가 있소.”
“검술 익힌 자들을 우선 파악해!”
군홧발 소리가 점점 커져 왔다.
루디가 나를 보며 몸을 떨었다.
“전하.”
“걱정하지 마.”
내 옆 방을 사용하던 황족이 끌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루디가 경악하는 눈빛을 보냈다.
잠시 후 그들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발렌 대공 전하! 계십니까?”
나는 루디에게 눈짓했다.
그녀가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기사들이 내 방 안을 둘러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대공 전하. 어디 계십니까!”
“술 냄새 한 번 지독하군.”
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경들 왔는가? 조금만 조용히 말해주게. 어제 과음했는지 머리가 울리는군.”
“역모 혐의가 있는 황족들을 압송 중입니다. 방을 수색해도 되겠습니까?”
의문문으로 끝냈지만, 허락을 구하는 건 아니었다.
나도 기사도 그걸 알고 있었다.
“마음껏 수색하게. 나올 건 술병과 숨겨 뒀다 잊어버린 안주뿐이겠지만.”
내 책을 나르다 계단에서 떨어진 기사가 내 방을 한 번 대충 둘러보았다.
“됐어. 가자.”
“그래도 서랍은 한 번 열어봐야 하지 않을까?”
“이 꼴을 봐라. 네가 역당이면 이런 망나니 폐인을 끼워주고 싶겠냐?”
“하긴. 게다가 친오빠지. 언제 밀고할지 모르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번듯하셔서 걱정했는데.”
“듣자 하니 패싸움을 벌이고 포크와 나이프를 손등에 꽂았다더군.”
“나는 술병으로 머리를 깨고, 깨진 술병 조각으로 바로프 대공을 찔렀다 들었네.”
“유리나 대공을 희롱했다는 말도 있던데.”
“말도 말게. 밤마다 찾아간다더군.”
“통치에 관심이 없는 건 좋지만 지나치게 삐뚤어지셨군.”
기사들이 다양한 말을 쑥덕대며 하나둘 방을 나갔다.
루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들은 명단에 올라온 황족들을 말린 생선처럼 엮어 본궁 지하 감옥으로 보냈다.
그들이 멀어지자마자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망할 술 냄새. 어지러워서 죽는 줄 알았네.”
“네, 네?”
루디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루디. 술 깨게 따듯한 꿀물 좀 가져다줘. 그동안 술병을 정리해둘 거니까 이따 밖에 내놔 줘. 방도 좀 쓸고 닦을게. 사방이 포도주 자국이다.”
“대공 전하?”
루디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난해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꿀물 안 가져다줄 거야?”
이내 그녀는 깊숙하게 고개를 숙이며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네. 전하.”
“웃지 마. 다른 시녀들 마음도 생각해야지. 지금 얼마나 당혹스럽겠어.”
“네. 전하.”
나갔던 루디는 따듯한 꿀물과 초대장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초대장을 내게 건네는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전생에서는 받지 못했던 초대장이었다. 나도 다른 황족들과 같이 말린 생선처럼 엮어 끌려갔으니까.
하지만 그 내용은 알고 있었다.
“자결하는 거 보러 오라는 거 맞지?”
“네.”
[황족의 명예를 존중하여 이들의 자결을 허락한다. 죄를 시인하고 자결하면 친지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
“여전히 똑똑하네. 내가 알던 그대로야.”
“네?”
“황족을 처형할 때 가장 부담되는 게 뭐일 거 같아?”
“외가 아닐까요? 첩 소생은 몰라도 비 소생만 해도 외가가 대귀족이잖아요.”
“그래서 처형을 하겠다고 하면 반발을 사지. 하지만 자결을 허락한다고 하면?”
“오히려 폐하 쪽에서 배려해준 모양새가 되는군요.”
“맞아. 원래 너희들까지 죄를 물어야 하는 거 자식새끼들 선에서 멈춰 주겠다 이거지.”
물론 다들 내심 분노할 거다.
하지만 회귀 전의 제이릴리스는 그들의 불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속으로만 터뜨리는 분노는 아무것도 아니다. 속으로만 삭이고 있으니 칭찬해줘야겠지.’
‘만조백관 중 짐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 한 번쯤 안 한 자가 있겠느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 한들 짐에게 검을 들이대기 전까지는 무죄이니라.’
그랬던 아이다.
한없이 당당하고 오만하게 군림하던, 나의 황제.
“아무튼 참관하러 가야 하네. 먼저 자백한 애들 다섯 명. 내일 점심인가?”
“네. 식사는 준비하지 않겠습니다.”
“아니야. 든든하게 준비해 줘.”
“네?”
“가서 큰일 치러야 하거든.”
“무슨 말씀이세요?”
“친구 중에 살짝 푸른빛 감도는 머리의 시녀 있지. 금발 황녀 모시는 시녀.”
“네.”
나는 전생의 황제 독살 미수 사건을 회상했다.
어린 황녀를 모시던 시녀의 복수였다.
분노한 황제는 그 황녀의 시체를 소금에 절여 외가에 보내버렸고, 그 시녀는 힘줄을 자르고 수도 빈민가 어딘가로 던져버렸다.
적당히 공존할 수 있었던 대귀족을 괜히 적으로 돌려버린 사건이었다.
막아야 한다. 동시에 내가 공을 세워 그녀의 신임을 받아야 한다.
“그래. 고마워. 옷 좀 골라주라.”
“네. 어두운색으로 골라 드리겠습니다.”
“아니. 화려한 걸로 골라줘. 최대한 요란하고 반짝반짝 화사한 거.”
“네?”
루디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 * *
본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은 조용했다.
나는 수염 기른 황족 사내와 검은 모자 쓴 두 황족 여인과 같은 마차를 탔다.
세 황족이 내게 불편한 시선을 보냈다.
나는 금실로 덩굴무늬 자수를 놓은 화려한 하얀 제복을 입고 머리를 거칠고 경쾌하게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냈다.
신나게 휘파람까지 불며 창밖 만개한 장미들을 바라보았다.
“거참.”
“무슨 행사라도 가는 건 줄 아나 봅니다.”
“내버려 둬요. 한 달 전쯤에 미쳐 버렸다는데. 사람을 물어뜯고 피를 마셨다니까.”
평판이 아주 좋았다.
모든 게 생각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같은 마차에 탄 황족들이 나를 벌레 보듯 바라보았다.
애써, 휘파람을 더 신나게 불었다.
30분쯤 마차를 타자 우리는 본궁에 도착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나는 시종의 부름을 무시하고 은근슬쩍 서쪽으로 향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포도주 저장고가 있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없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는데.”
황제의 포도주 저장고 앞에는 거대한 언데드 사냥개가 누워있었다.
황궁에서 일하는 하녀와 하인들이 고급 포도주를 한두 병씩 빼돌리다 걸린 게 시작이었다.
워낙 값비싸고 귀족들이 많이 찾는 만큼 쉽게 현금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포도주 저장고 앞에 경비병을 세웠으나, 이 역시 해결 방법은 되지 못했다.
향기에 취한 경비병들이 포도주를 빼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흑마법사를 불러 언데드 제작을 의뢰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저 사냥개였다.
나는 천천히 사냥개에게 다가갔다.
열 걸음 거리까지 다가가자, 놈이 머리를 들었다. 다시 한 걸음 물러나자 놈이 머리를 내렸다.
“흔들리며 피어나는 불꽃.”
내 중지와 검지 사이에서 뱀의 혀 같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나는 입김 불어 불꽃을 날려 보냈다.
언데드 사냥개의 머리 위에 불꽃이 내려앉았다.
기초 적색 마법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 정도 되는 언데드를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수단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다면 순간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정도는 가능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심장이 거세게 조여들었다.
숨을 끝도 없이 내쉬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20분 조금 넘게 지났으려나? 지글거리는 소리와 퍽 소리가 났다.
언데드 사냥개의 눈에 녹색 안광이 점멸했다.
금이 간 유리구슬 안구가 증기를 뿜으며 재생했다.
나는 그 틈을 타 포도주 저장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침침하고 넓은 방에 책장 같은 거치대가 촘촘하게 서 있고, 그 거치대에 수십 종류의 최고급 포도주가 줄줄이 누워있었다.
나는 그 중 ‘황무지의 눈물’이라는 적포도주가 잘 보이는 구석에 몸을 숨겼다.
10분 정도 기다렸을 무렵, 저장고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어? 사냥개가 안 움직이네?”
푸른빛 도는 흑발에 서늘한 인상의 시녀였다.
그녀가 황무지의 눈물 한 병을 집어 들고 코르크 마개를 잡아 뽑았다.
작은 병에 든 액체를 그 안에 쏟아붓고 새 코르크를 꽂아 아무 일도 없던 듯이 병을 밀봉했다.
나는 숨어있던 구석에서 걸어 나갔다.
“그러지 마.”
흑발 시녀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새 포도주를 가지고 가. 제발.”
그녀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체념 어린 한숨과 함께 품속에서 단도를 뽑아 들었다.
“제가 모시는 분은 단 한 분입니다.”
그래, 이번에도 그렇게 말하는구나.
“유감이다.”
그녀의 복수심은 이해했지만, 혈겁이 불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네가 한 행동이 그 황녀의 친정을 박살 낼 거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충성심을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도 본질적으로 같은 일이었다.
나는 목청껏 경비병을 부른 뒤, 주문을 읊었다.
“예리하게 찌르는 불꽃.”
깃 없는 화살처럼 빠르게 나아간 불꽃이 시녀의 손을 후려쳤다.
그녀가 손을 감싸 쥐며 단도를 떨어트렸다.
저 위에서 군홧발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병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