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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11화 (11/340)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11화

(11)

“내, 내가 어느 계단으로 내려왔지?”

“당신도 어서 도망가시오.”

“연기가 너무 심해!”

“도와줘!”

바닥에 깔린 융단 길을 태우며 번진 불이 나무 벽과 화려한 커튼에 옮겨붙었다.

귀한 집안의 아들딸들이 홀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쿨럭거렸다.

발렌시아누스는 손을 휘저어 자욱한 연기를 흩었다.

유유한 걸음걸이로 혼란에 빠진 사람들 사이를 해치며 붉은 가면의 여자를 쫓았다.

연기와 인영 사이에서 보라색 가면과 드레스 자락이 그 사내의 눈에 띄었다.

“마담 라베시아.”

발렌시아누스의 금색 눈동자가 커졌다.

붉은 가면의 여자와 마담 라베시아는 사람들이 몰린 출입구와 전혀 반대 길로 가고 있었다.

예비 출입구거나, 조직의 비밀 통로라고 생각한 발렌시아누스는 잠시 망설였다.

카운터에 검을 두고 온 탓이었다.

멀어지는 두 여자와 카운터를 번갈아 바라본 발렌시아누스는 칫, 하며 두 여자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는 시간이 없었다.

카지노 안을 내달린 붉은 가면의 여자는 한 벽 앞에서 멈춰 섰다.

“빨리. 불이 번지고 있네! 그 미친 황자가 불을 질렀어!”

마담 라베시아는 붉은 가면의 여자를 독촉했다.

붉은 가면의 여자는 품속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그중 하나를 벽의 작은 구멍에 꽂았다.

열쇠는 돌아가지 않았다.

“이 열쇠가 아닌가 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빨리 열게!”

그때 마담 라베시아의 귀에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안 돼. 안 돼!”

자욱한 회색 연기 사이에서 백발의 황족이 걸어 나왔다.

금실 은실로 자수를 놓은 화려한 제복 자락이 환풍구에서 쏟아진 바람에 펄럭였다.

황가의 피를 짙게 물려받아 키는 훤칠했고, 가면 너머로도 진한 금빛으로 번쩍이는 눈동자가 엿보였다.

“발렌시아누스.”

마담이라 불려 온 여자는 제 이복남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 * *

나는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물었다.

“남의 돈으로 뭔 짓을 한 거야?”

당신 때문에 루디 월급이 밀릴 뻔했다. 내 품위유지비도 반의반 토막이 날 뻔했고.

“어떻게, 어떻게.”

라베시아의 가면 아래 드러난 입술이 파르르 경련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말해도 못 믿을걸?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는 서슴없이 다가갔다.

“돌아가자. 가서 빌어. 운이 좋으면 자결을 허락받을 수 있을 거야. 정말 운이 좋으면 살 수도 있을 거고.”

“너, 너!”

나는 희대의 횡령범에게 무심하게 내뱉었다.

“그러게 왜 그랬어? 돈 많잖아.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놀았어야지.”

“이, 입 다물어. 네가 뭘 알아!”

마담 라베시아가 몸을 떨었다.

“네가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린 기분을 알아? 나는 그 계집애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황궁에서 일했어! 첩의 자식이라 동생들에게 존대해야 한데도 불평 하나 하지 않았지.”

그런데, 하며 그녀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별궁의 시녀들을 지휘했어.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고 가구를 교체했지. 황궁의 품격을 지키고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했어.”

이건 회귀 전에는 몰랐던 이야기다.

“그게 내 자부심이었어. 그 일을 하며 나는, 살았다고. 그런데 그 계집애는 나를 내쫓았어. 왜 계승권도 없는 나를 경계하는 거냐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멈추려고.

나 역시 그랬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평생 숨만 쉬고 살아야 한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 공부도 마법도 검도 배우지 못하는 우리는 이런 거나 하면서 살아야 하지.”

나는 감정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 역시 수도의 안정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라베시아가 고개를 떨궜다.

붉은 가면의 여자가 품속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 자세가 남달랐다.

“제 뒤로.”

붉은 가면의 여자가 마담 라베시아 앞을 막아섰다.

자세가 남다른 게 배울 만큼 배운 거 같았다.

맨손으로는 못 이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붉은 가면의 여자에게 말했다.

“너희는 몰랐잖아. 진짜 같이 죽으려고?”

“무지가 면죄부가 되는 세상이 아니니까요.”

나는 한발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피어올라 따르는 불꽃.”

심장이 뛰고 움직인 마나가 현상을 일으켰다.

타오르던 융단과 벽에서 불길이 너울너울 날아와 내 앞에 모여들었다.

붉은 가면의 여자가 입을 쩍 벌렸다.

“마법사?”

“단검 내려놔. 너 나 못 이겨.”

“그럼 이 불길을 모두 마법으로……?”

지하 전체에 번진 이 불길을 주문 한 번에 완성했다면, 단검 따위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마법사였다.

나는 굳이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대신 모여든 불길을 망토처럼 드리우며 말했다.

“순순히 자수해. 아니면 불로 지진 다음에 끌고 갈 거야.”

마담 라베시아가 이를 악물었다.

“마법을 익혔구나. 그럼 너도 반역자야. 나랑 같이 죽을 거라고. 그래. 나를 놔줘. 그럼 나도 네가 마법사라는 걸 비밀로…….”

“아니. 나는 달라.”

나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마담의 말을 끊었다.

라베시아가 의아함에 고개를 기웃거렸다.

나는 내 무해함과 유능함을 다른 방식으로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거든.

“무지가 면죄부가 되는 세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상 참작 사유는 되지 않을까?”

“…….”

“그분은 주제를 아는 자를 좋아하시지.”

나는 못을 박듯 내뱉었다.

라베시아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붉은 가면의 여자가 마담 라베시아를 향해 단검 끝을 돌렸다.

“저희 희망 카지노가 무엇을 증명하는 걸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나는 모았던 불길을 흩으며 답했다.

“잘 생각했어. 일단 지금까지 마담에게 돈 받은 장부를 병사들에게 제출해. 그리고.”

“그리고?”

“내가 딴 칩 빨리 환전해줘. 잘 쳐서.”

“수수료를 면제해 드리겠습니다.”

붉은 가면의 여자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마담 라베시아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발렌 대공 전하!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혹시 돌아가셨습니까? 어디 한군데 심한 화상을 입지는 않으셨습니까? 팔다리가 재가 되지는 않으셨습니까?”

마부의 목소리가 저 밖에서 들려왔다.

“아. 무사하네.”

아침이 왔나 보다.

“유감, 아니 유행, 아니, 다행입니다.”

아주 저주를 해라.

* * *

며칠 후.

황제가 호화로운 본궁 응접실로 나를 불러냈다.

어깨를 드러낸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타고 남은 재처럼 무심한 눈길을 보냈다.

“카지노에서 난동을 피웠다더구나.”

“예.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느냐?”

“제가 너무 많이 따버린 게 잘못이었던 듯합니다.”

“너무 많이 따버렸다는 게 무슨 말이냐?”

그녀가 고개를 기웃거렸다.

찬란한 백발이 그 몸짓을 따라 파도처럼 흔들렸다.

나는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카지노 따위의 추잡한 장소에 발을 들여 보신 적이 없어 모르시겠지만, 그곳에도 나름의 암묵적인 규칙이 있사옵니다.”

황제 양옆에 선 근위 기사와 시종장이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또 뭔 소리를 지껄이려고, 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계속 고하라.”

제이릴리스는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모르시겠지만’이라는 말이 그녀의 자존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칩을 많이 따면 같이 게임을 한 사람들에게 칩을 한두 개 나눠 주는 게 예의고, 상대가 올 인을 선택하면 제 칩이 더 많아도 상대의 베팅을 받아 주는 게 예의입니다.”

“올 인이라는 게 무슨 소리냐?”

“가지고 있는 모든 칩을 건다는 뜻입니다. 본래 상대와 제 칩의 숫자가 맞아야 승부를 낼 수 있으나.”

“상대가 모든 걸 걸고 오면 내 칩이 더 많아도 승부를 받아 주는 게 예의이다?”

“그렇사옵니다.”

황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그리하지 않았다는 말이군. 그렇게 큰돈을 땄고, 그래서 싸움이 났다?”

“그렇사옵니다.”

그녀가 흐음, 하며 벨벳 화려한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아느냐? 공연히 난동을 피워 민가에 손실을 초래하면 황족이라도 큰 벌을 받는다.”

나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입을 열었다.

“난동은 사실이나, ‘공연히’라는 말 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와 상대는 같은 규칙 아래서 운과 실력을 겨루었습니다.”

단어를 침착하게 골라 경박함과 진중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다.

“제가 예의를 지키지 않은 건 사실이나, 그렇다 하여 카지노 직원들까지 끌어들여 황족인 저를 공격한 건 분명 상대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취해 있는 줄 알았더니 옳은 말도 하는구나. 그래. 공명정대한 짐도 그렇게 생각한다.”

……공명정대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이번 일은 마담 라베시아의 잘못이다. 그깟 돈 몇 푼에 혈족에게 검을 겨누었으니 슬픈 일이다.”

드래곤처럼 오만한 목소리로 황제는 말을 이었다.

내 것보다 짙은 금빛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뜩였다.

“옛정을 이용하여 별궁의 예산을 사사롭게 운용했으니 그 죄 역시 무겁다.”

황제는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돈이 많이 비기 전에 알게 돼서 다행이다.

“지당하신 판단이옵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손해가 없는 상황에서 친족에게 극형을 구형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마담에게 벌금을 물리고 수도 밖 수도원으로 유폐시켰다.”

반역만 아니라면 그녀는 다른 군주들처럼 제 친족들에게 관대했다.

그녀가 알이 굵은 색색의 보석과 반지로 장식한 손가락을 들어 바라보았다.

“불법 고리대를 받아 사건을 초래한 카지노에는 벌금을 물렸다. 잡아떼면 쓸어 버리려 했거늘, 먼저 장부를 바치고 사죄하는 모습이 기껍더구나.”

벌금 액수가 어마어마했다.

나는 잠시 붉은 가면의 여자를 떠올렸다.

아마도 내게 주기로 한 돈은 못 보내 주겠지.

그래도 살아남았네.

축하한다.

“그렇게 보고를 받고, 그렇게 결정했다. 한데 작은 의문이 풀리지 않아 그대를 불렀음이야.”

금빛으로 칠한 손톱에 생긴 거스러미를 본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는 어떻게 몸 성히 나왔는가?”

두 근위 기사가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그대가 마법이나 검술에 조예가 깊다는 보고는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찌 카지노의 경비들을 상대로 난동을 피웠는가? 그들은 제압의 전문가일 텐데.”

나는 목덜미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운이 좋았나이다.”

“운?”

“본넬 경과의 대련을 준비하며 익힌 약간의 기술과, 친히 보장해주신 작위가 좋은 시너지를 냈습니다.”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같은 말도 했겠군.”

그녀가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제가 부정을 저지른 게 아니었기에 경비들도 제게 그리 강하게 나오지 못했습니다. 또 난전 중 누군가의 실수로 불이 나 모두 도망치기 바빴나이다.”

“실제로 경이 부린 난동은 많지 않다?”

“사실 그리 성히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빠졌지만, 그날은 멍투성이였습니다.”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눈살을 찌푸렸던 제이릴리스가 웃었다.

“권위로 윽박지르고 가랑이를 걷어차며 불을 질렀다고 기억하겠다.”

그녀가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런 곳을 다니다 보면 드잡이질을 할 일도 많겠군?”

“예. 그렇습니다.”

“짐의 혈족이 궁 밖에서 맞고 다녀서야 안 될 말이지. 그대 혹시 검술을 익혀 보고 싶은 마음은 없는가?”

먼저 물어봐 준다고?

나야 감사하지.

“그야…….”

잠깐, 안 된다.

“제가 검을 익혀 뭘 하겠습니까? 이 더운 여름날 땀 뻘뻘 흘리기 싫습니다. 그냥 놀고먹게 해주십시오.”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웃던 눈이 잠시 뱀의 그것처럼 가늘어졌다가 다시 웃음기를 띄었다.

큰일 날 뻔했다.

“혈통 덕에 건강과 긴 수명을 보장받았다고 방 안을 뒹굴며 놀고먹는 꼴을 보기 싫도다.”

마지막으로 떠보는 거였다.

“그대 같은 망나니는 땀을 흘리며 썩은 근성을 고쳐야지.”

“폐하!”

“6월 마지막 주부터 연무장에 나오도록 하라. 1 근위대와 함께 검술을 연마하도록.”

폐하. 감사합니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앞으로는 카지노 따위에 발을 들일 생각도 하지 마라.”

그녀의 눈이 장난기와 총기가 섞여 반짝였다.

* * *

“그래서 이제 검술을 익힐 수 있게 되신 거예요?”

“익혀야 할 판이 된 거지.”

방으로 돌아온 나는 기다리던 루디에게 황제와 나눴던 대화를 말해주었다.

이미 같은 배를 탄 사이였다.

굳이 비밀을 만들어 봐야 불신만 쌓일 뿐.

차라리 가능한 한 다 털어놓고 신뢰를 주는 게 나았다.

게다가 루디까지도 못 믿게 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어질 거 같았다.

온 세상에게는 당당히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었지만, 내 집 안에서는 위로받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었다.

“결국 운이라고 둘러댔지.”

“운이요?”

“그래. 운.”

“발렌 님은 운이 그렇게 좋으세요?”

“어쩌다 보니까.”

회귀 전의 운까지 이번 생에 받았나 보다.

“망나니로 위장해야 해서 가신 거죠?”

“그렇지.”

“그래도 도박장은 그만 가시면 안 돼요?”

루디가 미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불안으로 흔들렸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한 번은 더 가야 했다.

“많이 땄어. 허락해 주라.”

나는 웃음으로 넘기려 했다.

“그럼 저랑 가위바위보 해서 연속으로 세 번 이기면 허락해 드릴게요.”

“세 번?”

“운이 좋으시다면서요.”

“그래.”

그때 딴 게 금화로 몇 닢이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위바위보를 했다.

그리고 서른 판을 내리 졌다.

“다시는 갈 생각도 하지 마세요!”

루디가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운 되게 좋았는데.

“같이 갈래?”

“발렌 님!”

운명의 장난이었나?

이번 생의 운도 다 몰아 쓴 건가?

곤란하다.

아직 운이 많이 필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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