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5화 (5/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5화

(05)

“절대 절대로 고개를 먼저 드시면 안 됩니다. 말대답하셔도 안 됩니다. 등을 보이셔도 안 됩니다.”

“그래. 나도 잘 아네.”

경비병과 기사가 흑발의 시녀를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갔다.

나는 기사와 시종들에게 자초지종을 대강 설명했다.

중년의 시종장이 답하기를,

“폐하께서는 역모와 관련된 모든 일을 직접 보고 받길 원하십니다.”

그러더니 나를 알현실로 데려갔다.

그는 가는 내내 꼬치꼬치 알현 규정을 읊었다.

“내가 폐하를 한두 번 뵈는 줄 아는가? 알아서 잘할 테니 제발 좀 조용히 해주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시종장에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시종장이 내게 이상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제이릴리스 님이 즉위하신 지 이제 1년이시고, 제가 알기로 발렌 대공 전하를 찾으신 적은 없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실수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빨리 가세.”

본궁은 넓은 산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알현실은 그중에서도 꽤 높은 위치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넓은 계단을 오르고 올라 그곳에 다다랐다.

알현실 앞 계단을 본 나는 잠시 멈춰 서 뒤를 돌아보았다.

맑고 푸른 하늘과 높은 탑이 여럿 솟은 수도의 전경이 보였다.

이 아래로 반역 황자의 머리와 제이릴리스의 왼팔이 떨어져 내렸지.

이번에는 절대로 그렇게 놔두지 않겠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아닐세. 금방 가지.”

시종장이 알현실 옆문을 열었다.

전생을 포함하면 수백 수천 번 보는 광경이었지만, 볼 때마다 웅장했다.

높이 25미터가 넘는 거대한 기둥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고, 바닥에는 대리석과 색색의 수정이 깔려 있었다.

알현실 천장은 검푸른색이었고 유리 호롱 씌운 초 수천 개가 매달려 있었다.

흔들리는 촛불들을 보고 있자면 꼭 밤하늘을 보는 기분이었다.

“발렌 황자?”

“이런 자리에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저 망나니 놈. 무도회라도 온 줄 아는 건가!”

비슷한 반응이 기둥 양쪽에서 나왔다.

친족들의 자결 자리에 윤기 나는 하얀 제복을 입고 금장 장식을 번쩍이며 오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가능한 한 예의 없고 눈에 뵈는 거 없는 천둥벌거숭이가 되고자 했다.

기둥 오른쪽에 늘어서 앉은 황족들은 묶여 있지 않았고, 기둥 왼쪽에 앉은 황족 다섯 명은 수갑을 차고 있었다.

‘자비롭게도 자결할 기회를 얻은’ 자들이었다.

시종장이 조르르 달려가 단상을 올라 황제 제이릴리스의 귀에 뭐라 속삭였다.

고개를 숙인 나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처형이 끝난 다음에 붉은 달무리 궁으로 돌아가지 말고 기다리라.”

유예였다.

“예. 폐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자. 그럼 마저 듣겠다. 르수스. 그대도 짐을 죽이려 했다고 들었느니라. 이리 나와 변명할 말이 있다면 해 보거라.”

제이릴리스가 말했다.

나는 기둥 왼쪽에 앉은 황족들을 바라보았다.

곰 같은 덩치의 황족이 수갑을 차고 걸어 나왔다.

얼굴에 여기저기 멍이 들었지만, 여전히 당당했다.

“그대가 그대의 외가에 편지를 넣어 주술 회로가 새겨진 검을 여러 자루 구하려 했던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구에게 그 검을 주기로 하였느냐?”

“페하. 제가 말하지 않으면 어찌하실 것입니까?”

“이미 짐은 그대에게 자결을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그대의 명예는 지켜질 것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의심 가는 자들을 심문할 수밖에.”

의심 가는 자들을 심문하겠다는 말에 르수스가 이를 악물었다.

나도 전생에 당해봐서 안다.

말이 좋아 심문이지 그냥 고문이다.

황제가 친히 명한 고문이라 고문기술자들의 손속에 자비도 없다.

“편지를 보냈습니다.”

“누구에게 보냈느냐?”

르수스가 일련의 명단을 읊었다. 이미 모두 지하 감옥에 갇힌 자들이었다.

명단을 읊은 그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독기가 일렁였다.

나는 설마 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렌시아누스 대공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런 젠장.

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육두문자를 내뱉을 뻔했다.

아직 나는 제이릴리스의 애증 어린 총신이 아니었다.

오른쪽 기둥을 따라 앉은 황족들이 경악 어린 시선을 보냈다.

왼쪽 기둥을 따라 앉은 황족 네댓 명이 당연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이미 말을 맞춘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대충 눈치로 파악했거나.

편지를 받은 거 자체는 사실이었다.

다음날 정중한 거절의 의사를 표하고 불에 태워버렸지만.

그 편지는 보관해 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기사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전생의 나는 뭐가 제이릴리스를 위한 일인지 알지 못했다.

황제 같은 막중한 자리에서 그녀가 고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그녀를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반역에 가담하지도 선을 긋지도 못했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으로 어리석음과 아둔함의 대가를 치렀다.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옛날이야기, 시간 속에서 사라져야 할 이야기다.

나는 대리석 바닥을 박차고 한 걸음 걸어 나가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폐하! 저 곰 같은 자가 여우 같은 꾀로 저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그날의 맹세를 잊은 건가?”

“내 포도주병에 처맞고 기절한 놈이 맹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기사들이 군홧발로 바닥을 내리치며 무게를 잡았다.

물론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남의 방에 단체로 쳐들어왔다가 창밖으로 던져진 놈이 말도 많다.”

“내 분명 그대에게 줄 갑옷을 챙겨 놓았다.”

“이게 아가리에서 튀어나오면 다 말인 줄 아나. 왜 나까지 자결시키려고 난리야? 반역하려다 들켰으면 깔끔하게 독주나 처마셔!”

나는 일부러 천박한 어휘를 사용했다.

이는 치밀해야 할 반역에 저런 난폭하고 무식한 자를 끌어들였을 리가 없다는 상식을 상기시키고, 나와 르수스 사이에 이미 갈등이 있음을 표현하는 도구였다.

오랜만이라서 입에 잘 붙지 않았지만, 이제 다시 익숙해져야 했다.

제이릴리스가 한 손을 들었다.

나를 포함한 좌중이 입을 다물었다.

“짐은 의도가 아니라 시도를 무겁게 본다.”

시종장과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꿈을 현실로 옮기려 한다면 각오하라. 짐이 누누이 했던 말이다.”

그녀가 오른쪽에 앉은 황족들을 바라보았다.

그중 몇몇이 흠칫하며 눈을 피했다.

“생각만으로 처벌한다면 누가 그쪽에 앉아 있을 수 있겠느냐? 모두 지하감옥에 가둬도 모자라겠지.”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발렌시아누스.”

“예. 폐하.”

“붉은 달무리 궁 시녀와 기사들의 보고를 들었다. 마음이 꺾인 듯 술에 취해 산다더구나.”

“황공하옵니다.”

“그대의 행실이 바르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그건 죽을죄는 아니다. 무엇을 포기하고 술로 도망쳤는지는 묻지 않겠다.”

그녀의 목소리가 알현실 안에 서늘하게 울렸다.

“놓아버린 걸 다시는 붙잡으려 하지 않기를 바란다.”

유무를 따지지 않고 묻어주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머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녀가 피식 웃고는 다시 르수스를 바라보았다.

“짐은 두말하지 않는다. 그대는 아무 말 말고 자결하라.”

르수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음으로 금발의 황족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제이릴리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네 시녀에게도 너와 같이 자결을 허락했다. 그 가족은 처벌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거라.”

됐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금발의 여인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대는 아버지 선황 폐하의 첩 소생이라 알고 있다. 그대는 검객도 마법사도 아니고, 외가도 대단치 않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왜 반역에 그리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짐을 끌어내린다 해도 그대에까지 돌아갈 몫은 많지 않을 텐데.”

“제 오라버니는 스물다섯 나이에 소드 엑스퍼트의 성취를 이루었지요.”

제이릴리스가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금발 황족이 말을 이었다.

“1년 전 당시 황녀였던 폐하와 싸우다 전사하셨습니다.”

“기억한다. 밝은 갈색 머리의 빼어난 검객이었지. 기습으로 짐의 손목을 자를 뻔했다. 회유할 생각이었거늘 듣지 않더구나.”

“이유가 더 필요하십니까?”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수려한 얼굴에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충분하다.”

그 뒤로 제이릴리스는 기둥 왼쪽에 앉은 세 황족을 불러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녀가 내린 판결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건 회귀 전하고 똑같았다.

하지만 달라진 것도 있었다.

나는 기둥 오른쪽에 앉아 있었고, 제이릴리스는 독을 마시지 않았다.

금발 황족의 시신을 소금에 절여 그녀의 외가에 보내는 일도 없다.

명예로운 자결을 불허하고 단두대에 보내는 일도 없다.

이만하면 첫 단추는 잘 끼웠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술을.”

그녀의 말에 시종들이 유리잔을 들고 기둥 왼쪽의 다섯 황족에게 향했다.

맹독이 들어간 포도주가 잔마다 따라졌다.

그녀도 독 없는 포도주 한 잔을 들었다.

“마시도록.”

기둥 왼쪽의 다섯 황족이 잔을 들었다.

눈을 질끈 감은 자도 부릅뜬 자도 있었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며 잔을 집어 던지는 자는 없었다.

비 소생도 첩 소생도 제 손으로 잔을 비웠다.

이내 그들은 소리 없이 천천히 의자에 몸을 묻었다.

반역자들의 최후였다.

시신이 하나둘 들것에 실려 나갔다.

무심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황제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짐의 앞에 부복하라.”

익숙한 목소리였다.

불꽃 같은 아찔함을 품은 낭랑한 목소리.

나는 그녀의 말대로 단상 앞까지 나아가 붉은 융단에 무릎 꿇고 엎드렸다.

“그 시녀가 포도주에 ‘손톱 없는 독’ 오닉스를 넣었다더군.”

오닉스는 한 번 중독되면 열감과 따가움, 간지럼을 느끼며 손톱이 빠지도록 온몸을 긁다 죽는 독이었다.

많고 많은 맹독 중에서도 죽음까지의 고통이 끔찍하기로 이름 높았다.

물론 전생에서 이걸 마셨던 제이릴리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모르고 마셨다면 아무리 짐이라도 썩 유쾌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대의 충성과 헌신에 감사하네.”

“망극하옵니다.”

“그런데 짐이 대공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불러냈네.”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나는 오랜 경험으로 지금 그녀가 가학적인 미소를 짓고 있음을 알았다.

“그대는 왜 짐의 포도주 저장고에 있었나?”

나는 심호흡하고 답했다.

뻔뻔해져야 했다.

예의를 모르는 무뢰한이 되어, 권력에서 멀어져야 했다.

모두 내가 대공의 작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해야 했다.

모두 내가 제이릴리스를 대신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게 해야 했다.

“실은 저도 포도주 한 병 빼돌리려 했습니다.”

“!”

내 망언에 근위 기사들이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시종장이 악문 이를 파르르 떨었다.

나는 그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황금 옥좌에 앉은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발렌 대공! 지금 누구 앞이라고 고개를 쳐드는 거요.”

시종장의 경악 어린 속삭임을 무시했다.

쌍둥이 여동생임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나와 달리 앳된 분위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소드마스터에 오르며 한 번 허물을 벗은 육체가 최고의 상태로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워낙 어린 나이에 그 경지에 오른 덕에 육체 재구성이 회춘이 아니라 성숙으로서 작동했다.

당연히 그녀의 얼굴은 회귀하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백금을 녹여 부은 듯한 하얀 머리와 황금을 박은 듯이 진한 노란 눈동자.

늘씬한 몸매에 훤칠한 키를 자랑하듯 허리를 펴고 다리를 꼬고 앉아 상대를 내려다보는 여자.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용과 같은 인상의 군주.

제국 최연소 소드마스터이자, 상아탑주가 공인한 대마법사.

열여섯 살에 난을 일으켜 친족들을 참살하고 제위를 쟁취한 자.

그리고 앞으로 40년간 9번의 반란을 진압하고 5번의 대전쟁을 승리로 이끌 전쟁 영웅.

군비 증강을 위한 약탈에 가까운 징세로 원성을 샀던 폭군이 될 자.

대륙을 지배하는 제국의 황제.

그리고 나의 쌍둥이 여동생.

제이릴리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짐의 포도주를 빼돌리려 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당돌하구나. 누구의 것을 훔치려 했는지 아느냐?”

그녀가 절제된 어조로 분노를 드러냈다.

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오나 이해해 주십시오. 붉은 달무리 궁에서 매일같이 요리용 포도주만 먹다 보니 그 향기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요리용 포도주를 마셨느냐?”

“품위 유지비가 반의반 토막 나서 제대로 된 포도주를 사 마실 돈이 없습니다.”

기사들이 나를 향해 안타깝다는 눈길을 보냈다.

시종장은 아예 미리 병사를 불러 자결용 독약을 한 사발 더 준비하도록 일렀다.

그러나 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뻔뻔하게 요구했다.

“제가 포도주를 빼돌리려 했던 덕에 독살 미수범을 잡지 않았습니까? 한 번만 봐주십시오.”

회랑 전체가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

바깥에서 부는 봄바람 소리가 이 자리에서 가장 시끄러웠다.

그 침묵을 깬 건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

제이릴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넓은 회랑에 그녀의 웃음소리가 드래곤의 로어처럼 울렸다.

“실로 당돌하구나. 좋다. 짐의 목숨을 한 번 구한 자는 한 번 용서받을 자격이 있지.”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시종장. 이자에게 황무지의 눈물 한 병을 내주어라. 짐의 목숨을 구한 상이니라.”

독약을 준비하던 시종장이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예. 폐하. 황무지의 눈물에 극약을 타겠나이다. 발렌 대공. 폐하께서 대공을 배려해주셨다. 귀한 술로 마지막을 장식해주시는 황은에 감사하라.”

황제가 혀를 찼다.

“약을 타지 말고 포도주만 내주어라. 짐은 이자를 용서하기로 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