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6화 (6/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6화

(06)

본궁에서 온 시종이 ‘황무지의 눈물’ 한 병을 주고 갔다.

루디는 돌아온 나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피곤하시겠습니다. 쉬세요”

그뿐이었다.

나는 며칠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첫 단추는 어찌어찌 잘 끼웠다.

모두가 나를 보고 미쳤다고 생각했겠지.

씁쓸하지만, 그런 시선은 익숙하다.

나는 단 한 명에게만 무해함을 인정받으면 된다.

그러나 그런 경악 어린 시선이야말로 내게 기회였다.

힘이 회귀 전보다 더 필요했다.

앞으로 전생에 일어났던 배신과 반역과 반란, 마경의 범람을 적절한 선에서 막아내야 했다.

그녀가 선을 넘을 필요가, 폭군이 될 필요가 없도록 해야 했다.

‘짐 말고 누가 이 제국을 지킬 수 있겠느냐.’

그렇게 말하며 지었던 초연한 미소가 아직도 기억에 선연했다.

앞으로 상대해야 할 자들에 비하자면 단검을 들고 덤비는 시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계산을 실수해 만에 하나라도 제이릴리스와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질 때도 대비해야 한다.

그때 그녀의 화가 풀릴 때까지 공격을 받아 내거나 정 안되면 도망칠 힘이 필요했다.

“다시 검을 익혀야 해.”

하지만 그녀는 반역을 일으킬 능력을 경계했다.

황족이 검술이나 마법을 익히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다.

당연히 아직 누구에게도 허가가 내려온 적은 없었다.

검을 수련할 핑계가 필요했다.

“루디. 소풍 가자.”

“정말요? 잘 생각하셨어요.”

그녀가 반색하며 답했다.

“며칠간 누워만 있으셔서 걱정 많이 했어요? 어디로 갈까요?”

“백금 기사단 연무장.”

“네?”

* * *

연무장에 가려면 마차를 타고 본궁 옆까지 나가야 했다.

“발렌 님. 장미 진짜 예쁘게 피지 않았어요?”

옆에 앉은 루디가 환하게 웃었다.

방구석에서 술 냄새 풍기는 망나니 시중이나 들다 날씨 좋은 날 꽃밭을 가로지르니 행복할 만도 했다.

내가 너무했다. 앞으로는 좀 자주 나오는 게 좋겠다.

“루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네. 발렌 님.”

“만약에 내가 얻어터져도 그냥 보고만 있어.”

“네? 기사들 훈련 보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

“맞아.”

“그런데 왜 맞을 일이 있으신 거처럼 말하세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마차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햇살이 따듯했다.

제국 중부는 전반적으로 온난했고, 6월만 되어도 찌는 듯이 덥다.

하물며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

30kg가 넘는 전신 판금 갑옷을 입고 자갈 바닥을 구르면 땀이 줄줄 날 터.

그때 망나니 황족이 나무 그늘에서 시녀 부채질을 받으면서 희희낙락하는 걸 보면 누구라도 짜증이 날 거다.

적당히 신경을 긁어주다 보면 내게 대련이나 결투를 신청하겠지.

나는 마차 유리창에 대고 악의적인 미소를 연습했다.

“나는 검술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더운 날 고생하는 기사들을 보러 가는 거다.”

이런 말을 끝없이 되풀이하면서.

30분 정도 마차를 타자 ‘백금’의 연무장에 도착했다.

넓은 연무장에서 훈련용 무거운 갑옷을 입고 납덩이를 주렁주렁 찬 기사들이 구르고 달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더 빨리 뛰어라! 더 빨리!”

“못하겠습니다! 마나가 바닥입니다!”

“지금 마나가 늘고 있는 거다! 뛰어!”

“마나는 좌식 수련으로 늘리면 안 됩니까? 그편이 더 효율적이잖습니까?”

“폐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뛰어!”

“제기랄! 황제 폐하 만세!”

헉헉거리던 신참 기사가 선임 기사를 따라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 세상은 대기 중 마나 농도가 높아 육체 단련만으로도 충분히 소드 유저나 소드 엑스퍼트에 오를 수 있었다.

그 후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마나 제어력이 생긴 다음에는 명상 수련을 통해 마나를 축적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역대 최연소 소드 마스터께서는 뭔가 다른 깨달음을 얻고 친히 개발한 단련법을 기사들에게 주입해 주셨다.

그 단련법에는 이미 소드 엑스퍼트에 달한 기사들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연병장을 돌리는 과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게 신의 한 수였을 줄 누가 알았겠어.”

“네?”

“아니야.”

저 단련법은 훗날 예상치 못한 효과를 가져온다.

마나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모든 황실 기사들이 무의식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3의 마나로 5의 힘을 낼 정도로 다이나믹한 효과가 있진 않았지만, 1의 마나로 1.3의 힘은 낼 수 있는 단련법이었다.

제 살을 파먹으며 누가 먼저 쓰러지는지 겨루게 된 미래에서, 적은 마나로 오랫동안 싸울 수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이점이었다.

물론 그것 먼 미래의 일이고, 지금 당장은 저 백금 기사단장조차 이 짓거리를 왜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정말 다행이야.”

자기들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걸 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나를 경계했을 테니까.

나는 셔츠 단추를 세 개 풀고, 나무 그늘에 앉아 루디의 부채질을 받았다.

무리에서 뒤처진 젊은 기사가 나를 은근슬쩍 째려보았다.

좋군, 효과가 바로 나왔다.

단련장 쉰 바퀴를 돈 기사들이 다시 앞쪽으로 모였다.

더럽게 무거운 훈련용 철검을 들고, 제이릴리스가 개발한 제국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죽을 거 같습니다.”

“이건 마나 없이는 불가능한 움직임이라고요.”

“그래도 나는 할 만한데?”

“나도 저 황자 놈처럼 나무 그늘에서 시녀랑 노닥거리고 싶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죽을 거 같았는데, 이제 그 정도는 아니야.”

기사들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세 번만 더 하면 된다! 다들 힘내자!”

부단장이 투구를 쓰고도 우렁차게 소리쳤다.

다 죽어 가던 기사들도 비척비척 일어나 검술을 펼쳤다.

나는 루디에게 건네받은 서늘한 차를 홀짝이며 제국 검술을 바라보았다.

“제국 검술 1단계! 일체개고.(一切皆苦).”

느릿하고 웅장하게 베어 내려오다 한순간 마술처럼 빨라진 검들이 허공을 갈랐다.

일체개고,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싸움은 괴로움이다.

패배도 괴로움이고 승리도 괴로움이다.

하지만 괴로움에도 경중이 있다.

그림자를 인정하고 빛을 향해 나아가라.

승리의 대가를 두려워 말고 싸우라.]

그런 깨달음이 담긴 동작들이 제국 검술 1단계였다.

“과감해.”

나는 감탄하며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망막에 새겼다.

빨리 다시 저 기술을 쓰고 싶었다.

“다시 연무장 서른 바퀴 뛰고 2단계 펼친다. 준비해!”

“예! 단장님!”

기사들이 기합을 넣었다. 나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서늘한 차를 들이켰다.

나를 본 젊은 기사가 이를 악물었다.

“끝나고 보자.”

나는 그가 중얼거리는 말을 못 들은 척했다.

* * *

훈련이 끝났지만 젊은 신출내기 기사들은 숙소로 돌아가지 못했다.

“죽겠다!”

“내 다리, 다리가!”

“마나가 더 필요해.”

그들은 각자 넓은 연무장에 흩어져 검을 휘둘렀다.

나는 아까 나를 쏘아봤던 젊은 기사 근처로 가 앉았다.

루디가 건네준 물 탄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자니, 검을 휘두르던 젊은 기사가 나를 흘겨보았다.

“발렌 대공 전하. 어쩐 일로 여기까지 납시셨나이까?”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대들이 얼마나 대단한 훈련을 하는지 보러 왔지. 그런데 생각보다 쉬워 보이네.”

내 대답에 젊은 기사가 이를 악물었다.

“갑옷 입고 뛰다 검 좀 휘두르는 게 전부가 아닌가? 이 정도 훈련으로 헉헉거리다니. 선배들과 달리 아직 수련이 부족해 보이는군.”

내 도발에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발렌 대공 전하. 취하신 모양입니다. 시녀. 전하를 데리고 붉은 달무리 궁으로 돌아가게.”

“나 안 취했네.”

“그러고 보니 요즘 발렌 님은 취기에 방 검사도 제대로 안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젊은 기사가 악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제가 간다면 이불 갠 각도까지 검사했을 텐데, 아쉽군요.”

그 목소리에서 나를 엿 먹이고 싶다는 의사가 명백히 전해져 왔다.

“경들의 배려에 언제나 감사하는 중이네. 이 몸의 꿈속 유람을 지켜 줘서 고마울 뿐이야.”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답했다.

“소문대로 주정뱅이 망나니시군요. 폐하의 포도주 저장고를 털고도 살아남으시다니, 운이 좋으십니다.”

그가 대놓고 나를 비웃었다.

“운이 좋았지. 그런데 경은 운이 안 좋은 모양이야. 남들 다 들어가서 쉬는데 아직 여기서 구르고 있는 걸 보면.”

나는 수사법에 따라 침착하게 받아쳤다.

결국 젊은 기사가 먼저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이 주정뱅이 망나니가!”

“나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내 시녀와 폐하뿐이다!”

나는 주먹을 쥐고 발끈하는 척했다.

루디가 나를 말리려 일어섰지만, 나는 그녀에게 눈짓했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발렌시아. 네놈이 매일 술에 취해 시녀를 구타하고, 사촌 황족 여인들을 희롱한다고 들었다. 수치를 안다면 순순히 돌아가 자중하라!”

루디를 본 젊은 기사가 이를 악물며 일갈했다.

어느새 사촌 황족들을 희롱한다는 소문까지 생겼군, 아주 좋다.

이런 소문이 하나하나 모여 내 이미지를 완성하는 법이었다.

“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군. 경, 혹시 여동생이나 누나 없나?”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저녁이 아니었다면 연기임이 들통났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저녁이었고, 나는 연기에 능숙했다.

“이런 개망나니를 보았나!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아직도 끌려 나가지 않은 거냐!”

새삼 황족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음을 재차 실감했다.

어쩔 수 없었다.

황족의 정점인 황제에게 예비 반역자 취급당하고 있는 판이다.

처음에 존대해 준 것도 감사할 일이었다.

“오늘 네놈에게 수치를 가르쳐 주마.”

젊은 기사가 내 얼굴에 강철 건틀릿을 집어 던졌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피하고, 강철 건틀릿을 허공에서 걷어차 기사에게 돌려보냈다.

“내 손에 어찌 그리 투박한 물건을 끼라는 건가?”

젊은 기사가 헛웃음을 터뜨리고 내게 훈련용 철검을 겨누었다.

훈련용 검은 날이 없었지만, 그만큼 두껍고 무거웠다.

“닥치고 검이나 들어라. 오늘 그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 줄 테니까.”

끓어오르는 화산 같은 기세였다.

나는 하얀 비단 장갑을 벗고 한 선임 기사가 놓고 간 훈련용 철검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젊은 기사가 달려들었다.

그의 검이 내 머리통을 쪼개 버릴 기세로 떨어졌다.

“하.”

나는 검을 바깥쪽으로 휘둘러 젊은 기사가 내려친 검을 밀어내는 동시에 한 걸음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젊은 기사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달려들었다.

내 팔을 노리고 사선으로 베어 왔다.

나는 어깨를 앞으로 말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캉, 젊은 기사의 검과 내 검이 충돌하고 불꽃이 튀었다.

나는 체중을 실어 검을 밀었다.

혈통과 재능을 기반으로 성실하게 단련해온 열일곱 살 몸 상태는 내 생각보다 좋았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지 않는 몸이 그리웠다.

나는 그의 검을 밀어내며 그의 거리 안으로 파고들고, 오른발을 들어 젊은 기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순간 기사의 검에 힘이 빠지자, 나는 양손으로 쥐었던 검에서 왼손을 놓았다.

젊은 기사의 오른쪽 손목을 움켜쥐고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비틀었다.

동시에 그의 발을 걸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지친 몸으로 30kg가 넘는 연습용 판금 갑옷을 지탱하고 있던 기사는 중심을 잃은 순간 바닥을 향해 내달렸다.

갑옷과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경. 수치는 언제 가르쳐줄 생각인가?”

나는 일부러 담담하게 물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눈을 이글이글 빛냈다.

“그래도 황족이라고 봐주려고 했더니.”

“봐주려고 했다고? 내 머리를 반으로 쪼개려 이 악물고 달려들지 않았나?”

방금과 반대되도록 실실 웃으며 비꼬았다.

“입 닥쳐라!”

그가 화살 같은 찌르기를 날렸다.

눈으로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빨랐다.

나는 잡아끌린 듯 몸을 획 돌리며 피했다.

스친 옆구리에서 피가 흘렀다.

젊은 기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한번 화살 같은 찌르기가 날아들었다.

한 걸음 나아가며 팔을 뻗어 장창 같은 거리를 가로지르고, 또 한 걸음 나아가며 베어 올리는 동작의 연계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이끌린 듯한 감각으로 피했다.

몸이 뜨거웠다.

근섬유 하나하나에 철사가 연결된 거 같았다.

훨씬 빠르고 강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양은 형편없지만, 나는 마나를 움직여 신체를 강화하는 방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검을 치켜들었다 내리치며 기사의 올려 베기 공격을 찍어 눌렀다.

철과 철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고 기사가 밀려났다.

나는 그대로 땅을 박차며 돌진했다.

검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기사의 흉갑 정 가운데에 찔러 넣었다.

땅! 하며 벽을 친 듯한 반동이 느껴지는 동시에, 그가 붕 뜨며 바닥을 굴렀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따듯하고 힘이 넘쳤다.

술과 약으로 망가지기 전의 몸은 너무 산뜻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피를 타고 흐르는 무형의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거미줄 같은 탄성과 점성을 가지고 근섬유 하나하나를 둘러싸 충격을 완화하고 움직임을 보조, 근력을 강화했다.

그때 비틀비틀 일어난 젊은 기사가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발렌 대공. 최근에도 검을 익힌 겁니까? 마나를 다루다니. 이 일은 결코 묵과할 수 없습니다.”

아니, 잠깐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