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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9화 (9/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9화

(09)

나는 전생 후 약 보름 만에 황궁 밖으로 나섰다.

붉은 달무리 궁에 배치된 마차를 잡았다.

“‘희망’ 카지노로 가자.”

내 행선지를 들은 마부가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가는 내내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경멸과 두려움이 섞인 눈빛을 보니 내 소문이 잘 퍼진 모양이었다.

나는 만족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하수도 격자 구멍이 보이는 길바닥이 포석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마차가 다니는 길과 사람이 다니는 길도 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거리를 따라 3층에서 5층 높이의 석조 건물들이 즐비했는데, 건물마다 색이 다른 벽돌을 사용해 보기 좋았다.

상가 거리의 건물들은 한쪽 벽을 통유리로 만든 곳도 있었다.

인도 가장자리에는 기름 가로등이 걸려 있었다.

저녁이면 가로등 지기들이 불씨와 막대와 기름을 들고 거리를 오가겠지.

50만 인구를 자랑하는 제국의 수도 솔레타라온은 언제 보더라도 아름다웠다.

마차에 붙은 황실 인장을 본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거나, 화들짝 놀라며 거리 옆으로 물러섰다.

마부가 나를 흘깃 바라보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자부심과 자괴감이 공존하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멀었느냐?”

“다 와 갑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부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말 투레질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니 검은 벽돌로만 지어진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 왔네.”

검은 벽돌과 붉은 등.

수도 솔레타라온의 홍등가.

음지와 양지의 경계선이었다.

“여기가 ‘희망’ 카지노입니다. 언제 다시 데리러 오면 되겠습니까?”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와 주게나.”

그때쯤 모든 게 끝나 있을 거거든.

내 말을 들은 마부가 인상을 찌푸렸다.

새벽같이 일어나라는 뜻이니 기분 좋을 리가 없을 거다.

“싫은가?”

나와 본넬 경의 대련을 떠올렸는지, 제 다리 사이를 흘깃 바라본 마부가 침을 삼켰다.

“제시간에 딱 맞춰 오겠습니다.”

두려움은 친절함보다 인간을 상냥하고 성실하게 만들었다.

“그래. 부탁하지.”

나는 패검한 검의 날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검은 건물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어서 오십시오. 희망입니다. 저희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정장을 빼입고 붉은 가면을 쓴 사내가 문 앞에서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내게 종이 가면을 내밀었다.

나는 순순히 가면을 받아 썼다.

그의 눈동자가 내 머리 색을 재빠르게 훑었다.

황족 특유의 윤기 나는 백발을 보았음에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요즘 황족들이 품위 유지비를 유흥가에 꼬박꼬박 바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공부도 못하고 검도 마법도 못 익히는 이들은 쉽게 유흥에 빠졌다.

“환전 먼저 도와드리겠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정장 차림에 붉은 종이 가면을 쓴 여자가 내 옆에 바싹 붙어 왔다.

나는 그녀를 따라 카운터로 향하며 카지노 안을 둘러보았다.

가장자리의 방에서 카드놀이를 하는 점잖은 귀족들, 넓은 홀에 비치된 테이블에서 칩을 거는 부호들, 한쪽 벽에서 다트를 던지는 청년 귀족들이 보였다.

여기저기 쟁반을 든 웨이터들이 걸어 다녔다.

바니걸 복장의 미녀 딜러가 젊은 귀족 자제들에게 카드를 돌렸다.

한쪽 단상 위에서는 작은 악단이 흥겨운 가락을 연주했다.

색색 아름다운 유리 등잔이 사방에서 찬란한 빛을 쏟아냈다.

“은화 서른 닢. 다 검은 칩으로 바꿔 주게.”

“은화 서른 닢, 검은 칩으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도박장 특성상 계산에 혼란을 주기 위해 칩과 돈의 가격을 애매하게 정했다.

검은 칩은 은화 두 개당 칩 일곱 개 가치의 상당한 고가 칩이었다.

“하고 싶은 게임이 있으시면 그 테이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싶은 게임보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네.”

정장 입은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마담 라베시아. 그녀와 같은 테이블에서 게임을 하고 싶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그녀는 간드러지게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마담 라베시아와 같은 테이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방에 있는지 물어보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전생에 있었던 사건을 회상했다.

마담 라베시아는 전대 황제가 황태자였던 시절 들였던 첩 소생의 여인이었다.

붉은 달무리 궁과 같은 별궁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다 제이릴리스 즉위 후 퇴임.

제이릴리스와의 나이 차는 모녀지간 수준으로 크고, 첩 소생이라 계승권도 없어 견제당하지 않았다.

현재는 그동안 모아둔 돈과 부동산으로 불린 돈으로 유복한 은퇴 생활을 즐기는 중.

호방한 성격에 씀씀이도 좋아 이 검은 벽의 거리 어디에서나 환영받는 손님.

그게 대외적으로 알려진 마담 라베시아다.

“그 돈이 빼돌린 돈일 줄 누가 알았겠어.”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달, 많이 잃어 돈이 궁해진 라베시아는 고리대금을 쓰고, 그걸 메우기 위해 황실 별궁 관리비에 손을 대었다.

관리해둔 인맥으로 관리비를 몰래 꺼내 쓰고, 임대료가 들어오면 여기저기 돌려막았았지.

문제는 건물에 불이 나면서부터였다.

운영을 할 수 없으니 임대료가 안 들어왔고, 돈이 없으니 꺼냈던 황궁 관리비를 못 채우게 된 것이다.

사용인들 월급으로 책정된 돈까지 다 빼돌려서 시녀들 월급도 밀렸다.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라베시아를 처형하고 홍등가를 밀어버렸다.

그 뒤로 황족 품위유지비는 더 깎이게 되고, 홍등가를 지배하던 조직은 살아남기 위해 타국에 붙어서 지금껏 모아 온 정보를 빼돌린다.

방탕한 자 하나의 일탈치고는 너무 큰 대가였다.

“여기서 품위유지비가 더 깎이게 둘 수는 없지.”

그랬다가는 정말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

고기를 썰다 검은 빵 따위를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다가와 내게 어깨를 부딪쳤다.

“누구냐?”

“그럼 너는 누구냐?”

혀 꼬부라진 대답이 돌아왔다.

놈에게는 고약한 술 냄새가 났다.

“희망 여기 물이 왜 이래? 팔다리 다 잘린 놈도 여기 드나드나 봐?”

눈이 게슴츠레하게 풀린 청년이 내 가슴팍에 머리를 툭툭 부딪혔다.

“꼴에 황족이라고 머리 백발인 거 보소.”

놈이 손을 뻗어 왔다.

취해서 정신이 나간 귀족 도련님이었다.

“그래. 꼴에 황족이지.”

하지만 나는 안 취해도 정신 나간 망나니 황족이었다.

나는 놈의 가랑이 사이를 걷어찼다.

이번에는 발끝을 틀어 허벅지 안쪽을 노리는 배려는 없었다.

“컥!”

놈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붉은 가면의 여자가 종종 달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아무 일도 아니네.”

잠시 상황을 파악한 여자가 근처 직원들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네. 아무 일도 아니네요. 따라오세요.”

놈은 더는 칩이 없었다.

나는 붉은 가면의 여자를 따라 카지노 안쪽 방으로 향했다.

촛불 일렁이는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여러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입니다.

여자가 정중하게 문을 열었다.

“못 보던 얼굴이군.”

“새로 온 분인가?”

“왠지 아는 사이일 거 같은데.”

방 안에는 가면 쓴 손님 대여섯 명과 딜러, 그리고 마담 라베시아가 있었다.

나는 마담 라베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름이 물결치며 떨어지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붉은색이 감도는 갈색 머리와 보라색 가면이 잘 어울렸다.

서른을 넘어 마흔에 가까워진 나이지만 이마와 목에는 주름살 하나 없었다.

전대 황제와 그 애첩의 여식.

세월도 그녀의 미모를 앗아가지는 못했다.

“…….”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가면 아래 드러난 입가를 굳혔다.

선명하고 윤기 흐르는 백발.

일단 이복 남매 사이임은 알아챘겠지.

“테이블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딜러가 내게 손짓했다.

나는 붉은 가면의 여자에게 내 칩을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쉬운 게임입니다.”

딜러가 카드를 들고 설명했다.

“카드 두 장을 받으실 겁니다. 한 장은 자기만 보고, 한 장은 보지 않고 앞에 세워두면 됩니다.”

“두 장의 합이 큰 사람이 이기는 거로군.”

“예. 맞습니다. 그리고 만일 두 장의 카드가 같은 카드로 나오면 페어가 됩니다. 이 경우 큰 숫자보다 페어가 우선됩니다.”

“두 사람이 모두 페어라면 더 큰 숫자의 페어가 이기는 게 맞나?”

“예. 그렇습니다.”

“쉽군.”

나는 딜러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나는 어차피 질 생각이었다.

그다음 다 잃은 내게 불법 고리대를 권하게 유도할 거다.

그럼 그 자리에서 황제를 들먹이며 협박해야지.

제국에서 불법 고리대는 중범죄, 협박으로 쓰기 충분한 무게다.

동시에 마담 라베시아가 갚고 있는 대출금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자연스럽게 말해줘야 한다.

자기들이 횡령된 돈을 먹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알아서 기겠지.

그럼 마담 라베시아가 무리하게 돈을 빼돌릴 일도 없을 거고, 그러다 들키는 일도 없을 거다.

결국 우리들의 품위 유지비는 지켜질 것이고 나도 카지노에서 입막음으로 사례비 좀 받을 수 있겠지.

내가 평민이었다면 살인멸구를 걱정해야 할 계획이다.

하지만 나는 황족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어서 시작해.

기꺼이 잃어줄게.

나는 검은 칩을 내 앞에 한가득 내려놓았다.

* * *

“4 페어! 승리는 백발의 신사분.”

“합이 24. 승리는 백발의 신사분.”

“합이 17. 승리는 백발의 신사분.”

“6 페어. 승리는 백발의 신사분.”

내 승리를 알리는 딜러의 목소리가 방 안에 끝없이 울려 퍼졌다.

모피를 두른 중년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은 내 날이 아닌가 보군.”

착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5 페어였는데.”

뚱뚱한 젊은 사내가 식은땀을 흘렸다.

“다 잃었어.”

아마도 황족일 밝은 회색 머리의 여자가 내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조작한 거 아니야?”

마담 라베시아가 침음성을 흘렸다.

“운이 좋으시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내 앞에 쌓인 색색의 칩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아닌데.

잃어야 하는데.

그래야 불법 고리대금을 권유받아 물증을 잡을 수 있는데.

이렇게 벌어 버리면 안 되는데.

“나는 여기까지인 거 같군.”

모피를 두른 남자가 중절모를 집어 들며 일어섰다.

“나도 이만 포기할게.”

달라붙는 드레스 차림의 젊은 여인이 가방을 챙겼다.

뚱뚱한 사내와 밝은 회색 머리의 황족 역시 슬슬 일어날 분위기였다.

“다들 가시려는 거 같은데, 저랑 단둘이서 다른 게임 몇 판만 더 하시겠습니까?”

마담 라베시아가 내게 말했다.

가면을 쓰고 있어 그녀의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저야 좋죠. 괜찮으시겠습니까?”

돈 벌려고 온 게 아니었다.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머.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마담 라베시아가 방 안에 종을 울렸다.

잠시 후 붉은 가면의 여직원이 걸어 들어왔다.

“검은 칩 490개만 더 가져다주세요.”

그녀가 태연하게 내뱉었다.

“그럼 이번 게임은…….”

딜러가 게임을 설명했다.

나는 한숨과 함께 칩을 걸었다.

마담 라베시아가 그 칩 490개를 다 날려 먹는 데에는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별궁 관리비에 손을 댄 것도 도박에서 많이 잃었기 때문이었지.

라베시아는 도박을 정말, 정말, 아주 끝내 주게 못 했다.

“칩 350개 더 가져다주세요.”

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그녀의 뺨을 후려칠 뻔했다.

“백발의 신사님.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이겨 본 적이 없어서 떨리네요.”

“그게 도박의 묘미죠. 공부도 검도 마법도 못 배우는 사람들은 이런 거밖에 할 게 없잖아요?”

그녀가 나를 떠보는 듯이 말했다.

가면 너머 정체를 언급하는 내용에 딜러가 눈치를 주었다.

“마담.”

“예. 맞는 말입니다. 돈만 충분하다면 말이죠.”

라베시아의 입가가 묘하게 뒤틀렸다.

“말이 길었군요. 계속하시죠.”

패가 돌고 또 돌았다.

몇 시인지 모르겠다.

무척 졸린 걸 보니 평소 자는 시간을 훌쩍 넘긴 거 같았다.

나는 내 앞에 쌓인 칩을 옆으로 치웠다.

너무 높게 쌓여 라베시아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게 다 얼마냐.

무서울 지경이었다.

“칩 490개 더 가져다주세요.”

“마담. 죄송하지만 금고에 보관해두셨던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붉은 가면의 여직원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대출해드릴까요?”

라베시아가 혀를 찼다.

“그래. 대출해줘. 다음 달에 바로 갚을게.”

나는 감기기 직전이었던 눈을 부릅떴다.

생각해보니 꼭 내가 돈을 빌릴 필요가 없었다.

“얼마 대출해드릴까요?”

“은화 삼백 닢 빌려줘.”

“알겠습니다. 7월 1일에 은화 삼백 아흔 닢으로 갚아주시면 됩니다.”

아마 복리겠지.

복리로 월 30%면 연 2,200%가 넘었다.

고리대금이라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시녀들 월급까지 밀릴 만도 했다.

전생에서 황제가 벌금이나 계약 무효화가 아니라 쓸어버린 이유가 있었다.

“실례지만.”

나는 그렇게 운을 뗐다.

붉은 가면의 여자와 마담 라베시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제국법상 연 복리 40% 이상의 대출은 불법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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