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7화
(07)
나는 얼굴을 굳히며 둘러댈 말을 고민했다.
기사를 상대로 마나를 쓰다니, 검을 배웠다는 걸 자백해버린 꼴이었다.
“무슨 소리냐?”
나는 최대한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잘못하면 회귀하고 한 달여 만에 목이 베일지도 몰랐다.
“내가 검을 배우기는 뭘 배웠다는 거냐? 다 네놈이 허접한 탓이지. 자신이 바보가 아님을 증명하려 상대를 천재로 만들려 하느냐?”
“대공,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내가 할 소리다.”
나는 사악하게 웃으며 훈련용 철검을 치켜들었다.
아무래도 충격 요법을 써야겠다.
“내게 수치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었나? 내가 경의 수치가 되어주마.”
나는 훈련용 철검을 꼬나들고 달려들었다.
어둠 깔리기 시작한 연무장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내 눈이 돌아간 걸 본 젊은 기사가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격돌했다.
나는 검을 휘두를 때마다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지는 걸 느꼈다.
전생에서 얻은 경험이 아직 미숙한 몸을 끌고 가고 있었다.
피를 타고 흐르는 무형의 기운은 정확하게 내 뜻에 따라 아직 최적화되지 않은 몸동작을 보조했다.
캉!
내가 내지른 검이 다시 한 번 젊은 기사의 흉갑을 쳤다.
“예비 반역자 따위가!”
젊은 기사가 포효하며 검을 내리쳤다.
퍽, 나는 그의 검이 치켜 올라간 순간 그의 무릎 아래를 힘껏 걷어찼다.
젊은 기사가 비틀거렸다.
나는 다리를 들어 올려 그의 가슴팍을 밀어 차 넘어트렸다.
우당탕, 흩어져서 연습하던 젊은 기사들이 쇳소리를 듣고 하나둘 모여들었다.
“비겁한 기술이군.”
“전장에서 못 쓸 기술은 아니지만, 연무장에서 쓸 기술은 아니야.”
“망나니라더니 역시 더럽게 싸우는군.”
“술병 들고 날뛰었다는 놈들이 다 그렇지.”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예상대로인 반응이었다.
확인한 그 즉시 거만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해줘야 했다.
“내가 소개해 달라고 했을 때 소개해 줬어야지!”
“갑자기 또 무슨 소리냐?”
비틀거리며 일어난 기사가 화재를 따라가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몸을 숙이며 다시 한번 기사의 발목을 걷어찼다.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기사가 크게 비틀거렸다.
“여동생! 누나!”
나는 일부러 지저분한 말들을 외치며 검을 세 번 크게 휘둘러 흉갑 위를 두드렸다.
결국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빨리 뛰어서 그렇다고 봐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캉, 캉, 캉!
쇳소리가 나고 불꽃이 튀었다.
그 쓸모없고 가학적인 동작에 주변 기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경박하군.”
“소개? 그러고 보니 발렌 황자가 호색한이라는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는 거 같아.”
“본넬 경은 누나가 있지 않았나?”
“대충 무슨 상황인 알겠군. 하필 그런 놈에게 걸려서.”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며 어떻게 해야 더 망나니처럼, 검을 안 배운 놈처럼 보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젊은 기사가 중심을 되찾았다.
그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네놈 같은 망나니에게 이걸 꺼내 들 줄은 몰랐다.”
그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제국 검술 1단계, 일체개고.
부하를 감수하고 가속하는 기술.
나는 다급하게 검을 눕히고 자세를 낮추며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젊은 기사는 중간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참아!”
“죽일 생각이야?”
“그래도 황족이다.”
동료 기사 셋이 달려들어 그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긴 흉터를 가진 기사가 내 앞에 섰다.
“발렌 대공 전하. 저는 칼리엘이라 합니다.”
“칼리엘 경. 저 무례한 기사로부터 나를 지켜 줘서 눈물이 나도록 고맙네.”
“……?”
칼리엘이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누가 먼저 검을 겨누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저 기사가 먼저 내게 검을 겨누었네.”
주변의 기사들이 아무도 믿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갈등이 있다면 제대로 된 결투로 푸십시오.”
나는 내 인내심을 전부 긁어모았다.
환호성을 지르는 걸 참으려고.
“결투?”
삐딱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연습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발렌 대공 전하의 검 연습 허가는 제가 윗선에 보고해 놓겠습니다.”
“나는 환영이지. 저 기사에게나 묻게. 내가 대충 휘두른 검에 맞고 바닥을 굴렀으니 도망치고 싶을 거야.”
제국 기사는 강하다.
하지만 나는 소드 엑스퍼트까지 올랐던 몸이다.
신참 기사 정도는 제 실력을 내보이지 않고도 무난하게 이길 수 있다.
“본넬 경. 괜찮나.”
“저 망나니에게 받은 수모를 반드시 갚아 주겠네.”
“꼭 그리하도록. 폐하께서 참관하실 테니.”
나는 순간 내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잠깐, 방금 폐하라는 말이 나온 거 같은데? 무슨 소리인가?”
칼리엘 경이 답했다.
“이번 주 금요일에 폐하께서 저희 백금기사단원들의 수련을 직관하십니다. 결투도 그때 이벤트처럼 진행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문제 있으십니까?”
그녀는 소드마스터다.
내가 운 좋고 난폭한 망나니가 아니라 검술을 제대로 배웠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겠지.
하물며 내가 사용하는 제국 검술은 그녀가 개발한 검술이다.
아직 가르쳐 주지도 않은 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답할 방법이 없다.
어떡하지?
“대공 전하.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지셨습니다. 겁이라도 나십니까?”
젊은 기사. 본넬 경이 내게 말했다.
핏발 선 눈이 번들거렸다.
“그럴 리가 있나? 기대가 돼서 심장이 터질 지경이네. 폐하 앞에서 맞기 싫으면 연습이나 열심히 해 오게나.”
나는 여유 있는 척 돌아섰다.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수련 또 수련이다.
단숨에 제압하고, 운으로 이긴 척 위장해야 했다.
* * *
나는 거짓말을 싫어했다.
전생에서 거짓을 말하다 죽은 수많은 사람을 본 탓이다.
그 특유의 긴장감이 싫었다.
실수를 덮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해 더 큰 거짓말을 하다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리는 게 싫었다.
그래서 언제나 진실을 말했다.
꼭 숨겨야 할 게 있다면 진실을 다 말하지 않는 식으로.
하지만 그런 내 고집은 이번 삶에서도 통하지 않았다.
솔직함의 미덕은 진실을 말해도 죽이고 거짓을 들켜도 죽이겠다는 상대에게 통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유죄와 무죄는 군주의 말 한마디에 정해졌다.
그래도 한 번 겪어 보았던 삶이었다.
“발렌 님? 발렌 님!”
“미안. 불렀어?”
“여기 찬물 있어요. 쉬엄쉬엄하세요. 잘못하다 쓰러지시겠어요. 가뜩이나 날도 더운데.”
6월 초여름. 날씨는 벌써 푹푹 쪘고, 붉은 달무리 궁 근처의 공터에는 나무 그늘 하나 없었다.
“고마워. 그런데 지금 쉬었다가는 평생 쉬게 될지도 몰라서.”
나는 땀을 훔치며 답했다.
“소금도 가져왔으니까 드세요.”
루디가 안쓰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나는 검을 내려놓고 소금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성과는 좀 있으세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더.”
술과 약에 찌들어 망가지지 않은 몸은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였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핏줄을 따라 온몸을 타고 흐르고, 근육을 감싸 보조했다.
전생에서처럼 막힌 혈관을 우회할 필요도, 괴사한 근육을 마나로 대신하려 무리할 필요도 없었다.
아직 양은 많지 않았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었다.
* * *
“폐하께서 6월 둘째 주 정기 시찰을 시작하시겠습니다. 근위 기사 여러분께서는 부디 갈고 닦은 성과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시종장이 확성 주술이 새겨진 마도구에 대고 외쳤다.
백금 근위 기사단의 기사들이 일제히 단상을 향해 몸을 돌려 경례를 올렸다.
훤칠한 사내들의 함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제국과 황제 폐하께 영원한 영광을!”
자리에서 일어난 제이릴리스가 고운 손을 들어 마주 경례했다.
“그 충성에 보답을. 짐은 경들의 기세에 감명받았다. 오늘도 경들이 기대 이상의 기량을 선보여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제나처럼 사람 가슴을 벅차게 하는 말이었다.
“신임 기사와 황족의 대련이 예정되어 있다고 들었다. 좋은 승부를 기대한다.”
그녀가 우리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높은 단상 위에서 황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 불꽃처럼 번뜩였다.
나와 맞설 본넬 경이 그 눈을 보고 몸을 굳혔다.
“절대 지지 않겠다. 망나니 놈.”
결투에서 대련으로 바뀌었군.
하긴, 아무리 실질적인 대우가 개판이라고 해도, 기사와 황족이 결투한다는 건 썩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와 본넬 경은 앞으로 나오시오!”
시종장이 외쳤다.
나는 하얀 머리에 향유를 발라 거칠게 뒤로 넘기고,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화려한 옷을 입었다.
금장 단추와 은실로 수놓은 덩굴무늬 제복이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제발 찢어지지 마라.
다시 살 돈도 없단 말이다.
“놀려 나오셨나 봅니다?”
본넬 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두피가 보일 만큼 짧게 자르고, 윗머리와 앞머리만 조금 길렀다.
갑옷 아래 입고 있던 옷은 무늬 없는 가벼운 셔츠와 바지.
기사답게 깔끔한 외모와 복장이었다.
상급 기사 칼리엘 경이 우리에게 대련용 철검을 건넸다.
날은 없었지만, 진검보다 무거웠다.
나와 본넬 경은 검을 서로에게 겨누고 한두 걸음 물러섰다.
“정의의 여신 라 유스타티아께서 이 대련을 바라보신다.”
칼리엘 경의 선언과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나는 본넬 경을 공격하기에 앞서 제이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흥미로운 미소를 짓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야단 났군.
기술 쓰면 바로 들켜서 끌려 나갈 게 분명했다.
“어딜 보고 있는 겁니까!”
땅을 박찬 본넬 경이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달려들었다.
뭉툭한 검 끝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쉭, 하며 내 가슴팍으로 찔러 들었다.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그날은 많이 지쳐 있었나 보다.
사악, 나는 왼발을 축으로 크게 한 바퀴 돌며 찔러 드는 검을 피했다.
동시에 내 검을 힘껏 휘두르며 본넬 경의 허벅지 옆을 후려갈기려 했다.
본넬 경이 한걸음 크게 물러서며 피했다.
“저런 비겁한 자를 보았나!”
“허리 아래를 노리면 안 된다는 걸 모르나?”
기사들이 소리 높여 성토했다.
심판을 보던 칼리엘 경이 다가와 말했다.
“발렌 전하. 대련할 때는 검으로 허리 아래를 노리면 안 됩니다.”
“미안하군. 몰랐네.”
대련은 너무 오랜만이어서 까먹었다.
물론 그걸 얼굴에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나는 되려 알고도 모른 척했다는 재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본넬 경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걸 몰랐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각선을 그리며 베어 내려오는 검신에 예리한 기운이 번뜩였다.
대련용 검임에도 꼭 날이 서 있는 거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카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철과 철이 부딪히고 불꽃이 튀었다.
검 신이 맞닿은 순간 본넬 경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기다렸다.”
그가 그대로 체중을 실어 내 칼날을 찍어 누르는 동시에 한 걸음 걸어 나오며 내 가슴팍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보고도 피하지 못할 만큼 유려하게 이어지는 동작이었다.
나를 죽일 생각인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제국 기사들의 투로를 꿰뚫고 있었다.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며 중심을 잡고, 그대로 눕힌 검을 밀어 올렸다.
본넬 경의 웃음이 굳고, 그의 검이 내 검을 타고 미끄러져 나갔다.
본넬 경이 물러서려 했지만, 나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대로 몸을 바싹 붙이며 왼손을 뻗어 본넬 경의 팔뚝을 잡고,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려 했다.
“소드 레슬링?”
“자네가 잘못 본 거 같군. 그냥 어거지 부리는 게 아닌가?”
“그래. 매일 술만 마신다는 발렌 황자가 그런 기술을 알 리가 없지.”
“취객의 막싸움인가? 하하.”
기사들이 한 마디씩 내뱉었다.
“전하. 해보자는 겁니까!”
내 품 안에 갇힌 본넬 경이 이를 악물었다.
다음 순간 나는 그의 몸이 돌처럼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마나 신체 강화?”
그걸 알아챘을 때 이미 내 몸은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기술이 아니라 그냥 힘으로 날려버린 거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루디가 지른 비명이 들렸다.
허리가 아팠다.
“아이고.”
내가 비틀비틀 일어선 순간 본넬 경이 달려들었다.
종횡무진 휘두르는 검에서 섬뜩한 칼바람이 불어왔다.
못 막으면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다.
악문 이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오늘만 보고 살고 싶지 않았건만, 눈앞만 보고 사는 꼴이 되었다.
나는 탄식과 함께 심장에서 마나를 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