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0화
(10)
마담 라베시아가 혀를 찼다.
붉은 가면의 여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백발의 신사분께서 잘 모르시는 거 같은데, 저희 카지노는 허가 업체랍니다. 별도의 서류를 제출해 제국 재무대신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건 대부업이 아니라 도박업에 대한 허가 아닌가? 상대가 갚을 능력이 있는지는 아는가?”
딜러와 붉은 가면의 여자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신사분께서 걱정하실 부분은 아닌 거 같습니다.”
“걱정하실 부분이 아니라고?”
나는 가면에 손을 가져갔다.
붉은 가면의 여직원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지노 안에서 신원을 밝히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입 다물고 듣기나 해라. 너희가 살 방법을 알려주는 거니까.”
나는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마담 라베시아가 초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혹시? 하는 불안감이 번들거렸다.
붉은 가면의 여직원이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 카지노에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만.”
신원 운운한 거치고 태도가 빨리 바뀐다.
“마담 라베시아가 지금까지 빌려 가고 갚은 돈이 꽤 되지?”
라베시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면 너머로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돈은 마담 돈이 아니다.”
“그럼 누구 돈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황실 별궁 관리비를 빼돌린 돈이지. 너희가 지금까지 누구 돈을 받고 있던 건지 알겠나?”
황제는 밀을 수확하듯 제 손윗 형제자매들을 도륙하고 황위에 올랐다.
아직 그 독수가 민간에 본격적으로 미치지는 않았지만, 잔혹함으로 이름을 떨치기에는 충분했다.
음지와 양지 사이에서 끝없이 줄타기하는 홍등가의 카지노라면 그녀의 시선을 경계해 마땅했다.
“마담 라베시아. 사실입니까?”
붉은 가면의 여자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나 라베시아는 여유 있게 콧방귀를 뀌었다.
“자기. 저 말을 믿어? 내가 원금 이자 밀리는 거 봤어? 지금까지처럼 딱딱 갚아 줄게. 빨리 칩이나 가져와.”
“마담 라베시아의 주 수입원은 부동산이고, 그 돈은 매월 말에 꼬박꼬박 들어온다. 아직 6월 초인데 왜 벌써 너희에게 돈을 빌릴까?”
나는 한 호흡 쉬고 말을 이었다.
“지난달에 빼돌렸던 별궁 관리비를 메꿔야 해서 그렇지.”
“……!”
“나랑 같이 황궁으로 가자. 가서 자백해. 몰랐다고 싹싹 빌어. 그럼 살 수 있다.”
“…….”
“이러다 마담이 한 번이라도 관리비를 못 메우면 어떻게 될 거 같나?”
붉은 가면의 여자가 몸을 떨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라. 마담이 퇴직한 지 벌써 1년도 넘게 지났다. 옛 인맥으로 돈을 빼 오고 다시 채워 넣는 게 언제까지 안 걸릴 거 같지?”
나는 못을 박듯 내뱉었다.
“선택해라. 도박에 미친 여자랑 같이 죽을지, 아니면 너희라도 살지.”
마담 라베시아가 내 뺨을 후려치려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한 걸음 크게 물러서며 피하고 그 손목을 붙들었다.
“마담. 이러지 마.”
붉은 가면의 여자가 종을 울렸다.
가면 쓴 덩치 큰 사내들이 방에 들어와 발버둥 치는 마담을 끌고 나갔다.
“잠시 보고할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붉은 가면의 여자가 정중하게 물었다.
“그럼. 보고하고 와.”
두목에게 사실을 알려야 할 거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누구 돈을 먹고 있었는지 말이다.
전생에서는 하루아침에 조직이 반파되고, 두목은 옆 왕국으로 도망쳐 제국 홍등가에서 지금껏 모은 정보를 모두 토해낸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방에서 쉬시면서 기다려 주십시오.”
붉은 가면의 여자가 말했다.
바니걸 복장의 여자가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고맙네.”
저 여자는 똑똑하다.
현명한 선택을 할 거 같다.
먼저 가서 빌면 황제도 벌금 정도로 마무리할 거다.
아직 관리비가 많이 비지도 않았을 거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산처럼 쌓인 칩을 만지작거렸다.
사례비를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필요도 없을 거 같다.
돌아올 때까지 조금만 쉬자.
예상보다 쉽게 풀렸군.
* * *
한 시간 정도 종업원과 노닥거렸다.
방문이 왈칵 열리고 붉은 가면의 여자가 덩치 큰 사내 여럿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백발의 신사님.”
그 뒤에 마담 라베시아가 있었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온몸을 감도는 불길한 감각을 애써 무시했다.
못 도망가게 감시하고 있는 거겠지?
“백발의 신사님. 저희 희망 카지노가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내용입니다.”
붉은 가면의 여자가 씨익, 웃었다.
덩치 큰 사내들이 내게 다가왔다.
“왜 이런 선택을 했지?”
나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기분으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황제 폐하가 우리를 살려주실 거 같지 않네요.”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봐라.”
“죄송합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나는 심장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온몸을 깨우는 걸 느꼈다.
검은…… 입구에 두고 왔다.
하지만 나는 맨손 격투에도 익숙했다.
회귀 전에도 워낙 깽판을 많이 쳐 본 덕이었다.
“그럼 나라도 살아야겠구나. 너희를 다 때려눕히고 폐하께 보고하겠다.”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붉은 가면의 여자가 웃었다.
덩치 큰 사내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내가 할 말이다.”
나는 몸을 휙 숙이며 손을 피했다.
왼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동시에 말아 쥔 오른 주먹으로 사내의 턱을 후려쳤다.
퍽, 소리가 나고 사내가 그대로 쓰러졌다.
무릎이 꺾이며 쓰러지는 모습이 마치 줄 끊어진 인형 같았다.
“자, 잡아!”
덩치 큰 사내들이 단검과 강철 곤봉을 들고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근섬유 한 올 한 올을 감싼 마나가 강철 와이어처럼 내 몸의 움직임을 보조했다.
바로 앞에 선 사내가 강철 곤봉을 내리쳤다.
나는 상체를 기울여 피하고 다시 반걸음 나아가며 사내의 턱을 팔꿈치로 올려 쳤다.
일단 탈출해야겠다.
그리고 마담을 잡아서 황궁으로 돌아가자.
나중에 다시 오면 이 칩들을 환전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한 사내의 가랑이 사이를 걷어찼다.
“어억!”
가랑이 사이를 맞은 놈이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를 밀치며 방문 밖 좁은 복도로 나갔다.
“비켜라!”
앞을 막아서는 놈의 명치에 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카앙, 하는 쇳소리가 복도에 울리고 놈이 세 걸음 밀려났다.
마나를 활성화한 몸으로도 주먹이 욱신거렸다.
“주먹이 아주 매우십니다. 마나라도 다루십니까?”
놈이 입은 하얀 셔츠 단추가 떨어지자 그 안에 두른 판금 흉갑이 보였다.
흉갑이 주먹 모양으로 찌그러져 있었다.
기사들의 갑옷만큼 튼튼하지는 않았지만, 이 몸으로 때려 부술 만큼 무르지도 않았다.
곤란하군.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그런 흉기를 들이밀어? 모두 단두대에 서고 싶으냐!”
신분을 내세워 밀어붙여 보았지만, 검은 제복의 벽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 한 번 개겨 봐야지요.”
사내가 손바닥에 침을 뱉고 강철 곤봉을 붕붕 휘둘렀다.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이 시대 황족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지다 못해 땅을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황족의 정점인 황제에게 예비 반역자 취급당하는 탓이었다.
사내가 강철 곤봉을 내리치며 달려들었다.
부웅!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휘둘러진 곤봉이 벽을 부수며 파편을 튀겼다.
나는 한 걸음 나아가며 놈의 손목을 붙잡고 다리를 걸어 바닥에 엎어 쳤다.
쿵, 소리가 나고 놈이 신음을 토했다.
나는 놈의 얼굴을 힘껏 발뒤꿈치로 내리찍었다.
뼈 무너지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나를 잡으려면 평생 이딴 얼굴로 살 각오를 해라.”
내 말을 들은 검은 제복의 벽이 술렁였다.
그들은 좌우로 갈라지는 대신 강철 곤봉과 단검을 휘두르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망할.
검은 제복의 벽 뒤에서 붉은 가면의 여자와 마담 라베시아가 멀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그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원래 모르고 훔친 돈을 받았으면 사과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저들은 회귀 전에도, 이번에도 반항과 도주를 택했다.
사죄가 안 통할 거라고 판단한 이유가 있을 거다.
전생에서도 제이릴리스는 건수를 잡은 듯 홍등가를 쓸어 버렸지.
여기까지 생각하자 내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원래 홍등가를 쓸어 버릴 생각이었고, 라베시아는 좋은 명분을 만들어 준 셈인 거 같다.
그리고 저 여자는 황제의 속내를 알고 있었고.
그래. 처음부터 쓸어 버릴 생각이었다면 내가 좀 난폭하게 굴어도 한 번은 눈감아주겠지?
이렇게 된 이상, 즐거운 무력 행사 시간이다.
* * *
강철 곤봉이 발렌시아누스의 어깨를 향해 횡으로 휘둘러졌다.
발렌시아누스는 피하는 대신 오히려 휘둘러지는 곤봉에 몸을 들이밀었다.
“무슨?”
제복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퍼억, 곤봉이 발렌시아누스의 어깨를 후려쳤다.
그는 뼛속까지 울리는 고통에 몸을 떨었지만, 비명을 지르거나 주저앉지는 않았다.
곤봉에 제대로 힘이 실리기 전이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가 이를 악물며 제복 사내의 멱살을 잡았다.
금빛 눈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무기를 들이미느냐! 무릎 꿇어라! 이 더러운 평민들아.”
그가 왼손으로 사내의 멱살을 쥔 채로 땅을 박찼다.
오른손을 뻗어 사내가 든 강철 곤봉을 빼앗았다.
동시에 복도 왼쪽에 몸을 붙이며 왼쪽과 정면에서 날아들 공격을 사내의 몸으로 가렸다.
사내가 제 양손으로 망나니의 왼손을 꺾으려 했다.
발렌시아누스가 하얀 악마처럼 웃으며 강철 곤봉으로 사내의 이마를 내리쳤다.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강하지만, 기절하지 않을 만큼 약한 공격이었다.
이는 그가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완전히 축 늘어지지 않게 해 서 있는 방패로 삼기 위함이었다.
땅, 하는 맑은소리가 나고 사내의 눈이 좌우 다른 방향으로 돌았다.
동시에 복도에 가득 차 있던 제복 사내들의 공격이 발렌시아누스를 향해 떨어졌다.
발렌시아누스는 정면에서 찔러 오는 단검과 곤봉을 멱살 잡은 사내의 몸을 들이밀어 막았다.
“헉!”
“이런.”
“비겁하게!”
누가 누구에게 비겁하다는 거야, 하고 중얼거린 망나니 황족.
그는 놈들이 내지른 단검을 거두기 전에 강철 곤봉을 휘둘러 그들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두피가 찢어지고 피가 튀며 제복 인은 사내들이 쓰러졌다.
날렵한 사내가 붙잡힌 동료를 피해 발렌시아누스의 오른쪽으로 파고들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강철 곤봉을 사내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사내는 휘청이고 코피를 흘리면서도 단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발렌시아누스는 벽에 걸린 횃불을 집어 들어 사내의 얼굴을 지졌다.
40년의 기억에서 나온 과감한 행동이었다.
“아아아악! 이 미친 황자 새끼가!”
“더러운 입으로 더러운 소리만 내뱉는구나. 신의 자손이 베푼 은혜에 감사하지 못할까!”
“으, 은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 더러운 얼굴을 불로 정화해 주었다. 이 어찌 은혜가 아니겠느냐!”
그가 비틀거리는 사내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복도 끝 홀이 보이기 시작하자 발렌시아누스는 재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넓은 홀에서는 내가 불리해.’
하나.
‘이미 요란하게 날뛰기로 정했어.’
둘.
‘제복 사내들을 흩어야 해.’
셋.
답을 내린 그는 주저 없이 들고 있던 횃불로 바닥 융단에 불을 질렀다.
지상과 연결된 환풍구에서 밀려오는 신선한 공기를 탄 불이 순식간에 번졌다.
“미친놈!”
“지하에서 불을 질러?”
“고등 법원에 제소하겠다! 아무리 황족이라도 이런 짓이 용서받을 수 있을 거 같으냐?”
발렌시아누스는 술렁이는 그들을 보며 만족했다.
하얀 가면 아래 드러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제소? 감히 신의 후손을 제소할 수 있을 성싶더냐? 이 추잡한 놈들아.”
불길과 연기를 사이에 두고 그는 카지노의 어깨들과 대치했다.
홀에서 도박을 즐기던 귀족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불이야!”
“도련님! 도망치세요.”
“왜 이렇게 빨리 번지는 건가?”
“누가 나가는 길 좀 알려주게!”
검은 제복의 사내들이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젠장! 가서 나가는 길을 알려드려!”
“미친놈! 일반인들을 말려들게 하다니.”
제복 사내 중 몇몇이 탄식하며 몸을 돌렸다.
손님들을 다치게 했다가는 망나니 황족 하나가 아니라 수도의 온갖 부호들과 귀족들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방화 한 번에 적을 반으로 줄인 발렌시아누스는 여전히 앞을 막아선 자들에게 달려들었다.
홍등가에 불 피바람과 황궁에 불 찬바람을 아는 그에게 검은 제복들의 원망은 배부른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마나의 힘으로 달아오른 몸이 움직이고, 복도 밖으로 제복 입은 사내들이 하나둘 굴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