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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8화 (8/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8화

(08)

심장에서부터 손끝 발끝으로 뻗어나간 마나가 삽시간에 근섬유를 감쌌다.

본넬 경의 검이 정확하게 내 어깨를 노리고 떨어졌다.

카앙!

나는 육체만으로는 불가능한 속도로 눕힌 검을 쳐올리며 그 공격을 흘려냈다.

본넬 경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가 역시,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양손으로 쥐었던 장검을 한 손으로 고쳐 쥐었다.

그 무게에 팔에 힘줄이 솟고 상반신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방금의 움직임보다 더 놀라운 걸 보여줘야 했다.

“저 무거운 검을 한 손으로 잡는군.”

“혈통만 믿고 날뛰는 거지. 배운 거 없이 힘만 넘치는 망나니 놈이야.”

“맹수 같은 감각이 있군. 잘 배운다면 훌륭한 기사가 될 텐데. 하필이면 폐하의 치세에서 태어났어.”

“그런 말 말게. 어차피 제 성격 못 이기고 날뛰었을 놈이야. 저런 놈은 절대 경지에 못 오른다고.”

나는 한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부웅!

크게 반원을 그린 검이 본넬 경의 어깨를 스쳤다.

“본넬 경. 왜 움츠러드는가? 절대 지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명예도 모르는 놈이!”

그의 몸 테두리 선이 흐릿하게 보였다.

일체개고의 극의였다.

아직 제대로 단련되지 않은 몸으로 받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랐다.

결국 최선을 다해 볼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하하하!”

나는 긴장을 드러내지 않으려 박장대소했고, 근위대 기사들은 혀를 찼다.

“저런 상대에게 극의까지 사용하다니. 본넬 저 아이도 어지간히 흥분했나 보군.”

“대련이니 어쩔 수 없겠지. 많이 맞으면 지는 건데, 키 크고 팔 긴 놈이 멀리서 붕붕 휘둘러 대니 어쩌겠는가.”

“선배들 앞에서 창피당하기는 싫겠지. 게다가 상대도 상대 아닌가? 저런 놈에게 지느니 나라도 극의를 사용하겠네.”

본넬 경이 한 줄기 질풍이 되어 내게 지쳐 들었다.

열 걸음도 넘는 간격이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그 검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속도와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맞서 극의를 끌어냈다.

아주, 아주 잠깐이면 된다.

눈이 하얗게 뒤집히는 감각이 드는가 싶더니, 온몸에 철사처럼 퍼져 있던 마나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시간이 한없이 느려진 거 같았다.

이 힘을 이용한다면 정면 승부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승부를 위해 시합에서 지는 거였다.

그럴 수는 없었다.

본넬 경의 검이 내 검을 후려쳤다.

나는 도저히 못 이기겠다는 척 슬며시 검을 놓아버렸다.

본넬 경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밀리듯 뒤로 쓰러졌다.

동시에 천천히 눈동자를 돌려 황제와 근위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역시 극의는 극의군.”

“본넬 경의 실력은 확인했어.”

“흥. 감정만 잘 다스렸어도 진작 이겼을 거네. 둘 다 못 쓸 놈들이야.”

아득히 먼 곳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정의의 여신 라 유스타티아께서 이 대련을 바라보신다.’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정의의 여신님, 저를 용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

나는 뒤로 쓰러지는 그 기세 그대로 발을 차올렸다.

체내에서 마나가 근육을 보조하며 근력을 강화했다.

내 발끝이 초승달 같은 궤적을 그리며 본넬 경의 가랑이 사이로 치솟아 올랐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나는 웃었고, 본넬 경은 경악과 탄성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퍽.

“끄윽!”

끔찍한 비명과 함께 본넬 경이 쓰러졌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선임기사 칼리엘이 달려왔다.

“저, 저런 추잡한!”

연무장 주변에 앉아있던 기사들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황제 제이릴리스조차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내가 이긴 거 같군.”

본넬 경이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연무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풀린 다리가 오징어 촉수처럼 흐늘거렸다.

“허리 아래를 노리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규정 다시 찾아보네. ‘검으로’ 노리면 안 되는 거겠지. 소드 레슬링 할 때 다리 거는 건 문제 없잖은가?”

“그래도 상식과 명예라는 게 있잖습니까!”

“검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황족에게 근위 기사가 극의를 쓰는 건 상식적이고 명예로운 일인가 보군.”

칼리엘 경이 입을 다물었다.

시종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나를 불렀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올 게 왔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단상 위로 향했다.

넓은 연무장이 내려다보이는 단상은 생각보다 높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대련하며 흘린 땀을 식혀 주었다.

“발렌시아누스가 위대한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연무장을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는 나를 보지도 않고 손짓했다.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오라고 작게 말했다.

스무 걸음 거리까지 다가갔는데도 황제는 멈추라는 손짓을 하지 않았다.

더 가까이 오라고?

나는 열 걸음 거리를 띄고 있던 근위 기사들을 지나쳤다.

아직도?

다섯 걸음 거리의 시종장까지 지나쳤다.

더?

나는 황제가 앉은 옥좌 바로 옆까지 다가섰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제이릴리스가 손을 들었다.

새삼 그 손가락이 굉장히 길고 얇다는 게 눈에 띄었다.

피아노 연주하기 딱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손으로 천상의 선율이 아니라 비명과 죽음의 장송곡을 연주했다.

“대련 잘 보았다.”

그녀는 내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말했다.

“제 수준 낮은 몸놀림을 그리 봐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마지막에 고간을 향하던 발끝을 틀어 허벅지 안쪽을 노리는 발놀림이 예사롭지 않더구나. 좋은 배려였다. 언제 그런 기예를 익혔느냐?”

미친.

그걸 봤다고?

본넬 경의 몸에 가렸을 텐데.

“제가 그랬사옵니까? 경황이 없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일단 잡아떼고 보자.

“행운의 여신께서 정의의 여신의 천칭을 비트셨나 봅니다.”

“…….”

침묵이 이어졌다. 피가 바싹 말라붙는 기분이었다.

이내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밀은 사내를 아름답게 만들지 않지. 그래도 좋은 구경을 시켜 주었으니 상을 내려야겠구나. 바라는 게 있느냐?”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살포시 눈동자를 올려 황제의 입가를 바라보았다.

아주아주 약간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처형할지 말지 고민할 때 입가가 약간 올라가는 버릇이 있었다.

맙소사.

“황무지의 눈물을 한 병만 더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는 떨지 않으려 노력했다.

야심 없는, 오늘만 즐겁게 살면 그만인 사내로 보이려 했다.

“그래. 보내 주겠다. 더 바라는 건 없느냐?”

“실은 유흥가에 다녀오고 싶습니다. 외출 허가를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말을 마치자마자 시종장과 근위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폐하 앞에서 무슨 망발이냐!”

“발렌 대공. 언행에 예를 갖추시오.”

“잠깐.”

황제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흥가에 가면 뭘 하고 싶으냐.”

“술도 마시고, 노름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싶습니다. 매일 장미만 보려니 심심해서 죽을 거 같은데. 허락 좀 해 주십시오.”

시종장이 죽고 싶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허하노라.”

그녀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시종장이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폐하?! 어찌 그런 미천한 곳에 대공의 출입을 허하실 수 있으십니까.”

나는 그녀가 허락해 줄 걸 알고 있었다.

정적이 알아서 노름에 빠져 권력과 무예에 연을 끊어 주겠다는데 얼마나 좋겠는가.

“짐의 입으로 바라는 걸 말해 보라고 말했다. 황제에게 거짓말을 시킬 셈이냐?”

나는 돌아서며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대련 핑계로 검을, 유흥 핑계로 외출권을 얻었다.

이제 밖에서 눈치 안 보고 수련할 수 있다.

음모를 적당한 선에서 막기도 더 쉬워질 거다.

거기서 끌어들여야 할 사람도 있고.

* * *

“발렌 님. 이제 장기 외출권도 얻으셨는데 어디를 가시고 싶으세요? 수도에 맛있는 식당 많이 알고 있는데 안내해 드릴까요?”

신이 난 루디가 내 옷장에서 여름옷들을 꺼냈다.

“아니면 마도구 사려 가실래요? 상아탑 근처에 괜찮은 마도구 가게 많아요.”

저렇게 좋아하는데 초 치려니까 너무 미안했다.

그래도 말해야 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내뱉었다.

“루디. 옷 다시 넣어 줘. 나 마도구 사러 못 가.”

“왜요? 외출권 얻으셨잖아요. 폐하 서명 들어간 거라서 사실상 무기한인데요.”

“돈이 없어.”

“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종이에 숫자 몇 개를 적어 내렸다.

“이게 우리가 원래 받던 품위 유지비야. 생각보다 큰돈은 아니지?”

“그러게요. 예상외네요.”

“전대 황제 폐하가 여색을 어지간히도 밝히셨지. 황후를 세 번 갈아치우고, 황비도 총 열세 명이었어. 첩은 세 자릿수였고.”

“받을 사람이 너무 많았군요. 어라? 그러면…… 이제는 다시 늘어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루디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돌리려 다시 숫자에 집중했다.

“지난번에 자결 당한 다섯 황족 기억하지? 그중에 일류 암살자를 넷이나 고용한 황족이 있었어. 거기 들어간 군자금이 어디서 나왔을 거 같아?”

황제가 준 돈으로 황제의 목숨을 노린 거다.

돈 준 사람으로서 그녀는 당연히 진노했다.

“그 책임을 물어서 삭감당한 건가요?”

“응. 그래서 원래 받던 돈이 또 이만큼 줄었어.”

나는 종이에서 숫자 하나를 지우고 하나를 고쳐 썼다.

“이제 슬슬 제 월급하고 큰 차이가 안 나기 시작했어요.”

“맞아. 지금 이게 내 한 달 치 품위 유지비야.”

“마도구 사고 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네요.”

루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잘못하면 앞으로 더 적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탁할 게 있어.”

나는 새로 받은 ‘황무지의 눈물’ 한 병을 루디에게 내밀었다.

받아 든 루디가 눈을 깜빡거렸다.

“평민 출신은 황궁 시녀 못 하잖아. 루디 너도 수도 하급귀족 출신이지?”

“네. 막내라서 받을 건 없지만요.”

“잘됐네. 좀 부유한 친척들에게 이거 팔아 줘. 요즘 시세는 모르지만, 금화 다섯 닢은 받을 수 있을 거야. 그중에 세 닢은 너 가지고 두 닢만 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 같은 황족을 담당하게 돼서 고생이 많다. 네 충성에 보답해주고 싶어.”

“이러실 필요 없어요. 시녀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큰돈은 부담스럽다고요.”

루디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앞으로 더 고생시키겠다는 뜻이야. 이제부터는 다른 소문도 더해질걸?”

나는 연극적으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디가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네?”

“도박광, 강도 황족, 친족살해자, 황제의 개. 뭐 그런 별명을 예상 중이야.”

나는 금빛 눈으로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강도 황족의 곁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시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지도 몰라. 금화 세 닢 정도는 가볍게 받아둬.”

모든 게 잘 풀린다면, 나중에는 네게 금화를 상자로 들고 가져오는 귀족들도 생길 거니까.

나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다시 한번 싱긋 웃었다.

“그럼 부탁할게. 루디.”

* * *

나흘 후 루디는 큼지막한 가죽 주머니를 들고 왔다.

“발렌 님. 여기요.”

주머니를 열자 은화가 강처럼 흘러내렸다.

금화로 바꿔도 아홉 닢은 되어 보이는 액수였다.

아무리 고급 포도주라 해도 엄청난 가격이었다.

“루, 루디. 포도주 한 병을 얼마에 판 거야?”

“사겠다는 분이 하도 많아서 몇 분 모아 놓고 경매로 붙였어요. 역시 경쟁이 붙으니까 가격이 오르더라고요.”

“그래서 얼마에 팔았는데?”

“금화 열두 닢이요.”

역시 귀족이 좋다.

포도주 한 병을 어지간한 숙련공 연봉만큼 주고 사다니.

“그래서 이게 은화로 몇 닢이야?”

“은화 아흔 닢이요. 말씀하신 대로 제가 금화 세 닢 가지고 발렌 님에게 아홉 닢 치 가져왔어요.”

나는 은화 서른 닢을 챙기고 나머지 예순 닢을 다시 루디에게 내밀었다.

“아니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녀가 녹색 눈을 빛내며 고개를 저었다.

“빨리 받아. 애초에 돈이 필요해서 포도주를 판 게 아니라고.”

나도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들어가서 분위기 잡을 돈만 있으면 돼. 이번에 잘 풀리면 한동안 돈 걱정은 할 필요도 없어.”

“어디에 들어가실 생각인데요?”

루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카지노.”

“제정신이세요?”

루디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말했잖아.”

나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답했다.

“도박광 강도 황족의 시녀로 역사에 남을 거라고.”

그녀가 뭐라고 말하고 싶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다 생각이 있으신 거죠?”

“내가 술잔 바닥에 던지고 포도주 가운에 끼얹을 때 생각해봐. 그때하고 똑같은 거야.”

“그렇다고 대답한 걸로 알아들을게요.”

나는 고마움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우리도 한잔할까.”

“네?”

“금화 열두 닢에 팔린 술은 어떤 맛일지 궁금하지 않아?”

나는 독살 시도를 막은 대가로 받은 첫 번째 황무지의 눈물을 들어 보였다.

루디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찬장에서 잔을 꺼냈다.

“살면서 한 번은 먹어보고 싶었어요.”

나는 피처럼 붉고 맑으면서도 진득한 액체를 잔 두 개에 따랐다.

“발렌 님. 진짜 맛있네요.”

“말이 안 나온다. 불하고 별을 같이 마시는 기분이야.”

이 술을 왜 출정식 전에 장군에게 하사하는지 이유를 알겠다.

무척 상쾌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내일 출정이나 다름없다.

이기고 돌아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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